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제 3장
=====3:1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받을 줄을 알고 - 야고보는 자신을 포함한 '선생
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을 경고한다(Tasker, Burdick).여기에서 '심판'의 헬
라어 '크리마'(* )는 '재판을 통하여 내려진 판결'을 의미한다(롬 13:2,D-
ibelius-Greeven, Robertson). 선생들이 받을 '더 큰 심판'은 단순히 '다른 그리스도
인들보다 선생들이 더 엄한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책임'을 수
반한 '은사'로서의 '선생'의 사역을 성실하게 수행하지 않았을 경우,그에 상응하는 심
판관의 대가가 치러져야 함을 시사한다(눅 12:48,Moo,Adamson). 야고보는 이런 경고를
통해서 선생으로서의 가르치는 사역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Moo).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 '되지 말라'(* , 메 기네스데)
는 부정어 '메'(* )와 '...이 되다'를 뜻하는 '기노마이'(* )의 현
재 중간태 명령법인 '기네스데'가 결합된 것으로 선택적인 권고의 성격이 아니라 금지
를 요구하는 명령이다(Robertson, Burdick). 이러한 어휘들은 당시 대부분의 독자들이
지위 향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는 가운데, '선생'이라는 직임의 권위와 명성에
매료되어 영성이나 도덕적, 윤리적인 책임감 없이 어떻게든 선생이 되려는 갈망이 공
동체 전반에 편만했음을 추측하게 한다(Burdick, Moo). 더욱이 바울이 교회 직임에 대
해 진술한 것을 살펴 볼 때(고전 12: 8; 엡 4:11) 당시에 이러한 현상이 있었음을 추
측하기에 충분하다(Tasker, Moo, Mayor).
=====3: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 원문에 있는 '폴라'(* ,'많은,많은 것에')
라는 단어를 개역성경에서는 삽입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그 명확한 의미를 파악 하기가
어렵다(Robertson, Martin, Moo, Dibelius-Greeven). '폴라'의 의미에 대해 혹자는 죄
의 '수량'(RSV)이나 죄의 '다양성'(NIV, 잠 10:19),또는 이 두 가지 모두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Martin). 그러나 이러한 차이는 의미상에 큰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따라서 본
문을 '우리는 모두 많은 실수를 한다'혹은 '우리는 모두 많은 것에 실수를 범한다'라
고 이해하는 것이 무난하다. 한편 '실수하다'를 뜻하는 단어 '프타이오멘'(*
)은 유대 문헌이나 신약성경에서 영적인 실패, 즉 모든 죄의 행동을 가리키
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되었다(2:10; 벧후 1:10, Moo, Burdick).한편 '프타이오멘'의
인칭 어미인 '-오멘'(* )은 1인칭 복수 주격을 나타내는 것으로,야고보가 경고
받는 '선생들'의 부류에 자신을 포함시킬 뿐만 아니라 실수하는 '우리' 가운데도 역시
자신을 포함시키고 있음을 나타낸다(Robertson, Moo, Martin).
