작성자 : 정지혜(중앙대 교육대학원 역사교육전공)
1. 머리말
중국은 비록 최근 몇 년 동안 서양에 뒤지기는 했지만 원래 중국 문명이 서양을 압도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제일 먼저 제시하는 것이 ‘4대 발명’이다. 그동안 잠자던 서양 문명을 깨워준 것은 다름 아닌 중국에서 시작된 이들 발명 때문이라는 설명으로 4대 발명은 나침반, 화약, 종이 그리고 인쇄술을 말한다.
실제로 프랜시스 베이컨은 나침반, 화약, 종이와 인쇄술을 하나로 묶어 서양 근대화를 이끈 원동력은 ‘중국의 3대 발명’이라고 인정했다.
그런데 경주 불국사의 석가탑에서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국보 126호이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은 아직 그 진정한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이는 다라니경이 지닌 진정한 의미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다라니경은 인류의 3대 발명 중 하나인 인쇄술이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시작되었음을 입증하는 유물이다.
2.『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발견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서 발견 되었다. 석가탑 보수공사를 하다 생긴 불의의 사고가 그 계기였다. 탑을 보수하기 위해 옥개석을 들어 올리다가 그만 실수로 떨어뜨려 한 쪽이 깨지고 만 것이다. 사실 어처구니없는 큰 실수였다. 그런데 이 사고로 석가탑 안에 들어 있던 다라니경이 발견되었다.
다라니경은 가로 52센티미터, 세로 6.7센티미터 가량 되는 닥나무로 만든 종이를 12장 이어 찍은 7미터 정도 되는 두루마리 형식의 인쇄물인데, 각 행마다 7~9자씩 문자를 목판으로 인쇄했다.
석가탑은 751년에 건립되었으므로 그 속에서 발견된 다라니경의 인쇄 시기는 최소 751년 이전으로 소급된다. 기존에 세계 최고(最古) 기록을 보유하고 있던 중국『금강반야바라밀경』의 간행 시기가 868년이므로 최소한 117년 이상 앞선 유물이다.
다라니경의 발견은 학자들 사이에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인쇄술의 종주국으로 간주되던 중국의 최고 유물보다 117년 이상 앞서는 인쇄 작업이 중국이 아닌 신라에서 이루어졌다는 새로운 사실을 학자들은 쉽게 인정할 수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국내 학자들 사이에서도 적지 않은 견해 차이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다라니경의 인쇄시기를 밝히려는 연구 노력을 계속하여 마침내 706년에 인쇄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706년에 인쇄된 다라니경의 발견은 인쇄술이 중국에서 발명되었다는 기존 학설의 수정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기존에 중국 당나라에서 인쇄술이 발명되었다고 추정하던 시기가 712년에서 756년 사이임을 고려하면 다라니경의 발견이 세계의 학자들, 특히 중국학자들에게 던진 충격파가 얼마나 컸을지 짐작할 수 있다.
3.『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 연대를 밝히기 위한 노력
그동안 인쇄술이 중국에서 비롯되었다고 자랑하던 중국 학자들은 그 자부심에 치명상을 입히는, 다라니경이 신라에서 인쇄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 결과 중국 학자들은 지금도 다라니경이 702년에 당나라 낙양에서 인쇄되어 신라로 전해졌다고 주장한다. 중국에서 출간되는 관련 서적들을 보면 지금도 한결 같이 다라니경은 당나라 때 중국에서 인쇄되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중국 측 주장1) 중국 측에서는 그 근거로 690~704년에 재위한 당나라 측천무후(則天武后, 재위 685~704년년)가 특별히 만들어 쓴 무주제자(武周製字)1)가『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여덟 군데 나온다는 점을 들고 있다.
중국 학자들의 억지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국내 학자들의 연구 노력은 계속되어 추가적인 성과를 얻을 수 있었다.
