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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함산 아래 토굴에서 경허스님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1년 동안 주먹밥 공양을 하는 무한 고통 속에서 대각을 이루었다. 경허스님이 사교입선(捨敎入禪)한 것은 조선 순조 때 호열자(콜레라)가 이 땅을 침습한 결과였다. 경허스님은 무서운 호열자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는 것을 보고 대오각성(大悟覺醒)하여 동학사의 강당에서 학인들을 해산시키고 연함산 천장암 토굴로 일입청산(一入靑山)하였던 것이다. 1년 동안의 각고면려는 필설로 기록하기 어려운 것이었지만 스님은 입을 굳게 다물고 고행 속으로 잠행했다. 날이 가는지 해가 지는지 모르는 캄캄한 동굴 속에서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고 그런 용맹정진의 결과가 대오일번(大悟一番)을 가져온 것이다. ‘사람이 코 구멍 없는 소가 된다’는 말을 듣고 문득 삼천대천세계가 다 내 집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유월달 연함산 산길 아래에 야인이 일마치고 태평가를 부르나니.”
오도(悟道)의 노래를 부르며 경허스님은 세상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이후 호서와 영남을 중심으로 불법(佛法)을 펴서 식어가는 이 나라 선도(禪道)에 회천의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경허스님의 일화는 수없이 전해져 오지만 그것은 대개 그의 대오의 경지가 너무도 큰데서 오는 과장도 없지 않다.
경허스님의 대성에 네 분 제자의 역할이 한층 돋보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는 수월(水月)과 혜월(慧月), 만공(滿空)과 한암(漢岩)이란 거장들을 제자로 두었기에 더 큰 인물이 된 것이다. 이들 네 거장들은 모두 자기 나름대로의 특색이 있어서 우리들의 존경의 염을 한층 두텁게 한다. 수월스님은 남긴 문장은 없다고 하나 그 덕행과 여러 가지 일화로 신비에 쌓인 도인이며, 혜월스님은 역시 신비에 쌓인 도인으로 후세의 첨앙(瞻仰)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두 분은 문장은 남기지 않았다고 하나 덕행을 남겼으며 만공스님과 한암스님은 문장과 덕행을 아울러 남긴 거장들이다. 만공에 대한 경허스님의 인정은 대단한 것이어서 다음의 시로 크게 칭찬하고 있다.
雲月溪山處處同 구름과 달, 시내와 산 이르는 곳마다 같은지고
臾山禪子大家風 만고의 인품 이미 대가의 풍모 있더라.
慇懃分付無文印 글자 없는 도장을 은근히 분부하노니
一段機權活眼中 일단의 기틀과 권한이 살아있는 눈에 보이는구나.
여기에서 대가풍(大家風)이라 칭찬한 것이 ‘백미’이다. 대가의 풍모다운 만공의 스승에 대한 시 한 수를 음미해 보자.
鏡虛本無鏡 경허는 경허인데 거울 없거니
惺牛曾非牛 소는 소인데도 소가 아니니
非無處處路 아님과 없음의 여러 곳에서
活眼酒與色 살아있는 눈엔 오직 술과 여자 뿐
영찬시로서는 규격을 일탈한 작품이 아닐 수 없다. 적나라하고 적쇄쇄(赤灑灑)한 스승에의 영찬이다. 스승 경허스님을 읊은 또 다른 시를 보자.
善惡過虎佛 착함과 악함이 호랑이와 부처님을 넘는
是鏡虛禪師 이 경허라는 스님이여
遷仕向甚處去 죽어서 어느 곳으로 향하여 가셨는고
酒醉花面臥 술에 취해 색을 옆에 두고 누워 계시는도다.
여기에서도 스승을 스승답게 바로 본 진정한 대가의 풍모가 엿보인다. 이 중에 호랑이와 부처님을 뛰어넘는다는 ‘과호불(過虎佛)’이란 표현은 스승을 향한 후대의 예향이다.
[불교신문 2697호/ 2월23일자]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9055
첫댓글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