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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행복 전도사' 부부가 동반 자살하여 우리 사회에 큰 충격과 당혹감을 안겨주었습니다. 하루 평균 자살자가 무려 40명 가까이나 될 정도로 세계 최고로 불행한 나라와 사회가
되어가니 안타깝습니다.
우리 사회에 고금과 동서를 통털어 행복을 전하는 전도사도, 사상가도, 교사도, 문필가도, 종교가도 하늘의 별처럼 많지만, 이렇게도 철저하게 인간 존재를 관조하고, 행복이 무엇인가를 통찰한 법문은 과문한 저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 가르침의 위대성을 다시금 절감합니다. 밑줄과 굵은 글씨와 괄호 안의 문구는 제가 읽으면서 한 것입니다.
이 세상 모든 생명들 길이 행복하시길.
쾌락과 참 행복의 차이
“일상의 모든 것이 이 순간에도 늘 변화하며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관계되어져 홀로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 근본 의식이 내면화되어 이해되고 그리고 실천될 때, 무지와 고통은 물러갑니다. 물러가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행복감이 찾아 듭니다. 이 참 행복은 단순히 철학적 구축물로서의 개념적인 앎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경험되어야만 찾아드는 지혜의 덕목입니다.
현대를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매우 바쁘게 일상을 살고 있습니다. 돈을 벌기 위하여 일하고,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우정을 나누고, 이성을 사귀고, 오락과 스포츠를 즐기며, 또한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활동합니다. 우리는 돈과 시간과 에너지 그리고 마음을 그러한 일들에 바치며 보다 나은 삶으로 나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서 그것을 실현함으로서 만족과 행복을 성취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목적은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나 보다 나은 행복의 추구입니다. 행복을 찾는 방식이 어떠하건 간에, 그리고 행복이 의미하는 내용이 삶의 충만과 기쁨이건, 의무이건, 열정이건, 혹은 사랑이건 간에, 행복은 삶의 목적임에 분명합니다. 혹시 삶의 목적으로 다른 것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있다면, 그는 아마 다른 명목으로 표현할 뿐, 핵심은 행복을 찾고 있는 것임에 분명합니다.
이 행복이 삶에 있어서 그다지 중대한 결과를 초래하지 않는 일시적인 감정에 불과한 것이라면 행복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그다지 심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행복에 대한 개념이 우리 삶의 매순간의 질을 결정짓는 존재방식과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행복의 본질을 이해한다는 것은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목이 됩니다.
어떤 사람들에게 행복이란 재산을 어느 정도 가졌느냐에 따라 그 강도와 지속시간이 달라지는 조건적인 감정으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또한 어떤 이는 행복이란 “사는 동안 자신의 삶의 활동 중 가장 활기찬 부분에 대하여 느끼는 희열”이라고 말합니다.
사색을 가까이 둔 이들은 각박한 일상생활을 벗어나 아름다운 산 정상에 올라 평원과 멀리 능선을 바라보며 잡다한 것들을 날려 보내버리거나, 모래 해안에 앉아 지평선과 바다 위에 떠있는 조막섬들을 바라보며 자연과의 조화 속에서 느꼈던 평화로운 순간들을 행복과 결부하여 얘기할 것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어떤 중요한 시험에 합격했다거나, 아기의 출생과 같은 일들이거나, 소중한 혹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내거나, 아니면 누군가를 위하여 봉사하였던 일을 행복으로 얘기할 것입니다. 또한 채마밭을 가꾸며 노동과 생명 현상을 공감하는 것에서 혹은 뒷산을 산책하거나 가벼운 운동을 한 후 차나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얻는 편안함, 평화로움, 여유로움의 조용한 행복도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것들이 아무리 따뜻하고 감미로운 위안을 주는 것일지라도 그것의 에너지가 삶 전체를 비춰주는 것이 아니라면 본질적이며 또한 지속 가능한 행복은 아닙니다. 행복이 결코 삶의 미망에서 간혹 어떤 일시적인 기분 좋은 감정이나, 강렬한 기쁨, 희열, 경이로움 혹은 자부심, 뿌듯함 등의 어떤 마법 같은 순간으로만 국한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경험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것은 ‘내면적 대립과 갈등의 소멸’이 일시적으로 있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숲 속을 거닐 때, 걷는다는 단순한 행위 외에는 다른 그 무엇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자신은 그 순간 지금, 여기에, 자유롭고 열린 마음으로 그저 ‘존재’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내면적 대립과 갈등의 소멸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존재들과 자기 자신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에 감싸이게 됩니다.
