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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지전가 직무연수 자료]
교육복지의 역사와 의미 / 나에게 교육복지란?
김기형 공진중학교 교사
1. 들어가면서
‘나에게 교육복지란 ?’ 쉽지 않은 제목을 받아들고 어떻게 이야기를 전개할까를 고민하면서 지난 시간을 통해 변화되는 교육복지를 다시 한번 되새겨 보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교육복지는 이렇다.’ ‘교육복지는 이렇게 해야한다’, ‘교육복지학교의 교사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사업체계는 이렇게 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다’, ‘교육복지는 이런 성과가 있습니다’라고 많은 학교에서 컨설팅을 통해서, 또는 연수를 통해서 목소리 높여 외쳐 왔는데.....
과연 우리는 제대로 교육복지를 하고 있는 것인가? 교육복지 정책의 방향은 올바르게 아이들의 성장을 지원하고 있는 것인가? 학교의 변화(교사의 변화)없이 전문가들의 노력만으로 이뤄지는 교육복지는 타당한가? 십년이 지난 지금도 초기에 가졌던 문제 인식 수준으로 교육복지를 바라보아도 좋은 것인가? 게다가 더 의문을 갖게 하는 것은 교육복지사업으로 진정 도움을 받아 건강하게 성장한 아이들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갖고 지나온 활동들을 돌아봅니다.
제가 지난 시간 시행한 활동들이 지금의 현장에서 아이들을 만나는 지전가들께 얼마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교육복지의 역사 속에서 나의 변화에 대한 이야기, 나에게 어떻게 투영되었는지를 보다 솔직하게 이야기를 전개해 보렵니다.
2. 운명을 결정지은 한 통의 전화
“김선생, 오늘 시간 있으면 교육청에서 공청회를 하는데 학교 대표로 참석해 줄래?” 2003년 5월, 잘 알고 있는 교사단체의 선생님으로부터 걸려온 전화가 내 교직 방향을 바꿀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멋도 모르고 참석한 자리, 치열한 토론이 벌어지더군요. 주된 쟁점은 ‘시범사업을 실시하는데 학교의 교사들에 가산점을 주면 안 된다, 교육부가 지정한 학교는 무조건 실시해야 한다.’ 는 내용이었는데 나중에알고 보니 그 자리는 교육복지사업을 위한 교육청 순회 공청회 자리였던 거죠. (한동안 교육복지사업은 교사들의 가산점이 없는 상태에서 사업을 운영하였음) 이미 많은 계획이 결정된 상태에서 학교의 대표 교사로 ‘참 좋은 제도인 것 같은데 현재의 학교 현장에서 실현 가능할까?’하는 의문만을 뒤로 한채 모임을 마쳤다. 그리고 한 달여 후에 지역복지관에서 지역의 기관들이 참석한 가운데 교육복지 설명회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런 사업이 진행되겠구나 하고 알게 되었죠.
결국 2003년 8월 드디어『교육복지 투자우선지원 시범사업』이란 사업이름으로 서울과 부산에서 학교 현장에서 시범적으로 운영되기 시작하였죠. 복지의 복자도 모르는 나에게 어쩌면 큰 시련이 시작된 것이죠. 저는 유능한 수학교사로 충분히 나의 교직사명을 담당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시기였고, 학교 내 민주화를 위한 투쟁에 발 벗고 나서는 ‘싸움닭같은’ 교사라고나 해야 할까요. 그 당시 생활기록부 기록시스템 C/S방식을 현재의 NEIS로 전환하려는 교육부의 시도를 교사단체가 강력히 반대하던 시기라 교육부의 정책을 모두 반대하며 그들의 저의를 파악하려고 하던 때이기도 했거든요.
3. 신비의 그녀를 만나다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시범사업의 목표인 『저소득층 학생의 교육․문화적 결손을 치유․예방하고, 정서발달을 위한 가정-학교-지역사회 차원의 지원망을 구축하고, 건강한 신체발달을 위해 필수적인 최소한의 복지서비스를 제공한다.』라는 문구에 ‘아 이거다! 평소 가지고 있던 나의 교직관에 힘을 줄 수 있는 일이네’ 라며 너무 쉽게 넘어가 버렸죠.
