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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신안목포관광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천사의섬
▣ 고하도 고하도(高下島)는 예전에 보화도(寶化島), 고하도(高霞島) 칼섬 등으로 불리웠다 고하도에는 재미있는 설화가 있다. 하루는 이완용이 고하도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하는 말이 강진 군수(郡守)가 자기 생질(甥姪)인가, 자기 친척인데, 그 사람으로 하여금 고하도를 이완용으로 하여금 싸게 사주라 하는데 고하도 사람들이 팔라고 하지 않았다. 대대손손 거기서 사는 사람들이라서 안 판다고 하니까 그 고하도 도민(島民)들을 전부 잡아 놓고 고문과 협박을 해 가지고 결국은 샀는데 삼천오백원에 사 가지고 일본인한테 오천원을 주고 팔았다. 거기다 정종 공장을 만든다고 일본 사람들이 사주라고 해서 호남 지방, 전라 북도 통통 털어 가지고 일본 정종 공장을 만든 것이다. 산 사람은 일본 해군 대장 출신인데 고하도 물이 정종 만들기에 적합한 물 이어서 정종을 만들려고 샀었다.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육지면을 이곳에서 처음 재배하는데 성공했다. 기후 관계, 날씨 관계 등으로 해서 처음으로 시험 재배한 곳이 바로 고하도인데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재배했다고 한다. 국도 1호선은 일제하에 1907년부터 시작된 사업으로 목포에서 신의주 압록강교(橋) 까지의 도로를 말하고 2호선은 해남 쪽에서 부산으로 작업을 하였다.1986년 5월 13일 대통령령 제11899호로 국도 제1호선은 목포시에서 평북 신의주시(市)로 되고, 국도 2호선은 목포시에서 부산광역시 중구로 확정되어 시행하고 있다. 특별규정은 없으나 제정할 때 적용되어 현재 사용하고 있는 기준은 종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홀수번호로 부여하고 남쪽을 기점으로 북쪽으로하여 서쪽에서 동쪽순으로 하고, 횡선의 도로는 노선번호를 짝수번호로 부여하고 서쪽을 기점 동쪽을 종점으로 하여 남쪽에서 북쪽의 순으로 하였다. 현재의 초석은 유달산우체국 옆에 있는 초석을 말한다. ▣ 달성사 죽교동 317번지 에 위치한 달성사는 해남 대흥사의 수말사로 양산 통도사 출신인 노대련선사가 1915년 4월 8일에 세웠다. 달성사는 건물 6동(대웅전,요사체2,칠성각,명부전, 종각) 건평 71평, 대지 126평으로 경치가 아름답고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이 절에는 신묘한 효과음을 내는 범종이 있는데 1915년 대흥사에서 노대련선사가 가져온 것으로 전해진다. 이 범종의 주조년대는 정조 10년(1786년)이며 이종소리가 매우 청아하게 들려서 목포 팔경시중 달사만종이란 시귀에도 나타난다. ▣ 뒷개 오늘날 북항이라 불리운 곳이다. 항동쪽이 앞선창(앞개)이라 불리웠고 현재 북항을 뒷개라 불리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불리었던 순수 우리말이다. ▣ 마파지 대성동에서 옛 형무소로 돌아가는 길목을 마파지라 했다. 옛날에 말구루마(수레)가 겨울에 미끄러져서 부서진 일이 있었는데,그때 이일을 계기로 '말 마(馬)'자, '부술 파(破)'자를 써서 그 근방을 마파지라고 했다는 말도 있다. 그리고 이 근처는 대성동(신창동, 번창동)이 확장되면서 민가가 뛰엄뛰엄 들어서기 시작되었다. 또한, 이곳은 겨울에 서,북풍이 마주치는 곳이기에 목포에서는 추운 곳중에 하나이고 바람이 마주친다는 뜻의 매서운 바람을 맞받아 치는 곳, 맞바람 부는 곳 등의 뜻으로도 마파지라 불렸다 한다. 목포극장에서 만복동고개로 가는 언덕의 오른쪽을 말하는데 개항당시 지금의 복권과 같은 추첨권을 팔아 이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 추첨을 하였다 하여 만인계터라 불리었다. ▣ 목포진 목포진은 목포시 만호동 4통 3반 1-56번지 일대에 소재하고 있는 유적으로 목포영이라고 불리우며 만호(萬戶)가 지휘 통솔했다 하여 만호진, 만호영, 만호청이라고도 불리었다. 만호진이 설치된 정확한 연대는 세종 21년(1439년 4월 15일) 의정부가 무안 현의 목포는 왜적침입의 요해처이므로 만호를 파견하고 병선을 주둔토록 건의하여 세종의 재가를 받아 냈다. 이것이 목포만호진의 역사적인 출발점이다. 현재의 목포진 자리에 목포진성(城)이 처음으로 구축된 것은 연산군 8년 어간임이 밝혀지며 당시 중지 건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호남읍지"에는 성석축의 둘레를 215보, 높이를 7철, 여첩의 둘레를 140보, 높이를 2척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성의 동쪽에 둘레가 35보인 못이 하나 있으며 성문으로는 남문과 서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목포진은 근대적 행정.