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임"이라는 단어에 대해 아주 각별한(?) 의미를 두고 계신 분들이 내 주변엔 많다. 그래서 얼마전부터는 도대체 "모임"이라는 사전적 의미와 성경적으로 합당한 표현인지, 또는 의미있는 것인지가 궁금했다.
때로는 20년 세월의 청년기를 몽땅, 때로는 30년, 40년, 한 평생을 더불어 하셨다는데, 그에 비하면 시쳇말로 나는 그저 새 발에 피지 않는가?
그래서 "모임"이란 단어를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께서도 지식의 근본, 그러니까, "back to the basic"라는 생각으로 근본으로, 처음부터, 초보적 지식부터 다시 점검해보기로 하자.
우선, 모임이란 단어를 인터넷 검색란에 치게 되면, 처음 나오는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모임 1[명사] 어떤 목적 아래 여러 사람이 모이는 일. 모임 2[명사] [북한어, 수학] ‘집합01(集合)’의 북한어. 모임 집합의 북한말
다음은 백과사전적 의미가 나오는데, 느닷없이 이스라엘의 키부츠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오래 전 교과서에서나 배웠던 그 키부츠가 튀어 나온 것이다. 조금 내용이 많아 지겨울지라도, 함께 한 번 쯤 읽어 보기로 하자.
(히)qibbutz ('모임' 또는 '공동체'라는 뜻). 복수형은 kibbutzim. 이스라엘의 집단거주지. 주민 대부분이 농업에 종사하지만 때로 공업분야에서도 일한다. 재산은 모두가 공유하는데 주민들의 의식주와 복지·의료 활동 등에 쓰이고 남은 재산은 키부츠에 재투자된다. 성인들은 개인 숙소에서 생활하지만 어린이들은 대개 집단 양육된다. 요리와 식사도 공동으로 한다. 1948년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 키부츠는 개인적인 생활과 사적인 소유에 더 많은 자유를 주는 방향으로 운영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유대 국가기금으로부터 임차한 땅에 세워진 키부츠는 주 1회 모든 구성원이 모인 가운데 전체회의를 개최하여 정책을 결정하고 행정요원을 선출한다. 최초의 키부츠는 1909년 팔레스타인의 데가니아에 세워졌다.
이듬해에 또다른 키부츠가 설립되어, 현재 이스라엘에는 200개 이상의 키부츠에 10만 명 이상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에 세워진 최초의 키부츠는 실제로는 케부조트(kevuzot)였는데 점차 큰 규모의 키부츠로 발전했다.
키부츠는 팔레스타인에서 유대인의 새로운 거주지를 개척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민주적이고 평등한 운영방식을 통해 초기 이스라엘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지금도 이스라엘의 경제와 정치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으며, 전체인구 가운데 상대적으로 적은 부분을 차지하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키부츠에 대한 또 다른 해설, 키부츠(Kibbutz)는 이스라엘의 집단 공동체이다. 이 운동은 사회주의와 시오니즘을 결합하여 노동 시오니즘의 형태로 되었으며 독립적인 농업이 실질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이뤄졌다. 공동생활의 필요성때문에 또 이데올리기적인 영감때문에 키부츠의 구성원들은 순수한 공동생활 양태를 만들었고 이는 전세계의 관심을 받았다. 원본 주소 ‘http://ko.wikipedia.org/wiki/%ED%82%A4%EB%B6%80%EC%B8%A0’ 분류: 이스라엘(위키백과 ―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살펴 본 바와 같이 위 두가지의 키부츠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었다.
우리가 상고 해 볼 일이다.
또 다른 나머지 용어 해설로는 수학 개념의 집합론적 모임이다. 간략하게 보자면,
모임 (집합론) 수학의 집합론 및 이를 기초로 하는 여러 분야에서, 모임(class)은 특정한 성질을 만족하는 집합 (혹은 그 외의 수학적 대상)을 모은 것을 말한다. 모임 중에서는 집합인 것도 있고 집합이 아닌 것도 있는데, 전자의 예로는 자연수 집합의 모든 부분집합들의 모임이 있고, 후자의 예로는 모든 서수들의 모임이나 모든 집합들의 모임이 있다. 이와 같이 집합이 아닌 모임을 진모임(proper class)이라고 한다.
