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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읽어봅시다!!!
『육식의 종말』
- 제레미 리프킨 지음/ 신현승 옮김/ 시공사/ 2002
오늘날 지구상에 존재하는 소의 수는 12억 8,000마리로 추산된다.(1993년) 소의 사육 면적은 전세계 토지의 24%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들은 수억 명을 넉넉히 먹여 살릴 만한 양의 곡식을 먹어치우고 있다. 소의 무게를 전부 합치면 지구상의 모든 인간의 무게를 능가한다.
소의 수는 갈수록 증가하는 추세이며, 이는 지구의 생태계에 혼란을 가져오고 6대륙의 거주지들을 황폐하게 만들고 있다. 그 무엇보다 소의 증가는 현재 남아 있는 열대우림을 파괴하는 주요한 요인이 되고 있다. 중앙, 남아메리카의 수백만 에이커에 달하는 고대 열대우림 지역이 소 방목용 목초지로 개간되고 있다. 또한 소 방목은 사하라 이남 및 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남부 목장 지대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사막화의 주된 요인이다. 반건조 지역과 건조 지역에서의 과잉 목축으로 인해 4대륙에는 메마른 불모지가 생겨나고 있다. 나아가 사육장에서 흘러나온 축산 폐기물이 지하수 오염의 주요 원인이 되고 있으며, 소는 지구 온난화의 주범이기도 하다. 소가 내뿜는 메탄은 지구 온난화를 초래하는 잠재적인 가스로서 지구 대기에서 열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축우를 포함하여 여타 가축들은 미국에서 생산되는 모든 곡물의 70%를 소비한다. 지구상에서 생산되는 전체 곡식의 1/3을 축우와 다른 가축들이 먹어치우고 있는 반면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영양실조에 허덕이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농토가 생계용 양식 곡물 생산에서 상업용 사료 곡물 생산으로 전용됨에 따라 수많은 농부들은 대대로 물려받은 조상의 땅으로부터 쫓겨나고 있다. 인간들은 기아에 시달리고 있지만 소와 다른 가축들은 실컷 곡물을 먹고 있다. 이런 이유로 개발도상국들에서는 격렬한 정치적 분쟁이, 북반구의 산업화된 국가들과 남반구의 가난한 국가들 사이에서는 정치적 적대감이 움트고 있다.
수백만 명의 인간들이 곡식이 부족해 기아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선진국에서는 사료로 사육된 육류, 특히 쇠고기 과잉 섭취로 인해 생긴 질병으로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있다. 미국인, 유럽인, 일본인들은 곡물로 사육된 쇠고기를 탐식하고 있으며 그 때문에 ‘풍요의 질병’, 즉 심장발작, 암, 당뇨병 등에 걸려 죽어가고 있다.
그럼에도 지구촌 곳곳의 축산 단지들이 야기하는 환경적, 경제적, 인간적 해악의 피해에 관해서는 별다른 논의가 진행되지 않고 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가 지구의 생태계와 문명의 운명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점을 전혀 모르고 있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는 소와 쇠고기 소비 문제가 미래의 지구와 인류의 행복에 가장 큰 위협으로 부상하고 있다.
책의 1부에서 3부까지는 서구 문명에서 소의 역사적 역할에 대한 고찰이 다뤄진다. 이 부분에서는 고대 수메르의 왕궁 도살장에서 시작하여 아이오와 주 평원의 자동화된 공장형 비육장인 세계적인 거대 축산 단지들을 살펴볼 것이다. 특히 현 세기의 ‘육우 기지화’를 이룬 축산 단지의 형성과 현대적인 육식 문화의 초석을 닦은 문화적, 역사적 세력들의 독특한 결합에 관심의 초점을 맞출 것이다.
4부 ‘배부른 소 떼와 굶주린 사람들’에서는 현대적인 축산 단지와 전세계 쇠고기 문화가 인간에게 미친 영향을 검토한다. 우리는 현 세기에 곡물로 사육된 쇠고기를 최상위에 올려놓은 인위적인 새로운 단백질 사다리에 주목할 것이다. 전세계 곡물이 인간을 위한 식량에서 가축을 위한 사료로 전환된 것은 부의 재분배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극적인 변화에 속한다. 그것이 인류와 경제에 미치는 파장은 현재 전개되고 있는 엄청난 인간 비극을 이해하는 관점에서 검토될 것이다.
5부 ‘소 떼와 위협받는 지구 환경’에서는 현대적인 축산 단지에서 초래되는 환경적인 위협의 정도를 검토한다. 이런 위협들은 과거의 환경 문제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새로운 위협들은 일단 규모면에서 전세계적이며 지구상의 온갖 생물과 생화학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반 대중들은 환경 위협하면 자동차 배기, 공장 폐수, 독성 물질과 방사성 물질 등을 먼저 떠올릴 것이다. 이런 그들에게 현대적인 축산 단지에서 비롯되는 대대적인 환경 파괴는 어쩌면 충격으로 다가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전세계에서 육식이 급증하면서 발생되는 생태계 파괴는 환경에 피해를 주는 다른 많은 가시적인 요소들을 이미 능가하고 있다.
6부 ‘육식을 즐기는 사람들의 의식구조’에서는 서구 사회에서 축산 단지들의 심리학과 육식 생활의 정치학을 검토한다. 역사적으로 고대의 육식 신화 및 육식 관습은 남성 지배를 존속시키고 성별과 계급 조직을 구축하는 데 이용되었다. 현대에서는 육식이 국가 정체성을 다지고 식민 정책을 발전시키며, 심지어 인종 이론의 개발을 위한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육식이 문화적 가치와 사회적 경제를 이끌어내는 데 어떤 역할을 했는지는 축산 단지가 미국의 개척정신 형성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에 대한 고찰과 유사한 방식으로 검토될 것이다. 6부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교외 고속도로 문화의 등장 속에서 현대적 축산 단지들의 역할을 분석한다. 아울러 미국의 독특한 현상인 햄버거의 사회학을 살펴보고, 현대의 육류 해체에서 비롯된 도덕적, 윤리적 의미를 점검해 볼 것이다.
이 책은 21세기에는 인류가 육식 문화를 극복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끝을 맺는다. 만약 지구의 건강을 회복시키고 날로 증가하는 인구를 먹여 살리는 데 일말의 희망을 가질 수 있다면, 지구상에서 축산 단지들을 해체시키고 인류의 음식에서 육류를 제외시키는 것이야말로 향후 수십 년 동안 우리가 이루어내야 할 중요한 과업이다.
