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 조동호 선생 어록 -
-------------------------------------------------------------------- "조선독립을 도모하기 위하여 상해에서 청년학생을 교양하고 그 당원을 독립운 동에 이용할 목적이었다."(신한청년당 창당에 대하여 조동호 증인 신문조서) -------------------------------------------------------------------- "국제 연합이 진정으로 우리 민족의 독립을 가져오지 못하며 미국도 우리의 독 립을 이끌어주고 일의 진행을 도와주는 것일 뿐이니 진정으로 필요한 많은 부 분은 자기 스스로 완성하도록 하라."(1919년 8월 26일 독립신문 2호 1면 시무 감언 中에서) ----------------------------------------------------------------- "금수강산이 야수의 침입에도 가만히 있고 단군 자손들은 섬 오랑캐들에게 유 린당하여 국토가 우리 소유가 아니며 자손이 거의 없어지게 되게 되었도다. 적막한 고궁은 가을 풀로 뒤덮여 지고 남아 있는 폐허 더미에는 어린 아이가 망국의 피눈물만 떨구는도다."(1919년 8월 29일 독립신문 3호 1면 일본 학정 사 中에서) --------------------------------------------------------------------- "부끄럽다. 우리 민족이 영광의 반만년 역사를 이어오면서 일본인을 가르쳤으 되 과거 일본이 은혜를 악으로 갚음으로써 우리가 재앙을 받은 때가 있었으나 우리는 오직 올바름으로 악을 바로 잡는 가르침을 주었을 뿐이었다. 끝에 가 서 천지가 뒤집어져 섬 오랑캐의 노예가 되었음은 갈대밭이 화려한 산이라는 말과 같다. 일본인의 역사상 큰 죄악인지는 모르겠으나 우리는 분하고 부끄러 운 말을 무어라 토할 수가 없도다."(1919년 9월 4일 5호 1면 독립신문 다시 들 리는 만세 소리 中에서) --------------------------------------------------------------------- "더러워서 기자의 신성한 붓을 아직 들지 않았으나, 이판에 기생 데리고 상해 에 오는 민, 박 두 아이는 너도 생각이 있겠지 명성황후가 너의 사촌이 아닌 가. 바가지 들고 인심 좋은 마을에 가면 굶지는 않을 터이니 속히 물러가라 쇠몽둥이 맛 한번 보기 전에."(1919년 9월 29일 독립신문 15호 3면 군소리 중 에서) --------------------------------------------------------------------- "일본인들이 내년 사월까지 독립문 앞까지 전차를 개통한다고 하던데, 우리 독 립을 축하할 때에는 교통편의를 주게 될 것이야."(1919년 9월 29일 독립신문 15호 3면 「군소리」中에서) --------------------------------------------------------------------- 왜놈은 임시정부보다도 우리 독립신문을 더 무서워한다지. 그 까닭은 독립신 문이 수없이 본국 안에 퍼지는 것을 싫어서. 제 아무리 별 수단을 다 한다한 들 제 아무리 헌병, 순사를 몇 천, 몇 만을 늘린다 한들 2천만 동포가 하나도 남김없이 우리 신문 애독자요 전파자인데 아무 방법이 없을 것이다."(1919년 11월 1일 24호 3면 독립신문 「군소리」中에서) --------------------------------------------------------------------- "평양에서는 요새 매일 아침마다 집 앞의 전봇대에 태극기와 독립만세 4글자를 붙이는 사람이 있다. 두 길이나 높이 붙여서 그것을 올라가 떼느라고 고생이 막심한 순사가 혼자 말로 “제길 할 놈들 만세나 부를 것이지. 이것은 왜 붙 여 사람을 고생시키는 거야......” 둘러서서 구경하던 아이들이 한꺼번에 “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불렀다. 파출소에 잡혀가서는 하는 말이 “순사가 부 르라고 하기에 불렀오”라고 했다더라.(1919년 10월 11일 독립신문 19호 2면 「곡중소」中에서) -------------------------------------------------------------------- "종로 파출소에 초등학생 여러 명이 경찰관을 놀리려고 만세를 부르며 독립이 다 되었다고 떠들었다. 