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은 홍길동 소설에 나오는 내용이다.
" 대장부 세상에 나매 공명을 받지 못하면 차라리 병법을 외워 大將印을 腰下에 빗겨 차고 東征西伐하여 국가에 대공을 세우고 이름을 만대에.... "
위에서 東征西伐은 단지 용어의 빌림인가 아니면 실제의 조선사회가 동정서벌하고 있는가
실록에는 西征, 東征, 北征, 南征이란 용어가 나온다. 이중 서정과 동정은 횟수가 많다.
西征은 여진족의 정벌, 야인의 정벌을 의미하며 東征은 왜구의 정벌을 의미한다.
세조(世祖) 정해년과 성종(成宗) 기해년의 대대적인 西征과 그후 잦은 西征의 논의가 있었으며 많은 기록이 빠져 있으나
아래의 기록을 보면 인조때에도 서정한 것을 알 수 있다.
"우림위 이인경(李仁慶), 겸사복 김택룡(金澤龍)이 상소하여, 그들의 아버지가 무오년에 김응하(金應河)를 따라 서정(西征)했다가 도적의 칼에 죽었으니 선봉이 되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상이 은총어린 답을 내리고, 이어 가서 의주 부윤에 예속되어 조발에 따르라고 명하였다." - 인조 032 14/03/09(갑인)
위의 내용을 보면 인조때 서정을 하면서 무오년의 원수를 갚는다고 하는데
무오년은 광해 10년을 말하며 이때의 기록은 모두 빠져있다.
다음의 기록을 보면
무오년의 서정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이때는 서정이 실패한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에서 수만명중 태반이 피를 흘리고 팔천의 정예부대가 포로가 되었음을 기록은 전한다.
실록에는 그 다음해 기록에 왕이 전교를 내림으로서 알 수 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해석본이지만 내용을 알 수 있게 모두 인용하였음.)
《 광해 139 11/04/03(병진) / 왕이 애통함을 알리는 전교를 중외에 내리다 》
왕이 애통해 하는 전교를 내려 중외에 효유하였는데, 그 내용에
“민망하게도 덕없는 내가 큰 기업을 이어 받아 백성을 사랑하는 뜻은 간절하나 썩은 고삐인지라 잘 몰아갈 수 없었으며, 풍속을 돈후하게 가르치려고 하여도 헝클어진 실타래인지라 다스리는 효과가 없었다. 지난번 국가의 운명이 거듭 비색함으로 인하여 역적의 무리가 연달아 일어났다. 초(楚)나라 감옥처럼 빈번한 형벌에 옥석(玉石)이 함께 불타는 일도 있었을 것이며 정(鄭)나라 역사처럼 넘치는 법률에 경중(輕重)의 착오도 간혹 면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도깨비 지역에 던져진 몸은 풀려 돌아가리라는 소망이 단절된 지 오래되었고, 가시 울 속에 국한된 그림자는 법망이 풀리리라는 헛된 바람만 간절하였을 것이다. 원한 품은 해골은 스산한 귀화(鬼火)만 자생하고 원통함을 외치니 싸늘한 서리는 몇 번이나 내렸겠는가. 주(周)나라의 세열(歲펞)로도 떨쳐 버리지 못하는데 위(衛)나라의 성규(星圭)인들 어떻게 측량할 수 있겠는가.
어려운 시기에 힘겨운 거사인 줄은 이미 알지마는 어쩔 수 없는 일이며 재물도 힘도 다 바쳤으니 수고로워도 쉴 수가 없다. 오직 저 외부의 관원과 변방의 장수는 도백(屠伯)과 도신(盜臣)이 많으니 남의 상자나 주머니를 열고 더듬는 것으로는 계학(溪壑)같은 욕심을 채우기 어렵고 껍질을 벗기고 뼈를 부순다 하여도 이익이라면 치수도 버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서민의 집은 텅텅 비어 가시밭에도 살 수 없음을 탄식하고 창생은 흩어지며 초목의 지각없음을 부러워한다. 정치는 뇌물로 이루어지니 진(晋)나라처럼 문란하기 시작함이 마땅하고 칭찬은 선물로 인하여 들리니 제(齊)나라처럼 지탱하지 못할 것은 당연하다. 그 부모된 이의 심정은 어떠하겠는가. 이러한 신하를 대하며 항상 가슴이 아프다. 더구나 서정(西征)의 큰 싸움은 동쪽을 염려하는 명나라의 깊은 근심을 덜어 주기를 바랐는데, 수만 명의 생명이 반이나 모래밭에 피를 흘렸고 팔천 명의 정예 부대는 모두가 오랑캐의 포로가 되었으니, 꿋꿋한 영혼은 아직도 고향을 생각하는 꿈이 있을 것이며 고아나 과부는 아득히 바라보며 통곡하는 슬픔을 어떻게 견디겠는가.
천자의 특별한 명령은 간곡하나 적개심의 성의를 펴지 못하였고 남은 백성은 초췌하나 어진 정치의 혜택은 아직도 막혔다. 한밤중에 서성이며 너희들이 무슨 죄로 생업을 잃었는가를 생각하고, 조정에 임하여 탄식하니 내가 군주되었음이 즐겁지 않다. 음침한 기운이 끼어 팔도에 돌림병이 만연하고 봄이 어긋나 농사철에 가뭄 또한 극심하다. 그러므로 정전(正殿)을 떠나 정결한 생활을 하며 반성하고 수양하는 도리를 더욱 독실히 하고, 음악을 거두고 거친 음식을 먹으니 염려하는 심정이 갑절이나 깊어진다. 폐단을 자문하여 제거하기에 힘을 쏟는데 죄를 용서하고 충성을 포창함을 늦출 수 있겠는가. 아, 하북(河北)에 조서를 반포하니 당(唐)나라 때의 군민(軍民)들이 부끄러워하였고 산동(山東)에서 조서를 들으며 한(漢)나라 때의 부로(父老)들이 감읍하였다. 그러므로 이처럼 교시하노니 잘 알아들을 줄로 여긴다.”
하였다. 【대제학 이이첨 지음.】
실록의 기록과 같이 東征西伐이란 용어의 정의가 조선사회의 통용용어였던 것이다. 이것이 한반도에 있는 조선이라면 東征이나 西伐이란 용어가 성립하지 않는 것이다.
다음은 동정을 보여주는 세종때의 기록이다.
《 세종 004 01/07/21(갑자) 》
임금이 명하기를,
“이제 동정(東征)해서 얻은 한인(漢人) 9백 30여 명에게는 포로되었다가 도망한 회회인의 예에 의하여, 옷과 갓·신·포목을 주어서 요동으로 풀어 보내라.”
고 하였다.
(원문은 규장각도서관 전자정보실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