인간의 식단에서 육류를 제외시키는 것은 인간 의식의 역사에서 인류학적 전환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식 문화를 넘어서야만 인류를 위한 새로운 과제를 정할 수 있다. 또한 생태계 보호, 인간에 대한 영양 공급, 지구를 공유하는 다른 생명체들의 안녕에 대한 관심을 가질 수 있다.
♣ 읽어봅시다!!!
『우울증, 기쁨으로 바꾸기』
- 문종원 신부 지음/ 바오로딸/ 2008
이제 우울증은 ‘심리적 감기’ 도는 ‘영혼의 감기’라는 표현이 실감나는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때, 자칫 죽음에 이르는 어두움의 통로에 생명의 불을 밝혀줄 책이 출간되어 반갑기 그지없다. 이 책에는 발병 원인, 다양한 증상, 간이 진단 방법과 치료 방법까지 우울증의 모든 것이 여러 사례와 함께 자세히 밝혀져 있다.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과 그 가족뿐 아니라 많은 사람이 두루 읽어 우울증으로 인한 비극을 미리 막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 안영(소설가)
이 책은 정신과 의사보다 더 자세하고 명확하게 우울증을 진단하고 처방을 내린다. 이 책에 소개된 여러 사례를 통해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은 신앙을 통한 치유다. 예수님의 사랑과 그분을 향한 믿음 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질병 치유에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이 책은 알려준다. 부디 많은 사람이 이 책을 읽고 신앙인으로서 우울증에 대해 갖고 있는 편견이나 오해를 없애기 바란다. 긍정적이고 격려에 찬 치유의 글은 많은 도움을 줄 것이다.
-양창순(신경정신과 대인관계클리닉 전문의)
하는 일마다 잘 안 되는 것 같고 가슴이 답답한 사람, 자신이 가치 없다고 생각되고 세상 사는 의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들은 한 번쯤 우울증을 의심해 보아야 한다. 물질문명이 발달하고 개인주의가 확대될수록 우울증에 시달리는 사람들은 늘어나고 있다. 특히 스스로 열심한 신앙인이라고 믿는 사람에게도 우울증이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이 책은 풍부한 사례와 설명을 통해 사람들이 스스로 우울증을 진단하고 거기서 벗어나는 다양한 방법을 알려준다.
- 황대권(생태운동가)
※ 성바오로 서원 및 바오로딸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책을 펼치면...
☞ 과학 문명의 발달로 모든 것이 더욱 편안하고 풍요로워졌다. 한편 이러한 과학 문명의 발달은 우리를 도덕적, 영적 가치가 상실되고 지나친 편리함과 쾌락을 추구하며 경제적 이익을 최고 목표로 삼는 시대에 살게 한다.
만연된 소비주의로 모든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인간적, 심리적, 영적 허약함을 불러일으켜 우울증 환자를 증가시킨다.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은 물론 가정주부와 어린이, 심지어 신앙인들조차도 활기차고 기쁘게 살아가기보다 우울하게 살아가는 것을 더러 본다.
여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이는 어느 한 나라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 문제다. 한 통계에 따르면, 2020년이 되면 우울증이 가장 큰 장애가 된다고 한다. 세계보건기구는 날이 갈수록 우울증이 심각해져 세계적으로 1억 2천만 명이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고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 경제적 손실은 전체 질병 가운데 네 번째로 높으며, 우울증은 또한 무기력과 무능력의 주요인이다.
우울증 환자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다는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에 대한 인식이다. 사랑의 공동체는 우울증 환자가 하느님의 선하심과 지혜, 각 사람이 행복해지기를 바라시는 원의,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아들을 희생시킨 사랑을 되새기도록 도와주는 치료사 역할을 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삶과 죽음의 의미를 지향하면서 초월적 해답을 준다는 사실은 신앙이 우울증 환자에게 많은 것을 제공해 줄 수 있음을 뜻한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3일간 바티칸에서 개최된 우울증 관련 회의 참석자들을 소개하는 자리에서 우울증은 ‘존재론적이고 영적인 위기 또는 불안에서 생겨나는 영적 시련’이라고 하면서 우울증에 걸리면 삶의 의미를 느끼지 못한다고 했다. 교황은 또한 우울증 환자들을 다룰 때, 전문 화학 요법과 함께 특별히 가족과 사목자와 본당 공동체가 따뜻한 마음으로 지원하고 배려함으로써 더욱 많은 효과를 얻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울증 환자는 자신의 능력을 믿고 자존감을 회복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질 수 있도록 인내하며 섬세하게 도와주어야 한다. 교황은 또한 아픈 이들에게 손을 내밀고, 그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고 지지해 주며 가치를 존중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이 책은 우울증을 물리쳐야 할 적군으로 보지 않고 친근하게 대할 때 더욱 역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깨닫게 한다. 우울증을 떨쳐내려면 내면에 기쁨을 지니고 살아가면서 그 기쁨을 표출시키는 법을 알아야 한다.
♣ 읽어봅시다!!!
『용서는 사람 사이에 물길을 튼다』
- 박인숙 대담·글/ 바오로딸/ 2009
이 책의 제목 「용서는 사람 사이에 물길을 튼다」는 마종기 라우렌시오 님의 아름다운 시 「우화寓話의 강」첫 구절에서 따왔습니다.
작은 물방울에서 비롯된 시냇물은 물길 따라 모이고 섞여서 강이 되어 흐르지요. 사람 마음 사이에도 얕으나마 물길이 트여 조금씩 섞이다 보면 강물처럼 된다고 시인은 말합니다. 기쁨과 슬픔, 웃음과 눈물 다 끌어안은 채 저 끝과 이 끝이 하나 되어 출렁인다고요.
햇빛 눈부신 날 밝은 물살 튀기며 흐르는 강은 참으로 아름답지요. 온갖 물고기와 수초도 넉넉하게 키워내는 생명의 보금자리입니다.
그처럼 아름답게 삶의 굽이굽이를 돌며 새로운 생명을 보듬고자 사람들은 소망합니다. 곳곳에서 만나는 거센 소용돌이도 탈 없이 헤쳐 나가기를 바라지요.
