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무의 어조 -오형엽

[마카]

허무의 어조

                   오형엽


1. 허무의 차원

인류의 문명화 과정은 신화적, 종교적, 형이상학적 세계관을 탈피하여 과학적 세계관으로 전환되는 과정과 동궤에 있다. 과학적 세계관은 인간의 이성적 능력을 최상의 척도로 삼아 자연과 역사와 우주를 지배할 수 있다는 믿음을 근간으로 한다. 이 믿음을 통해 근대 이후의 세계는 과학문명의 동력을 가동시켜왔으며, 현대사회는 그 동력의 가속화 과정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크게 보아 이 문명화의 과정은 도시화와 더불어 세속화의 흐름으로 전개되고 있다. 우리의 현실을 놓고 볼 때, 196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 도시화와 세속화의 흐름은 가히 충격적이고 폭력적일 정도로 급격하게 진행되어 왔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한국의 시인들은 죽음과 부패의 도시적 현실을 대면하였고, 그것을 환멸과 허무의식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시인들은 이 환멸과 허무를 소멸과 폐허의 시적 형식으로 형상화한다. 그런데 시인들이 겪는 허무는 반드시 도시화와 세속화라는 문명사적 차원에만 기인하는 것이 아니며, 개인사적, 존재론적 차원으로부터 종교적, 정치적 차원에 이르기까지 다층적으로 연루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들이 겪는 허무의 차원이 다양하며, 그것을 표현하는 시적 어조도 다양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는 작품들에서도 상이한 허무의 차원과 그것을 표현하는 상이한 시적 목소리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2. 최승호- 문명비판적 허무와 풍자


최승호는 첫 시집 『대설주의보』(1983)를 낸 이후 열한 번째 시집 『아무 것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나』(2003)에 이르기까지 줄곧 비평가와 독자들의 관심의 초점이 되어왔다. 그가 보여준 현대 자본주의사회에 대한 관찰과 인식은 최승호류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독자적인 시세계를 형성하였고, 이후 후배시인들에게 하나의 전범으로 작용하였다. 그의 초기 시는 변기, 쓰레기통, 창녀촌으로 대변되는 세속도시의 공간 속에서 시궁쥐, 바퀴벌레, 파리, 하루살이 등의 비루한 동물들과, 똥, 송장, 창녀 등의 결핍된 존재들이 등장하여 그로테스크한 죽음의 풍경들을 보여준다. 그리고 다섯 번째 시집인 『회저의 밤』(1993) 이후로 이러한 부패와 죽음의 풍경 속에 긍정의 언어와 이미지들이 개입되기 시작한다. 이는 도정일이 정확히 지적하듯이, ‘구멍’의 이미지가 ‘허/무’의 구멍과 ‘욕망’의 구멍이라는 이중적 의미망을 가지는 것과 관련되어 있다. 타락한 인간의 욕망을 허무의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대면하는 최승호의 시는, 이 지점에서 문명비판적 허무의 차원이 존재론적, 형이상학적인 허무의 차원과 중첩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최근에 발표된 다음의 시를 읽어보자.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 아무래도 나는 순하고 착한 노인은 못될 것 같다. 그렇다고 일부러 독 짖는 늙은이가 되겠다는 말은 아니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 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들도 경험한다. 그들도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 게들은, 왕게든 털게든 대게든, 늠름하게 최후를 맞이하겠다는 자세로 수족관 유리 밖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 그러나 밖으로 끌려나온 뒤에 게는 일종의 괴상한 광물덩어리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 이게 그 게 찌꺼기인지, 저게 그 게의 잔해인지,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 해도.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할까.

- 최승호, 「게」(『창작과비평』, 2005년 여름호)

시인은 “빠져나갈 수 없는 그물에 걸려든 것 같은 일상적 삶”에 환멸을 느낀다. 이것은 천민자본주의의 촘촘한 네트워크와 완강한 메카니즘에 포획된 세속도시의 현실을 의미할 것이다. 시인은 이러한 삶을 “게요리전문점 수족관의 게”에게서도 발견한다. 게는 “몸을 팔려고 대도시로” 온 점이나,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현대 도시인의 양상과 흡사하다. “지금은 바퀴들이 지나간다. 구름은 흘러오고 사람들은 흘러가고. 사람 외에는 보이는 영장류가 없다.”가 보여주는 것은 도시문명의 현실과 무의미한 시간의 흐름과 가공할 만한 인간의 욕망이다. ‘게’가 보여주는 알레고리적 상징은 초기 시에서부터 시도된 최승호 시의 기법인데, 초기 시와 변별되는 특징은 어조의 차원과 허무의 차원에 있는 듯하다.