어쩌면 영화 ‘Sound of Music’ 에 나오는 절제와 통제 속에서 자라고 있는 트랩대령의 아이들에게 음악을 통해 아이들 본연의 생기발랄과 희망을 갖게 해주려고 수녀원에서 나온 마리아를 생각하게 했답니다. 교육복지사업이 영화의 여주인공 마리아의 역할처럼 소외계층의 아이들에게 희망을 줄 수 있고, 그런 사업이 성공하도록 내가 할 수 있는 한 도와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는 사실을 그땐 왜 몰랐는지. 희망이라는 계란을 매우 크게 생각했었나 봅니다. )
이 사업 진행에 뛰어들면서 새롭고 설레게 하는 단어들이 생겨났답니다. 가령,
‘한 아이를 키우려면 한 마을이 필요하다’, ‘연계 및 네트워트’, ‘복지’, ‘마을’, ‘소외계층’, ‘낙인감’, ‘정서’, ‘풀 밧데리’, ‘프로그램’, ‘사업계획서’, ‘zep’ 등 지금은 익숙하게 사용하지만 오랫동안 입 안에서 잘 나오지 않는 생경하고도 유의미하며 신기한 단어들이었죠.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교육복지 사업은 어쩌면 나와는 코드가 잘 맞는 사업이구나. 내가 잘 할 수 있는 사업이 되겠구나.’ 라고 공감과 열정을 갖게 해 주어 적극적으로 뛰어들도록 하게 했답니다.
4. 시범사업이 시작되다
2003년 2학기에 서울 6개 지역, 부산 2개 지역으로 본격적으로 사업이 시작되었죠. 초기 사업의 구상과 안정을 위해 지역pc와 학교 지전가들의 노력은 교사인 우리의 시각으로는 이해가 안 될 정도로 밤낮없이 노력하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교사로 살아온 나에게 새로운 세상의 여신들을 만나게 되었죠. 정다운 이름들(김주미, 전구훈, 조현희, 부은희, 윤은주, 최윤정_pc들, 김금란, 김은영, 이남희, 정정희,김소이, 강현옥, 고정언_지전가, 김영삼, 최우암, 김옥수, 김용서, 오시용_담당교사 등등) 이들의 활동은 지금 생각해도 나에게는 신비로운 그녀들이며, 교사의 매너리즘에 빠져있는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답니다.
초기 교육복지방향은 지역 나름의 특색을 가지고 시작하였는데, 북부지역은 지역 청소년 활동가 중심의 교육복지 사업으로, 강서지역은 학사사 중심의 교육복지 사업의 틀로 특징지을 수 있다고 봅니다.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기회가 있을 때 재조명할 필요가 있음)
이때 학교 선생님들의 여론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핸드폰이 있는데 도와줘야 하나’, ‘중식에 저녁까지 다해주네’ 등 부정적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분위기였기에 학교에 상주하는 지역사회전문가의 위상은 현재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죠. 초기에는 학교 내의 지전가의 위상과 역할을 학교에 알리는데도 어려움이 많았는데 예를 들면 잦은 출장에 학교 눈치를 봐야 하고, 직원회의에도 참석하기 못 했고, 교육복지실이 설치 미비 등 당시 지전가들이 고생이 많았죠.
2003년 가을, 이렇게 시작된 사업이 저의 교직생활의 생각과 활동의 범위를 바꾸어 놓게 될 줄은 나 자신도 모르고 있었죠.
5. 교육복지! 한 아이의 소중함을 배우다.
시범사업의 시작은 교육복지사업의 전문인력이 교육청과 학교에 pc와 지전가들로부터 복지에 대한 기초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본교에 임용된 지전가는 아이들에 대한 열정, 교육복지사업의 필요성, 이 사업으로 개인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계획 및 운영 등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유능하고 뚜렷한 철학을 지닌 분들이었다. 2004년 사업의 진행과 2005년부터 전담부서의 부장과 지전가들 사이의 끊임없는 논쟁을 통해서 하나하나의 사업이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교육복지의 진정성을 느끼게 되었죠. 그런 사업 진행의 과정에서 아이마다 서로 다른 유형의 결핍이 있으며, 서로 다른 환경에서 소외되고 있음을 알게 되었죠.
