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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귀농 사랑방 원문보기 글쓴이: 밑돌
생명살림의 먹을거리와 밥상머리 공부
김수현(약사, 식생활 전문강사)
현대인의 식생활의 변천
인류는 근 400만년 동안 거의 비슷한 음식을 먹었고 농경사회로 들어간 1만년 역사동안에도 곡류와 채식 위주의 식사를 했었다.
현대인의 식생활의 변화는 근 100여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우리나라의 경우 근 30년 동안 예전과는 아주 다른 음식을 먹게 되었다.
곡식의 도정율은 심각할 정도로 높아져 1 년에 9600억 원 어치에 해당하는 식량을 깎아버리고 있고 사람들은 도정율이 높은 곡식의 섭취로 인한 만성 질환을 앓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축산과 낙농이 되지 않았던 지리적 여건상 많이 먹을 수 없었던 육류와 우유의 섭취 증가는 개인의 질병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환경 파괴, 식량 부족, 사회 경제적 불평등의 야기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식품가공 기술의 발달과 다국적 기업의 진출은 식품 첨가물, 유전자 조작식품, 환경 호르몬의 증가를 극단적으로 증가시키며 식품의 오염뿐만 아니라 생명 전체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새로운 음식과 환경에 대한 신체적 적응은 빠른 시간 안에 일어나지 않으며 유전적 골격을 바꾸어 놓지도 못하고 있다. 낯선 음식과 새로운 환경이 만들어낸 새로운 화학물질들은 인간의 면역 기능을 떨어뜨리며 생명의 다양한 고리를 끊어내고 인류사회 전체의 큰 위협으로 남고 있다.
전통적, 지역적 식사의 의미
전통적 식사, 지역적 식사라고 하는 것은 수천, 수백 년의 세월을 흘러 과학적으로 검증된 음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이 땅에서 나는 음식들을 원하고 있으며 그런 음식들에 이미 길들여져 있다.
동양인의 위는 서양인들의 위에 비해 덜 발달해 있어 위산의 분비가 떨어져서 많은 양의 단백질을 소화하는 데 곤란을 겪고, 장은 1m 정도가 길어 섬유질이 결핍된 육식 위주의 서구적 식사에 쉽게 배설의 장애를 경험한다.
우리 조상들이 평생 쌀 서 말을 못 먹었다는 이야기는 그만큼 농경사회에 살면서도 생육기간이 짧은 구황작물들에 의존해서 살아왔다는 것이며, 조, 수수, 피, 기장과 같은 거친 곡식을 주식으로 삼으며 우리 몸은 그런 음식에 길들여져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나라의 경우 축산과 낙농이 안 되는 나라였고 귀한 음식들은 양반과 권력층이 모두 독점했던 음식들이었기 때문에 서민들이 고기와 우유를 먹는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이야기들이었다.
조상들은 온 들녘에 나는 풀, 뿌리들을 나물로 무쳐 먹었다고 하는데 그 종류는 250가지가 넘었다고 한다. 되도록 도정하지 않은 거친 곡식과 채식 위주의 식사는 전통적인 우리들의 식사였으며 우리 몸은 그런 음식을 간절히 원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식생활의 변천
지금의 30대들은 40대들의 건강 수준과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단연코 식생활의 변화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37년 전 분유가 들어왔으며 밀가루와 설탕과 식용유를 본격적으로 이용하게 되었다. 설탕을 많이 먹고 튀긴 것을 많이 먹는 집이 부잣집이었으며, 우리는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을 굳게 믿으며 밀가루를 먹어야 키가 크는 줄 알고 밀가루로 된 분식을 늘려왔다.
