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지하다시피 시인 김남주는 지난 1980년대 민족·민중문학 운동의 최정점에 위치했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의 시세계는 반외세 민족 자주의식과 민중 주체의 혁명의식을 본원적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본고의 경우에는 김남주의 시 일반이 이루는 이러한 측면에서의 세계관을 탐구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의 시들 중에서도 비교적 서정성이 높은 작품을 골라 그것들이 이루는 정서적 특질을 중심으로 좀더 새로운 의미를 찾아보려는 것이 본고의 주요 의도이다.
김남주는 본래 시인이기보다는 戰士이기를 원했고, 또 그렇게 불려지기를 바랬던 사람이다. 그 스스로도 일찍이 "어이, 나는 시인이라기보다 무슨 글쟁이라기보다 전사여, 전사!"라고 말한 적이 있다. 물론 그는 1974년 [창작과 비평} 여름호를 통해 정식으로 문단에 데뷔를 한 시인이다. 하지만 그는 그 이후 한동안 시인으로서의 삶보다는 전사로서의 삶을 살아간 바 있다. 특히 그가 그 자신의 자아를 이러한 방향으로 한층 심화시킨 것은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옥살이를 하면서부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김남주를 전사로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금에 이르러서는 그 자신의 의지와 달리 거개의 사람들이 그를 무엇보다 시인으로 기억하고 있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의 논의도 당연히 그를 시인으로 받아들일 때 가능해진다. 남민전 동지들 중에는 아직도 그를 전사로 생각하는 사람이 없지 않지만 말이다. 전사로서의 그의 면모는 남민전 동지인 박석률의 회고담을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오늘의 세평이 그렇다고는 하더라도 김남주가 시인으로서보다는 전사로서 남고자 했던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진술에만 따르면 그에게 있어서 시는 단지 혁명의 나사와 못이었을 따름이다. 이러한 전사로서의 의지는 특히 옥중에서 씌어진 시편들에 의해 확인이 된다. (말년에 이르러 다소 흔들리기는 했지만) 전사로서의 자신의 열정과 관련하여 그는 시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당신은 묻습니다
시를 쓰게된 동기라도 있냐고
나는 이렇게 밖에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혁명이 나의 길이고
부러진 낫 망치소리와 함께 가면서
첨으로 시라는 것을 써보게 되었다고
노동의 적과 싸우다 보니 농민과 함께
피 흘리며 싸우다 보니
노래라는 것도 나오더라고 저절로 나오더라고
― [시의 요람 시의 무덤] 부분
이 시는 일종의 시로 쓴 시론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통해 시에 대한 몇 가지 그의 생각을 찾아보기는 어렵지 않다. 첫째는 시가 혁명의 부산물이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는 저 자신이 직접 "나의 시는 혁명에 종속하는 것", 곧 "혁명의 무기"라고까지 언급한 바 있다. 김남주에게 있어서는 "시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고, 혁명적 실천이 먼저 있고 시는 그 자연스러운 산물"인 것이다. 둘째는 시가 노래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서도 역시 그는 직접 "시가 본디 노래라 노래로 돼서 불려질 때" "가슴을 적신다"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로서는 이미 노래로부터 분리되어 자율적 미학체계로 존재하는 현대시의 의미 영역을 인정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셋째는 시가 실천적 행동의 과정에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그가 낭만주의적 시관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영국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시인 워즈워드가 일찍이 "시란 강렬한 감정이 저절로 넘쳐흐르는 것"이라고 정의한 바 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시에 대한 이러한 생각들은 김남주의 시세계 전체를 관통하는 간과할 수 없는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 일반이 고양된 이데올로기의 목소리를 보여주는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다. 김남주는 자신의 시가 "압제자의 가슴에 꽂히는/창이 되"([시인이여])기를 원했고, "자유의/신성한/유혈의/전투에" 나가 "북 치고 장구 치고 노래하는 일"([시인의 일])이 되기를 원했다. 따라서 그의 시의 내용이 반독재 민주화와 반외세 자주화를 고무, 찬양하기 위한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으로 일관해 있는 것은 당연하다. 특히 옥중에서 씌어진 시들의 경우가 그러했는데, 그의 시의 이러한 특징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 논고들에 의해 (의식의 변이과정을 포함하여) 수 차례 검증된 바 있다.
이들 논고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시인 김남주는 본래 증오와 분노에 찬 마음에서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정서의 시를 써온 사람이다. 따라서 김남주의 시와 관련하여 서정성 운운하는 것은 더러 일종의 연목구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도대체 그에게 서정성 운운할만한 작품이 존재하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언뜻 생각하면 김남주의 시세계는 서정성과는 전혀 무관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는 그의 시의 전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내리는 판단임이 분명하다. 옥중시전집 {저 창살에 햇살이 1, 2}(창작과비평사, 1992), 그리고 그밖의 개별 시집 {나의 칼 나의 피}(인동, 1987) {솔직히 말하자}(풀빛, 1989) {사상의 거처}(창작과비평사, 1991) {이 좋은 세상에}(한길사, 1992) {나와 함께 모든 노래가 사라진다면}(창작과비평사, 1995) 등을 꼼꼼히 살펴보면 곳곳에 적잖은 서정시들이 끼여 있음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冒頭에서 말한 바처럼 본고에서는 다름 아닌 이들 서정시를 주된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들이 이루는 정서적 특질을 다양한 시각에서 살펴봄으로써 김남주 시에 함유되어 있는 또 다른 의미망을 드러내보려고 하는 것이 본고의 핵심 의도인 것이다.
2. 서정적 정서와 파토스적 정서
'서정시(lyric poem)'라는 용어는 오늘날 사람들이 흔히 말하고 있는 시 일반을 가리킨다. 사전적으로 쉽게 정의하면 주관적·관조적 수법으로 작자의 사상·체험·감정을 운율에 맞게 표현한 언어예술양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서정시는 곧바로 장르 개념으로 기능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서사시, 극시와 더불어 시의 큰 갈래의 명칭을 뜻하는 것이 '서정시라는 것이다. 이처럼 큰 갈래의 명칭으로 파악하면 최근에 발표되고 있는 대부분의 시는 저절로 서정시가 된다.
물론 서정시라는 말에 이러한 의미만 담겨 있는 것은 아니다. 특별히 서정성이 강화되어 있는 시, 곧 서정적 정서가 도드라지게 드러나 있는 시 또한 서정시로 명명되고 있기 때문이다. 순수하게 서정적 감동, 서정적 심미의식만을 드러내고 있는 시도 역시 서정시라는 용어로 차별화되어 명명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 때의 서정시는 큰 갈래의 서정시 안에서 작은 갈래로 존재한다. 이 경우의 서정시는 주지주의 시라든지 리얼리즘 시라든지 하는 것들과 상호 대립하면서 순수하게 서정적 정서를 고양시키는 시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와 같이 서정시라는 용어에는 두 가지 의미가 혼재되어 있다. 하나는 장르의 개념으로 사용되고 있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히 서정적 경향이 강화되어 있는 경우이다. 전자를 큰 갈래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면 후자는 작은 갈래의 서정시라고 할 수 있다.
