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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딸기
넝쿨이 우거져 들어가기 힘들다. 따기 쉬운 바깥쪽을 건드렸다. 왼손은 바가지를 들고 오른손으로 거뒀다. 모기가 달려들어 왼팔과 얼굴을 뜯어먹는다. 어지럽게 늘어진 가지도 뜨끔뜨끔 찔러댄다. 잠시 가득해 소쿠리에 쏟아붓고 다시 들어간다. 철조망처럼 가시덤불이 얽혀 비집고 가운데로 들이민다. 어쩌다 하나씩 떨어뜨리면 아차 놓친 물고기처럼 아깝고 커 보인다. 가시 때문에 엎드려서 줍진 못한다. 그냥 내버려 둘 수밖에 없다.
잘 고른다고 하지만 돌아서 보면 또 있다. 발갛게 익은 건 엄지와 식지로 똑똑 잡아떼지만 떨어지질 않는 게 있다. 더 익어야 할 것들이다. 약간 거무스레하고 굵은 게 익은 것이다. 한 줌씩 입에 털어 넣으면 달콤한 게 살살 녹아내린다. 나는 이쪽에서 찾고 아낸 저쪽에 따 내려가는데 뻗치면 손이 맞닿을 정도다. 한 줌 쥐여주면서
“시장하니 먹으면서 하세요.”
몇 번 삼키니 요기가 된다. 자꾸 먹어도 질리지 않고 곧잘 넘어간다. 그리 달지 않고 검붉게 익은 오돌토돌한 게 맛나다. 이걸 심어 이리 딸 줄 생각이나 했겠나. 개울이나 산기슭에서 보는 줄 알았지 키울 줄은 몰랐다. 되나마나 심어놓았는데 이리 잘 됐다. 아침마다 식전에 나와 거두는 게 일이다. 하늘에 걸린 별처럼 팍삭 들어부었다. 마치 촛불시위처럼 반짝인다. 녹색 가운데 붉은 색깔이 흐른다. 이 빛이 아름답고 영롱하다.
홍색이 지천이다. 날마다 거둬들여도 익어나오는 걸 감당하기 어렵다. 아낸 바구니를 배에 대고 허리에 잡아매 두 손으로 딴다. 이내 그득 담기자 쏟아붓고 휘저어 또 담는다. 넓은 광주리에 담긴 걸 보면 빨간 게 여간 탐스러운 게 아니다. 표가 난다. 덜 익은 건 분홍이고 검붉은 게 잘 익은 것이다. 과일 중 제일 자잘하다. 맨손으로 따야 잘 거둘 수 있다. 가시 피해 장갑 끼고 일하면 뭉그러지길 잘한다. 아낸 장갑 오른손 엄지와 식지 끝을 한 마디씩 끊어냈다.
사과와 감, 복숭아 등 과실은 한주먹씩 되니 잘 붓는다. 이건 자잘해서 한참 담아야 한다. 또 야물잖고 몰랑해서 조심하지 않으면 으깨진다. 다른 건 가시가 없는데 줄기와 잎사귀에도 붙었다. 만지면 곳곳에서 찌른다. 손가락 끝에 박혀 뜨끔거리면 봐도 보이지 않고 스칠 때마다 콕콕거려 따갑다. 며칠간 욱신거리다 괜찮아진다. 작은 가시가 어찌 나뭇잎에도 붙어있다. 딸기만 가시 없지 온몸이 가시로 덮였다.
먼동이 트자 깨우며
“빨리 갑시다.”
잠을 설치고 새벽에 나가 따기 시작한다. 주섬주섬 먹으면서 따는데도 끝이 없다. 키를 넘는 나무가 휘휘 늘어진 가지마다 빼곡히 익었다. 겉과 속이 새빨간 게 아침 햇볕에 붉은빛이 감돌고 또 배어난다. 익은 건 몰캉하면서 쉽게 쏙쏙 빠져나온다. 그 자리는 노랗게 대머리처럼 도드라져 보인다. 옆 밭 민씨와 정씨 부부에게도 한 줌씩 줘 맛보게 했다. 그들은 작년 가을에 심었으므로 이제 마지막 마늘과 양파를 거둬들이고 있다. 해마다 하다가 지난해엔 그만뒀다. 올핸 마늘 쫑을 못 뽑아 손이 근질근질하다. 이슬 맞은 아침에 뽑으면 쏙 잘 빠져나온다. 비 내린 날도 축축해서 끊어지지 않고 길게 빠졌다. 그래도 중간에 끊어져서 송곳을 갖고 찌르면 솔솔 미끄러져 올라왔다.
몇 해 전에 비슷한 넓이로 가꾸던 윤 회장이 교통사고로 정신을 차리지 못하자 그 부인이 밭을 관리해 달라 부탁했다. 배로 넓어져 힘에 부치니 거북하고 버겁다. 아내가 김해 농장에서 산딸기 몇 포길 얻어왔다. 뿌리도 약하고 며칠 지나선가 잎이 시들시들하면서 마르니 살 것 같지 않다. 긴 것을 반 정도 잘라줬다. 사는데 부담을 줄여준 것이다. 그래도 새싹이 나오려나 기다렸지만 종무소식이다.
갈 때마다 싹이 나나 뒤졌다. 구포 장이나 엄궁 농산물 시장에 가면 한쪽 구석에서 묘목을 판다. 대추나 감, 복숭아, 자두, 밤나무 등인데 딸기나무는 못 봤다. 시중에 산딸기가 나오면 저게 어디서 났을까. 재배하는가. 못하는 게 없으니 키우려니 했다. 사람들이 묘목을 사다 심어놓고 열심히 다독거린다. 잘 키우면 몇 해 뒤에 소출이 크다는 걸 안다. 그걸 심어놓고 열매 맺길 바라며 작은 희망을 건다. 돌을 둘러 막아놓고 살기를 바랐다.
