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 한일 역사 공동 연구 보고서 제 1분과편 , 김현구 ,6세기의 한일 관계
6세기의 한일 관계를 전하는 기본 사료로서는 한국 측의 삼국사기와 일본 측의 일본서기를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500년을 끝으로 왜와 관한 기사가 거의 나오지 않는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당시의 양국 관계를 보여주는 다수의 기사가 보인다. 따라서 싫든 좋든6세기의 한일 관계는 일본서기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일본서기에 보이는 한일 관계에 관한 가시는 상호 모순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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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대부분의 기본 연구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객관적인 기준보다는 자기 편의에 따라서 인용 해석해왔다.
그래서 극단적으로는 “ 야마토 정권의 한반도남부 경영론” 이 나왔는가 하면 반대로 “ 삼한 삼국의 일본 열도내 분국론이 나온 것이다 ” >
책 마무리 짓고 쉬고 있는 차태헌입니다.. 지금은 좀 마음의 여유가 생겨서 제가 평소에 생각했던 부분들..
김현구는 하나의 현상이고 본질은 강단 전체이기 때문에 이런 강단의 문제점들이 종합적으로 축약된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를 까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를 비판적인 시각으로 읽고 있습니다.
까대기.. 해야 할게 정말 많네요. 노가다 끝나고 또 노가다..T_T
일단 김현구 교수 논문은 6세기에 한일 관계에 대한 기록들이 없으니 니들이 일본서기 봐야지 별 수 있겠냐. 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데
이것은 참으로 잘못된 말입니다. 6세기에 한반도 사서와 반도 사서에서 일본의 외교 관련 기록이 사라졌다면 곧바로 일본서기로 가야 하는게 아니라 “ 어째서 이 시기에 왜의 외교 관련 기록들이 사라졌는가?” 이것이 먼저 연구 되어져야 할 것입니다.
일단 결론부터 이야기 드리면6세기에 열도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이 시기에 열도에서 정권 교체가 있었다는 점입니다.
5세기의 찬 진 체 흥 무 라고 하는 송서에 등장하는 왜왕들은 성을 왜 倭로 하였습니다. 백제가 부여의 후손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왕족들의 성을 餘로 해서 교류했듯이 열도의 통치자들은 성을 倭로 하여 중국과 교류하였습니다.
高祖永初二年,詔曰:「倭贊萬里修貢,遠誠宜甄,可賜除授。」( 송서 왜국전 )
송 고조 영초 2년 왜찬 倭贊이 만리 조공하였으니 먼길을 온 성의를 감안하여 제수함이 마땅하다.
•秋七月甲辰,安東將軍倭王倭濟進號安東大將軍。(송서 문제기 )
가을 7월 안동장군 왜왕 왜제 倭濟를 안동대장군으로 올려주었다.
이것은 이들이 기존의 비미호 대여가 통치하던 왜와도 다른 왕조이고 이후 608년에 수나라 사신 배청을 맞은 성을 아매로 하는 왜왕과도 또 다른 왕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502년 기록을 마지막으로 송서 왜 5왕의 기록이 사라지고 6세기에는 문헌상으로 성씨가 바뀐 교체된 왕조가 등장합니다.
즉 이 시기에 정권 교체가 있었다는 거지요. 따라서 6세기에 중국이나 반도의 문헌상으로 왜의 외교 관련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1. 왜가 외교를 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거나
2. 외교를 할 왕조 자체가 없었거나
이 2가지로 축약이 된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이것을 무시하고 닥치고 일본서기나 보자고 하는 김현구 교수님이신데요.
이것은 뒷 부분에서 김현구 교수가 일본 열도 안의 한반도 분국론이 극단적 주장이다. 라고 주장하기 위해서 사료를 편향적으로 편집하기 위한 하나의 포석 같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글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익숙한데 그건 기레기라고 하는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사료가 부족하기 때문에 일본서기를 봐야 한다는 김현구 교수의 거짓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데 사실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에서 논의되었어야 하는 것은 인물 화상경입니다. 김현구 교수의 말대로 사료가 매우 부족하기 때문에 인물화상경에 세겨진 금석문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금석문에는 3명의 인물이 등장하는데 6세기의 백제의 통치자였던 무녕왕 즉 사마가 있고 이 무녕왕에게 거울을 받는 남제왕 (일본어 오오또왕 ) 그리고 연호의 자리에 세겨진 일십대왕이라고 하는 인물입니다. 이 3명의 관계를 추적하면 당시 백제 왜의 관계을 알 수 있는데 언급조차 하지 않은채 그냥 일본서기만 보자고 주장합니다. 한일 역사 공동 위원회에서 김현구 교수의 논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이 인물 화상경을 보면 연호에 세겨진 일십대왕이 당시 백제와 열도에서 최고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임을 추측할 수 있는데 , 이것은 백제 무녕왕이 됩니다.
여기서는 김현구 교수가 이런 중요한 사료들을 무시하고 일본서기만 보자고 하는 이유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까합니다.
결국 뒷 부분에 다른 사람들의 주장은 극단적인 것이고 자기의 주장은 중간위치에 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주장하는건데요. 네 역시 낯이 익습니다. 기레기들이 쓰는 수법입니다.
일단 일본 열도의 한반도 분국론이 왜 극단적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말입니다. 역사적 사실은 가치중립적인 것입니다. 사료들이 어떤 하나의 사실을 지칭한다면 그 사실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게 역사학입니다. 그런데 어떤 하나의 사실을 가지고 극단적이네 뭐네 하는 것은 이미 그 말을 뱉은 사람이 역사적 사실을 순수하게 볼 생각이 별로 없다는 것을 보여 준다고 생각합니다.
아래의 자료에서 보았듯이 김현구 교수님은 어린아이들 방송하는데서 자신이 일본인들이 준 장학금을 받은 덕에 편하게 공부했다 이것을 자랑스럽게 이야기 하시던데요.
일본하고 사이좋게 지내면 떨어지는 떡고물이 많다. 이게 김현구 교수님의 가치관이라 일본 열도가 한반도 분국들이 있던 곳이다. 라고 하는 주장이 김현구 교수님의 가치관하고 어긋나서 “ 극단적”인 주장이 되는걸까요? 참 알 수 없는 분이 아닐까 합니다.
이렇게 극단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손님으로 오신 일본 학자분들께 원래는 한국 학자라면 “ 야 너희 6세기에 왕조 교체 있었잖아? 이거 너희 일본은 왜 공부 안하냐? 혹시 천황께 불경해서 그런거냐? 에라이 학자라고 하는 것들이 고추 떼 !"이렇게 이야기 해야겠지만
좋은게 좋은 김현구 교수님 입장에서는 일본 학자들도 만족하고 한국 학자들도 만족할 만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앞으로 제한된 사료만 사용하고 그렇게 해서 ” 교류의 시스템을 중심으로 “ 라고 하는 부제를 단 논문을 씀으로써 한일 우호에 증진하는 그런 글을 쓰겠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김현구 교수에게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겠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