본교의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사업이 무엇일까?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 가야하는 상황에서 가능했던 일은 논쟁(토론)뿐이었던 것 같습니다. 논쟁의 끝은 항상 내가 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교육복지의 필요성, 사업의 연속성이 아이들을 도와줄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우리만이 할 수 있는 사업들을 만들기 시작했어요. 2004년부터 2007년까지 내가 근무하는 학교에서 중점적으로 운영한 사업으로는 “방과후 공부방(EDU-CARE)", 지역청 공동사업으로 추진한 “ 사제동행 도보 국토순례”, 지역사회기관과 함께 한 “진로정보 박람회” 등이었죠.
제가 처음으로 만난 지전가샘이 교육복지를 표현하면서 즐겨 애용하던 시 한 구절이 있는데요. 교육복지를 하면서 힘들 때, 내일은 불꽃이 될 지도 모를 아이들을 보면서 힘을 얻곤 했지요. 지금도 저는 교육복지 연수에 가면 선생님들께 이 시한 구절을 전하면서 교육복지가 왜 필요한지를 소개하곤 한답니다.
“ 지금은 숨어 숨어 타는 숯이야!
내일은 불꽃일 줄 몰라라.“
6. 대중 앞에 서게 될 줄이야!
평탄하게 수학만을 잘 가르쳐 오던 평범한 교사가 아주 우연한 계기에 교육복지사업 연수 강사로 다니며 대중 앞에 서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답니다.
2004년 12월 22일(수) 서부교육청 강당에서 “교육복지투자우선지역 지원사업 실무담당자 연수”에서 20분간 본교에서 실시한 방과후 공부방(EDU-CARE)운영에 관한 사례발표를 하였죠. 몹시 떨려서 청중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고 몇 명이 왔는지도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의 첫 발표였어요. 이 사례발표를 시작으로 2005년부터 교육개발원의 강사풀로 전국으로 다니며 강의하게 되고 서울시연구지원단, 강서교육청 연구지원단으로 본의 아니게 활동하며 학교의 연수, 지전가 연수 등에 학교에서의 사례중심으로 강의하는 교사가 되었답니다.
처음 시작할 때 저보다 열심이고 저보다 강의를 잘 하는 교사들이 있었음에도 왜 말 주변이 없는 제가 지금까지도 틈틈이 강의하고 있을까 생각해보니, 제가 똑똑하고 잘 나서가 아니라 오랫동안 교육복지에 몸담고 있는 교사가 거의 없기 때문이라 하더라구요. 이 문제는 교육복지정책의 입장에서도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일 듯해요.
7. 서울, 교육복지의 최대의 적을 만나다.
교육복지사업이 본 궤도에 올라오기 시작할 즈음 서울시에 큰 변화가 생겼습니다. “ 좋은 학교 만들기 자원학교”라는 이름으로 당시의 공00교육감이 야심차게 사업을 진행하겠다고 움직였죠. 이 사업이 교육복지사업의 근간을 흔들게 될 줄도 모르고 이 사업의 초안과 계획이 교육복지담당관들한테서 나왔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었던 거죠. 저 또한 교육복지와 함께 하면 많은 아이들이 더 좋은 혜택을 받을 수 있을거라는 순수한 취지로 본교에서도 이 사업을 추진하였으니...... 저에게는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최악의 선택었다고 후회한답니다.
2006년 ~ 2011년까지 운영된 “ 좋은학교 만들기 자원학교”는 그동안 교육복지를 단단하게 지켜왔던 사항들인 교사의 가산점 문제, 지역(ZONE)개념, 대상자 중심의 사업을 송두리째 삼켜버렸습니다. 이후로 교육복지학교는 2015년까지 교사들에게 가산점을 주면서 교사의 자발성참여가 더 어려워진 측면이 있으며, 가산점이 없어지는 2016년부터는 사업하기가 더 어렵다고 학교들이 원망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죠.
서울시는 2012년부터 기존의 교육복지우선지원사업학교와 자원학교를 통합하여 “교육복지특별지원사업”으로 교육복지를 운영하게 됩니다. 특히 자원학교에서 교육복지로 바뀐 학교들은 아직도 자원학교의 운영방법처럼 교육복지를 운영하려는 경향이 남아 있게 됩니다.