“어서 자라거라.”
보리 갈아놓고 못 참는다.
얼마 뒤 비닐 자루에 또 십여 그루를 가져왔다. 팔 벌려 넓게 심었다. 이번엔 몇 포기 죽고 다 살아났다. 톱밥을 둘레에 놓아 잡풀이 올라오지 못하게 하고 주위에 거름을 듬뿍 묻어주며 잘 크라 어루만졌다. 까칠까칠한 게 손바닥을 긁는다. 봄에 옆으로 새순이 번져 쑥쑥 올라와 놀랐다. 키를 훌쩍 넘겨 치솟았다. 멀대같이 웬 키가 이리 크나. 옆으로 늘어지고 퍼지면서 자라는데 똑바로 치고 올라간다. 굵기도 대나무처럼 곧으면서 엄지보다 크다. 일 년 만에 저리 크니 여러 해 지나면 팔뚝만 하리라 여겨졌다.
숲속에 자연 딸기나무는 작다. 넝쿨도 있는데 많이 따야 한주먹 정도다. 그런데 거름을 줘선가 되게 크다. 한길을 훌쩍 넘어 자랐다. 무슨 딸기나무가 이리 클까. 자꾸 올라간다. 줄기도 굵다랗다. 저래 자라면 되겠나 싶어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낫으로 높은 곳을 잘랐다. 그래선가 옆으로 가지가 척척 늘어져 엉켜 들어갈 수 없다. 높으면 밑으로 다닐 수 있었을 텐데 괜히 끊었구나 싶다. 한발 벌려 심었는데도 이리 좁다랗다.
하얀 꽃을 피우고 벌들이 잉잉 날아다닌다. 하도 많아 쏘이기라도 할까 조심한다. 바닷가 휑한 곳인데 어디서 이리 날아왔나. 보니 키우는 벌통의 벌들 같다. 토종인지 양봉인지 엉겨 붙어 벌 떼거리다. 바글바글하다. 작은 꽃인데 꿀이 있을까. 긴 가지에 안쪽부터 차례대로 피어나간다. 한꺼번에 피잖아서 여러 날 벌들이 수정해 줘야 할 것 같다. 하얀 꽃이 크잖고 작달막하다. 벚꽃이나 사과, 배, 복숭아꽃에서는 이렇게 많은 벌이 다니는 걸 못 봤다. 꽃도 한꺼번에 피잖고 차례로 떠듬떠듬 끝 가지로 피어나간다. 벌 떼가 왁자지껄하다. 마치 벌통 옆에 있는 것 같다. 마구 날아다니며 날갯짓 소리가 요란했다.
얼마 지나 꽃들이 다 피고 나니 잠잠하고 조용하다. 그냥 잎만 무성하고 입을 다물어 열릴 것 같지 않았다. 작은 꼭지가 눈감듯 꼭 감싸고 단단하게 붙어있다. 저게 무슨 딸기가 되겠나. 나올 것 같지 않더니 멍울이 벌어지면서 발갛게 영글어 나왔다. 그것도 꽃피던 순서대로다. 그만 산딸기가 되어 나온다. 처음은 몇 알이더니 점점 여러 개로 굵게 벌어져 나갔다. 조금씩 부풀어 발갛게 익어가니 놀라워라. 몇 개를 따 먹으며
“이게 뭔 일이래.”
고사리처럼 옆으로 번지는가. 새싹이 돋는 게 두더지 올라오듯 여기저기 막 쳐든다. 나무망치로 내리쳐야 하나. 아내는 너무 많아 큰 것만 두고 작은 건 두 손으로 잡아당겨 뽑아낸다. 캐야지 저러면 뿌리가 상해서 살겠나. 어디서 봤는가. 그리 당겨도 잘 빠져나온다. 비 온 뒤라야 한다. 어미 뿌리에서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중간중간 싹을 틔운다. 올리면 뚝 떨어져나온다. 한 아름씩 다른 밭으로 안고 가 심었다. 조그만 밭이다가 이내 딸기밭으로 변해갔다. 매일 가서 옮기는 게 일이다. 뚱딴지처럼 불쑥불쑥 잘 나타나는 산딸기다.
“뿌리와 흙을 떠야지 저러면 될까.”
들은 채 않고 하던 일을 계속한다. 찔끔찔끔 여러 곳에 옮겨심었다. 삽으로 콱 찔러 벌려 넣곤 묻었다. 일일이 구덩이 파고 물주며 거름 넣어서 심으려니 거추장스럽다. 빨리해야 좋다. 늦으면 캐놓은 모종 잎이 시들어져 사는 게 어렵다. 한낮 햇볕이 좀 뜨겁나. 아내와 일하다 티격태격이다. 야무지지 못하고 엉성하게 일한단다.
“살면 살고 너 알아서 커라.”
거의 다 살아났다. 부치는 텃밭 절반은 딸기밭이다. 무성히 자랐는데 장마와 태풍 때 비바람이 심해 모두 삐딱하게 기울었다. 똑바로 세우려니 이미 굳어져서 꿈쩍도 안 한다. 자꾸 그냥 두지 말고 바르게 하래서
“한번 밀어봐요.”
“꼼짝도 안 해.”
“가시는 찌르지.”
곧게 하라는데 어림도 없다. 처음 심은 밭이 가장 잘 됐다. 무성하게 우거져 들어가기도 어렵다. 호랑이가 들앉아있을 만한 엉큼한 숲이다. 다른 밭은 그냥 자라 대나무처럼 깡마르다. 거름을 주고 잘 건사한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이 차이를 나타낸다. 마른 땅에 뿌리내린 나무가 딱딱한 굳은 흙에다 굵다란 줄기여서 손쉽게 바로 할 수 없다. 바르게 서라고 발로 툭툭 차도 끄떡없다. 괭이로 걸어 잡아끌지만 어림없다.
