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물, 혹은 순환하는 넋
한 승 원 (소설가, 시인)
움직이는 물은 속에 꽃의 두근거림을 지니고 있다.
- 글로리아 알코르타
1
이상인의 시를 읽으면서 '달보살 이야기'를 떠올린다.
염소뿔같은 초생달이 조금씩 커져서 만월이 되는 것은 밤하늘의 달보살 때문이다.
달보살은 달을 관리하는 선녀이다.
달은, 사실은 새까만 밤하늘 길을 떠도는 한 개의 둥그런 기구같은 투명 물통에 지나지 않는다.
달보살의 소임은 그 통에 빛의 물을 가득 채워놓는 것이다.
그런데, 달보살이 빛의 물을 가득 채워 놓고 또 다른 바쁜 볼 일을 보러 가고 없는 새에
어둠나라 도둑이 그 빛의 물을 하루에 몇 동이씩 도둑질해간다. 그 때문에 달은 점차 일그러지다가 마침내는 빛을 잃게 되는 것이다.
세상에 달빛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린 달보살은 다시 한결같은 마음으로 빛의 물을 쉬임없이
길어다가 투명물통에 채운다.
마침내 만월을 만들어 놓고 나서야 달보살은 안도의 숨을 쉬며 다른 일을 보러 간다.
그러면 또 다시 도둑이 빛의 물을 퍼가는, 숨바꼭질 같은 그 일은 이제껏 계속되어 오고 있다.
물, 그 일렁이는 표면과 깊이를 알 수 없는 아득한 심저, 의식과 무의식, 몸과 심혼을 가지고
있는 그 물은 나무를 나무이게 하고 석탑을 석탑이게 하고 사람을 사람이게 하고, 석가모니를 석가모니이게 예수를 예수이게 노자를 노자이게 니체를 니체이게 까뮈를 까뮈이게 하고, 오랑캐꽃을 오랑캐꽃이게 나비를 나비이게 한다.
노을을 핏빛으로 타오르게 하고 안개와 신기루를 있게 하고, 달무리와 무지개를 생겨나게 하고, 산난초꽃과 장미꽃과 개망초꽃과 구절초꽃을 피어나게 한다.
물고기들을 헤엄치게 하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게 한다.
곡식과 포도를 썩게 한 물(술)은 인간을 취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시를 쓰게 하고 노래를
하게 하고 광란하게 한다.
물은 스스로 깊이 스며들고 기어들고 아래로 아래로 흐르고 출렁거리고 증기 되어 솟아올라
떠돌고 꿈꾸고 춤추면서 동시에 자기와 관계 맺은 것들 모두를 어디론가 스며들고 기어들고
흐르고 솟아오르고 출렁거리고 춤추고 꿈꾸게 한다.
이상인의 시에서는 그 곡진한 물의 시간을 읽을 수 있다. 그는 물 자체이다.
못물이 맑고 다사로운 고장 담양(潭陽)에서 나고 자란 이상인은 한 때 거기 고여 있는
물이었다.
이후 잠시 흘러 섬진강 용소에서 맴도는 엽록색의 물이다가 여천 바닷 속의 섬들을 들이받는
까치파도이다가 지금 순천의 삼산 이수로 돌아와 출렁거리고 있다. 그는 샘물이면서 샘물이
아니고 강물이면서 강물이 아니고 바닷물이면서 바닷물이 아니다.
그 모두이다.
그의 삶이 샘솟으면 샘솟는대로 고이면 고여 있는대로, 흐르면 흐르는대로, 파도 되어
철썩거리면 철썩거리는대로 그것들은 거짓없이 시로 드러나고 있다.
그의 시와의 만남도 이러구러 십 년이 다 되어간다.
시고(詩稿)를 들이미는 그의 얼굴에 어린 웃음과 말씨에는 어려워하고 조심하는 수줍음이
향처럼 스며 있다.
불혹의 나이인데도 그것은 변함이 없다.
백발이 성성해지더라도 그것은 한결같으리라. 향 맑은 순백의 성정.
그의 고향인 담양 추월산 기슭의 대밭 밑에서 솟은 청순한 샘물 맛이 그러하지 않을까.
차 우리는 물일수록 좋은 순한 물이어야 한다.
가령 서울이나 광주나 부산의 수돗물로 차를 끓이면 그 어떠한 좋은 차도 제 맛을 내지 못한다. 중금속과 질소와 죽은 프랑크톤과 소독용 염소의 맛과 냄새 때문에.
그의 시 솜씨는 담양의 그 청순한 물로, 추월산 밑의 대밭 속에서 댓잎에 맺혔다가 떨어지는
이슬을 받아먹고 자란 잎차를 끓여내는 소박한 솜씨이다.
황토밭에서 캐어온 고구마같은 말, 섬진강 물무늬와 은어의 비늘같은 말, 해초향 묻은 말,
퍼덕거리는 숭어회같은 말,..... 그 어떤 것으로 시를 빚어도 담양 추월산 기슭의 풋풋한
구절초향같은 시의 맛과 향이 사라지지 않는다.
