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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세음보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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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정법 및 불교입문 하는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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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번호:193 글쓴이: 日蓮
조회:24 날짜:2003/02/28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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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장
1. 위대한 창조력을 지닌 말의 세계
정구업진언
수리 수리 마하수리 수수리 사바하(3번)
본경을 강의하겠습니다. 정구업진언입니다. 입으로 지은 죄를 깨끗이 하자는 진언입니다. 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입은 재앙의 문인 동시에 진실과 광명의 문이기도 합니다. 입은 칼과 같이 양면성이 있습니다. 인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입을 조심하고 말을 조심해야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됩니다.
"말은 이것이 위대한 창조의 힘을 지니고 있사온 바 저희들은 참된 말을 바로 써서 말의 위력을 실현하겠습니다.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겠사오며, 나쁜 말을 하지 않겠사오며, 참된 말만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다짐해야만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말의 중요성에 대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화엄경에도 등장하는 내용이지만 참으로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만 할 대목이 있습니다. 보현행자의 서원입니다.
"중생과 세계의 나타난 현상이 아무리 거칠고 부정하게 보이더라도 실상은 청정하고 원만하오니 저는 언제라도 중생과 세계의 실상을 찬양하고 긍정하는 말만을 하겠습니다. 참된 진리의 모습을 깊이 믿고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 실상의 말이고 참된 말이며, 올바르게 찬양하는 말인 것을 깊이 믿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이 믿고 찬양하는 참말은 위대한 성취력을 지니며 창조의 힘을 나타냄을 깊이 믿습니다."
말이라고 하는 것은 진실로 위대한 창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말은 무섭고도 두려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 한마디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말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말을 잘 활용해야 합니다. 소극적이고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말을 하지 마십시요. 우리들은 쓸데없는 말들을 너무나 많이 합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심코 던지는 한마디의 말이 그 아이의 일생을 결정짓는다는 얘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노벨수상자 솔 벨로우는 초등학교 때 선생님이 "너는 노벨상 감이야"라고 무심결에 던져준 한마디의 말이 자기일생을 문학가로 결정지었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말 한마디가 우리들의 삶을 결정짓는 예를 많이 봅니다. 옛말에 `입살이 보살'이라 하고 `말이 씨가 된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하는 말은 위대한 창조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허술한 말을 하거나 부정적인 말, 좋지 못한 말을 쓰게 되면 곧바로 그 말은 그의 앞날에 부정적인 상황을 창조하고 그의 미래를 나락으로 이끌고 가는 원흉으로 둔갑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경전의 제일 처음에 입으로 짓는 업을 맑히는 정구업진언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진실로 말이 지니고 있는 위대한 힘을 잘 아셔야 합니다.
우리가 관세음보살님을 부르면서 염불을 하다 보면 내 몸과 마음이 관세음보살로 변해 갑니다. 관음의 화신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를 많이 하게 되면 내가 관음의 화현이 되어서 모든 액난과 고난을 이겨 나갈 수 있는 힘이 양성되고 용솟음치는 활력을 잉태하게 되어 있습니다.
말은 마음에서 나온 것이어서 마음을 통제하려면 말부터 통제해야만 합니다. 가끔 사람들이 묻습니다. "스님, 마음을 도무지 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면서 "마음을 잡고 싶다" "마음을 안정시키고 싶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 때 마다 드리는 말씀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음을 잡으려면 우선 마음이 하는 역할을 점검해 보아야만 합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선 말과 생각과 행동이 있지 않습니까? 그같은 말과 생각과 행동이 마음으로부터 나와 다시 마음으로 흘러드는 도리를 아십니까? 우리가 말을 들을 때 그 말은 다시 어디로 흘러드나요? 또 우리가 생각을 할 때, 그리고 행동을 할 때 그 종착점은 바로 마음 아닙니까? 그러니 결국 말과 생각과 행동이 마음에서 나와 마음으로 흘러드는 것이라고 하면 그 말과 생각과 행동을 잡는 것이 바로 마음을 잡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을 잡으려면 말을 잡아야 합니다. 생각을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행동을 통제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잡기 위해, 생각을 잡기 위해, 행동을 잡기 위해 염불하고 기도하고 절을 하는 것입니다.