우리나라의 식생활의 변화는 근 30년 동안 빠르게 변화하고 있으며 다양한 식문화가 함께 공존하게 되었다. 전후 세대들은 양반과 귀족들이 독점하고 있었던 이밥에 고깃국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며, 30대를 비롯한 젊은 세대들은 빵과 고기, 우유와 주스로 대변되는 서구적 식생활을 동경하고 있다. 전후세대들이 추구하는 식문화가 한상 차림문화, 과식의 문화, 부의 상징으로서의 음식문화를 즐기고 있다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코스문화, 미식문화, 여유의 상징으로서의 음식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의 경우 88년도 올림픽을 전후하여 전국에 패스트푸드점과 훼밀리 레스토랑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90년대 태어난 아이들은 극단적인 인스턴트, 가공식품 문화에 다시 한번 강력하게 노출되고 있다.
미래세대의 식사는 엄마들의 사회진출, 음식이 가지는 사회문화적 기능의 망각과 편의주의적인 식문화에 대한 동경 속에서 한 끼니를 때워야 하는 고달픈 시간들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식품의 변화와 오염
우리가 쌀밥을 충분히 먹게 되면서 ‘쌀눈 떨어진다. 쌀 빡빡 씻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쌀눈을 안 먹으면 각기병에 걸린다고 했고 쌀뜨물을 받아 된장국을 끓여먹기도 했었다.
우리가 지금 그토록 고슬고슬하고 맛있게 느끼는 밥은 모든 생명력과 영양이 사라진 것들이며 우리는 모두 잠재적 각기병을 앓고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지금 고기를 먹으며 입에서 살살 녹는 그 기름진 고기의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그 옛날에 풀을 뜯어먹고 자란 소고기는 국을 끓이면 누런 기름이 떴었고 고기는 질겨 그들의 근육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요즘에 맛있다고 하는 꽃등심, 안심, 차돌백이라고 하는 것들은 곡물 사료를 먹이고 밀집된 사육환경 속에 운동량을 제한하여 만들어낸 기름 덩어리의 고기일 뿐만 아니라 성장 촉진제와 호르몬들이 넘쳐나는 고기가 되었다.
전 세계의 육식의 환경파괴는 날로 심각해져 지구의 허파장치라고 하는 아마존 열대우림의 심각한 훼손을 가져왔다. 사육되는 고기들이 뿜어내는 메탄가스와 노폐물들은 공기와 물과 땅을 오염시키고 그들은 전 세계 곡물 생산량의 50%를 먹어치우고 있다.
우리는 지금 햄버거 하나를 먹으며 내 선택의 자유를 경험할지 모르지만 그 햄버거 하나는 아마존 열대우림이 작은 부엌 크기만큼 베어진 결과이고 10억 인구의 기아를 해결할 수 있는 식량을 먹어치운 대가이다.
우리가 지금 먹는 식품들은 가공기술이 발달하고 유통기간이 늘어나면서 소비자들의 화려한 욕구를 채워주기라도 하듯이 각종 발색제와 향료, 방부제와 온갖 화학물질들이 넘쳐나는 식품들이 되어 버렸다.
식품첨가물의 경우 정부는 모두 동물실험 결과 안정성을 확인해주고 있지만, 화학첨가물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의 생명활동과는 하등의 관련이 없는 것들이며 인체 내에서 어떤 문제가 일어날 수 있는지에 대한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답할 수 없는 실정이다.
농약과 화학비료를 사요하고 시설재배를 통해 키워진 야채와 과일의 비타민, 미네랄의 함량도 80년대에 비해 반 이하로 줄어들었다는 보고도 있으며, 많은 양을 수입에 의존하고 있는 콩과 옥수수, 감자는 유전자 조작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지목하고 있다.
유전자 조작식품들을 개발하는 다국적 기업들은 식량난의 해결과 영양의 개선, 환경문제의 해결을 위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음을 쉽게 알 수 있다.
유전자 조작이라고 하는 것은 단백질의 변형을 일으켜 신생물질의 탄생을 의미하며 이는 면역체계를 교란시킬 가능성을 충분히 내포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종의 다양성과 환경을 파괴하고 다국적 농업기업의 식량독점과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예전과 같은 것을 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이는 완전한 착각이며 우리는 아주 낯선 음식들을 먹고 있는 셈이다.
