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암 최용술은 1899년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에서 태어났다. 생후 일년이 되어 어머니와 사별하고 일곱 살쯤 되어 경북 김천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아버지마저 돌아가시어 고아가 되었다. 아홉 살 무렵 일본인 ( )씨를 다라 일본 ( )로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고국이 그리워 밤낮으로 울며 떼를 쓰니 ( )이 견디다 못해 여린 용술을 길에 버렸다. 그곳 경찰이 용술을 어느 절에 인계하였는데 그절의 주지 도움으로 열 세 살무력 ( )의 계승자 대동류 합기유술 총무장 ( )선생을 만나게 된다. 이때부터 선생을 따라 원씨가비전무의 전승지 ( )가서 원씨가의 비전무를 수업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 )(용술의 일본명)이 ()를 설득하여 일본 합기도 ........입문케 하였다. 다게다 선생은 용술을 데리고 ( )로 데리고 가서 7년간 비전무를 전수했다. 23~24세경 하산하여 ( )에서 ()선생과 함께 ( )들에게 술기를 전수하였다. 그후 선생과 북해도 오따루에 머물면서 북해도에서부터 구주에 이르기까지 일본 전역을 순회하면서 술기를 전수하였고 태평양 전쟁때는 특공대 훈련도 시켰다. ( )은 여러 제자중에서 용술을 가장 아껴 대동류의 모든 술기를 오직 용술에게만 전수해 주었다고 한다. ( )선생은
"이 무술은 본디 너희 나라 것이니 네가 너희 나라에 가지고 가서 펼치라"고 자주 말하였고 특히 손기술이 뛰어난 용술을 보고 "내가 죽으면 네 손목을 내 관속에 넣어 달라"고 까지 했다고 한다.
1943년 ()선생과 사별하고 1945년 12월 그믐에 일본을 떠나 이듬해 1월 초순에 고향인 황간으로 돌아왔다. 황간에서 대구로 이주한 후 6.25전쟁을 치르고 전쟁 직후 반월당 염매시장에 살 때 한국 합기도 설립자 지한재 성무관 관장을 배출하였다. 1957년 봉산동으로 이사하여 ( )를 차렸고 1960년에는 합기술 교본을 출판하였으며 1963년에 사단법인 대한 기도회를 설립하고 공식적으로 총재에 취임하였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온 그에게는 이
시대에 맞는 조직력이나 명예욕이 없었다. 오직 합기유
술의 보급과 제자 양성에만 심혈을 기울였다. 불과 몇 년간 도장을 거쳐 간 제자들이 각종 협회를 조직하여 스스로 최용술 도주의 수제자임을 내세우면서 영향권에서 벗어 나갔다. 그러던 중 1974년 충남 금산의 이영수, 김윤상, 김현배 세 사람이 최용술 문하에 들어가 합기유술을 배우게 된 것이 인연이 되어 1980년 금산에 대한민국 합기유술의 총본관인 용술관을 설립하여 1986년 타계할 때까지 술기 전수에 전념하였다. 선생은 대구 직할시립 현대 공원묘지에 안장되었고, 2000년 4월 그의 제자들인 용술관 유단자 회원들이 추모비를 건립하였다.
위의 최용술 도주의 행장은 선생의 제자이며 최용술 인물사 연구의 권위자인 김정윤씨의 도움말과 이영수 총재님이 덕암 최용술 도주님 생전에 들었던 내용을 간추린 것임을 밝혀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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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주인
최용술선생님을 댁에 모시고 지내셨던 교육자이신 이영수 선생님조차 최용술선생님의 일본관련 내용은 김정윤선생님께 부탁드렸다고 합니다. 김정윤선생님의 글은 1962년과 그다지 달라진 것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