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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과 함께 가는 여행 원문보기 글쓴이: 황봉학
공사를 시작함
그대와 더불어 지향할 곳이
지금 이곳이 아니라면 저는 우선
다리 하나를 놓겠습니다
실개천이면 외나무다리를
개울이면 징검다리를
깊은 강 가로막혀 있으면
튼튼한 철근 콘크리트로
건너고 싶은 사람들 건너게 해야지요
몸이 불편한 친구가 사양해도 저는
그를 부축해주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건너게 해야지요
우러러볼 별과 달이 없어도
살아 있는 한 사는 거라고
화톳불에 언 몸을 녹이다 보면
봄 햇살 언 몸을 녹여줄 거라고
하지만 섣불리 단정하진 않으렵니다
완공시킬 날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지푸라기 하나라도 이 땅에 생겨나려면
둘 이상의 계절이 필요하듯이
땅과 땅이 손 내밀어 따뜻이 화해하는
그 순간이 오기까지 '너'와 '내'가 아니라
'우리'라는 이름 아래 늘 함께라면
그대는 단념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겠지요
저는 다리 하나부터 놓을 것입니다.
내림굿
찔레꽃 떨어지는 새벽의 마을에서
살아왔다 앓아왔다 내 사람아
계면조의 울음일랑 묻어 두고
한 손엔 부채 한 손엔 방울을 흔들며
내 애간장 태울 대로 다 태워, 에라
되집고 돌아서 널뛰듯 춤을 추랴
헤매던 넋 하나 돌아오고 있다
서러움에 지펴 이렇듯 몸 쑤시면
차라리 악에 받쳐 세찬 도리질이야
같이 죽어 영원히 같이 살 것을
눈 못 감고 죽은 너는 먹장구름이야
내 얼굴에 퍼붓는 너는 굵은 빗방울이야
고샅을 돌아나오면 꼭 네 생각이 났다
피었다 지고 졌다 또 피어나는
찔레꽃 산길에서 하나가 되었던들
오냐, 남치마 일월대 홍철릭 신칼
내가 살아 삶의 내력을 풀어 간다면
너는 다가와 죽음의 내력을 들려주어
보았다 아무것도 안 보여 팔 휘저으며
왔느냐 어디를 갔다가 예 왔느냐
수많은 영육 밤의 수렁에 빠졌는데
얼마를 더 살겠다고 굿당 앞에 서
튀는 율동이 되어, 만개한 꽃송이 되어
햇살을 향한 入巫라니--내 사람아.
너는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
너는 나를 빌려 태어난 것이니
너는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
갓 돌이 지난 자식을 씻긴다
분홍색 플라스틱 물통에 물을 받아
아토피스형 피부염
온몸이 사람의 살 같지 않게 거친
자식의 몸을 씻긴다
장난삼아 고추를 톡 건드리자
내 몸을 빌어 태어난 자식이
간지러운지 까르르 웃는다
10대조 할아버지 아기 때의 웃음 소리도
똑 이러했을 터
나와 성씨가 같은 미지의 사내가
한 여인의 몸에 튼튼히 길을 놓아
태어난 몸이 있었을 것이다
한 여인의 몸에 난 길을 뚫고 나와
태어난 자식이 지금 웃고 있다
情念의 피는 대를 물리는 법
무덤도 흔적 없을 수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몸이
지금 너의 몸 안에 들어 있다
갓 돌이 지난 하얗고 작은 생명체여
너는 나를 빌려 지상에 온 것이니
너는 나에게 아무것도 빚진 것 없다.
당신이 내 앞으로 걸어오면
당신이 지금
아무것도 입지 않은 몸으로
내 앞으로 걸어오면
나는 넌지시
들풀로 탈바꿈해 나부죽이 흔들릴까보아
당신이 지금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손으로
내 앞으로 걸어오면
나는 넌지시
풀피리로 탈바꿈해 흐느껴 울까보아
살아 있기에
온갖 아픔 못 떨치는 당신과
한 백년만 바람 맞으며 흔들릴 수 있다면
나는 들풀이 되어도 좋다
나는 풀피리가 되어도 좋다.
면회
등뒤에서 문이 닫힌다
사유의 자유가 무한한
이곳은 얼마나 평화로운가
바람도 술잔도 없는 곳
무죄한 네가 보고 싶어 찾아왔다
......잘 있었니?
웃고 있구나
쾌락과 도취를 거부한 누이
창백한 너를 따라 나도 말없이 웃어야겠지
마주보며 웃을 뿐
침묵이 한동안 자연스럽다
생각해보렴
육체란 게 얼마나 사악한지를, 추악한지를
제 명 다하면 하얀 뼈 말려야 할
너도나도 살아 있어 웃음 짓는가
살아 있어 만나고 헤어지는가
우리 사이의 안 보이는 금, 아직
세계는 전모를 드러내지 않고 있어, 아직
욕망의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惡이란다
모든 죽음은 언제나 타인의 죽음
모든 고통은 언제나 자신의 고통이란다
우리 둘의 거리는 불과 1미터
DMZ 너머보다 멀게 느껴진다
무엇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기에……
아, 하늘이 없다
잘 있거라
몇 권의 책을 놓고
나는 다시 한낮의
저 어두운 거리로
맨몸으로 돌아가야 한다
등뒤에서 닫히는 문.
문학평론가 김윤식(金允植)
1
모든 너에게
이것은 너 때문이었다.
내가 왜 文學을 하게 되었는지는 나도 잘 모르지만, 그러나, 이렇게 X字가
붙은 것을 하게 된 것은 바로 너 때문이었다.
빌려주지도 않은 돈을 달라고 떼쓰던 ─ 그런 心情을 아는가,
너는 그런 心情을.
손톱 자국 난 가슴으로 西海바다 소금 낀 바람에 피묻은
빨래조각 같은 깃발이 있었다면, 너는 웃으라.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이것을 너는 내게 가르쳤다.
그리하여, 이 모든 것은, 아무 것도 아니면서 ─ 너 때문이었다.
─ 《현대문학》(1962. 8), 101쪽 金允植의 薦了所感 전문
2
“노예선의 벤허처럼 눈에 불을 켜야만 나는 사는 것이었다”
그것을 김윤식은 내게 가르쳤다.
1936년 8월 10일생.
경남 진영 깡촌에서 태어난,
지방 상업고등학교를 나온,
입이 약간 돌아가 있는,
한국문학이 그에게 빚지고 있는 것은
그 수많은 저서가 아니다.