첫째, ‘어조’에 대해 살펴보자.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첫 문장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로 써야겠다”이다. 시인이 시의 문체를 직접 언급하고 있는 이 문장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의미심장하다. 일단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문체”는 빈정대듯 비꼬는 문체, 즉 반어적이고 냉소적인 어조를 의미한다. 이 어조는 시 전체에 풍자적 의미망을 형성한다. 그런데 “어기적거리는, 엉성한, 눈을 흘기는” 것은 ‘게’가 보여주는 태도이다. 세속도시의 인간을 ‘게’의 형상으로 상징하는 시인은, 이를 완결된 알레고리의 기법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아니라, ‘게’의 태도를 내면화하여 그것을 어조의 차원으로 전환시킨다. 이것은 시인이 “나”라는 1인칭 화자에게 반어적이고 냉소적인 어조를 부여하고, 이 목소리를 상징, 혹은 알레고리적 차원에 개입함으로써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망을 확보하는 효과를 낳는다. “누가 내 몸을 사서 분해하거나 해체해도 그 왕성한 식욕을 원망하지 않겠소!”에서 보듯, 알레고리의 대상인 ‘게’의 반어적 태도와 어조를 취하여 다시 세계를 바라보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은 느리게 늙어가고 인생은 빨리 썩어간다. 아마 죽은 뒤에는 우울했던 해골도 이빨이 빠진 채 웃으리라.”는 자본주의 문명의 영속적인 영향력 아래 구속되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멸과 허무의식을 냉소적인 어조로 표출하는데, “이런 말도 아직은 혀 한 조각이 뭉쳐져 있어 하는 것이다.”는 여기에 다시 자기 진술의 태도를 첨가함으로써 다층적인 목소리를 형성한다. 초기 시의 냉정한 관찰과 묘사, 간결한 진술 및 즉물적 이미지와 비교하면, 이러한 어조의 실험은 최승호의 최근 시가 보여주는 형이상학적 깊이와 원숙미가 기법 및 어조의 차원과 무관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처럼 어조의 차원은 허무의 차원과도 결부되어 있다.

둘째, ‘허무’에 대해 살펴보자. 앞서 말한 대로, 어조의 실험이 허무의 차원과 관련되는 것은, 인용 시의 후반부에 제시되는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고 도대체 뭐가 뭔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대목은 화자의 시선이 아니라 몸이 해체된 ‘게’의 시선으로 말해지고 있다. 보이지 않는 게의 시선을 자신의 눈에 달고 현실을 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하겠다. 최근 시집의 해설에서 성민엽이 예리하게 밝히고 있듯, 최승호 시에는 다양한 시선의 패턴이 작용한다. 이 시선을 주체적 시선, 탈이 난 주체적 시선, 자기 응시의 시선, 주체와 타자의 분별이 사라진 시선 등 네 가지 패턴으로 분류할 수 있다면, 인용 시의 시선은 네 번째 경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아무것도 볼 수가 없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는 자도 없”다는 표현은 이 무분별의 시선이 ‘허무’의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이 허무의 차원은 “과거에 참으로 게였는지, 텅빈 껍데기가 현재인지, 미래는 이제 없는 건지”에서 무시간성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모든 게 가짜인지 헛것인지 뒤죽박죽 너절하게”에서 진짜/가짜의 이분법이 무화된 ‘허/무’의 차원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쓰레기통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허무의 구멍이 부패와 죽음의 공간으로 귀착되는 것이지만, 이 문장 뒤에 붙는 “-해도”와 “그래도 靈을 믿었던 게는 다리가 없어도 어기적거리고, 눈이 없어도 가야 할 길을 보며, 마침내 바다로 돌아간다”라는 문장을 통해 이 죽음의 공간이 가야할 길을 거쳐 궁극적 공간으로 돌아가는 화엄의 길이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그러나 한편 이 문장에 다시 “- 고 말해야 할까.”라는 빈정대는 어조를 덧붙임으로써, 시인은 “텅빈 껍데기”가 지닌 허무의 공간에 반어적 풍자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3. 남진우- 묵시록적 허무와 숭고