2. 허공계의 무량한 존재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
나무 사만다 못다남 옴 도로도로 지미 사바하(3번)
인간에게 극한 상황이 느껴지는 이유는 물질계적인 3차원의 존재라는 사실만을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이 3차원에만 국한되어 있는 존재이고 3차원적 존재라는 사실만을 인정하는 어리석음에 휩싸여 있기 때문에 극한상황을 느끼게 됩니다. 시간과 공간에 속박된 차원을 의미합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극한상황이라는 것은 인간이 물질적 한계를 분명히 인식할 때 초래되는 상황입니다. 스스로를 3차원적인 존재로 전락시킬 때만 한계상황이 느껴지게 됩니다. 만일 그 마음 가운데 무한대한 차원을 인정하고 그를 호흡하게 되면 한계상황은 어느결에 눈 녹듯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한대한 차원과 하나가되기 위해 기도하고 정진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모든 갈등과 대립,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 부터 초래되는 모든 극한상황은 우리의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는 순간에 녹아져 내리게 되어 있습니다. 철학자들이 아무리 설명한다 하더라도 이와같은 상황은 3차원적인 언어로는 설명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입을 갈무리하고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린 다음 자연스럽게 초월세계, 3차원을 뛰어넘는 존재들에 대한 감사로움의 표현인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五方內外 安慰諸神眞言)'을 독송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는 우리가 말하는 `시방'입니다.
고혈압이라든가 당뇨 등등의 육신의 질병 따위로 3차원적 생각에 속박되어 있을 때 이 육신은 한계상황에 봉착하게 됩니다. 그같은 한계상황을 느끼는 마음으로는 어떠한 질병도 이겨낼 수 없습니다.
인간들의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3차원적인 한계상황으로부터 유래되는 것입니다. 세포들 속에 그 같은 생각이 머금어져 있는 한 질병의 퇴치는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관세음보살님을 모시고 부처님을 모시기만 하면 몸과 마음 가운데 있는 질병은 저절로 녹아져 내릴 수 밖에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기도는 3차원을 뛰어넘는 능력을 이끌어 내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통해 물질계적인 한계상황이 타파되고 그로부터 야기된 모든 질병들은 자연히 스러져 내립니다. 끊임없이 기도하고 정진하는 가운데 당뇨가 낫고, 고혈압이 낫고, 변비가 나으며 모든 질병이 다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하는 마음이 아니고서는 3차원적인 어떤 질병도 치유해 낼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밝히는 사람들이 드물기 때문에 모두가 무명에 휩싸여 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이데아(Idea)를 꿰뚫는 사람들이 참으로 희유하다고 금강경에 나오지 않습니까? 질병이라고 하는 것은 전부가 자기 스스로 3차원적인 욕망의 포로가 되었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들리진 않지만 다겁생래 우리를 항상 지켜보시며 시방삼세에 항상 함께 하시는 허공계의 모든 분들께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안위'는 `고맙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런 뜻입니다. 무한대의 세계에 대한 감사로움과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맛볼 수 없음에도 나의 마음을 무한대의 차원으로 끊임없이 승화시키고 제고시키려는 그러한 부처님의 염원이 담겨진 내용입니다.
우리는 입으로 쓸데없는 소리하지 않고, 3차원적인 소극적이고 비관적이고 부정적이며 원한에 서린 말을 떨쳐내고, 오방내외에 계신 모든 삼세제불보살님과 화엄신장님께 `감사합니다'하는 기도를 올려야만 합니다.
제가 지금까지 제 나름대로 열심히 기도 정진하고 참선을 하며 공부해 왔지만 불경에 나오는 한자 한자의 순서와 배열이 철두철미한 진리성 속에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놀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습니다.
경전의 해설자들도 그것이 주는 뉘앙스와 의미를 부처님의 마음따라 올바로 간취하거나 올바로 파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사실이 불교의 불행이고 비극입니다. 문자 그대로 그냥 해석해 내려가고 그것으로 끝을 낼 수 밖에 없겠지만, 밝은 눈으로 보면 전후좌우의 배열과 그 안에 들어있는 무궁무진한 의미를 생각해야만 될 그런 내용들이 대부분입니다.
