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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강해(16) 2024. 10. 23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다
왕상8:1-11(대하5:2~6:2)
<언약궤를 시온에서 옮김>
솔로몬은 성전을 완공한 후 가장 먼저 행한 일은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는’ 일이었습니다.
1~2절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 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 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우두머리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2 이스라엘 모든 사람이 다 에다님월 곧 일곱째 달 절기에 솔로몬 왕에게 모이고.”
이 순간은 역사적 대전환의 순간입니다. 광야에서 유랑하던 시절의 모세 성막에서 이제 영구적 건물인 솔로몬 성전으로 언약궤(법궤, 증거궤)의 자리를 옮기는 순간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 땅에 영구히 정착한다는 의미를 담은 역사적 순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은 이스라엘 민족의 모든 우두머리들(족장들)을 모두 소집하였습니다. 이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행사를 온 민족의 대표들과 함께하기 위해서였습니다(축제의 시간).
그때가 언제였습니까? ‘일곱째 달 절기에’(2)에 그 행사를 추진하였습니다.
‘일곱째 달’이라고 했는데, 어느 해 일곱째 달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성전이 완공된 때는 솔로몬이 즉위 11년 8월입니다(6:38). 그렇다면 그 다음 해 7월일까요? 그러면 11개월 후의 일입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그렇게 해석하지 않습니다. 아마도 성전 완공보다 한 달 먼저, 그러니까 ‘절기에’ 맞추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마도 11년 7월에는 성전에 대한 모든 공사는 끝나고 주변 환경 정리만 남았을 것입니다. 이에 솔로몬은 주변 환경 공사가 마무리되지 않았음에도, ‘절기에’ 맞추어 언약궤를 안치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말하는 ‘절기’는 무슨 절기를 말하는 것일까요? 예, 유대 종교력 칠월 15일부터 시작하여 칠 일간 거행되는 '초막절'을 의미합니다.[이스라엘의 3대 절기- 유월절, 오순절, 초막절(장막절, 수장절)]. '초막절'은 절기 중 가장 크고 즐거울 뿐만 아니라 제일 마지막으로 거행되는 수확의 절기였습니다(추수감사절). 이 절기는 광야 생활 동안 지켜 보호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기념하면서, 동시에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사 풍성한 수확을 거두게 해주신 하나님의 은총을 감사하는 절기였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초막절을 맞이하여 광야 생활 이후 유리 방황하던 언약궤를 영구한 안식의 장소인 솔로몬 성전에 안치시키는 일을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2023년 가자지구의 무장 정파 하마스 대원들이 갑자기 공격하여, 이스라엘 남부 레임 키부츠 부근 사막에서 음악축제를 벌이던 사람들을 학살하고 수백 명을 인질로 잡아간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음악 축제가 바로 ‘초막절 음악축제’였습니다. 이 기습으로 약 1200명의 사람이 죽고, 250명의 사람이 인질로 잡혀갔습니다. 지금까지도 전쟁 중입니다. 며칠 전 ‘하마스 지도자 신와르가 사망했다’는 기사와 영상이 나왔습니다. 이스라엘 총리 네타냐후는 남은 인질이 모두 석방될 때까지 전쟁을 지속한다고 합니다. 속히 전쟁이 끝나기를….
지금까지 언약궤가 있던 곳은 어디였습니다. ‘시온’에 있었습니다. ‘시온’(Zion)은 예루살렘 남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구릉 이름인데, 이곳에 세워진 산성을 다윗이 여부스 족속으로부터 빼앗아 '다윗성'이라 명명하였습니다(삼하5:7). 그리고 다윗은 이곳 다윗성에다 장막을 설치하고, 여호와의 언약궤(법궤)를 임시로 안치하여 놓았었습니다. 이후 40여 년간 머물러 있었습니다(삼하 6:17).
이 과정에서 많은 난관이 있었습니다(삼하 6:1-19).
