삭막한 우리 사회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막혀 있다. 타인에 대한 신뢰에서부터 시작되는 대화. 유럽에서는 생활화 되어있는 대화문화의 배경을 통해 삶 속의 대화의 가치를 되돌아 보자. 프랑스에서 거주할 때 있었던 에피소드다. 한 한국 청년이 혼자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한 자리 건너 마주 보이는 테이블에서 한 젊은 프랑스 여성도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앉은 위치 때문에 식사 도중 자연히 서로의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청년은 시선을 어디에다 둘지 몰라 어색한 자세로 식사에만 열중하였다. 그래도 몇 번 눈이 마주치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마다 이 여성이 눈웃음과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뭔가 짧게 말을 건내기도 했다. 청년은 적이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는 콩당콩당 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간신히 식사를 끝낸 것 같다. 그녀도 디저트까지 끝냈다. 찬스를 포착한 맹수처럼 그는 일어나서 용감하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을 걸었다. “저어~ 혹시 제가 맘에 들면 저랑 데이트 하실래요?” 상대 여성은 어이가 없다는 표정에서 곧 이어 웃으며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노우했다. 여자가 내숭떨며 한 번 튕겨보는 것이라고 판단했는지 청년은 한 번 더 도전하였다. 그러자 성가신 듯 여자는 테이블에 식사비를 놓고 곧장 일어나서 나갔다. 한국청년은 조금 당황스럽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대화와 토론이 생활화 되어있는 유럽 이 에피소드는 현지 문화를 잘 몰랐던 한국인이 망신당한 이야기다. 유럽에서 이성이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온다고 자기를 좋아해서 그런 것이라고 착각해서 실수해서는 안된다. 유럽인은 대체로 타인에 대한 경계심도 거의 없고 미소를 잘 짓고 대화를 좋아한다. 요즘 내가 미국에 살면서 느끼는 것은 확실히 미국인은 유럽인에 비하여 무뚝뚝하다는 것이다. 내가 프랑스에 살 때에 동네 이웃 사람들은 지나가다가 눈빛만 마주쳐도 미소와 인사를 나누었다. 그들은 엘리베이터 안이나 심지어 일반 거리에서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 이렇게 자연스럽고 기분 좋은 대인 접촉 덕분에 유럽인들은 일상의 삶에서 상호 대화가 잘 이루어진다. 유럽인들은 미국인이나 한국인에 비하여 대인 접촉 욕구가 많고 대화를 좋아한다. 개인주의 사회에서 외로워서 말벗을 원하기 때문에 그런 것만은 아니다. 또한 그들이 특별히 누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아무튼 그들은 웬지 낯선 사람에게도 미소를 지으며 비교적 말을 잘 건넨다. 공원이나 까페에서는 괜히 말을 걸고 뭔가 대화를 나누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다. 이처럼 유럽인들의 일상적인 삶 속에는 미소와 인사가 관습화 되어있고 대화와 토론이 생활화 되어있다. 그래서 까페나 공원에서는 조잘대는 사람들이 많고 때로는 목소리를 높여 격정적인 토론을 하기도 한다. 대중이 많이 모이는 광장에서는 구경꾼들과 대화와 토론을 하는 입심 좋은 만담가도 인기가 높다. 유럽에서 철학 까페가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도 바로 대화와 토론을 좋아하는 일반 국민들이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도 적극적인 자기 의견 발표와 대화 및 토론 자세를 가장 중요하게 다룬다. 그리고 유럽 텔레비전의 토크쇼에서는 연예인들이 일정한 주제를 놓고 진지한 대화와 토론을 하는 것을 흔히 본다. 우리 나라 텔레비전처럼 연예인들이 신변잡기적인 잡답과 농담만 늘어놓는 것하고는 너무 다르다. 우리 나라 텔레비전에서 드라마가 방영 될 시간대에 유럽 텔레비전에서는 대화, 토론 프로그램이 주를 이룬다는 것은 지역간 문화적 차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유럽 대화문화의 철학적 배경 낯선 타인에게 미소를 보내며, 누구하고도 대화를 즐길 여유를 갖고 있는 유럽인들의 국민성과 문화풍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여러 각도에서의 고찰과 설명이 필요할 것이다. 이쯤에서, 유럽인의 타인에 대한 인식과 만남 및 대화 문화의 배경에 대해 사회적, 철학적인 측면에서 설명해보고자 한다. 타인에 대한 관심과 대화는 곧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이자 자기 존재성을 확인시키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대화나 토론의 상대가 누구이든지 간에 누군가를 상대한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타인에 대한 관심과 인정, 배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타인에 대한 관심과 배려는 곧 자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관심의 표출이기도 하다. 인간은 제 아무리 개인적으로 고독을 즐긴다 하더라도 고립되어서 살 수 없는 사회적 동물이다. 인간들이 모여 살다보니 개인은 타인과의 접촉과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독일의 사회학자 F.퇴니에스가 주장한 게젤 샤프트(이익사회)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기 때문에 타인의 존재는 일단 자아의 존재와 생존을 위협하는 경계의 대상이 된다. 타인과의 관계는 필연적이고, 나 자신의 존재를 위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적극적으로 대하고 처리해야 한다. 이처럼 타인은 자아를 밖으로 불러내어 그들과 만나게 한다. 타인의 입장에서 볼 때 나 자신도 타인의 입장에 놓여진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존재와 이익을 위해 남에게 해를 끼치고 상처를 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렇다고 마음의 빗장을 걸고 사회적 접촉을 거부한 채 살수는 없다. 남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나눌 것은 나누며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사회생활인 것이다. 유럽인의 활발한 대화문화는 일단 이러한 접촉, 교환, 나눔의 필요성을 인식한 데에서 출발한 것으로 보여진다.
