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대의 많은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예술은 "보여주기용 예술"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종종 품게 된다.
내가 지금 느끼고 있음으로 해서 즐겁기 보다는 내가 남에게 보여줄 수 있음으로 해서 생기는 즐거움.
물론 나는 이런 즐거움이 아주 본능적인 것이고 당연하며 예술의 발전에 있어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보여주는 즐거움이 예술의 모든 즐거움을 대표하거나 혹은 제일 높은 위치에 있는 걸까?
그런 건 아니라고 여겨진다. 단지 내가 무언가를 느끼며 행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끔 주변을 의식하는 것에서 벗어나 무아지경에 들어서게되는 자체만으로도 즐거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런 행위가 계속 이어져서 점점 더 나아지고 때로는 테크닉의 벽을 깨뜨리는 자신을 발견하면서도 즐거울 수 있다.
내가 뉴욕에서 느낀 백인 예술과 흑인 예술은 형식의 아름다움과 자유의 아름다움으로 구별되어진다
한 예술 형태가 형식이나 자유쪽으로 완전히 치우칠 순 없겠으나 인간도 나르치스나 골드문트의 인간형이 있는 것처럼 예술에도 그런 편향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내가 본 백인은 종합하고 분류하고 조직하고 체계화하기 좋아하는 인종이다.
클래식 연주회에서 느낄 수 있는 분위기.
수학처럼 정확한 클래식 곡들의 연주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 연주 중에 쥐죽은 듯 고요했다가 곡과 곡 사이에 터지는 재채기 하품 헛기침 .
반대로 흑인은 어디로 튈지 모를 탄성과 생기에 찬 인종이다.
클래식 연주장에서 잘 볼 수 없는 흑인들은 돈을 낼 필요없는 뉴욕 섬머 페스티발의 축제장 곳곳에 찾아드는데 특히 클래식 재즈나 라틴 재즈가 연주되는 곳엔 항상 만원이다.
클래식과 달리 연주자들이 분위기를 타면 십 분도 되고 이십 분도 되는 곡이 어쩔 때는 단 일 분만에 끝나기도 하고, 비밥인 듯 시작된 음악이 할머니 꼬마들 마당에 뛰어 나와 흥에 겨워 덩실거리면 어느새 스윙으로 변해있다.
한국의 미국 따라 배우기에서 무언가가 소홀히되지 않았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 미국 문화의 풍성함은 흑백의 조화에 큰 연관이 있다고 생각되는데 한국인들은 흰 쪽으로만 기울어져있지는 않은가?
재즈나 탭댄스는 주변을 의식하지 않으면서 즐길 수 있고 한편으로는 남에게 보여주는 즐거움도 줄 수 있는 예술 쟝르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흑백 인종의 일백년 동안 섞임이 이러한 쟝르의 탄생을 가능하게 만들었으리라.
한국의 힙합 랩퍼들은 커다란 대형 공연장이나 녹음실에 가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뉴욕의 랩퍼들은 지하철 안에서도 학교 화장실 안에서도 옷을 사러 간 옷가게 안에서도 햄버거 가게 카운터 앞에서도 만날 수 있다.
한국 사람들은 탭댄스를 뮤지컬 무대 위에서만 이루어진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아니면 흑인들이 헐리우드의 배우로 등장 할 수 없던 4,5,60 년대의 미국 영화안에서만 볼 수 있다고 생각하는 지도.
사람들에게 내가 하는 탭은 이러이러하다라고 얘기했을 때 과연 그 사람들이 머리가 아니라 피부로 이해할 수 있을까?하는 의심이 든다.
지하철을 기다리며 플랫폼에서, 해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엘리베이터 안에서, 점심을 먹고 입에 담배를 물고 회사 옥상에서 즐길 수 있도록 탭을 배우라고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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