일상에 대한 잡다한 생각들이 머리속에 순간적이나마 떠오르지 않고, 미래의 계획도 번잡하게 자리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부대끼는 감정도 사라진 이 휴식의 순간은 마음의 평온・평화로 다가와 느껴집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느끼는 행복감이란 조건적으로 찾아든, 잠시 반짝 개는 날씨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그것을 축복의 상태라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지속적인 행복감은 아니지만 그러한 감정・정서는 우리들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칩니다. 그 마음의 평온・평정・평화의 순간들이 우리에게 진정한 충만함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이루게 해주는 조건의 본질에 대해서 일깨워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보다 지속적이고, 본질적인 행복이란 어떤 것일까요? 행복을 이해하기 위하여 먼저 행복과 가장 흔히 비교되는 쾌락과 기쁨에 대하여 살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아울러 쾌락과 기쁨이 참 행복과는 어떠한 차별성을 지니는 가를 살펴보는 것을 생략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쾌락은 감각적 혹은 지적인 차원의 기분 좋은 자극에 의해 일어납니다. 쾌락의 감정은 특별한 상황과 장소와 순간에 의존되어 일어나는데, 그것은 일어났다가는 점차 약화되어 무덤덤해지거나 불쾌해질 수도 있습니다. 쾌락은 본질적으로 불안정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맛보는 것은 쾌락의 구체적인 한 부분이지만, 일단 배가 부르고 나면 맛을 통한 즐거움으로부터 무덤덤해집니다. 계속해서 먹게 되면 속이 불편해질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행복감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다른 예로는 사랑이 없는 사람과 혹은 단순한 본능적 욕구를 사랑으로 착각한 대상과 관계를 맺는 것은 일시적으로 쾌락적 감각 내지는 감정을 만끽할 수는 있습니다만 이내 곧 허탈감에 이어 소외감이 찾아들기도 합니다. 해서 쾌락은 마치 닳아 없어지는 양초처럼 누릴수록 고갈되며, 반복하면 점차 싫증을 가져와 어떤 경우에는 혐오감으로 증폭되기도 합니다.
더구나 쾌락은 근본적으로 자기중심적인 경험이므로 이기주의의 폐단과 쉽게 연결되어서, 타인들과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항상 잠재되어 있습니다. 쾌락은 악의나 폭력, 자만심, 탐욕 등과 어우러질 수 있으며, 참된 행복과 더불어 같이 할 수 없는 그 밖의 다른 부정적인 정신들과 결합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복수를 하거나, 다른 사람들이 어려워하는 것을 보고 쾌락을 느끼기도 합니다. 거의 기계적일 정도로 지나치게 감각적 쾌락을 쫓는 것은 강박관념의 중독이나 탐욕, 불안, 실망 등을 동반함으로서 행복의 반대편을 향해 가는 길임에 분명합니다.
쾌락은 미망에 헤매이는 자들의 행복이요. 행복은 현자들의 쾌락입니다. 쾌락은 조건에 의존되어 일어나지만, 행복감은 쾌락과는 달리 내면으로부터 조용히 솟아납니다.
행복감은 조건에 영향을 받을 수는 있지만 조건에 얽매어 종속되지는 않습니다. 행복감은 쾌락처럼 이내 그 반대방향으로 변하지 않으며 오히려 오래 지속되며, 관조하며 누릴수록 충만하며 증대합니다.
쾌락과 행복 사이에는 직접적 연계가 없습니다. 돈을 모으는 쾌락, 새 아파트를 장만하여 소유하는 쾌락, 맛있는 음식을 먹는 쾌락, 스포츠를 즐기는 쾌락, 명품을 지니는 쾌락, 혹은 귀한 와인을 즐기는 쾌락, 또는 등산과 산책을 하는 등의 모든 쾌락들은 단연코 기분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이런 쾌락들은 절박한 상태에서 벗어날 때 얻는 충만감과 평온・평정・평화・자유로움과 같은 그런 행복은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병든 상태에서나 극한적 고통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으며, 가난의 한가운데에서도 행복할 수 있고, 몸짱이 아니어도 행복할 수 있고, 심지어는 죽음의 과정 속에서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쾌락과 행복의 차별을 강조한다고 해서 기분 좋은 감각을 선호하는 그 자체를 전적으로 거부해야 한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즐거운 감정이 자신을 소외시키지 않는 한, 사랑하는 사람과 무엇에 대해 공감하거나, 의미 있는 예술품들을 감상하거나, 감미로운 음악에 젖거나, 오롯한 숲 속을 거닐거나, 이국적인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을 멀리해야 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행복의 반대편으로 우리를 옭아매는 것은 즐거움 그 자체가 아니라 즐거움에 대한 우리의 내면적 집착입니다. 쾌락은 그것이 정신의 균형을 깨뜨리고 강박관념의 집착을 불러일으킨다거나, 쾌락을 누리지 못하게 막는 것에 대한 대립과 갈등 그리고 혐오감을 유발할 때 행복의 장애가 된다는 것에 유념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쾌락이 본질적으로 행복과 다르다고 해서 행복의 적은 아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쾌락을 경험하는 방식에 달려 있습니다. 쾌락이 자꾸만 반복하고 싶은 채울 수 없는 욕구를 불러와서 내적 자유를 구속한다면 문제가 됩니다. 오감의 기분 좋은 감각적 경험은 그것이 집착으로 고질화 되어 갈증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킬 때 행복의 반대편에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공중에 자취를 남기지 않고 나는 새처럼 쾌락이 현재 순간에서 깨어있는 상태에서 경험되는 경우는 집착을 불러오는 강박관념의 중독이나 속박과 환멸 그리고 소외로 내몰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쾌락이 깨어있음을 통한 알아차림과 통찰을 갖추고 평정을 찾은 상태의 내면적 자유와 더불어 자리한다면 그것은 행복을 가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행복을 장식해줍니다. 그렇다고 해서 행복감을 위하여 쾌락이 반드시 있어야 할 필연적 요소는 아닙니다.