또 다른 나를 이해하는 과정 사실 따지고 보면 유럽인이나 한국인이나 구별할 것 없이 남과 얼굴을 마주하고 진솔하게 대화하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타인은 나와 어느 정도 거리와 긴장감을 유발하는 상대로 다가온다. 타인의 의견은 나의 의견과 불일치 되기 쉽고, 타인은 결코 나 자신과 동일시 될 수 없다. 그러나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인간을 피해서 완전히 고립된 개체로서 살수 없다. 인간의 일상 삶에서 타인과의 관계성은 불가피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 자세가 요구된다. 사실상 대화를 하기 전에 타인의 존재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존재이다. 익명의 타인을 대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유럽인이나 한국인에게도 간단한 일은 아니다. 어쩌면 유럽인이 낯선 사람에게 미소를 보내고 대화를 하는 행위는 접촉과 대화를 통해서 타인과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자기 동일시의 상대를 찾는 일 일런지 모른다. 다시 말해서 타인을 자기 존재로, 안으로 불러오는 적극적인 자세일 것이다. 우리는 타인과 대화를 나누기 전에 그사람에 대해 온전히 판단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사회적 편견과 이기주의는 타인의 존재와 관계를 가로막고 왜곡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타인의 존재, 말, 행동은 낯설음과 의심 그리고 두려움 때문에 경계의 대상이 되곤 한다. 그렇다고 타인에 대한 무관심, 외면, 그리고 대화 단절은 곧 자아중심적 사고에 갇혀서 사는 고독하고 이기적인 존재의 표현일 따름이다. 물론 타인과 접촉하고 관계를 맺는다고 타인과 내 자신이 동일시 될 수는 없다. 다만 낯선 타자(他者)를 대화로 내 안으로 불러 들여와 느낄 때 나 자신은 경계하거나 두려운 상대가 없어지므로 나 자신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이렇게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이 타자성을 극복하고 자유로운 자아의 존재성을 느끼는 것이다.
신뢰가 돈독한 사회를 위해 유럽인의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대화문화는 바로 이러한 철학적 배경과 교육에서 발달되고 있다. 그리고 공공의 영역에서 대화를 통한 합리적 의사소통성이 매우 중요한 시민사회의 덕목으로 지목되고 있다. 사실상 타인을 무사무욕의 자세로 받아들이고 합리적이고 투명하게 대화를 나눈다면 타인은 이미 내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렇게 타인을 내 안으로 불러오는 방식이 하나의 사회윤리가 되어 사회에 확장된다면 사회적 연대감도 증가할 것이다.삭막한 우리 사회는 대화를 필요로 한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우리의 대화는 막혀 있다. 우리의 대화가 막힌 이유는 타인과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과 남의 존재에 대해 돌이켜 볼 삶의 여유와 지혜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 허심탄회한 대화가 있어야 조직사회가 투명해지고 사람과 사람사이의 신뢰가 회복될 것이다. 이제 나 자신부터 마음의 문을 열고 먼저 타인에게 미소를 보내고 인사를 해보자. 길거리에서도 식당에서나 엘리베이터 안이나 공중목욕탕에서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