2
성정이 물의 넋인 만큼 그의 감수성과 관능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서늘하게 한다.
(1) 아이를 부르는 젊은 엄마의 목소리가 남쪽으로 뻗은 가지의 맨 끄트머리에서 마른
피부를 들치고 유두같은 꽃봉오리로 맺히고 있을 즈음 계곡을 흘러와 멈칫멈칫
외나무다리를 건너던 물소리 몇이 흘깃 치어다보다가 차츰 충일되기 시작하는
산수유의 꽃눈 속으로 뼈와 살을 버리고 뛰어든다.
-<소쇄원의 산수유> 일부
(2) 그대 살 속에 길이 있네
그대 살 속에 절벽이 있네
그대 살 속의 길 속에 절벽이 절벽 속에 길이
서로를 꽉 껴안고 있네.
-<生> 일부
식물의 뿌리는 모세관 현상(삼투압)으로 빨아들인 물을 팽압으로 줄기와 잎 쪽으로 밀어
올리는 일을 한다. 어찌 식물만 그러하랴. 살아 있는 것들은 모두 꽃병에 꽂힌 꽃들처럼
사랑에 목말라 한다.
이상인은 늘 그러한 갈증 속에서 산다.
그의 시간은 물처럼 일렁거린다. 그의 '되새떼'의 시간은 '장엄한 물길'이 되어 '섬진강을
이루며 지루한 여행을 계속하는 것'이다.
그의 시들에 의하면 물은 우주가 자기의 시간의 모습을 형상화시킨 것이다.
물은 그에게 있어서 운명이다. 어머니의 양수 속에서 열달 동안 헤엄치다가 담양의 땅 위로
솟구쳐 오르자마자 그는 이리저리 흘러 다녔다. 섬진강변으로 여천 바다 한복판으로.
곡진한 삶과 사랑의 갈증 때문에.
(3) 세월처럼 이어지는 물소리를 따라 올라간다.
그 물소리가 끝나는 곳에 멈추어
배추흰나비애벌레처럼 잠시 두리번거리다가
바짓가랑이에 묻은 생각 털고
한 줌 햇살로 뛰어들면
선암사, 쉼없는 물소리가 되어 흘러가고 있었구나.
-<선암사가 다시 지어지고 있다> 일부
(4) 늘 햇살들이 노란 병아리처럼 종종거리는
다리 위에는 시간의 강물이 흐른다
나는 강물 앞에 멈추어 있고
그 강물은 끊임없이 다리 건너에 있는
푸른 그녀 속으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
- <푸른 그녀> 일부
이상인은 삶의 뿌리와 잎과 줄기와 꽃과 열매를 참선하는 선승들처럼 알아차리곤 한다.
물이 화두이다.
물을 통해 삶을 알아차린다. 비밀작법인 그 물의 심저, 물의 세계로 들어간다.
물 속에 삶의 구경이 있다.
물로 녹아 흐르는 것, 이쪽과 저쪽의 경계를 허무는 것, 하나 되는 것이 그의 소망이다.
물이 그의 원형이다.
(5) 장광을 둘러친 푸른 대숲 속에서
시도 없이 울어대던 굴뚝새 울음소리가
울 엄니 치맛자락에 살구꽃처럼 쌓일 때
그리움 하나 동동 떠돌던 정화수는
늘상 눈물 흘리며
새벽별처럼 반짝이더라.
-<울엄니> 일부
(6) 아내는 푸른 강물이었네
날마다 내 곁에서 흐르고 있었지만
가 닿기에는 너무 먼 강물이었네.
-<아내는 푸른 강물이었네> 일부
(7) 그 여름 내내 헤엄치는 꿈만 꾸었습니다
나는 자꾸 무거운 납처럼 강바닥에 가라앉고
당신은 너무도 멀리에서 손짓하며 흐르고 있었습니다
당신에게로 가 닿으려는 나의 마음은
-<그 여름, 섬진강> 일부
물은 끊임없이 변태한다. 그는 어머니의 정화수로 말미암아 생성된 몸을 이제는 아내의 강물
속에 던져 헤엄치며 살지 않으면 안된다. 강물은 저편 언덕으로 건너가려는 자를 익사하게
하고 절망하게 한다.
그러나 거기에 빠져 죽지 않고는 오르가즘에 이르지 못한다. 죽음같은 오르가즘 저 너머에
있는 그것은 무엇일까.
물은 지하의 자궁에서 샘솟아 나와 우물이나 못에 고였다가 내와 강을 따라 흘러서 바다에
이르러 출렁거리고 증발하여 안개와 구름으로 떠돌다가 비와 눈과 안개 되어 대지에
떨어지는데 그 일부는 지하로 스며들어가고 일부는 바다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출렁거리며
순환하는 우주의 넋이다.
티벳의 태장계 만다라처럼 윤회한다.