먼저『무구정광대다리니경』의 필체에 주목한 연구가 이루어졌다. 8세기 초 당나라는 이미 안진경, 왕희지 등을 거친 시기이므로 글자체에서 격식과 질서를 중요시했는데『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중국에서 인쇄되어 넘어온 것이라고 하기에는 아주 자유분방한 필체를 구사하고 있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글자 크기에 구속되지 않고 한 행에 7~9자를 자유롭게 배열했을 뿐 아니라 글자의 좌변과 우방도 불규칙하다.
청주대학교 김성수 교수는『무구정광대다라니경』제3장 3행 마지막 글자의 편린인 조(照)가 북위 시대에 사용한 조 자로 판명됐다고 밝혔다. 당시 황제인 측천무후의 성이 조씨임을 감안하면 당시 중국에서는 피휘(避諱)2)로 이 글자를 쓸 수 없었다.
또 김성수 교수는 경주시 구황리 삼층석탑(황복사지 삼층석탑)에서 발견된 사리외함(舍利外函)에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함께 안치했다”고 새긴 글씨(706년 제작)와 석가탑에서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권미제(券尾題, 책의 마지막 부분에 제작에 참여한 사람들을 적은 글)글씨의 필적 감정을 의뢰한 결과 같은 사람이 쓴 것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에 사용된 무주제자는 4자가 10여 차례에 걸쳐 나타나는데, 이는 경문이 인쇄된 연대를 추정하는 데 중요한 사료가 된다. 이 글자가 사용된 경전은 당나라 무후(武后)4년(704)에 번역되었고, 2년 뒤인 성덕왕 5년(706)에 신라에도 전해졌다.
따라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제작 연대는 불경이 신라에 전해진 성덕왕 5년(706)부터 늦어도 석가탑 건립 연도인 751년 이전으로 추정할 수 있다는 의미다.
(중국 측 주장 2)중국 측이 반론의 근거로 제시한 종이 문제에 대해서도 곧바로 한국 측의 반격이 시작 됐다. 김성수 교수는 고구려 담징이 일본에 종이를 전하는 등 이미 6세기 이전에 한반도에서 닥나무 종이가 생산되었다는 역사적 증거들이 있다며 당시 신라에 종이 제조 능력이 없었다는 중국 측 주장은 잘못된 것이라고 일축했다.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종이 재질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결과, 이 종이가 신라 지역에서 생산된 닥종이로 화엄사 서탑에서 발견된『백지묵서경(白紙墨書經)』과 같은 재질이며 신라 고유의 종이 가공법인 도침법(搗砧法-방망이로 두들기는 것)이 사용됐다고 밝혔다.
또 당시 신라에는 닥종이 제조 기술이 없었다는 중국 측 주장과는 달리, 삼국시대 종이류를 정밀 분석한 결과 신라가 이미 8세기 전후로 두께 0.019밀리미터에 불과한 종이를 만들 정도로 훌륭한 종이 제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는 점도 입증했다.
4. 지속되는 논쟁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발견된 후 계속되던 논쟁은 국내 학자들의 연구 노력에 힘입어 잠잠해지는 것 같더니 최근 새로운 발견을 계기로 다시 불이 붙었다.
2005년 9월, 고려 초인 1038년 무렵에 불국사 석가탑을 중수(重修)하면서 그 내력을 적은 「불국사서석탑중수형지기」(佛國寺西石塔重修形止記-이하‘중수기’)와『무구정광대다라니경』으로 추정되는 사경(寫經-붓으로 베껴 적은 불경)조각 등이 발견되면서『무구정광대다라니경』또한 고려 시대에 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됐다.
‘중수기’라는 묵서 제목 아래 고려 시대에 이루어진 중수 내용을 이두를 사용하여 기록했는데, 중수한 시기는 내용 중에 보이는 태평(太平) 18년(1038년, 고려 정종대)으로 추정된다.
