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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코파이는 제단에, 아침햇살은 냉장고에
철저한 현지화로 공략
안준현의 아세안 레터는
안준현 하노이 특파원이 동남아시아 경제, 산업, 정치, 사회 소식을 전합니다. 여름휴가지로 익숙했던 동남아시아는 이제 한국 대기업 생산기지가 자리 잡고 유학과 취업 교류가 늘면서 경제·산업 비중이 빠르게 커지고 있습니다. 이 일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일을 현지에서 생생하게 전할 계획입니다.
하노이시 호안끼엠구에 사는 응우옌 티 린(21)씨의 하루는 편의점에서 시작됩니다. 하노이의 한 대학 경영학과 2학년인 린씨는 방학 중이지만 아침 보충 수업을 듣기 위해 들르는 학교 앞 편의점 서클K에서 어김없이 손에 쥐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한국산 쌀 음료 ‘아침햇살’ 한 병(500㎖)입니다. 밥 먹을 시간도 없고 빈속으로 강의실에 들어가기도 싫은 그에게 이 음료 한 병이면 아침 식사가 됩니다. 린씨는 “콜라보다 비싸지만 몸에도 좋고 달지 않아서 좋다. 한국 여자들이 마시는 음료라는 이미지도 있다”고 했습니다.
린씨가 매일 집어 드는 아침햇살 500㎖ 한 병의 가격은 약 2만동(한화 약 1100원)입니다. 베트남에서 현지 생산 콜라 500㎖가 4000∼5000동(한화 약 220∼280원) 수준임을 감안하면 4∼5배에 달하는 프리미엄 가격입니다. 그럼에도 린씨처럼 아침햇살을 아침 식사 대용으로 마시는 베트남 젊은 층이 빠르게 늘고 있습니다.
한국에선 마니아 음료, 베트남에선 국민 음료
아이러니한 것은 이 음료의 정체입니다. 아침햇살은 1999년 한국 웅진식품이 세계 최초 쌀 음료로 출시했지만, 정작 한국에서는 호불호가 갈리는 마니아 음료에 그쳤습니다. 모기업 웅진그룹이 극동건설 부도로 흔들리자 2013년 사모펀드에 950억원에 넘겨졌고, 2018년엔 대만 식품 대기업 퉁이(統一)그룹에 2600억원에 재매각됐습니다. 지금 베트남 젊은 층이 열광하는 ‘한국 쌀 음료’는 사실상 대만 기업 소유인 셈입니다.
베트남 진출은 2014년 시작됐습니다. 웅진식품은 탄산음료보다 건강하고 자극이 덜한 음료를 선호하는 동남아 시장을 공략하기로 하고 베트남에 먼저 발을 디뎠습니다. 판단은 적중했습니다. 현지 전통 단 음료 ‘쩨(Chè)’처럼 곡물 베이스의 달지 않은 음료에 익숙한 베트남인 입맛에 딱 맞았던 것입니다. 2015년 120만병으로 시작한 판매량은 9년 만에 83배 성장해 2024년 4월 기준 베트남 누적 판매량 1억1000만병을 돌파했습니다. 연간 판매량만 1000만병 수준으로, 전체 아침햇살 수출의 80% 이상을 베트남이 책임지는 구조입니다.
인기가 높아지자 라인업도 확장됐습니다. 흰쌀 아침햇살에 이어 흑미 아침햇살, 아침대추까지 베트남 시장에 속속 등장했습니다. 편의점 냉장고 한 칸을 통째로 차지하던 아침햇살이 이제는 두 칸, 세 칸씩 늘어나는 모습입니다. 1.5ℓ 대용량 페트병은 빈마트·빅씨 등 대형마트 음료 코너 중앙 진열대에 자리 잡았고, 기숙사생들이 일주일치를 한꺼번에 카트에 담아가는 단골 품목이 됐습니다. 서클K·GS25·패밀리마트 등 어느 편의점에 가도 아침햇살이 빠져 있는 곳을 찾기 어려울 정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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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레오 파이와 함께 제사상에 올라와 있는 초코파이의 모습. /베트남 온라인 커뮤니티
기자가 직접 하노이 시내 한 대형 마트를 찾아가 보니, 이런 인기는 진열대 규모부터 확연히 드러났습니다. 창고형 매장에서는 한국에서 통째로 실려 온 웅진식품의 1.5ℓ 12병들이 박스가 팔레트째 쌓여 있었는데, 상자 옆면에는 ‘1.5L X 12PET’와 함께 ‘베트남 수출용’이라는 문구가 선명하게 찍혀 있었습니다. 바로 옆으로는 네슬레의 ‘라비에+(LaVie+)’, 일본 기술을 내세운 ‘아이온라이프(I-on Life)’, 현지 브랜드 ‘다인타인(Danh Thanh)’ 등 국내외 생수·기능성 음료 박스들이 나란히 쌓여 있어, 아침햇살이 로컬 생수 브랜드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위치에 올라섰음을 보여줬습니다.