만일 말에 실수가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 본문의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은 '실수하다'라는 의미의 '프타이에이'(* )와 '...아니다'를 의미
하는 '우'(* )가 연결되어 말의 실수를 부정하고 있는 조건문으로서 어떤사람이든
말에 실수가 없을 가능성은 거의 희박함을 암시한다(Martin). 이것은 그리스도인들 중
에서 조차 때때로 죄를 범하게되는 죄의 보편성을 시사한다(Burdick). 1절에서의 선생
들에 대한 경고가 2절에서 '말'에 대한 주의로 연결되어,본절의 '말'은 후속절의 초점
이 되는 '혀'에 대한 이야기에 배경을 제공한다. 이러한 전후 문맥으로 볼 때 본문은
'만일 말로 범죄하지 않는 자면'을 의미한다(Burdick, Martin, Moo). 한편 '온전한 사
람'은 죄가없거나 결백한 의미에서의 완전함이 아니라 잘 갖추어지고 성숙한 '온전함'
을 나타낸다(1:4, Martin).야고보는 말로 행하는 범죄는 누구든지 쉽게 범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말을 잘 통제하여 실수를 범하지 않는 사람은 성숙되고 온전한 사람임
을 강조하며 더불어 언어생활을 조심할 것을 권고한다.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 야고보는 이와 같은 본문을 통해서 상이해 보이는
듯한 1절과 3절의 내용을 자연스럽게 하나로 연결시키고있다(Dibelius-Greeven). '굴
레 씌우리라'의 헬라어 '칼리나고게사이'(* )는 '재갈을 물
리다'라는 의미로 신약성경에서 드물게 쓰이는 단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1:26절에서 '혀'와 연결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Robertson) 본문도 역시 다음
절부터 전개될 혀에 관한 진술과 관련 하여 권면을 전개하려 한 듯하다. 사실상 본문
은 1-12절까지의 내용에 있어 핵심이 되는 것으로, 선생들에게서 시작된 경고를 전체
그리스도인 공동체로 확대시키고 있다.즉 야고보의 이러한 진술은 지도자들에게 그 초
점을 맞추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Matin) 궁극적으로는 공동체에 전반적인 적용을 의
도하고 있음을 나타낸다(Moo).선생이든 일반적인 그리스도인이든간에 혀를 제어(制御)
하여 말의 실수가 없게 하는 것은 결국 온몸에 굴레를 씌워 죄짓는도구로 이용되지 못
하도륵 하는 것과 같다(Burdick, Tasker).
=====3:3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 헬라어 본문에
서 본절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에이 데'(* , '만약','if', 'When')에 대
한 견해는 두 가지 이다. (1) 혹자는 '이데'(* , '보라')라고 주장한다(C P, Ma-
yor, Ropes).(2) 혹자는 '에이 데'(* , '만약')라고 주장한다(A, B, K, L,
RV, NIV, Martin, Moo, Dibelius-Greeven).두 가지 견해 중 후자가 더 타당한 듯하다.
왜냐하면 비록 '이두'(* , '보라')가 4,5절에서 등장하여 '이데'가 조화를
이룬다 할지라도 '이데'는 본서에서 한번도 사용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본절
의 재갈 예는 말(馬)의 온 몸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말의 '입'에 물려진 재갈에 있
음을 나타낸다. 즉 재갈이 말의 '입'에 채워짐으로 말이 통제된다는 사실이 강조된다
(Moo). 야고보는 이렇게 해서 다음에 이어지는 다른 예화들과 자연스러운 조화를 이뤄
간다.
=====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
로 운전하나니 - 본절은 혀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 이전에 그 예로 배와 키의 관계를
나타낸다(Moo,Tasker). 즉 야고보는 작은 부분을 통해 커다란 몸체를 조종할 수 있음
을 암시하면서(Moo, Dibelius-Greeven) 배와 키의 관계를 제시한다. 큰 몸체가 '광풍
에 밀려갈 때' 일지라도 사공은 자그마한 키를 통해 원하는 방향으로 배를 조종할 수
있다. 야고보는 말과 재갈, 배와 키, 몸과 혀를 비교시켜서 혀가 작지만 혀를 제어하
지 않을 경우 엄청난 범죄가 발생하게 됨을 강조한다.
=====3:5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 '이와 같이'로 연결되는 것
은 앞의 두 예화가 본절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뒷받침 해준다(Burdick, Mayor). 이
것은 본절이 3,4 절의 예화를 완성하고 있음을 시사한다(Martin). 재갈과 키가 그 자
체의 왜소함에도 불구하고 말의 온몸과 배의 진로를 좌우하듯이, 우리의 혀역시 비록
크기는 작을지라도 그 역할은 매우 크다(Moo, Tasker). 헬라어 본문에는 '큰 것을 자
랑하도다'의 헬라어가 '메갈라 아우케이'(* )로 되어있으나 다
른 사본에는 '메갈라우케이'(* , '자랑하다', '뽐내다')로 되어
있어(* ,P*20, k, L,) 의미 파악에 주의를 요한다(mayor, Tasker). '메갈라우케이'
로 보게 될 경우 '자랑하는 혀'의 의미가 강조 되는 반면에 '메갈라 우케이'로 이해할
경우 '큰 것을 자랑하다'라는 의미로 '작은 혀'와 '큰 역할'이 대조된다(boasts of g-
reat things, RVS, Tasker, Robertson). '메갈라우케이'와 '메갈라 아우케이' 두 경우
중 후자의 것이 타당하다.왜냐하면 앞서 언급된 두 가지 예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작은
것'과 '큰 것'이 대조되기 때문이다. 본문은 비록 혀가 작을지라도 큰 역할을 하여 엄
청난 힘, 곧 잠재된 거대한 능력을 가지고 있음을 시사한다(Moo, Martin, Burdick).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 본문의 '어떻게 작은'과
'어떻게 많은'은 동일한 헬라어 단어 '헬리콘'(* )으로 한 단어가 두상반
된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야고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 일종의 균형과 대칭의 효과를
내고 있다(Moo, Martin). 한편 '나무'에 해당하는 헬라어 '휠렌'(* )은 메마른
지중해 기후로 인한 불꽃에 의해서 쉽사리 재가 되어 버릴수 있는 팔레스틴 언덕의 산
림으로 보는 것이 타당한 듯하다(RSV, Moo, Martin). 야고보는 본절에서 산림이 작은
불씨에 의해 파괴되어 버림을 예로 들어 혀의 잠재적인 파괴력에 대해 경종을 울리고
있다(Burdick).