군사제도의 개편 요구에 따라 목포 개항 2년 전인 1895년(고종 32년)7월 15일 칙령 제 141호로 폐진되었다.현재는 목포만호비와 만호동 일대 일부 주택의 담장이나 축대 등이 만호진의 흔적을 알려주고 있다. ▣ 미륵불 달성사에서 유선각쪽으로 가는 길목, 하늘에 닿을 듯 드높은 절벽 하단에 거대한 미륵불이 있다. 높이 13미터의 이 미륵불은 달성사 주지였던 노대련선사(禪師)가 조성하였다고 구전될 뿐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삼학도 전설의 주인공인 선비가 이곳에서 세 처녀가 타고 있는배를 향해 활을 쏘았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 부동명왕상 부동명왕은 대일여래가 모두 악마와 번뇌를 항복시키기 위하여 분노한 모습으로 나타난 형상으로 오대명왕의 하나이다. 1920년대 말 일인들이 일본 불교의 부흥을 꾀하기 위하여 일등바위 아래 암벽에 조각했다. 철퇴를 들고 있는 부동명왕상 옆에 '부동명왕'이라 새겨져있으며 현재도 주민들이 찾아와 불공을 드리고 있다. ▣ 불종대거리 현재 신안군청이 있는 곳에서 북교동 성당으로 가는 길목에 예전에는 불이 나는 곳을 살피고 종을 치는 철탑이 있었다. 그래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주변에 장이 섰었다. 이곳이〈쌩기장터, 쌍교장터〉 라 불리었다. |
공설시장 앞거리를 말하는데 예전에는 이곳에 바다물을 막는 수문이 있었다. 개항후 이곳을 모두 매립하여 땅이 되었다. ▣ 양을산 지금 목포시에 있는 목포대학 뒷편을 보고 비녀산이라고 하는데 그 산의 모양이 마치 옛날 여자들이 경대 앞에서 머리를 곱게 빗고 비녀를 꽂아 놓은 형성이라 해서 비녀산이라고도 하다. 또 해발 150미터 높이의 산이다. 앞으로 목포의 이지형으로는 이 산이 목포 시내 한 중앙을 차지 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많다. 그곳에 양을촌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양을산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양을촌이라고 한 것 같다. ▣ 유선각 유달산 자락에서 무정 정만조 선생이 유선각 정자에 들러서 시회를 열곤 하였는데, 유배지에서 풀려 나오면서 선비들이 노는 곳이라 해서 유선각이란 이름을 짓게 되었다. 이후부터 鍮達山이 儒達山으로 쓰이게 되었고 이 유선각 현판은 무정 정만조 선생의 제자이며 대통령에 출마했던 신익회선생의 친필이다. ▣ 이훈동씨 정원 목포시 유달동 4-1번지 유달산 남동쪽 기슭에 이훈동씨집 정원을 말하는데 이 정원은 1930년대에 일본인 우찌다니만빼이 가 조성한 정원으로서 면적이 천여평에 이른다. 광복후 해남 출신 국회의원 박기배씨의 소유물이 되었다가 1950년대에 이훈동씨가 인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원은 호남지방에서 제일큰 정원이며 113종(한국야생종 37,일본원산종 39,중국원산종 25,기타 12)의 나무와 순 외래수종 76종, 상록수 69종이며 일본식 석등 춘일형,원주형,직부형, 설견형석등.오중탑, 칠층탑 등 일본식 정원의 표본이기도 한다. 1988년 3월 16일 지방문화재자료 제165호로 지정되었다. ▣ 인어상 옛날부터 사람들이 인어는 몸의 반이 아름다운 여자고, 또 반은 물고기로 상상 속의 동물이라고 한다. 대반동 앞에 있는 인어상은 어떤 예쁜 여자가 빠져 죽어서 됐다는 전설도 있는데 실은 그곳에 애기 바위가 있고 이 동네 애들이 많이 놀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곳에서 놀던 애들이 많이 죽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인어상이 애기바위 위에 세워진 뒤로는 애들이 죽지도 않고 오히려 죽은 애들의 영혼을 달래 주었다고들 믿고 있다. 이인어상은 80년도에 청년 회의소 전남지구회 회원 대회 행사를 목포에서 주관하게 되었는데, 그 주관 기념 행사로 목포 청년 회의소에서 세웠다고 한다. 이 인어상이 세워진 곳은 우리 목포가 항구 도시인데다가 목포항을 들어오는 관문이 되므로, 드나드는 선박들이 이것을 보고 아름답고 착한 환상적인 마음을 갖도록 해주는 심리적 효과를 얻기 위해서 세웠다고 한다. ▣ 조각공원 시내에서 보이는 유달산 쪽에 1982년 11울 10일에 조성된 조각공원은 우리 나라에서는 최초로 이루어진 야외 조각 공원으로서 연면적 13,000평의 규모로 당시 불량 주택(초가집)지역으로서 도시 미관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조각공원이 조성되었다. 당시 이 조각공원에는 한국 조각가 연구회(회장 김영중)회원 44명의 작품 104점(청동 52, 대리석23, 합성수지 12, 철 12, 시멘트 2)이 전시되어 목포의 새로운 자랑거리가 되었다. ▣ 째보선창 다순구미 앞쪽에 배를 댈 수 있는 조그마한 만(彎)이 있었는데 이 곳에 부두시설을 하면서 삼면을 막고 한면만 열어놓아서 언챙이 모습을 하였다고 해서〈째보선창〉이라 불리웠다. 