남진우는 첫 시집 『깊은 곳에 그물을 드리우라』(1990)에서 신화적 상징을 통해 낭만주의적 순결과 신성성을 보여준다. 두 번째 시집 『죽은 자를 위한 기도』(1996) 이후 그의 시를 물들이고 있는 검은 심연의 그림자는 이 신화적 신성성이 현실에 부딪혀 좌절된 형국을 연상시킨다. 밤을 물들이는 ‘죽음’과, 죽은 자들이 부르는 ‘피’의 모티프는 두 번째 시집 이후의 지배적 모티프가 된다. ‘피’로 점철된 ‘죽음’의 세계에 대해 시인은 매혹과 거부감을 동시에 가지는데, 시인은 안/밖, 자기동일성/타자성 등의 이분법을 넘어서기 위해 ‘금 간 유리’와 ‘항아리’와 ‘앵무새’의 상징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피’와 ‘죽음’의 상상력에 ‘책’과 ‘불’의 상상력을 결부시킴으로써, 이분법을 넘어서는 동시에 더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상징체계를 형성한다. 최근에 발표된 다음 시는 지금까지 남진우가 보여준 허무의식의 극단을 강렬한 파토스적 목소리로 들려준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낯선 바람

서녘에서 불어오고

집 없는 나 텅빈 네거리에 서서

너를 찾는다


바다가 밀려와 땅을 뒤덮어도

붉은 꽃들 사방에서 피어나 손짓하니

징역의 시절들

어지러운 꿈자리에 시달리던 밤은 끝났다


어디에 있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

날 선 돌멩이 들어 나를 찍던 사람은

어질머리 흔들어도 푸르름 변치 않고

손가락 끝을 아무리 깨물어도

새는 울지 않고

나 아프고 괴로우니

탁발승처럼 맨발로 먼 길 걷고 걸어

너 사는 집 앞에 벌 받는 자세로 서 있어도

그 누구 하나 아는 체하지 않는다


눈먼 바람은 여전히 서녘에서 불어오고

붉은 꽃들 사정없이 피어나 나를 쫓아와도

나 외롭고 슬프니


내가 지상에 토하고 가는 한 모금의 피

내가 하늘 아래 남기고 가는 한 줌의 살

먹고 마시라

이 시절 다 가기 전에

긴 가뭄 큰물이 번갈아 찾아오리니

너 찾아가는 길

세상은 어느덧 저물어간다

- 남진우, 「지상의 양식」(『세계의문학』, 2005년 여름호)

1연은 시의 현재적 양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적 화자인 “나”와, 그가 찾는 대상인 “너”와, 공간적 배경인 “텅빈 네거리”와, “서녘에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이 그 구성 요소를 이룬다. “집 없는”과 “텅빈 네거리”가 보여주는 시적 화자의 ‘고독’과, “너를 찾는다”가 보여주는 ‘구도’적 태도는 존재론적 차원뿐만 아니라 사회적 역사적 차원과 관련되어 있다. 2연의 “징역의 시절들/어지러운 꿈자리에 시달리던 밤”이 그것을 암시한다. 이 고난과 상처 입음은 3연의 “상처에 소금을 뿌리며/날 선 돌멩이 들어 나를 찍던 사람”에서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된다. 이 고난과 상처 입음의 과거사가 시적 화자에게 고독과 방황, 그리고 구도적 길 찾기를 가져다주었다고 짐작할 수 있다. 화자는 이러한 “밤은 끝났다”라고 선언하고, 자신에게 상처를 준 사람은 “어디에 있나”라고 묻는다. 이처럼 과거의 고난은 지나갔지만, 화자는 여전히 “아프고 괴로우”며 “외롭고 슬프”다. “바다가 밀려와 땅을 뒤덮어도/붉은 꽃들 사방에서 피어나 손짓하”는 상황과, “손가락 끝을 아무리 깨물어도/새는 울지 않”는 상황은, 시적 화자의 ‘고독’과 ‘구도’적 태도가 사회적 역사적 차원뿐만 아니라 근원적 운명의 차원과도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이것은 원죄의식에 해당하는 종교적 차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연의 “서녘에서 불어오”는 “낯선 바람”이 이러한 설명을 뒷받침한다. 이 바람은 종교적 차원의 바람이며, 종말론적이며 묵시록적 세계로부터 불어오는 어둡고 불길한 바람이다. 이 “낯선 바람”은 “붉은 꽃들”과 “울지 않”는 “새”로 이어지는 계열선을 타고 흐르다 6연의 “피”와 “살”로 맺힌다. 시적 자아의 고독과 방황은 과거의 고난과 상처가 낳은 산물이기도 하지만, “너”를 찾아가는 구도적 길가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남진우는 존재론적 ‘고독’과 사회 역사적 ‘고난’을 자신의 원죄의식으로 받아들이면서, 그것을 궁극적인 가치를 찾아가는 신화적 종교적 ‘고행’의 길가기로 전개시키는 것이다. “내가 지상에 토하고 가는 한 모금의 피”와 “내가 하늘 아래 남기고 가는 한 줌의 살”은 이러한 고독과 고난과 고행의 결정체이다. 이 ‘피’와 ‘살’을 “먹고 마시라”라고 표현하는 것은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는 성찬의 의미를 변형시킨 것으로서, 이 시의 제목인 「지상의 양식」과 긴밀히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남진우의 신화적 종교적 상상력이 종말론적이며 묵시록적 사유와 관련되지만, 기독교적인 신중심주의가 아니라 지극히 인본주의적 사유에 기초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에 나타난 “피”와 “살”은 존재론적 ‘고독’과 사회 역사적 ‘고난’과 신화적 종교적 ‘고행’의 상징으로서, 신이 아닌 인간의 영웅주의적 모습을 대변한다.