일반 매대에서는 할인 프로모션의 강도가 눈에 띄었습니다. 지난 8일 롯데마트에서는 ‘로떼 막스 세일’ 판촉전이 한창이었는데, 흑미 아침햇살(N.GAO DEN WOONGJIN) 1.5ℓ 제품이 정가 6만9900동에서 3만9900동으로, 오리지널 아침햇살(NUOC GAO WONGJIN) 1.5ℓ 제품은 5만6000동에 판매되면서 ‘한 병을 사면 사과맛 음료 500㎖ 한 병을 더 준다’는 1+1 프로모션까지 걸려 있었습니다. 콜라·에너지드링크 등 다른 음료 브랜드들 사이에서 아침햇살에만 대형 세일 판촉물이 두 개나 붙어 있는 모습에서, 현지 유통업체들이 이 제품을 얼마나 공들여 미는지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베트남 현지 식품 유통 관계자는 “아침햇살은 이제 단순한 수입 음료가 아니라 베트남 젊은 층의 라이프스타일 아이템이 됐다”며 “탄산음료 일색이던 편의점 냉장고 판도를 바꾼 거의 유일한 K음료”라고 했습니다.
베트남 국민 편의점으로 통하는 서클K 매장의 냉장고를 열어봐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습니다. 500㎖ 기준으로 오리지널 아침햇살과 흑미 아침햇살이 각각 3만7000동에, 대추 맛인 ‘아침대추’가 나란히 진열돼 있었습니다. 아침대추 앞에는 “1병을 사면 사과 맛 워터진 음료 500㎖를 6000동 할인된 가격에 살 수 있다”는 묶음 판촉 태그가 붙어 있었는데, 정가 3만5000동이던 아침대추 자체도 2만9000동으로 할인 판매 중이었습니다. 기린(Kirin)의 ‘라테’ 시리즈(초콜릿·두리안·복숭아맛)나 TH트루밀크 등 쟁쟁한 유음료·과즙 음료 브랜드들 사이에서도 아침햇살 시리즈만 세 가지 맛이 한 줄을 차지하고 있어, 편의점 유음료 코너의 터줏대감이 됐음을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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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노이 롯데마트에 진열된 아침햇살. /사진=안준현 특파원
“조상님 드셔보세요” 제사상에 오르는 초코파이
아침햇살이 ‘마시는 국민간식’이라면, 오리온 초코파이는 그야말로 베트남인의 삶 곳곳에 스며든 ‘먹는 국민간식’입니다. 베트남 가정집 제사상이나 집 앞에 복을 기원하며 차려놓는 단상 위에 낯익은 빨간 상자가 놓여 있는 모습은 이제 특별한 광경이 아닙니다. 초콜릿 과자가 조상을 모시는 제단에 오르는, 한국인의 시각에서는 다소 생경한 풍경입니다.
초코파이가 베트남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95년입니다. 초기엔 고전했습니다.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베트남에서 초콜릿은 변질이 쉬워 현지 소비자들에게 외면받았기 때문입니다. 오리온은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연구를 거듭했습니다. 한국 제품과는 다른 배합을 적용해 고온에서 잘 견디는 내열성 유지를 쓰고, 수분 유지를 위해 기능성 올리고당을 배합했습니다. 한국에서 판매되는 초코파이가 1단계 숙성 공정만 거쳐 완성되는 것과 달리, 베트남용 초코파이는 서로 다른 온도에서 두 차례 숙성 공정을 거치도록 설계돼 있습니다. 그 결과 섭씨 30도가 넘는 더위에도 유통 중 변질되지 않고, 진열돼도 초콜릿이 포장지에 늘어붙지 않으면서 입안에서는 잘 녹는 식감을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기술적 현지화 못지않게 중요했던 건 정서적 코드였습니다. 베트남에는 한국의 ‘정(情)’과 유사한 ‘띤깜(정감)’ 문화가 있는데, 오리온은 이 개념을 그대로 패키지 마케팅에 활용했습니다. 그 결과 초코파이는 베트남 명절에 가족·친지·가까운 사람들끼리 주고받는 선물로 자리 잡았고, 제사상은 물론 약혼식·결혼식 하객 답례품으로도 인기를 끌게 됐습니다.
실제로 하노이의 한 가정집 제단을 촬영한 사진을 보면, 조상의 영정 사진과 향로, 노란 국화 화분 사이로 초코파이 상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화려하게 조각된 목재 제단과 금박 글씨의 대련(對聯) 장식 한가운데, 서양 과자 브랜드도 한식 다과도 아닌 한국산 초콜릿 파이가 조상을 모시는 상차림의 일부로 당당히 자리 잡고 있는 셈입니다.
