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만난 영은 엄마는 내 손을 잡은 채 눈물을 글썽이더니 울음소리가 점점 고조되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우리를 쳐다보았다.
삼월. 아직도 매서운 바람과 함께 희끗희끗한 봄눈이 꽃잎처럼 날리고 있었다. 영은 엄마가 우는 이유를 나는 금방 알 수 있었기에 나도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우리는 그 해 큰딸들을 서울의 같은 대학에 입학시켰다. 자식을 낳아 길러 처음으로 객지에 떼어놓고 돌아오던 길의 동병상련이었다. 우리 둘은 아이들을 서울에 두고 떠나올 때 좌석에 나란히 앉았었지만 눈물 때문에 말문을 열지 못했다. 희망하는 대학교에서 학력고사를 치르는 동안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 신림동 하숙집에 머물렀다. 삼박 사일 동안이었지만 자식을 둔 엄마끼리의 일치감에 정이 들었다. 그 후 영은 엄마를 우연히 만난 것이었다.
아이들이 입학한 지가 이십 여일 남짓 되었었나 보다. 영은 엄마는 딸이 보고 싶어서 참을 수 없었던 감정이 나를 보자 터져나온 것이었다. 해질 무렵 수돗가에서 쌀을 씻을 때, 시내버스 안에서 딸 또래의 여학생들을 보고 있을 때, 나도 얼른 달려가서 찾아보고 싶을 만큼 그리웠다. 딸이 쓰던 방문을 열면 아직도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처럼 눈에 밟혔다. 영은이는 입학 후 밤마다 울면서 전화를 해 엄마의 마음이 더 아팠던 것 같다. 일주일에 한두 번 전화를 했던 우리 아이는 목소리가 밝고 명랑해서 낯선 대학 생활에 빨리 적응해 가려느니 생각됐다. 그러나 나는 딸을 기숙사에 둔 것이 마치 시집보낸 것처럼 서운했다.
학교 구내 식당에서 먹는 밥이나 기숙사의 식사가 부실해 영은이에게는 매월 간식비를 넉넉히 보내준다고 그의 엄마는 내게 전화했지만 우리는 그만한 형편이 안 되었다. 계절이 바뀌어 과일 몇 개와 옷가지를 싸들고 찾아간 캠퍼스 맨 끝에 있던 기숙사 건물은 언제나 쓸쓸해 보였다. 방안 넓은 유리창 밖 무성한 나무들은 그린 듯이 서 있었고, 그 창가에 서서 집을 떠나온 외로움에 몰래 울었을 딸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그런 딸을 나는 차마 가슴에 안아볼 수가 없었다. 길에서 만난 영은 엄마처럼 감당할 수 없는 감정에 딸의 마음까지 우울하게 할 것 같아서였다. 나는 그걸 억제하려고 화제를 다른 곳으로 돌리곤 했다. 기숙사에서 딸을 잠시 만나고 당일에 돌아와야 했던 나는 달리는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고속도로가 반짝이는 강물처럼 아른거렸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방안 청소를 시켰을 때, 공부하는 것보다 청소가 훨씬 어렵다면서 짜증을 내기도 했지만 탓할 것이 없던 애였다. 여느 어머니들과 다를 것 없는 보편적인 모성을 지닌 나였지만 딸이 대학생이 되었어도 어린 젖먹이처럼 안 잊혔다. 입학 후 여름방학이 되기 전까지 영은 엄마는 딸 생각이 날 때마다 거의 매일 나에게 전화를 했다. 그 횟수가 점점 멀어져가던 것으로 보아 딸을 떼어둔 서운함에서 익숙해져 가리라 생각됐다. 나도 그러했다.
