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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강해(14) 2023. 10. 22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
느헤미야8:1-12
<사람을 세우는 느혜미야>
느헤미야 두 가지 소명을 가지고 예루살렘 성에 왔습니다.
하나는 허물어진 예루살렘 성벽을 다시 세우는 소명이었습니다. 수많은 내외부의 방해 공작에도 느헤메야는 훌륭하게 자신의 소명을 완수하였습니다. 52일 만에 성벽을 완공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또 하나의 소명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예루살렘 성읍을 ‘하나님의 성읍’으로 회복하는 소명이었습니다. 즉, 느헤미야는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안정적인 성전 제사를 통해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길이며, ‘제사장 나라’의 비전을 실현하려는 소명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위한 첫걸음은 적재적소에 사람을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지어진 성벽을 수호할 문지기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봉사할 ‘노래하는 자들’(성전 찬양대)과 ‘레위 사람들’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바빌로니아 땅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스룹바벨과 같이 1차로 고향 땅에 돌아온 사람들의 명부(족보) 명부를 발견해서 명부에 없는 부적격 제사장들을 걸러 내였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도와 일할 행정 책임자 두 사람을 세웠습니다. 자신의 동생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 ‘하나냐’을 세었습니다. 그들은 능력도 있었지만, 충성스럽고 누구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중요 보직에 사람을 세우는 작업을 마쳤습니다.
<일곱째 달 초하루>
성벽을 세우고, 사람을 세웠습니다. 이제 세 번째 세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말씀을 세우는 것입니다. 1절 “이스라엘 자손이 자기들의 성읍에 거주하였더니 일곱째 달에 이르러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져오기를 청하매.”
매우 중요한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학사 에스라였습니다. ‘학사’란 ‘율법을 가르치는 교사’란 뜻입니다.
에스라는 느헤미야보다 14년 먼저 ‘두 번째 포로귀환의 지도자’로서 예루살렘에 돌아온 사람이었습니다.
에스라서 7장을 보면, 에스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습니다.
스7:2 “살룸의 현손이요 사독의 오대 손이요 아히둡의 육대 손이요.”
6절 “이 에스라가 바벨론에서 올라왔으니 그는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도우심을 입음으로 왕에게 구하는 것은 다 받는 자이더니.”
10절 “에스라가 여호와의 율법을 연구하여 준행하며 율례와 규례를 이스라엘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하였었더라.”
에스라는 우선 사독의 5대 손으로 정통 제사장 가문에서 자라난 제사장이었습니다.
또한, 그는 모세의 율법에 익숙한 학자였습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일에 헌신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자신의 삶에 적용하려고 애를 썼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치기로 결심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지난 14년 동안 말씀을 연구하고 또 가르치는 일에 최선을 다해 왔지만, 전국적인 부흥 운동을 끌어내지는 못했습니다. 그것은 아직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완전히 분위기가 바뀌었습니다. 예루살렘 성벽 복원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던 일이 현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기적과 같은 일이 백성들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갈급함을 불러일으켰습니다. 느헤미야뿐 아니라 온 백성들의 마음에 이 도성을 ‘하나님의 성읍’으로 만들어야 하겠다는 열망에 불타올랐습니다.
에스라는 바로 이때를 위해 준비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준비된 사람을 쓰십니다. 하나님을 그를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대적인 회개운동과 부흥을 이끌어 내셨습니다.
초대교회 시절, 하나님은 ‘이방인 선교’를 위해 그 당시 헬라 학문에 능통한 사울(바울)을 택하여 사용하셨습니다.
때마침 일곱째 달 초하루가 돌아왔습니다. 이스라엘의 달력에 따르면 신년은 가을에 시작되었는데 여기서 일곱째 달 초하루가 바로 그 날이었습니다(출애굽을 기념).
레23:23-25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4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일곱째 달 곧 그 달 첫 날은 너희에게 쉬는 날이 될지니 이는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요 성회라/ 25 어떤 노동도 하지 말고 여호와께 화제를 드릴지니라.”
그러니까 예루살렘 성벽도 방금 완공되었고, 새해도 된 데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날은 모두가 노동을 하지 않고 쉬며 나팔을 불어 기념할 날이라 했으니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예루살렘 성벽의 동쪽 편에 있는 문)에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입니다(나팔절).
마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새해를 맞기 위해 ‘신년맞이 타종행사’를 보기 위해 종로 ‘보신각’에 모이는 것과 비슷합니다. 아니면 첫 해맞이를 보려고 정동진이나 경포대로 몰리는 것과 비슷합니다.
더군다나 유대인들에게는 7월은 아주 중요한 달입니다. 이달 10일은 속죄일이고, 15일은 초막절입니다. 말하자면 성벽 완공과 더불어 하나님 앞에서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시기였던 것입니다.