그동안『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8세기 초에 인쇄되었다고 추정한 것은 석가탑이 751년 건립된 이래 단 한 번도 수리하지 않은 상태로 보존돼 있었고, 이에 더해 그 경문에서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여성 황제인 측천무후가 기존 문자를 혁파하고 새로 만들어 사용한 ‘무주제자’가 발견된다는 데 그 근거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목원대학교 곽승훈 박사는「중수기」에서 석가탑을 ‘무구정광탑(无垢淨光塔)’이라는 명칭으로 언급한 것을 보면 이 탑이『무구정경(无垢淨經)』이라는 불경의 내용을 바탕으로 조성된 데서 유래했으므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신라 시대에 만든 것이 틀림없다고 주장했다. 통일 신라 시대에는 ‘무구정경’ 사상에 따라 석탑을 조성한 반면 고려 전기에는『보협인다라니경(寶篋印陀羅尼經)』을 바탕으로 탑을 만들었다.
다시 말해, 석가탑은 751년 무렵에 건립될 당시 이미『무구정경』에 기초해 조성되었다는 것이 이번「중수기」를 통해 확인된 만큼 석가탑에서 발견된『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건립 당시에 만들어 탑 속에 봉안한 유물이 분명하다는 것이다.
경전 자체가 조탑공덕경(造塔功德經)으로써 이는 신라 사람이 애초에 석가탑을 만들 때 그 설계도가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라는 것이다.
5. 인쇄술 발명의 필요충분조건
‘동양 인쇄 문화의 발달사적 시각’에서 보더라도 당대의 신라는 인쇄술 발명에 필요한 모든 물적, 기술적 기반을 갖추고 있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인쇄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종이와 인쇄용 잉크가 필요하다. 당시 유럽에서는 양피지를 사용하는 실정이었었는데, 양피지를 가지고는 인쇄를 할 수 없다. 애초에 세계의 학자들이 중국에서 인쇄술을 발명했다고 인정한 배경에는 종이와 먹이 갖추어져 있다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당대에 신라에는 이 두 가지 물적 기반이 갖추어져 있었다. 특히 종이에 관해서는 세계적으로 중국 못지않은 선진국이었다. 원래 종이는 중국의 채륜이 105년에 나무껍질, 마창포, 어망 등 식물 섬유를 원료로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종이의 질은 우리나라가 더 우수했다.
신라의 닥종이는 다듬이질이 잘되어 섬유질이 고르고, 색깔이 희고 질겨서 ‘백추지(白錘紙)’라고 불렀는데 중국에서도 좋은 종이로 널리 알려졌다.
신라의 닥종이는 고려로 계승되어 더욱 발전했는데, 11세기 후반 이후에는 중국에까지 많은 종이를 수풀하기에 이르렀다. 중국 역대 제왕의 진적을 기록하는 데 고려의 종이만 사용했다는 기록도 있다.
고려 시대에 중국에 수출할 만큼 뛰어난 먹을 만든 것으로 보아 그 이전 신라에서도 양질의 먹을 사용했을 것은 당연하다.3)
6. 맺음말-『무구정광대다라니경』을 세계에 알리자
목판 인쇄술에 이어 계속해서 목활자, 금속활자를 세계 최초로 개발한 선조들의 업적을 살펴보면 역시 과학 기술의 진보는 선대의 지적 자산이 축적되고 그 위에 당대의 창의적 노력이 더해져 이루어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금속화자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생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인쇄술이 중국에서 비롯됐다는 학계의 통설은 아직도 요지부동이며, 이렇듯 학계의 통설이 쉽게 바뀌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우리 자신의 노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당장 우리부터 금속활자의 소중함은 알지만『무구정광대다라니경』의 진정한 가치는 잘 모르는 것이 현실이다. 인류의 문명을 획기적으로 진일보시킨 것이 인쇄술이고, 우리 인류가 언제부터 인쇄를 시작 했는지 그 기원을 알리는 유물이『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라면 이는 우리 민족의 자랑스러운 유물을 넘어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이다.
흔히 우리는 5,000년 역사를 이어온 문화 민족임을 자랑스럽게 얘기하지만, 정작 우리 역사에 대한 애정은 부족하지 않나 싶다.『무구정광대다라니경』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소중한 유물이다.
첫댓글 잘 읽었읍니다. 많은 지식 주셔서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