일상적으로 살펴보지 않았던 의미라, 무슨 내용인지 휘둥그레 지셨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얘기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상고가 없이는 분별력도 없다. 무조건 따라 하고, 본인의 의견 없이 무조건이 된다면, 내 인생의 주체는 없어지는 것이다.
이 지면에서 교제를 하시는 분들은 대부분 구원에 대한 확신이 있고, 거듭난 분들이다. 우리는 구원의 은혜를 받았을 때, 전도자가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었는가? 아니면, 설교자가 우리에게 구원을 주었는가?
우리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요, 성령으로 된 것으로, 각인에게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였고, 각인에게 예수님께서 들어 오신 것이고, 각인에게 빛으로 온 것이지 않는가?
그런데 주변의 흘러 가는 상황을 보면, 그렇게 귀하게 은혜로 받은 성령을, 내 안의 성령은 무시하고, 내 안의 예수님은 팽개쳐버리고, 무조건 "모임"이라는 단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
우리가 구원을 받았을 때 그 기쁨, 설레임, 그 은혜, 그것이 모임이 우리에게 주었는가? 난 그 은혜를 하나님으로 부터 받았고, 난 그 넘치는 사랑을 성령으로 부터 받았다.
설교자가 한 말이 있다. 어느 전도 집회를 마치고 나오는데, 한 여인이 황급히 달려와 "감사합니다. 설교자님 말씀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너무도 감사한 표정으로 거듭 인사말을 하였는데, 그 설교자의 말씀이, 자신은 그저 성경의 말씀을 전달 하였을 뿐이니, 하나님께 감사하라고..
우리는 각자 은혜로 받은 이 성령의 역사하심을, 내 가슴 속에서 아직도 간절히 각자, 각인에게 직접적으로 살고 대화 하고 싶어하시는 성령을 무시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처음 받은 첫 사랑은 성령으로 인해 받았음에도 그 사랑은 뒷전으로 밀어 놓고 다른 곳을 향해 자신은 달려 갔었고, 지금도 달려 가고 있는 건 아닌지?
난 성경에서 아주 무서운 말을 보았다. 예수님께서 세상 죄를 다 지고 가셨는데, 딱 한 가지 죄, 용서 받지 못할 죄, 용서 될 수 없는 죄가 있다는 사실!
바로 성령을 방해하는 일이다. 아주 무서운 얘기이고, 괴변일지 모르지만, 내 마음에 들어 오신 성령을 무시하고, 다른 쪽으로만 마음을 계속해서 외도한다면, 과연 성령께서 당신을 어떻게 판단하시겠는가?
내 마음에 이미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고, 예수님께서 더불어 살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영이 살아 계신 성전이지 않는가? 내 안에 성전이 있지 않는가?
우리는 성경을 읽고 성경을 상고 한다 하지만, 아직도 눈에서 수건을 내리지 못한 건 아닌지.. 참으로 성령께 기도 드려 이 눈에 가리워진 이 수건을 내려 주시길, 부디 벗겨 주시길 간절히 기도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각인이 주님으로 부터 은혜를 받은 성도이고, 그 성도의 모임은 교회이고, 난 성경 어디에도 구원 받은 거룩한 성도들의 집합체가 "모임"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을 아직 보지 못했다. 혹여, 성경에서 이런 내용을 발견하신 분이 계시다면, 댓글로 저의 무지함을 깨우쳐 주시길 소망합니다.