현재는 매립되어 없어졌다. ▣ 하당과 당곶 호남 평야를 누비는 영산강 유역에는 청동기시대에 부족사회가 형성되어 살면서 선진 문화를 받아들여 청동기 문화를 창조해 왔음을 역사가 증명하고 있듯이 무안 반도에는 일로 ,청계, 몽탄 등지에 부족 사회를 형성하며 살고 있었다. '무안읍지'와 '동국여지승람'에 나타난 것이 다같이 "당곶진 재읍남육십리 이로방"이라는 것을 보면 현재 목포시 이로동 어딘가가 확실하리라 본다. 그러나 이곳 주위에서 말하기를 하당은 암소 형국이라며 마을 앞에 있는 샘(우물)을 중심으로 동쪽을 '동긋태' 서쪽을 '서긋태'라 하여 놀이마당에서도 편을 가르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고 바다에 내밀고 있는 육지의 뿌리에는 돌밭 다리가 수로까지 이어져 있어 옛날 이곳에서 어촌이 형성해 있었다. 또한 이곳 주변에서는 땅끝 또는 땅꼬지라는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예로부터 내려온 구전에 의하면 하당을 창꼬지 또는 창꽃이라 했다 한다. 또한 사람들은 지금도 창꽃, 땅꼬지 혹은 땅끝이라 한다. 그 음이나 뜻으로 보아 당곶이 아닌가 생각한다. ▣ 동명유래1 ⊙ 경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지주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일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정통, 목포대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경정1정목으로 본정통, 산수동3정목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경정2정목이 되었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9년 만호동회의 관할이 됨. ⊙ 광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어,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5정목,6정목,7정목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서정 1정목, 2정목, 3정목으로 되었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광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명동회의 관할이 됨. ⊙ 금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어,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본정통, 목포대 남해안통 3정목의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금정 1정목, 2정목이 되었다가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9년 만호동회의 관할이 됨. ⊙ 금화동 개항때 앵정이라 불리었고 일본 화류계 식당들이 있어 [사꾸라 마찌]라고 하면 전국에서도 알아주었다. 광복후에도 금화동이라고 불리고 있다. ⊙남교동 남교동(南橋洞)은 옛날에 쌍교장터라 불리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다리가 둘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개항전에 바다물이 드나들었는데 개항이후 시가지가 늘어나면서 다리 위쪽은 북교동, 다리 아래쪽은 남교동이 되었다. ⊙ 눌도동 본래 지도군 압해면의 지역으로서 눌도 또는 육도라 하였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장자도를 병합하여 눌도리라 해서 무안군 압해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목포시에 편입되고 1966년 1월 1일 충무동회의 관할이 됨. ⊙ 달동 본래 지도군 압해면의 지역으로서 달리섬, 달리도 또는 달리라 하였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의 폐합에 따라 고하도, 허사도, 외달도, 노하도를 병합하여 달리라해서 무안군 압해면에 편입되었다가 1963년 1월 1일 목포시에 편입되고, 1966년 1월 1일 충무동회의관할이됨. ⊙ 달성동 본래 무안군 부내면 신죽호 윗동네 지역으로서 1914년 일본이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해안통 1정목,2정목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안통 3정목이라 하다가 광복 후 죽교동에 편입되었는데, 1949년 9월 24일 동제실시에따라 죽교동4구라 하다가, 1966년 동명변경에 의하여 달성동회로 고침. ⊙ 대반동 본래 무안군 부내면 등산진 옆동네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을 간척큁라여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해안통 1정목, 2정목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해아통 