“따곤 베내어야 하니 그냥 둡시다.”
억지로 세우면 부러질 것 같다. 한번 마음먹으면 끝내 해내는 성미여서 못내 차지 않는 아내다. 그러나 이 겨울에 어찌해볼 수 없다. 지그재그잖고 마침 한쪽으로 쏠려 질서 있어 보인다. 앞에 거총한 자세다. 이 굵은 나무를 바람이 불어서 다 스러지게 했으니 그 바람 한번 세다. 밀어도 꿈쩍 않는데 그럴까.
“해보지도 않고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몇 차례 심어놓고 관심이 대단하다. 마늘 까고 줄기와 껍질을 모아서 나무 밑동에 뿌려둔다. 동구리를 한 삽씩 주위에 묻고 거름도 듬뿍 넣었다. 그리 정성과 공들이는 나무가 기우뚱하니 보기 싫은가보다.
“안 되면 되게 하라.”
어디서 많이 듣던 얘길 하며 나를 힘들게 했다. 시키면 다 되는 줄 안다. 내가 무슨 무쇠 몸이나 되나.
민 총무가 무엇이 붙었대서 보니
“경작금지 안내”
“미세먼지 차단 숲 조성 공사”
2월 말까지 심은 걸 거두고 모두 철거하라는 현수막이다. 하나가 아니고 곳곳에다 걸었다. 작심하고 쫓아낼 생각이다. 할 수 없지 뭐 나가라면 그만두고 떠날 수밖에 없다. 십 년 가까이 가꾼 텃밭으로 정성을 많이 쏟았다. 이것저것 심어 가꾸는 재미가 좋았다. 한번 해본 말이려니 하고 눈치를 보며 설설 씨뿌리는 사람도 있다. 작년 가을에 심어놓은 마늘과 양파를 뽑아야 하나 말아야 할까. 삼사월이 지나고 오월 말인데 아직 작업할 기미가 안 보인다.
“이러다 올해는 그냥 넘어가려나.”
봐도 기척 없는 게 작업할 것 같지 않다. 말뿐인가 사정이 생겼는가. 코로나로 난린데 무슨 숲 가꾸긴. 그사이 전염병으로 세상이 어지러웠다. 사회적 생활 속 거리 두기로 지연되었나 보다. 마늘과 양파를 파내야 하는데 제대로 굵어 다 된 것을 걷게 됐다. 보리도 익어서 이삭을 잘라 서둘러 발로 지근지근 밟고 두드려 타작한다. 양파도 잘 돼 머리만치나 크다. 딸기도 익어 이렇게 따먹으니 다 역병 덕이렷다.
몇은 농기구를 들고 떠났다. 어쩌나 하고 미련을 대던 사람은 다행히 거둬들인다. 저걸 갈아엎겠나 뿌려놓고 버텼는데 여기까지 왔다. 다들 큼직큼직해서 풍년 농사다. 나도 심어볼 걸 그랬나. 상추도 잘 자라 너풀너풀하다. 추운 겨울 지난 저걸 쌈 싸 먹으면 맛있을 텐데⸱⸱⸱. 마늘 대를 고추장에 버무린 걸 좋아하는데⸱⸱⸱. 그 바람에 산딸기도 발갛게 익어 나온다. 겨울비가 잘금잘금 자주 와서 뿌리 작물이 굵다랗다. 평소엔 잘 안 되더니 요럴 때 큼직한 것은 뭣인가. 어깃장을 놔도 남 약 올리는 일이다.
처음 이곳에 쑥 뜯으러 왔다가 알게 됐다. 갈대와 억새, 쑥대머리, 잡초가 길길이 자라 채소 갈아먹으려면 한참 치워야 했다. 갑자기 여기저기서 나타나 십여 명이 달라붙었다. 지나다 일하는 걸 봤는가 용케도 찾아왔다. 여러 곳 헤매다가 알아냈다. 양달이고 바닷가여서 해풍이 불어 엎드려 일해도 공기가 좋다. 어떤 이는 좌우에 차들이 다니니 매연이 있다 하지만 아늑하고 좋기만 한데 바닷바람이 불어 그런 건 없는 것 같다.
“괜히 찜찜하게 그러네.”
남해안으로 다니는 배들이 보여도 연기가 날지 않는다. 다리 밑에 차 대고 들어가기 쉽다. 좀 더 차지하려 옥신각신해도 자주 드나들며 서로 지켜주니 그런대로 든든하고 할만하다. 농작물을 잃거나 누가 들어와서 훑어가는 일이 없었다. 여럿이어서 한두 사람이 붙어산다. 시내 가고 오면서 힐끔힐끔 밭이 잘 있나 살피면서 지킨다. 이른 봄에 할머니들이 가끔 냉이나 쑥 뜯으러 비탈에 들어오는 일 외엔.
“잘 지냅시다.”
말은 그리하면서 더 넓히려 욕심을 부린다. 늙수그레한 칠순 넘은 사람들이다. 줄 치고 내 땅이라 표시해 두면 되는 개척시대 밭이다. 열 명 정도 모여 풀과 돌을 걷어내고 땅 뒤집기에 열을 올렸다. 바닷가 낮은 지역이어서 무얼 갖다 쏟아부은 곳인가 비닐과 옷가지, 나무, 전선, 시멘트 조각 등 잡동사니가 섞여 올라온다. 쓰레기가 왜 이리 나오나. 그래도 다 치우고 나면 번듯한 게 좋다. 만지면 보드라운 흙이 아기 살갗 같다.
내 것이라 지키고 남의 땅에 한 발만 들여놓아도 눈알을 부라린다. 경계지점에 길도 없이 돌만 깔아놓았다. 다니는 길도 뭉개 없앤다. 풀이 자라 길길이 커가니 밭으로 씨가 떨어진다나. 한 치도 양보가 없다. 다툼도 생기자 호호 중화음식점 2층 원탁에 모여 회장을 정하고 협의하면서 짓도록 했다. 질서 있어 보였는데 윤 회장이 땅거미 질 때 자전거 타고 어스름 길을 가다가 그만 승용차에 받혀 뇌수술을 받았다. 사경을 헤맨다.