음식이 가지는 사회, 문화적 기능
예로부터 음식은 손끝 맛이라고 했고 아이들은 엄마의 입김으로 큰다고 했다.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지어준 옷을 입으며 아이들은 자신이 사랑받는 존재임을 알았다. 부모가 해준 밥을 먹고 자란 아이들은 정서적으로 안정된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상대의 정성과 사랑을 느끼고 온전한 생명으로 거듭 나아간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엄마의 정성에 감사하고 아빠의 수고에 감사하며 농부들과 뭇 사람들의 노고에 감사한다. 더 나아가 뭇 생명들과 땅과 해와 바람과 비에 감사한다. 그렇게 밥은 사람과 사람이, 사람과 자연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기능을 지니고 있다. 밥을 먹으며 우리는 사람과 자연의 뭇 생명들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고 있음을 자각한다.
음식은 단순히 영양을 보충하는 수단으로서 그치지 않으며 다양한 음식의 맛과 향과 질감을 기억하고 훈련하며 생명의 다양성을 배워간다. 사람들은 밥을 먹으며 사람의 정성과 사랑을 담고 사람과 생명체들과의 네트워크에 눈뜨게 된다.
전통적 식사에 대한 편견과 상업적 논리
우리는 밥을 먹으며 ‘밥에는 영양가가 부족하다, 밥은 남기고 고기는 더 먹어라, 맛있고 영양가 있는 반찬은 더 먹어라,’라고 말하고 있으며, 밥은 먹기 불편하니까 일품요리나 서구적로 식생활을 개선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못 먹고 없이 살았던 시절 그렇게도 원했던 밥은 이제 영양가 하나 없는 살만 찌게 하는 탄수화물 덩어리 식품으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늘 무언가가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영양학자들이 권하는 칼로리 권장량에도 맞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내가 늘 먹고 있는 밥이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한 말하거나 말하지 않거나 그 밥을 먹고 자란 아이들과 가족 또한 자신도 늘 부족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된다. 밥은 엄마의 정성과 사랑과 가마와 기도의 마음이 담기는 곳이다. 그러나 이미 밥은ㅇ 영양가 별로 없는 형편없는 식품으로 전락되었고 우리는 그런 밥을 먹으며 우리의 생명이 온전할 리는 없어진다.
늘 부족하다고 생각하거나 엄마가 차려준 정성어린 밥상을 먹지 못하고 자란 아이들은 밥을 먹으며 자신이 사랑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아이들은 커서 음식을 좋아하는 아이라면 폭식증에 시달리게 되고 음식을 싫어하는 아이들은 남성편력, 여성편력 증상을 보이기도 한다. 누구를 만나도 사람에 대한 만족이 없고 자신의 마음은 늘 채워지지 않아 허전하게 된다.
그러나 더 무서운 일은 자신의 삶이 늘 부족하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갈증은 끝없이 이어지고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자기 것을 채우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비행과 폭력에 빠지는 것도 그 곳에서는 자기를 인정해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깃집에 가서 고기 먼저 먹고 밥과 냉면은 나중에 먹는다. 그리고 밥은 남기라고 말한다. 이는 밥상위의 패권주의다. 밥상에 고기가 귀중하면 밥도 귀중하고 반찬도 귀중하다. 성인들은 귀한 것을 보고도 귀하다고 말하지 말라고 했다. 사람의 마음에 훔치고 싶은 도적심이 생기는 것을 경고했던 것이다.
우리의 행복은 누군가의 고통과 연결되어 있다. 1등 하는 아이의 행복에는 2등하고 꼴등 하는 아이의 아픔이 있다. 내가 내 돈 주고 사먹은 수입음식들과 에너지들은 국제시장의 곡식과 에너지 가격을 올리며 제3세계 누군가는 비싸서 사먹을 수 없는 지경을 만들 수도 있는 일이다.
나의 삶이 귀중하면 너의 삶도 귀중하고 너의 행복 없이 나의 행복은 없다. 정부는 핸드폰, 자동차, 컴퓨터를 팔아 국제시장에서 값싼 곡식을 사먹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식량이 지금과 같이 낮은 가격을 유지해주리라는 보장은 없다. 지금도 석유값은 폭등하고 있고 석유 때문에 전쟁은 일어났다.
