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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행전 강해(16) 2024. 10. 20
소리를 높여 기도하다
사도행전 4:23-31
<일산서지방 성지 순례>
후원해 주시고 기도해주셔서 일산서지방 주관 ‘튀르키에, 그리스 성지 순례’를 은혜중에 마치고 돌아왔습니다. 주일예배를 인도해 주신 김명관 목사님, 애찬으로 섬겨주신 장로님과 권사님 가정에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선교 여행은 튀르키에(소아시아)에 있는 7 교회 중에 몇 교회, 그리고 사도 바울의 선교 지역을 방문하는 일정이었습니다. 배우고 깨달은 것은 차츰 사도행전을 강해하는 동안 함께 나누겠습니다.
또, 여행은 ‘나만 옳다는 것은 내려놓는 과정’이라고 합니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색다른 그들의 생활 방식과 습관을 익히면서, 서로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며, 사람과 사회를 보다 폭넓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많은 여행을 추천드립니다.
그리고 이번 여행 중, 우리 일산서지방에 속한 목회자들과 사모님들과 많은 교제의 시간을 쌓을 수 있어 좋았습니다.
<지난 시간 요약>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걸인’을 고쳐준 일로 인해,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하셨다’는 증거로 인해 베드로와 요한은 유대교 종교지도자들에게 잡혀 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40년 동안 걷지 못하던 사람이 분명히 일어난 증거가 자신들의 눈앞에 있으므로 그들도 어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은 궁리 끝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협박하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고 대답하며 그들의 협박에 굴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담대할 수 있었던 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와 요한의 대답에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 아니라, 이미 백성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 일어난 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있었기에, 백성들의 저항이 두려워 베드로와 요한을 풀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가장 먼저 어디로 갔을까요?
23절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동료, 즉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에게 갔습니다.
본문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요한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걱정하며 함께 모여 중보기도 했을 것입니다. 잡아간 자들이 누구입니까? 얼마 전 예수님을 잡아간 바로 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없는 죄도 만들어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아마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받게 될 형벌에 대한 걱정과 함께 그로 인하여 앞으로 교회에 닥쳐올지도 모를 박해에 대한 불안과 염려를 하고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는 산헤드린 법정에서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그들은 함께 모여 중보기도 하며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이 무죄 방면되어 찾아왔으니 얼마나 기뻤을까요?
성도들을 만난 베드로와 요한은 그들에게 재판 과정에서 오고 간 말을 전하였습니다.
그 말 가운에는 앞으로 교회가 직면하게 될 위기를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비록 지금은 백성들의 반응이 두려워 그들을 풀어주었지만, 산헤드린의 공식적인 결정은 ‘이후에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계속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든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하였다’든지 하는 말을 하고 다니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협박이었습니다. 이것은 초대교회에 드리운 어두운 그림자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성도들은 마음에 큰 부담과 두려움을 느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기도하는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
이 위협의 말을 들은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전해준 ‘불길한 소식’을 듣고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때 그들의 기도의 태도가 두 가지로 나옵니다.
첫째, ‘한마음으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전해준 ‘불길한 소식’으로 인해 신앙공동체가 분열되거나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한마음으로 뭉치는 동력이 되었습니다. 박해는 오히려 교회를 더욱 튼튼하게 영적으로 단결시키는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여기서 ‘한마음으로 기도했다’라는 것은 ‘나뉘지 않는 믿음으로, 일치된 믿음으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위기는 성도들의 마음이 분열되면서부터 시작됩니다. 각자 자기주장을 앞세우고,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하기 시작하면 교회가 분열되고 타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서로 자기중심적인 기도만 하게 됩니다. 그러면 영적 능력이 교회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이 하나 되게 해달라고 하나님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하셨던 것입니다(요15장).
분위기가 좋은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재정이 풍족한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가 좋은 교회가 아닙니다. 함께 한마음으로 기도하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둘째, 이들은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통성기도’를 좋아하지 않는 분들도 있습니다. ‘기도를 그렇게 요란하게 해서 되겠는가? 경건하게 해야지’라고 합니다. 그래서 묵상기도가 유일한 기도의 스타일인 분들이 꽤 있습니다. 물론 조용히 기도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선호하는 것 자체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기도는 조용히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 문제입니다. 그것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경에도 ‘소리를 높여’ 기도했습니다. 물론 항상 시끄럽게만 기도해야 한다고 해도 문제입니다. 조용히 기도할 때도 있고 크게 소리를 높여 기도할 때도 있는 겁니다.