이 당시 언약궤는 기럇여아림 아비나답의 집에 방치되어 있었습니다. 다윗은 다윗성 안으로 이 언약궤를 가져오려는 계획을 세웠습니다. 무려 삼만 명이나 되는 사람을 동원하였고, 법궤를 모실 새 수레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아비나답의 두 아들 아효와 웃사가 끌게 하였습니다(아비나답 집에 대한 배려가 아니었을까?). 집에서 출발할 때, 온갖 악단을 만들어 장엄하게 연주를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고자 한 것입니다. 그러나 옮기는 도중 큰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나곤의 타작마당에 이르렀을 때에, 갑자기 소들이 뛰어서 궤가 떨어지려고 하였습니다. 급히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잡았는데 그만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습니다. 크게 놀라고 당황한 다윗은 그곳 이름을 하나님이 치셨다는 뜻으로 ‘베레스 웃사’라고 지었습니다. 이 비극적 사건은 다윗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지 않았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민4:15절에 보면 하나님은 법궤를 이동할 때에는 레위 지파 가운데에도 특별히 고핫 자손들이 어깨에 메어 이동할 것을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는 경고도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고핫 자손도 아닌 사람이 어깨에 메지도 않고 수레에 실어 나른 것입니다. 아무리 목적이 좋고, 정성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은 말씀대로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이 일로 다윗은 하나님의 궤를 두려워하여 예루살렘으로 실어 오는 것을 포기하고, 근처에 있던 레위인이였던 가드 사람 오벧에돔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그 후 3개월이 지났습니다. 아마도 사람들은 오벧에돔의 집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눈여겨보았을 것입니다. 혹시나 무슨 해를 입지 않을까 하는…. 그런데 반대로 그의 온 집안이 복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법궤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을 잘못 다룸으로 인한 재앙이었음을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다윗은 다시 하나님의 법궤를 다시 예루살렘으로 모셔 오고자 합니다. 이번에는 율법대로 철저히 행하게 하였습니다. 고핫(그핫)자손들이 하나님의 궤를 어깨에 메고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여섯 걸음’을 걸었는데,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자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으로 알고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자를 드렸습니다. 이제 드디어 언약궤가 다윗성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이를 본 다윗은 온 힘을 다해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을 본 그의 아내 미갈이 심중에 그를 업신여겼습니다. 이 일로 부부 사이에 큰 금이 가고 말았습니다. |
그때의 경험을 살려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았습니다.
3절 “이스라엘 장로들이 다 이르매 제사장들이 궤를 메니라.”
그런데 여기서 솔로몬이 언약궤의 운반을 고핫 자손에게 맡기지 않고 상위 직위인 제사장들에게 직접 맡긴 것은, 성전 봉헌식을 더욱 경건하고 비중 있게 거행하려는 의도에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직접 멘 실례는 매우 의의 깊은 역사적 사건, 예를 들면 요단강 도하 시(수3:6, 17), 여리고 성 포위 시(수 6:6) 등에 이미 시행된 적이 있었습니다.
<넘치는 감사를 드림>
단순히 언약궤만 옮겨온 것이 아닙니다.
4~5절 “여호와의 궤와 회막과 성막 안의 모든 거룩한 기구들을 메고 올라가되 제사장과 레위 사람이 그것들을 메고 올라가매/ 5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그와 함께 그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
장막 안에 있는 거룩한 기구를 모두 옮겨 왔는데,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날랐습니다. 이 모세 성막의 옛 기구들은 이제 그것들(놋제단, 향단, 떡상, 촛대 등)을 대신할 솔로몬 성전의 새 기구들이 제작되었으므로(7:23-50), 더 이상 사용되지 않고 옮겨져 성전 창고에 보관되었습니다(7:51).
그리고 언약궤가 지성소에 안치되기 전, 솔로몬 왕과 백성들은 이때 법궤 앞에서 감사와 기쁨의 제사를 성대히 베풀었습니다. 따라서 이때의 희생 제사는 단순히 정결만을 위한 예식이라기보다 잔치와도 같은 기쁨과 감사의 행사였습니다. 즉 성전의 낙성식으로 갖는 축하의 순간인 것입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는 법궤가 지성소에 안치되기까지 백성들이 노래하며 춤추었다고 합니다.
이제 제물로 드린 양과 소는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을 만큼 많았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일이 아니라 기쁨과 감사가 넘쳐 자발적으로 드린 제물입니다.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드디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잡았습니다.
6~9절 “제사장들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자기의 처소로 메어 들였으니 곧 성전의 내소인 지성소 그룹들의 날개 아래라/ 7 그룹들이 그 궤 처소 위에서 날개를 펴서 궤와 그 채를 덮었는데/ 8 채가 길므로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 9 그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맺으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
제사장들은 주의 언약궤를 제자리, 곧 성전 내실 지성소 안, 그룹들의 날개 아래에 가져다가 놓았습니다.