인생의 자기성취가 소중한 만큼 삶의 기본이 되는 의식주의 자립적 해결이 중요하고 산업의 발달이 중요한 것이라면 농업은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것으로 중요하다. 평생 먹어야 하는 밥을 누가 대신 해결해주었으면 하는 것도 생명의 이치는 아니며 농업은 희생되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것도 누군가의 이득을 위한 패권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지금 혼자 잘 먹고 잘 살겠다고 하는 우리가 찾고 있는 행복이라고 하는 것은 영원하지 않다. 우리의 삶은 진주목걸이와 같이 모두 연결되어 있어 알 하나만 빠지면 더 이상 목걸이로서 그 기능을 할 수 없듯이 생영의 고리, 연관적 관계를 떠나 살 수 없는 이치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밥은 빨리 먹어치우고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우리의 음식 문화 속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는 빠름의 논리 또한 누군가의 이득을 위해 존재하는 상업적 논리이며 죽임의 논리이다. 노동자가 일을 빨리하면 사용자는 득을 본다. 며느리가 일을 빨리하면 시어머니가 득을 본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느리게 사는 사람들을 보고 그렇게 사니까 평생 남의 살이를 한다는 둥, 그것밖에 안 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해왔다.
이태리를 중심으로 유럽 전역에 일어나고 있는 슬로우푸드 운동은 단순히 햄버거 먹지 말자의 운동에 끝나지 않는다. 화덕에 원하는 피자 토핑을 얹고 즉석에서 구워내어 온 식구가 함께 나누어 먹는 축제의 전통적 식사를 지키고자 하는 운동일 뿐만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등 사회 곳곳에 스며있는 빠름의 논리를 극복하자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거칠게 몰아 쉬어온 숨을 천천히 고를 필요가 있게 되었다.
밥상머리 공부: 감사, 겸손, 기도, 그리고 생명에 대한 연민
예전에 조상들은 밥상머리에서 교육이 끝난다고 했었다. 우리는 밥을 먹으며 엄마와 아빠와 농부들과 자연의 은혜에 감사한다. 결국 감사한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교육의 시작이며 끝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좋은 것만 골라먹으려고 해서 그럴 수 없는 세상, 내 자식만 잘 키워보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온통 식품은 오염되어 가고 있고 우리는 엄마와 식당 아줌마가 차려준 음식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으며 우리는 시장에 나와 있는 것들만 사먹을 수 있다.
내 자식 잘 키워보려고 좋은 것 골라 먹이고 좋은 것 입히려고 하지만 온통 아이들은 인스턴트, 패스트푸드에 둘러싸여 살아가며, 생명적 보살핌 속에서 벗어나 경쟁에서 살아남기만을 요구받는 우리 아이들이 겪고 있는 심리적 갈등과 불안은 아이들의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아무리 엄마가 정성껏 음식을 해서 먹인다고 해도 농부들이 정성껏 농사를 지어주셔야 안전하고 좋은 음식으로 우리는 살아갈 수 있고, 날이 흐리지 않고 바람이 적당히 불어주고 비가 적당히 와주고 땅이 가물지 않아야 곡식은 잘 여물어간다.
나 하나, 어느 한 사람의 노력만으로 잘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미 우리들의 어머니들은 내 마음과 의지대로 내 자식을 잘 키울 수 없고 인간의 뜻만으로 농사를 잘 지을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옛날의 엄마들은 음식을 먹을 때도 고시레를 하고 먹었고 여린 생명인 우리들의 아이들이 무탈하며 잘 크게 해달라고 열 살까지 수수 팥단지를 해주며 간절히 기도했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생명과 진리에 대해 깨닫는다는 것은 결국 모든 생명과 생명 아닌 것들에 대한 끝없는 감사의 마음과 인간의 능력의 부족함을 알고 한없이 낮아지는 겸손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웃들과 사람들, 해와 달에게, 나무와 새들에게도 경배의 마음으로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것일 것이다. 예로부터 전 세계적으로 자연의 품속에 있었던 인류는 의례와 의식을 통해 인간과 자연과 우주만물의 공명의 시간을 가졌다.