경찰관이 크게 놀라면서 “아직 독립이 안 되었어”라 고 했다. “그럼 언제 되는지 물어봐 주시오”라고 했다. 다음날부터는 장난 삼아 하루에도 두 세 번씩 “독립 아직 안되었소,”하고 물어보는 성화에 생 각다 못하여 학부형을 불러다 엄하게 타일렀다고 한다.(1919년 10월 14일 독 립신문 20호 2면 「곡중소」中에서) -------------------------------------------------------------------- " 정부라는 기관은 민국 원년 이년으로 천년만년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무궁할 우리 민족의 자유요 생명인 귀중한 것으로 그 임원되는 사람은 잠시 귀중한 곳에 위탁받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아~ 아~ 대한 동포여 멀지 않은 자유의 희망 중에 씩씩하게 참고 활동하자. 항상 부르라 대한 독립만세를! 정부 만세를! (1919년 10월 25일 독립신문 22호 1면 임시정부와 국민 中에서) -------------------------------------------------------------------- “언제나 독립이 되나”, “언제나 저놈들이 다가나” 하는 것이 우리 2천만 동포가 밤낮으로 바라고 축원하는 것이다. 또 미,일 전쟁도 상상치 못할 바 는 아니니 1년 내에 못하면 2년 그도 못하면 3년 4년 내지 10년을 가더라고 2천만이 다 죽기까지는 맹세코 기필코 우리의 신성한 국토 내에서 우리를 노 예로 하는 원수의 이 민족을 축출하고 말리라 함이 2천만 대한민족의 결심인 줄 알고 적은 전율할 지어다.(1919년 11월 1일 독립신문 24호 1면 독립완성 시기 中에서) --------------------------------------------------------------------- 우리 대한민족은 조국을 광복할 목적으로 맨손 혁명을 개시하여 3.1운동이 발 생하였고 중국 인민은 국권을 수복할 사상으로 일본 상품 배척운동을 열창하 여 5,4운동이 발생하였는데 그 동기가 학생층으로부터 발생된 것은 양쪽이 모 두 같다.(1922년 7월 1일 독립신문 131호 1면 中에서) --------------------------------------------------------------------- 1922년 10월경 나는 상해 하비로 보강리 24호 조상섭의 집에서 김구, 이유필, 조상섭, 최석순, 오영선, 여운형과 발기인이 되어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 다.(노병회 조직에 대하여 조동호 증인신문조서) --------------------------------------------------------------------- 일본의 정치가 미기행웅(尾崎行雄)군이 얼마 전에 경성에서 조선 문제를 강연 할 때에 “조선이 독립을 하면 중국과 같이 될 터이라”고 걱정을 하였다니 이곳만 한번 와보았으면 그 우려가 저절로 소멸될 것이다. 중국이 어떻단 말 이냐, 조선이 중국같이 될까 염려하지 말고 중국을 조선 같게 하지 말아 라.(1924년 10월 15일 동아일보 「전지행 1신」中에서) --------------------------------------------------------------------- 조선인의 처지는 기타 제국과는 특이하여 될 수 있는 대로 타인을 원조하고 다시 타인의 원조를 받아야 할 것이다.(1924년 10월 19일 동아일보 「전지행 3신」中에서) --------------------------------------------------------------------- 조선인의 동작에 대하여 일본인은 언뜻만 하면 인도하라고 요구하니 우리 국 가의 체면도 있거니와 인도야 어떻게 한단 말이오. 그런 때에는 대개 구속으 로 맞치는데 이 구속은 물론 도와주는 의미에서의 구속이외다. 지금 우리는 일본인이 조선인 문제를 아주 포기하기를 바라나니 두 사이에 있어서 서로 괴 로운 때가 많소이다.(1924년 10월24일 동아일보 「 전지행 4신」진위군총사령 외교총장 도상명(陶尙銘)씨를 방문하여 도상명의 말 中에서) --------------------------------------------------------------------- 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 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에 나타낼가. 