우리는 너나없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낳아 길러준 부모님에서부터 남편과 아내, 아들과 딸, 친구와 일터의 동료와 이웃들까지 모두 ‘나’의 일부이지요. 그들과의 관계가 어떤 모습인지에 따라 행복과 불행이 나뉩니다. 비틀린 관계는 때로 삶을 통째로 집어삼키기도 합니다.
「용서는 사람 사이에 물길을 튼다」는 가까운 사람으로 인해 몹시 힘겨운 일을 겪은 여섯 분의 이야기입니다. 믿었던 이에게 배신을 당해 빚더미에 몰린 분도 있고 부모님 때문에 오래도록 상처 받은 분도 있습니다.
괴롭히는 사람이 미워서 화가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문제는 그다음부터이지요. 화가 나다 못해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은데, 아무리 애써도 털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분노와 원망이 증오와 무기력과 절망까지 불러와 더 깊은 상처를 냅니다.
오랜 헤맴 끝에 여섯 분은 평화를 찾았습니다. 가슴을 옥죄는 사슬에서 벗어난 것입니다.
물길을 튼 것이 그 비결입니다. 서로의 마음에 물길이 트여 자꾸 모이고 섞이다 보니 강물처럼 하나가 된 것이지요. 더 이상 잘못을 문제 삼지 않고 함께 웃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용서’의 힘입니다.
용서란 참으로 버겁게 느껴져서 선뜻 다가서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운 것까지 낱낱이 털어놓으며 화해의 체험을 나눠준 여섯 분의 주인공은 우리도 용서할 수 있다고 북돋아 줍니다. 고맙습니다.
이 책을 읽는 모든 분이 사랑의 물길을 터서 가족과 친구와 이웃과 함께 행복의 바다로 물결쳐 가기를 바랍니다. 시 인용을 허락해 주신 마종기 선생님과 기도와 수고로 함께 해 주신 바오로딸 수녀님들과 모든 것을 이끌어 주신 하느님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 박인숙 마리아 도미니카
※ 책을 펼치면...
미움이라는 게 지우개로 싹싹 문지른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다. 묵주기도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주님의 몸인 성체 한 번 받아모신다고 지워지지 않는다. 없애버리려고 작심을 해도 미움이란 결코 한순간에 사라지지 않는다.
미움과 싸우려면 먼저 소용돌이가 잦아들 시간이 필요하다고 그(김웅렬 신부)는 말한다. 겨울 산에 쌓인 눈이 언제 다 녹을까 생각하겠지만 햇살과 바람이 온기를 더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녹아내린다. 그런 다음에야 대지가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은 이치다.
미움에 산처럼 쌓인 미움을 녹이려면 시간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용서해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용서해야 하는 까닭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는 내가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를 파탄시킨 사람, 밉고 또 미운 그 사람이 예뻐지기를 기다리다간 세월이 다 지나가 버린다. 가슴에 미움을 품고 있으면 내가 먼저 망가지고 병이 난다. 나를 고통에 빠뜨린 사람 때문에 내 인생까지 망칠 수는 없지 않은가?
자잘한 마음속 상처도 마찬가지다. 나는 상처 받아 끙끙거려도 정작 상처 준 사람은 자신이 그렇게 한 줄도 모르고 희희낙락 잘 살아간다. 그럴수록 나는 더 열 받고 그 인간 미워서 잠도 이루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그래도 내가 살려면 용서해야 한다.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기도 모자라는데 나에게 피해를 주 사람 때문에 금쪽같은 하루, 귀한 한 달, 소중한 일 년, 황금 같은 몇 년을 불행으로 도배하는 건 더 억울한 일이다.
“용서해야 하는 두 번째 이유는 그 사람을 선하게 변화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어둠이 두 개 모이면 더 큰 어둠이, 악이 두 개 모이면 더 큰 악이 된다. 하지만 어둠은 빛이 들어오면 물러나고 악은 선을 만나야 물러난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악한 마음을 보내기 시작하면 양쪽 다 망가진다. 부산에 있는 시누이와 미국에 사는 올케가 서로 못마땅하게 여기는 사이라고 하자. 두 사람이 전화통을 붙잡고 싸우지 않아도 마음으로 미운 화살을 쏘아대면 두 사람 모두 병이 난다. 가족까지 서로 미워하다가 결국 온 집안이 흉하게 변해가는 모습을 그는 적지 않게 보았다.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용서해야 할까요? 용서에도 과정이 있습니다. 먼저 나를 괴롭힌 사람, 원수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식을 찌른 사람을 위해 생미사를 넣고 미사 시간에 맞춰 성당에 앉아 있어도 가슴속에선 저릿저릿 미움이 솟구친다. 그래도 내가 살기 위해서는 기도해야 한다.
주님 앞에 앉아 기도한다고 입을 뗐는데 원수를 향한 욕이 터져 나온다고 해도 놀랄 건 없다. 미움과 용서라는 두 대치점이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니까 끝까지 붙들고 기도하다 보면 욕은 줄어들고 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자신을 발견할 때, 미움으로 병든 마음의 치유와 용서가 시작된다.
“두 번째는 내 거울을 밀쳐내고 하느님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을 비춰보는 것입니다.”
내 거울로 상대방을 비춰보면 나는 손해 보고 상처 받고 가슴에 칼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나 하느님 거울에 비춰보면 나 때문에 손해 보고 상처 받은 사람도 보인다.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니고 수두룩하다.
‘아!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이 이렇게 많다니...’
하느님 거울에 비춰보면 나 역시 죄인이다. 나도 죄인이라는 동질성을 가지면 다른 사람한테서 받는 상처만 가지고 길길이 뛸 수는 없는 일이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만 들여다보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용서가 불가능하다.
“세 번째는 나에게 못 되게 구는 그 사람의 과거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산다. 나도 상대방도 마찬가지다.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의 현재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상처까지 살펴야 한다. 아파하고 힘들어 하는 상대방을 위해 기도하노라면 지난날 내가 받은 상처도 치유되고 서로를 가엾게 여기는 마음의 눈이 생긴다.
사람이 어려움에 처하면 숲은 보지 못하고 나무만 보는 잘못을 저지른다. 고통의 한가운데, 벼랑 끝에 서 있을 때는 햇볕이 따뜻하게 내리쬐도 나무 뒤에 있는 그림자만 보일 뿐 아름다운 꽃과 잎을 틔워내는 은총은 보지 못하기 쉽다.
“마음의 치유와 용서의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집착 때문입니다.”