이제 문명의 대전환을 예고하는 21세기는 인류의 삶이 좀 더 겸손해지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는 삶을 통해 근원적으로 행복과 마주하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다.
경쟁과 분열의 시대! 생명적 무지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에 대한 생명에 대한 깊은 연민만이 우리를 상생과 공존의 시대, 화합과 평화의 시대로 인도해 주리라 믿는다.
현대인의 생활 습관병과 감사의 마음
현대인이 앓고 있는 대부분의 질병들은 세균에 감염되는 급성질환이 아니며 오랜 시간동안 잘못된 생활습관에 의해 야기된 생활습관 병이다. 사람들은 질병이 어느 날 찾아온 하느님의 징벌처럼 느끼기도 하며 귀신과 마귀의 장난으로 여기기도 했었다. 오늘날에 와서도 사람들은 먹고 살만하면 병이 들었다고 원망의 마음으로 말한다.
하지만 결국 질병은 오랜 세월에 걸쳐 발생한 생활습관 병이며 누구나 잘못된 생활습관을 통해 질병과 죽음에 이를 수 있는 문제다.
습관은 제 2의 천성이라고 했다. 타고난 천성을 바꾸기 어렵듯 습관을 바꾼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생활습관을 생각하면 술 먹지 말고 담배 피우지 말고 운동하는 것들을 생각하지만 생활습관이라고 하는 것은 매일매일 반복하는 행위를 말하며 거기에는 먹는 습관, 자는 습관, 배변하는 습관, 행동하는 습관, 숨 쉬는 습관 ,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마음 쓰는 습관들이 있다. 결국 우리는 자신의 잘못된 습관을 반성하고 한 가지씩 바꾸어 나가며 좀 더 건강하고 새로운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질병은 하나의 메시지다. 질병은 더 이상 이대로 살아가면 큰일 나니까 지금 당장 먹을 것 바꾸고 마음 바꾸고 모든 것을 바꾸라는 친절한 메시지다.
질병을 통해 감사해야 한다.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 상황은 지금보다 더 나빠졌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은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이다. 내가 아무거나 막 먹고 난 자식이고 남편이랑 싸우며 시어머니 미워하며 난 자식이 우리의 아이들이라면 태어난 것이 기적이고 팔다리 병신 아닌 것이 기적인 것이다. 우리의 생명적 무지를 안다면 우리는 참회하며 그 안에 감사의 마음이 넘쳐난다.
그렇게 우리는 감사한 마음을 통해 과거를 원망하지도, 거기에 매여 있지도 않으며 미래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질병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도 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것은 기적이며 우리는 그곳에서 만족과 감사를 통해 기쁨과 평화를 얻고 행복한 삶으로 나아간다.
자연의 심성을 따라 생명에 눈뜨다
자연의 심성을 따라 우리는 생명에 눈뜬다. 생명적 신뢰 없이 자연의 심성을 말할 수 없다. 생명은 타고난 생명력, 기운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이 될 수 있는지와 관련된 가능성은 그 안에 모두 내재되어 있다.
생명은 유전적 지도를 따라 그 안에서 그려지는 그림과도 같다. 무엇이, 어떤 것이 발현될지는 잘 모른다. 세포의 유전자에는 수천 년의 조상들의 역사와 경험과 지혜가 축적되어 있다. 그들의 생각과 경험과 의식은 모두 지금 이어지고 있다.
콩이 팥이 되지도 않고 팥이 콩이 되지도 않는다. 콩은 심어서 또다시 수확을 통해 콩으로 거듭나고 콩이다. 우리는 생명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자연(自然)이라고 하는 말이 스스로 그러한 것임을 말하듯, 생명적 인정과 신뢰 없이 생명은 커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생명력을 가지고 태어난다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그 안에 내재된 힘이 있고 그것은 스스로를 치유하며 돌보고 잘 커갈 수 있다.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나와서 성장하고 쇠약해져 사멸하며 그 안에 생명력을 가지고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하고 발전하는 것을 말한다. 생명과 자연이라고 하는 것은 내부적 힘에 의해 변화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믿을 필요가 있다. 생명력이 없이 태어나는 사람은 없으며 그 생명력은 인생 전체를 이어가며 치유하고 변화시켜간다.
