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수화(樹話) 김환기가 뉴욕에 첫발을 디딘 것은 1963년 10월 20일이었다. "늦게 나가서 커피 두 잔에 토스트 두 쪽 먹고 또 커피 한 잔(한 홉 남짓 드는 휴대용 종이컵에 준다). 커피는 10선(仙·센트), 빵도 10선. 이 사람들 사는 것을 보니 그저 내버리기 위해 사는 것 같다." 일기에서 수화는 이국 생활의 고단함 속에서 샘솟는 예술에의 열정을 숨김없이 털어놓는다.
▶"오늘은 죽자 사자 일을 했다. 그러곤 거의 완성돼 가는 그림을 부숴버렸다. 용기가 필요하다. 부수는 용기. 자잘한 것을 뭉개버리고 커다란 주제만 남겨놓았다. 행결 좋아졌다." 견디기 힘든 것은 어렵게 탄생시킨 작품을 알아주지 않고 자기들 잣대로만 평가할 때였다. 뉴욕타임스가 "작품에 아시아의 흔적은 없고 미국 추상표현주의 영향이 강하다"라고 했을 때 그는 썼다. "우울한 심정. 하지만 이대로 죽어도 좋다. 꿈을 이루고 귀국해야지."
▶수화가 한국을 떠날 때 그는 홍익대 미술대학장이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이었다. 안정된 미래를 훌훌 털어버리고 그는 50 나이에 자신의 예술적 갈증이 인도하는 미지의 세계에 몸을 던졌다. 조선의 달항아리와 민화에 담겨있는 한국적 정서를 어떻게 세계인이 공감할 수 있는 조형 언어로 표현할까가 그의 꿈이었다.
▶수화의 뉴욕 생활 11년이 가능했던 것은 아내 김향안이 곁에 있어준 덕이었다. 시인 이상(李箱)의 연인이기도 했던 김향안은 수화에게 끊임없이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은 뮤즈였다. 수화는 김향안을 '향(鄕)'이라고 부르며 "애인이 있는 곳이 고향인 것 같아. 조국이 더 큰 거라면 사랑하는 사람은 조국이기도 해"라고 했다. 1974년 7월 25일 수화는 뇌일혈로 쓰러져 자신이 좋아하던 뉴욕의 산 언덕 묘지에 묻혔고, 김향안은 그로부터 꼭 30년 후 수화의 곁에 묻혔다.
▶수화와 김향안 부부의 유해가 수화의 고향인 전남 신안 안좌도에 돌아온다. 신안군은 2일 수화 부부 유해를 안좌도로 이장하는 협약을 유족들과 맺는다. 안좌도 지주 아들이었던 수화는 아버지가 죽자 소작인들 빚을 전부 탕감해주고 스스로를 지주의 굴레에서 해방시켰었다. 무수한 점으로 이뤄진 수화의 추상 그림들은 이제 '입자의 교향악' '생명의 전율'이란 평가를 서양인들로부터 받는다. 자신을 버리고 부숨으로써 다시 태어나 세계적 예술가로 우뚝 선 수화의 사후(死後) 귀향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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