“맨발로 먼 길 걷고 걸어”가는 “탁발승”이야말로 이 비극적 영웅의 모습이다. 이 시에 7번이나 등장하는 시적 자아 “나” 혹은 “내”라는 단어는 강도 높은 자기동일성의 징후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이것은 ‘고독’과 ‘고난’과 ‘고행’이 지닌 파토스적 장엄함과 숭고미를 증거한다. 그리하여 이 시가 전체적으로 보여주는 도저한 낭만주의적 열정, 혹은 허무주의적 파토스의 표출은 시인의 자기동일성 내부에 소용돌이치는 강렬한 타자성의 에너지를 보여준다. 남진우는 이것을 “이 시절 다 가기 전에/긴 가뭄 큰물이 번갈아 찾아오리니”라는 숭고한 예언적 어조로 노래함으로써 묵시록적 허무의 새로운 표현을 얻는 것이다.

4. 박판식- 존재론적 허무와 위악

박판식은 2001년에 등단하여 최근 첫 시집 『밤의 피치카토』(2004)를 출간한 젊은 시인이다. 그는 유년과 현재의 시간대를 부유하는 몽상적 이미지들을 연금술적 언어감각으로 조합하는 독특한 시세계를 보여준다. 상징성이 강한 시적 언어들이 몽환적 의미망을 따라 방사되면서 이미지의 불협화음을 이루지만, 그것이 어떤 내적 조화를 통해 회집되는 양상을 띤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무의식적 이미지들의 방사와 결집을 관장하는 주된 모티프는 ‘부력’과 ‘중력’이다. ‘중력’이 하강의 의미로서 현실원칙을 대표한다면, ‘부력’은 상승의 의미로서 현실원칙을 초월하거나 비껴나 있는 쾌락원칙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다. 이때 ‘부력’은 유년의 시간과 관련되며 ‘어머니’로 대표되는 모성과도 관련된다. 최근 발표된 다음 시에서 이 모티프는 독창적인 이미지로 표현되고 있다.

폐암으로 죽은 내 주인 여자는 유언 대신 침을 뱉었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노랗고 끈적끈적한 그 타액을 떠올린다

태양의 비명소리를 들은 밤이었다

불가사리, 거품을 뿜어내지 않으면서도 그것은

아스팔트 위에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침은 야성으로 빛나며 자유라고 외쳐댔다

의식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

훅, 하고 순식간에 빨려드는 아홉 개의 흡반

침은 살고 싶은 가장 단순한 동기를 내게 부여해 주었다

창살에 박혀 죽는 곤충은 없다

가볍기 때문에, 탄력이 넘치기 때문에

그리고 침은 이제 아주 끈적한 한 마리 곤충이 되었기에

사뭇 두려운 기색조차 없었다

한 마리 곤충의 위악적인 증발

이미 날개를 어깨를 팔다리를 모두 뜯어내었기에

도무지 착지라고는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쾌락이 닥쳐왔다

- 박판식, 「서광」(『시작』, 2005년 여름호)