`입을 청정히 하라. 진리에 입각한 말을 하라. 그 깨끗한 입과 깨끗한 마음으로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들에게 예경을 올려라' 여기서부터 우리들의 기도는 시작됩니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우리의 마음은 우주로, 부처님 세계로, 그리고 신장님들의 세계로 승화되는 것입니다. 여기서부터 이른바 물질계적인 극한상황을 초극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나의 한계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힘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힘은 나의 욕망과 탐욕에 포로가 된 마음을, 그리고 나를 속박하는 갖가지의 부정적인 양태의 사슬을 과감히 끊어내게 합니다. 참다운 기도에 의해 그와 같은 힘이 생겨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무한대의 차원을 머금으면 머금을 수록 나의 마음은 한도 끝도 없는 우주로 달려가기에 세속의 모든 허망한 욕망들은 저절로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끊임없이 기도를 하며 살면 3년 전이 다르고 2년 전이 다릅니다.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3차원적인 한계상황이 점차로 초극되어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열심히 기도하고 살면 물질계적인 자기를 제압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신(神)과 신장(神將)
불교에서 말하는 신장(神將)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神)과는 패턴이 다릅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가다가 신을 보았다 했고 또 파티마니 루르드 등의 장소에서 성모 마리아를 목격한 사람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신장은 꼭 외부에 있는 존재들만이 아닙니다. 우리가 다 신장이될 수 있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의 존재들 가운데 살아있는 중생들에게 메시지를 던지게 될 때 신이라고 생각하게 될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리석은 사람들의 생각입니다. 우리들의 마음 밑바닥에, 나의 마음가운데에 영원의 존재와 하나가 되는 존재가 있음을 분명히 확신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사람들은 외부에 뭐가 있다고 생각하고 그걸 신이라고 부릅니다. 사도 바울의 패러독스 역시 거기에 있습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신이란 존재는 내용에 있어서는 불교의 신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신을 인간과 전혀 구별되는 존재로서 창조주로 등극을 시킵니다. 불교에서의 신이란 인간과 구별되는 존재가 아니며 우리의 마음과 둘이 아닌 존재로 얘기합니다. 기독교가 2원론이고 불교가 1원론인 차이가 신에 관한 이해로서는 현격한 차이가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에서는 신과 인간사이에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지만, 불교에서는 그같은 차별이 인정되지 않습니다.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예에서와 같이 불교에서는 모두가 하나입니다. 우리가 갈고 닦으면 언제든지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 가운데 거치게 되는 존재들을 신장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마음이 부처이고 우리 모두 부처입니다만, 그 사실을 깨닫고 닦은 정도가 다르기에 차별이 나는 것입니다. 본래는 모두가 다 하나인 것입니다.
우리가 말하는 귀신이란 존재는 모두가 부처가 되어가는 과정의 존재인 것이고 우리들의 본질적 자화상인 것입니다. 우리들은 `살아있는 귀신'이며 `죽은 귀신'들은 허공계에 가득 있습니다. 보이는 세계나 보이지 않은 세계 역시 하나인 것입니다.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은 바로 우리들의 의식 영역을 보이는 세계로부터 보이지 않는 세계로, 3차원으로부터 무한대한 차원으로, 극한상황으로부터 해탈의 상황으로 넓혀가는 것입니다. 극한상황을 깨뜨리는 것이 해탈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의 의미는 3차원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철학자들의 근본명제 가운데 아주 어려운 난 문제중의 하나가 바로 `극한'이라는 용어입니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극한'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모두가 무한입니다. 불교에서 말하는 해탈은 3차원적 세계로부터 극한상황을 타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극한상황이란 무한대차원과 3차원 사이의 장벽을 말합니다. 이 장벽에 부딪쳐 뚫고 나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주저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저앉는 사람은 고뇌를 느끼고 죽음을 느낍니다. 투쟁을 하게 되고 죄악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것을 뚫고 나가버리면 고뇌도 없고 죽음도 없고 투쟁도 없고 죄악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기가 막히지요. 불교는 이렇게 기가 막히게 풀려가는 것입니다. 어려울게 하나도 없습니다. 차원만 뛰어 넘으면 간단한 것을 그 한계상황과 물질계에서 그렇게 괴로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중생들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오방내외 즉 시방삼세에 계신 무한대한 차원의 많고 많은 무량한 제불보살과 화엄신장께 지극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정진하며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안녕하십니까?' 이렇게 예경을 올리는 것입니다. 인사드린다는 것은 그들을 내 마음 가운데 품는 것입니다. 그들을 인정하고 내 마음 가운데 받아들이기만 하면 나는 그 순간부터 고뇌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며 모든 허망한 세계로부터도 벗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도 두렵지 않게 되고 욕망 때문에 싸울 이유도 없게 되는 것입니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면 남과 다투고 싶은 마음이 녹아져 버립니다. 물질로부터 해방되니까 참회도 되고 업장도 무너져 내리게 됩니다. 이것이 불교가 표방하는 부사의(不思議) 해탈경계입니다. 내 마음 가운데 부처님을 모시고, 오방내외에 계시는 모든 신장님들을 모시고, 관세음보살님, 화엄성중님, 지장보살님 전에 기도 드릴 때 모든 죄와 업장이 녹아져 내리고 고뇌로부터 해방됩니다. 죽음의 먹구름이 흩어지게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게 됩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에겐 죽음이 초월됩니다.
