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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종하(1926~2000)
변종하는 70년대 들어와 ‘돈키호테’와 ‘돈키호테 이후’라는 제목의 연작을 발표하면서 왕성한 작품활동을 했다.
70년대 후반에는 별과 나무, 달,새 등 자연을 주제로 한 해학적 그림을 선보여 왔다.
요철기법의 화면에 거즈를 씌워 마티에르의 효과를 더욱 두드러지게 만든 독특한 기법으로 눈길을 끌었다.
밤의새
새 , (45 * 37 캔버스에 혼합재료)
변종하의 작품은 '서정적 풍경'이라는 자연주의적 풍경으로 대변된다.
자연적인 느낌을 좋아해서 변종하의 작품들에서 만날수 있는
꽃과 새, 나무 그리고 사람에 대한 따스한 느낌들이 들어있다.
변종하의 작품에는 자연과 자연과 떨어져살수없는 우리네 삶이 녹아있다.
1926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하였다. 시적인 정서의 한국적인 이미지 결합을 추구해온 화가로 평가된다. 8·15광복 직전 만주에 있는 신경미술원에서 공부하였고 8·15광복 후에는 귀국하여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서 4~7회 수상하였다. 특히 1955년에는 부통령상을 수상하였으며, 홍익대학교·수도여자사범대학·서울대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프랑스에 유학하면서 재료에 대해 완벽을 추구하는 러시아 화가들에게 큰 감명을 받았으며, 프랑스 미술비평가이며 시인인 르네 드뤼앵(Ren Druin)을 만나 작품세계에 큰 전환을 가져왔다. 그후 런던의 쿠퍼 화랑, 파리 시립미술관 등에 초대작가로 활동하였다. 당시 작품으로 일그러진 인물상을 해학적으로 표현한 《우화》 《돈 키호테》 시리즈가 있다.
1975년 현대화랑에서 전시회를 열고 《어떤 탄생》이라는 주제로 민화·야생초·십장생 등과 새를 소재로 한 작품을 시리즈로 발표하였다. 요철 위에 마포를 씌우고 색을 칠하는 새로운 기법을 시도하였으며, 한국적 이미지를 새롭게 탐구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 밖에 《감자꽃과 태초의 새》 등이 있다.
1987년 뇌경색으로 쓰러진 후에도 작품활동을 계속해 오다가 2000년 7월 29일 사망하였다.
변종하 화백의 예술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두 가지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내용적인 측면과 기법적인 측면이다. 어떤 화가의 작품이든 내용과 기법을 떠난 것이 있을 수 없다고 한다면 변종하 화백의 예술을 이야기하는데 굳이 이점을 부각시킨다는 것은 특별한 의미가 없다. 그럼에도 이 점을 강조하는 내면에는 보편성으로써의 내용과 기법이 일반적인 것이 아니라 변종하 화백만이 지니고 있는 내용과 기법으로써의 특수성을 말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의 특수성이란 그만이 가지고 있는 독자한 면모와 속성을 지칭하는 것으로 그것은 변종하를 변종하답게 하는 단면에 다름 아니기도 하다.
변종하 화백의 예술을 연대기적인 측면에서 점검한다면 "65년을 경계로 한 전후로 크게 나눠볼 수 있고, 전기에 있어서도 서울시대와 파리시대로 다시 세분화할 수 있으며, 후기 역시 "60년대 후반과 "70년대 그리고 투병시기인 "80년대 후반 이후로 세분해 볼 수 있다.
"50년대에 이르는 화력이란 그 나름으로 변화와 추이를 지니지 않을 수 없다. 우선 크게 단면화해 본 연대기로 보아서도 저으기 풍부한 변화적 내역을 살피기에 충분하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변종하 화백만큼 자기세계라는 방향 속에 자적해 왔고 일관해 온 작가를 만나기는 쉽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다. 예술가의 타입을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구분해 본다면, 자기세계를 부단히 심화시켜 가는 타입과 시대에 맞서 자기세계를 적절히 확대해 가는 타입으로 나눌 수 있다. 전자의 경우는 보다 자신에 충실한 편이라 할 수 있고 동시에 체질적인 면모가 강한 작가에서 찾을 수 있으며 후자의 경우는 시대적인 미의식에 편승, 실험적 의욕으로 자신을 투자해 가는 작가로서 그만큼 변화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변종하 화백은 많지 않은 전자의 대표적인 작가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만큼 각 시대에 따른 변화의 내역을 통해 그의 예술을 살핀다는 것은 커다란 의미를 지니지 못할 것 같다. 단편의 집적을 통해 전체에 이르기보다 언제나 전체라는 문맥에서 그의 작가적 면모를 떠올릴 수 있겠기 때문이다.