이미 빼앗긴 것에 대한 애착의 마지막 한 줌까지 포기해야 기적이 일어난다. 행복이라고 생각한 것을 버릴 때 기적을 맛볼 수 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을 포기하는 만큼 행복이 깃든다고 김웅렬 신부는 힘주어 말한다.
※ 통신판매 02-944-0944 인터넷 서점 http://www.pauline.or.kr 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예수 하버드에 오다』
- 하비 콕스 지음/ 오강남 옮김/ 문예출판사/ 2004
- 인간으로서 우리의 사명은 다시 이야기할 가치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이다.
- 랍비 예수는 우리가 딴 세상이 아니라 ‘이 세상’을 유심히 보길 원했던 것이 분명하다. 우리가 하느님의 현존을 발견하는 것은 지금 여기, 온통 우리 주변에 있는 가장 일상적인 일들에서다.
- 선불교의 이야기들은 듣는 사람들의 사고방식, 세계를 보는 시각을 뒤흔들어 놓기 위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랍비 예수의 스타일이기도 하다. 그의 이야기 거의 모두가 반전의 고리로 끝나고 있다. 듣는 사람들에게 어떤 정보를 주는 것보다도 그들에게 충격을 주는 것이었다. …선불교의 이야기들이 세계를 보는 ‘우리의 눈’이 바뀌는 것을 목표로 한다면, 예수가 사람들에게 바라는 것은 ‘세상 자체가 바뀌는 것을 보는 것, 따라서 세상을 보는 그들의 방법을 바꾸는 것이다.
-어리둥절함, 난처함, 혼란함이 배우는 과정에서 장애물만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우군일 경우가 많다. 나는 예수도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의 눈썹을 찌푸리게 하고 머리를 흔들도록 하는 경우가 많았으리라 확신한다. 사실 이것이 그의 교수 방법의 기본이었다.
- 나는 각 종교들이 가치 이상을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종교들은 변화산 이야기와 밤길 이야기처럼 서로를 연결시키는 이야기들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가치란 공중에 떠 있는 무엇이 아니기 때문이다. 가치란 예배 의식과 설화를 통해 대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런 것이 없으면 가치도 곧 증발되어 없어진다. 이런 종교 전통의 성인들과 예언자들이 단순히 윤리 강령의 목록만 만들지 않았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이야기들을 들려주었고, 우리는 그 수혜자들인 셈이다.
-사실과 함께 의미가 따라와야 한다. 그렇지 않고 사실 자체만으로는 무의미한 것이다. …앙상한 사실 자체는 나자렛 예수라는 이름을 가진 어느 랍비가 로마 관할이었던 유대 지방의 총독 본시오 빌라도의 사형 선고를 받고 거기서 출발, 언덕 위 형장으로 가서 처형되었다는 것에 불과하다. 이 사건이 주는 의미는 여러 세기 동안 수없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삶에 중심적인 것으로서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을 통해 예식으로 재현되었다. 사실이 없다면 예식은 공허한 기만일 수 있다. 그러나 예식이 없다면 그 사실은 쓸데없는 잡동사니의 단편들일 뿐이다.
- 유대인들은 여러 세기 동안 비극적인 일을 극복하기 위해 그들의 성경으로 돌아가는 일에 익숙했는데, 이것이 바로 예수가 한 것이었다. 그는 그의 삶에서 가장 밑바닥에 처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최악의 상태로 떨어진 인간의 운명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는 친구의 배신, 사람들이 보는 데서 조롱당하는 것, 엄청난 육체적 고통, 자기의 사명을 완수하지 못했다는 생각, 희롱, 죽음 등으로만 고통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가 가장 필요로 하는 그 순간 하느님이 그를 버렸다고 하는 그 무서운 느낌 때문에 더욱 괴로워했다. 대부분의 사람들, 심지어 건전한 신자들이라도, 때로는 하느님이 그들을 잊으시거나 무시하시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갖기 때문에, 예수도 이와 똑같은 심정을 가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그들에게 힘과 든든함이 될 수 있다.
- 사실 하느님이 ‘어떻게’ 현존하시는가를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를 버리신 그 사건 자체라는 것이다. 그는 멸시받고 버려진바 된 세상 사람들, 무시되고 도외시되고 굴욕 받을 숙명을 지닌 사람들과 함께 고통당하시고 씨름하시면서 현존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탈종교적’ 그리스도인의 사명은 초월적 구원을 위해 애쓰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고통당하시는 하느님의 고통에 즐겁게 동참하는 것’ 그리고 하느님 자신만이 완성할 수 있는 창조의 회복을 위해 힘쓰는 것이어야만 한다.
- 예수가 어떻게 죽었는가는 매우 중요하다. 성경 구절에 보면 그는 단순히 “죽었다”고 하는 대신에 “십자가에 못 박혔다”고 했다. 이 두 가지에는 차이가 있다.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반드시 죽을 운명에 대한 반격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을 다시 살리는 것은 그의 억울한 죽음을 가져온 제도, 남미 신학자 환 소브리노가 ‘십자가의 세상’이라고 한 이 세상에 산 몇 백만 사람들에게 고통과 죽음을 가져다준 사형 제도에 대한 똑같이 결정적인 반격을 의미한다. 부활 이야기는 생명이 죽음을 이긴다는 것만이 아니라 하느님의 샬롬이 잔인함과 욕심스러움과 포학함을 이긴다는 그 최후의 승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 친구란 우리의 허물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사랑하고 받아주며, 우리와 함께 하기를 즐기며, 가장 어려울 때 우리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이다. 20세기 가장 뛰어난 신학자 칼 바르트는 그의 여러 권짜리 신학을 한마디로 요약하라면 “하느님은 우리 ‘위하여’서이시다”라 할 수 있다고 했다. 디트리히 본회퍼는 예수를 단순히 ‘남을 위한 존재’라고 정의했다. 나는 이 학자들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한다. 예수의 전체 기별의 요체는 하느님께서 가장 훌륭한 친구처럼 우리 모든 인간들과, 특히 달리 친구가 없는 사람들과 끝까지 함께 하시기로 선택하셨다는 것이다.
※ 일반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영적 일기와 함께하는 내 하루의 성경』
- 요나 아빕 몬시뇰 지음/ 오영민 옮김/ 바오로딸/ 2009
세상에서 가장 신비로운 것이 하느님 말씀 아닐까? 말씀은 고정된 의미에 갇히지 않고 늘 살아 움직이며 새로운 의미로 다가온다. 분명 같은 구절인데도 어제와 오늘의 메시지가 같지 않다. 어제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새로움이 오늘 그 말씀 속에서 고개를 든다.