김남주의 작품과 관련하여 여기서 강조하고 있는 서정시는 후자의 서정시를 뜻한다. 그의 시들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순수하게 대상에 대한 주관적이고 관조적인 정서를 토로하고 있는 작품만을 따로 서정시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구태여 여기서 이러한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이들 서정시가 보편적인 그의 시와는 상당히 변별되는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일반적인 세계가 이른바 비판적 리얼리즘 혹은 혁명적 낭만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면 이들 시의 세계는 좀더 전통적인 抒情主義에 바탕을 두고 있다. 아니, 이들 서정시는 비판적 리얼리즘 혹은 혁명적 낭만주의 이전 단계의 원초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이라고 해도 좋다. 그의 시의 주류적 경향과는 다소 떨어져 있는, 순수한 서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 이들 서정시인 것이다
찬 서리
나무 끝을 나는 까치를 위해
홍시 하나 남겨둘 줄 아는
조선의 마음이여.
―[옛 마을을 지나며] 전문
이 시는 원초적 서정이 맑고 투명하게 응축되어 있는 작품이다. 이 시를 가리켜 '서정시' 이외의 용어로 명명할 수 있는 수는 없다.
찬 서리 내리는 초겨울 감나무 끝의 '홍시'와, 그 주위를 날아가는 '까치'가 선명하게 대비되어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러한 대비는 일단 우리 조상들의 여유 있는 마음, 한가로운 마음을 밀도 있게 형상화하는 데에 기여한다. 전통사회의 조상들이 지니고 있던 넉넉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우회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인 셈이다. 그런가 하면 이 시는 그의 의식 내면이 본원적으로 지향하는 바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그의 이상이 窮極的으로는 이 땅의 대지와 고향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것인데, 이를 가리켜 구태여 그가 과도하게 "농촌공동체의 복원"에 집착하고 있다고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 이처럼 자연이며 삶의 일상으로부터 비롯되는 순수한 정감을 드러낸 작품도 다수 남기고 있는 것이 시인 김남주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그는 자본주의 사회의 부패와 타락, 그리고 비인간성에 대해 누구보다도 격렬하게 증오하고 저주했던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자본주의 사회의 대안으로 그 이전의 사회, 곧 농촌공동체를 복원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미래사회의 바른 비전을 위해, 미래사회의 바른 건설을 위해 옛 사람들이 보여주었던 삶과 언어 등을 다만 차용하고 있을 따름이다.
아직은 어느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것이 미래사회의 유토피아, 즉 미래사회의 행복한 삶이다. 따라서 미래의 행복한 삶을 전망하기 위해 과거의 조상들이 경험했던 행복한 삶에서 모범을 구하는 것은 항용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일종의 尙古主義로서 수많은 시인들이 과거의 낙원(파라다이스), 곧 원시적이고 신화적인 삶에서 미래사회의 모범을 발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여기서 또 하나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과거의 전근대사회, 곧 봉건적 전통사회에도 부분적으로는 이처럼 긍정적인 가치가 남아 있다는 점이다. 동시에 이는 오늘의 근대사회, 즉 자본주의사회에도 자본주의 이후의 사회와 비교해 볼 때 부분적으로는 다소간의 긍정적인 가치가 존재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과거의 전통사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의 현대사회도 얼마간의 긍정적인 가치가 내재해 있고, 따라서 새로운 사회의 건설은 그것을 발전시켜 가는 가운데 비로소 가능해지리라는 것이다.
이로 미루어 보면 지난 1980년대에 김남주가 혁명적 투쟁을 통해 척결하려고 한 것이 자본주의적 근대의 모든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자본주의적 근대를 이루고 있는 것들 중에서도 얼마간은 긍정적인 요소가 함유되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가 이 시기에 전투적이고 투쟁적인 시만을 쓰지 않은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심미적으로 잘 응축되어 있는 서정시의 경우 시대를 초월하는 내재적 가치를 갖는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본래 훌륭한 서정시는 역사의 각 단계마다 새로운 시적 전망을 불러일으키는 저본으로 기능하기 마련이다. 적절한 역사적 상황이 주어지게 되면 시단 전체에 의미 있는 각성을 제공할 수도 있는 것이 이들 서정시이다.
밤 들어 세상은
온통 고요한데
그리워 못 잊어 홀로 잠 못 이뤄
불 밝혀 지새우는 것이 있다
사람들은 그것을 별이라 그런다
기약이라 소망이라 그런다
밤 깊어
가장 괴로울 때면
사람들은 저마다 별이 되어
어머니 어머니라 부른다.
―[별] 전문
이 시에서 '별'은 의인관적인 수사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일종의 객관상관물이기도 하다. 여기서의 별이 "그리워 못 잊어 홀로 잠 못 이뤄/불 밝혀 지새"울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보편적인 인간의 심성이 이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시의 후반부를 이루는 "가장 괴로울 때면/사람들"이 "저마다 별이 되어/어머니 어머니라 부른다"와 같은 구절은 서정시의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전반부의 주체의 객체화가 이 부분에 이르러 완전히 객체의 주체화로 역전되기 때문이다. 객관적 세계의 일부인 '별'로부터 보편적 인간의 자아를 깨닫고 있는 것이 이 시인 것이다.
또한 이 시는 공적이고 사회적인 의미를 거의 내포하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도 주목이 된다. 표면적인 구조만으로 보면 전적으로 시적 화자의 주관적이고 개인적인 감성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이다. 이러한 점에서도 이 시는 서정시로서의 보편적인 특성을 함유한다.