“아이고 윤 회장님이 어쩌다가.”
손을 잡고 기도하며 ʻ고향의 봄ʼ을 하모니카로 불러줬다. 민 총무가 텃밭 일을 도맡아 하게 됐다. 평일에 나와 일하는 분도 있지만 대게 주말에 만날 수 있다. 부부가 오는 건 우리와 미연네, 택시 하는 변 기사이다. 다른 집은 남자만 와 일하는데 집사람들이 궁금하지 않는가. 오는 걸 못 봤다. 궁상스럽게 남자가 다듬어간다. 억척같은 배 여인도 있어 혼자서도 잘한다. 호미로 하는데 이곳저곳 넓은 밭을 알뜰히도 파 뒤집는다.
빈터에다 감과 대추, 매실, 밤나무를 심었다. 언제 쫓겨날지 모르는데 내 밭처럼 정성껏 가꿔 나간다. 몇 해 뒤 고씨 집 감나무가 주렁주렁 달려 굵은 대봉이 먹음직하다. 주먹 크기의 정씨 개량 대추도 열려 가장자리 둘레는 과수원이다. 농사를 지어봤는가 다들 뛰어나다. 따라 하자면 한참 달려가야 한다.
때맞춰 농사짓기를 잘한다. 가을 완두콩과 김장 배추, 무, 마늘, 양파, 이른 봄 감자와 옥수수는 어느새 다 심고 난 뒤다. 따라 한다고 하지만 후다닥 해 버린다. 보고 부랴부랴 뒤따른다. 그들은 잠도 안 자고 밤에 와 일했나. 뒤처진다고 한 소리 듣게 만든다. 남의 밭 콩이 굵다고 내 것보다 좋아 보이는가. 이래라저래라 아낸 잔소리가 많다. 내 멋대로 했다간 두벌 일을 해야 한다. 늙으면서 나를 못 살게 한다.
“우리도 과실나무를 심어요.”
감과 산초, 대추, 매실, 머루, 산딸기, 엄나무를 구해 심었다. 다른 건 아직 커가는데 딸기가 이리 익어 나온다. 매일 따도 아침에 보면 어제보다 더 붉게 빛난다. 긴 가지에 늘어지게 달렸다. 아직 눈도 뜨지 않은 게 많다. 여러 바구니에 담아 눌리지 않도록 얇게 펴놓았다. 그림처럼 예뻐서 사진을 이리저리 찍을 때 두리번두리번 설계도면인가 종이를 펼쳐보며 난데없이 건장한 남자 두 사람이 나타났다.
“다음 주 월요일부터 조경 작업에 들어갑니다.”
바닷가 철새도래지여서 문화재청이 보호하는데 시에 부탁해 구청과 대교 사무실에서 나눠 돌보고 있다. 앞뒤 두 곳 길을 내고 가운데 남는 쓸모없는 자투리다. 더 넓은 저 아래 공터는 구청에서 공원으로 가꿔 온갖 나무를 심고 오솔길을 내며 벤치도 놨다. 여긴 처음엔 꽃밭을 만들겠다며 나가라 하다가 주위 아파트 사는 나이 든 사람들이다. 지긋한 부모뻘이다.
운동 삼아 소일거리로 예쁘게 할 테니 잘 봐 달라 했다. 그냥 놀리는 것보다 풀 베고 채소 가꾸면 보기 좋아 보일 거라 여겼다. 주위를 깨끗이 하고 꽃도 심어 꽃밭처럼 하겠다 했더니 그래도 안 된단다. 완강히 거절하다가 얼마 뒤 팀장과 다른 직원이 찾아왔다. 생각해 보니 풀 베고 쓰레기 줍는 일이 을씨년스럽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샅샅이 둘러보고 나서 가까이 다가와 경작하라 고맙게 허락해 준 곳이다.
“그냥 농사지으세요.”
손을 들어 죽 그으며 둑에 나무나 넝쿨 채소를 올리면 풀 벨 때 어렵단다. 벚나무와 상록수, 매실 등을 사서 입구에서 가장자리로 쭉 둘러 심었다.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개나리를 심어 경계로 삼았다. 우리 놀이터라 관심이 대단하다. 유실수도 있어 열매 맺으면 따먹기 좋다. 꽃나무도 심어 사철 피는 것을 볼 수 있게 했다. 접시꽃과 봉선화, 코스모스, 금잔화를 씨를 뿌려 모종을 만들어 곳곳에 심었다.
“붉은 접시꽃만 봤는데 분홍과 흰 것도 있네.”
금송화는 냄새가 고약하다. 꽃은 보기 좋은데 향기가 그렇다. 그걸 밭 가장자리에 심어두면 채소를 갉아 먹는 벌레가 가까이 못 온단다. 거름과 비료를 주었더니 이것들이 제멋대로 커서 덩치가 크다. 봉숭아는 줄기가 아른거리는 게 불그레한 것이 팔뚝만 하다. 뿌리는 약한 게 너무 커서 바람에 이리저리 넘어져 휘청거린다. 가을바람 불면 이것들이 빙글빙글 돌며 야단이다. 넘어져 비틀대면서도 꽃을 한껏 피운다. 가까이 가 보면 줄기가 부러지고 뿌리가 반쯤 뽑혀 죽어야 하는데도 저리 환하게 웃어대고 있다.
“밭에 만수국 노란 꽃이 철갑을 했다.”
