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주 산행일기-2> 시산제의 세레나데
오늘은 아주 특별한 날이다. 지난 몇 달 동안 갈등 속에서 헤매던 회원들이 새로이 ‘뉴욕한인산악회’라는 단체를 만들고, 그 ‘창립 총회 및 시산제’를 올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새벽 4시 조금 넘어서 잠이 깨었다. 시산제 날이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경건해지고, 새로 모임을 만들어서 올리는 첫 번째 시산제이니만큼, 나도 뭔가 정성을 바쳐야 되지 않을까? 하는 신통한 생각이 떠올랐다.
무엇을 하면 좋을까? 한참 궁리를 해보았다.
금일봉? 그건 내 스타일이 아냐.
음식? 지난번 산행 때 누군가가 준비한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그럼 무얼 하지?
케잌? 아휴! 그걸 가지고 어떻게 산에 올라가?
아, 아, 아. 있다, 있어! 헝가리안 쿠키. 세계에서 제일 맛있는 과자.
나는 이불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서 우선 냉장고에 들어있는 버터를 내놓았다. 실내온도에서 알맞게 말랑말랑해진 버터로 밀가루 반죽을 해야 하니 말이다. 그리고는 껍질을 까지 않은 알몬드(원래는 껍질 벗긴 알몬드를 쓰는데, 껍질에 영양이 많다고 해서 나는 까지 않은 것을 사용한다)를 꺼내서 블렌더에 갈고, 밀가루는 체에 쳐서 부드럽게 하여 반죽할 준비를 해놓았다.
다음은 일사천리로 도시락을 준비했다. 밥을 덥혀 보온도시락에 담고, 반찬은 오늘 음식이 풍부할 것이니 입맛을 깔끔하게 해주는 깻잎 장아찌와 무 장아찌로 담았다. 가져 갈 물도 준비해서 일단 차거워지라고 냉동실에 넣고, 둥글레차는 새로 끓여 보온병에 담았다. (둥글레차가 제일 맛있을 때가 산에서 마실 때이다. 커피보다 훨씬 맛있다.) 그리고 나니 어느덧 6시가 되었다.
밀가루에 말랑해진 버터를 넣고 알몬드와 다른 재료들도 넣어서 반죽하여 부지런히 과자를 만들었다. 반죽할 때부터 감이 좋더니 성공적으로 잘 구워졌다. 베이크는 15분 동안 하는 것이지만, 완성된 과자를 식혀서 과자 표면에 파우더 슈가로 마무리해야 하므로 시간이 필요하다.
벌써 8시 10분전이 되었다. 너무 급하니 손이 떨렸다. 마음을 가다듬고 한 놈 한 놈씩 부서질세라 조심하며 몸에 하얀 파우더 슈가를 입혔다. 과자가 아니라 수줍음에 떠는 새색시 형국이다. 둥그런 용기에 담으니 그런대로 시루떡 같기도 하고 케잌 같기도 해서 보기에 괜찮았다. 부리나케 배낭에 집어넣고 린우드 플라자까지 날아갔다. 딱 5분 늦었다. 다행이다.
오늘의 행선지는 슈네뭉크.
슈네뭉크 산은 내가 좋아하는 산 중의 하나이다. 산보다도 산으로 올라가는 입구의 그 너른 평원. 파랗게 잔디가 깔린 넓고 넓은 평원은 가장자리에 심어진 나무들과 그 뒤로 이어지는 산들로 인해 황홀하게 아름다운 풍경화를 우리에게 선사해준다. 향화는 “선배님, 한국 드라마에서 보면 ‘나 잡아봐라!!!’ 하며 청춘남녀가 나무를 끼고 뛰잖아요? 여기가 딱 그 무대예요.”하니, 그 말을 들은 진경씨가 “맞다, 맞아. 호호호, 말씀을 너무 재밌게 하시네요.” 하며 맞장구를 친다.
“나는 이 풍경이 멋진 영화의 한 장면 같아. 그래서 이곳을 걸어가면 마치 내가 영화 속에서 걸어가고 있는 주인공인 듯한 착각을 하게 돼.”
나는 심호흡을 하며 향화의 말을 이었다. 모두들 정말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일 만큼 평원은 가을엔 가을대로, 겨울엔 겨울대로, 지금 같은 봄엔 봄대로, 그윽한 정서를 영혼의 분수처럼 뿜어내고 있다.
오늘의 첫 번째 토픽은 참으로 많은 분들이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70명에 가까운 회원, 일반인들이 우리의 시산제에 참가해 주셨다. 마음이 저절로 뿌듯해졌다. 회원들은 모두 입이 귀에 걸려서 싱글벙글했고, 린우드 플라자에서 기다리는 동안 장기영 열사(우리는 정의감에 불타는 그를 열사라고 불렀는데, 열사는 세상을 떠난 사람에게 붙이는 말이라 하여 동지로 부르기로 했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스타벅스에서 커피와 빵을 넉넉하게 사가지고 와서 우리들에게 나눠 주며 아침 공복을 해결해 주었다.