말씀을 읽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작업이다. 지성뿐 아니라 온 마음을 기울여야 그 의미를 터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세상사에 익숙한 우리에게 온 마음으로 말씀을 대한다는 것은 도전이다.
성경을 세상을 바라보듯 일상적으로 대하는 우리는 말씀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데 많은 장애를 느낀다. 이 때문에 성경을 읽고 의미를 깨닫도록 이끄는 ‘효과적’ 방법이 필요하다.
성경이 단순히 학문적 탐구 대상이라면 이에 접근하고 연구하는 방법은 훨씬 쉬울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진정 우리를 살게 하는 일용할 양식이며 우리 삶에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보화이기에 애정 어린 마음으로 말씀에 다가가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적 일기와 함께하는 내 하루의 성경>은 이런 면에서 효과적인 방법을 제시한다. 브라질의 요나 아빕 몬시뇰이 말씀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 삶에서 직접 체험한 결과를 기록한 이 책은, 무엇보다 말씀을 사랑하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을 불러일으킨다.
저자는 친절하게 성경을 읽는 순서, 말씀을 이해하는 방법, 그리고 말씀을 영혼의 양식으로 소화하기 위한 영적 일기 작성법을 제시한다. 사실 나는 어떤 틀에 따라 성경을 읽는 것에 거부감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책을 읽고 나서는 이 방법에 따라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 성경과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확신이 들어서다.
이 책은 성경이 나를 위해 주신 하느님 말씀임을 깨닫게 하며, 성경을 읽으면서 자신에게 건네시는 하느님의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지혜를 전한다.
성경을 순수한 마음으로 대하고 싶은 마음을 강하게 불러일으키는 이 책에서 자극을 받아 기축년 새해를 맞으면서 ‘내 하루의 성경’ 여정을 시작했다. 이 책은 성경을 많이 접한 이들이나 성경에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 모두에게 큰 도움을 준다. 말씀은 우리 안에서 늘 새롭게 탄생하기에 이를 향한 우리 여정은 마침이 있을 수 없다.
- 민남현 엠마 수녀의 추천글
※ 성바오로 서원 및 바오로딸 서원 (051-465-2173) 및 인터넷 바오로딸 서원 www.pauline.or.kr 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성경 읽기의 황금률
☞ 매일 읽어라
매일 성경을 읽으십시오. 이것은 황금률입니다. 예외는 없습니다. 읽고 싶을 때는 물론 읽고 싶지 않을 때도 읽으십시오. 성경 읽기는 약 먹는 것과 같습니다. 약은 먹고 싶든 먹고 싶지 않든 필요하기 때문에 먹습니다. 성경도 똑같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어려운 시대에 날마다 성경을 읽는 것은 필수입니다. 몸을 양육하기 위해 음식을 먹듯이 영혼도 하느님 말씀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날마다 샤워를 하는데, 만일 아침에 샤워를 하지 못했다면 저녁에라도 샤워를 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영혼과 성경의 관계도 똑같습니다. 곧 성경을 낮 시간 동안 읽을 수 없었다면 특별히 의식하지 않아도 영혼이 하느님 ‘말씀의 샤워’를 갈망할 것입니다. 몸에 쏟는 것과 똑같은 관심을 영혼에도 쏟으십시오. 우리는 대부분 샤워를 하지 않으면 깊이 잠들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뒤척이게 됩니다. 이제 우리 영혼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하느님 말씀으로 샤워하지 않으면 결코 깊이 잠들 수 없을 것입니다.
☞ 기도하는 마음으로 하라
성경 읽기는 단순한 공부가 아닙니다. 하느님 말씀과의 개인적 만남, 곧 우리에게 직접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살아 있는 말씀과 친밀한 접촉을 추구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대화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말씀은 우리 마음에 이야기하고 우리는 그 말씀에 응답합니다. 그것은 서로를 깊이 사랑하는 두 존재의 살아 있는 만남입니다. 많은 사람이 이미 이러한 관계의 구체적 실체를 경험했습니다. 이제 당신이 경험하십시오. 하느님의 주요 관심은 우리가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와 대화를 이어 나가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르치고자 하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진리를 깨우치기를 원하십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기대하는 자세로 임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아주 개인적이고도 실천적인 말씀을 해주실 것입니다.
♣ 읽어봅시다!!!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
- 조르주 베르나노스 지음/ 정영란 옮김/ 민음사/ 2009
20세기 종교문학의 정수
아이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을 지닌 한 젊은 사제의 숭고한 기록
고통 받는 이들에 대한 거룩한 사랑, 그리고 세상 모든 죄악을 용서하는 위대한 믿음
신을 향한 믿음이 사라져 가던 시대, 프랑스의 어느 작은 시골 마을 본당에 부임해 온 한 젊은 신부는 가난과 욕망, 육체적 정신적 나태에 어그러진 마을의 모습을 목격하고 깊은 고뇌에 빠져든다. 그리고 ‘악’과 싸우기 위한 용기와 힘, 의지를 얻기 위해 일기를 써 내려가기 시작한다.
신부는 일기 쓰기를 통해, 신앙에서 멀어지고 여러 죄악에 빠져 고통 받는 영혼들뿐만 아니라 자신의 고독과 자기 연민까지 깊숙이 들여다본다. 썩어 가는 포도주와 딱딱한 빵만으로 이루어진 자기 학대와도 같은 식사, 다른 사람들보다 연약한 신체, 세상 물정 모르는 순박함과 그로 인해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고 모함 당하는 데에서 오는 외로움……. 더 이상 기도를 하지 못하고 자살의 유혹까지 겪는 한 성직자의 섬세한 내면 성찰은 비단 신앙만이 아닌, 인간의 숭고함을 보여 준다.
1930년대 반교권주의와 무신론이 번져 가던 프랑스 사회에서, 사르트르나 카뮈와도 비견되던 날카로운 시각으로 그 시대 교회의 부패와 관료주의 등을 앞장서 비판했던 베르나노스는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를 통해, 너무나 나약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고결한 인간 본성을 어느 누구보다 아름답게 그려 냈다.
▶ 이 뛰어난 작가는 모든 자유인의 존경과 감사를 받아 마땅하다. -알베르 카뮈
▶ 초자연을 자연스럽게 제시해 내는 역량이야말로 베르나노스의 위대한 재능이다.