내 마음 가운데 미움이 있으면 남이 나를 미워하고 내 마음 가운데 원망감이 있으면 남이 나를 원망하게 됩니다. 원한이 원한이 되어 끊어지지 않으니까요. 내 마음 가운데 항상 감사로운 마음이 있고, 죽음의 공포가 전혀 없고 불생불멸을 확신한다면 어떤 액난에서도 괴롭지 않습니다. 교통사고조차 무섭지 않습니다. 내 마음 가운데부처님을 모시고 살면 혼탁한 세상에서 스스로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자명하게 깨달을 수 있습니다. 무한대의 세계를 열어 주는 그러한 천수경을 앞에 놓고 공부를 하게 되면서 우선 `부처님 감사합니다' `관세음보살님 감사합니다' `화엄성중님 감사합니다'하는 마음으로 `오방내외 안위제신진언'하는 것입니다.
3. 무상심심 미묘한 불법
개경게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그 다음에 개경게(開經게)입니다. 경을 찬미하는 내용을 담은 중요한 게송입니다. `무상심심미묘법(無上甚深微妙法)' 불법은 정말 미묘합니다. 죽음과 삶이 둘이 아닙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얘기입니까? 또 `기도는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 작업이다'라고 하는 사실을 한번 생각해 봅니다. 3차원적인 세상의 눈으로 보면 불가능한것도 무한대한 차원에서 보면 아이들 장난감 같은 차원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무슨일이든 이루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불법은 그렇게 미묘합니다. 사람이 만들어 놓은 문제를 부처님께서 풀지 못하면 누가 풀겠습니까? `예외없는 규칙은 없다(There is no rule but has some exceptions)'라 하지 않습니까. 아무리 법이 세상없이 철두철미하다 하더라도 묘하게 빠져나갈 구멍은 다 있는 것 아닙니까? 사람이 만들어 놓은 제도, 사람이 만들어 놓은 어떤 문제라 하더라도 일견 불가능한 듯 보이지만, 부처님이나 관세음보살님의 눈으로 보면 애들 장난감 같은 것입니다. 모든 것은 바로 부처님의 이데아 속에서 실꾸리 풀려나가듯 풀려나가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풀어나가는 과정에서 닥쳐오는 어려움은 각오를 해야 되겠지요. 분명한 사실은 모든 문제가 정말 무상심심미묘한 법따라 풀려 나간다는 사실입니다.
`믿어라'고 강요하는 것이 아니고, 또 모든 것을 하느님 아버지한테 위탁해 놓는 그러한 것도 아닙니다. 누구에게다가 위탁해 놓으면 간단할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럴 경우 외부의 허락이 아니면 영적인 세계의 진화라거나, 마음세계의 진화라는 것은 기대하기가 어렵습니다. 불교가 우리 만중생들에게 필요하고도 절실한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사실 다른 종교를 접하고 들어온 사람은 대부분이 불교가 어렵다고들 합니다. 그들은 좋은 일이 생겨도 하느님 탓, 나쁜 일이 생겨도 하느님 탓, 아들이 대학교 떨어져도 하느님 탓, 길을 가다가 망신을 당해도 하느님 탓, 다 하느님 탓입니다. 자기가 망신을 당하면 자기가 무언가 잘못해서 망신을 당한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하나님 탓이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의 정신과 마음을 고양시키려는 노력을 포기하고 그저 하나님에게만 모든 것을 위탁합니다.
불교는 결코 외부에 스스로를 위탁하지 않습니다. 안팎이 하나입니다. 참으로 불법은 무상심심미묘법입니다. 불법은 파고들면 들수록 정말 미묘해집니다.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점점 미묘해지고 불가사의해집니다. 그런 공부를 계속하다 보면 온 세계가 참으로 미묘불가사의한 진리 가운데 하나로 보이게 됩니다.
문화양상과 제도와 문물, 동물 식물 모든 것이 다 일정한 진리를 따라 형성되었습니다. 반야심경에서도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지요. 만상은 모두 진리따라 형성되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저기 보이는 종(鐘)은 1700℃에서 녹은 쇳물로 만들어집니다. 종도 이렇게 진리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모든 것은 진리따라 만들어졌습니다. 저 형광등도 마찬가지지요.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은 다 진리를 바탕으로 형성되어 있습니다.
`참'의 기운
여러분의 육신도 마찬가지입니다. 식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제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제도들을 프레임 워킹(frame working)하는, 즉 틀을 짜는 근본적인 정신적 지주를 이데올로기라 합니다. 만일 이데올로기가 `참[眞]'이면 그 조직과 제도는 영원불멸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가 `참'이지 못하면 그 조직과 제도의 수명은 오래갈 수 없고 붕괴되고 맙니다.