손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뵈이지 아니한다.(11 월30일)(1924년 12월 7일 「전지행 20신」손문선생이 봉.직 전쟁후 승리하여 북경으로 입성하는 것을 보고) --------------------------------------------------------------------- 내가 6년반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십번 읽었고 많은 기도로 고통을 참았다. 성 경만큼 훌륭한 말씀이 없으며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1938년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광산에서) ------------------------------------------------------------------------- 공산당도 그렇지만 건준의 조직부도 대중적인 기반위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 들이 맡아야 한다. 나는 이미 그 소임에 합당치 않다.(1945년 8월 22일 이영 근에게 한 말(1990년 월간조선 9월호)) ---------------------------------------------------------------------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난 아해(아이)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 는 건가 이제 서로 원수가 됐으니 우리(남과 북)가 합(合)치려면(남북통일)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6.25 동란때 수원에서 친지들에게) ---------------------------------------------------------------------
-------------------------------------------------------------------------------- 독립운동가, 언론인, 정치가, 혁명가 호는 유정(榴亭)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백운리 299번지에서 출생. 본관은 풍양 조씨(豊壤趙氏) 회양 공파(淮陽公派) 중 청교파(靑橋派)이고 한성부서윤(漢城府庶尹)을 지내신 증 이조판서(贈 吏曺判書) 철명공(哲命公) (영의정 현명의 종형<領議政 顯命의 從兄>)의 7대 주손(胄孫)이신 명하공(明夏公) (1862-1900)과 고령 박빈(高靈朴彬)(1864-1945)여사의 3남 2녀 중 3남으로 출생하였다. 가세는 선산과 전답이 많아 대체로 부유한 편에 속했다. 소년 시에는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했으며 자라면서 신학문에 뜻을 두고 1908년 경성측량학교(京城測量學校)에 입학, 1910년 수료했다. 우리 나라를 섬 오랑캐에게 강탈당하고 백성들은 울분에 쌓여 있을 때 조동호는 동대문에 살던 몽양 여운형(夢陽 呂運亨)과 친분을 갖게 되면서 서로 뜻이 맞아서 함께 할 것을 약속하고 개성 이만규(李萬珪)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고 1914년 12월 하순 흰 눈이 펑펑 내리는 압록강을 건너 중국 남경(中國 南京)으로 망명하여 남경금릉대학 중문학부(南京金陵大學 中文學部)에 입학, 3년간 수학하면서 몽양의 권유로 기독교에 입문했다. 1917년 졸업, 상해(上海)에서 중국인 황자오(黃覺)가 경영하는 구국일보(救國日報) 기자로 채용되면서 언론인의 출발이 시작되었으며 중화신보(中華新報) 기자도 겸직했다. 박은식, 신규식 등이 조직한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에 이사(理事)로 참여하면서 섬 오랑캐에게 반만년의 역사와 화려한 금수강산을 강탈당한 조국을 되찾기 위하여 평생을 독립운동에 몸 바치게 된다. 1918년 조동호는 여운형, 한진교, 장덕수, 김철, 선우혁과 6인이 발기인이 되어 조선독립과 청년학생 교양을 목적으로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조직했다. 