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 6년 8월에 있은 왕위 양위 사건은 세자를 둘러싼 외척세력의 제거를 위한 기회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그의 의도대로 왕권의 강화와 왕실위상의 강화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이러한 류의 전위사건(傳位事件)은 태종 10년에도 한차례 더 있게 되었다. 태종은 자신과 왕실이 갖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이제 쉰 둘의 나이가 된 1418년은 태종으로 하여금 결단을 내릴 것을 촉구하였다. 비록 이직(李稷) · 황희(黃喜) 같은 강직한 대신들의 반대와 형을 대신하여 아우가 세자에 오른다면 분란이 생길 것이라며 울면서 반대하는 원경왕후가 있었지만, 태종은 결국 눈물을 머금고 그 해 6월 초 3일 양녕을 폐위하고 곧 경기도 광주(廣州)로 그를 내보냈다.
평화로운 시대에 지위에 오를 수 있으려면 그만큼의 어짊과 지혜, 그리고 인덕, 천의가 그에게 모아져야만 한다. 어진 신하와 태종의 보살핌, 그리고 경사(經史)에 대한 성취, 군주로서의 위엄을 모두 갖추고 있던 충녕은 마침내 그 해 8월 8일 왕위에 오르게 된다. 한편으로 태종은 군국의 지휘권만은 아직 세종에게 이양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장남이 아닌 셋째가 왕위에 올랐다는 점과 따라서 군국(軍國)의 일이 갑작스럽게 혼란스러워질 수 있다는 태종의 세종에 대한 배려에서 나온 것이었다.
이제 모든 것이 태종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양위를 하고 상왕으로 뒷전에 물러난 뒤 태종은 형 정종과 함께 동교에 있는 살곶이벌과 낙천정에서 사냥과 주연을 베풀면서 노닐었다. 이렇게 궁궐에서 벗어나 사사롭게 편안한 마음으로 시원한 강물과 산야의 공기를 마신 것이 얼마만인지 몰랐다. 최영, 정몽주, 공양왕, 정도전, 남은, 아우 방번과 방석, 형 방간 등의 싸 움 속에서 항상 긴장을 풀지 못했던 그였다.
왕위에 올라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정사를 돌보다보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또 양녕에 대한 일처리로 골머리를 앓기도 하였다. 어느 때인가는 왕위를 자기에게 물려주고 산천을 오가면서 유유자적하는 형 정종이 부럽기도 하였다. 이제 쉰 둘이라는 나이는 자신을 돌볼 때라고 그에게 속삭였다. 또 그는 어려울 때나 곤란이 닥쳤을 때 안에서 일을 원만하게 처리한 원경왕후에 대한 미안함에서 벗어나 그녀만을 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세월은 쉽게 사람을 늙고 병들게 만든다. 그래도 자신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항상 온화한 얼굴로 맞아주었던 형 정종이 병으로 1419년 9월 26일 인덕궁(仁德宮)에서 승하한 것이다. 또한 이듬해에는 자신과 생사고락을 같이 해온 부인 원경왕후 민씨마져 7월 10일에 수강궁(壽康宮)에서 병으로 그의 곁을 떠난다. 잇다른 형과 부인의 죽음은 수많은 위기를 넘어온 태종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로부터 3년 뒤인 1422년 4월에는 날씨도 화창하여 세종과 함께 철원의 고석정(高石亭) 근처에서 사냥을 하여 노루 · 멧돼지를 한 마리씩 잡았고, 또 22일에는 아들 세종과 동교(東郊)에서 매사냥을 하다가 낙천정(樂天亭)에서 쉬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날 태종은 환궁 하였다가 자리에 눕게 되었다.
그의 나이 쉰여섯이 되던 1422년 5월 10일, 천달방(泉達坊) 신궁(新宮)에서 아들 세종과 양녕(讓寧), 효령(孝寧), 후궁과 그 자식들, 그리고 신하들이 애통해 하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은 것이다. 희대의 영웅으로서 한 시대를 움직여 나갔던 그가 앞서간 부모와 형들을 쫓아 그 삶을 마감한 것이다.
태종의 곁에 있으면서 그를 지켜보았던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 변계량(卞季良)은 태종 신도비문(神道碑文)에서 그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태종은 좀처럼 세상에 없는 뛰어난 자질로서 성학(聖學)에 밝았으며, 효도와 우애가 신명(神明)에 통하고, 정성과 공경은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에 이르렀으며, 사대(事大)하는 일은 천자가 그 지성(至誠)을 칭송하였고, 교린(交隣)하는 일은 왜국(倭國)이 그 도(道)가 있 는 데 복종하였다.
하늘을 흠모하고 백성을 불쌍히 여기며 검소함을 숭상하고 비용을 절약하였다. 덕(德)과 예(禮)를 먼저 하고 형벌을 삼갔으며, 충직(忠直)한 이를 등용하고 간사한 이를 내쳤으며,이단(異端)을 물리치고 음사(淫祀)를 금지하였다.
고금(古今)을 참작하여 제도 를 정하고, 문교(文敎)를 밝게 하고 무비(武備)를 엄하게 하였다. 쌓였던 폐단을 모두 개혁하니, 모든 공적(功績)이 다 빛나고, 사방(四方)이 안도(按堵)하여 백성이 편안하고 산물이 풍족하니 제왕(帝王)의 도(道)가, 아! 성하였도다. 그 황제의 사랑을 얻음이 융성하였던 것 과, 두 번씩이나 감로(甘露)의 상서(上瑞)를 얻었던 것도 마땅하다 하겠다.
태종은 그 해 9월 6일 광주(廣州) 서대모산(西大母山) 즉 할미산의 양지 바른 곳에 부인 원경왕후와 함께 합장되었다. 오늘날의 서울시 서초구 내곡동에 해당된다. 그리고 능의 이름을 헌릉(獻陵)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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