4졍목이라 하였고,해방 후 족교동에 편입, 1949년 9월 24일 동제 실시에 따라 이전 죽교리의 대반동을 합하여 죽교5구라 하였으며 1966년 동명 변경에 의하여 대반동회로 고침. ⊙ 대성동 대성동(大成洞)은 개항후 새로이 번창한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번창동으로 불렀다가 다음에는 신창동으로 고치고 이어서 크게 성장될 동이라 하여 대성동 개명하여 지금의 대성동 파출소앞 〈장터자리〉를 중심으로 커졌다. ⊙ 대안동 본래 무안군 부내면의지역인데 개항전에느 바다이었고, 1914년 4월 1일 일본이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동, 남교동, 신창동의각 일부를 병합하여 왜식으로 명치정이라 아렸는데, 1948년 4월 1일 왜식동명 변경에 의하여 대안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호남동회의관할이됨. ⊙ 대의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지역으로서 목포항의서넘쪽 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주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안통 1정목, 영사관통, 산수통 1정목과 3정목의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대화정 1정목, 2정목, 3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대의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해 유달동회의 관할이 됨 ⊙ 동명동 일본사람들이 해안통, 서정, 광동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던 것을 광복후에 동명동 으로 바꾸었다. 송도라는 섬은 일본사람들이 육지와 이어버리고 공원과 신사(神寺)를 만들었으나 광복이후 없어졌다. ⊙만호동 세종 21년 서기 1439년 조정에서 목포에 만호를 설치하였다. 이때가 목포에 만호를 처음으로 둔 것으로 기록된다. 목포 만호가 있었던 곳이라 하여 만호대라 하였다. ⊙ 명륜동 본래 무안군 보내면의 지역인데, 이곳 역시 개항전에는 바다였고,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동,남교동, 신창동의 각일부 지역을 벼압하여 왜식으로 대정정이라 하였다가, 광복 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의하여 명륜동이라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호남동회의 관할이됨 ⊙ 무안동 무안동은 무안으로 나가는 길이 시작되는 곳이어서 무안동이라고 불렀다. 현재 만호동에서 중소 기업은행과 한일은행 뒤쪽에서 광성당쪽을 지나 유달산으로 오르는 산줄기가 있었는데 개항이후 시가지를 매립하면서 만호동에서 한일은행까지의 산을 일부 헐어버렸다. |
▣ 동명유래2 ⊙ 보광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동쪽 이데,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고,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3정목,4정목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보정 1정목, 2정목,3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도치고,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영해동회의 관할이됨 ⊙ 복만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남쪽 개펄인데,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고,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무안통 1정목, 2정목의 각 일부지역을 병합하여 복산정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복만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영해동회의 관할이 됨. ⊙ 북교동 북교동(北橋洞)은 옛날에 쌍교장터라 불리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 다리가 둘이 있었는데 그 자리에 장터가 있었다. 이곳은 개항전에 바다물이 드나들었는데 개항이후 시가지가 늘어나면서 다리 위쪽은 북교동, 다리 아래쪽은 남교동이 되었다. ⊙산정동 본래 무안군 부내면 산정리의 지역으로서 상에 정자가 있었다하여 산정이라 하였다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용당리, 관해동의 각 일부와 이로면의 연치동, 백련동으로 병합하여 산정리라 해서 무안군 이로면에 편입 되었다가, 1932년 일부 지역이 목포부에 편입되어 연산동이 되고, 광복후 1962년 1월 21일 동명 변경에 의하여 나머지 전역이 목포시에 편입되는 동시에 산정1동,2동,3동의 동회로 갈려졌음. ⊙ 상동 본래 무안군 이로면의 지역으로서 창? 