세 번째로 생명은 모두가 상호의존적으로 관계를 맺고 있으며 그 관계를 떠나서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연관적 존재라는 것이다. 아무리 씨앗의 생명력이 있어도 땅에 심고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해가 비추어 줘야만 씨앗은 뿌리를 내리고 줄기가 자라고 가지가 뻗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는다. 씨앗은 해와 바람과 비와 땅과 관계를 맺으며 생명으로서 성장하고 온전해지는 것이다. 너 없이는 내가 없는 상호의존적, 연관적 관계로 생명은 자신의 의미를 갖춘다.
네 번째로 생명이 관계를 맺는다고 하는 것은 다만 바램 없이, 기대 없이, 욕심 없이 준다는 것이다. 해가 씨앗의 싹을 틔울 때, 씨앗에게 “너는 나에게 무엇을 해줄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밥이 내가 되고 네가 내가 되고 자연이 내가 되어 모든 만물이 한 몸인데, 손이 아픈 허리를 두들겨 준다고 한들 손이 허리한테 “너는 나에게 뭐해줄래?”라고 말하지 않는다.
다만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아무런 욕심 없이, 바램 없이, 왼 손이 하는 일을 오른 손이 알 수 없을 정도로 한다는 것이고, 안 아플 때까지 두들겨 주고 가렵지 않을 때까지 긁어주듯이 끝까지 한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늘상 하는 ‘나는 하느라고 했다’는 말은 얼핏 보면 맞는 말 같지만 이는 기대와 욕심을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생명적 이치의 말은 아니다.
다섯 번째로 자연의 은혜 속에 자란 생명들은 모두다 제각기 제 모습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노지에서 자란 채소와 과일들은 큰 놈도 있고 작은 놈도 있고 못난 놈도 있고 잘난 놈도 있고 맛이 있는 놈도 있고 만시 덜한 놈도 있다. 그것은 하등의 문제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잘난 것은 잘난 대로 먹고 못난 놈은 못난 대로 먹고 맛이 있으면 맛이 있는 대로 먹고 맛이 없으면 맛이 없는 대로 먹으며 타박 없이, 불만 없이 그냥 먹었다는 것이다.
생명의 중요한 특징 중의 하나는 다양성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다만 통제와 관리를 위해 불편한 가치일 뿐이지, 다양성이라고 하는 것이 잘못이거나 문제는 아니다. 뿐만 아니라 다양성이 사라진 세상은 더 이상 생명이라 할 수 없다.
여섯 번째로 생명은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이다. 큰 목소리에 우리는 깜짝 놀란다. 거친 행동에 그릇이 깨지고 잽싼 행동에 발밑에 깔리는 생명이 잇다. 갓 태어난 아이의 생명은 부드러운 엄마의 목소리와 섬세하고 연한 손길로 키워진다. 생명을 키우는 시간은 번거롭고 힘든 것이 아니라 부드러운 손길만이 생명 살림의 길임을 알려주는 시간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은 부드럽고 연한 것이다. 노자는 부드럽고 연한 것은 삶의 무리이고 강하고 센 것은 죽음의 무리라고 했다. 생명은 서로 삼가고 조심할 때 살림의 무리 속에 있게 된다.
자연의 심성의 마지막은 생명의 순환성이다. 강아지 똥이 민들레의 밥이 되듯 모든 생명은 누군가의 밥으로 돌아간다. 우리는 자연이 준 음식과 물과 공기를 마시고 살아가며 그들의 밥으로 돌아가야 한다. 누군가의 쓰임이 되지 않는 생명도 이미 생명의 이치를 벗어난다.