이 년간의 기숙사 생활을 신입생 후배에게 물려주고 제 힘으로 자취방을 얻어 이사하게 되었을 때에도 이삿짐을 모두 정리한 후에야 딸은 전화만 했다. 대학 사 년간을 장학생으로, 게다가 아르바이트까지 해야만 했던 그 좁은 어깨가 얼마나 무거웠으랴.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돌아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지만 초콜릿도 아이스크림도 찾아낼 수 없어 힘없이 냉장고 문을 닫으면서 "나는 이렇게 안 살 거야. 맛있는 것 냉장고 속에 가득가득 채워놓고 살 거야." 하고 울먹였다. 그리고는 조용히 책상 앞에 엎드려 있던 딸이었다. 학교에서 일등을 할 때마다 기껏 자장면이나 책을 선물로 사주었을 뿐이었다.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하기까지 일등을 놓쳐본 일이 없어 그 책들이 책꽂이에 가득 찼다. 착하고 대견스럽기만 한 딸에게 어미로서 해준 것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아, 안타까움만이 언제나 물결처럼 다가온다.
대학 삼 학년이 되면서 본인의 진로가 정해지고, 시험에 도전하기 위해 학원이나 도서관에서 밤샘하기가 일쑤였다. 그 때 어려웠던 것은 배고픔이었다고 훗날에 딸은 말하였다. 이른 아침 도서관에 가기 위해 자취방을 나서면 뉘 집에선지 생선 굽는 냄새가 허기를 재촉했고 그럴 때면 엄마 생각이 났었다고 한다. 고등학교에 다니는 두 연년생의 동생과 아빠의 출근 때문에 엄마의 손길은 저에게 닿을 수 없었다. 자정이 훨씬 지나 자취방에 전화를 하면 빨래하다 달려와 숨소리가 헐떡거렸다. 비타민 한 병도 먹여보지 못했던 딸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엄마였다. 어려서 먹고 싶은 과자가 넉넉지 않아 가난을 싫어하던 아이, 아빠가 받는 적은 월급 생활을 원망하던 아이, 공부를 하면서 졸음이 올 때면 나는 이 길이 아니면 죽는다는 각오를 수없이 되풀이하였다고 하였다.
모든 일의 영광 뒤에는 고통과 인내가 함께 있다. 박세리 선수가 미국의 필드를 강타했을 때 우리는 안방에 편히 앉아 그의 단편적인 영광만을 볼 수 있었다.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나서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 낸 것이 아니었다. 물론 박 선수를 길러낸 배경에는 그의 훌륭한 아버지가 있었다. 아파트 층계를 거꾸로 걷는 훈련에서부터 한밤중에 공동묘지를 달리며 담력을 기르는 훈련에 이르기까지 그 많은 노고를 아버지와 함께 하였다고 한다. 죽음보다 강한 의지와 인내가 아니고서는 성공할 수 없다. 어느 발레리나가 텔레비전 방송국에서 인터뷰하던 일이 생각난다. 발가락에 염증이 생겨 뼈를 깎는 아픔을 참아내면서 공연을 해야 한다던 그의 모습에는 영광보다 더 큰 고통의 흔적들이 스며 있었다.
딸은 대학 졸업과 함께 스물 셋의 나이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합격자 발표가 있던 날 딸은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엄마 저를 낳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실로 신이라도 감동했을 노력이었음을 나는 안다. 연수원에 입소하기 전 며칠 동안 집에 내려와 있을 때에도 메이크업 교실과 차밍스쿨에도 나가는, 여자로서의 소양을 다듬던 딸이 기특했다. 그리고 내 손을 쥐고 소곤소곤 말했다. 사시에 합격한 사람은 삼백 명이나 되니 저 혼자서만 해낸 일이 아니므로 엄마는 친척이나 친구들에게 딸 자랑을 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고 그 약속을 받아냈다. 사법 연수가 끝나고 상위 5 퍼센트의 성적으로 마쳤다는 것을, 딸의 사진과 함께 신문에 실린 기사를 읽고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 젊은이들과 다를 바 없이 갈색 머리에 멋을 부리는 신세대다. 그리고 엄마에게 달려들어 어리광을 부리는 어린 딸이다. 아직도 야무진 꿈과 야망을 위해 끝없이 도전하는 딸을 멀리서 나는 바라볼 뿐이다. 보람된 일을 이루며 살고 싶다는 그의 뜻에 신의 은총이 함께 하기를 나는 기도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