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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지연
장지연(張志淵, 1864.11.30~1920.10.2)은 일제 강점기의 언론인으로 호는 위암(韋庵), 숭양산인(嵩陽山人)이다. 고종 31년(1894))에 진사가 되었고 을미사변 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의병의 궐기를 호소하는 격문(檄文)을 각처에 발송하였다. 또한 아관파천(1897) 때는 고종의 환궁을 요청하는 만인소(萬人疏, 만여 명의 선비들이 연명(連名)하여 올리던 상소)를 기초하기도 하였다. 『시사총보(時事叢報)』 주필을 지내다 후에 『황성신문』 사장이 되어 민중계몽과 자립정신 고취에 전력을 다하였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황성신문』에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썼다.
장지연 역시 술 좋아하는 인물로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유명한 「시일야방성대곡」도 술을 먹으면서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는 울분 속에서 술을 기울이고, 울면서 그 논설을 썼다. 또한 장지연은 술친구가 없어도 혼자서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술을 마셨다고 한다. 그에 대한 일화는 다음과 같다. 수주 변영로가 어느 날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장지연의 집으로 갔다. 장지연의 방문 앞에 이르렀을 때 안에서 서로 술을 권하는 소리가 들렸다. 변영로는 장지연이 누군가와 술을 마시나 보다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다. 그랬더니 손님은 없고 그곳에는 장지연 혼자 둥글게 만 이불을 앉혀 놓고 술을 권하고 자기도 마시고 있는 것이었다.
2.나석주
·1운동이후 독립운동가들은 장기적인 독립 전쟁 대신 소수의 결사를 조직해 암살, 파괴활동을 벌여 한국인의 애국심을 자극해 항일민중폭동을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1919년 11월 9일에 만주 길림성에 있는 한 중국인 농부의 집에서 비밀결사인 의열단을 결성했다. 성립 당시의 의열단 단원은 김원봉, 윤세주, 이성우, 곽경, 강세우, 이종암, 한봉근, 한봉인, 김상윤, 신철휴, 배동선, 권준, 서상락의 13명으로 추정하며, 1925년경에는 70명 정도였다. 단장격인 의백에는 김원봉이 추대되었다.
의열단은 결성 직후 '조선의 독립과 세계의 평등을 위해 희생하기로 한다.' 등의 공약 10조를 발표했는데, 과격한 투쟁, 엄격한 행동지침과 희생정신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암살 대상인 '7가살'을 정했는데 이는 조선 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 총독, 매국노, 친일파 거두, 밀정, 반민족 인사였다. 그리고 파괴 대상인 '5파괴'로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관과 그에 관련된 시설을 지목했다. 그리고 암살과 파괴 계획을 실천하고자 폭탄 제조기술을 익혔다.
1920년에 근거지를 베이징으로 옮겨,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 중심 노선에 반대하던 한국인의 지원을 받았다. 의열단은 초기에, 부산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박재혁, 1920년 9월 14일), 밀양 경찰서 폭탄투척 의거(최수봉, 1920년 12월 27일), 조선총독부 폭탄투척 의거(김익상, 1921년 9월 12일), 일본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암살 저격 의거(오성륜, 김익상, 이종암, 1922년 3월 28일), 종로경찰서 폭탄투척 및 효제동 의거(김상옥, 1923년 1월 12~22일), 도교 궁성 폭탄투척 의거(김지섭, 1924년 1월 5일), 동양척식회사와 식산은행 폭탄투척 의거(나석주, 1926년 12월 28일) 등을 단행했다. 1923년에는 김원봉의 부탁을 받은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이라는 의열단 선언문을 썼다.