여기서 서정시 일반의 특성에 대해 잠시 논의를 할 필요가 있다. 일단은 그것이 갖는 보편적 개념에 대한 좀더 상세한 이해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서정시(抒情詩)라는 말의 서정(抒情)을 한자로 풀이하면 '감정이나 정서를 물길어 올리듯 펼쳐 드러낸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자연히 서정시는 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형상의 가장 중요한 자질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정작의 문제는 이 때의 감정이나 정서가 갖는 의미의 실제이다. 감정과 정서가 동일한 의미를 갖는가, 아니면 별개의 의미를 갖는가, 하는 질문을 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물론 이에 대해 명확하고 분명한 대답을 하기란 쉽지 않다. 사실은 영어에서도 정서로 번역되는 emotion과 감정으로 번역되는 feeling이 크게 다른 내포를 갖고 있지 않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기서는 일단 그것들의 의미를 섬세하게 구분하여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우선 감정은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고등동물도 갖고 있는 것으로 좀더 원초적인 정신 형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정서는 인간만이 갖고 있는 것으로 주체에 의해 일종의 지적이고 미적인 여과과정을 거친 정신 형질이라고 할 수 있다. 감정이 좀더 순간적으로 솟구쳐 오르는 정신 형질이라면 정서는 좀더 자아의 내면에서 지적이고 미적인 절제를 거친 정화된 정신 형질인 셈이다. 따라서 시에 함축되어 있는 화자의 정신 형질과 관련하여 말하면 '감정'보다는 '정서'가 상대적으로 좀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논의에 따르면 서정시는 결국 정서를 중심으로 하는 시가 된다. 그러나 서정시가 오직 정서만으로 자신의 형상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시적 형상이 이루어지는 데는 그것의 자질로서 이미지며 이야기도 상당히 필요하다. 정서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이야기도 시적 형상을 이루는 중요한 자질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은 상호 침투하고 간섭하는 가운데 그것의 총체에 기여한다. 그리고 그것들은 공히 그 내부에 유의미성으로서의 관념을 포괄한다. 이처럼 정서, 이미지, 이야기, 관념 등이 상호 뒤얽혀 있는 것이 시적 형상이 갖는 본래의 모습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것의 중심에 무엇보다 정서가 자리에 있다는 점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서정시를 서정시로 존재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근거가 정서라는 점을 소홀히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 동안의 문학양식에서 상대적으로 좀더 정서를 중요하게 취급했던 것은 낭만주의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이미지즘이 이미지를, 리얼리즘 이 이야기를, 주지주의가 관념을 강화시킨 문예양식이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지하다시피 김남주의 많은 시에는 이들 자질 중에서도 특히 정서가 전경화되어 있다. 당연히 여타의 자질, 곧 이미지와 이야기는 후경화되어 드러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의 몇몇 시를 작은 갈래의 서정시로 명명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의 논의가 더 필요하다.
서정시의 가장 중요한 자질인 정서가 강화되어 드러나게 되면 자칫 낭만주의 시로 되기 쉽다. 낭만주의 시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워즈워드의 "시란 강렬한 감정이 저절로 넘쳐흐르는 것"이라는 개념이다. 시를 노래라고 생각하는 것이며, 그것이 저절로 흘러나오는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 등으로 미루어 보면 시인 김남주가 기본적으로 낭만주의자였던 것만은 확실하다. 이는 "시가 술술 나오는구나/거미줄이 거미 똥구녕에서 풀려 나오듯이/막힘없이 거침없이 빠져 나오는구나/기분 좋구나 어절씨구 배설의 쾌감처럼/시원스럽기도 하구나"([시를 쓸 때는]) 등의 그의 시작태도에서도 확인이 된다.
물론 이러한 논의를 그가 단순하고 순진한 원론적 낭만주의자라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낭만주의자로서 김남주에게는 아무래도 '혁명적'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필요가 있다. 사실 그렇다. 그가 남긴 시와 산문에서 혁명적 낭만주의자로서의 풍모를 찾기는 별로 어렵지 않다.
대지로부터 곡식을 거둬들이는 농부여
바다로부터 고기를 길러내는 어부여
화덕에서 빵을 구워내는 직공이이여
광맥을 찾아 불을 캐내는 광부여
돌을 세워 마을의 수호신을 깎아내는 석공이여
무한한 가능성의 영원한 존재의 힘 민중이여
그대의 삶이 한 시대의 고뇌라면
서러움이라면 노여움이라면
일어나라 더 이상 놀고 먹는 자들의
쾌락을 위해 고통의 뿌리가 되지 말고
―[민중] 부분
이 시는 민중 주체의 혁명을 고무하고 추동하는 강렬한 정서로 일관되어 있다. 이러한 정서적 특징과, 그것이 내포하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그의 시로부터 혁명적 낭만주의의 면모를 찾기는 어렵지 않다. 정서적 특질과 관련하여 말하면 그의 시의 대부분은 이처럼 혁명적 낭만주의에 닿아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만 생각하면 이 시에 드러나 있는 정서는 아직 정화되기 이전의 정신 형질, 즉 감정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시에는 미처 절제되지 않은 원초적이고 즉자적인 감정이 아무런 가감없이 표출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정서를 담고 있는 시를 가리켜 작은 갈래로서의 서정시라고 하기는 곤란하다. 이 시의 기본 정서가 무엇보다 조화와 일치에 따른 평화의 정서가 아니라 대립과 갈등에 따른 투쟁의 정서라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슈타이거는 서정시에 수용되는 정서를 크게 서정적 정서와 파토스적 정서로 나누고 있다. 서정적 정서가 조화와 균형을 추구하는 정서라면 파토스적 정서는 극적 격정을 추구하는 정서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와 같은 강렬한 정서는 서정적 정서라고 할 수 없다. 이러한 정서가 곧 파토스적 정서이거니와, 파토스적 정서는 기본적으로 적대적 정서를 뜻한다. 갈등과 대립을 전제로 하는 파토스적 정서는 그러한 갈등과 대립의 관계를 타개하려는 적극적인 의지의 산물이다. 존재하는 세계를 향한 협력의 정서가 아니라 부재하는 세계를 향한 대결의 정서인 파토스적인 정서는 당연히 격정적일 수밖에 없다. 상대적으로 좀더 공적인 의미 영역을 갖는 김남주의 시의 파토스적 정서는 말할 것도 없이 지속적인 정신적 긴장을 바탕으로 한다. 따라서 계속되는 열망이 만드는 그의 강인한 정신적 긴장이 성공한 옥중시에서 눈부신 아름다움으로 빛나는 것은 당연하다. 비수와 같은 날카로움으로 "단숨에 핵심을 찔러 가는 놀라운 직접성"을 보여주고 있는 다음의 시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미군이 있으면
삼팔선이 든든하지요
삼팔선이 든든하면
부자들 배가 든든하고요
미군이 없으면
삼팔선이 터지나요
삼팔선이 터지면
부자들 배도 터지나요.
―[삼팔선] 전문
이 시는 민족 통일을 저해하는 제국주의 외세와, 그에 기생하는 지배계급에 대한 강렬한 적개심을 보여주고 있다. 얼마간 지적 아이러니를 응용하고 있기는 하지만 이 시의 기본 정조가 민족 통일에 대한 갈망이 만든 파토스적인 정서임은 분명하다. 이처럼 김남주 시의 대부분은 격정적인 정서, 파토스적인 정서를 기본 정조로 삼고 있다.
물론 그의 시들 중에는 그렇지 않은 정서, 이른바 서정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작품들도 상당하다. 본고의 기본 전제가 이들 작은 갈래의 서정시로 하여 성립된다는 것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당연히 이 때의 서정시는 파토스적 정서가 아니라 서정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다.