=====3: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 본절에서는 5절에서 보여준 혀의 파괴적 성향이
곧 바로 언급된다. '혀는 곧 불이요'는 '혀 또한 불이다'(Adamson) 혹은 '이와같이 혀
는 불이다'(Martin)라고 것이 자연스럽다. 한편 '세계'의 헬라어 '코스모스'(*
)에 대한 해석은 세 가지이다. (1)꾸밈(벧전 3:3), (2)악의 총체(Vulgate), (3)
사악한 세상 조직의 타락하고 반역적인 형세(Tasker, Martin, Moo, Robertson). 이 세
가지 중 세번째 해석이 문맥상 가장 타당한 듯하다(1:27;4:4, Moo).혀는 불과 같이 모
든 것을 태워 버릴 뿐만 아니라 온 세상의 모든 악들과 연관되어 사람들로 하여금 범
죄케 한다(Burdick).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 '바퀴'를 의미하는단어 '트로콘'(* )은 '트레콘'
(* , '달리다', '뛰다')에서 파생된 것으로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의 문서에서
사용된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야고보가 오르페우스 신비 종교의 영향을 받았음을 시
사하기보다는 당시에 널리 대중화 되어있었던 종교적 또는 철학적 표현을 효과적으로
사용했음을 암시한다(Robertson, Moo, Martin, Dibelius-Greeven, Mayor). 이것은 인
생의 전영역 가운데 성쇠(盛衰)를 가리키는 듯하다(Moo,Burdick). 이렇게 혀는 온 몸
을 더럽힐 뿐만 아니라 불과 같아서 인생을 파괴시킬 수 있다. 한편 혀와 동일시되며
인생 전체를 파괴시킬 수도 있는 불의 근원은 '지옥불'이다. '지옥'을 뜻하는 헬라어
'게엔네스'(* )는 힌놈의 골짜기를 지칭하는 히브리어 '게힌놈'(*
)에서 유래한 표현이다(Burdick, Martin, Moo ). '게힌놈'은 예루살렘 정남
방의 쓰레기 소각장으로, 계속 타고 있는 쓰레기 불로 말미암아 마지막날의 심판의 장
소로 자주 비유되어 왔다.야고보는 이러한 표현을 통해서 만약 각자가 자신의 혀의 힘
을 제어하는 데에 실패한다면, 급기야 완전한 파멸에 이르는 것을 피할 수 없음을 경
고하고 있다. 파멸할 수 밖에 없는 것은 혀의 오용과 남용이 사단으로부터 비롯되기
때문이다(Martin, Moo, Tasker, Mayor).