(8) 어느 날 파도 드센 날, 그물에 걸려든 누런 놀래미의 혼이
어부 정복씨에게 스며들어 이 세상에 나오게 된
이제 막 새 이빨이 돋기 시작하는 주성이
가끔씩 두고 온 바닷속 소식이 궁금한지
재미없는 학교 책가방일랑 선창에 던져둔 채
일렁이는 푸른 바다 한끝을 살짝 잡아 당겨보기도 하고
슬그머니 들추어보기도 하고
-<귀소> 전문
(9) 내리 5 대째 그물질로 생계를 이어온 수삼이가
도회지 공장에 취직했다가 압사하던 날
어디선가 날아온 쬐끄만 방울새 한 마리
손 큰 후박나무에 깃들이더니
한사리 무렵이면 어김없이
울어도 울어도 해초 같은 질긴 울음을 울었다.
차례로 푸른 바다가 되었던
수삼이의 증조할아버지와 그 아들의 아들이 잠든
저 먼바다의 크고 작은 파도들을 호명하여 불러내듯이
-<방울새 울음소리> 일부
이상인의 물은 노자의 물처럼 아래로 아래로 흘러 바다에 이른다. 그 바다는 가시적인 바다이기도 하고 비가시적인 바다이기도 하다. 석가모니의 화엄의 바다와 노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이고 공맹(孔孟)의 짠한 마음(仁)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아래로는 아픈 삶을 사는 것들과 자리를 함께 하는 것. 물의 삶의 구경은 바로 그것이다.
(10) 허연 치맛자락을 살며시 들어올려 미끄러운 海望바위를 간신히 딛고 올라와선 숭어의
비늘같은 어둠을 털어 낸다. 녹슨 내장을 말끔히 비운 채 포구 안쪽에 조으는
멍텅구리 배를 서서히 감싸 안으며 꿈결처럼 파닥이던 멸치떼를 가늠해보기도 하고
흰 손을 불쑥 배 안으로 집어넣어 죽은 뱃고동소리를 건져내 밀물 속에 방생하기도
한다.
-<밀징포 안개는> 일부
(11) 올해도 어김없이 붉은 동백꽃이 겁나게 피어부렀다네
어쩔 것인가,작년 재작년 큰 파도에 휩쓸려가버린 봉만이 재식이는 또 그놈들의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는, 삼켜버린 저 바다의 질기고 푸른 혀는 이 봄에도
환장하게 출렁거리고만 있는데
-<봉통에서> 일부
(12) 파도는 작은 돌담가에 서 있는
오동나무와 손 잡고 놀다가
밤이면 열리는 오동나무 속으로 걸어들어가
잠시 새근새근 잠들었다가
수평선의 푸른 눈꺼풀 사이로 붉은 해 뜰 때
진보라 오동꽃으로 피어나고 싶었던거라.
-<섬집 아이> 일부
그의 물은 생명을 삼켜버리는 거대한 괴물같은 마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속에 뛰어들어서 꽃으로 피어나고 꿈꾼다. 그 꿈이 있어서 이
만경창파 거친 세상은 살아갈만한 세상이 된다. 그의 물이 관능적인 것은 한(恨) 혹은 질긴
생명력 때문이다.
그 생명력이 우리의 희망사진관이 되어 우리들의 내일을 생생하게 보여주곤 한다.
(13) 월호 앞바다에 만다라같은 달이 뜨면
처녀는 활짝 핀 무밭을 뒹굴며
밤새도록 아이 낳는 꿈을 꾸었단다.
- <處女島> 일부
(14) 기도가 해국처럼 꽃피기 전에는
삶의 벼랑을 떠나지 않겠다고 서원한
그의 허리와 어깨 언저리와
합장한 손등이 어느덧 금가고 부스러져
바다의 일부가 되어갔지만
-<선무당 바위> 일부
이제 순천으로 돌아온 그는 가슴 속에 섬 하나를 키우며 삼산 이수를 맴돌고 있다.
인도 사람들은 죽음을 앞두고 바라나시 강가로 모여든다. 물로 말미암아 한 줌의 안개구름처럼 일어난 자기의 모든 것을 물에게로 되돌려주려 함이다. 다시 태어나 새로운 생명으로
빚어지기를 희망하는
것이다.
그것은 물의 의지이다.
우리들은 누구든지 달보살처럼 허공에 뜬 둥그런 투명 물통에 빛의 물을 채우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내 목구멍에 거미줄이 쳐지지 않도록 삶의 현장으로 달려가서 바쁘게 일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다 보면 누군가가 우리들의 빛의 물을 다 퍼내버려 세상은, 우리들의 가슴은
거무칙칙하게 어두워져 있고 으스스 추워져있곤 한다.
시는 추위를 이기게 할 수 있는 털쉐터나 양말 한 짝 장갑 한 켤레일 수 없고 배고픔을 가시게 할 빵 한 조각일 수 없다. 복수를 하려고 벼르는 자의 칼과 권총 한 자루일 수도 없다.
그렇지만 그것은 소주 막걸리 맥주 포도주처럼 적어도 우리를 취하게 하는 빛 한 줄기일
수는 있다.
이상인을 아끼는 많은 사람들은 그가 한 사람의 달보살이 되기를 바란다. 어두워진 세상을
빛으로 가득 채우기 위해 쉬임없이 빛의 물을 길어다가 밤하늘의 둥그런 투명 물통을 채우는
달선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