그런데 출 25:15의 규정에 의하면, 채를 법궤의 고리에 꿴 채로 두어야 했습니다. 법궤 운반용 '채'(pole)는 법궤의 고리에 꿰어진 상태로 항상 붙어 있었습니다(출 25:13, 15). 그룹들이, 궤가 놓인 자리에 날개를 펼쳐서, 궤와 채를 덮게 하였습니다. 궤에서 삐죽 나온 두 개의 채는 길어서, 그 끝이 지성소의 정면에 있는 성소에서도 보였습니다. 그러나 성소 밖에서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채는 오늘날까지 그곳에 그대로 놓여 있습니다.)
오늘까지 - 본서(열왕기서)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기록되었다(서론, 기록 연대). 그러므로 본서가 기록될 당시에 솔로몬 성전은 파괴되었고(B.C.586년), 따라서 법궤에 딸린 채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서 '오늘까지'란 말은 솔로몬 성전의 파괴 이전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사실은 저자가 본서를 기록할 때 이전의 기록물을 그대로 사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Keil, Hammond). |
그런데 궤 속에는 호렙에서 모세가 넣어 둔 두 개의 돌판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히브리서 9:4에 의하면, 언약궤 안에는 본래 '십계명 두 돌판' 외에도 '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성전 완공 후(B.C.959년) 법궤를 지성소에 안치시킬 때 십계명 두 돌판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을 보면 나머지 것들은 모세 시대 이후 여호수아 시대와 사사 시대, 그리고 사울과 다윗 시대를 거치는 근 500여 년 동안의 어간에 없어진 듯합니다. 아마도 엘리 제사장 시절 법궤가 블레셋에게 일시 탈취당했을 때(삼상 4:3-11) 유실된 듯합니다.
한편, 그러나 혹자들은 본래 언약궤 안에는 십계명 두 돌판만 들어 있었을 뿐, 만나 항아리와 싹난 지팡이는 '여호와 앞에'(출 26:33) 곧 '증거궤 앞에'(민 17:10) 두었었다고 해석하는 이도 있습니다(Keil).
출 16: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민 17:10 “여호와께서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아론의 지팡이는 증거궤 앞으로 도로 가져다가 거기 간직하여 반역한 자에 대한 표징이 되게 하여 그들로 내게 대한 원망을 그치고 죽지 않게 할지니라.”
그리고 히 9:4의 말은 후대 유대 전승에 기인한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견해 역시 완전히 배격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다 해석하더라도, 그것들이 보존되었더라면, 언약궤 앞에 두는 것이 옳습니다. 언급이 없는 것으로 보아, 그것들이 유실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궤에 아론의 지팡이와 항아리가 없다고 해서 언약궤의 의미가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언약궤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두 돌판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가득한 여호와의 영광>
이렇게 언약궤가 제자리를 잡자 성전에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났습니다.
10~11절 “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올 때에 구름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하매/ 11 제사장이 그 구름으로 말미암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성전에 가득함이었더라.”
성경에서 '구름'은 여호와의 임재를 나타내는 현상(표적)으로 사용됩니다(시 18:11, 사 4:5, 단 7:13, 마 17:5, 계1:7). 예를 들면 시내 산과 그리고 출애굽의 여정에서 하나님께서 당신을 나타내실 때는 항상 구름이 그분을 둘러싸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출 19:16, 24:15-18).
이것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배후에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의 영광은 너무 강렬해서 인간이 직접 대면할 수 없습니다(출 33:20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인간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광채를 대면하면 죽습니다. 즉 구름은 하나님이 우리 인간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입으시는 ‘옷’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구름은 곧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임재를 가시적으로 볼 수 있는 표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구름이 이전에 성막 봉헌 시에도 나타났고(출40:34~35), 지금 성전 봉헌 시에도 나타난 것입니다. 따라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이전의 모세 성막을 승인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새로이 솔로몬 성전을 자신의 임재 처소로 승인하셨다는 것을 뜻합니다.
구름을 통해, 제사장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한 것을 경험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제사장들은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 앞에 모두 엎드렸습니다.