눈에 불을 켜야 한다는 것,
빌려주지도 않은 돈을 달라고 떼쓰던 그런 심정을, 그런 심정으로
글을 써온……,
예순 넘긴 나이로도
밤이고 낮이고 책을 읽고 있는
낮이고 밤이고 글을 쓰고 있는……
이 마을 저 무리 기웃거리면서
‘권력과 영광’을 찾는
‘오만과 편견’에 사로잡힌 글장이는
김윤식의 집념을 알고 있어야 한다.
내가 나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내가 내 눈에 불을 질러야 한다는 것,
살아 있는 한은, 아아 노예선의 벤허처럼……
그것을 김윤식은 내게 가르쳤다.
3
세 가지 자문
나는 무엇인가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내 문자 행위의 출발점은 이것이다
부끄러워 고개 들지 못할 때
자신을 이겨낼 수 없다는 무력감에 사로잡힐 때
원고지를 대하는 일은 구원이 아니라 구속이었다.
줄기차게 꾸짖는 200 개의 네모난 입들
─ 너는 결코 떳떳하지 않아, 너는 벌써 물들어 있어.
몇 차례의 시행착오를 더 겪어야
나도 하나의 성채를 가질 수 있을지
쌓으면 무너지는 모래성 같은 詩들
맨손으로 땅을 파내려가면
세계의 끝을 찾을 수 있으리라
그렇게 믿으며 살아온 당달봉사의 나날들
명암에 대한 성찰에의 길을 찾아서
나는 늘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언어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폭우 속의 모래성일지라도
내 정신은 부활만을 꿈꾸었던 것이다.
고막이 터져도 終生토록
안구가 파열해도 終生토록
이 땅 이 시대의 당신들을 벗삼을 수 있다면
노예선에서 생을 마친들 뭐 어떠랴
바람 그리기
황혼의 감천*으로 너를 보낸다 누이야
네가 혼자 사분거리다 냇둑을 뛰어가면
다옥한 네 머리카락 황금빛으로 빛났다
망각의 시내 이편에서 나는 지켜보았다, 너는
아무런 수치심도 없이, 두려움 하나 없이
오롯이 옷을 벗었다
하나씩 발 아래 옷이 쌓이면
도리암직한 네 몸 청동빛이 났다
그때 감천은 무르춤하였고,
깊이깊이 한숨짓는 바람의 다발
울음 참고 나는 오래 지켜보아야 했다
그 무력했던 날들
누이는 어느 날부터인가
월경이 멎고, 식욕을 잃었다
낮에 웃고 밤에 바장이고
혼자 웃고 혼자 흐느끼고
잘 쉬어라 쉬어
네 곁에서 나직이 휘파람 불면
누이는 일어나 두 팔 아느작거리며
집을 나섰다 마을을 나서
혼자 가만가만 웃다 바람이 이끌면
네 혼을 불러내는 정든 시내
그 냇둑에 서서 바람을 그리겠다고
바람의 매무새를 그리겠다고
감천아, 감천의 바람아, 착란의 이 땅아
내 누이는 영원히 어린애란다
나와 누이를 연결시켜주는 끈은 없단다
버려진 내 누이, 너는 아직 곱게도 미쳐……
* 감천(甘川):김천시 외곽을 흐르는 시내.
본회퍼의 혼에게 띄우는 편지
그 감옥에서 그대
몇 번을 기도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리
죽게 될 날을 기다리며
아니, 그래도 풀려날 기적을 간구하며
무슨 축복인 양 중심이었던 그 사람
총각으로 죽은 나사렛의 한 젊은이
예수의 이름에 배어 있는 피의 의미를
기도하는 도중에라도 깨달았다면
디트리히 본회퍼
그대 죽기 전에 이미 구원받았을 사람이네
그 감옥에서 그대
몇 번을 참회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리
나도 기억할 수는 없다네
누이를 데리고 다닌 이 나라 정신병원의 수와
내 입 속으로 털어넣은 몹쓸 알약의 수를
무슨 축복인 양 중심이 될 그 사람
못 박혀 죽은 나사렛의 한 불효자
예수의 이름에 배어 있는 고난의 의미를
편지 쓰는 도중에라도 깨달았다면
디트리히 본회퍼
그대 죽기 전에 이미 부활했을 사람이네
그 감옥에서 그대
몇 번을 절망했는지 기억하지는 못하리
내 절망이 철망으로 차단된 누이의 세상을 벗어나
밤마다 꿈에 멀쩡해져 만날지라도
구원이며 부활을 꿈꾸진 않으리
내 다시는 나를 위해 고해하진 않으리.
뼈아픈 별을 찾아서
- 아들에게
취해서 귀가하는 어느 밤이 온다면
집에 당도하기 전에 꼭 한 번
하늘을 보아라 별이 있느냐?
별이 한두 개밖에 없는
도회지의 하늘이건
별이 지천으로 돋아난
여행지의 하늘이건
뼈아픈 별 몇이서
너를 찾고 있을 테니
그 별에게 눈 맞춘 다음에야
벨을 눌러야 한다
잠이 들어야 한다 아들아
천상의 별을 찾는다고 네 발 밑에서
지렁이나 개미가 죽게 하지 말기를
통증을 느끼는 것들을 가엾어하지 않는다면
네 목숨의 값어치는 그 미물과 같지
아들아 네 등뒤로 떨어지며 무수히 죽어간
별똥별의 이름은 없어 뼈아픈 별이기에
영원히 반짝이지 않는단다.
사랑의 탐구
나는 무작정 사랑할 것이다
죽어버리고 싶을 때가 있을지라도
사랑이란 말의 위대함과
사랑이란 말의 처절함을
속속들이 깨닫지 못했기에
나는 한사코 생을 사랑할 것이다
포주이신 어머니, 당신의 아들
나이 어언 스물이 되었건만
사랑은 늘 5악장일까 아니 女湯
꿈속에 그리는 그리운 고향 그 고향의
안개와도 같은 살갗일까 술 취한 누나의
타진 스타킹이지 음담패설 속에서만
한결 자유스러워질 수 있었고
누군가를 죽여버리고 싶을 땐
목청껏 노래불렀다.