원론적인 의미에서의 서정시(작은 갈래의)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서정적 감동을 준다. 서정적 감동은 대립과 갈등에 따른 격정적 감동이 아니라 조화와 일치에 따른 따뜻한 감동을 가리킨다. 이러한 감동을 주는 서정시가 사람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리라는 것은 의문의 여지가 없다. 온화하고 온유한 정서의 이들 시에서는 서정시의 본원적인 특징이 그렇듯이 자아와 세계가 분리되어 있지도 않고, 상호 대립하거나 대결하지도 않는다. 상대적으로 좀더 私的인 의미 영역을 갖는 서정적 정서가 적대적인 대결의 정서가 아니라 均衡과 一如의 정서인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서정적 정서는 이러한 조화와 일치의 심리 상태를 있어야 할 당위의 세계로 추구하지 않는다. 합일의 세계, 곧 一如의 세계를 억지로 강제하는 것은 본래의 서정적 정서가 아니다. 서정시에 자연의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는 것도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자연의 세계야말로 시인의 정신 영역 안에서 별다른 대립이나 갈등이 없이 곧바로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시인에 의해 포착되는 모든 것들을 하나로 용해시켜 분리와 구분이 허락되지 않는 혼융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이 서정적 정서인 것이다. 다음의 시가 그러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좋은 예이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해를 향해 사방팔방으로 팔을 뻗고 있는 저 나무를 보라
주름살투성이 얼굴과
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의 이곳 저곳을 보라
나도 저러고 싶다 한 오백년
쉽게 살고 싶지 않다 저 나무처럼
길손의 그늘이라도 되어주고 싶다.
―[고목]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무엇보다 고목이 되고 싶어한다. 그가 고목이 되고 싶어하는 까닭은 그것이 지니고 있는 넉넉함과 너그러움 때문이다. 여기서 고목은 "주름살투성이의 얼굴과/상처 자국으로 벌집이 된 몸"을 지니고 있지만 "쉽게 살"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여유 있는 마음으로 "길손의 그늘"이 되어주는 존재이다. 다름 아닌 그러한 고목과 하나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이 시에 나타나 있는 화자의 현존인 것이다. 이를테면 세계와 一心同體가 되고자 하는 서정시의 보편적 정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 이 시라는 뜻이다.
김남주의 시도 실제로는 이처럼 적잖은 부분에서 서정적 정서의 보편적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그의 시의 몇몇 작품과 관련하여 특별히 '서정시'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3. 기다림의 정서와 그리움의 정서
앞에서 필자는 서정시를 가리켜 서정적 정서를 주조로 하는 시라고 말한 바 있다. 일단은 누구라도 수긍할 수밖에 없는 논리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서정성'과 '서정적 정서'의 개념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서정적 정서'와 '서정성'이라는 용어가 만드는 분위기가 곧바로 일치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정(抒情)의 의미를 '감정이나 정서를 물길어 올리듯 펼쳐 드러낸다'라고 이해하더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이다. '서정적 정서'라는 말에 비해 '서정성'이라는 말이 상대적으로 좀더 응축된 감정가치를 지니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이로 미루어 보면 '서정성'이라는 개념을 '서정적 정서'가 좀더 강화된 것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매번 이처럼 정확하게 분리하여 이해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각각의 개념이 이루는 폭이 너무 협소해져 오히려 논의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논의는 곧바로 낭만성과 서정성이 이루는 개념의 편차에 주목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다. 낭만성이 외적으로 고양되고 있는 조금은 일반적인 정서라면 서정성은 내적으로 수렴되고 있는 조금은 특별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낭만성에 비해 상대적으로 좀더 내향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 서정성인 셈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정서가 전혀 이질적인 것은 아니다. 많은 부분에서 상호 공유되는 영역을 지니고 있는 것이 이들 정서라는 뜻이다.
서정성은 대부분 자연의 이미지를 매개로 하여 구체화된다는 점에서 특히 주목이 된다. 서정성이 가장 원초적인 정서인 것처럼 자연의 이미지 역시 가장 원초적인 이미지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언제나 유동하는 시인의 의식내면을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서정적 정서는 일종의 원초적 정서이기도 하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서정적 정서도 조화와 균형, 일치와 종합의 정신 형질 안에 자리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들 서정적 정서가 갖는 유동의 양상을 바로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서정적 정서 안에 내재되어 있는 시인의 의식은 대강 두 방향의 움직임을 보여준다. 공히 조화와 일치를 목표로 하지만 이들 중의 하나는 주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세계의 자아화라고 할 수 있고, 다른 하나는 객체를 지향하는 것으로 자아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다. 흔히 이를 가리켜 전자의 경우 '동화'라고도 부르기도 하고, 후자의 경우 '투사'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살펴보려고 하는 것은 이와 같은 현상학적 의식지향이 아니다. 서정적 정서는 기본적으로 그 내부에 두 방향의 원초적인 흐름을 지니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지적하면 하나는 기다림의 정서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움의 정서이다. 이 그리움과 기다림은 모든 인간 존재가 지니고 있는 근원적이고 시원적인 정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밖에 이들 정서를 모두 초월한 중도적 정서도 있을 수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운명적으로 인간은 이미 대상(자연)과 분리되어 있는 존재이다. 어찌 보면 인간은 대상(자연)과 분리됨으로써 비로소 인간으로서의 특성을 지닌다고도 할 수 있다. 인간이 감성과 이성의 능력을 갖게 된 것도, 나아가 언어의 능력을 갖게 된 것도 사실은 대상(자연)과 분리되어 있는 이러한 근원적인 조건에서 기인한다. 따라서 인간의 모든 정서는 기본적으로 이 대상(자연)과의 분리에서 싹이 텄다고 해야 옳다. 이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도 역시 대상(자연)과의 분리가 만드는 정서들 중의 일부라는 것이다.
여기서 정작 주목을 해야 할 것은 인간의 여러 정서들 가운데서도 이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가 가장 원초적인 정서, 곧 원형의 정서라는 점이다. 그렇다면 여타의 많은 정서들은 이들 정서, 곧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로부터 파생된 정서라고 해도 크게 틀린 지적이 아니다. 이처럼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가 모든 정서의 근원을 이루고 있는 것은 서정적 정서 내부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오히려 전통적 서정의 경우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의 정서가 훨씬 더 정서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예가 많다. 좀더 원초적인 서정일수록 정서의 뿌리가 기다림과 그리움에 닿아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다림의 정서란 주체는 자기 자리에 있으면서 객체가 주체에게로 다가오기를 바라는 정서이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기다림의 정서이다. 기다림의 정서가 갖는 수동성은 주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객체에 의해서 조화와 일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이 기다림의 정서에 대해 김남주가 사뭇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혁명의 전사이기를 원했던 그로서는 자기 스스로 조화와 일치의 대상을 찾아 나서지 못하고 "앉아서 기다리기나 하는" 수동적인 정서를 당연히 마땅찮게 여겼을 것이다. 다음의 예가 김남주의 이러한 심리 상태를 표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앉아서 기다리는 자여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엉거주춤 똥누는 폼으로
새 세상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여
아리랑 고개에다 물찌똥 싸놓고
쉬파리오기를 기다리는 자여
―[똥누는 폼으로] 전문
이 시에서 화자는 "새 세상"을 만드는 일에 직접적으로 나서지 않고 "앉아서 기다리"기나 하는 사람에 대해 강한 야유의 정서를 드러내고 있다. 기다림의 마음이 지니는 수동적 태도에 대해 그가 매우 비판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게 해주는 작품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지만 이 시를 지탱하고 있는 야유의 정서는 서정적 정서, 즉 조화와 일치의 정서와 별다른 관계가 없다. 오히려 이 시의 주조를 이루고 있는 정서는 분리와 괴리의 정서라고 해야 옳다. 대상에 대해 경멸의 감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당장에 조화와 일치를 이룰 수는 없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서정시가 서정적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큰 갈래의 서정시에서는 대립과 갈등으로서의 극적 정서, 즉 파토스적 정서도 충분히 수용되고 있다. 하지만 김남주의 시와 관련하여 여기서 일단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그러한 큰 갈래로서의 서정시가 지니는 다양한 정서가 아니다. 작은 갈래로서의 서정시가 갖는 특유의 정서, 즉 조화와 일치의 정서, 그 중에서도 기다림의 정서인 것이다.