이로써 솔로몬의 성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의 장소로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되었습니다.
<배우는 교훈>
오늘 본문을 통해 배우는 교훈이 있습니다.
첫째, 성도는 범사에 자기 일보다 주의 일을 앞세워야 합니다.
당시 ‘초막절’ 절기는 각 지파별로, 가족별로 지키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은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는 행사를 위해 모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예루살렘으로 소집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는 수확 철입니다. 농경사회에서는 가장 바쁠 때입니다. 초막절에 맞추어 예루살렘까지 가려면 미리 출발해야 했습니다. 여러 날이 걸리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소집에 응했습니다.
즉 우선순위를 하나님의 일에 두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가르침은 세상을 등지고 살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세상에서도 시간을 아끼고, 성실하게 자신의 맡은 일을 감당하며 살라고 가르치십니다. 선을 행하며 모범된 시민이 될 것을 가르치십니다. 다만, 우선순위에 대한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세상일을 핑계로 주의 일을 등한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라고 가르치십니다(마6:33).
둘째, 목적이 선하고 옳더라도 그것을 이루는 방법까지 선하고 옳아야 합니다.
언약궤를 성전으로 옮기는 장면을 보면(3절), 제사장들이 궤를 메고 가는 장면이 나옵니다.
다윗이 처음 저질렀던 실수를 솔로몬은 기억하고 반복하지 않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솔로몬의 성전 건축을 살펴보았는데, 강조되는 한 마디를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그 설계와 식양대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하여 하나님의 선한 사업이라는 올바른 목표를 가지고 있다고 해도, 그 과정까지 올바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게 됩니다.
우리 속담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꿩 잡는 게 매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공산주의자들의 이론과 흡사합니다.
이는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딤후2:5)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목적도 선해야 하고, 과정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합니다.
셋째, 감사는 받은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5절에 보면, “솔로몬 왕과 그 앞에 모인 이스라엘 회중이 그와 함께 그 궤 앞에 있어 양과 소로 제사를 지냈으니 그 수가 많아 기록할 수도 없고 셀 수도 없었더라”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온 수많은 제물은 죄를 짓고 용서를 구하는 성격의 속죄 제물이 아니라 은혜에 감사하는 화목제에 해당하는 제물입니다. 자신이 받은 은혜에 기뻐하면서 자원하여 드린 예물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앞에 드리는 헌물의 성격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교훈해 줍니다.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보다 더 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성령님의 동행하심이라는 은혜를 입고 삽니다.
우리는 어떤 조건을 가지고 헌금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에 감사하기에 헌금을 드리는 것입니다(자원하는 마음으로).
이처럼 감사로 드리는 예물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풍성하게 해줍니다.
넷째, 누구도 주님의 공로 없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습니다.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지성소에 두고 나올 때에, 구름이 임하면서 여호와의 영광이 여호와의 전에 가득 찼습니다(10~11절). 본래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세움 받은 제사장들조차도 ‘능히 서서 섬기지 못하였습니다.’ 즉 하나님의 영광 앞에 모두 엎드렸습니다. 이것은 죄인으로서의 인간의 한계를 잘 보여줍니다.
여러분, 구약 성경에서 가장 위대한 신앙의 인물을 들라면 누구를 들 수 있습니까? 바로 출애굽의 영웅 ‘모세’입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대언자였고 이스라엘에서 가장 위대한 영적 지도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모세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는 감히 설 수 없었습니다(출40:35). 의인이라 불리는 욥도(욥42:6), 선지자 이사야도(사6:5), 위대한 의인 다니엘도(단10:8~9) 하나님 앞에 당당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모습을 가지고는 하나님의 앞에 설 수 없는 죄인들입니다(롬3:23).
그런데 신약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는 놀라운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롬5:1~2)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토록 거룩한 사람들도 하나님의 영광 앞에서는 감히 설 수조차 없었는데 바울 사도는 도리어 당당하게 서서 그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무엇이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엡3:12 “우리가 그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을 얻느니라.”
히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맺는 말씀>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랑할 것, 내세울 것, 항상 기억하고 찬송해야 할 것은 우리에게 독생자 예수님을 기꺼이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과 온몸으로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내신 예수님의 사랑과 오늘도 우리와 함께하시며 갈 길을 인도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늘 기억하며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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