=====3:7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 본
절은 다음절의 내용을 유도하기 위한 대조적인 예이다. '길들므로'의 헬라어 '다마제
타이'(* )는 현재 시상이며 '길들었거니와'에 해당하는 헬라어 '데
다마스타이'(* )는 완료 시상이다. 야고보는 현재시상과 완료
시상을 중복하여 사용함으로 인간이 여러세대에 걸쳐 짐승과 새,벌레와 해물(창9:2-7;
행 10:12; 11:6)등의 동물들을 지배하고 정복한 상태의 연속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Robertson, Tasker, Burdick, Mayor, Adamson, Moo).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연을 다스
리고 정복할 권한을 주셨으며(창 1:28;시 8:6-8) 실제로 인간들은 동물들을 다스려 길
들였고,동물들은 인간에게 지배되고 복종하였다.한편 '짐승'을 나타내는 '데리온'(*
)은 원래 신약성경에서 길들지 않은 동물들 즉 야생 동물에만 사용되어 왔
다. 야생 동물이 길들여지는 것은 사 11:6-9처럼 메시야 시대의 상징으로 쓰여진다(A-
damson).
=====3: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가득한 것이라 - 앞절에서 언급한 바대로 인
간은 모든 짐승을 다스리고 길들였다. 반면에 인간은 자신의 지체 중 하나에 불과 한
혀를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 야고보는 앞절에서 인간이 다스린 동물과 본절에서 인간
이 다스릴 수 없는 혀를 대조시켜서 혀의 악함과 파괴력을 강조하고있다. 하지만 비록
인간 자신의 능력으로는 혀를 제어할 수 없다 할지라도 그리스도인의 혀는 성령에 의
해서 지배되며, 하나님의 긍휼과 도우심과 은혜로 말미암아 제어될 수 있다(Burdick,
Moo, Mayor, Martin). 야고보는 본절에서 제어되지 않은 혀의 두 가지 속성을 제시한
다.
쉬지아니하는 악 - '쉬지 아니하는'의 헬라어 '아카타스타톤'(*
)은 1:8의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에서 '정함이 없는'이라는 의
미로 사용된다.이것은 '아카타스타톤'이 수식하는 악이 불안정함과 한 마음을 품지 않
는 데서 기원함을 시사한다(Moo). 이러한 악은 마치 복종될 수 없는 흉악한 짐승과도
같은 것으로 결코 제어될 수 없음을 암시한다(Burdick,Tasker).
죽이는 독 - '죽이는'을 뜻하는 헬라어 '다나테포루'(* )
는 '다나토스'(* , '죽음')와 '페로'(* , '가져오다')의 합성어
로 '죽음을 가져오는'이라는 의미를 내포한다(Robertson).'죽이는 독이 가득 하다'는
구약성경의 교훈들을 반영하는 것으로(시 140:3; 잠 10:8; 11: 9, Moo) 독사에게 물린
즉시 온 몸에 독이 퍼지고 급기야는 죽음을 초래하는 것처럼(Burdick,Robertson, Moo)
혀는 이웃을 파괴시킬 뿐만 아니라 범죄케 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다.
=====3:9
야고보는 혀의 양면성 즉 '찬송'과 '저주'를 대비시켜서 그 불합리성을 제시한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 '주 아버지'라고 해석되는 헬라어 '톤
퀴리온 카이 파테라'(* )는 '주와 아버지'가
아니라 '주이신 아버지'라는 의미로 '주'와 '아버지' 모두가 하나님께 적용되고 있다
(Robertson). '주 아버지'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고백으로(RV, Tasker) 혀의 가장 고귀
한 기능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임을 시사한다(Martin, Moo).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 '저주'는 구약성경
에서 자주 나타나는 주제이다(창 9:25; 49:7; 잠 11:26; 24:24; 26:2). 이러한 저주는
고대 세계에서 큰 힘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며, 상대방으로 하여금 하나님으로
부터 분리되어지고 영원한 심판을 겪게 되기를 기원하는 것이다.그러나 구약성경에 비
해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저주하는 것을 금했다(롬 12:14).예수님도 제자들에게 저주를
금하고 오히려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라 하셨다(눅 6:28, Moo, Martin). 한편 '형상'
을 의미하는 '호모이오신'(* )은 '닮게 만들다'는 뜻을 가진 '호모이
오오'(* )로부터 온 것으로 '하나님의 외관대로 지으심을 받은 것'을 의
미한다(made after the likeness of God, RV). 또한 '지음을 받은'을 의미하는 헬라어
'게고노타스'(* )는 완료시제이다. 이 두 가지 즉 '호모이오신'과
'게고노타스'는 인간이 범죄로 타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자신의 거룩함을 보여
주는 흔적을 여전히 가지고 있음을 암시한다(Tasker, Burdick). 이에 야고보는 사람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면서 또 사람을 저주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높이고 저주하는
것과 마찬 가지임을 강조하여 그 불합리성을 나타낸다(Burdick). 그 이유는 사람이 하
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3:10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 하리라 - 야
고보는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이중성을 드러내며 경고한다(Mayor). '마땅치
아니하니라'의 헬라어 '우 크레'(* )는 선악간의 차이를 분별하는 기준
이라기보다는 이중적인 면 즉 찬송과 저주의 공존으로 인해 생겨나는 불안 정함을 시
사한다(Tasker). 이와같이 입에서 나오는 말의 이중성으로 인해서 생기는 모든 양태는
죄악이며 사람들이 가장 범하기 쉬운 범죄이다. 이러한 말의 폐해(弊害)에 대해 예수
께서도 엄중히 경고하셨기에(마 15:11,18,19)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지배와 인도하심
을 따라 우리의 입을 일관성 있게 하나님만을 찬양하고 사람에게 사랑과 친절을 베푸
는 것에 효과적으로 사용하여야 한다(Burdick).