기본적으로 기다림의 정서는 私的인 정서이다. 사적인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는 원초적인 서정시에서는 기다림의 주체와 대상이 화자와 사랑하는 님(자연이거나 역사, 진리일 수도 있다)으로 단순화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화자의 정신 차원이 매우 복잡하고, 그리하여 상징을 통해 사적이면서도 동시에 공적인 이미지나 정서가 드러나게 되면 주체와 객체의 이러한 관계는 불투명하게 해체되거나 전도되는 경우가 적잖다. 주체 중심의 정서와, 객체 중심의 정서 사이에 일종의 불균형이 끼어 들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주체와 객체가 구체적인 사물(이미지)의 모습이 아니라 추상적인 관념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경우도 허다하다. 물론 이는 김남주의 시라고 해서 크게 다를 바 없다. 다음의 시에서 그러한 예를 확인할 수 있다.
겨울을 이기고 사랑은
봄을 기다릴 줄 안다
기다려 다시 사랑은
불모의 땅을 파헤쳐
제 뼈를 갈아 재로 뿌리고
천년을 두고 오늘
봄의 언덕에
한 그루 나무를 심을 줄 안다
사랑은
가을을 끝낸 들녘에 서서
사과 하나 둘로 쪼개
나눠 가질 줄 안다
너와 나 우리가
한 별을 우러러보며
―[사랑은] 전문
이 시에는 무엇보다 시인이 깨닫고 있는 '사랑'의 의미가 구체화되어 있다. 따라서 시인의 내적 자아에서 비롯된 기다림의 정서가 이 시에 직접적으로 표면화되어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일단은 먼저 이 시의 시적 주체가 '사랑'이라는 관념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인간의 삶에서 '사랑'의 마음이 갖는 정작의 의미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 이 시의 주요 내용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를 이 시의 기본 정서가 기다림의 정서와 전혀 무관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시 역시 그 배후에는 폭넓은 기다림의 정서가 도사려 있기 때문이다. 이 때의 기다림의 주체는 말할 것도 없이 '사랑'이다.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아는 기다림의 주체를 사랑으로 설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 '사랑'은 기다림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 "천년을 두고 오늘/봄의 언덕에/한 그루의 나무를 심을 줄" 아는 생명의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 사람으로 의인화되면서 구체의 옷, 즉 물질의 옷을 입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인의 자아를 투영하고 있는 사랑은 일종의 주관화된 이미지로 기능하게 된다. 다시 말하면 물질화된 관념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것인데, 이러한 전이가 가능한 것은 그것이 일찍이 기다림의 과정을 통과한 바 있기 때문이다.
기다림의 정서는 기본적으로 사랑의 정서에 종속되기 마련이다. 언제나 사랑의 정서로 수렴될 수밖에 없는 것이 기다림의 정서이다. 이러한 상관관계는 위의 시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1연의 정서적 주조인 기다림의 정서가 2연의 정서적 주조인 사랑의 정서로 응결되고 있기 때문이다. 2연에서 노래되고 있는 "사과 하나 둘로 쪼개/나눠 가질 줄" 아는 마음이야말로 사랑의 마음이 아닌가. 이러한 사랑의 정서가 1연의 기다림의 정서를 통과하는 가운데 가능했으리라는 것을 알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다.
기다림의 정서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근원적인 정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이 된다. 이처럼 근원적인 정서를 담아내고 있다는 것은 시인 김남주가 나아가 언제나 현실적인 것에만, 당대적인 것에만 집착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
김남주는 기다림의 정서뿐만 아니라 그리움의 정서 또한 적잖이 드러낸 바 있는 시인이다. 그리움의 정서는 기다림의 정서와는 상반되는 정서이다. 공히 유동하는 정서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이루는 관계의 구조는 많이 다르다. 요컨대 그리움의 정서는 주체가 오히려 객체를 향해 다가가고자 하는 정서이다. 그리움의 정서에서 객체에 비해 주체가 상대적으로 훨씬 적극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따라서 기다림의 정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능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 이 그리움의 정서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갖는 능동성은 객체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체에 의해서 조화와 일치가 이루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기본적으로는 그리움의 정서 역시 私的인 정서이다. 사적인 정서에 기반하고 있는 원초적인 서정시에서는 그리움의 주체와 대상이 상호 연인의 관계를 취하고 있는 예가 적잖다. 그리움의 정서 또한 많은 경우 화자의 사랑하는 님(자연이거나 역사, 진리일 수도 있다)에 대한 연모의 정서로 단순화되기 쉽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다. 김남주의 시에서도 그리움의 정서는 이처럼 사랑하는 님에 대한 연모의 정서로 나타나는 경우가 없지 않다. 다음의 시에서 그 예를 확인할 수 있다.
나는 그린다 여인의 얼굴을
허공에 담배연기 속에 그 까만 눈을
내 고뇌의 무덤 그 하얀 유방과
달빛에 젖은 골짜기 그 축축한 허벅지를
눈을 감고 그린다 허공에 담배연기 속에
오 부챗살처럼 퍼지는 여인의 몸 밤의 자리여
―[고뇌의 무덤] 부분
이 시에서 화자는 사랑하는 님에 대한 그리움의 정서를 사뭇 급박한 어조로 표백하고 있다. 이 때의 님은 구체적인 육체의 형상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감각적인 느낌을 준다. 화자 자신이 그리움의 대상을 "여인의 얼굴", "까만 눈", "하얀 유방", "달빛에 젖은 골짜기 그 축축한 허벅지" 등 물질의 이미지를 택해 그려내고 있는 것도 사실은 좀더 살아있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이다. 마침내 이 시에서 화자의 그리움의 정서는 "부챗살처럼 퍼지는 여인의 몸"을 딛고 "밤의 자리"에까지 이르고 있다.