헤겔은 이를 `변증법적인 붕괴'라고 얘기했는데 마르크스는 계급투쟁적인 차원으로 왜곡된 논리를 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필요한 제도나 정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프레임 워킹될 때 올바른 `참'의 기운을 머금고 그 제도가 양성되었다면 시행착오를 거듭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올바른 기운을 머금고 있지 않는 제도가 바탕이 되었을 때 그것은 쉽사리 붕괴되고 맙니다.
모든 제품들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참'의 기운이 얼마나 많이 들었는가에 따라 그 기계의 수명이 오래 가느냐 짧게 가느냐가 달려 있습니다. 물건을 만드는 직공이 적당히 날림으로 만들었다면 겉모양은 다른 직공이 만든 것과 같겠지만 그 수명은 전혀 다를 것입니다.
칫솔을 예로 들어봅시다. 날림으로 만든 칫솔과 정성스럽게 만든 칫솔이 있다고 할 때 겉은 똑같은 회사 제품이지만 수명은 만든 사람의 마음상태에 따라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들이 저 먼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프레임 워킹하는 과정 가운데 마음에 `참'의 기운, 진리의 기운이 온전히 들어있지 않으면 수명이 오래 갈 수가 없습니다. 짧게 살다 끝낼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종이나 꽃이나 사람이나 제도나 모든 것이 다 결국은 하나로 지어져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진리입니다. 마음입니다.
만상은 모두 하나의 근본, 즉 마음으로부터, 진리로부터 나옵니다. 마음을 알면 열을 알고 백을 알고 천을 아는 도리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마음이 진리요, 마음이 부처입니다. 자꾸만 공부를 하다보면 하나의 진리를 꿰뚫게 되고 또 마음을 꿰뚫게됩니다. 그 결과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등 제반 양상들이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가 한 눈에 다 들어와 버립니다.
어떤 제도를 만들 때 그 계획의 밑바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공공이익과 복리증진을 위한 마음이 깔려 있는가, 아니면 위정자 편의에 따라 만들어지는가에 따라서 정치나 경제의 수명이 정해집니다. 그것을 정통성이라고 말하기도 하지요. 불교는 참으로 미묘합니다. 하나를 꿰뚫으면 우주 시방삼세가 다 들어오는 도리가 있습니다.
"법을 아는 자는 우주를 아는 자요, 법을 지배하는 자는 우주를 지배하는 자"라 하신 부처님 말씀도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근본적으로 우주와 마음이 별개가 될 수 없습니다.
불교를 더 많이 알려면 의학을 알아야 하고 또한 약학, 한의학을 알지 않으면 안됩니다. 불교가 만상을 머금고 있다 보니 모두를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몸과 마음이 참된 기운과 참된 상념을 가지고 살아가면 마음 가운데 참된 기운을 가득히 머금게 됩니다. 그리고 그 참된 기운이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도리 따라 내 몸에 있는 수도 없이 많은 세포들에게 참된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그래서 그 세포들 가운데 나쁜 물질, 더러운 것, 쓰레기들은 다 흘러나가고 몸안에 있는 질병은 모두 녹아져 내려 세포의 활성도가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학문은 부처님 가르침 가운데 하나로 다 모이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몸에 참된 기운이 가득하면 내 몸에 있는 세포들은 활성도가 높아 음식을 많이 취하지 않더라도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오히려 탁한 음식을 많이 취하게 되면 독소가 많이 나오기 때문에 세포들이 그같은 음식을 거부하게 됩니다. 세포가 깨끗하면 허기도 덜 느끼고 잠도 많이 잘 필요가 없습니다. 잠을 잔다는 것은 세포를 휴식시키고 세포를 보수하는 시간이며 수리하는 시간입니다. 보수하는 시간이 짧아도 회복이 빠르고 세포가 젊으니까 기미`주근깨를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화장품 장사가 울고 갑니다.
원리는 이렇게 하나로 가는 것입니다. 만상도 다 그렇게 가게 되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부처님 말씀대로 맑고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게 되면 몸 안의 쓰레기는 다 맑은 기운에 밀려져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미묘하지요. 무상심심미묘법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입니다.
중국의 유명한 도인 소강절선생 말과 같이 소나무 잎새에 얼룩이 지는 것을 보고 천년 뒤의 소식을 아는 도리가 있습니다. 시공(時空)을 뛰어 넘어 꿰뚫는 거지요. 스타트하는 것을 보고 그 결과를 알게 됩니다. 스님들이 미래를 내다보는 것은 점을 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를 보면 미래를 예지할 수 있는 도리가 있는 것입니다. 올바른 `참'의 기운이 몸과 마음에 확연히 익어지면 무엇을 판단하게 될 때, 되는 것 안 되는 것을 이내 감지해 버립니다. 세속 중생들의 눈으로 볼 때는 참으로 미묘하고 불가사의하겠지요.