당시 파리 강화회의에 참석할 미국 윌슨 대통령의 특사인 크레인에게 협조를 얻어 윌슨 대통령에게 보낼 한국 독립에 관한 진정서 2통을 영문으로 작성했다. 또한 김규식을 대표로하여 강화회의에 제출할 「독립청원전문(獨立請願全文)」과 신한청년당의 취지서, 당헌, 당강을 작성하였으며 「신한청년(新韓靑年)」창간호에 실려있다. 창당시에는 6인이었으나 50명까지 당원수가 늘었다. 즉 신한청년당이 조직되면서 국내에서는 전국방방곡곡에서 3.1만세운동이 시작되었으며 3.1운동후 상해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 臨時政府)가 수립하게 되는 진원이 된다. 1919년 4월 상해 김신부로 22호에 신한청년당원들이 주축이 되어 조동호와 여운형, 이동녕, 이시영, 손정도 등 독립애국투사 29인이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다. 조동호는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 충청도(忠淸道) 의원과 국무위원(國務委員)을 겸직하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임시정부에서는「사료조사편찬부(史料調査編纂部)」를 설치하고 안창호, 이광수 등 10여명과 한일관계사료집(韓日關係史料集) 전4권을 편찬하였으며 임시정부 기관지로 이광수, 차이석, 백성욱 등과 같이 상해판 독립신문(獨立新聞)을 창간하여 성경(聖經)에서 그 자체(字體)를 따서 한글 활자를 고심 끝에 제조하고 철혈(鐵血), 냉열(冷熱), 철묵, 묵망, 첨구자(尖口子) 등의 필명으로 많은 논설을 썼다. 특히 「독립완성시기」, 「임시정부와 국민」, 「우리의 3.1운동과 5.4운동」, 「한중제휴의 필요」같은 논설은 유명했으며 「군소리」와 「곡중소(哭中笑)」란을 만들어 집필했다. 「독립완성시기」는 미,일 전쟁이 일어나야 우리나라가 독립이 되는 것으로 단정지었으며 미.일 전쟁은 필연고 일어나게 된다는 확신을 갖고 논설을 썼다. 유정 조동호는 민족의 앞날을 예견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평생을 받친 뜨거운 가슴의 독립운동가요, 곧은 언론인이였다. 우리 민족이 독립되는 그날까지 잠시도 펜을 놓지 않았던 인물이다. 또한 중국인들과 합동하여 독립운동에 도움이 되고자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를 설립하였다. 1921년 이동휘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국무총리로 취임하면서 독립운동에 러시아가 도움을 주겠다는 확답을 받고 이동휘 국무총리의 권고로 임시정부요인들인 조동호를 비롯하여 여운형, 이동녕, 노백린, 신규식, 박용만, 김규식, 조완구, 신채호, 최창식 등과 같이 고려공산당(高麗共産黨)에 가입 출판위원이 된다. 1922년 .10년후 독립전쟁을 개시한다는 목적으로 한국노병회를 창립하였다. 여운형, 김구, 이유필 등과 한국노병회(韓國勞兵會)를 창립하여 취지서, 회헌, 회측의 기초 위원과 회계 검사원역을 맡았다. 1923년 12월 귀국하여 동아일보 논설위원으로 입사하면서 많은 논설을 썼고 봉천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중국에 봉직(奉直) 전쟁을 취재하면서 종군기 전지행(戰地行)을 20회에 걸쳐 연재했다. 중국의 전쟁이 우리 민족에게 미치는 영향을 주내용으로 썼으며 마지막회에는 손문(孫文)씨가 민국원년(民國元年)에 북경(北京)에 다녀간후 13년간을 해외로 표류하다가 북경에 입성하는 모습을 보고 너무나 부러워서「아- 우리 이승만, 이동휘, 안창호 등 여러 선생들은 어느때에나 그 모습을 한성(漢城)에 나타낼가 손선생의 이번 행동이 남의 일 같이 보이지 아니한다.」(1924년 11월 30일 북경에서)고 동아일보 1924년 12월 7일자에 실려있다. 당시 동아일보가 이런 기사를 1면에 썼다는 것은 용감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1925년 4월 전조선 신문기자 대회를 개최한다는 기회로 17일 1시 「아서원」2층에서 일제경찰에 눈을 피해 조선의 독립을 열망하면서 조선공산당(朝鮮共産黨)을 창당하고 7인의 중앙집행위원과 선전부를 담당한다. 