<말씀을 사모하는 백성들>
수문 앞 광장에 모인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책을 가져오셔서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요청을 들은 에스라는 얼마나 기뻐했을까요? 전에는 에스라가 주도하여 가르치려 하였으나 잘 먹히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스스로 사모하여 말씀을 배우려고 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 한국교회에도 이런 말씀을 사모하는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우리 사도교회 성도님들도 자발적으로 함께 모여서, ‘목사님, 우리에게 성경을 가르쳐주세요’라고 간곡하게 요청한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우리 교회가 얼마나 달라지겠습니까?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럼 수문 앞 광장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2-3절 “일곱째 달 초하루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회중 앞 곧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이르러/ 3 수문 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정오까지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서 읽으매 뭇 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수문 앞 광장에는 남자나 여자나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나와서 회중 앞에 섰습니다. ‘모세의 율법책’은 모세가 기록한 다섯 권의 책(‘모세 오경’ -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가리킵니다. 에스라는 그 말씀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설교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읽은 것입니다.
그런데 ‘새벽부터 정오까지’, 그러니까 여섯 시간 동안 율법을 낭독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그 자리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모두 ‘귀를 기울였다’고 합니다. 당시는 누구나 율법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한 말씀이라도 놓칠세라 아주 ‘주의 깊게’, ‘마음을 써서’ 들은 것입니다.
뒤에 있는 18절을 보면, ‘첫날부터 끝날까지 날마다’ 초막절 기간(일주일) 내내 이렇게 율법책을 읽었다고 되어 있습니다(느8:18).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하루에 여섯 시간씩 일주일 동안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인다고 하는 것은 정말 기적과도 같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도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마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한 눈도 팔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했던 것입니다.
<말씀 앞에 일어서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여러분처럼 무슨 편안한 의자에 앉아서 그렇게 말씀을 들은 것이 아닙니다.
4-5절 “그 때에 학사 에스라가 특별히 지은 나무 강단에 서고 그의 곁 오른쪽에 선 자는 맛디댜와 스마와 아나야와 우리야와 힐기야와 마아세야요 그의 왼쪽에 선 자는 브다야와 미사엘과 말기야와 하숨과 하스밧다나와 스가랴와 므술람이라/ 5 에스라가 모든 백성 위에 서서 그들 목전에 책을 펴니 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일어서니라.”
백성들은 학사 에스라 율법책을 낭독할 나무 강단을 특별히 만들었습니다. 나름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는 뜻입니다. 또 에스라가 율법책을 읽을 때, 그의 양옆에 열세 명의 영향력 있는 지도자들을 서 있게 했는데 그것은 그 행사의 위엄과 진지성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행사를 얼마나 중요한 일로 여겼는지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중요한 국가의 기념행사가 있을 때에, 단상에 그 행사에 걸맞은 지도자 되는 사람들이 자리합니다. 그 행사의 권위를 높여주는 것입니다.
한편, 율법책을 펼 때에 모든 백성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일어섬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최대한의 존경심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그냥 성경 몇 절 읽는 동안만 서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새벽부터 정오까지 6시간 내내 그렇게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릴 때 목사님의 설교가 30분만 넘어가면 몸을 비틀고 시계를 보며 다른 생각을 하곤 합니다. 말씀에 관심이 없고 형식적으로 예배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영혼이 만족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영적인 기쁨이 없습니다.
예전 중국 선교사에게서 들은 이야기입니다. 자유롭게 예배할 수 없으니 예배시간과 말씀을 오히려 더욱 사모한답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무려 3시간 동안 드렸습니다. 그 사람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 북한의 지하교회에서도 동일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너무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가 있기에, 그리고 너무 편한 환경을 가지고 있기에,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갈급함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또, 가끔씩 에스라가 하나님을 송축하면 백성들은 손을 들고 ‘아멘, 아멘’하면서 응답했습니다.
6절 “에스라가 위대하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매 모든 백성이 손을 들고 아멘 아멘 하고 응답하고 몸을 굽혀 얼굴을 땅에 대고 여호와께 경배하니라.”
그리고 몸을 굽혀서 얼굴을 땅에 대고 하나님께 경배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하루 여섯 시간 동안 일주일 내내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였던 것입니다.
저도 이 말씀에 감동을 받아, 다음 주일부터 설교를 여섯 시간 하면 어떨까 생각 중입니다.
<레위 사람들의 통역>
그런데 뜻하지 않은 문제가 있었습니다.