이처럼 김남주의 시에서 그리움의 정서는 상대적으로 원초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기다림의 정서와는 달리 그리움의 정서가 이루는 주객의 관계는 그다지 엉켜 있거나 꼬여 있지도 않다. 주체로서의 화자가 객체로의 대상에 향해 기본적으로 순연한 마음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이러한 마음에서 비롯되는 그리움의 정서가 상대적으로 온전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리움의 정서가 이러한 모습을 갖는 데는 매사에 능동적이고자 했던 그의 의지도 중요한 몫을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또한 낭만주의자로서 그의 주체가 얼마나 확고했는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본래 그리움의 정서는 주체에서 비롯되어 객체를 지향하는 정서이다. 따라서 그리움의 정서는 그것의 조직과 결이 상대적으로 좀더 정갈하고 투명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김남주의 시적 정서는 기본적으로 전통적 농촌정서, 곧 자연의 정서를 토대로 하고 있지 않은가. 그의 시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갖는 이러한 면은 님을 향한 것이 아닐 경우에도, 말하자면 동지들을 향한 것일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다음의 시가 그러한 예의 하나이다.
바로 옆방에 서로
그리운 사람 있어도
그 얼굴 볼 수 없기에
똑 똑똑 똑똑똑 벽을 두드려
잘 자오 잘 자게
잘 잤는가 잘 잤네
아침저녁으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다네.
―[아침저녁으로] 전문
이 시의 시적 공간은 감옥이다. 김남주가 10년 가까이 옥살이를 했고, 그의 시의 대부분이 옥중시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 시에서 이러한 시적 공간이 전개되는 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투옥된 체험이 전혀 없는 사람일지라도 시적 공간을 익숙하게 그려낼 수 있을 만큼 압축된 묘사가 돋보이는 것이 이 시이다.
이 작품은 감옥에서 흔히 이루어지는 통방의 체험을 형상화하고 있다. 이러한 통방을 주고받는 마음의 배후에 자리해 있는 것이 그리움의 정서이다. 이 시의 등장 인물들이 그리움의 정서를 갖는 것은 물론 감옥의 벽이 서로를 갈라놓고 있기 때문이다. "바로 옆방"에 있으면서도 "얼굴 볼 수 없기에/똑 똑똑 똑똑똑 벽을 두드려" 그리운 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시에서처럼 벽을 두드려 그리움의 마음을 소통하는 것도 또한 궁극적으로는 합일에의 의지의 산물이다. 이 작품에서도 역시 서정적 정서로서 그리움의 정서는 하나됨에의 의지를 토대로 하고 있다는 뜻이다.
물론 서정적 정서의 모든 내용이 항상 기다림과 그리움의 모습을 취하는 것은 아니다. 비록 조화와 일치의 세계를 담아내기는 할지라도 크게 유동하지 않는 가운데 중도적인 모습을 취하는 경우도 상당하기 때문이다. 중도적 정서로서의 서정적 정서는 일종의 자족적 정서이다. 이러한 중도적 정서는 일체의 심리적 결핍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비로소 가능해지기 마련이다. 주체와 객체 사이에 분별과 분리가 게재되어 있지 않은 정서, 다시 말해 이미 동일성이 이루어져 있는 정서가 중도적 정서이다. 따라서 출옥되기 이전의 김남주의 시에서는 쉽게 발견하기 어려운 것이 중도적 정서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여 이 시기의 그의 시에 중도적 정서로서의 서정적 정서가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시가 다름 아닌 그러한 뜻에서의 서정적 정서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예이다.
내가 손을 내밀면
내 손에 와서 고와지는 햇살
내가 볼을 내밀면
내 볼에 와서 다스워지는 햇살
깊어 가는 가을과 함께
자꾸자꾸 자라나
다람쥐 고리만큼은 자라나
내 목에 와서 감기면
누이가 짜준 목도리가 되고
내 입술에 와서 닿으면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
옛 추억의 사랑이 되기도 한다.
―[창살에 햇살이] 전문
이 시에서 화자인 '나'는 '햇살'과 이루는 완벽한 조화와 일치를 노래하고 있다. 그야말로 빈틈없는 혼연일체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나'와 '햇살'의 관계이다. 이처럼 철저한 합일의 세계를 드러내고 있다는 점에서 이 시는 서정적 정서의 원형을 함축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물론 이 시에서의 시적 공간도 역시 감옥이다. 그와 관련하여 여기서 정작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은 이 시의 화자가 옥중에 있으면서도 이처럼 본연지성으로서의 일치의 정서를 잃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옥중에서 중도적 정서를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명하기 위해 또 다시 그의 옥중시를 예로 들을 필요는 없다.
이 시에서 화자와 관계하고 있는 일치의(하나됨의) 대상은 인간이나 역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인 햇살이다. 부지불식간에 햇살로부터 "목에 와서 감기"는 "누이가 짜준 목도리"를, "그녀와 주고받고는 했던/옛 추억의 사랑"을 깨닫고 있는 것이 이 시에서의 화자이다. 이러한 깨달음은 사실 오랜 세월에 걸친 지난한 수련을 통해서나 가능한 일이다.
일반적으로 일치의 대상이 자연의 일부로 선택되면 정서의 내면이 거의 주체에 의해서 결정되기 마련이다. 대상으로부터 화자에게 다가오는 정서의 밀도가 상대적으로 미약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온전한 중도적 정서를 획득하기가 그만큼 쉽다는 뜻이다.
물론 이러한 논의를 김남주의 위의 시에 내재해 있는 중도적 정서를 폄하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 옥중의 주체에게는 햇살로부터 친화의 정서를 느끼는 것 자체가 어렵고 힘들기 때문이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의 시의 정서적 양상은 옥 안에서 쓴 시들보다 옥 밖에서, 즉 출옥 후에 쓴 시들이 훨씬 온전한 모습을 보여준다. 출옥 이후의 시들에서는 파토스적 정서로 대변되는 대립과 투쟁의 정서가 점차 사라지고 대상과 관조적 거리를 획득하는 데서 비롯되는 조화와 균형의 정서들이 차츰 주조를 이루기 시작한다.
詩作 행위도 좀더 온전한 삶을 향한 의지의 하나로서 이루어진다면 시에 좀더 온전한 정서를 담아내는 것도 마땅히 무익하지 않다. 이 때의 온전한 정서가 대상과 잘 통합되어 있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정서를 뜻하는 것은 재론할 필요가 없다. 출옥 이후에 씌어진 김남주의 시 가운데는 이러한 뜻에서의 밝고 화사한 정서를 담고 있는 작품이 적잖다. 다음의 시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반짝반짝 하늘이 눈을 뜨기 시작하는 초저녁
나는 자식놈을 데불고 고향 들길을 걷고 있었다
아빠 아빠 우리는 고추로 쉬하는데 여자들은 엉뎅이로 하지?
이제 갓 네 살 먹은 아이가 하는 말을 어이없이 듣고 나서
나는 야릇한 예감이 들어 주위를 한번 쓰윽 훑어보았다 저만큼 고추밭에서
아낙 셋이 하얗게 엉덩이를 까놓고 천연스럽게 뒤를 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이 들어서 그랬는지
산마루에 걸린 초승달이 입이 귀밑까지 째지도록 웃고 있었다.