8. 2 ROUND 준비
2003년~2004년 시범사업기간이 끝나고 2005년부터 교육부는 교육복지사업의 확대운영을 발표하여 2007년까지 본 사업이 원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격동의 시기(정권교체와 맞물려)에도 교육복지의 2라운드 운영에 대한 정책진행을 위해 학교, 교육청, 담당자들은 더욱 현안에 대하여 초미의 관심을 가지고 많은 준비를 하게 되었죠. 교육개발원, 교육부, 시도교육청, 학교 등이 한 마음으로 사업의 확대의 필요성을 주장하였으니 이때만큼 절실히 교육복지의 지속성이 필요하다고 느낀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보수정권이 들어섰음에도 불구하고 2008년부터 교육복지사업은 계속 확대 운영하게 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지만 과도기에 교육복지를 성과 중심의 정량평가로 전환하면서 사업의 계속성을 담보했던 인물이 이명박정권 내내 교육부를 좌지우지했던 이00장관인데요. 지금에서 어찌 그를 평가해야 좋을 지...
<참고> 5년 동안 사업진행보고 및 의견 수렴자료
이렇게 준비를 끝내고 2라운드를 시작하려 할 즈음에 나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이 있었죠.
2008년 2월초 강서지역 지전가들 사이에 지전가들의 권익 보호를 위해 서명을 하고 받아 교육청담당자와의 면담을 추진하는 자리에 제가 함께 참여하게 되었죠. 물론 크게 얻어낸 건 없지만 지전가들의 목소리를 함께 낼 수 있었다는데 큰 의미를 갖게 되었지만요. 그일로 저는 교육청 담당자인 최모 장학사에 눈이 나게 되고 주동자인 것처럼 교육청에서는 문제를 삼게 되었죠. 그 해에 나는 경서중학교에서 다른 학교로 전근을 가야하는 시기였고, 인근의 교육복지학교로 전출하기로 거의 확정되어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비사업학교로 전근가게 되었죠. 이때부터 2011년 일반학교 교육복지를 실시하기까지 3년동안은 교육청에서 부르지도 못하게 할 정도로 문제교사로 낙인되었답니다. 이 기간에 교육복지는 놀라울 정도로 확대되어 있었고, 연구지원단의 구성도 교장중심으로 재편되어 운영되면서 일반교사들이 참여할 기회를 갖지 못하게 되었죠. 지금에 와서 보면 교육복지의 중심적 역할은 지전가와 담당부장교사들이며, 부장교사들이 함께 오랫동안 교육복지를 지켜내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문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일로 강서지역의 지전가들은 새로운 환경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죠..(학교를 그만두거나, 교육청 pc로 옮겨가게 됨).
9. 비사업학교에서 교육복지를 접목시키다.
비사업학교에서 상담부장 업무를 맡고 있을 즈음 서울시예산으로 교육청에서 실시하는 “방과후 공부방 사업”을 공모하여 공항중학교에 공부방 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그 운영방법이 2004년 처음 사례발표했던(2007년까지 경서중에서 교육복지 사업으로 운영하던 공부방) EDU-care 와 동일한 사업이더라구요. 그때 특허권을 신청해 둘걸....
이처럼 이제는 초기 교육복지에서 운영하던 사업들 중에서 사업으로 포장하기 좋은 것들은 서울시나 교육청의 타부서에서 하나 하나씩 사업을 가져가지 시작하는 거죠. (예, 도서관사업, 공부방사업, 방과후 자유수강권, 체험활동지원, 예체능 활동 지원 등)
비사업학교의 진로상담부에서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위클래스를 교육복지실처럼 운영하게 되고, 교육복지를 통해 배우게 된 개개인의 특성을 지원해 주는 사업을 개별적으로 찾아 연계하게 되는 어쩔 수 없는 복지맨이 되었음을 새삼 알게됨
2011년, 2012년 일반학교에 교육복지사업이 시작되었으며, 이때에 교육청에 교육복지 연구지원단으로 다시 활동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음.
10. 지역기관! 너는 누구냐.
교육복지사업을 통해 나의 시야가 넓어진 것은 아이들을 보는 관점의 변화 뿐 아니라 지역, 마을에 대한 생각을 갖게 된 것입니다.