AIDS 바이러스
에이즈(AIDS)바이러스를 생각해 봅시다. 그것은 인간의 마음이 만들어 낸 자연발생적인 재앙입니다. 같은 땀이라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는 사람이나 죄악을 저지른 범죄자들이 흘린 땀과, 건강한 몸으로 스포츠를 하면서 흘린 땀은 다릅니다. 두 가지 땀을 분리해서 독물질을 검사하는 시약인 셀레인산(Celane acid) 처리를 해 보니까 범죄자들의 몸에서 나온 땀은 까만 암적색으로 변했는데 스포츠맨들에게서 나온 땀에는 어떤 변화도 없었다고 합니다. 범죄자들의 몸 속에는 독물질이 많다는 얘기지요. 마음의 변화가 몸의 화학변화를 유도하는 것입니다.
남녀간에 부정적인 관계를 맺게될 때 그 때 나오는 특유의 감정이 있겠지요. 남녀간의 긍정적이지 못한 만남이 형성될수록 특유의 묘한 감정이 형성될 것입니다. 그 마음이 바로 특수한 변종바이러스를 초래할 가능성은 대단히 클 것입니다.
새로운 바이러스가 생겨나고, 새로운 구조를 이루기 때문에 기존의 약물로는 손을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분명한 사실은 이제 미래는 에이즈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란 점입니다. 인간의 좋지 못한 마음과 환경으로 인해 에이즈 보다 더한 어떤 바이러스가 생겨날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인간의 마음으로부터 만법이 생겨납니다. 재앙도 복도 다 그런 것입니다. 문명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과거시대와는 유다른 감정이 인간의 마음 가운데 양성되고 바이러스도 특유한 독종들이 생겨날 수 있습니다. 과거에는 호모(Homo)라거나 동성연애 같은 것이 오늘날처럼 심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이 대자연의 질서를 위반하는 양태이기 때문에 변종바이러스가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그같은 변종바이러스들이 인간을 재앙으로 굴러 떨어지게 합니다.
에이즈 바이러스가 몸에 들어가면 5년 정도는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다고 합니다. 길게는 8년, 10년 가는 경우도 있답니다. 막을 쓰고 활동하지도 않고 꼼짝없이 그대로 가만히 있는다는 것입니다.
이 에이즈 바이러스의 무서운 이유가 무엇인고 하니 자기가 들어간 몸체 주인공이 약해질 때만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약해져서 기(氣)가 빠지고 정(精)이 빠져나갈 때 그 때 에이즈 바이러스가 발동을 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기가 막힌 얘기지요. 참되게 살고 보정(補精), 즉 정을 잘 유지하고 잡난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죽을 때까지 발병하지 않을 것이라는 학설도 있습니다. 이 에이즈 바이러스가 꼭 정이 고갈된 상태이거나 몸이 허약해진 상태에서 들고일어난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참으로 많은 것을 생각케 합니다.
앞으로 5년 내지 10년 동안에 에이즈가 만연할 것입니다. 이것은 제 얘기가 아닙니다. 많은 석학들의 예측입니다. 우리 능인선원은 그 때를 대비하고 있습니다. 에이즈 바이러스는 마음을 다스림으로써 분명히 퇴치가 가능할 것이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능인선원만 왔다하면 에이즈가 다 낫게 될지 누가 압니까? 외국에서 들어온 여러가지 관계 서적들을 보면서 느낀 것이 많습니다. 이미 결론은 나와 있습니다. 40대 후반이 넘으면 남녀간 만남의 횟수를 대폭 줄여야 합니다. 고혈압, 당뇨병도 원인이 다 그것이니까요. 가능한 한 청정하게 살고 기도하며 살아야합니다. 몸과 마음이 약화되면 곧 바로 사라져 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대의왕여래이신데 퇴치못할 질병이 있겠습니까? 병 낫는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몸이 약한 사람들이 능인선원에 와서 열심히 기도하면 거의 모두가 건강을 되찾고 있지 않습니까? 열가지 백가지가 모두 하나의 원리로 통해 있습니다.
만나기 어려운 불법 <백천만겁난조우>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강남에 온 것도 인연인 것 같습니다. 저도 여러분도 모두 전생에 복을 좀 지었나 봅니다. 부처님께서 강남에다 무얼하나 보여 주시려고 저를 이곳에 보내신 모양입니다. 능인선원에 관세음보살님의 서상(瑞相)이나 부처님의 서상이 현신한다는 사실을 공표하면 서울시내가 들썩거릴 것입니다. 색안경 쓰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요. 그래서 조용히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청정하고, 정결하고, 고결하게, 정말로 진리에 가깝게 살면 사건이 벌어져도 큰 사건이 벌어질 것입니다.