―[추석무렵] 전문
이 시에서 무엇보다 돋보이는 것은 시적 화자와 세계가 완벽하게 통일되어 있는 밝고 화사한 중도적 정서이다. 시인의 직접적인 체험에서 비롯된 소박한 이야기 한 토막이 가식 없는 묘사를 통해 따뜻하고 온전한 중도적 정서로 산출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무구한 서정적 정서에 중도적 정서 운운하며 특별한 이름을 붙이는 것은 아무래도 멋쩍은 일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시는 초저녁의 하늘, 고향의 들길, 엉뎅이로 쉬하는 아낙들, 네 살 먹은 아이, 그리고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는 시인 등으로 구성되어 있는 한 토막의 작은 이야기이며 풍경이다. 이들 형상이 이루는 행복한 조화와 균형, 그리고 그로부터 비롯된 충만한 서정적 정서가 이 시의 전체 형상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시로부터 무슨 엄정한 의미나 사상을 찾아내려고 해서는 안 된다. 대지의 활기찬 생명현상을 아무런 꾸밈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시인의 정겨운 마음을 읽는 것만으로도 이 시에 대한 이해는 충분하다. 대지와 동화되고 있는 아낙들을 바라보며, 또 다시 그것들과 동화되고 있는 시인의 해맑은 마음을 주체화하는 것이 이 시의 바른 독법인 것이다.
이처럼 김남주의 시는 각각의 서정적 정서의 특질을 다양한 조직과 결을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 기다림의 정서가 주조를 이루는가 하면, 그리움의 정서가 전면에 나타나기도 하고, 때로는 중도적 정서가 구체화되기도 하는 것이 그의 시의 서정적 특질이다.
물론 그의 시의 모든 정서가 이러한 측면에서의 서정적 정서를 드러내고 있는 것은 아니다. 치열하게 들끓는 투쟁의 정서, 즉 파토스적 정서를 주조로 하고 있는 작품이 사실은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반외세 민족 자주의식과 민중 주체의 혁명 사상을 기초로 하고 있는 것이 그의 시의 주류라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이들 시에서 그가 이처럼 치열하게 들끓는 투쟁의 정서, 파토스적 정서를 보여주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는 어려운 것이 그의 시 일반이 갖는 정서적 특징이다. 이러한 점은 이른바 작은 갈래로서의 서정시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서정시 본래의 순연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들이 이루는 정서적 특징을 단정적으로 규정하기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그의 시의 서정적 특징을 기다림의 정서, 그리움의 정서, 중도적 정서로 나누어 살펴본 바 있지만 이는 단지 논의의 편의를 위한 임의적인 방편이었을 따름이다. 명확한 과학적 틀이 있어 그에 입각해 논의를 전개했던 것도 아니고, 고매한 식견이 있어 그에 입각해 논의를 전개했던 것도 아니다.
4. 맺음말―전통적 정서와 전통적 형식
김남주가 자신의 시에 표출되어 있는 정서적 특징에 대해 얼마나 구체적인 이해를 하고 있었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글을 남기고 있는 것을 보면 그가 이에 대해 일정한 고민을 했던 것만은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가능하다면 내 시에서 소위 서정성을 빼버리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쓰기도 했는데 그것이 어느 정도 성공적으로 되었는지 모릅니다.
특히 내가 제거하려고 했던 서정성은 소시민적인 서정성, 자유주의 서정성, 봉건사회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고리타분한 무당굿이든가 판소리 가락에서 묻어 나오는 골계적, 해학적, 한적 서정성이었습니다. 이런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서정성이나 자유주의적 소시민적 서정성으로는 내가 바라는 또는 그런 서정성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바라는 어떤 이상은 실현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시에서 무기로써 사용하고자 하는 서정성은 일하는 사람들의 서정성 중에서 진보적인 것, 전투적인 것, 혁명적인 것입니다. 일하는 사람들 중에서 이런 정서를 일상적으로 갖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이 글에서 우선 먼저 감지할 수 있는 것은 시인 김남주가 시적 정서 일반을 하나의 무기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자기 자신의 시에서 의지적으로 추구했던 정서가 진보적인 것, 전투적인 것, 혁명적인 것도 다름 아닌 이 때문이다. 그러나 앞에서 줄곧 논의해온 것처럼 이러한 정서는 서정적 정서 본래의 것은 아니다. 서정시의 정서적 내면을 이루는 중요한 일부이기는 하지만 이러한 정서는 일종의 극적 정서로서 파토스적 정서로 분류되는 것이 보통이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김남주 시의 본질적 정서가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가를 잘 알 수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은 그가 비판, 부정하고 있는 서정성들의 목록이다. "소시민적인 서정성, 자유주의 서정성", 봉건사회의 유산인 "골계적, 해학적, 한적 서정성", "전통적이고 인습적인 서정성" 등이 그것의 세목이다. 이 글을 쓸 즈음 시인 김남주에게는 무엇보다 이들 서정성이 가장 중요한 극복의 대상이었던 듯하다.
그가 이들 서정성에 대해 이토록 거부의 마음을 갖고 있는 까닭은 자명하다. 일단은 먼저 사적 유물론에 입각해 역사의 발전을 확신하고 있던 것이 당시의 그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 무렵의 현실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그로서는 이들 정서가 의심할 바 없는 퇴영적 정서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이러한 입장이 지나치게 단선적이라는 것은 앞에서도 우회적으로 지적한 바 있다. 역사의 발전이 결코 線條的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여기서 별도로 강조할 필요는 없다.
한 시인의 정서적 특징은 기본적으로 자기 시대의 정서적 특징 일반과 맞물려 있을 수밖에 없다. 자기 시대의 정서적 특징 일반으로부터 완전히 초월할 수 있는 시인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 시대의 사회적 성격이 다양하고 복잡한 것만큼 그 시대를 반영하는 시인의 정서적 특징은 다양하고 복잡한 것이 당연하다.
이러한 면은 김남주의 시라고 해서 특별히 다르지 않다. 그의 시의 정서적 특징 역시 자기 시대의 정서적 특징 안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다는 뜻이다. 사실 그렇다. 그토록 타매해 마지않았던 예의 서정성들로부터 그가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던 것도 이러한 논리에 의하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렵다.
새삼스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의 몇몇 시에는 그가 비판, 극복하고자 했던 예의 정서들이 여전히 잔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자신에 의해 '전통적 서정'이라고 불려졌던 것들이 유독 그러하다. 모든 작품에서 다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 전통적 서정의 경우 상당한 비중으로 그의 시의 정서적 내면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통적 발상법을 그가 그만큼 자신의 시에 응용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의 시에 남아 있는 전통적 정서를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 옛것을 바탕으로 하지 않고 어떻게 새것을 이루어낼 수 있겠는가. 민족적 정서의 원형으로 자리해 있기 마련인 것이 정통적 정서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앞에도 언뜻 말했듯이 서정시에서 정서를 산출시키는 요소는 매우 다양하다. 일단은 정서가 발생되는 초보적 계제에 리듬과 어조가 자리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그것 뿐만은 아니다. 여타의 형상의 자질인 이미지와 이야기도 정서를 산출하는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정시의 언술방식이며 구성방식도 정서를 산출하는 의미 있는 근거로 작용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서의 산출과 관련하여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시인의 세계관이다. 여기서의 세계관이라는 말에는 당연히 대상에 대한 시적 자아의 심리적 거리며 태도도 포함되어 있다.