위쪽이므로 윗마을, 윗동네, 웃몰 또는 상리라 하였는데, 1914년 일본이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따라 중화동과 하당리 하신진의 각 일부와 부내면의 내동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상리라 해서 무안군 이로면에 편입되었다가, 1962년 11월 21일 동제 실시에 의하여 목포시에 편입되는 동시에 이로동회의 관할이 됨. ⊙ 상락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로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무안통 3정목, 동해안통 3정목과 동해안통 6정목을 병합하여서 상반정 1정목, 상반정 2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상락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무안동회 관할이 됨 ⊙ 서산동 서산동은 개항초기에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으로 개항 이전에는 서평리라고 불렀다. 이곳에는 개항무렵에 러시아가 조차지를 두었었다. ⊙석현동 일명 돌고개라고 한다. 옛날부터 큰돌들이 많아 지어진 이름이라 하는데 이곳은 지석묘군(地石墓郡) 일명 고인돌이 많고 아주 오랜 역사들이 숨쉬는 고장이기도 하다. ⊙ 소반동 대반동의 이웃에 있는 지역으로 대반동보다 작다 해서 소반동이라 부른다. 이지역명은 동명으로서 현존하지 않으며 현재 대반동에 포함된다. ⊙ 수강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었는데,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1정목을 둘로 갈라서 수정 1정목,2정목이 되었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동명 변경에 따라 수강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따라 만호동회의 관할이 됨 ⊙ 신 동 백련동 끝에 집이 너댓 가구가 있는데 이곳을 신동이라고 한다. '신동'이란 명칭은 중간에 새로 생겨난 동리란 뜻이다. ⊙양동 이곳은 개항 무렵 현대 대성동과 산정동 일부는 불란서령, 만호동은 영국령, 서산동은 러시아령, 서산동과 만호동 사이는 개항지, 그 윗쪽은 일본령으로 갈라져 있었다는데 현재 정명여자고등학교 근처는 미국령으로 불리웠다. 그래서 미국령쪽을 서양사람이 산다고 해서 양동이라 불리었다 한다. ⊙ 연동 옛날에는 미나리 방죽이 많았던 곳이다. 방죽이 많았기에 연꽃이 또한 많았다. 그래서 연동이라 불리었다고 한다. ⊙ 연산동 1932년 1월 4일, 목포부 구역확장에 따라 무안군 이로면의 산정리 일부를 편입하여, 백련동과 산정동의 이름을 따서 연산동이라 하고, 1966년 1월 1일 연동회의관할이 됨 ⊙ 영해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었는데,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1정목,2정목의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영정 1정목, 2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영해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영해동회가 되어 행복, 영해, 축복, 보광, 복만의 5동을 관할 함. ⊙ 온금동(다순구미) 한문으로는 따뜻한 온자와 비단금자로 쓰며 순수한 우리말로는 (다순구미)이다. 온금동에는 1978년까지도 목포에서 유일하게 산신당이 있었으며 이곳에서는 산신제를 매년 지내왔었다. 양지바르고 따뜻하여 옛날부터 마을이 이루어졌었다. ⊙ 용당동 옛날에는 바닷가에 있었던 마을이었다. 지금의 목포경찰서 아래쪽에 바다쪽으로 튀어 나온 곳이어서 용머리라는 뜻으로 용당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목포에서는 아주 옛날부터 있었던 마을 이름 가운데 하나이다. ⊙ 용해동 광복후 1962년 11월 21일 동명 변경에 의하여 용당동 일부를 갈라서 용당과 관해동의 이름을 따서 용해동이라 하여 이로동회의 관할이 됨 ⊙ 유달동 본래 목포개항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서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산수통 2정목,4정목, 1정목 일부를 병합하여 산수정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변경에 따라 유달산 밑이 되므로 유달동으로 고치고, 2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유달동회가 되어 중앙,유달, 대의 의 3동을 관할함 ⊙ 유 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남해안통 3정목 일부를 갈라서 왜식으로 유정이라 하였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9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만호 동회 관할이 됨. ⊙ 이로동 옛날에는 무안현 이로촌이었으나 1914년 행정구역 개편시 무안군 이로면이 되었다. 1963년도에 이로면의 일부가 목포시로 편입되었다가 그 뒤로 이로면 전체가 목포시로 되었다. 