갑자기 교통사고가 났거나 물에 빠져서 죽을 위기인데 조용조용히 “거기 가시는 분, 나를 좀 살려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냥 “사람 살려!”하고 소리 지르는 겁니다.
불이 나면 “불이야!”라고 외치는 겁니다.
상황에 따라 다른 것입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앞으로 닥쳐올 위기 앞에서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기도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함께 모여 예배하고 집회(기도회)할 때에는 ‘한마음으로 소리를 높여’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기도의 내용>
그 기도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만물의 창조자시오 통치자로 인정하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24절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그들은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았습니다.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바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으신 분’, 곧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주재’(Sovereign Lord)라고 불렀습니다. 이 말은 ‘최고의 주님’, ‘최상의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온 우주에 하나님보다 높으신 분은 없다는 뜻입니다. 아니 온 우주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다는 고백입니다.
이것을 믿는다면, 성전의 종교지도자들이나 산헤드린의 권력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들 또한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대로 통치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있다면, 우리는 사람들의 협박이나 박해를 두려워하지 않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힘 있는 사람들 앞에서, 사람들의 위협 앞에서 말 한마디 못하고 두려워 떤다면,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온전히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둘째, 하나님은 대적들의 방해조차도 이용하셔서 당신이 계획하신 일들을 이루신다는 고백을 드리고 있습니다.
25~26절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이 말씀은 시2:1-4의 인용입니다.
시2:1-4 “어찌하여 이방 나라들이 분노하며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여호와와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대적하며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여기에서 ‘기름 부음 받은 자’는 바로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를 대적하여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마음을 합하여 함께 음모를 꾸민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음모는 ‘헛된 일’이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보시고 ‘비웃으실 일’입니다. 왜냐하면, 창조주 하나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피조물은 이 세상에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어떻게 이러한 예언의 말씀을 남긴 것일까요? 그것은 다윗 자신의 혜안이 아니라,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정말 그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27~28절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헤롯(유대 왕)과 본디오 빌라도(로마 총독)는 서로 어울리지 않는 정치 세력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하나가 되었습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은 서로 앙숙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또한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방인(로마 관원들)과 이스라엘 백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아무런 죄도 없으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하는 일에 마음이 하나가 되었습니다. 실제로 예수님은 죽으셨고, 그들의 계획대로 성공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반전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음모가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것을 행했을 뿐’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자신들의 계획대로 이루었다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계획의 일환으로 쓰임 받은 것뿐입니다. 그들은 자기들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시키는 ‘나쁜 도구’로 쓰임 받은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또다시 교회를 박해하려고 하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는 것을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 또한 하나님의 계획 속에 이루어지는 일임을 믿음으로 선포하고 있습니다.
29절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예루살렘 성도들은 자신들이 당할 위협은 온전히 하나님께 맡깁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자신들이 마땅히 해야 할 사명을 감당케 해 달라고 기도합니다.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박해의 위협에 굴복하지 않고 오히려 담대하게 복음의 말씀을 증거하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놀라운 기도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따라야 할 ‘마땅한 기도’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남의 물건을 훔치고 도둑질하는 사람들을 보면 아주 담대합니다.
그렇게 나쁜 짓을 하는 사람도 담대한데 우리는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데 너무나 담대하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서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16:33)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지금 죽은 예수, 실패자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이기신 승리자 예수님, 영원한 심판자이신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환난을 당할지라도 담대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주시는 담대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하나님의 놀라운 치유와 표적과 기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기를 간구하였습니다.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치유(healings)와 표적(signs)과 기사(wonders)가 나타나기를 간구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특별히 병이 치유되는 놀라운 역사가 많이 나타났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치유의 이적은 복음서에 기록된 것만 따져도 아주 많이 있습니다. 기록되지 않은 것을 포함하면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치유의 이적을 행하셨습니다.