이처럼 복잡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하여 발생시키는 것이 서정시의 정서적 특질이다. 따라서 김남주의 시에 전통적인 정서가 남아 있다면 마땅히 앞에서 말한 정서 산출의 요인에 그러한 점이 남아 있다는 뜻이 된다. 그의 시들 가운데에는 사실 그러한 점도 상당히 엿보이고 있다.
김남주의 시가 지니고 있는 전통적인 정서는 우선 리듬의 면에서 그 단초가 드러난다. 리듬은 시의 형식적 특징을 이루는 핵심의 요인이다. 그렇다면 이는 곧 그가 시의 형식의 면에서 익히 전통적인 것을 취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일단은 이 때의 '전통적인 것'이 그가 도처에서 강조하고 있는 '민족적 형식'과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민족적 형식의 경우 곧바로 전통적 형식이 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일찍이 그가 "민족적 형식을 취"하는 것은 "민족적 정서와 문화유산, 사고와 습관 등을 비판적으로 받아들여 계승하고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이러한 논의는 우선 그가 시의 형식면에서 전통적 가치를 계승, 발전시키는 일에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의 시의 구성법이며 리듬 체계가 결코 낯설지 않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다름 아닌 이에서 연유한다. 그의 시가 남달리 리듬과 가락에 예민한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사실은 이 때문이다. 일찍이 염무웅이 그의 시로부터 "최선의 절제된 형식, 우리말의 내재적 힘과 가락을" 볼 줄 알아야 한다고 말한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김남주의 시에서 리듬과 가락은 우선 먼저 반복과 병렬의 언어 구조로부터 비롯된다. 반복과 병렬은 전통 민요의 가장 원초적인 구성 원리이다. 병렬은 본래 언어의 동질적인 요소가 나란히 반복되어 나타나는 것을 가리킨다. 이러한 반복에 의해 리듬과 가락이 태어나는 것인데,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면 반복은 병렬의 하위개념에 속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는 반복과 병렬의 개념을 따로 떼어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부분 그것들이 상호 뒤섞여 있는 가운데 응용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반복과 병렬 그 자체는 객관적 지시내용을 갖지 않는다. 그 대신 주체의 의식에 투영되어 정서적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이 반복과 병렬이다. 이 때의 정서적 효과는 대부분 강조의 역할을 하지만 때로는 그밖의 다양한 심리적 효과 및 주술적 효과를 제공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반복과 병렬에서 비롯되는 리듬과 가락이 곧바로 시적 정서를 산출하는 주요 요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반적으로 반복과 병렬은 언어의 형태 및 구조의 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지만 의미의 면에서 이루지는 경우도 아주 없지는 않다. 시의 형태의 면에서 이루어지는 반복과 병렬의 유형은 음운, 어휘, 통사, 연 등 모든 구성 단위에 걸쳐 있다. 다음의 시는 연의 단위에서 반복과 병렬이 이루어지고 있는 예이다.
별 하나 초롱초롱하게 키우지 못하고
새 한 마리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서울의 하늘
물 한 모금 깨끗하게 마실 수 없고
고기 한 마리 병들지 않고 살 수 없는
서울의 강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공기 한 바람 상쾌하게 들이킬 수 없는
서울의 거리
나는 빠져 나간다
지옥을 빠져나가듯 서울을 빠져나간다
영등폰가 어딘가 구론가 어딘가
시커먼 굴뚝 위에 걸려 있는 누르팅팅한 달이
자본의 아가리가 토해놓은 서울의 얼굴이라 생각하면서
이 시는 모두 4연 14행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단은 1연의 통사 구조가 약간의 변주를 이루면서 2연과 3연에서 반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연까지 계속되던 유사한 통사 구조는 4연에 이르러 일련의 변용을 낳는데, 이러한 구성방식이 우리 시의 오래된 전통 중의 하나라는 것을 여기서 새삼스럽게 강조할 필요는 없다.
이 시의 각각의 연들이 이루는 구조적 특징을 기호화하면 aaab형이 된다. aaab형은 김남주 시의 경우에는 아주 익숙한 구성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자유] [재순이네] [우리 시대의 사랑] [서울의 달] 등의 시에서 그러한 예를 찾아 볼 수 있다. aaab형은 물론 전통적으로 우리 시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구성방식 중의 하나일 따름이다. 그의 시들 중에는 이밖에도 aa형, aab형, abba형, aaba형, aaabb형 등 우리 시의 전통적 구성방식에 의거하고 있는 작품이 허다하다. 그가 그만큼 우리 시의 전통적 형식으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고 있다는 증표라고 할 것이다.
시행의 對句的 전개 또한 반복과 병렬의 중요한 일부이다. 그의 시들 중에는 對句的 전개를 통해 詩行을 구성하고 있는 작품들도 또한 상당하다. 對句的 구성방식은 동일하거나 유사한 시행을 마주보게 배치함으로써 가락과 리듬, 그리고 시적 긴장을 유지하게 하는 미학적 장치이다. 이는 당장 위의 시의 "별 하나 초롱초롱하게 키우지 못하고/새 한 마리 자유롭게 날지 못하는" 등의 구절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시행의 對句的 구성방식은 전통시의 대표적인 장르 중의 하나인 한시와 민요에 두루 포괄되어 있는 표현 기법이다.
지금까지 논의한 그의 시의 형식적 가치들은 기본적으로 시적 정서를 산출하는 여러 자질들 중의 하나이다. 그의 시의 정서적 특징이 이처럼 여러 부분에서 전통적 정서에 닿아 있다는 것인데, 물론 이는 그의 의지적 노력의 결과이다. 그가 자기 시의 형식을 민족적 형식에서 취하고자 했다는 것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앞에서의 그의 시의 형식적 특징에 대한 논의의 경우 그 자체로는 의미를 지닐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여기서는 그의 시의 정서적 특징이 형성되는 과정에 다소나마 이들 형식적 요인들이 기여한 바를 살펴보고자 했을 따름이다.
이러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시의 형식적 요인들을 따져보는 동안 아쉬움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것들의 작용에 의해 그의 시의 정서적 특질들이 산출되는 과정을 좀더 섬세하게 고찰할 수도 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의 시의 형식적 요인들을 따져보는 일이 기본적으로 본고의 정작의 의도와 많이 다른 것은 사실이지만 말이다.
부족한 점이 많은 것을 잘 알면서도 서둘러 여기서 논의를 맺기로 한다.(1999.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