버린 현수막을 주워와 펼치거나 둘러치는 일이 있는데 지나는 버스나 사람들 눈에 띄어 보기 싫다. 얼룩덜룩한 게 거슬리고 농기구도 큰 것은 두드러져 보인다. 막무가내로 난 하겠다며 갖고 오는 사람이 있다. 걱정해도 소용없다. 넌 말해라 한다는 고집이다. 여름은 덜한 데 겨울은 드러나 밭이 어지럽고 지저분해 보인다. 부디 이러지 말자 우리 다 쫓겨나면 뭐 좋나 해도 무슨 얄궂은 말을 하며 대든다.
“구청에서 깨끗이 하라고 연락이 왔어.”
회장의 얘길 귀 넘겨 듣는다. 심은 것마다 잘 돼 풍성하고 땀 흘리며 일하다 돌의자에 앉아 쉬면 내 세상이다. 찹찹한 게 어찌 그리 편할까. 일하는 사람이 걸핏하면 돌의자를 세운다며 눈을 세로로 뜬다. 놀기만 하려고 나댄단다. 거름과 비료, 농약, 신발, 옷가지, 농기구를 넣을 움막을 하나하나 짓더니 여러 개다. 나도 올해는 농막을 지어야겠다 맘먹고 터를 닦으려는데 일이 이렇게 벌어졌다. 조마조마했는데 조경하는 사람들이 정말 나왔다.
“저 딸기나무들을 옮겨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버려지는 게 아까운가. 옮겨심자 한다. 솟은 것 중 좀 실한 것들을 뽑아 개울 둑에 심었다. 아카시아와 잡목들이 즐비해서 약간 햇볕이 드는 곳을 골라 구덩이를 파고 물 넣고 자근자근 밟아 뒀다. 풀이 웃자라 들어가기도 어려운 곳을 베내고 종종 묻었더니 가지런한 게 좋아 보인다. 아카시아가 멋없이 커서 그늘진다. 봄날 꽃필 땐 향기와 흐드러진 하얀 잎이 눈부셔 좋았는데 이럴 땐 민주다.
“잘 살아라.”
옆에 알맞은 빈터가 보이자 또 옮기자 한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유월이라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난다. 가슴팍엔 줄줄 흐르는 느낌이다. 괭이로 파고 삽으로 퍼내는 일이 쉽나. 옆에서 더 깊게 하라 야단이니 시키는 대로 하려면 녹초가 된다. 나는 일 잘하는 머슴이다. 엎드려 일하는 게 그리 재밌을까. 호미로 긁적여도 삽 괭이로 하는 나보다 더 잘한다. 일할 땐 옆도 안 본다. 앞만 보고 한달음에 내닫는다. 천성이 부지런해 잠시라도 가만 안 있다. 풀 베는 것도 대충해 버린다. 엉거주춤 서서 하려니 허리가 아프다. 낫으로 휙휙 쳐두면 안 한 것보단 낫다. 며칠 뒤엔 또 자라 우거진다. 아낸 그렇잖다. 펑퍼져 앉아 차근차근 머리 깎듯 밭 언저리를 한 바퀴 돌며 뽑고 빡빡 면도하듯 민다. 저리 부지런하니 게으른 난 늘 꾸중 듣는 게 일이다.
바지런한 사람이다. 건너편 바닷가 파밭 끄트머리가 좋다며 자꾸 얘기해 보란다. 안달이다. 아쉬워 못 산다. 그동안 정이 많이 들었는가. 아는 가덕도 친구에게 부탁해 산기슭 황토밭을 조금 얻었다. 거기에다 심자고 보챈다. 가 보진 않았다. 좀 멀고 외진 곳이다. 산이 높고 좁은 곳이라 내키지 않는다. 텃밭도 조금 하는 거지 자꾸 넓혀 농부가 되려 한다. 밭이 없어지는 게 안됐는가 다급한 마음에 어디 없나 찾아 헤맨다.
“대장동에 그리 가면서 밭뙈기 하나 없나.”
무얼 심고 가꾸고 싶어 근질거려 못 산다. 아침 일찍 따 모은 것을 포장해 분당 주옥에게 보내고 아는 사람들에게도 나눠준다. 그래도 많이 남아 냉장고에 넣는데 거기도 차서 보관하기 어렵다. 많아 넘치니 구차하다. 어쩌면 좋겠나. 먹어본 이웃이 서로서로 사줬다. 시중가 절반 값으로 팔았다. 석주는 중고 매장 당근 사이트에 들어가 사진을 올렸더니 사겠다고 주문이 들어온다. 이리저리 열흘 넘게 팔았다.
“고단해도 돈이 생기니 할만하네.”
수십 킬로이다. 번 돈이 쏠쏠하고 짭짤하다. 찔리고 옮겨심느라 힘든 건 숙지근해지면서 언제 그랬나 생각이다. 새벽에 나가 따는 재미가 붙어 정신없다. 실컷 먹고 주고 파는 게 그저 그만이다. 이런 게 어딨냐이다. 죽은 사람 옆에 두고 팥죽 들어오는 것 헤아린다더니. 만약 시골 가서 농사지었으면 난 벌써 골병이 들었을 것이다. 어휴 이만하길 다행이다.
“이게 웬 떡이래 먹고 인심쓰고 팔고.”
붉은 게 먹음직하다. 한 술씩 떠먹는 게 아니라 음미하는 맛이 대단하다. 이맘때쯤 풀밭에서 갓 올라온 텁텁한 찔레 순을 먹고 신 시금치 잎을 맛보기도 한다. 그러다 딸기를 보면 눈에 띄는 그 붉은 색깔이 좋다. 보석을 찾은 것 같다. 탐스러운 걸 따 먹다가 가시에 찔리고 노린재가 씹혀 퉤퉤 하던 게 생각난다. 보이는 게 붉다 파랗다 하지 냄새가 노란 게 어딨나. 정말 그렇게 나는 것 같다. 한참을 기분 나쁘게 했다.
“어휴 코를 톡 쏘는 노린내다.”