- 프랑수아 모리아크
▶ 결코 퇴색하지 않을 지혜로 가득찬 걸작. - 로버트 콜스
※ 책을 펼치면...
소설가로서건 평문가로서건 베르나노스에게 있어 『어느 시골 신부의 일기』의 이해와 관련하여 각별한 ‘어린이 정신’은 영원한 주제다. ‘인간은 그들이 저지른 악덕에 의해서가 아니라 너무나 깊이 숨어 들어 자칫 찾아내기 어려울 때도 있지만 그들의 어린 시절로부터 남아 간직된 손상되지 않은 몫, 순수한 몫을 헤아려서 이해되어야 할 것임을 나는 경험으로 이윽고 알게 되었다.’ 스스로 다 알고 어른인 척 굴고 싶어 하는, 20세기에 어린이 정신의 미덕을 역설한 베르나노스는 독특한 설득력으로 세계는 선한 자와 악한 자로 이분되는 게 아니라, 어린이 정신으로 충만하여 사는 성인과 그것을 잃어버린 (죄인이라기보다는) 불행한 사람들로 나눠지는 것임을 알려 준다. 세상살이가 씌워놓은무겁고 두꺼운 허위를 헤치고 범용한 영혼들에게서도 인간 실존의 깊은 곳에서 어린이 정신이 되살아나 단 한순간만이라도, 그러니 죽음의 순간만이라도 삶의 모든 마디마디를 하느님 앞에 집결시키며 우리의 참 존재와 우리를 화해시켜 줄 수 있는 한, 그 많은 슬픔, 절망의 유혹, 자살까지도 종종 목도하게 되는 베르나노스의 작품 세계는 얼어붙은 비극적 세계가 아니다. 더구나 이 비루하고 추악한 세상 속으로 어린이 정신의 인물들, 즉 샹탈, 올리비에가 끊임없이 진정성을 건 길을 걸어가고 있음에야. 브라질 이민 시절, 한 어린 브라질 소녀가 사인을 하나 해 주십사고 이 유명 프랑스 작가에게 내민 앨범 위에 적어 준 글은 우리가 읽은 이 작품이 드러내고자 했던 어린이 정신의 위대함을 달리 웅변한다.
아가씨, 천성으로 게으른 나는 5분 전까지만 해도 당신의 앨범 위에 무엇을 써 줄 것인지 혼자 막연히 자문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앨범을 하나 간직하겠다는 의도는 사실 매우 감동적이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며 그런 것이 바로 어린이 정신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어린이 정신이 그렇듯이 그런 의도는 보통 망신이나 당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어린 시절에 대해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세상 사람들이 어린 시절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어린 시절은 세상 사람들을 난처하게 만드는데, 모든 것을 잘도 눈감아 주는 그들은 누가 자신을 난처하게 만드는 것은 참지 못하지요.
요컨대, 소녀들은 마치 가난한 사람들이 손을 내미는 것처럼 자기 앨범을 소위 대단하다는 어른들에게 내밉니다. 그러나 소녀들과 가난한 이들 양쪽 모두는 보통 실망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진실로 기만을 당하는 사람은 지복(至福)을 특전으로 받은 사람들, 즉 가난한 이들과 어린이들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손을 내밀었던 상대방인 대부분의 어른들, 고위 성직자며 신학자, 역사가, 평문가, 소설가들은 당신에게 겨우 사인이나 하나 해 주었습니다. 여기서 사인이란 사람들이 가난한 이에게 던져 주는 푼돈 같은 것입니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전체주의 체제가 승리한다면 그들은 더 이상 사인할 필요조차도 없게 될 것이고, 군인이나 죄수처럼 단지 자신의 등록번호만을 적어 주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런 어른들에게만 손을 내민 것이 아니라 시인들에게도 손을 내밀었습니다. 그런데 시인들은…… 오, 기적이여! 당신에게 계산하지 않고 주었습니다. 왜냐하면 시인들은 천성이 자유롭고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이 추악한 세상은 오직 시인들과 아이들의 다정한 공감에 의해서 지탱된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이 공감의 연대는 항상 공격을 받지만 또한 항상 부활합니다.
시인들에게 충실하고 어린 시절에 충실하십시오! 절대로 어른이 되지 마십시오! 어른들은 어린 시절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고 있는데 그것을 알아채기 위해서는 복음서를 읽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좋으신 하느님은 고위 성직자, 신학자, 평문가, 역사가, 소설가들, 요컨대 모든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린이들을 닮아라.” 한데 고위 성직자, 신학자, 역사가, 평문가, 소설가들은 기만당한 어린 시절을 향해 여러 세기에 걸쳐 이렇게나 되풀이합니다. “우리들을 닮아라.”
당신이 오랜 세월이 지나 이 글을 다시 읽을 때, ‘세도가’들은 무력하고 ‘박사들’은 무지하고 ‘권모술수가들’은 어리석고 ‘점잖은 체하는 사람들’은 고질적으로 경박한 사람들이라고 점점 더 믿게 된 이 늙은 작가를 떠올리고 기도를 올려 주세요. 세계 역사에 있어서 아름다운 모든 것은 인간의 겸손하지만 강렬한 인내와 ‘하느님’의 자비로운 ‘은총’의 신비로운 조화를 통해 우리도 모르는 새 이뤄지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지십시오. 그리고 행운이 있기를! 우리는 모두 삶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런데 삶을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바로 삶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정녕 ‘탐욕’과 ‘권태’야말로, 모든 중죄를 다 합한 것보다도 더 사람들을 저주하는 것이니만큼.
※ 일반서점과 인터넷 서점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
- 미셸 드 생피에르 지음/ 심 바오로 옮김/ 가톨릭출판사/ 2009
“나의 형제들이여, 이 제단에 계시고 우리를 쳐다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천사들의 눈으로 볼 수만 있다면 얼마나 그분을 사랑하는지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신앙이 없습니다. 우리는 장님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조금 후 우리 주님(성체)을 들어 올릴 때에 여러분은 그분께 여러분의 눈을 열어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십시오! 이렇게 말하십시오. ‘주님! 제가 당신을 보게 해 주소서!’ 그분은 두 손에 가득 찬 은총을 누구에게 선물할지 찾고 계시지만 아무도 그 은혜를 구하는 이가 없습니다.”