방천 둑길에서 기타를 오래 퉁기고
왠지 부끄러워 밤 깊어 돌아왔더랬지
배다른 동생아 너라도 기억해다오
큰 손 작은 손 손가락질 속에서
나는 자랐다 길모퉁이 겁먹은 눈빛은
바로 나다
사랑은 그 집 앞까지 따라가는 것일까
세월처럼 머무르지 않는 것일까
낯선 누나가 흘러 들어오는 것이지
젓가락 장단에 잠 설치지만
사랑이란 다름 아닌 침묵하는 것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것
쓰다듬어주면서
네가 하는 말을 다 이해한다고
고개 끄덕여주는 것.
상처
산 개미가 죽은 개미를 물고
어디론가 가는 광경을
어린 시절 본 적이 있다
산 군인이 죽은 군인을 업고
비틀대며 가는 장면을
영화관에서 본 적이 있다
상처입은 자는 알 것이다
상처입은 타인한테 다가가
그 상처 닦아주고 싸매주고
그리고는 벌떡 일어나
상처입힌 자들을 향해
외치고 싶어지는 이유를
상한 개가 상한 개한테 다가가
상처 핥아주는 모습을
나는 오늘 개시장을 지나가다 보았다
상황 1
난생 처음 임종을 지켜보았지
홀로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은 휑뎅그렁하니 비어 있었거든
정체 모를 두려움 불을 켰으나
바로 정전이 되었지
초를 찾아 불을 밝혔는데, 젠장
어둠이 잠복한 방 안에서
내가 나를 보고 있었거든
분명한 음영의 무시무시한 얼굴
거울 앞으로 다가갔지
창백하게 얼어 있는 허구(虛構)
나는 떨었다 저건 치명적인
거짓이다 세상의 거울은 거짓말만 속삭인다
노려보는 두 눈 고개를 들 수 없어
그때, 육체를 강타하는 배설의 욕구
화장실 문이 고장으로 잠겨 있었거든
촛농이 손등에 마구 흐르고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이
나를 용납하지 않고 있었다
어디선가 내가 나를 보고 있었거든
몸을 돌려, 비틀걸음으로
거울 앞으로 다가갔지
나는 맨주먹으로 그놈을
아아 있는 힘을 다하여……
상황 6
기웅이와 함께 삼촌을 따라간 복날…… 맑은 공기…… 깊은 숲 속이었
다…… 여기가 좋겠어…… 동네 청년들은 잠시 앉아 땀을 훔쳤다…… 삼촌
이 시작하자고 외쳤다…… 날씨 화창한 그날, 울창한 나무 사이로 쏟아지는
몇 줄기 무심한 햇살……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던 누렁이를 삼촌이 한 청
년의 도움으로 자루에 집어넣었다…… 어어, 누렁이를 왜…… 나무에 매달
아놓은 자루를 청년 둘이서 몽둥이로 패기 시작했다…… 깨갱 깽깽 깨갱 깽
깽깽…… 비명이 숲에 울려퍼지고……누군가의 륙색에서 솥이 나왔고, 큰
물통도 나왔다…… 솥이 걸리고…… 삼촌, 누렁이가 뭐 잘못했어?…… 저
래야 고기가 연해지는 거야…… 퍽퍽 쉴새없는 몽둥이질…… 깨갱 깽깽 깨
갱 깽깽 기웅이가 귀를 틀어먹더니 뒤로 벌렁…… 가끔씩 간질 발작을 해
초등학교 4학년에 올라가면서 학교 관두고 자물쇠 공장에 나가 일을 배우
던 기웅이…… 벌렁 나자빠져 거품을 입가에 물고…… 난 고기 안 먹을
래…… 짜식, 보신탕집에 따라와 잘만 먹더라…… 이것도 힘든데……몽둥
이는 다른 청년에게 넘어가고…… 비명이 끼잉끼잉 신음소리로 변하더니
잠시 후 멎어버렸는데도 때리고, 더 때리고, 다시 때리고…… 뼈와 살이, 머
리와 등이 맞는 소리…… 기웅이가 낙엽 위에 드러누워 흰 눈자위 가득한
눈으로 하늘을 봤다…… 그 정도면 되겠다…… 피범벅이 된 누렁이가 자루
속에서 나왔다…… 시뻘개진 누렁이는 다시 나무에 매달렸고…… 껍질을
태우는 냄새…… 뻣뻣하게 뒤틀려 있는 기웅이의 사지…… 경련하는 한쪽
다리를 잡았다…… 가자, 기웅아…… 냄새가 너무 지독하다…… 자꾸만 토
할려고 그래…… 얘, 어디 가니?…… 삼촌도 사람이지? 삼촌도 사람이지?
…… 왜 애들을 달고 와선…… 기웅아 고만 해라…… 냄새가, 냄새가 안 나
는 무덤가로 나는 기웅이를 질질 끌고서…… 나는 울면서, 쏟아지는 햇살
속으로…… 토하고 싶은 기분으로 샛노란 햇살 속으로…… 기웅이 옆에 꿇
어앉아 웩웩거리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햇살 속에서……
세상의 모든 어머니에게
자궁 적출 수술을 하신 날의 밤
통증으로 잠 못 이루는 당신 곁에 앉아
서른셋에 죽은 한 사내의 이적을 읽습니다
눈앞에서 자식이 죽어가는 모습을 본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이여
그대 살아갈 생애의 무게는
이 우주의 무게와 맞먹을 것입니다
눈앞에서 어머니가 죽어가는 모습을 본
세상의 모든 자식들이여
그대 살아갈 생애의 무게는
이 우주 무게의 일부를 이룰 것입니다
34년 전 난세포 하나로 저를 잉태하고
오늘 자궁을 들어내신 나의 어머니
한쪽 가슴 이미 없으시니
그대 여성으로서의 몫은 다하신 것이지요
그날 1960년 4월 18일
한나절 꼬박 통증으로 눈물 흘리며
생명이라는 우주를 이 우주에 내보내신
당신을 다시 한 번 불러봅니다
"어머니―"라고.