매장에 진열된 초코파이의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기자가 확인한 제품만 해도 오리지널 격인 ‘띤(Tình)’, 카카오 함량을 높인 ‘덤(Đậm)’, 여름 한정으로 나온 냉동 수박맛(수박 그림에 ‘Đông lạnh(냉동)’ 표기), 딸기맛(Dâu Tây), 당 함량을 절반으로 줄인 ‘레스 슈거(Less Sugar 50%)’, 말차맛(Matcha)까지 여섯 종류에 달했습니다. 계절과 건강 트렌드, 현지 입맛까지 반영해 맛을 계속 세분화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성과는 숫자로도 확인됩니다. 오리온 초코파이의 베트남 파이 시장 점유율은 70%를 웃돌고, 복숭아·요거트·수박·진한 초콜릿 맛 등 현지 입맛에 맞춘 제품들이 잇따라 히트하면서 매출도 매년 늘고 있습니다. 베트남 내 초코파이 매출은 지난해 처음으로 연간 1300억원을 돌파했으며, 누적 매출은 1조1300억원에 달합니다. 오리온 관계자는 한국 설에 해당하는 베트남 최대 명절 ‘뗏’을 앞두고 초코파이와 ‘쿠스타스 꼼’(카스타드) 선물 세트가 불티나게 팔린다고 전했습니다.
최근에는 훈훈한 미담도 화제가 됐습니다. 하노이 다이남대학교에 재학 중인 응우옌 뚜안(19)씨가 땀다오 산에서 등반 중 길을 잃어 37시간 동안 조난됐다가 무사히 구조됐는데, 계곡물과 함께 지니고 있던 초코파이로 버틴 사실이 알려지며 현지에서 ‘생존 간식’으로 화제가 됐습니다. 베트남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등산할 때 초코파이를 꼭 챙기자”, “초코파이를 비상용 생존 키트에 추가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까지 돌았습니다. 오리온 베트남 법인은 이 학생을 직접 찾아가 신제품과 자사 과자를 선물하며 화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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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클K에서 판매 중인 붕어싸만코. /사진=안준현 특파원
붕어 모양에 반한 베트남… 붕어싸만코
36도를 웃도는 베트남 여름철 국민 아이스크림 자리를 지키는 것은 빙그레의 ‘붕어싸만코’입니다. 지난해 베트남에서만 약 670만개가 팔려나갔고, 금액으로는 약 25억원 규모로 붕어싸만코 해외수출 총액의 42%에 달하는 수치입니다. 해외에서 팔린 붕어싸만코의 절반 가까이를 베트남 소비자가 사 먹은 셈입니다.
붕어싸만코는 베트남에서 판매되는 한국산 아이스크림 브랜드 가운데 매출 1위를 차지하고 있으며, 현지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붕어 모양의 독특한 외형이 소비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으로 분석됩니다. 가격은 베트남 로컬 브랜드의 제과형 아이스크림보다 2배가량 비싼데도 현지에서 연평균 600만개 이상 팔리는 메가 브랜드로 성장했습니다. 빙그레 관계자는 한류 영향으로 젊은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를 끌면서 SNS에 인증샷을 찍어 올리는 소비자도 늘었다고 전했습니다.
같은 서클K 매장의 냉동고를 들여다보면 붕어싸만코의 현지 위상이 더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현지에서는 ‘싸 만코(SAMANCO)’라는 이름으로 그린티맛·믹스베리맛·딸기맛 등 세 가지 이상의 맛이 진열돼 있었는데, 바로 위에는 ‘베스트셀러(Best Seller)’라고 적힌 파란 배너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 배너 아래 나란히 놓인 브랜드가 하겐다즈, 오레오, 킷캣, 비나밀크(Vinamilk) 등 글로벌·현지 유명 브랜드였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붕어 모양 과자에 아이스크림을 채운 이 한국산 제품이 세계적 아이스크림·과자 브랜드들과 나란히 ‘잘 팔리는 제품’ 칸에 오를 만큼 현지 냉동고에서 확고한 입지를 굳혔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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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한 가정 제단에 오른 오리온 초코파이. /오리온
왜 유독 베트남에서 ‘K국민간식’이 됐나
아침햇살·초코파이·붕어싸만코까지, 한국에선 흔하디흔한 이 제품들이 베트남에서 유독 ‘국민간식’ 반열에 오른 배경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철저한 현지화입니다. 초코파이의 2단계 숙성공정처럼, 열대 기후와 현지 유통 환경에 맞춘 기술적 조정이 뒷받침됐습니다.
문화적 접점입니다. 초코파이의 ‘정’과 베트남의 ‘띤깜’, 곡물 음료에 익숙한 입맛과 아침햇살이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졌습니다.
한류라는 후광입니다. K팝과 드라마를 통해 형성된 한국에 대한 호감이 소비로 이어지면서, 웬만한 로컬 제품보다 비싼 가격에도 지갑을 열게 만드는 힘이 됐습니다.
정작 한국에서는 마니아 제품이거나 어릴 적 군것질에 불과했던 이 간식들이, 바다 건너 베트남에서는 제사상에 오르고 생존 간식으로 회자되며 전혀 다른 위상을 갖게 된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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