`백천만겁난조우(百千萬劫難遭遇)', 참으로 백천만겁이 지나도록 만나기 어려운 부처님 법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법을 만난 이때 열심히 닦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4난(難)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첫째로 치불난(値佛難)입니다. 만날치(値), 부처님 만나 뵙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직접 만나 제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요? 부처님께서 태어나실 그 때에 같이 태어나서 부처님을 만나는 공덕은 참으로 무량하다는 것입니다.
두번째, 설법난(說法難)입니다. 다른 사람하고 이야기하다가 그들 마음에 무언가 아로새겨질 말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설법난이라고 했습니다. 어려운 법일수록 자주 많이 설하도록 해야 됩니다.
연습이 대가를 만듭니다(Practice makes genius). 연습도 하지 않고 100m 선수가 될 수 있습니까? 기회가 날 때마다, 시간 날 때마다 말을 잘 못하더라도 법을 얘기하세요. 얘기하다 보면 말문이 열리고 입도 열리고, 그래서 내생(來生)에는 목소리도 좋아진답니다. 이렇게 자꾸하게 되면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릴 수 있고, 뭔가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대상도 많아지게 됩니다.
세번째, 문법난(聞法難)입니다. 법을 얻어듣기가 힘들다는 것입니다. 부처님 법을 설하는 장소가 어디이건 열심히 찾아가 들어야 합니다. 특히 가정법회 때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는 `내가 누군데'하는 아만심이나 교만심은 버리십시요. 그 누구의 말이라도 경청해 주십시요. 마음에 상(相)이 생기면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고 싶은 마음이 나지를 않습니다.
초등학교 다니는 어린아이들 말이라도 경청해 들어야만 할 때가 있습니다. 설령 얘기하는 것이 유치하고 수준이 떨어진다 해도 귀 기울여 들어주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슬기로운 인물이 되고 부처님의 아들딸이 되려고 하면 부처님 법 듣는 마음자세가 중요한 것입니다.
네번째, 신수난(信受難)입니다. 이 세상에는 진정으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답니다. 부처님을 믿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참된 신심이 생겨나기가 어렵다는 얘기입니다.
치불난(値佛難), 설법난(說法難), 문법난(聞法難), 신수난(信受難)의 경계는 모두 보통 사람의 마음 가운데 갈고 닦기가 어려움을 의미하는 내용입니다. 법을 설하기어렵고, 법을 참된 마음으로 듣기 어렵고, 법을 바로 믿어 받아들이기 어렵고, 부처님 만나기 어려운 경계를 생각해서 항상 마음을 갈고 닦는 자세를 가다듬으시기를 바랍니다.
이와같은 4난(難)외에 또 다른 차원의 4난이 있습니다. 첫번째 인신난득(人身難得)사람몸 받기 어렵고, 두번째 남자난득(男子難得) 남자되기가 어렵고, 세번째 불법난봉(佛法難逢) 불법만나기 어려우며, 네번째 위승난행(爲僧難行) 스님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몸 받기가 어렵다는 사실은 부처님께서 기회가 되실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눈먼 거북이가 태평양 바다에서 판자쪽 하나 만나기만큼 어렵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사람몸 받기 어려운데 태어난 이상 후회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도록 최선을 다 하여야 할 것입니다. 또 여자분들에게는 죄송스러운 일이지만 남자몸 받기가 그렇게 어렵답니다. 여자의 업(業)이란 것이 있어 여자의 몸을 바꿔 남자가 되
어야지만 성불할 수 있다는 얘기까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이처럼 말씀하신 그 속뜻을 알 길은 없습니다만, 여자의 몸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핸디캡이 많음을 부인할 수 없는 일이 아닌가 판단되어지기도 합니다.
또 부처님 법 만나기가 그렇게 힘들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말씀하셨습니다. 갖가지 사법이 창궐하는 이 때, 정법을 만난다는 것은 여간한 인연 아니고서는 어려운 일입니다. 만나기 어려운 불법을 만난 우리들은 몸과 마음을 다해 열심히 불법을 연마해야 할 것입니다.