시간의 무게
형제여, 들고 가는 그 시간이
무겁지 않습니까 신발은 이미 젖었는데
우산 없이 견디고 계신 당신 몸과
산지사방에 내려꽂히는 시간
거역할 수 없이 쏟아지는 시간들이
조금은 아프지 않습니까
생일을 기억하고 제삿날을 기억하는
우리는 모두 같은 시간 속에서
무엇을 챙기며 살아가는 것일까요
잠시 후, 그리고 먼 훗날에도 시간은
땅에서 하늘로 솟구치지 않겠지요
낮은 곳에서 높은 곳으로 흐르지 않겠지요
종이배처럼 떠내려가 다시는 오지 않을
멀고먼 시간, 시간들
형제여, 제 나이도 이제 마흔하나랍니다
살아온 시간이
살아갈 시간보다 많다는 것을 안다고 한들
촌초를 다시 다툴까요
촌음을 거듭 아낄까요
포켓에 난 구멍으로 술술 빠지는
기나긴 나날, 나날들
태엽을 감고 있을 때
시계를 수리점에 맡길 때
또 얼마나 많은 타인의 시간이 아파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마지막 숨을 헐떡이겠습니까, 마는
밤마다 창을 열고 외치곤 합니다
내가 시간에다 몸 맞추면
나를 안은 우주가 전율할 것이라고......
아픈 형제여.
실직
눈앞의 모든 것이 별안간 삐뚜름해지는군 어느 날 아침 출근 시간
나는 늘 타던 지하철 4호선을 타지 않았어 엉뚱하게, 전혀 엉뚱한
버스에 몸을 실었지
차창 밖 빌딩들은 하나같이 무표정하다 너희들이 날 무시하는거냐 돈
돈이 없으니 평화의 댐 건설을 위해 나는 현재로선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도대체, 겉으로 드러나지 않으면서도 줄기차게 맹랑하게
나는 기죽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시간일까, 일자리일까, 아니면 태아?
아내는 벌써 4개월째라네
세 판을 내리 지고 한 판 이겼어 속 시원하게 불계승
담배를 물고 어둠 내린 거리로 나섰지 눈에 확 들어오는 '643'
팔팔 올림픽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나도 한때 나리가 되고 싶었지 월말고사 입학시험 입사시험 뭐
그런 시험을 아주 잡친 것도 아니었어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열리긴 뭐가 열려
윽박지르지 말아다오 시간이여 일자리여 곧 태어날 내 자식이여
점점 살기 좋아진다는 3低의 시대 그러나 나는 아직 아무런
계획이 없다.
어머니가 가볍다
아이고―
어머니는 이 한마디를 하고
내 등에 업히셨다
경의선도 복구 공사가 한창인데
성당 가는 길에 넘어져
척추를 다치신 어머니
받내는 동안 이렇게 작아진
어머니의 몸 업고 보니
가볍다 뜻밖에도 딱딱하다
이제 보니 승하가 장골이네
내 아픈 니를 업고 그때……
어무이, 그 얘기 좀 고만 하소
똥오줌 누고 싶을 때 못 눠
물기 기름기 다 빠진 70년 세월 업으니
내 등이 금방 따뜻해진다.
역사를 위한 변명
가려거든 가라 돛대도 아니 달고
바람도 불지 않는 저 바다로
별들이 몸 숨기는 밤이 오면 가라
병든 말을 내리치며 물가에 닿으면
삿대도 없는 배가 그대들을 맞이할 게다
가라 안개 걷히지 않은 황해
아직은 미명 아직은 멀어 새벽밥 먹고 있어야 하리
좌별초, 우별초, 신의군
옷소매를 걷고 모여 백기 불태웠으나
굴욕의 시절은 길어 산하 차례로 유린되리
가라 가라 맨손으로 노를 저어 남으로 더 남으로
강화도, 진도, 쫓겨간 제주도에도 파도는 거세고
천하디 천한 그대들은 마지막까지 남아 성벽을 쌓고
묵묵히 겨울과 대항하는 성채.
육교 난간에 서서
육교 난간에 서서 내려다보면 마치
개가 된 듯한 기분이다
흐르지 않는 인파를 향해
줄 이은 차량을 향해
맹렬하게 짖고 싶은 기분이 든다
하루에도 몇 번씩 원고가 되었다가
하루에도 몇 번씩 피고가 되는 생활
육체는 종일 자동판매기
고장이 나기까지 삼킨 만큼 꼭 내뱉는
육교 난간에 서서 올려다보면 마치
개가 된 듯한 기분이다
킬킬대는 낮달을 향해
무표정한 애드벌룬을 향해
맹렬하게 짖고 싶은 기분이 든다
쾌락의 한계효용
고통의 한계효용
무턱대고 자수하고 싶은 마음으로
쫓기어 와 쫓기어 와서 이 천길
낭
떠
러
지
에 서서.
이 거대한 세기말 병동에서 9
94년 러시아의 한 해커가 인터넷을 통해 시티뱅크에 침투, 1천만 달러
를 훔쳐갔으며, 미국 10대 해커들이 뉴저지 공군기지의 한 연구소에 침투
한 일이 발생, 미국 사회를 경악케 했다. 올해 초에는 버지니아 랭글리 공군
기지의 컴퓨터 네트워크가 마비됐다. 호주와 에스토니아의 해커들이 3
만 통이 넘는 전자 메일을 쏟아 부었기 때문이다. ㅡ<중앙일보> 1997년 11
월 5일자 10면에서
여기는 밤의 천국
숨쉬는 존재는 당연히 없다
여기서는 아무도 살지 않지만
계산되고 있다 정보를 교환하는 신과 인간
유한(1)과 무한(0)이 만들어내는
무가치한 존재의 더미
전세계의 사막이 점점 넓어지고 있듯
묘지가 자리 넓혀 지구를 뒤덮고 있다
비석도 없는, 생몰년도 모르는
주검들, 주검의 산, 산맥
하루에 쓰러지는 건물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파괴되는 승용차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생산되는 컴퓨터의 수를 생각한다
하루에 버려지는 신생아의 수를 생각한다
이 거대한 쓰레기의 지구를 덮치려는 듯
몰려오는 허리케인
불어오는 황사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줄기차게 쏘아 올리는 우주탐사 로켓
10! 9! 8! 7! 6! 5! 4! 3! 2! 1! 0!
컴퓨터 화면…… 내 마음의 킬링필드
너와 나의 관계가 구조 조정되는 이 환각의 밤에
나를 울컥 구토케 하는 것의 정체는?
잃어버린 관계
나를 노려보지 마라, 잭 니콜슨
아니, 맥머피
철조망 안에 서 있는
너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
나는 죄가 없어, 맥머피
아니,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졌다
낳아 주시고, 키워 주시고, 학교까지 보내 주신
애비와 에미를 나는 열여섯 살에 버렸었지
나이를 먹으면서 친구와 친척을,동료와 전우를, 애인을 버렸었지
얼마나 오래 탈옥을, 일본으로의 밀항을,지상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었던가
仁川 李氏 성을 버리기 위해 얼마나 발버둥쳤던가
관계를 맺을 때마다 얼마나 두려움에 사로잡혔던가
더 이상 죄의식에 사로잡히고 싶지 않아
맥머피, 나쁜 자식, 네가 뭘 안다고
나를 노려보니?