보이지 않는 작은 것이 냄샌 지독하다. 산기슭 딸기는 비실비실 말라 죽어가는 어미 나무와 같이 있어 많이 달리지 않는다. 새끼가 혼자 커야 거기서 조롱조롱 맺힌다. 조금 있는 걸 맛나다 하면서 귀한 열매로 여겼다. 사과와 감, 토마토, 수박 등은 붉은빛이 돌아도 겉과 속이 선홍색인 건 이뿐이다. 햇볕에 반사되는 붉은 빛은 저녁놀처럼 아른아른한 게 어쩜 요리도 어여쁠까. 푸른 숲에 빨간 건 눈에 잘도 보였다.
“어디 없나 따먹게.”
찾아 헤맸다. 햇순이 걱정근심 없이 쭉쭉 뻗어 올라 치솟는다. 제법 굵다. 엄마 나무 바로 곁엔 큰 것이 솟고 멀리 뻗어가는가 떨어진 곳에도 작은 것이 종종걸음으로 올라왔다. 이것들이 다 크면 밭에 들어갈 수도 없을 것 같아 솎아내야 한다. 열린 아빠 엄마 나문 따 먹고 무정하게 싹둑 베낸다. 거추장스러운데 가시가 있어 어찌 걷는담. 무슨 걱정인가. 푸른 숲 가꾸기로 중장비가 들어와 그대로 엎어버릴 것이다.
“찔레처럼 온통 억센 가시로 덮였어.”
그래도 따기만 하고 이 가뭄에 물을 주지 않으니 미안하다. 열매에 수분이 많은데 메마른 흙에서 무얼 빨아올리나. 통에 물을 가득 길어 들이부었다. 얼마나 무거운지 끙끙거리면서 날랐다. 되게 용을 썼더니 설사가 다 난다. 새벽에 이 난리를 치르고 나면 노곤해서 아무것도 못 한다. 몇 번 소변으로 잠을 못 잔 데다 피곤이 겹쳐 흐느적거린다.
“오전은 일해주고 오훈 나간다.”
당구 치면 팔이 후들후들 떨려서 지기 일쑤다. 주일날은 설교 듣는데 그만 깜박깜박 존다. 저 멀리서 아득히 들려온다. 사람을 옴짝달싹 못 하게 옥죄어 죽을 맛이다. 한 달간 달달 볶인다. 지쳐서인가 제대로 밥을 먹었는데도 중간에 어지럼이 생겨 보니 저혈당이 찾아왔다. 아내도 몸이 안 좋아 사소한 일에 자꾸 짜증을 낸다. 난 뒷전이다. 달래기 바쁘다.
“이 짓거리도 못 하겠다.”
딸기가 몸서리난다. 보기 싫고 먹는 것도 떨떠름해졌다. 하루만 둬도 익어 시꺼먼 게 뚝뚝 떨어진다. 물러터져 못 쓴다. 산기슭에는 가지에 하나둘 열리는데 여긴 뭐 좋은 일이 있나 빼곡히 매달렸다. 그냥 따 먹지 했다가 이리 혼날 줄 몰랐다. 처음은 굵다가 점점 작아진다. 콩알만 하다. 가시에 찔려 손등과 팔다리 곳곳이 긁혀 생채기가 얼금얼금 났다.
“오뉴월 더운 날 두꺼운 긴 소매를 걸치니 이게 뭐람.”
멀쩡한 곳이 없다. 만지면 터실터실하다. 벗으면 곳곳에 죽죽 피멍이 들었다. 잔가시가 들어가 곳곳에서 뜨끔거린다. 땀에 절여 목욕을 자주 해 기름기가 다 빠지는 느낌이다. 피곤해서 몸살이라도 나면 열나는데 코로나로 의심받는다. 격리되고 검사받아야 한다. 일할 때 마스크를 어찌 쓰나. 콧등은 내놓아 숨 쉬면서 일해야 한다. 공기 중에 다니는 전염병이 들어올까 불안하다. 장난삼아 몇 그루 심었다가 이리 많이 열리나.
“한 말 들어요. 코를 덮으세요.”
가물어 모든 게 타들어 가는데 간밤에 비가 왔다. 하마나 하마나 하다가 온 비여서 반갑다. 물기 없으니 딸기도 자잘해 져서 맛도 덜하다. 가뭄에 찌들면 달콤하리라 여겼는데 아니다. 소변 보는데 연통에 물 듣는 소리가 들려 보니 제법 많은 비가 내린다. 아파트 저 밑 도로를 보니 빗방울 튀는 게 타닥타닥 가로등에 번쩍여 보인다. 비 맞으면 딸기는 어찌 되는가. 물러터져 맛없으면 어쩌나 걱정이다.
“물컹해서 먹겠나.”
퉁퉁 불어 허물어지거나 물러져 질퍽거리면 야단이다. 오전에 비 삘 때 갔다. 바짓가랑이에 풀잎 이슬이 촉촉이 젖어 든다. 딸기가 주인을 반기며 발그레한 게 웃고 있다. 꽤 굵다. 그사이 물기를 빨아들였는가. 더 선명하게 홍색이고 말랑말랑한 게 손에 잡혀 똑똑 잘 떨어진다. 물렁거려 싱겁고 맛없나 했더니 더 달다. 배로 커 보인다. 만지면 쏙쏙 빠지니 수월하다. 붓기도 잘한다. 이내 한 바가지다.
“씻겨서 먹음직하구만.”
