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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23.06.28 03:30
전쟁 중 문화재 보호 노력
▲ 1945년 7월 오스트리아 알타우제 소금광산에서 도르래를 이용해 미켈란젤로의 성모자상을 꺼내는 '모뉴먼츠 맨'. /미 스미소니언박물관
최근 우크라이나 희귀 성화(聖畫)를 비밀리에 프랑스 파리 루브르박물관으로 옮겨 무사히 전시했다는 소식이 전해졌어요. 작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소실이나 도난 위험에 처한 우크라이나 문화재는 유럽 다른 국가로 '구조'돼 보호를 받고 있습니다. 이처럼 지금은 특정 국가의 문화재더라도 '전 인류의 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을 갖고 여러 나라가 문화재 보호에 나서는 경우가 있어요. 그러나 이런 인식이 생긴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오랫동안 전쟁에서 패배한 나라의 유산을 파괴하는 것이 승자의 권위를 높이는 일이라 여겼기 때문이에요. 문화유산을 약탈하는 행위도 승자의 정당한 전리품 취득이라 생각했어요. 국제사회가 각국 문화재 보호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은 세계대전을 치르고 나서입니다.
점령지 문화재 약탈한 나치의 만행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이 저지른 대규모 문화재 파괴와 약탈은 악명이 높아요. 2차 대전 기간 나치가 저지른 약탈 규모는 그 이전에 유럽에서 있었던 모든 전쟁 기간 자행된 약탈을 모아 놓은 것보다 더 광범위했습니다. 유럽 전역에서 약탈한 예술품이 500만점에 달한다고 해요. 아돌프 히틀러는 게르만 우월주의를 강화하는 정책을 펴면서 점령지문화재를 압류하도록 명령했어요. 초현실주의·야수파 등 미술 작품들은 모두 '순수한 독일 정신'을 오염시키는 '퇴폐 예술'로 간주해 추방했어요.
이뿐만 아니라 나치 독일은 점령지에서 국립 도서관이나 기록 보관소에 있던 중요한 서적, 박물관에 소장된 귀중한 유물도 모두 가져갔어요. 여기에는 히틀러의 예술 사랑도 한몫했습니다. 1937년에는 이것들을 모아 히틀러의 고향인 오스트리아 린츠에 박물관을 세우려 하기도 했죠. 1941년 4월부터 1944년 7월까지 프랑스에서 약탈한 문화재 양만 화물 열차로 1418칸에 이르렀다고 해요. 히틀러는 바이에른주에 있는 노이슈반슈타인 성에 약탈한 문화재를 숨겨 놓도록 지시했는데, 나중에는 물건이 천장까지 쌓여 많은 문화재가 성 밖 창고에 방치되는 수난을 겪기도 했습니다. 특히 전쟁이 자신들에게 불리한 쪽으로 전개되면서 나치 독일은 자신들이 수집한 작품을 이리저리 함부로 끌고 다녔고, 이 과정에서 귀중한 문화재들이 또 한 번 파괴됐어요.
헤이그 협약과 푸른 방패
2차 대전 당시 문화재 훼손에 대한 반성은 1954년 헤이그 협약을 체결하는 원동력이 됐어요. 과학 발전에 따라 무기 성능이 크게 향상되면서 무력 충돌이 벌어질 경우 문화재 훼손 위험성이 과거보다 훨씬 커졌기 때문이죠.
헤이그 협약은 세계적으로 가치 있는 문화재가 무력 분쟁 때문에 파괴되지 않도록 필요한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하도록 하고 있어요. 여기에는 건축물이나 건물군(群), 고고학적 유적, 미술품, 예술·역사적 의의가 있는 서적, 박물관과 도서관, 기록보관소, 문화재의 보존·전시를 목적으로 하는 건조물 등이 모두 포함돼요. 협약을 체결한 국가는 등록부에 기재된 특수 문화재에 대해 어떠한 적대 행위도 취할 수 없어요. 또 특수 보호 문화재를 수송할 때 어떠한 적대 행위도 해서는 안 돼요. 물론 가입국에 비해 이를 비준한 국가 비중이 크지 않다는 한계도 있어요. 하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 인류 전체의 문화적 손실을 줄여야 한다는 취지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이 협약은 큰 의미를 가집니다.