처형하지 않으면 처형되기 때문에?
무서운 애비와 에미
그분들을 내가 처형해도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하는
神은 나를 용서하리라 믿었었지
누대의 조상은 이해하리라 믿었었지
난 더 이상 잃어버릴 것이 없단다
그러니 노려보지 마라, 잭 니콜슨
아니, 맥머피
철조망 밖에 서 있는
너의 눈빛이 너무 무서워
나를 이 감옥에서, 이 세계에서
이 거대한 병동에서 내보내 주어
철조망을 걷어 주어…… 빨리!
자인팔광대 말뚝이를 찾아서
야 이눔아 니 버버리가?
언제부터 버버리로 살기로 했더노?
말뚝아 말뚝아 야 이눔 말뚝아
니라도 나와 굿거리 장단에 몸을 흔들며
한바탕 신명나게 놀아야잖겠노?
팔광대 줄광대 다 불러와
욕 한마디 걸찍하게 내뱉아야잖겠노?
지기미 ×발 쌍눔같이 야 야가 머꼬
정월 대보름날 소 부르나 말 부르나
자인 장날 봉놋방에 든 노총각
꼭두새복에 지 혼자 선 가분데 다린가
자인 장날 놀이마당 편 우리 광대패
차일 칠라꼬 땅에다 박은 말뚝인가
좋다 좋다 쿵망캥캥 후르르삣죽
우루과이인지 우르르 꽝인지
농축산물 전면 개방인지
신토불이 전멸 개발인지
하늘 우러러보다 나랏님 우러러보다
우르르 꽝 청천 벽력 맞아
엎친 데 덮쳤는데 이눔 말뚝아
욕 한마디 속 시원하게 씨부려야잖겠노?
지기미 ×발 내 가심은 숫제
수껑이다 오뉴월 땡볕에 솥뚜껑이다
목민관의 치세에도 살아 남았는데
진주민란 동학혁명 죽어 있진 않았는데
일본놈들 공출에도 살아 남았는데
소작쟁의 노농운동 죽어 있진 않았는데
좋다 좋다 쿵망캥캥 후르르삣죽
말뚝아 말뚝아 야 이눔 말뚝아
땅 지키고 쌀 거둔 농사꾼들이
땅 팔고 집 팔아 도회지로 가
쌀 구걸해다 먹게 생겼는데
간 팔고 쓸개 팔아 대국에 가
쌀 꾸어다 먹게 생겼는데
니가 먹물 잔뜩 먹은 내 대신에
한마당 흐뭇하게 놀아봐야잖겠노?
지기미 ×발 비기도 싫다
막판꺼지 와서 난리 법석 친
양반도 영감도 다 비기 싫다
자인 장날 지름 잘잘 흐르는 햅쌀밥
내 돈 내고 사묵지 못한다면
내는 버버리로 지낼끼다
좋다 좋다 쿵망캥캥 후르르삣죽
* ‘버버리’, ‘수껑’은 ‘벙어리’, ‘숯’의 경상도 사투리. ‘지기미 ×발’과 ‘좋다 좋다 쿵망캥캥 후르르삣죽’은 慈仁八廣大에 자주 나오는 대사. 자인팔광대는 경북 경산군 자인면 일대에서 행해오던 자인단오굿 때, 한장군 사당 앞에서 놀았던 가면극임.
1939년 단오굿 때의 연행을 마지막으로 일제에 의해 중단되었으나 오랜 복원작업 끝에 제2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88)에 참가해 문공부장관상을 받았음.
젊은 별에게
다시 밤이다
시야에 출렁이는 겨울 별자리 어디
자전과 공전의 질서를 깨뜨릴 수 없어 고뇌하는
젊은 별이 있다면, 지금 나에게 신호하라
내 짙푸른 꿈 하나 쏘아 올릴 터이니
광년의 거리 밖 너의 괴로움과
내 바람의 외투를 걸치고 길 나서던 날들의 절망감이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내 아무런 확신 없이 떠돌던 삶이
네 울분으로 들끓는 코로나
백만 도가 넘는 뜨거움을
만나서 녹아 내릴 수 있다면
고생대, 중생대, 참 얼마나 많은 화석된 시간을 지나
겨울 별자리와 나는 이 밤에
이 우주의 한 귀퉁이에서
대좌하고 있는가, 밤마다
내 참 얼마나 많은 별에다
旣成에 대한 증오의 화살을 쏘아 올렸던가
어디를 가도 안주할 곳은 없었으니
멀고 먼 시간의 바다인 황도
12궁이 가리키는 세상을 향해 떠났었다, 그날 이후
내 죄악의 유혹에 얼마나 자주 굴복했던가
소리내어 울면서 버린 동정을
얼마나 오래 저주했던가
나보다 더 오래 질서이신 신을 저주한 사람이 있으면
만나고 싶다, 그를 힘껏 포옹하리
지금은 밤이다, 끝 모를 어둠
몸부림치는 서로의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것은
언제나 밤이지, 시작 모를 어둠이
지상에 가득 찰 종말의 날이
내 생애의 어느 날이 될지라도
어둠 속에서 표류하는 젊은 별이여
너를 축복하리, 환하게 웃으며 반기리, 환히
환희의 날이 너와 나의 사후에 올지라도
왜 이리 두려울까, 두렵지만 지금은 밤이니
질서에 길들기를 거부하는 젊은 별이여
희뿌연 새벽이 오기 전에
내게 신호하라, 내 온몸으로 뜨겁게
뜨겁게 너와 결합하고 싶다.