내용적인 측면에서 변종하 화백의 예술을 접근한다는 것은 내용을 이루는 요소와 그것이 표상하는 독특한 미의식을 동시에 파악해야 된다는 것이기도 하다. 우선 양식적인 면에서 본다면 그가 추구하고 있는 내용은 구체적인 이미지를 매개로 한 것이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매개로써 등장한다는 데서, 일반적인 양식 구분으로써 구상경향과는 그 괴를 같이 하지 않는다.여기서야말로 이미지는 독특한 표상으로써 내용을 지니는 것이 된다. 지금까지 그에게 적용되어 온 설화적 구상주의라는 수식이 반드시 적절한 것은 아니지만 편의적으로 그렇게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그의 근작 가운데는 「서정적 풍경」이란 표제의 작품이 있다. 아니 일군의 근작들이 「서정적 풍경」의 시리즈를 이루고 있다. 이 말을 조금만 바꾸면 설화적 구상이 된다.
그의 화면을 이루는 요체로써 설화란 어떤 것인가 우리는 흔히 설화라고 했을 때 이야기 속의 어떤 내용을 떠올리게 되는데, 변종하 화백의 경우, 설화는 반드시 과거의 이야기로 국한되지 않는다. 때때로 메타포로써의 현실 비판적 요소를 띨 뿐 아니라, 일반적으로 설화적 구상의 경향이 토속적인 내용으로 국한되어지는 경우에 비해 보편성을 띤 내용인 경우가 많다. 이같은 내용적 측면만 본다면, "70년대의 작품들에선 메타포로써 현실 비판적 색채의 우화가 적지 않았으며,"80년대 중반이후 근작에 이르기까지는 시원(始原)의 풍경이라고 일컬을 수 있는 보편적 정감에 그 뿌리를 둔 내용이 하나의 맥을 이루고 있는 편이다. 전자의 우화 「돈키호테 이후」는 표제 그대로 단순한 세르반테스의 번안이나 문학의 회화적 변용이 아니라 돈키호테를 계승한 또 다른 돈키호테란 의미를 띠고 있다. 즉 풍자 이후의 풍자, 비판 이후의 비판이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경우의 풍자와 비판은 바로 현실풍자와 현실비판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그것이 직설적인 방식이 아니라 대단히 은유적인 채널을 통한 것이어서 쉽게 파악되지 않는 면이 있다. 아무도 그를 시대비판의 작가로서 보려고 하지 않는 점도 이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최근작들은 보다 보편적인 정감에 문맥되어 있는 시원(始原)의 풍경이다. 아담과 이브가 등장하는 태초, 인간과 동물과 식물이 어우러져 있는 태초의 풍경들이다. 어떤 세속적 수식도 초극된 순수한 시원(始原), 강렬한 생명충동이 흘러 넘치는 그러한 세계이다. 그런 점에서 "80년대 이전의 자연대상과는 그 문맥을 달리한다. "종전의 그것들은 회화화의 대상이라는 그 대상성에 얽매어 있었다 말하자면 꽃은 꽃으로의 대상성, 새는 새로서의 대상성 같은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작품들에선 이 대상성이 부단히 지워지고 있다. 대상성이 지워진다는 것은 또 다른 표현으로 말하자면 객관화의 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이다. 객관적인 대상이 그 객관적인 상태를 벗어난다는 것은 무엇을 가리키는가 쉽게 이야기한다면 주관화이다. 꽃이나 새가 주관화된다면 의인화로써만 가능하다. 꽃이 내 자신이 되고 새가 나와 관계있는 어떤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꽃이나 새의 상태로 머물러서는 안되고 인간과 같은 감정을 지니는 것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단순히 인간의 감정을 의탁한 매개물이 아니라 바로 인간감정 그 자체로 표상되어야 한다. 그래서 꽃이나 새는 그것이 꽃이나 새라고 하는 형상을 빌리고 있기는 하나 이미 인간화된 것이 된다. 꽃가지에 두 마리의 새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이의 공간에 "사랑해요" 역시 같은 말인 "jet"aime"가 긁힌 자국으로 쓰여 있다. 새는 말로써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해요" "쥬뗌"은 사람이 나누는 사랑의 밀어다. 새의 감정이 아니라 사람의 감정이다." (미술광장 - 1994. 9월호)
세속적인 모든 수식을 극복한 순수한 평화와 사랑이 점철된 세계는 병고와 싸우면서 지순한 인간감정에 도달되고 있는 작가의 내면풍경이라 할 수 있다. 펄럭이는 망또에 몸을 의지한 채 어딘가를 노려보는 눈망울의 돈키호테는 어느덧 긴 수염의 꿈꾸는 듯한 표정을 지닌 예수 그리스도의 이미지로 바뀌어지고 있다. 그리스도의 이미지는 때때로 그의 자화상과도 겹쳐진다.