“성체를 모시십시오. 내 형제들이여, 예수님께로 가십시오! 여러분이 예수님을 위한 삶을 살기 바랍니다. 우리도 그분 덕택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 바쁘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신성한 구세주께서는 ‘내게로 오너라! 수고하고 지친 자들아, 내게로 오너라! 내 너희를 쉬게 하겠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여러분, 그분의 초대를 거절할 수 있을까요? 우리에게 합당치 않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실대로 말하자면 여러분은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에게는 이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죄인이다. 우리는 죄가 너무 많아 주님께 나아갈 용기가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아픈데 치료를 거부하거나 의사를 부르지 않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당신들의 재산은 하느님께서 당신들의 손에 잠시 맡겨 두신 것에 불과합니다. 당신과 가정을 위하여 꼭 필요한 것만 받은 다음 나머지는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야 합니다. 나의 벗들이여, 들어주십시오! 일자리가 있고 월급을 받으면서 왜 가난한 이들을 돕지 않습니까? 술집이나 파티에 갈 돈은 충분히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어떤 결말을 맺어야 합니까? 나의 형제들이여! 자선을 베푼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보시기에 많은 공로를 세운다는 것입니다. 즉 자선은 하느님의 자비를 우리에게로 끌어들이는 힘이고, 우리 구원을 확인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한 자선을 많이 베풀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행동을 함으로써 우리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되면 우리는 늘 부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방향으로 자선을 베풀어야 합니다. 즉 모든 것을 하느님을 위해 해야 합니다. 세상을 위해 하면 안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떠날 때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세속에 매달리지 맙시다. 하느님께 도달하는 것이 우리의 으뜸가는 목적이고, 이 세상에 사는 것은 그 이유에 불과합니다.”
“우리 주님께 제일 예쁘고 비싼 것을 드려야 되지 않을까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우리에게 많은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 인색한 것은 얼마나 큰 배은망덕입니까? 그분은 우리 모두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십자가는 책들 중에서도 제일 지혜로운 책입니다. 이 책을 모르는 이들은 다른 책을 모두 보았다 하더라도 무식한 이들입니다. 이 책을 사랑하고 연구하는 이들만이 참으로 지혜로운 이입니다. 아무리 달갑지 않은 내용이라 하더라도, 이 책이 실제로 던져 주는 괴로움에 잠기는 것보다 더 큰 행복을 느낄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알면 알수록 여기에 머물고 싶은 마음이 생깁니다. 여기에서는 심심해할 시가니 하나도 없습니다. 알고 싶은 것을 다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맛들이게 되면 그만 둘 수 없습니다.”
“천국을 얻기 위하여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은총과 십자가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위로가 됩니다.”
“박해와 모욕을 당할 때보다 더 행복한 순간은 없습니다. 그때 하느님이 나를 위로로 감싸 안으셨고, 내가 청하는 것을 다 허락해 주셨습니다.”
“사람은 얼마나 큰 존재입니까? 사랑으로 말미암아 창조된 인간은 사랑 없이는 살지 못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자기 자신과 세상을 사랑합니다. 그렇지만 나의 형제들이여! 부족한 것은 바로 신앙입니다.”
“하느님이 무엇보다 요구하시는 것은 신뢰입니다. 하느님께 우리의 걱정을 맡긴다면 그분의 정의와 자비가 우리를 도와줄 것입니다.”
“나의 자녀들이여, 보십시오! 사람은 모든 것을 사랑하는 하느님께 바쳐야 합니다. 일, 걸음걸이, 잠 등 그 밖의 모든 것을 그분께 봉헌하지 않는 한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하느님과 함께한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입니까? 그분이 모든 것을 지켜보시고, 모든 것을 용서하신다고 생각한다면 아침마다 이렇게 합시다. ‘모든 일이 당신 마음에 드시도록, 제가 하는 모든 일에 당신이 함께해 주십시오!’ 신앙이 있는 영혼에게 하느님의 생각은 얼마나 많은 위로를 줍니까? 영혼과 하느님, 둘은 절친한 친구와 같습니다.
그땐 기도하는 것이 하나도 지루하지 않습니다. 그 시간은 몇 분밖에 걸리지 않지만 천국을 미리 맛보게 해 줍니다!
우리가 성당에 들어설 때 정말로 하느님의 존재를 느낀다면, 그리고 그분께 향하는 사랑을 느낀다면, 우리는 성체 현시대 대신 아기 예수님을 직접 본 아이처럼 신앙의 눈으로 그분을 쳐다볼 것입니다. 저는 성체 앞에서 물어보았습니다. ‘여기 누가 계십니까?’ 성체 현시대에서 ‘하느님!’이라고 대답하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광장에 가는 것처럼 성당으로 들어가서, 사람을 구경하거나 두리번거립니다. 그리고 서거나 의자에 앉아 미사를 드립니다. 또 어떤 이들은 무릎을 꿇지 않고 마치 하느님을 욕하는 것처럼 무릎을 세웁니다. 소름이 끼치듯 무섭습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지 않으면 누구 앞에서 무릎을 꿇을 수 있겠습니까?"
“나의 친구여, 보십시오. 내가 그분을 오른쪽으로 모셔 가면 그분은 오른쪽에 머물고, 왼쪽으로 모시면 왼쪽에 머무십니다. 만약 우리가 미사가 무엇인지 안다면 죽었을 것입니다. 나의 벗, 사제가 불행해지고 게을러지는 이유는 미사를 정성껏 드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 나의 하느님, 사제가 미사를 드리는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않는다면 그 사제는 얼마나 불행합니까? 처음 몇 달 동안은 아주 성실히 거룩한 미사를 합당하게 드린 사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다음에는요? 오,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 우리와 같이 불쌍한 사람에게 그 일을 맡기셨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사제품을 받자마자 자기의 비참함 때문에 울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제가 내적 생활을 하지 않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하느님은 고독 속에서 말씀하십니다.”
“착한 사제가 되는 방법 가운데 하나는 신학생들처럼 사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들이여! 우리가 상을 받을 만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습관으로, 의무로, 우리 자신에 대한 사랑으로 신앙생활을 하니까요. 애석한 일입니다. 모든 것을 하느님의 눈 아래서, 하느님과 함께, 하느님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 해야 합니다.”
※ 가톨릭출판사(02-360-9172)와 인터넷 가톨릭서점 www.catholicbook.kr 에서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 읽어봅시다!!!