‘기쁨’이란 말 또한 매우 모호합니다. 기쁨과 행복의 차이는 보다 미묘합니다. 일반적으로 행복은 당연히 기쁨의 형태로 표출됩니다. 수행의 진행 과정에서 여러 형태의 기쁨이라는 현상이 일어나고 그것이 연이어 자연스럽게 행복감으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일상생활에서는 마음의 평온함과 거리가 먼 건전하지 못한 부정적인 기쁨도 있습니다.
기쁨은 오감의 감각적인 쾌락만큼이나 다양한 감정과 연계되어 있습니다. 가벼운 미소부터 한바탕 웃어재끼는 즐거움, 새로운 도전을 통해 느끼는 흥분감, 감각과 감정을 황홀하게 하는 감동, 뿐만 아니라 두려움과 불안이 물러가고 난 뒤에 오는 안도감, 어려운 일을 성공해냈을 때의 환희, 선량하고 자비로운 행위를 하였을 때 느끼는 뿌듯함,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았을 때 느끼는 고마움, 일반적인 지식을 뛰어넘는 경이로움 등과 더불어 기쁨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감정들이 참 행복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그 내면에 도사리고 있는 모든 부정적 감정들(부정적 감정을 '번뇌'라 한다.)이 제거되어야 합니다. 성냄이나 시기・질투가 일어나면 기쁨은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집착과 이기심 또는 자만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 때 기쁨은 햇빛 속의 안개처럼 서서히 걷히어 버립니다.
기쁨이 지속되고 평온하게 성숙하려면 질투, 인색, 악의, 성냄, 혐오, 지루함, 짜증스러움 등의 부정적인 마음이 붙어 있지 않아야 하고, 참 행복의 요소인 선의와 깨어 있는 의식이 참여되어야 합니다.
행복감은 놀라움과 예기치 않은 강렬한 기쁨으로 인해 풍요로워질 수도 있습니다만, 모든 형태의 기쁨이 행복감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기쁨의 내면에는 들뜸과 흥분(도거)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들뜸과 흥분은 평온・평정・평화와 자리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행복은 기쁨에 내재된 들뜸과 흥분과는 존재의 양식이 다릅니다. 우리는 기쁨에 겨워 펄쩍 뛰기는 해도 행복해서 펄쩍 뛰지는 않습니다.
오랜 만에 친구를 만나 박장대소하며 술을 한 잔 기울이면 참 기쁩니다. 그런데 자기 자리로 돌아왔을 때는 무슨 이유에선가, 발원지가 어딘지 모르게 허전함과 공허가 슬그머니 기어 들어옴을 경험하지 않았습니까? 그러한 열광의 기쁨에는 들뜸과 흥분은 있었을지언정 진정한 행복은 없습니다.
지속적인 평온의 만족감에 토대를 두고 있지 않은 모든 피상적 기쁨은 어김없이 허탈과 우울 속으로 다시 추락하고 맙니다. 현대의 소비사회가 끊임없이 수많은 기쁨과 쾌락의 꺼리들을 만들어내고 있고 또 새롭게 만들어 내려고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문화 속에서 우리는 구조적으로 감각적인 쾌락과 기쁨들을 자꾸만 찾게 되고, 감정적으로도 늘 감각적 긴장을 갈구하며, 마침내는 고질적인 중독 상태에 빠질 유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이고 조건적인 행복으로서 ‘통조림 행복’ ‘행복의 그림자’에 불과합니다.
행복감의 경험은 조건에 의존되어 휘둘리는 불안정감을 극복하게 해줍니다. 부정적인 감정(번뇌)이 일어날 때, 행복감을 경험하게 한 그 깨어있음의 통찰력이 두려움과 불안함 그리고 비관적 감정을 허망한 자아로부터의 자유와 평온을 향하는 힘으로 작용합니다.