정선아라리를 찾아서
정선아라리를 찾아서 가는 길은
가도 가도 산이네 산은 바위산
돌기와집 기울어져 있고 집은 비었나
가도 가도 밭이네 밭은 묵정밭
잡풀만 칠칠하고 밭은 버려졌나
물이 저대로 흘러 돌아오지 않듯이
사람도 저대로 흘러 돌아오지 않을까
토하듯 이 내 가슴 후련하게
아라리로 정선아라리 노박이로
불어제칠 사람 이 고장에 없나보이
싸릿골 처녀 얘기 나루터 총각 얘기
아 그 왜 아우라지 나루터 가기 전
수수밭 삼밭에 숨어 별짓 다 하던 시절 얘기
들려줄 사람 정말 이 고장에 없나보이
말캉들 가는데 저도 인젠 가야겠에유
어디 간들 여기보단 낫겠지유
어디 간들 정선아라리 600여 수
뗏목처럼 엮어지던 그 노랫말도
수수깡처럼 휘어지던 그 가락도
이제 들을 수 없으니,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 고개로 나를 넘겨주게.
정윤화(鄭閏和)의 북춤
북이 없었더라면 어떻게 헤쳐나왔을꼬
꽃고깔 눌러쓰고 북 힘껏 치면
흘러갈 것들 다 흘러갔고
사라질 것들 다 사라져갔구마
이날 이때껏 온몸으로 북 치며
북 치며 둥글게 돌며
돌다가 바람에 노는 연처럼 재주부리며
내는 나이도 잊고 살아왔구마
고달프다고 북 버렸더라면 어떻게 헤쳐나왔을꼬
꽹과리와 징까지 공출당한 일정 때는
잽싸게 몸 돌리면서 치는 잦은가락으로
양코배기 군인들이 설친 군정 때는
발뒤꿈치 들썩대고 얼러가며 두드리는 외장단으로
형제끼리 죽이고 자식까지 내버린 6·25는
발로 북 받쳐들고 앙금앙금 뱅뱅 돌며
남북으로 갈려 소식조차 모르고 지낸 지난 40년은
한 발 내딛다가
북을 어깨 뒤로 획 돌려 제치며
천둥 번개가 끝나면
오색 꽃구름이 안 비치겄나
힘을 넣은 장단으로 몰아치다가
멋을 넣은 가락으로 흩뿌리다가
덩실, 신나는 추임새 끌어내고
으쓱, 북으로 재미나게 놀아주고
멈칫, 춤사위로 가락 마무리하면
세상 어느 구석에는 그래도 여유가 있었으니
내는 나이도 잊고 신나게 살아왔구마.
종이
-지식인들에게
1
오늘 그대 앞에 놓인 그 종이는
자술서입니까 전향서입니까
쓰자니 손 떨리고 가슴 두근거리는
왜곡 보도하는 기사문입니까
이실직고하는 참회록입니까
그 많은 친일 문인 가운데
참회록을 쓴 이는 없는 대한민국의
지식인들은 오늘도 종이 앞에 앉아 있습니다
2
서 있습니다 투표 용지 앞에서
붓뚜껑을 들었을 때
일생 동안 春園과 六堂처럼 훼절한 적 없으신
제 아버지와 장인은 지식인입니다
《지리산》과 《태백산맥》을 읽으시는 아버지
《文藝春秋》를 정기 구독하시는 장인
신념을 갖고서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뽑고
권총을 차고서 정계로 진출한 군인들을 옹호하는
두 어른은 대학을 나온 지식인입니다
3
내일 그대가 소리쳐 읽을 종이는
판결문입니까 선언서입니까
읽어도 손 떨리고 가슴 두근거리지 않는
양심과는 무관한 판결문입니까
양심에서 우러난 양심 선언서입니까
수많은 이 땅의 지식인 가운데
글로써 양심을 파는 이 없는(?) 대한민국의
지식인인 저는 오늘도 종이 앞에 앉아 있습니다.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는 햇볕
지하도 계단에 설치된 기계가 고장났다
가파른 삶
지나가던 사람이 그를 업었다
덜렁거리는 두 발
다른 두 행인이 빈 휠체어를 들었다
휠체어에 앉았던 그의 어머니
네 사람의 뒤를 따라가고 있다
햇볕이 지하도 깊숙한 데까지 따라 내려갔다.
짐진 자를 위하여
너의 짐을 져주는 일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를
너는 생각해본 적이 있는가
나는 고통에 짓눌려 딱정벌레처럼 위축되어
이게, 기어가는 것인지 죽어가는 것인지
촉각 잘린 귀뚜라미처럼
관절염 앓는 어머니처럼
나는 살아가고 있는데
네가 캄캄한 밤에 돌이 되어
내 앞에 엎드리면
나는 너를 지고
너의 짐까지 지고
어디쯤에 이르러 숨돌려야 할까
울음 참으며 당도한 곳이 막다른 골목이면
울음을 그냥 터뜨려야 하는지
돌아서서 다시 걷기 시작해야 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이기 때문에 무력감에 절망하고
공포에 질려 부르짖기도 하지만
기적을 꿈꾸진 않으리라
부끄러움에 떨며 받아들이리라 너의 짐을
나의 짐 위에 너의 짐을 얹어
더 어두운 세계를 찾아서 갈 터이니
자거라 지금은 잠시 자두어야 할 때.
집짓기
비어 있는 들판에
돌을 실어 나른다
오래 가꾸어온
몇 조각 꿈도 실어 나른다
갈 데 없던 시절의
공연한 헛기침들
피붙이 같은 材木에게
이제는 체온도 전하여본다
널빤지를 딛고 올라서면
세상의 한쪽은 내 것이 될까
여백의 하늘이 곁에 와 설까
한없이 무거워져갈
동시대인의 작업복
내가 띄운 먹줄은
누구의 줄에 가 닿을 건지……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올리면 너도 쉴 수 있는 곳
창을 내리라 아침 알리는 사랑의 빛
보잘것없는 이 터전에도
제 나름의 의미를 부여해야지
그러나 언젠가는
무너진다 무너져내려
먼지가 될 나와 우리와
모두의 험한 생계
비어 있는 들판에
다시 기둥을 세운다
먼발치에서 흘긋 보면
조붓하고 허약한 공간이지만
시멘트 반죽마다 들이는 구슬땀,
또 한 번의 진통을
기억하기 위하여.
천상병 생각
인사동 거리 걸어갈 때 마주치는 찻집
내 그대 살아생전의 얼굴 본 적은 없네
그대 반평생 제정신으로 살다
반평생 넋 나가 살았다는 얘기며
술잔만큼의 웃음과
담배 개비만큼의 구걸
소문으로 들어서 알고 있을 뿐
나 2000년에
시인으로 살아가기 부끄럽고 한심스러워
‘歸天’ 간판 못 본 듯 발걸음 옮기네
천상의 시인이었으면 무엇하나
지상의 병든 몸이었던 것을
그대 애꿎게 당한 세 차례의 전기 고문과
생전의 유고 시집 『새』 이후
황폐한 나날에 쓴 시들이 쨍그랑!