「코민테른」에 승인을 얻기위하여 조동호는 정대표, 조봉암은 부대표로하여 각기 모스크바에서 승인을 얻어내었으며 신의주사건을 계기로 귀국하지 못하고 상해 해외부를 설치했다. 1928년 상해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되어 취조를 받으면서 증거서류를 뜨거운 난로 속에 집어넣었으며 서울 경성지법에서 치안 유지법 위반과 증거인멸죄로 4년간을 서대문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이에 관한 기사는 당시 동아일보에 사진과 함께 대서특필되어 있다. 1932년 조선중앙일보(朝鮮中央日報)를 인수 확장하여 여운형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무기명으로 항일 논설을 계속 집필하였으며 다시 2년간을 신의주형무소에서 옥중생활을 했고, 또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생을 하게 된다. 1936년 손기정 선수의 일장기 제거사건에 배후인물로 결국은 조선중앙일보가 폐간하게 된다. 「조동호는 1917년 구국일보와 중화신보(2년), 독립신문(4년), 동아일보(2년), 조선중앙일보(4년)등 여러 신문에서 총 12~13년간 언론으로 왜인들에 간담을 서늘하게 했으며 우리 동포에게는 희망과 긍지를 안겨주었다.」 1938년 많은 옥중생활과 일제의 지나친 탄압으로 결국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에 친지가 경영하는 광산으로 피신하여 몸과 마음을 추수리게 된다. 당시 조동호는 회상하기를 「내가 6년반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십번 읽었고 많은 기도로 고통을 참았다. 성경만큼 훌륭한 말씀이 없으며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라고 회상했다. 1919년 상해 독립신문에 당시 조동호는 「독립완성시기」라는 논설로 (1919년 11월 1일 24호 1면) 「미,일 전쟁이 일어난다면 안목이 얕고 욕심많은 일본인은 한민족을 속이려다가 스스로가 속으니 민망한 웃음을 참지못하리로다. 일본은 필히 패망하고 「언제나 독립이되나」「언제나 저놈들이 다가나」하면서 우리 2천만 동포가 밤낮으로 바라고 축원하던 독립이 올 것이다라고 썼다.」 드디어 일제는 우리 한민족의 독립을 얼마나 열망했던지(?) 미국땅 하와이를 폭격하면서 2차대전이 일어난다. 이미 국제정세는 일제패망을 예견하였으니 우리는 해방을 맞이할 수 있다는 희망하에 1944년 8월초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마현리 속칭 마제라는 한강변에서 조동호, 여운형, 현우현 등 7,8명이 모여 천렵을 가장하여 모임을 갖게 되었다. 이로부터 며칠 후인 8월 10일 서울 경운동「삼광의원」현우현 집에 조동호와 여운형, 김진우, 현우현, 황운 등이 모여 비밀 결사인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을 정식으로 창건하여 조국 해방에 준비를 하게 된다. 건동에는 군사 위원회를 조직하고 농민 동맹을 조직했으며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내무부와 군사 위원회를 담당 비밀히 활동하다가 관철동집회소(貫鐵洞集會所)에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된다. 1945년 8월 15일 섬 오랑캐 왕이라는 작자가 겁먹은 목소리(연합군은 왜왕을 전범으로 사형시켰어야했다)와 떨리는 목소리로 연합군에게 항복을 하니 우리는 그렇게도 기다렸던 해방을 맞게 된다. 조동호는 해방 다음날인 8월 16일 서대문형무소에서 출옥한다. 해방과 동시에 건국동맹에서 건국의 모든 준비를 마친 건동 동지들이 건국준비위원회(建國準備委員會)를 조직하여 위원장에는 여운형, 조동호는 선전부장으로 추대되었고 장안파공산당에서는 책임비서로 추대된다. 그러나 그간에 일제의 많은 고문으로 인한 지병이 심화되어 사실상 활동이 불가능한 상태여서 6일후 8월22일 모든 직책에서 사의를 표하고 경기도 수원시 교동 35번지에 사는 누님 조동소(趙東昭)댁에서 신병을 치료하며 쉬게 된다. 