=====3:11
본절의 샘의 비유는 매우 인상적이고 효과적이다. 왜냐하면 건조한 팔레스틴 기후
에서 샘의 중요성이란 이루 말할 수 없으며 많은 마을과 촌락들이 이 샘과 시내를 의
존하여 형성되었다(Moo, Martin).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 본문 처음에 등장하는 '메티'
(* , '어찌...하지 않겠느뇨')는 야고보가 즐겨쓰는 문학적인 표현으로, 부정
적인 대답을 예상하면서 묻는 수사학적인 질문이다(Moo, Martin,Robertson). 야고보는
이 수사학적 질문을 통해서 한 샘이 두 가지 맛을 낼 수 없음을 예로들어 한 입에서
경배와 저주가 나오는 것이 부당함을 예증한다. 한편 '구멍'을 나타내는 헬라어 '오페
스'(* )는 땅의 갈라진 틈 또는 바위 표면에 갈라진 한틈을 의미한다(Roberts-
on, Tasker, Adamson). 이러한 틈새에서 솟아나는 두 종류의 물 즉 '단 물'과 '쓴 물'
은 '신선한 물'(fresh water)과 '짠 물'(salt water)을 가리킨다(NIV, RSV). 한 샘에
서 신선한 물을 내놓다가 다시 짠 물을 내놓는 일은 있을수 없으며(Moo, Martin, Ada-
mson),만약에 신선한 물에 쓰거나 짠 물이 첨가된다면 그 물은 이미 신선함을 잃어 효
력을 발휘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물을 마시는 자에게 피해를 준다. 이와 마찬
가지로 한 입에서 찬양과 저주가 나오는 것은 부당할 뿐만 아니라 혀가 사악하게 활용
되었을 때 그 말은 바로 이 쓴 물과 같아져서(Moo) 비극을 초래하며 전체를 그릇되게
한다(Martin).
=====3:12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 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
본문 역시 부정어 '메'(* , '아니')로 시작되어 부정적인 대답을 요구하는 수사학
적인 질문이다(Martin). 본문에서 열거되는 무화과나무, 감람열매, 포도나무, 무화과
등의 식물을 사용하는 비유는 고대 문학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었다(Martin). 신약성
경에도 복음서를 중심으로 여러 번 사용되고 있다(마 7:16-20; 12:32,33; 눅 6:43-45,
Martin, Adamson). 이 비유가 신약성경에서 사용될 때의 의미는 '선한 마음에서 선한
것이 나오고 악한 마음에서는 악한 것이 나옴이 마땅하다'는 것이다(Moo, Martin). 따
라서 야고보는 본 비유를 통하여 모든 나무가 자신의 특성에 맞게 열매를 맺음을 강조
하고 있다.