딸기밭이 온통 불그레하다. 비오니 익는 게 빠르다. 저절로 씻겨져 말끔한 게 탐스럽다. 한입씩 넣으며 달짝지근한 맛에 취한다. 굵고 몰캉한 게 솔솔 잘 넘어간다. 고추밭처럼 딸기밭에 불이 붙었다. 설렁설렁 부는 바람에 빗물도 마르고 촉촉한 땅에 먼지도 안 난다. 딸기만 불타듯 익었다. 옮겨 담기 바쁘다. 딸 때는 모르는데 갖고 와 고르고 저울에 다는 것도 일이었다. 온전하지 못한 것과 덜 익은 것을 골라내고 너무 익어 곧 문드러질 것도 빼냈다. 스치로폼에 1킬로씩 담아 포장했다. 비닐로 덮으니 하얀 그릇에 탐스러운 발간 것이 보석과 같이 빛났다. 물러서 일그러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만져야 했다. 이것 때문에 아무 짓도 못 한다. 이 일로 오도 가도 못 하고 갇혀 지내자니 죽을 맛이다.
“여기 새집이 있어요.”
앉아서 보면 숨어있던 것을 볼 수 있다. 꽤 굵은 것들이다. 잎에 가려 안 보인 딸기다. 위아래를 찾아 더듬는데 마른 풀로 에워싼 조그만 집을 발견했다. 새집이 있어 달린 나무째 꺾어와 꽃병에 꽂았다. 찬찬히 살펴봤다. 작은 새인가 둥지가 자그만 하다. 딸기나무 중간쯤 잎에다 걸고 집을 지었다. 겉은 마른 잎을 두르고 속은 어디서 보드랍게 가는 잎을 갈라 펼쳐 둥글게 짰다. 마무리한 곳엔 흰 실로 옭아맨 듯하다.
“참 정교하게 만들었다.”
다 키우고 갔는가 비었다. 깨끗하다. 털 부스러기나 배설물, 비비적거린 흔적도 없다. 어찌나 정갈하게 지었는지 자꾸 봐 진다. 혹시 살기 전에 뜯어왔는가. 짝을 못 만났는가. 열매가 맺히면 사람이 온다는 걸 알 텐데. 보면서 무슨 새일까. 꺾어온 새집 나무에도 딸기가 달려 익어간다. 꽂아뒀더니 눈 감고 있던 딸기가 부스스 깨어나 발그레하다. 탁구공을 새집에 넣어서 새알처럼 기분을 냈다. 타조 알 같은 게 들앉았다.
“불도저가 밀어버리면 사라질 텐데 누구나 가져가라 주세요.”
딸기나무 처음 키울 때 애먹었던 것을 생각하니 이걸 누가 캐 가 심었으면 한다. 모종도 찾으면 쉽게 있나. 여기 이렇게 많은 걸 어찌 알겠나. 막 파 가도 된다. 묘목 파는 데는 잎도 없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비싸게 사와 심어야 한다. 이건 잎이 보이고 살아있는 걸 그냥 마음대로 캐 가져갈 수 있다. 여기 공짜 묘목이 있다. 이걸 신문에 내야 하나 텔레비전에 광고해야 하는가. 딸기 따 먹고 실컷 가져갈 수 있다.
“오늘 김 사장 정비소에 차 고치러 가면서 필요한가 얘기해 볼게요.”
십 년 훨씬 넘은 차여서 여기저기 고장이 잘 난다. 이번엔 전조등이 나갔다. 밤길 갈 때 가로등 빛에 모르다가 뒤늦게 알게 되었다. 다닐 때 침침한 게 영 밝지 않아 왜 이런가 했더니 눈이 하나 나갔다. 그것도 모르고 한쪽 눈으로 다녔다. 살림엔 눈이 보배요. 천 냥이면 구백 냥이 눈값이라는데 귀한 눈을 빠뜨리고 지났다. 전에 김 사장이 아파트 화단에 감나무를 가져가 심었는데 대봉이 주렁주렁 열려 이웃과 나눠 먹는다며 자랑이 대단했다. 이번에도 가져가라 일렀다.
반기며 일 마치고 저녁에 캐러 가겠단다. 몇 사람 데려가야지 옆집과 아는 친척도 줘야지 한다. 오지랖이 넓어 퍼주길 좋아하는 인심 좋은 사람이다. 일 보고 집에 가는데 전화가 왔다. 이곳 길을 아는 동생이 옆에 있는데 밭을 알려달란다. 벌써 가 있는가 보다. 가다가 들러보니 두 대의 차가 대 있고 들랑날랑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여자도 보인다. 모두 딸기 딴다고 정신없다. 남자들은 입으로 가져가고 여잔 바구니에 담는다.
“딸기 천지다.”
허겁지겁 따먹는다.
날이 어스름해져서 아직 가로등도 켜지지 않았다. 웬 딸기냐며 처음 본 것처럼 주인인 내가 가까이 가도 모른다. 나무만 가져가라 했는데 이리 여럿이 와 딸기를 막 따먹는다. 먹는 걸 어찌하겠나. 어두우니 익은 거나 덜 익은 걸 그냥 딴다. 친구와 친척들이다. 기쁨에 넘쳐 야단이다. 어디 이런 데가 있었나.
“야 여기 딸기 많다.”
꽃필 때 벌 떼처럼 모였다.
점점 어두워지자 삽과 괭이로 새순을 파기 시작한다. 뿌리가 깊어 쉬 나오지 않자 잡아당긴다. 왕 대추와 엄나무를 다 캐고 딸기나무 수십 그루를 뽑았다. 여럿이 달려들어 육중한 쇠붙이 곡괭이를 휘두른다. 하나둘 모으니 재밌는가 한 아름씩 거두어 두 트럭에 실었다. 딸기 달린 나무는 두고 옆에 곁가지 올라온 것들을 건드렸다.
“더 따먹고 가자.”
가로등이 켜지자 밝았다. 밤중 딸기밭은 웬 사람들로 붐볐다. 일하다 말고 딸기 따 먹느라 부산을 떤다. 여러 사람을 품에 안은 딸기밭은 오늘 밤 신났다. 시끌벅적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따 먹는다. 잘 익은 것 덜 익은 것을 마구 헤집는다. 익은 건 몰캉하고 달콤하지만 덜 익은 건 딱딱하고 풋내난다.