당시의 상황을 건동에도 참여하였고 항일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충청북도 청원군 출신이며 일본에서 발행된 통일일보(統一日報) 창립자 이영근(李永根) (1919-1990)(대한민국 국민훈장 무궁화장 추서)은 1990년 월간조선 9월호에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기록에 의하면 “나는 일제시대부터 동향의 인연으로 친하게 사귀고 있었음으로 건준 조직부장 사임을 만류시키려고 찾아갔더니 조씨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당도 그렇지만 건준의 조직부도 대중적인 기반위에서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맡아야한다. 나는 이미 그 소임에 합당치 않다”고 하면서 미련없이 그만두워 버렸다. 8월16일 장안 빌딩의 목욕탕도 아닌 세면장 수돗물로 멱을 감고 감옥살이에서 묻은 때를 씻어내는 그러한 소박한 인물이었다. 「인공」에서는 인민위원의 한사람으로 각료명단에는 김구(金九)내무부장하에 차장(대리)으로 발표되었으나 다음해 2월 조직된 좌익계의 통일전선체 「민전」에서는 집행위원에도 선임되지 않고 공산당조직으로부터도 버림을 받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1946년 2월 어느 정도 몸을 추수린 유정 조동호는 친지의 주선으로 큰 한옥을 빌려 정치학교를 설립하고 후배와 정치인 지망생들을 위하여 교육사업을 시작한다. 위치는 안국동 105번지이며 정치학교 이름은 유정의 정치학교. 즉 유정정치학교(榴亭政治學校)였으며 처음에는 20~30명이었으나 장소가 협소한 관계로 100명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조동호는 하루 1시간 정도 강의를 하고 다른 선생들이 2~3시간 강의를 하였다. “정부라는 기관은 천년만년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무궁할 우리민족의 자유요 생명인 귀중한 것으로 그 임원되는 사람은 잠시 귀중한곳에 위탁받은 국민의 심부름꾼이다” 라고 상해 독립신문에 쓴 것이 있다. 주로 정치인은 국민의 어려움을 대신하여 봉사하는 것을 임무로 하고 동서고금의 훌륭한 정치인들의 행적을 가르쳤다고 한다. 유정정치학교는 조동호의 건강 때문에 끝까지 돌보지 못했으므로 지금은 어느 학교의 전신인지 분명치 않다. 당시「실업자동맹(失業者同盟)」위원장을 맡아 국민들의 경제 활동의 많은 힘을 썼다. 회원은 9만5천명이었다. 후배들이 “선생님을 좌익이라고 하는데 그렇습니까?”하고 물었을때 “맞는 말이다. 모두들 나를 좌익이라고 하고 좌익에서는 나를 변절자, 배반자라고 한다. 그 말이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내가 한 일은 우리 조국을 찾는 일이었으며 조국을 찾았으니 나는 승리자이다. 나는 인생의 성공자이며 내가 바라던 독립이 되지 않았는가, 지금 내가 할 일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이제 어떤 일도 할 힘이 없고 할 마음도 없다.”고 하였다. 1947년 4월 근로인민당(勤勞人民黨)이 조직되자 정치협의회 위원으로 추대되었으나 여운형이 7월 19일 사망하자 그 일도 그만 두었다. 1948년 5월 10일 제헌국회 선거 전에 김성숙(金星淑), 윤동명(尹東明)(근민당동지) 등이 수원누님댁에 있을때에 여러 번 찾아와 제헌국회의원에 출마하라고 종용했었다. 당시 수원시장(水原市長)으로 있던 조용구(趙龍九)(1906-1982)는 조동호의 조카(둘째형님의아들)로 수원에서는 유지로 있을때였으니 조용구도 여러 번 작은아버지에게 충분히 당선될 수 있다고 권했으나 조동호는 "나는 적임자도 아니며 건강도 좋지 않고 우리나라 독립으로 나는 내인생에 목표가 달성되었으니 내 할일은 다했다." 고 하면서 수원에서 출마하면 충분히 당선될 수도 있었는데 고사하고 말았다. 그때 김성숙은 "유정 선생님이 안하면 나도 안한다." 고 하며 김성숙도 출마하지 않았다.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祖國統一民主主義戰線) 에서는 자기들에게 협조하지 않는다며 조동호 ,박일원, 김재복, 김성숙, 장건상, 조봉암 등을 지적하여 「미제국의 유급간첩」이라고 중상모략 하고 이들은 「동요분자들」, 「비겁자들」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1950년 6월 25일 김일성(金日成)이 러시아를 등에 업고 남침을 했을때 조동호는 “김일성은 나이가 어려 철이 안난 아해(아이)이다. 