내 혼을 깨뜨리네
아프고 또 아픈 몸으로
소풍 나온 아이처럼 웃고 또 웃다가
하늘로 돌아간 그대 생각에
나 부끄러워 그 집 앞
얼른 지나쳐 가네.
침묵의 거리
'그날 그 자리에 있었다
요란한 브레이크 소리 단말그'는 마의 비명
눈여겨본 차 번호판 4613
뺑소니를 놓는 차, 뒤꽁무니
……인간의 마을에 밤이 온다
한 순간에 한 사람이 사라져
하나뿐인 소우주가 폭발하였다
'그'는 틀림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지구상 유일한 목격자로서
……복음은 다시 들려오지 않는다
'그'는 보았다 슬픔과 기쁨을 다루던
주름진 호두 모양의 뇌
거리를 붉게 물들인 뇌척수액
깨어 있던 인간의 기계 깨지고 말아
……잠언과 묵시가 사라진 지구
다음날 아침 아스팔트 위에는
핏자국과 흰 스프레이 자국
며칠 후 그 거리에는 <목격자를 찾습니다>
플래카드 외롭게 펄럭이고 색 바래고
……침묵이 세상을 암흑에 휩싸이게 한다
'그'는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외로운 신은 얼마나 가슴아파하고 있을까
침묵이 흐르는 21세기 벽두의 거리
대형 전광판이 빛을 쏘아 보내는 휘황한 거리
……그는 나다.
폭력과 광기의 나날
폭력 없는 시대가 있었던가
피라미드도 만리장성도
파르테논 신전도 앙코르와트도
폭력이 이룩한 거대한 건축물
강력한 폭력 무자비한 폭력
집단에 의해 불가항력의 폭력이
희랍의 신전을 건축하고
힌두교의 사원을 건축하였으니
인간이 창조해온 수많은 신은
당신들의 신전에서 울어야 마땅하다
광기 없이 어떻게
집단이 집단을 죽일 수 있으랴
1982년 친이스라엘 레바논 민병대원들이
팔레스타인 난민촌을 습격했을 때 죽은
1000여 명 중 성인 남자는 그렇다 치고
여자와 아이들은 땅을 잃어버린 자의
딸과 손자라는 죄밖에 없다
1988년 이라크에 투하된 독가스로
쿠르드족 수백 명이 살해되었을 때
아기를 안고 죽은 아버지는 그렇다 치고
아버지의 품에 안겨 죽은 아기는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죄밖에 없다
지상의 그 어떤 성벽도
폭력을 막기 위한 폭력의 벽
우리는 그 벽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유쾌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는다
지상의 그 어떤 거대한 구조물도
폭력을 상징하기 위한 폭력의 구조물
우리는 그 구조물 앞에서 그림을 그린다
멋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림을 그린다
폭력없는 시대는 없었으니
마하비라여
살해당한 사람과 살인한 사람은
죽어서 무엇으로 다시 태어나는가
폭력없는 사회가 존재했던가
광기 없는 사회가 존재할 것인가.
폭력과 비폭력
―지아코모 맛테옷티*에게
에이브라함 링컨(1809∼1865. 4. 14):워싱턴 포드 극장
김옥균(1851∼1894. 2. 27):중국 상해 同和洋行 객실
이토 히로부미(1841∼1909. 10. 26):만주 하얼빈 역
김좌진(1889∼1930. 1. 24):만주 영안현 자택 부근
여운형(1885∼1947. 7. 19):서울 혜화동 로터리
김구(1875∼1949. 6. 26):서울 경교장
존 F. 케네디(1917∼1963. 11. 22):텍사스주 델라스
마틴 루터 킹(1929∼1968. 4. 4):테네시주 멤피스
박정희(1917∼1979, 10. 26):서울 궁정동 만찬석상
안와르 사다트(1918∼1981. 10. 6):이집트 중동전 전승 기념식장
베니그노 아키노(1932∼1983. 8. 21):필리핀 국제공항
인디라 간디(1917∼1984. 10. 31):뉴델리 차 속
자크 엘룰:폭력은 오만이요, 분노요, 광기이다.
랩 브라운:살육에 대한 유일한 대답은 살육이다.
스토켈리 카미차엘:백인은 사람들을 착취한다. 우리는 폭력에로 부름 받
았다.
잘로 신부:부정당한 폭력은 정당한 폭력에 의하여 구축되어야 한다.
프란츠 파농:식민지인은 폭력 속에서 그리고 폭력을 통해 자유를 발견한
다.
"나치즘에 대한 프랑스의 레지스탕스는 자유롭고 정의로운 공화국을 창건
하려는 목표였다. 그러한 레지스탕스의 주인공들이 1945년 알제리아의 세
티프에서 4만5000명의 인민을 학살하였으며, 1947년에는 마다가스카르에
서 10만 명 가까운 대학살을 감행하였다."
선전 포고도 없이
야만의 날들이 진군해 오고 있다 지상의 남은 빛이
일시에 사라지는 야만의 밤 까막눈의 밤 우후죽순같이
바라크들이 들판에 세워지고 망루의 탐조등
결국 세계는 감시하는 사람과 감시당하는 사람으로 분리될까
이윽고 하늘을 뒤흔드는 전폭기 폭력에 대한 폭력적 반동 혹은
非폭력에 대한 폭력적 반동 저공 비행 속도를 죽인 마하의
전폭기 눈 깜짝할 사이 무차별의 폭력 조명탄으로 밝아지는 지상
연기 기둥과 화염에 싸이는 나의 집 내 직장을
예감한다 무자비의 폭격 어느 날 모든 사람들이 일시에
표정을 잃게 되어도 나의 귀에는 오직
신음 신음 숨 넘어가는 소리
귀를 틀어막아도 나의 귀에는 오직
무거운 발소리 발소리 형장으로 향하는 발소리
아무런 희망도 없이 기다려야 할 끈끈한 시간 앞에서
누군가는 신념 때문에 누군가를 죽여야 하는지 누군가는
폭약?적재한 트럭을 몰아 벽을 향해 달려들어야 하는지
소모품인 개인의 생명 하나밖에 없는 사람의 목구멍
목구멍에서 나온 마지막 외마디 소리
"브루투스, 너마저!"(카이사르)
"아버지, 제 영혼을 아버지 손에 맡깁니다!"(예수)
"나는 괜찮아……"(박정희)
결국 세계는 심문하는 사람과 심문 받는 사람으로 분리될까
입술이 터지고 해진 옷 어디론가 사라져간 그대
신념―죽어야 할 이유에 몰려 있던 그대
개인의 개인에 대한 테러와
개인의 집단에 대한 테러와
집단의 개인에 대한 테러와
집단의 집단에 대한 테러가
무엇이 다른가
물리적 폭력과 경제적 폭력과 심리적 폭력이
무엇이 다른가
묻고 싶다 자유로부터 격리되지 않으려고 일어선 그대여
우리는 자라면서 사람을 죽이는 법을 배우게 된다.