“이거 방풍이지요.”
“무화과 꺾어서 꺾꽂이할래요.”
어찌 알고 나물도 캔다. 모두 신명이 나 견딜 수 없는가 이리저리 다니면서 무엇이 있나 뒤진다. 이마엔 전등불을 켜서 다닌다. 준비를 잘해 왔다. 저녁을 딸기로 채우는 것 같다. 이런 횡재를 만날 수 있나. 어디 어디 심고 누구 몇 그루 주자는 등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얘기는 계속된다. 대장 김 사장을 앞세워 한몫 톡톡히 챙긴다.
주일 아침에
“내일이면 숲 작업이 시작된다니 오늘 마지막으로 가서 땁시다.”
아내 말 따라 한참 딸기를 따는데 우우 몰려왔다. 며칠 전 캐갔던 정비소 직원들이다. 오자마자 밝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딸기를 허둥지둥 따먹기 시작한다. 주인 눈치 볼 필요도 없다. 버려지는 것이니 괜찮은 것으로 생각한다. 달린 나무도 여러 그루 캐내었다. 순을 캔다는 게 어미 옆에 붙어있어서이다. 굵고 참한 것을 골라잡는다.
“딸기가 주렁주렁하다.”
“더 많이 달렸다.”
새벽이니 식전인가 허기를 채우는 것 같다. 마구 따 먹는다. 심고 보니 모자랐는가 이 아침에 또 왔다. 지천으로 달린 걸 보곤 이거야말로 좋은 과일이라고 생각이 든 것 같다. 먹어보니 이를 데 없다. 밝은 아침 햇살에 반짝이는 것을 보고 더 탐을 내는 것 같다. 심어놓으면 이렇게 먹는 것을 느끼는가 보다. 숱한 과일 중에 꽃같이 아름다운 과실이다.
“다녀도 산딸기밭은 처음이구만.”
밝은 햇빛에 빛난다. 아주 귀엽게 생겼다. 오뉴월 무슨 나무 과일이 있나. 빨리 나온 건 앵두나 살구, 매실이고 이 산딸기이다. 먹는 것 중에 붉은 게 많은 것 같아도 찾아보면 그리 많지 않다. 안팎이 붉은 건 토마토와 딸기이다. 요즘은 온상에서 길러 내 더 일찍 나온다. 식물의 색깔이 그냥 된 것이 아니라 어디에 좋은 것 같다. 다른 과일은 혈당을 높이는데 산딸기는 덜 하다. 그래선가 사람들이 당뇨에 좋다고들 한다.
“과일 먹고 배탈 난 적 있는데 괜찮을까.”
무른 참외 먹고 설사를 했단다.
좋은 것을 골라 남 주고 판 뒤 남는 걸 먹는다. 아침저녁으로 쟁반에 담아주는 것을 챙겨 든다. 빨간 물이 배어 치아가 거무스레하다. 단단한 이에 스며드는 것 같다. 치석 치약으로 살살 문질러 닦으니 되돌아온다. 어떤 이는 단맛이 적어 설탕을 넣어 먹는다. 그러면 빛깔과 풀이 죽어 흐물거려 후줄근하다.
“밭이 헐빈해 졌네.”
“난장판이다.”
후닥닥 캐서 가니 세상이 조용하다. 천둥 치고 소낙비가 지나간 것 같다. 딸기밭이 홀쭉해졌다. 딸기가 비 내리고 더운 볕에 잘 익어 루비처럼 빛난다. 곱디곱구나. 따다 말고 밭 가운데 서서 단소를 꺼내 불었다.
“삘릴리---.”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다---.”
앞 개울에 복숭아와 대추, 석류가 붉게 달렸다. 도로를 내면서 심은 것들인데 다른데 없는 과실나무가 세워졌다. 그중 복숭아는 발갛게 주렁주렁 달려 익었다. 절벽 밑에 물이 있어 따기가 어려웠는가. 그대로 탐스럽게 남았다. 작을 때 매실처럼 따 술 담그는데 사람들 눈에 띄지 않았는가 보다. 손이 닿지 않아 긴 장대에 갈고리를 잡아매어 당겼다. 굵다란 게 물로 첨벙첨벙 빠지면 매미채로 건져 올렸다. 두 양동이에 담아 아내와 만선의 기쁨으로 들고 왔다.
한번은 아내가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선다. 풀밭에 떡붕어가 있었다. 방금 뛰어올랐는가 싱싱하다. 물로 넣어줬다. 큰 게가 저쪽에서 엉금엉금 기어 이쪽으로 오고 있다. 보기에 붉게 보이고 긴 다리에 둥글넓적한 몸통이 크다. 건너오면 붙들어야지 곡삽을 가까이 대고 훌치려 했다. 눈치채고 깊은 곳으로 설설 들어간다. 조심조심 잡으려는데 흙탕물이 가려 볼 수 없다. 아내가 바닥을 휘저어 흐리게 했다.
썰물 때는 강물이 들어와 붕어가 있었고, 밀물에는 라면 끓일 때 넣으면 맛있을 바닷게가 올라왔다. 어떨 때는 숭어가 수면으로 입을 봉긋봉긋하며 여러 마리씩 떼로 줄줄이 둥둥 떠다닌다. 대야로 건지면 막 잡힐 듯하다.
“괜히 구정물로 흐려놓고선.”
십 년 가까이 부치면서 사람들과 어울리고 배추와 무, 상추, 부추 채소를 가꿔 푸성귀를 실컷 먹었다. 감자와 고구마, 땅콩, 마늘, 양파, 옥수수를 키웠다. 달래와 돌나물, 냉이를 캐와 기르고 봉선화와 금송화, 접시꽃을 심어서 꽃밭에 앉아 물들이는 아내를 보며 참 행복했다. 산딸기까지 흐드러졌다. 밭과 함께 즐거웠다.
“간다. 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