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주 (坡州) 의 유래
파주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증헌문헌비록에 남겨있다. 맨처음 고조선의 땅으로 삼한시대 마한에 딸려 있었다,
또한 삼국시대에 최초로 파주를 차지한 것은 백제 였으나 고구려와의 계속된 영토 싸움으로 475년 파주땅 전체가 고구려 영토가 되다.
신라 진흥왕때 고구려를 몰아내고 신라가 차지했는데 삼국통일 과정에서 신라와 고구려가 서로 싸우는 각축장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936년 후삼국을 통일하고 고려를 세운이 후 각 지역을 주, 부, 군, 현으로 지명을 고치는데 이때 적성지역을 적성현이라 불렀다. 그 뒤 장단, 적성, 파평 지역이 개성부 관할의 기현에 속하다.
1018년 (현종9) 파주는 경기에 속하는데 京(경)은 天子가 도읍한 京師를 뜻하고 기(幾)는 천자의 거주지인 왕성을 중심으로 사방 560리 이내의 땅을 의미, 오늘날의 수도권 지역을 의미한다.
1170년(의종24) 무신정변이 정중부를 비롯한 무사들의 반란으로 일으킼 보현원이 바로 장단 지역이고 1174년(명종4) 장단지역에 궁궐 조성관을 두어 새궁월을 지을 준비를 하고 1217년(고종4) 장단현에 궁궐조성이 완성 되었다.
조선에 들어와 5개 지역인 교하, 파평, 파주, 적성, 장단으로 나뉘다.
파평은 삼국시대 이래 중요한 군사적, 전략적 요충지로 일찍이 고려시대 윤관 장군의 기마대가 있던 곳이다.
윤관장군은말이 국력임을 간파하고 별무반을 만들어 말을 키우고 글과 무예를 닫아 여진족을 물리치고 국경을 지켰다.
1398년 파주지역인 파평현과 서원현이 원평군으로 1414년 중앙관제와 지방 군현의 대대적 개편에 따라 교하현이 원평군에 장단현은 임단현에 소속되다. 1415년 인구가 1.00호를 넘어선 원평군이 원평도호부로 승격하다.
1459년(세조5) 세조의 비인 정희 왕후는 파평 윤씨 윤번의 딸로 세조가 어린 조카 단종을 영월로 유배 시키고 1455년 왕위에 오를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 하게 된다. 이후 파평 윤씨인 정희왕후의 고향인 원평도호부를 목(牧)으로 승격 하면서, 파평 윤씨의 파(坡)자를 따서 파주(坡州)라 하였다 한다.
파주의 서쪽은 한강이 흐르고 북쪽은 임진강이 흐르고 있어 두강이 만나는 파주는 임진강의 범람으로 수해를 입기도 했다.
또한 심국시대 부터 삼국의 격전장으로 ,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 임금이 화석정에 불을 놓아 칠흙같이 어두운밤 무사히 임진강의 임진나루를 을 건너 의주로 피난했고 조선과 중국의 사신들이 한양에서 중국을 오가는 사행 길목 이었다.
연암 박지원도 임진나루를 건너 8촌형 박명원의 사행길을 따라 갔다 . 연암 박지원이 참가했던 사행길은 1780년 5월에 한양을 출발하여 6월 24일 압록강을 건너 북경을 거쳐 열하까지 오갔던 일을 날짜별로 기술한 길 위에서 쓰여진 일기이다. 이"열하일기'를 통해 박지원은 조선의 대문장가가 된다.
병자호란때는 소현세자가 이 강을 건너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갔다.
6,25사변이 일어난 때에는 임진강의 고량포를 거쳐 북한군이 내려왔고 한국전때는 휴전협상의 장소였고 지금은 철책선이 분단의 아픔을 대변해 주고 있는 곳으로 1986년 도라산에 전망대를 만들었는데 맑은 날이면 북한의 개성이 보인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