우리 안에 들어 와 계신 주님을 더 이상 외롭게 홀로 두지 말고 더불어 그 분과 매일 매일 말로만의 동행이 아니고, 입술로만의 동행이 아닌, 진짜 진짜 예수님께서 살고 계신 우리 거듭난 성도님이시길, 정말 정말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드리는 아침이다. |
|
첫댓글 이별여행님 의 예리한 판단에 감사드립니다
성경에도 없는 사람말만 듣고 따라가는 무지한 사람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그리스도 심판대 앞에 섰을때 슬피 울며 후회 할것 입니다
지금까지 아무도 '모임'이란 글자에 대하여 곱씹어 본 사람은 없었고 집회 중에 한 사람의 질문을 받은 경험이 있습니다. 자매의 지적하신 대로 모임은 집합 단체 공동체를 의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
저는 이 단어를 교제라는 의미로 그리고 교회라는 순수한 우리말로 이해하고 있습니다.정말로 아름다운 단어이지요. 말씀때문에 성령의 역사로 모여지는 단체, 그 어떤 힘이나 조직으로, 아니면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단체 오직 하나님을 섬기기위한 구성체이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회단체와 또같은 집합체로 이해될 수 밖에 없습니다. 성령께서 모이도록 역사하신 그 모임을 말합니다.고전11:13, 34,살후2:1참조바랍니다. 샬롬
아멘! 이별여행님의 글에 참으로 아멘입니다.
성경에서 읽은 마리아와 마르다의 이야기는 옛날에만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 이야기의 핵심은 주님을 위하고 주님을 섬기는 일을 하느라 정작 주님의 원함을 버리는 것이고 주님을 섬기느라 정작 주님을 외면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이름만을 붙인 그 모임(집단)을 위하고 그 집단이 추구하는 일을 하느라 정작 주님을 외면하는 오늘날의 실태를 보면서 안타까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우리는 다시 주님 앞으로 나아가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리고 마리아처럼 그분 앞에서 그분과만 참된 교제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샬롬!
모임이라는 순수한 뜻은 몇 사람이 모이는 것 입니다. 우리만의 단어가 아닙니다. 계모임...몇 사람이 모이면 단순한 모임 또는 공동체(공통의 목적을 위한 뜻이 포함되면) 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 목적의식을 가졌으니 모임이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아직도 눈에서 수건을 내리지 못한 건 아닌지...참으로 성령께 기도 드려 이 눈에 가리워진 이 수건을 내려 주시길, 부디 벗겨 주시길 간절히 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모임은 교회입니다. 거듭난 성도들의 집합체가 교회일진대...교회라고 일컬어야지요. 임마누엘교회...
모임 속에 살면서도 그 뜻이 무엇인지 조차 알지 못하고 지나온 30여년,맹인으로 살아온 지난 날들! 돌이켜보면 참으로 어리석음의 극치였다. 오늘 처음으로 모임이란 낱말을 접하고 여러가지 생각을 갖게 한다. 모임의 중심에 그리스도가 없고 일이나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적 단체에 지나지 않는다. 주님이 경영하는 모임이 아니면 한낱 계모임이나 무엇이 다르겠는가? 주님의 성령이 이끄시는 모임. 성도들의 살아있는 교제가 있는 곳, 말씀이 풍성하여 하나님의 말씀이 달음질 하는 곳,피차 사랑을 나누는 향기나는 제사가 있는 곳, 그곳이 정말 그립다.
성도들을 모이게 하는 것도 성령이시요,
성도들을 하나로 묶어 주시는 이도 성령이십니다.
사람이 인위적으로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하여
성령이 함께하는 "교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더불어 동행하지 않는 모임이라면,
그건 사교적인 모임일 뿐입니다.
각자의 마음 속에 성령은 없고
오로지 땅에 일만 생각하고
그 마음 속에 성령이 함께 호흡하지 않을진대,
육신의 몸만 모인다 하여 그게 무슨 유익이 있겠습니까?
우리를 키우고 거두시는 이도 주님이듯이
우리들 모이게 하고 교제케 하시는 분도,
인간의 인위적 계획과 전략이 아닌
성령의 역사하심 이어야합니다.
절대로 혼돈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모임이란 그 글자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내용입니다. 자기 유익을 위하여 모이는 모임은 사회 단체가 되지만 주의 성령을 받은 지체들이 그의 뜻을 따라 모이면 교회가 되고 교제가 됩니다. 돈을 목적하면 계모임이 되고 산을 위해 모이면 산악회가 되고 사회활동과 자기의 권익을 위해모이면 사회단체가 됩니다. 모양은 주님을 위해 모이는 교회라고 하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이 아니면 사단의 회가 되고 어떤 한 사람의 지시 명령을 받드는 모임이면 사교집단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