* 지아코모 맛테옷티(1885∼1924, 이탈리아의 국회의원):1924년 5월 30일의 국회에서 통일사회당의 맛테옷티는 지난번 선거에서 자행된 파시스트의 폭력과 불법을 날카롭게 공격했다. 소란해진 의회, 야유와 협박의 고함 속에서 연설은 거의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였으나 그래도 맛테옷티는 2시간 가까이나 단상을 차지하고 공격을 퍼부었다. 연설이 끝나고 국회에서 나갈 때 그는 동료에게 말했다. "내 장의(葬儀) 연설이나 준비하게." 연설하는 동안 뭇솔리니가 꿈쩍도 않고 줄곧 앉아 있기만 하던 그 모습은 인상적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과연 장의 연설은 필요했었다. 6월 10일부터 행방불명이 된 맛테옷티는 두 달이 지난 8월 16일, 로마에서 14마일이나 떨어진 라레르타렐리의 숲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6월 10일에 그는 파시스트에게 연행되어 자동차 안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피라미와 피라미드
살아 있는 것들은 다
살려고 애쓴다 조금이라도 더 살아보려고
몇 달 내리 가뭄이 들어도 피라미는
강바닥에 머리 박고 버틴다
한 달 내내 비가 퍼부어도
나무뿌리는 땅을 움켜쥐고 버티고
어린 날의 놀이터 감천 냇가에서
내가 잡은 수많은 피라미
잡았다 놓친 그 중 몇 마리는
눈깜짝할 사이에 사라지면서
나를 비웃었을까 나에게
고마움을 느끼며 얼씨구 달아났을까
죽어가면서도 영원히 살고 싶었던
저 먼 시절 이집트의 왕들
피라미 같은 인간을 채찍질하며 세운
사막의 거대한 무덤들
생명 연장의 꿈을 키우는 동안
얼마나 많은 파라미가 죽었을까
그림자가 너무 길다 태양신의 나라
시간의 봉분을 높다랗게 올린
수많은 파라미의 노역과 죽음을
상기해야 하리 저 무모하게 거대한
파라미의 피라미들 앞에서
한 사람에게
너의 속내에 자리한 아픔이 자라나
내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더 깊어진다면
나는 지금 자리 정리하고 일어나
네 곁으로 달려가야 하리라
비록 일상의 모든 끈끈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느낌뿐일지라도
작은 것을 아끼는 부드러운 마음과
작은 것은 버리는 단단한 마음으로
살아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너는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나누어 짐지면 살림살이의 무게는
얼마만큼 더 가벼워지는지
너는 나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가
내 속내에 자리한 아픔이 자라나
네가 겪고 있는 아픔보다 깊어진다 해도
너는 지금 자리 정리하고 일어나
내 곁으로 달려오지 않아도 좋다
비록 일상의 모든 끈끈한 것들로부터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일지라도
... 그러나 그것이 잘못이라면?
할머니의 젖가슴
팔순 넘긴 할머니 양지쪽에 앉아
젖가슴 꺼내 또 만지고 계시네
하야 이리 와본나
가슴에 다시 젖이 돈다 아이가
젖멍울이 다 아푸다
하야 니가 좀 만져봐라
내 어릴 때 밤마다 파고들어
만지며
가슴 다 내놓고 저승길 걸어가시네.
잠들었던 할머니의 젖가슴
쪼글쪼글 볼품없이 쪼그라졌는데
치매의 몸에도 봄기운 도시는지
옷고름 풀어헤치고 양지쪽에 앉아
젖가슴 꺼내놓고 나를 부르시네
개나리 진달래 꽃길로 나서며
백구야 훨훨 나지를 마라
너 잡을 내 아니로다
일촌 간장 맺힌 설움에
부모님 생각이 절로 나네
고개를 끄덕이며 창부타령 한 가락
나비처럼 나풀나풀 우리 할머니
화가 뭉크와 함께
- 1984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어디서 우 울음소리가 드 들려
겨 겨 견딜 수가 없어 나 난 말야
토 토하고 싶어 울음소리가
끄 끊어질 듯 끄 끊이지 않고
드 들려와
야 양팔을 벌리고 과 과녁에 서 있는
그런 부 불안의 생김새들
우우 그런 치욕적인
과 광경을 보면 소 소름 끼쳐
다 다 달아나고 싶어
도 同化야 도 童話의 세계야
저놈의 소리 저 우 울음소리
세 세기말의 배후에서 무 무수한 학살극
바 발이 잘 떼어지지 않아 그런데
자 자백하라구? 내가 무얼 어쨌기에
소 소름 끼쳐 터 텅 빈 도시
아니 우 웃는 소리야 끝내는
끝내는 미 미쳐버릴지 모른다
우우 보트 피플이여 텅 빈 세계여
나는 부 부 부인할 것이다.
혜초의 시간
―투루판에서 둔황까지
또다시 황사바람이 불어와 눈 비빈다
이 모진 바람 언제부터 불어왔을까
산맥을 넘고 사막을 지나온 시간
바위가 돌이 되듯 세월 부서지고
돌이 모래가 되듯 시간 쌓였으리
둔황 막고굴 속에 봉인되어 있던
혜초의 시간 장장 1천2백 년
그 동안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태어나고
죽어가면서 참 많이도 울었으리 눈물 없는
서방정토를 꿈꾸며 그렸을까 둔황 벽의 그림들
시간은 바람처럼 왔다 물처럼 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땀 흘리며 그려내는 것
둔황 가는 길 다리 아파 밤하늘 우러르니
캄캄한 저 하늘에 가물가물한 별빛 하나
고개 끄덕이며 내 가슴에 불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