두 번째 토픽은 향화가 그녀의 개 아톰, 큰아들 재원과 함께 산행에 참여한 것이다. 재원인 딱 그의 아빠 국화빵이었다. 산으로 가는 자동차 속에서 그의 어머니에게 철학적인 사차원의 세계를 이야기 하는 바람에 휴웃! 저런 아들 가진 엄마는 참으로 실력이 있어야 하겠구나, 내 아들 아닌 것을 다행으로 여겻다.
밤색의 중간 크기 몸을 가진 아톰은 스태포드셔어 불0000 종이라고 하는 이름을 기억하기조차 어려운 종류의 개인데, 영국에서는 별명이 ‘듀크 어브 에딘버러’라는 귀족가문의 개였다. 그의 할아버지며 아버지가 국제 경연대회에서 우승했다고 향화가 부언해 주었다.
처음 개를 데리고 온 향화는 회원들에게 폐가 될까봐 무지 긴장했다. 내가 여러 차례, “괜찮아, 모두들 더 좋아할 거야.”, 라며 안심시켰으나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것이 지나친 기우였다는 건 곧 증명되어서 조금 후엔 향화도 아톰의 목줄을 풀어주고 마음대로 올라가게 해주었다.
산행길에 개를 동반한 일은 처음이어서 아톰은 회원들의 집중적인 애정공세에 시달려야 했다. 그러나 임자는 원중이었다. 아톰이 앞서 가면 향화는 몸의 균형을 잃고 자칫 끌려갈 형국이었는데, 10살배기 원중이는 아톰이와 함께 달리기까지 하면서 잘도 데리고 올라갔다. 아톰이가 얼마나 즐거워 날뛰던지 그의 희열이 우리에게도 전이되었다.
오늘 토픽의 절정은 정성스러우며 경건했던 ‘시산제’ 이다.
우선 시산제의 무대가 무대다운 모습을 갖췄다. 배윤근 선배님께서 시산제를 위해 시원하고 멋진 불루와 화이트의 새 텐트를 장만해 오신 까닭이다. 날렵하게 쫘악 펴진 팽팽한 텐트는 보기만 해도 시원하고 멋있었다. 거기에 걸린 우리 산악회의 세련된 로고는 최소영 회원이 수고한 작품이었다. 그리고 어느 해보다도 단아한 제사 음식. 거기다가 향화가 붉은 도미와 굴비, 새우튀김들을 푸짐하게 마련해 와서 시산제 음식에 처음으로 생선이 올라가는 진기록까지 만들었다. 물론 나의 헝가리언 쿠키도 제사상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영광을 입었다.
시산제는 지난 30년 동안 함께 산에 올랐던 동료들 중 먼저 세상을 떠난 6명의 산우들 제사와 함께 치러졌다. 목청 좋은 이경식 부회장이 아름다운 문장의 고천문을 낭독할 때, 회원들은 정서적으로 고양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작년에 세상을 떠난 이림 회원의 부인이 멀리 워싱턴에서부터 달려와 명패 앞에서 절하며 흐느낄 땐 모두 함께 눈시울을 적시며 코를 훌쩍거렸다. 제사가 끝난 후, 새로 출발하는 우리 산악회처럼 신선하고 향기로운 김주천 회장표 포도주까지 풍성하게 돌려져 우리들을 찬란한 미래에의 꿈으로 흠뻑 빠지게 해주었다.
시산제 날의 날씨는 비가 오겠다는 예보와는 달리 나중엔 햇살까지 따뜻하게 비춰주는 좋은 날씨였다. 산에서 다들 내려온 막판에 비가 한 줄기 내렸지만, 그건 한 때 뿐이었다. 모두들 유쾌한 기분으로, 서로 사랑하는 회원들과 산행을 함께 할 수 있다는 사실을 행복해 했다. 나 역시 산에 함께 갈 수 있는 친구가 많이 생겨서 행복했다. 아니 너무너무 행복하다. 저절로 산을 향한 세레나데가 콧노래처럼 입에서 흘러나왔다.
첫댓글 산이 좋고 사람이 좋고 하늘이 좋고 내마음도 좋고... 시산제의 풍경이 다시 한번 새롭군요. 순수한 소녀처럼 열심히 써주시는 선배님의 글을 읽을수 있는 우리 회원들도 행복한 사람들, 삶의 주름 겹겹을 헤집고 신선한 윤활유로 찌꺼기를 닦아내듯 여러마음이 한마음이 되는 훈훈함을 맛보게 해준것 같아요. 따뜻하고 선한 기운으로 꽉찬 모임, 당당하고 비바람에도 r끄떡없는 산악회가 되기를 말석에서 응원합니다. 선배님, 산행일기 거르지 말아 주세요. (연재료는 코리 이용권, 맨하탄에서 영화, 커피등 제공되겠습니다.)
바쁘신 와중에도 좋은글 맛깔나게 써주셔서 잘 일고 있습니다.그 날 저도 제수로 올라온 쿠키를 한개 집어 먹고 너무 맛있어서 한 10개는 더 먹은것 같습니다. 누가 준비해오셨나 궁금했었는데 잘 먹었습니다. 힘든 부탁이지만 매번 산행기를 올려주시면 나중에 뉴욕한인 산악회를 위해서 좋은 기록이 될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2007 년 시산제 ) 카테고리 에 시산제 동영상 6편 올려놨습니다. 그날의 기억을 생생한 화면으로 ~
난 그날 아톰한테 도둑 키스 당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