초기 강서지역은 지역별로 거점기관을 지정해 놓고 지역기반형사업을 전개하는 형태로 지역을 활용했구요. 특히 학교와의 관계형성이 미비한 상황이었기에 지역별 기관협의회를 통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했었죠.
교사의 눈으로는 모든 것이 신기했고 모든 것들이 답답했죠. 지역기관은 학교의 높은 담장을, 학교는 지역기관의 인프라가 약함을 탓하기도 했지만 서로 조금씩 함께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으며, 지역기반형사업을 통해 지역의 많은 기관들이 교육복지를 이해하고 네트워크의 필요성을 인지하게 되었죠.
아쉬운 것은 2012년부터 『기초학력․정신건강』우수교육청 지원사업으로 교육부로부터 받은 예산을 목적에 맞게 사용하고, 지역기반사업은 계속 확대하는 방안을 고민하지 않고, 교육복지사업의 지역기반형 사업 예산과 함께 ‘지역교육복지센터’를 설치하여 운영함에 있다. 이렇게 센터의 운영중심으로 방향이 바뀌면서 그동안 지역기반형사업의 지역 네트워크이 단번에 와해된 것이다. 지역은 연계된듯하지만 연계되지 않는 묘한 관계 이더라구요. 저는 아직도 지역기관에 대한 충분한 이해를 잘 하지 못합니다. 교육복지센터 T/F에 참가도 해 보지만 교육복지의 지역연계에서 센터가 공룡처럼 보이는 것은 제가 부족하기 때문일까요.
교육복지를 통해 연결된 지역기관이 콘서시움으로 ‘강서 푸른이 학교’ 라는 새로운 지역사업을 하는 경험을 하면서 교사가 아닌 지역인으로 느껴지기도 했었죠.
교육복지사업이 아니었다면 지역기관에 아직도 무관심하고, 지역연계라는 의미도 모르고 아이들에게 최소한만을 안겨주었겠죠.
11. 나에게 교육복지란?
나에게 교육복지는 나의 교직생활의 교사로서의 관점을 바꾼 계기가 되었습니다. 지금 진로진학상담교사로 활동하게 된 것도 교육복지사업의 영향이라고 봅니다. 아마 교육복지를 만나지 않았다면 수학교사로서 남들처럼 승진하기 위해 나름 노력하는 평범한 교사였겠죠.(물론 승진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나 교육복지를 만난 2003년 이전과 이후는 난 전혀 다른 교사가 되어 버렸죠. 처음으로 같이 근무한 지전가 선생님이 나를 평가한대로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사”로 만족합니다. 교육복지 전도사처럼 연수강사로, 컨설팅으로, 교육복지정책 T/F로 바쁘게 움직이지만 십년을 지난 지금 마냥 행복해 할 수 만 없군요. 아쉬움이 참 많이 남네요.
시범사업에 참여했던 많은 지전가, 프로젝트조정자, 전문인력들, 담당선생님들은 지금 어디에 계시는지..... 특히 함께한 각 지역의 교사들은 어디에 계시는지....왜 지금까지 계속 교육복지와 함께 하는 교사는 손꼽을 정도로 없는 건지.
왜 우리는 십년동안 학교의 재구조를 통한 교사들의 변화를 이끌어 내지 못했는지.....올해 일반학교로 확대되면서 제일 걱정한 것이 교사들이 어떻게 움직이게 할 것인가.. 이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네요.
왜 우리는 십년동안 교육복지 대상 학생들의 행복을 추구하면서 정작 그들을 이끌어주는 지전가, pc, 담당교사들의 행복을 외면하고 있는지....
나 개인적으로 이글을 정리하면서 너무 오래동안 변화없이 교육복지사업을 해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는 2세대, 3세대의 교육복지 담당교사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조용히 정리해야 하는 것 아닌가.....
나에게 교육복지는 내 삶을 활력으로 재충전하게 하는 배움이다.
수학교사에서 교육복지 담당교사를 통해 진로진학교사로 전환하였으니, 이제 소외계층 학생들을 위한 진로교육 방향과 지도에 필요한 매뉴얼을 준비하는 새로운 테마에 도전해야 하는 사명을 느낍니다.
대단하지 않은 한교사의 주절거림을 끝까지 읽어주신 선생님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