이와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 야고보는 본문에서 11절의 질문으로
돌아가 11,12절의 수사학적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앞서 언급한 이중성의 부당함 즉
한 샘에서 두 종류의 물이 나올 수 없고 한 나무가 다른 종류의 열매를 맺을 수 없음
을 드러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결국 짠 물은 짠 물일 뿐이라는 일관된 부정적 견해
즉, 혀의 악함을 드러내어 강조하고 있다(Tasker, Moo, Martin). 짠 물이 단 물을 내
지 못하는 이유는 그 근원에 있어 나무와 열매의 비유처럼,짠 물이 단 물의 근원일 수
없기 때문이다(Burdick). 그러므로 선한 사람의 입에서 선한 말이 나오고 악한 사람의
입에서는 악한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3:13
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 본절은 '티스'(* , '누구')로 시작하면서 새로
운 문단을 소개한다(13-18절, Adamson). '지혜'애 해당하는 헬라어 '소포스'(*
)는 유대인들이 교사, 서기관, 랍비를 가리킬 때 사용한 전문용어였으며 '총명'의
헬라어 '에피스테몬'(* )도 특별한 지식이나 훈련을 받은 전문인을
가리킨다(Moo, Tasker, Burdick, Robertson). 이러한 '지혜와 총명'은 1절에서 언급한
'선생이 되려하는 자들'을 암시한다. 한편 '지혜의 온유함'에 해당하는 헬라어 '엔 프
라위테티 소피아스'(* )는 문자적으로 '지혜로부
터 나오는 온유함으로'라는 의미이다. 여기서 '지혜'는 헬라적 지혜 개념이 아니라 하
나님이 요구하시는 거룩한 삶을 살아가도록하는 실제적인 히브리적 개념의 지혜 곧 하
나님을 아는 것을 의미한다(Adamson). 또한 '온유함'은 약함이나 체념에서 비롯된 것
이 아닌 포괄적인 포용성으로 성령의 인도함 가운데 성취될 수 있는 부드러움을 가리
킨다(갈 5:22,23, Burdick). 야고보는 본절에서 선행과 온유의 근원을 믿음과 동일하
게 취급되는 지혜로 보면서(Tasker, Burdick) 선생이 되려는 자들에게 선생을 영예와
지위를 얻기 위한 방편으로 삼지말고 참된 선생으로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에서 비롯된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선행을 행해야 함을 권면한다.
=====3:14
그러나 너희 미음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 '젤론'(* , '시기')은 신약성경에서 긍정적으로도(요2:17),
부정적으로도 사용된다(행 5:17, Robertson, Moo). 본절에 사용된 '젤론'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어 이기적인 열정을 의미한다(Mayor). 또한 '다툼'에 해당하는 헬라어
'에리데이안'(* )은 '이기적인 야망'의 의미로 자기나 자기편의 특권
과 이익만을 추구하는 태도를 가리킨다(Moo, Burdick).이것으로 인해서 '당파심',
'불화'가 일어나기에 바울은 '당파심'이나 '불화'의 의미로 사용하기도 하였다(고전
3:3; 고후 12:20; 갈 5:20, Martin, Moo, Dibelius-Greeven, Robertson). 당시 본서의
수신자들중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심과 열정 그리고 야망에 빠져서 자신의 이익을 위
해 편을 만들고 당(黨)을 지어 홀란스럽게 만들며 교만해져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
는 자들이 있었다(Burdick). 그래서 야고보는 이런 자들을 향해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
에 빠지지 말고 진리를 거스려 교만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3:15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 본절은 앞절에서 언급한 내용인 이
기적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힌 '지혜'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
온 것'이 아니다(Burdick). 즉 그것은 참된 지혜의 근본이신(잠 2:6)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지혜가 아니다(Martin, Moo).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은 지혜는 세가지 특성을 지
닌다.
세상적이요 - 이것은 하늘과 비교하여 부정적인 의미의 땅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Moo, Martin, 고전 15:40; 고후 5:1) 지혜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인정하기보다는 세상
의 제한된 사고와 견해로 평가하는 지혜를 나타낸다. 이러한 지혜는 세상의 인침을 받
은 일련의 모든 활동과 동일한 의미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결과를 초래한다(고전 1:20;
2:5,6, Adamson, Martin).
정욕적이요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쉬키케'(* )는 '영적'인 것과
비교되는 '육신적'인 것을 의미한다(Moo,Martin, Adamson, 고전 2:14; 15:44,46).이것
은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되어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한 자들 즉 중생하지 못한 자
들의 특성 이다(Burdick).