이름의 유래는 분명하지 않다. ▣ 동명유래3 ⊙ 죽동 오늘날에는 제일 비싼 땅이 되었지만 죽동은 개항되기 전에는 해변이었으며 개항된 후 선창의 노동자들이 팥죽을 많이 사먹는 죽거리였다. 그래서 죽동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개항때 애환이 많이 서린 동네이다. ⊙ 죽교동 죽교동(竹橋洞)에는 원래 무안현 신죽동이라는 마을이 있었다. 유달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었다. 이 신죽동의 죽자와 쌍교동의 교자를 한자씩 따서 죽교동으로 불렀다. ⊙ 중 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의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목포대, 본정통, 산수통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중정 1정목,2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1949년 동제실시에 따라 만호동회의 관할이 됨. ⊙ 중앙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서남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 거류지가 되었는데,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사관통, 목포대,본정통, 산수통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본정 1정목, 2정목 ,3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8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유달동회의 관할이 됨. ⊙ 창평동 본래 무안군 보내면의 지역인데,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죽동, 남교동, 신창동의 각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창평동이라 해서 목포부에 편입되었는데,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다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동제 실시에 의하여 호남동회의 관할이 됨 ⊙ 축복동 본래 무안군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4정목,5정목 병합하여 축정 1정목, 2정목 , 3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8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영해동회의 관할이 됨. ⊙ 충무동 1966년 1월 1일 동제 변경에 따라 임진왜란 때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수군진을 기념하여 충무동회가 되어 달동, 눌도동의 2동을 관할함. ⊙ 측후동 측후동은 오늘날의 기상대, 당시 측후소(測候所)가 있어 측후동이라 하였다. 이 측후소는 개화기 초부터 시작하여 우리나라 기상업무의 시초를 이루었고, 오늘날 서울 기상청의 초창기 연혁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항동 개항후 매립을 하여서 이루어진 곳으로 항구의 동네라고 항동이라 했다. ⊙해안동 해안동은 현재 선창쪽으로 바다를 메워 도로를 만들고 시가지를 이루어 해안통으로 부르다가 해안동으로 바꾸었다. ⊙ 행복동 본래 목포 개항지의 지역으로서, 목포항의 동쪽 개펄을 간척하여 일인 거류지가 되었는데, 1914년 일본인들에 의한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동해안통 2정목, 3정목의 각 일부 지역을 행정 1정목, 2정목이라 하다가, 광복후 1948년 4월 1일 왜식 동명 변경에 따라 정을 동으로 고치고, 1948년 동제 실시에 의하여 유달동회의 관할이 됨. ⊙ 호남동 이 동의 이름도 개항후에 일본사람이 붙인 이름인데 목포에 철도가 1914년에 완공되어 개통되었으나 지금의 대성동과 호남동사이의 넓은 시가지는 물이 고인 개펄 그대로였다. 마치 호수처럼 되어 있었는데 이곳이 완전히 매립된 것은 1920년 깨였다. 처음에는 개벌동이라 불렀으나 호수의 남쪽이라는 뜻에서 호남동으로 이름을 지어 불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