백성을 다 죽이고 어쩌자는 건가 이제 서로 원수가 됐으니 우리(남과북)가 합(合)치려면(남북통일) 앞으로 100년은 족히 걸릴 것이다.” 라고 예견하면서 한탄을 했다. 6.25 전란이 일어난지도 이미 반세기가 지났건만 통일될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그때 어찌 그렇게 예견했을가 조동호는 그 후부터 수원 누님 댁과 고향인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을 오가면서 투병생활을 하다가 1954년8월 15일(음) 한 많은 그의 일생을 마감했다. 민족의 해방을 위한 투사로, 올곧은 성품을 보여준 선비로, 정론을 추구하는 언론인으로, 세상을 먼저 내다보는 예견자로 자신의 삶을 바쳤던 유정 조동호. 시간은 흘러 그가 세상을 떠난지도 50여년이 지났지만 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변한 것이 없다. 그가 당당한 붓으로 가르쳤지만 과연 우리의 언론은 그에게 얼굴을 들 정도로 당당한가. 그가 힘겨운 삶을 사는 민중에게 마음을 쏟아 부었지만 지금의 정치가들은 민중의 아픔을 얼마나 알고 있는가. 아니, 그러한 질문이 너무도 크고 방대하다면 조금 작게 나 자신에게 물어보라. 과연 나는 조상들이 힘겹게 얻어낸 광복의 땅 위에서 얼마나 당당하게 발을 내 딛을 수 있는가. 얼마나 당당하게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볼 수 있는가. 우리의 후세들은 우리들을 분명 기억 할 것이다. 그들에게까지 부끄러워서야 되겠는가. 적어도 유정은 우리에게 당당하지 않은가. 자녀는 2남 1녀이며 묘소는 경기도 이천군 마장면 해월리 산24번지에 모셔져있다.
[민족반역자처단협회]
작성&출처-민족반역자처단협회(http://cafe.daum.net/koko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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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사 유언』
조동호 호:유정 (1892-1954)
★혁명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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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7.08 1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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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김일성이넘..ㅠㅠ 묵념,,,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님 께서 지금의현실을 보신다면 얼마나 원통해 하실까 부끄럽기 짝이없읍니다
......이나라를..도와주세여...(__)
유정 조동호선생님은 해방 60년 만에야 '독립지사로 서훈돼셨습니다. 31년동안 '섬 오랑캐'와 목숨을 걸고 투쟁하셨는데, 좌파라는 누명을 씌우고 그렇게도 '서훈'을 꺼려하더니.... 드디어 2005년 3,1절날 빛을 보셨습니다. 왜정시에 국내에서 투쟁하신분들을 싸잡아 '좌파'라고 했으니,......
빼앗긴 나라를 찾으시려 목숨울 걸고 투쟁하시다 3차에 걸쳐 7년의 옥고를 치루신 분입니다. 민족의 큰 어른을 그처럼 폄하하더니....
내가 6년반동안 옥중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몰랐다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내가 옥중에 있으면서 성경을 몇 십번 읽었고 많은 기도로 고통을 참았다. 성경만큼 훌륭한 말씀이 없으며 누구나 읽어야 할 필독서이다.(1938년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도천리 광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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