주님은 제자들에게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이미 누가복음을 묵상하면서 자세히 살펴보았지만, 열두 제자를 파송하실 때(눅9장)와 70명의 제자를 파송하실 때(눅10장), 주님은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제자들에게 주셔서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귀신 축출과 치유의 이적이 왜 그들에게 그렇게 중요한 사역이었을까요? 물론 귀신에 사로잡힌 사람들과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마음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오히려 여기에는 더욱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열두 제자를 파송하시던 장면을 다시 한번 읽어보겠습니다.
눅9:1-2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사 모든 귀신을 제어하며 병을 고치는 능력과 권위를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며 앓는 자를 고치게 하려고 내보내시며.”
그렇습니다. ‘앓는 자를 고치는’ 치유의 목적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병의 치유가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는 선교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입니다. 마가복음의 결론 부분에도 병 치유의 이적과 전도의 밀접한 관계에 대해서 언급되고 있습니다.
막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그러니까 말씀을 확실하게 증언하는 방법으로 표적이 사용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실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건으로 말미암아 복음을 증거할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되었고, 또한 그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아졌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앞에서 묵상하여 잘 알고 있습니다(행4:4).
물론 병 고침과 같은 놀라운 표적만을 추구하는 신앙생활은 다른 문제를 많이 만들어내기도 하지만, 병 치유의 표적이 따르게 되면 확실히 복음을 증거할 때에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래서 특별히 교회가 세워질 때에 하나님께서 이와 같은 이적을 많이 보여주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치유와 표적과 기사를 믿음으로 간구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도 두 가지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30절을 다시 한번 읽겠습니다.
30절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 첫 번째는 병을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라는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손’은 누구의 손입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손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통하여 병이 고쳐진다고 해서, 우리가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치유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습니다. 인간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망가진 인간을 고치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에 그것을 사람들이 자기의 영광으로 가로채기도 한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두 번째 전제는 병을 고치는 능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가 바로 그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님의 이름을 사용할 수 있는 권위를 부여하셨습니다. 베드로와 요한도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앉은뱅이를 고쳤습니다.
‘안수’(按手)를 해야만 병이 고쳐지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귀신을 쫓아내는데 소위 ‘안찰’(按擦)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믿기도 합니다. 그래서 종종 안찰기도를 받던 환자가 오히려 죽임을 당하는 그런 비극적인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여러분, ‘안수’나 ‘안찰’이 병을 고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이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두 가지 전제는 결국 한 가지 목적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병의 치유는 반드시 복음을 증거하는 목적으로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병 고치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그와 같은 표적과 기사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복음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것이 목적입니다. 바른 목적을 위해서 믿음으로 간구하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능력으로 놀라운 표적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기도의 결과>
그렇게 열심히 기도하기를 하고 나니까,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31절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우선 ‘모인 곳이 진동했다’고 합니다. 마치 지진이 난 것처럼 그 자리가 흔들리고 진동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기쁨으로 들으셨다는 응답입니다. 용기를 얻은 성도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고 합니다. 오순절 때에도 그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했는데(행2:4), 그와 똑같은 일들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그들이 기도했다고 해서 그들을 둘러싸고 있던 위협이 사라진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이 ‘한마음으로 소리 높여’ 기도했지만, 그들을 위협하던 대적들은 여전히 거기서 살기등등했습니다. 상황이 바뀐 것은 없습니다. 기도하기 전이나 기도한 후나 그들이 처한 상황은 똑같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이 있습니다. 그들이 천지의 대주재이신 하나님을 임도 기도한 이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상황은 그들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핍박도, 환난도, 죽음도, 결코 성도들의 발목을 잡는 올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성도들을 둘러싸고 있는 어려운 현실은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더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더욱 믿음 안에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맺는 말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초대 교회 성도들이 믿는 하나님(대주재)은 바로 오늘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들이 죽음의 위협 속에서도 기도하며 담대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삶을 살았듯이, 오늘 우리도 상황을 핑계대로 이리저리 피해 다니지 말고, 기도의 능력을 체험하며 하나님의 구원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을 내 삶의 현장에서 온몸으로 증언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