에티 힐섬(Etty Hillesum)은 2차대전 당시 독일인들에게 끌려다니다가 아우슈비츠의 개스실에서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그는 죽기 일 년 전에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면적 삶만 있다면 수용소 철장 안에 있건 철장 밖에 있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치 않다.(..........) 나는 많은 수용소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다. 모든 걸 알고 있으므로 이제 그 어떤 새로운 정보도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못한다. 나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삶이 아름답고 의미 가득하다고 생각한다. 매순간 나는 그렇게 느낀다.”
행복감은 정신작용이 대상에 대한 섬세한 이해(지혜)에서 비롯되는 깊은 정서적 균형상태인 것입니다. 일상적인 쾌락은 기분 좋은 일들과의 접촉에서 발생하여 그 접촉이 끝남과 동시에 사라지고 말지만, 행복감은 우리가 자신의 내적 본성과 조화를 이루는 한 오래도록 누릴 수 있습니다. 또한 행복감은 자기중심적이지 않고 조용하게 외부로 향하는 이타심입니다.
또한 행복은 우리가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지속시켜야 할 어떤 열광적 상태가 아니라 증오나 집착과 같은 강박관념의 정신적 독소들이 제거된 상태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구조와 마음이 작용하는 방식에 대해 좀 더 이해(위빠사나)가 깊어져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서 매우 중요한 부분은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위빠사나)해야 합니다.
현실을 정확하게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현실이란 존재 되어져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합니다. 우리는 대상에 대해 늘 잘못 지각, 인식, 인지, 판단하고 있는 상태에 있으며(무명, 어리석음), 이러한 인식의 오류는(무지, 어리석음) 세상과 끊임없는 갈등을 만들어 우리를 고통스럽게 합니다. 우리는 덧없는 것(제행무상)을 영원한 것으로 여기고, 본질적인 고통(일체개고)에 다름 아닌 것을 행복으로 여깁니다. 부와 권력의 힘과 명성과 강박적인 쾌락에 대한 갈증이 바로 그렇습니다. 모든 것이 관계 속에서 성립할 뿐, 홀로 실재하는 것이 아닌데(연기, 얽혀있다, 제법무아), 자기 자신(아상, 마나식, 강력한 자기 동일 의식)이 판단한 것(아견, 아집, 아착, 아치)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며(탐욕) 대립(분노) 속에서 마침내는 스스로 고통을 얻고 있습니다.
무지와 고통은 삶의 근본적인 조건의 세계가 아니라 우리가 현실에 대해 품는 그릇된 생각에 토대를 둔 삶의 정신적 양식인 것입니다. “일상의 모든 것이 이 순간에도 늘 변화하며 진행되고 있으며, 모든 것은 서로 관계되어져 홀로 실재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이 근본 의식이 내면화되어 이해되고 그리고 실천될 때, 무지와 고통은 물러갑니다. 물러가면 그 자리가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행복감이 찾아 듭니다. 이 참 행복은 단순히 철학적 구축물로서의 개념적인 앎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실천적으로 경험되어야만 찾아드는 지혜의 덕목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것을 증득할 수 있는 잠재적 역량(불성, 여래장)을, 참깨 한 알이 분명히 참기름을 안으로 지니고 있듯이 자기 자신 안에 지니고 있습니다. 참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지 못할 뿐 아니라 알려고 하지 않고 실천하지 않으며, 다만 대상을 소유함으로서 행복을 얻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정리하면 행복이란, 우리가 정신적 강박관념 상태와 마음을 어지럽히는 감정들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나타나는 지속적인 충만이요, 평온・평정・평화의 상태입니다. 행복은 존재와 세상을 왜곡도 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연기) 인식할 수 있게 해주는 지혜(정견)입니다. 또한 내적 자유를 향해 나아가는 기쁨이요, 타인들을 향해 발산되는 선의의 자비입니다.
이러한 행복감은 우리의 정신이 기능하는 방식에 대한 이해와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세상을 통째로 바꾸기란 어렵지만 세상을 지각하는 방식을 혁명적으로 전환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위빳사나 수행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봄의 황홀과 들뜸에 휘말리지 말고 봄을 수행 속에서 적절하게 즐기시기 바랍니다. 수행을 벼르고 있는 회원님들은 당장에 수행을 실천하시고, 수행을 하고 있는 분들은 보다 참 수행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싸두- 싸두- 싸두-
(위빠사나 수행처 경주 마하보디선원 선원장 혜조스님 2010년 5월 정기법회 법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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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알알이 보석입니다. 꿰어서 목에다 걸 일만 남았습니다. 그런데 그게....참.
위빠사나 수행을 하시어야 할 일만 남았지요.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