기법적인 측면에서 변종하 화백의 작품을 접근한다면 화면상에서의 여러 기법적 특징과 화면을 벗어난 매재의 확대란 두 가지 면에서 가능할 것 같다. 화면상에서의 기법적 특징은 요철의 릴리프적 효과에서 먼저 파악되어진다. 판 위에 인체적 도형을 만들고 그 위에 그저 천을 덮고는 채색을 가하는 방법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평면에 그려진 상태로써가 아니라 각인된 상태로 나타나는 특징을 준다. 이는 평면으로써의 회화가 갖는 기법의 한계를 벗어나려는 모색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회화의 평면성 극복은 회화가 아닌 어느 한계를 지향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작가는 회화를 더욱 회화이게 한다는 의미로써의 리얼리티를 강조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그려진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자체로 남으려는 회화의 자율성의 감회를 뜻하는 것이다. 회화의 자율성은 더욱 풍요로운 표현의 내면을 통해 확인된다. 바탕에 천의 올이 선명히 드러날 정도로 색채를 문지르는가 하면, 짓뭉게듯 덕지덕지 발라 올려진 안료층은 본능적이라고나 할 수 있는 회화성에 대응된다. 어떻게 보면 그의 화면에 떠오르는 일정의 표현방법과 그 지속이야말로 회화의 리얼리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우고, 긁고 뭉게고 슬슬 문지르고 다독거리는 붓자국과 그 붓자국의 행간에 숨쉬고 있는 작가의 내밀한 정감이야말로 극명하게 드러나는 회화의 리얼리티가 아닌가.
평면을 벗어난 다양한 매재의 확대는 그를 가장 기질적인 작가로서의 내면을 확인시켜 주는 일면이다. 평면의 릴리프화를 통해 드러난 그의 조각적 감각은 도화(陶畵)를 통해 다시 확인되고 있다. 이미 "80년대 초에 도화전을 가진 바 있는 그에게 최근작의 도화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면서도 근작 도화는 그 형태 감각이나 이미지의 설정이 더욱 완숙한 경지를 보여주고 있어 도화라는 쟝르가 갖는 그 본래적 향방을 뚜렷이 각인시킨 것이 되었다.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볼 수 있었던, 만들어진 도자위에 그림을 시술하는, 단순한 바탕으로써의 도자가 아니라 도자의 형태와 그 속의 이미지가 하나로 태어나는 경지를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기질적인 일면은 드로잉, 꼴라쥬, 판화와 같은 쟝르를 통해서도 확인된다. 화가로서의 기질이란 그리지 않으면 안 되는 생래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이 다양한 매재의 진폭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하고 있는 내용은 하나의 방향으로써 큰 테두리를 벗어나고 있지 않다. 그가 말하고 있는 서정적 풍경으로써의 설화적 구상이 그것이다. 물론 이 설화적 구상은 시대적 미의식을 뛰어넘는 원초적 서정으로써의 그것이다. 그 원초적 서정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한 사람의 진정한 서정 시인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드로잉
한국 서양화단의 거목 석은(石隱)변종하(卞鍾夏)옹이 지난 29일 서울대 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74세. 고인은 지병인 당뇨 때문에 1987년 뇌졸중으로 쓰러져 1년 동안 식물인간으로 지내다 극적으로 깨어나 89년 부터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임경식(62)이목화랑 대표는 "그림은 물론, 문학.음악.과학.의학 등 다방면에 걸쳐 풍부한 지식을 가졌던 분" 이라며 "병마와 싸우고 난 뒤 작업이 더욱 강렬해지고 완성도도 높아졌는데…" 라며 안타까워했다.
외아들 태호(46.성균관대 건축공학과 교수)씨는 "아버지는 항상 '마음이 기름져서는 좋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고 가르치셨다" 고 회고했다. 고인이 97년 자신의 호를 딴 비영리재단인 석은미술문화재단을 설립, 자신의 작품 1백점(한국화랑 협회 추정가격 60억원)과 부동산 등 모든 재산을 기탁한 것도 이같은 인생관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이 과정에서 가족들은 상속포기 각서까지 쓰기도 했다.
임종전 "내가 지병으로 다른 사람의 빈소를 찾지못했으니 부의금을 받지말라" 고 말할 정도로 고인은 개성이 강하고 완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딸 진(眞.51)씨는 "저의 결혼식 때 트럭 3대분의 꽃을 준비할 정도로 속은 따뜻했다" 고 회고했다.
고인의 대표작은 71년 대한미술협회전에 출품한 '돈키호테 이후-독재자' . 독재시절을 풍자한 이 작품으로 그는 전시장에서 중앙정보부로 연행돼 조사를 받았다. "독재자는 누구를 말하느냐" 는 추궁에 "박정희씨" 라고 당당하게 대답, 옥고를 치를 뻔했으나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문제로 안면이 있던 육영수 여사의 도움으로 하루만에 풀려났다.
대구 출신으로 일제의 징집을 피해 만주로 건너가 신경 미술학원을 졸업한 고인은 수도여사대(현 세종대)미술학과장을 지내다 사직하고 프랑스 소르본대학에 4년간 유학을 했다. 귀국 후 홍익대, 서울대 교수를 역임했으며 국전 부통령상.은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유족으로 부인 남정숙 여사와 1남 3녀. 사위는 김용진(사업).김도균(〃).최승민(한국해양연구소 연구원)씨. 발인은 8월 1일 오전 4시. 760-2011
조현욱.하현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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