이 시는 크게 세 가지 시적 대상을 연상적 상징체계로 조합하는 기법을 보여준다. 이 시적 대상의 첫째는 ‘주인 여자의 침’이고, 둘째는 ‘불가사리의 흡반’이며, 셋째는 ‘곤충의 증발’이다. 첫 번째 사건은 주인 여자의 죽음인데, 주인 여자는 아마도 시적 화자의 어머니일 것이다. “폐암으로 죽은” 이 여자는 “유언 대신 침을 뱉”는다. 여기서 ‘침’은 이 시 전체를 지배하는 시적 장력을 지닌다. “노랗고 끈적끈적한” 속성으로 인하여 ‘침’은 액체와 고체의 경계에 있으며, 기체로의 휘발이라는 잠재성 또한 가지고 있다. 일단 이 점이 ‘주인 여자의 침’과 ‘불가사리의 흡반’과 ‘곤충의 증발’을 이어주는 연결고리로 작용하는 것이다.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싶을 때마다” “그 타액을 떠올”리는 것은 ‘침’이 지닌 야성과 자유를 향한 외침 때문이다. 침을 야성 및 자유를 향한 외침과 관련시킨 것도 적절한 의미 부여이지만, 이것을 “태양의 비명소리를 들은 밤이었다”와 “불가사리, 거품을 뿜어내지 않으면서도 그것은/아스팔트 위에서 바다를 그리워하고 있었다”라는 문장과 병치해 놓음으로써 침의 속성과 불가사리의 속성이 중첩되는 효과를 낳는다. 불가사리는 바다의 ‘물’과 태양의 ‘불’을 한 몸에 안고 있는 존재로서, 야성과 자유에의 동경이라는 ‘침’의 의미에 고향과 원초적 생명을 동경한다는 의미를 겹쳐 놓는다.

“의식에 구멍이 뚫리는 순간”은 ‘침’과 ‘불가사리’의 이미지가 상호 융합시킨 의미를 다시 시적 자아에게 돌려놓는다. 이를 “무언가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순간이라고 볼 때, 이 경험은 시적 창조의 경험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 순간 “훅, 하고 순식간에 빨려드는 아홉 개의 흡반”은 시인의 의식의 촉수와 불가사리의 흡반을 다시 중첩시킴으로써 새로운 연쇄구조를 형성한다. 그리고 다음 장면은 “침”과 “곤충” 사이에서 병치를 통한 의미의 중첩을 시도하고 있다. 파찰음 ‘ㅊ'이 지닌 야성적 공격성으로 인하여 “침”과 “창살”이 하나의 계열선을 이룬다고 볼 때, “창살에 박혀 죽는 곤충은 없다”라는 문장은 ‘침’과 ‘곤충’ 사이의 대립적 의미망을 보여주지만, “가볍기 때문에, 탄력이 넘치기 때문에/그리고 침은 이제 아주 끈적한 한 마리 곤충이 되었기에”에서 보듯, ‘침’은 그 끈적함으로 인해 가볍고 탄력이 넘치는 ‘곤충’과 중첩되는 새로운 의미망으로 전개되는 것이다.

“한 마리 곤충의 위악적인 증발”은 박판식의 시의식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주인 여자의 침’ 및 ‘불가사리의 흡반’과 상호 중첩되는 ‘곤충’은 야성을 가지고 자유를 외치며 태양과 바다를 동경하지만, 그래서 ‘부력’을 가지고 하늘로 상승하려 하지만, 침이 마르고 불가사리가 아스팔트 위에서 거품을 내뿜지 않듯 ‘증발’의 운명을 맞이하는 것이다. 이 운명은 비극적이고 허무적인 것이지만, 시인은 “사뭇 두려운 기색조차 없”이 허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이 증발은 “위악적인” 것이 된다. “이미 날개를 어깨를 팔다리를 모두 뜯어내었기에/도무지 착지라고 말할 수 없는 죽음의 쾌락이 닥쳐왔다”라는 마지막 구절에 이르러, 우리는 허무를 받아들이는 이 위악적 ‘증발’이 “죽음”으로 귀결됨을 알게 된다. 유년 시절과 어머니를 매개로 한 ‘부력’은 몽환적 신비로움을 시에 부여하지만 ‘중력’이 지배하는 현실의 무게를 견디기 어려우며, 지상의 땀과 피를 초월하여 부유하는 시적 상상력은 그만큼 가벼워질 수 있다. 따라서 시인은 “날개를 어깨를 팔다리를 모두 뜯어내”는 위악적 증발을 통해 죽음의 착지를 시도함으로써 “서광”을 맞이하려 한다. 박판식이 보여준 ‘부력’과 ‘중력’ 사이의 긴장과 불협화음은 이 “죽음의 쾌락”을 경유하여 새로운 지점으로 진행될 것이다. 그 장면을 함께 지켜보기로 하자.

오형엽

1994년 현대시, 1996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저서로 주름과 기억, 신체와 문체,현대시의 지형과 맥락등. 현재 수원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