7-8절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하나님의 율법은 히브리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에 낭독도 히브리어로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람들은 칠십 년간 남의 나라 땅에서 남의 언어로 살아야 했기에 히브리어를 많이 잊어버렸을 수 있습니다. 또 잡혀가지 않고 남아 있던 사람들도 당시의 국제적인 외교 언어였던 아람어를 일상어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스라가 읽는 히브리어 율법서를 많은 사람이 제대로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유다 백성이 히브리어로 낭독되는 율법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레위 사람들이 통역하며 설명까지 해주었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을 듣는다고 다 이해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것도 귀한 일이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읽은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공부 모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회개하는 백성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은 백성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9절 “백성이 율법의 말씀을 듣고 다 우는지라 총독 느헤미야와 제사장 겸 학사 에스라와 백성을 가르치는 레위 사람들이 모든 백성에게 이르기를 오늘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 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으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울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율법을 준행하지 않았고, 율법을 어기어 우상숭배를 하고 그 죗값으로 70년 동안 포로가 된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말씀 앞에 무너지며, 자신들의 가슴을 치며 통회하는 마음으로 회개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 때의 한 장면을 읽어드리겠습니다. “길선주 장로의 설교가 있은 뒤, 집으로 돌아갈 사람은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근 6, 7백 명이 기도하기 위해 남아 있었다. 기도하던 중 갑자기 길 장로가 일어나 자신은 형제들을 질시했을 뿐만 아니라 특히 방위량 선교사를 극도로 미워했음을 회개한다고 하며 보기에 비참할 정도로 땅바닥에 굴렀다. 그러자 한 교인이 또 일어나 자신의 죄를 자복하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음란과 증오, 특히 자기 아내를 사랑하지 못한 죄뿐만 아니라 일일이 다 기억할 수 없는 죄를 자복하였다. 그는 기도하며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울었고 온 회중도 따라 울었다. 우리는 그 순간,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 있음을 분명하게 느꼈다.”([한국 기독교의 역사]. pp.271)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거룩하신 말씀 앞에 서게 되면 사람들은 자신이 얼마나 큰 죄인인지 깨닫게 됩니다. 지금 수문 앞 광장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동안 자신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제 마음대로 살았는지 깨닫게 되면서, 하나님께 회개의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국교회가 양적으로 성장했지만, 점점 부패해진 이유는 말씀에 따른 진정한 회개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시대의 강퍅함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마11:16~17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일부 인기 있는 설교자들은 설교가 아닌 만담을 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웃고 박수치며 좋아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없습니다. 하나의 쇼가 돼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삶의 변화가 없습니다. 한국교회의 가장 큰 위기는 말씀은 듣지만 열매가 없다는 것입니다. 삶의 변화가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마다 회개의 눈물이 있기를 축원합니다.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그러자 느헤미야와 에스라가 “오늘은 너희 하나님의 성일이니, 슬퍼하지 말며 울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회개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회개할 날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앞으로 그들은 대속죄일을 앞두고 금식하며 회개하게 될 것입니다(9~10장의 내용). 그러나 오늘은 하나님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그리고 기뻐하되 혼자서 기뻐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기쁨을 나누라고 말씀하십니다.
10~12절 “느헤미야가 또 그들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되 준비하지 못한 자에게는 나누어 주라 이 날은 우리 주의 성일이니 근심하지 말라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하고/ 11 레위사람들도 모든 백성을 정숙하게 하여 이르기를 오늘은 성일이니 마땅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 하니/ 12 모든 백성이 곧 가서 먹고 마시며 나누어 주고 크게 즐거워하니 이는 그들이 그 읽어 들려 준 말을 밝히 앎이라.”
‘가서 살진 것을 먹고 단 것을 마시라’는 말은 잔치를 벌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혼자 먹고 마시지 말고, 미처 음식을 준비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함께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초대교회도 마찬가지 - 행2장)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 아주 중요한 교훈을 주는 말씀입니다.
주일날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부활의 기쁨에 참여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감사한 날입니다.
회개는 주일날 교회에 와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분은 꼭 교회에 오셔서만 회개 기도를 하십니다. 교회에 오시기 전에 주중에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일은 가벼운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용서받은 기쁨을 누리시는 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맺는 말씀 -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특별히, 10절 말씀 중에 제 마음을 사로잡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는 것이 너희 힘이니라”라는 말씀입니다.
‘힘’은 에너지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이 우리 삶의 원동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살아갈 때, 어떤 시험이나 어려움이 와도 담대할 수 있습니다.
기쁨이 고난을 이기게 합니다.
감사가 시험을 이기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주 안에 있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고백했습니다.
롬8:35~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6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오늘은 우리 하나님의 성일, 곧 주일입니다. 주님의 부활을 기뻐하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내 죄가 사해졌음을 인정하는 날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았음을 고백하는 날입니다.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감격하는 날입니다.
보혜사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감사하는 날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이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구원의 은혜를 기뻐하셔서, 한 주간 살아가실 용기를 얻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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