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 이야기
박문평
1) 입사하고 나서 첫 야유회를 갔다. 도착과 동시에 빙 둘러앉은 자리에 소주가 돌았다. 막걸리보다 소주에 약했다. 신입사원이 고참이 주는 걸 거절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는 대로 받아 마셨다. 한참 후 냇가에 세수하러 간 것까지는 기억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스라이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나 때문에 버스 출발 시간이 많이 늦어진 것은 뒤에 알았다.
2) 본사 근무 시절에 회사 창립 60주년 행사가 전주공장에서 있었다. 울산공장에서 같이 근무한 직원들도 참석했다. 너무 반가웠다. 운동장 둘레 나무 밑에는 술이 넘쳐났다. 이번에도 주량을 넘어 섰다. 여관에 들어갈 때 상사 방문을 걷어찼다. 아무 대꾸가 없었다. ‘술 취한 녀석 건들어 봤자 훈계도 안 통할 거고.’ 다음 날 아침 왜 문을 찾느냐고 하길래 내가 안 그랬다고 하얀 거짓말을 했다.
3) 행패를 부린 거야 없지만 7년 만에 2번을 실수하고 깨달았다. 조직 생활에서 스스로 술을 통제 못하면 낙오자가 된다는 것을. 후에 회사에서 명예퇴직이 시행될 때 음주 상습자나 술버릇이 안 좋은 직원부터 불이익을 받았던 것은 물론이다. 낙오자가 되기 전에 알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다행인가.
4) 회식 자리에서도 요령이 생겼다. 탁자 밑에 빈 그릇을 둔다. 도를 넘을 것 같으면 남들이 보지 않을 때 마신 척하고 빈 그릇에 부었다. 다음 날 술이 쎄다는 소리를 들었다. 야외에서는 앉은 자리가 잔디밭이나 돌밭이니까 흔적 없이 버리기가 오죽 좋은가. 순진한 신입사원은 그 당시에는 몰랐었다.
5) 캐리어가 쌓이니 술자리를 피하는 방법도 터득하였다. 화장실 가는 척하고 나오기도 하고, 스마트 폰이 필수품이 되고부터는 전화 받는 척하고 그 자리를 피하는 것이 한결 자연스러워졌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그 자리에서는 좀 실례가 될 수 있겠지만 취한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훨씬 현명한 처세술임을 알게 되었다.
6) 한때는 몇이서 양주를 몇 병을 마셨다느니, 소주를 얼마 마셨다느니 등 다음 날 회사에서 자랑하기에 바빴다. 일종의 무용담이었다. 양주가 대접받던 시절이 있었다. 일본이나 해외에 출장 갔다 올 때는 면세점에서 양주를 사 오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모임이 있으면 양주의 출처부터 이야기한 후 전원이 같이 마셨다. 다음 차례가 소주였다. 그러니 더더욱 빨리 취할 수 밖에.
7) 밖으로 나오면 저쪽에서는 벌써 일행들끼리 시비가 붙어 있기도 하였다. 버스나 택시를 타기 위해 한참을 가다 보면 전봇대 밑에 신발을 벗어놓고 편안히 자는 모습을 더러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마시면 저렇게 될까, 왜 통제를 못할까. 그런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다.
8) 지인 중에 술을 좋아하는 분이 있었다. 회사에서 정년퇴직 후 늘 술을 끼고 살았다. 술을 끼고 살던, 베고 살던 곱게 먹으면 누가 뭐라 하겠는가. 의처증까지 있으니 가정이 편할 날이 없었다. 아들딸이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마이동풍이었다. 알콜 중독 치료병원에도 입원했다. 병을 고쳐놓으면 곧 가게로 달려갔다. 마지막에는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쳤다.
9) 일본에서는 본인의 자발적인 의사가 없으면 알콜 중독 치료 병원에 입원을 안 시킨다고 한다. 알콜 중독 치료는 본인의 의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란다. 치료 기간 중에 허가를 득하여 외출, 외박을 할 때도 있다. 이때는 병원에서 복용할 약을 제공한다. 술이 들어 가면 인위적으로 구토를 하게 하는 약이다. 거리에는 술 자판기가 즐비하다. 의지가 없으면 얼마든지 술을 마실 수 있다. 80년대 일본에 처음 출장갔을 때 술 자판기가 모두 ‘품절’이었다. ‘과연 일본 사람들은 술을 좋아하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고 정책적으로 야간에 일정 시간이 지나면 술을 구입하지 못하게 한단다. 즉 술 자판기를 시스템적으로 ‘품절’ 상태로 돌려 버리는 것이다.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10) 무엇보다도 내가 술을 나름대로 곱게(?) 즐길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가 들여준 이야기였다. “술이라는 것은 자기 손으로, 자기 입으로, 자기 목으로 넘기는 것이다. 누가 입을 벌려 넣어 주는 것도 아니다. 술을 제 스스로 컨트롤 못하면 술 마실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아버지가 술을 좋아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주었던 것 같다. 지금도 술이 도를 넘을 것 같으면 이 말을 상기하면서 자제한다.
“자기가 좋아해서 마시는 술. 최소한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 가훈은 아니지만 살아가면서 명심할 일이다.
첫댓글 선생님
술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좋아해서 마시는 술, 남에게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한다.'
맞는 말이죠.
잘 읽었습니다.
올해도 좋은 글 많이 쓰시고 행복한 시간 되세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