『아듀』
- 엠마뉘엘 수녀 지음/ 김주경 옮김/ 오래된미래/ 2009
‘카이로의 넝마주이’라고 불리는 엠마뉘엘 수녀는 1908년 11월 브뤼셀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여섯 살 때 그녀가 보는 앞에서 익사 사고를 당한 아버지의 죽음으로 세상의 고통에 일찍 눈뜨게 된다. 스무 살의 나이에 수녀가 되기로 결심한 후 이집트, 터키, 튀니지 등지에서 아이들에게 프랑스어와 철학을 가르치는 수녀 교사로 일한다.
오늘날 엠마뉘엘 수녀가 현대의 유명한 신화가 된 것은, 그녀가 민중을 선동하는 위대한 연설로 만족하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행동과 사랑을 한데 섞었다. 평온한 은퇴의 삶이 예비되었던 예순셋의 나이에,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묵주만을 무기 삼아 그녀는 카이로의 빈민촌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그곳에 정착하여 학교와 집과 보건소를 세우는 일을 하며 23년간 넝마주이들과 함께 생활한다.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회색빛 수녀복에 흰색의 베일, 검은 농구화 그리고 두꺼운 테의 안경은 겸손과 청빈의 상징이었으며, 또한 다른 사람들을 옹호하기 위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포기하는 태도의 표시였다. 그리고 주름진 얼굴은 지혜를 말해주고 있었다. 반항적인 눈길은 비겁함에 맞서는 저항을 이야기하고, 심각하기보다는 장난기 가득한 성품을 느끼게 한다. 엠마뉘엘 수녀는 구변과 유쾌함과 서정성이 넘쳐나는 여인이었다. 2008년 10월 10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세기를 통과하는 진정한 서사시와도 같은 그녀의 삶의 이야기는 강렬한 의미를 지닌다.
『아듀』의 출판은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되어 있었다. 엠마뉘엘 수녀는 여든한 살이던 1989년에 이 책을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필립 아소의 도움을 받아 2006년 8월, 아흔여덟 무렵에 이르기까지 원고를 수정, 보완, 증보하였다. 그러므로 20여 년에 걸쳐 다듬어진 이 작품은 그녀가 쓴 첫 번째 책이자 마지막 책이 되었다. 첫 번째라고 하는 이유는 이 책을 쓰기 시작한 시점이 그녀가 쓴 어떤 책들보다 가장 빨랐기 때문이다. 그때는 그녀가 아직 이집트에서 살고 있을 시기였다. 그녀는 이 책을 완성하는 데 있어서 생을 마감하기 몇 개월 전까지 백 번도 넘게 이집트를 다녀왔다. 마지막 책이라고 하는 이유는 이전에 한 번도 말한 적이 없는 것들을 고백함으로써, 이 책이 사후에 출간되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이는 물론 부끄러움 때문이기도 했지만, 고백의 내용으로 인해 자유롭지 못할 수도 있음을 염려했던 듯하다.
- 책머리에
※ 책을 펼치면...
지금은 1989년, 여든한 살 성탄절 이브이다. 카이로에서 보내는 이 밤에, 나는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에게 더 가까워진 느낌을 받는다. 그 아기가 나로 하여금 빈민촌에서 넝마주이들과 함께 삶을 나눌 수 있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하느님께는 영광, 사람들에겐 평화! 자정 미사에 가서 기쁨으로 찬양을 하기 전에, 나는 이 책의 첫줄을 써보려고 한다. 나는 어쩌면 이 고백을 통해, 고상하고 우아한 노래로 천사들의 합창 속에 끼어들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까? 아니, 결코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 반대이다. 나는 죽음과도 같았던 세월들을 되돌아보면서, 나와 함께 살고 있는 넝마주이들, 그들의 웃음과 눈물, 그들의 증오와 사랑, 그들의 위대함과 비천함을 그려볼 생각이다. 그러자면 인간의 마음 깊숙한 곳에 감춰져 있는,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야 할 것이다……. 미디어들이 나에 관해 만들어놓은 허상이 지속될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는 한이 있더라도…… 또 한편으로는 충격을 받는 독자들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라도…… 나는 그 점에 대해 먼저 사과를 구하고 싶다. 본래 진실 안에는 다듬어지지 않은 날 것이 있는 법이 아닌가? 나는 앞으로 써나갈 이 책이 뭔가 모범적인 면을 보여주는 책이 되길 원치 않는다. 다만 진실한 책이 되길 원할 뿐이다.
이 책의 첫 번째 목표는 단순히 진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본래 인간은 벗고 살도록 태어난 존재였다. 그런 그에게 죄가 나뭇잎 옷을 입게 했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으로 어머니의 뱃속에서 태어났던 나는, 이제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모습으로 나를 드러내려고 한다. 이런 ‘적나라한 노출’은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잃어버린 시간을 되찾자’는 것일까? 아니다. 난 인류가 모여서 한 점에 이르게 되기를 바란다. 한 아이의 눈물, 한 소녀의 불안, 한 여인의 투쟁, 인간의 고통을 줄여보기 위한 이들의 시도들을 보면서, 독자들도 그 안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고 소리치게 될 것이다.
“아, 이 사람이 바로 나야!”
나는 내 삶의 모험을 그리는 데 그치지 않고, ‘땅의 양식’을 갈망하며 끊임없이 요동했던 ‘한 인간’과 오늘밤 그 탄생을 축하하고 있는 ‘그리스도’, 곧 하느님이시면서 인간이셨던 그분 사이에 있었던 기이한 사랑의 이야기를 되돌아보고 싶다. 이 책은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안에서, 수많은 어린아이들의 표정 안에서, 또 죽어가던 수많은 피투성이의 얼굴들 안에서 만났던 그분을 이야기해줄 것이다. 우리 분명히 하자, 인간에 관한 적나라한 진실이 말해질 때면 언제나 하느님이 함축적으로 나타나신다는 사실을. 이 책에서 나는 마지막으로, 내 전 생애를 움직였던 두 가지, 곧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인간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자 한다.
노엘…… 말구유 뒤에 이미 십자가의 모습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통은 갓 태어난 아기로부터 결코 멀리 있지 않다. 이 글이 출간될 때쯤엔, 아마 난 이미 하느님 안에서 다시 태어나 있을 것이다.
나는 믿는다. 죽음의 풀무 속에서 부활이 솟구쳐 오른다는 것을.
-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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