우리가 잠시 쓰고 가는 것들이나 우리가 그렇게 갖고 싶어 집착하는 것들은 모두 돌아가는 과정에 잠시 머무는 것들 중에 하나이며, 우리가 낳은 자식조차도 그들은 해와 바람과 땅의 자식이며 자연의 아들과 딸들이다.
잘 존재하기 위해 생명적 특성을 거스르지 않고 생명적 질서 속에 살아가는 것. 그것이 웰빙적 삶의 척도가 되어야 할 것이라고 본다. 생명력을 믿으며 상호 연관된 삶의 이치를 깨닫고 다양성을 불편해하거나 의심하지 않고 기대와 욕심을 내려놓으며 오늘의 위치에서 자신을 바라보며 살아가는 것. 온전하게 만족하며 온전하게 감사하고 온전하게 어울려 살아가는 것. 그것은 물질적 가치와 정신적 풍요의 문제를 상반된 문제로 여기는 이원론적인 사고방식의 해제를 의미하기도 한다.
정신없이 경제적 부와 물질적 가치를 쫓다가 이제는 육체적 건강과 정서적 여유와 만족도 중요하다고 여기는 삶의 자세는 근본적인 의식의 전환이라기보다는 끝없는 인간의 욕망 실현의 한 과정으로서 밖에는 이해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몸과 마음은 이미 둘이 아니다. 정신적 가치에 대한 갈망이나 끝없는 지적 욕구나 건강한 육체를 갖기 위한 좋은 음식, 좋은 먹을거리, 좋은 환경 등을 고려하는 것은 모두 몸과 마음, 물질과 정신에 대한 집착 그 이상이 아닐 수 있다. 오늘날 웰빙의 열풍은 육체와 정신에 대한 한없는 집착 그 이상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한다. 그것은 돈일 수도 있으며, 건강일 수도 있으며 명예와 권위의 회복일 수도 있고, 지적 욕구의 충족을 통해 행복감을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행복하다고 이야기 하는 것에는 주관적이며 자의적인 부분이 있지만, 행복에 이르는 방법에는 원하는 것을 모두 갖는 방법과 욕구의 양을 조절하며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 있다. 사람들의 욕망은 끝없이 이어진다. 사람들은 제 뜻대로 모든 일들이 되기를 바라고 기대와 욕심은 더 큰 욕망을 낳으며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인생의 일들은 뜻하는 대로 되는 것만은 아니며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가지며 행복에 이룰 수 없다는 것은 조금만 자신의 삶을 돌아보다오 알 수 있는 일이다.
생명의 질서에서 벗어나는 가장 큰 이유는 인간의 끝없는 욕망을 조절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욕구제어의 실패는 환경의 파괴와 생명 경외의 실종, 인간성 상실과 공동체의 붕괴로 이어지며 더 큰 욕망의 수레를 굴리고 있다. 욕구의 양을 조절하기 위해서는 과거에 대한 반성과 현재에 대한 만족과 감사의 마음이 필요하다.
과거에 잘못 먹고 싸우고 미워하고 잘못 살아온 무지의 세월을 떠올리면 지금의 상황은 더 나빠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오늘도 살아 있고 분명 살아있는 오늘의 삶은 기적과도 같은 것이다. 참회와 반성은 생명으로서 온전하게 거듭나는 길이며 만족과 행복에 이르는 길이다.
밥을 통한 생명적 각성
우리는 자연적인 먹을거리를 통해 생명을 믿고 신뢰하며 생명의 네트워크에 대해 자각한다. 또한 우리는 밥을 먹으며 사람, 자연, 우주와의 교감의 시간을 가지며 나의 생명과 뭇 생명의 소중함에 대해 구체적 이해를 해간다.
농업이 안정되어야 사회가 안정되듯 밥을 해 먹어야 삶이 안정된다. 먹고 입고 자는 것을 스스로 해결하며 삶의 기본에 눈 뜨는 것은 생명적 삶을 위한 초석이다.
자신의 먹을거리에 대한 관심은 자립적 삶의 기초이며 생명에 대한 이해와 발견의 시작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