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테디셀러는 이런 책일 게다. 시류에 흔들리지 않되 둔감하지 않고, 화려하게 돋보이지 않지만 돌아보면 그 자리에 있는.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미화 실장은 다음주 초 출간되는 ‘우리 시대 스테디셀러의 계보’(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에서 대중 곁에 오랫동안 머물러온 스테디셀러의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저자는 “언급된 책들이 모두 ‘양서’라고 말할 수는 없다”면서도 “하지만 저마다 눈부신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고 믿는다”고 밝혔다.
저자가 첫머리에서 살펴본 분야는 성장소설이다. ‘새는 알에서 깨어나려 한다. 알은 곧 세계다. 새로 탄생하기를 원한다면 한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아포리즘으로 유명한 헤세의 ‘데미안’은 성장소설 계보의 출발점에 서 있다. 서구의 합리주의 전통보다는 동양적 구원의 세계에 바탕을 둔 점이 인기 요인이다.
1980년대에는 이문열씨의 ‘젊은 날의 초상’이 낭만적 성장소설로 우뚝하고 90년대에는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가 맥을 잇는다. 이 책은 프랑스 삽화가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이 독자들을 매혹시키면서 이후 성인 동화류가 쏟아져나오는 물꼬를 튼다.
어른을 위한 동화로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가 첫손에 꼽힌다. 아름다운 잠언들이 한국인의 내면에 가 닿았다는 평이다. 120여종이 중복 출간되고 97년 서울대 논술고사에 출제될 만큼 고전 반열에 올랐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셸 실버스타인)와 ‘갈매기의 꿈’(리처드 바크) 역시 성인동화 계보를 형성한다.
일본 소설 가운데서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가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하고 있다. 날렵한 문체와 문화적·지역적 구분 없는 동시대적 감각이 신세대에 소구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소설 스테디셀러의 말석은 ‘국화꽃 향기’(김하인)로 대표되는 멜로적 대중소설이 차지한다.
90년대 중반 이후 여성 독자를 겨냥한 커리어우먼 스토리가 발돋움하기 시작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랑과 성공은 기다리지 않는다’(조안 리)와 ‘여성이여 테러리스트가 돼라’(전여옥)는 1세대 주자. ‘나는 나를 경영한다’(백지연)와 ‘남자처럼 일하고 여자처럼 승리하라’(게일 에반스)가 여성을 위한 처세 매뉴얼로 뒤를 이었다.
자기계발을 촉구하는 경제·경영서들이 스테디셀러 목록에 오르기 시작한 것도 90년대 중반이다.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스티븐 코비). 이런 부류의 책들은 IMF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확고한 영역을 구축한다. ‘익숙한 것과의 결별’ ‘낯선 곳에서의 아침’ 등의 구본형씨는 “자신이 잘하는 일에 집중해 전문성을 축적하라”고 외쳐 직장인들의 우상이 된다.
속도와 적응의 논리로 무장한 이런 책들의 대척점에도 책은 존재한다. 자연주의적 삶을 추구한 소로의 ‘월든’과 헬렌·스콧 니어링 부부의 ‘조화로운 삶’, 피에르 쌍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류시화씨의 ‘외눈박이 물고기의 사랑’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 등은 본질적 자연주의에 다다르지 못하고 감상적 위안에 머물렀다는 평가가 내려진다.
법정 스님의 ‘무소유’는 ‘스테디셀러 중의 스테디셀러’다. 76년 초판, 지난해 개정판이 나온 이 책은 1백70만부 이상이 판매됐다. 가히 ‘무소유 신드롬’이라 할 만하다. 저자는 “이 책은 침묵과 무소유라는 서늘한 가치를 일상의 삶 속에서 풀어내 고단한 현대인의 삶을 위로했다”며 “인간의 본성에 다가가는 이러한 책들은 새로운 세기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절실하다”고 강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