또 수행자 되기 힘들다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수행자 된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머리 깎고 수행자로 산다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참으로 불법만나기가 어렵습니다. 부처님 법은 나의 가슴, 나의 삶을 개조하고 변모시키는 그러한 정법이기에 만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렇게 설해지는 장소가 많은 것도 아니고 해서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입을 열어 전하라! 가르치라! <아금문견득수지>
`아금문견득수지(我今聞見得受持)'입니다. 문견득수지(聞見得受持)는 교육학에서 말하는 학습발달 5단계와 같습니다. 모든 것은 듣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말이 씨가 된다' 하듯 우선 귀를 스쳐 지나가야 생각이 일어나기 시작합니다. 부처님께서 문.
사.수(聞.思.修) 3혜(三慧)를 닦아 나가라 하셨습니다. 우선 듣고 난 다음 생각하게 하고 그 다음 닦아 나가라 하셨습니다. 부처님 말씀대로 먼저 듣게 해야 합니다. 법문을 듣게 하고 부처님 가르침을 전달해야 합니다. 전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습니다. 입을 열어 전달하는 사람이 없다면 어디엘 가서 듣겠습니까? 부처님께서도 천리 만리 먼 곳에 법을 설하는 사람이 있거든 신발을 삼아 신으며가서 들으라 하셨습니다.
현대 한국불교의 가장 큰 맹점은 전법 포교의 중요성에 대해 절감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사실입니다. 그저 참선만이 최고라고 강조를 합니다. 참선이 중요하지 않은게 아니라 참선이 중요한 만큼 전법 포교도 중요하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드물다는 얘기입니다. 부처님께서는 금강경에 부처님 말씀 한마디 전하는 공덕이 항하사 만큼의 칠보로 보시하는 공덕보다 크다 말씀하셨습니다.
귀에 스쳐 지나가야 그 다음 무엇을 할 것 아닙니까? 귀는 왜 뚫려 있습니까? 들은 다음에라야 보고 싶은 마음이 나고, 수행하고 싶은 마음도 날 것이 아닙니까? 부처님 경계를 보고 싶은 생각은 듣는 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것 아닙니까? 백번 들은 다음 한번 가서 보려는 마음이 난다는 것입니다. 듣지도 못하면 찾아가 보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찾아가 본 다음 저것이 나한테 필요한 것이구나 하고 얻으려는 마음을 내지요. 얻으려는 마음 가운데 의지가 생기고 의욕이 생깁니다. 발심(發心)이 생기지요. 그 같은 의지와 의욕이 마음 가운데 아로새겨지게 만듭니다. 즉 받아지니게 하는 것입니다. 단계적으로 피라밋처럼 올라가는 것입니다. `아금문견득수지', `내가 이제 듣고, 보고, 얻어, 받아, 지니게 되오니' 이런 말입니다. 받아서 마음 가운데 간직하고 아로새긴다는 의미입니다.
참뜻 알게 하소서! <원해여래진실의>
`원해여래진실의(願解如來眞實義)' 입니다. `마음 가운데 부처님 말씀을 아로새기겠사오니, 원하옵건대 여래의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의 의미입니다.
진(眞)은 `참'입니다. `참'이라야만 열매[實]가 열리는 것입니다. 참된 말과, 참된 행동, 참된 마음만이 공덕을 가져옵니다. 부처님의 진리를 깊이 믿고 진리만을 말하는 것이 진실(眞實)의 말이며 참된 말이며 부처님을 올바르게 찬양하는 말입니다. 믿고 찬양하는 참말은 위대한 성취력을 지니며 위대한 열매를 거두게 되는 것입니다. 참된 말, 진리의 말만이 위대한 창조의 힘을 나타냅니다. 참된 말은 참된 열매를 가져오고, 위대한 성취를 가져오고, 위대한 창조를 가져옵니다. 거짓말, 삿된 말을 해서는 미래를 보장받을 수 없습니다. 이루어지는 것이 없습니다. 고통이 옵니다. 인생을 의미없이 바보처럼 보내 버리게 됩니다. 부처님 말씀은 진실입니다. 참되기 때문에 항상 위대한 성취가 가능하고 위대한 창조의 힘이 양성됩니다.
4. 법의 곳집을 여는 진언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3번)
무진장의 법장을 여는 개법장진언(開法藏眞言)의 진언이 `옴 아라남 아라다'입니다. 경전은 법장(法藏)입니다. 문자 그대로 법의 곳집입니다. 법장을 펼치면 본경이 나옵니다. 부처님의 경전은 무량무변한 법의 창고입니다. 아무리 퍼내도 마르지 않는 바다입니다. 부처님의 법장을 여는 마음은 무량무변한 공덕의 창고를 여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표출하는 진언입니다. 참된 공덕의 세계를 발원하는 사람들은 부처님의 무진법장을 여십시오. 경전을 펼치십시오. 그 자리에 무량한 보배가 가득함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