마귀적이니 - 이것은 참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기인하지만(잠 2:6) 이기적인 욕
망과 야망에 사로잡혀 중생하지 못한자들이 소유하는 지혜는 마귀에 의해서 그 행동과
생각을 지배받고 선동됨을 나타낸다(Martin, Moo, Adamson).
=====3:16
개역성경에는 '가르'(* , '왜냐하면')가 생략되어 있다. 이것은 본절이 이기
적인 욕망과 야망에 사로잡힌 거짓된 지혜의 특성을 정의한 것(15절)에 대한 근거임을
시사한다.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 '요란'을 뜻하는
헬라어 '아카타스타시아'(* )는 '무질서함'(고전 14:33)을 나
타내며 일반적으로 무정부 상태와 정치적인 소동을 연상케 하는 단어다(Robertson,Bu-
rdick). 또한 '악한'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울론'(* )은 요 5:39의 '아가
다'(* , '선함')와 반대 개념으로 하나님과는 전혀가까워질 수 없는 악한
행위를 나타낸다. '시기'와 '다툼' 즉 이기적인 욕망과 열정 그리고 야망은 아무런 유
익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영적인 생명과 사업을 파괴시키는 무질서와 악한 행위만 생
산할 뿐이다(Burdick). 그러기에 그러한 것을 유발시키는 거짓된 지혜는 세상적이고
정욕적이며 마귀적인 것이다(15절).
=====3:17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 본절은 앞서 언급된 거짓 지혜와 대조되는 참된 지혜
즉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특성에 대한 진술이다. 하나님에게서 비롯된 지혜는
이론적이고 사변적인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실천적인 것이다.
성결하고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하그네'(* )는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지혜의 기본적 특성으로 성적인 순결의 의미보다는 모든 악한 태도나 동기가 없음을
의미하며 '거짓된 지혜'의 이기적인 동기와 대조를 이룬다(Robertson,Burdick).
화평하고(* , 에이레니케) - 이는 '평화를 사랑함'이나 '평화를
가져옴'을 의미한다(히 12:11). 이것 역시 독한 시기와 대조를 이루는 것으로 위로 난
지혜는 모든 이에게 화평을 가져다준다(Tasker).
관용하고 - 이로 번역된 헬라어 '에피에이케스'(* )는 주로 왕
으로서의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사용된 단어로 죄인에 대해 단호하게 징벌하실
수 있음에도 블구하고 용서하시고 인내하시는 온유와 자비를 나타낸다.
양순하며 - 이의 헬라어 '유페이데스'(* )는 '유'(* , '잘',
'좋게')와 '페이도마이(* , '순종하다')의 합성어로 '잘 순종 하는'
이나 '유순한'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만하여 진리를 대적하는 것과(14절) 대조되는 것
으로 위로 난 지혜는 하나님께 잘 순응하는 성품을 소유케 한다.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 '긍휼'과 '선한 열매'는 상관 관계를 갖는다. '긍
휼'은 가난하고 곤경에 처한 자들을 실제로 도와 주는 마음 자새로 긍휼을 베풀지 아
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며 하나님의 정죄 아래에 있는 자이다(2:13). 이러
한 긍휼을 드러낼 때 그 결과로 선한 열매를 맺게된다(마 7:17,18, Martin, Burdick).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 거짓된 지혜의 당을 만들고 구별하며 자기편의 이익을 추
구하는 것과는 달리 위로 난 지혜는 구별이나 위선이 없는 공평함과 신실함이 가득하
다.
=====3:18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 본문은 '위로 난 지
혜'에 대한 결론이다. '의의 열매'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르포스 디카이오쉬네스'(*
)는 '의로 이루어진 열매'를 뜻한다(Laws, Ropes).
'의'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모든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Moo) '화평'과 긴밀한 상관
관계를 지닌다(시 85:10;사 32:17, Tasker).이러한 의는 이기적인 욕망과 야망에서 비
롯된 무질서와 악한 행위에서는 생겨날 수 없으며 오직 화평 가운데서 맺어질 수 있는
열매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속성인 화평을 소유
하고 닮은 자녀이기에 화평을 이루어 '의'를 이루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마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