헤이그 협약에서는 보호받아야 하는 문화유산을 표시하는 방법으로 푸른색 방패 모양 표지를 지정했어요. 헤이그 협약 가입국은 자국의 중요 문화유산이나 문화 기관에 '푸른 방패'가 새겨진 깃발, 현판 등을 활용해 보호 대상임을 표시하고 있어요. 그리고 이 로고를 공식 사용하는 비정부 국제기구가 있는데 바로 국제푸른방패(BSI)입니다. '문화 적십자'라고도 불리는 기구로, 전쟁과 자연재해 등 위험 상황에 놓인 문화유산과 박물관, 도서관, 기록관을 보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어요.
'문화재 전담반' 모뉴먼츠 맨
세계 대전이 진행되고 있는 와중에도 문화재를 지키려 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2차 대전 당시 창설된 '모뉴먼츠 맨'이에요. 처음 이 '문화재 전담반'이 만들어진 이유는 수도원 파괴 때문이었어요. 1944년 2월, 1200년 역사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이 연합국 폭격으로 파괴됐어요. 세계 각국의 비난이 이어졌고 예술품을 지켜야 한다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왔어요. 그렇게 해서 모뉴먼츠 맨이 탄생했습니다. 여기에 참여한 사람들은 모두 군인과는 거리가 먼, 미술계 관계자가 대부분이었어요. 초창기 창단 멤버 60여 명은 박물관 관장, 큐레이터, 건축가 등이 주를 이뤘죠. 이들의 원래 임무는 전쟁의 포화 속에서 건축물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문화재 약탈로 인한 피해가 점점 심각해지자 강탈된 예술품을 찾는 것으로 임무가 바뀌었어요.
처음에는 이들에 대한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어요. 차량과 무전기·지도 등 필요한 물품이 거의 지급되지 않았죠. 전쟁 중에는 문화재 훼손이 불가피하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열악한 상황이 이어지던 가운데 프랑스 파리 출신 여성 로즈 발랑이 등장하며 이들의 활약이 주목받기 시작했어요. 발랑은 나치가 약탈한 예술품을 보관하던 주드폼 박물관에서 일하며 그곳으로 들어오는 약탈품을 빠짐없이 기록했어요. 어디서 왔는지, 또 어디로 가는지 꼼꼼하게 추적했죠. 그녀의 노력으로 모뉴먼츠 맨은 나치가 예술품을 숨겨뒀던 알타우제 소금광산을 발견합니다. 이 광산에서만 '성모자상'을 비롯해 그림 6500여 점, 조각상 200여 점, 공예품 상자 1200여 개를 발견했다고 해요. 모뉴먼츠 맨은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하실이나 기관차, 음식 창고, 수도원 등에서 수많은 문화재를 발견했어요. 그렇게 모뉴먼츠 맨에는 총 13국 350여 명이 참여해 활동했고, 이들의 영웅적인 활약상은 2014년 영화로도 제작됐답니다.
▲ 로즈 발랑. /모뉴먼츠맨앤우먼재단
▲ 독일 뉘른베르크 시청사의 폭격 전 모습(왼쪽)과 2차 세계대전 중 폭격으로 부서진 후의 모습. /미 스미소니언박물관
▲ 폴란드 크라쿠프에서 18세기부터 영업한 호텔 폴스키에 붙어 있는 푸른 방패 표지(오른쪽 아래). /국제푸른방패
▲ 2차 세계대전 중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서 있는 군 트럭. /미 스미소니언박물관
▲ 폭격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 박물관. /국제푸른방패
서민영 계남고 역사 교사 기획·구성=김윤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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