1926년을 전후하여 의열단은 활동 방향을 전환하고자 했다. 그 동안의 활동이 일본의 권력 핵심부에 타격을 가하고 큰 충격을 주었으나, 단원들의 희생도 많았다는 반성이 내부에서 나왔다. 그리고 지금까지와 같은 암살, 폭력을 통한 충격요법으로 독립을 이룰 수 없다고 반성하고, 전 민중을 기반으로 하는 무장투쟁을 꾀했다. 이를 위해 민족협동전선의 구축, 통일적인 독립당의 환성, 그리고 세계 혁명과의 연결을 모색했다. 그리하여 1930년대에는 중국 국민당의 원조를 받아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 지도자를 양성하였다. 한편, 민족 세력의 대동 단결을 위해 다른 민족 단체와 함께 한국대일전선연맹을 발족시켰고, 이를 조선민족혁명당으로 발전시켰다. 조선민족혁명당의 결성으로 의열단은 사실상 해체되었지만, 의열단의 투쟁이 독립운동사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3.윤봉길
일제는 1930년대에 와서 경제 · 정치 · 군사적인 요인들이 복합되어 만주와 중국으로 침략을 확대하게 되었다. 일본경제의 불황은 1926년부터 심각하게 나타나 다음 해에는 대부분의 은행이 도산하고, 국제적 불경기의 충격과 결합되어 1930년 초부터 심각한 공황으로 치달았다. 러·일 전쟁 이후부터 성장해 온 군부는 해외에 대한 군사적 팽창 즉 침략과 국내에서의 엄격한 통제경제체제가 이로부터 탈출하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고, 실업자가 200만을 넘어서고 사회주의 운동과 노동운동이 크게 일어나서 정치문제로 발전하게 됨으로써 군부로 하여금 만주·몽고의 침략을 주장하는 구실을 주게 되었다. 마침내 소작쟁의 등에 허덕이던 농촌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무렵의 중국은 장개석이 손문의 유지를 이어받아 북벌을 거의 완성시키고 있었다. 그러자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려고 1928년 산동에 군대를 진주시켜 '제남사건'을 일으켰으나, 장개석은 일제에게 대항하지 않고 우선 북벌을 계속했다. 이에 따라 그 대상이던 북경정부의 장작림이 만주로 철수하는데, 일제는 그의 반일적 태도를 염려하여 그가 탄 열차를 폭파하여 살해했다. 그러나 그의 아들 張學良은 장개석과 결속하여 보다 강력하게 반일정책을 모색하니 日帝는 문관이나 군부할 것 없이 만주에 대한 직접적인 군사행동을 계획하게 되었다
3·1운동 후 만주에 그 기반을 둔 한국독립군이 간단 없이 한·중 국경선 부근의 일본군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주어 일제의 한국지배가 흔들리고 있었다. 또 만주에서는 일제가 가상의 적으로 간주하던 소련이 세력을 강화시키고 있었다. 중 ·소가 공동관리하던 중동철도를 1929년에 국민정부가 국유화를 선언하자 소련은 극동군 전병력을 국경에 집결시키고 '하바로프스크 협정' 에 의하여 이를 환원시켰다. 요컨대 일제는 중국의 통일을 방해하여 만주에서 확보한 강제적 이익을 확대·영구화하고, 한국독립군 활동의 근절, 소련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는 목적으로 만주침략을 계획하였다.
일제는 이제 그 구실만 남겨놓고 있었는데, 만보산사건·중촌 대위 피살사건·유조구철도폭파사건 등에서 그 흉계가 나타났다. 만보산사건은 1931년 4월에 일어난 한·중 농민 간의 사소한 수로싸움이었던 것인데, 일제가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여 양국 민족사이의 충돌로 확대시키고, 중·일 양국관헌의 대립으로 유도해 만주침략의 구실을 삼는 동시에 한국인과 중국인을 대립시켜 재만한국독립군을 고립시키려는 것이었다. 즉 한국인의 항일의식을 반중감정으로 쏠리게 하여 공동의 적인 일제에 대한 한·중 양국민의 연대의식을 약화시키는 한편, 한국인을 만주침략에 가담시키기 위해서 만고산 사건을 최대로 이용하려 했던 것이다.
1931년 6월에 일제 육군참모본부 소속 중촌진태랑 대위가 소련에 대한 작전계획을 위해 흥안령 방면에 파견되었다가 중국군에게 피살된 사건이 발생하자, 일제는 중촌이 군사 정보활동을 한 것은 감춰두고 만몽침략의 기운을 조성하는 구실로 삼기 위해 중국정부에 압력을 가했다. 중국은 9월 상순 경에야 이 사실을 시인하고 외교 교섭에 의해서 사건을 해결하려고 하였으나, 일제는 이 사건을 크게 과장하여 자국민의 민심을 선동·자극하는 한편, 육군의 정예인 제 2사단을 관동군의 주력으로 대체하는 등 침략 작전상의 준비를 마쳤다. 마침내 1931년 9월 18일에는 관동군이 봉천 교외의 유조구 부근 만철 선로의 일부를 자기들 손으로 폭파하고 이것을 중국측에서 폭파했다고 트집 잡아 즉시 군사행동을 일으켰다. 이것이 일제가 '만주사변'이라 부르는 9·18사건인데, 1937년 중일전쟁과 연결되어 일제가 패망하기까지 15년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일제는 표면상 전선을 확대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1932년 1월에 금주, 2월에 하얼빈을 점령하니, 4개월 반만에 만주의 주요 도시와 철도 연선이 관동군의 점령하에 들어갔다.
만주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일제는 곧 괴뢰 '만주국' 건설을 위한 공작을 진행하였다. 전쟁초기부터 법제와 금융에 관한 연구를 전문가에게 맡기는 등 각본에 따라 1932년 3월 1일에 '만주국'의 건국을 선언하게 되었다. 3월 9일에는 청의 마지막 황제 부의가 만주국의 집정에 취임함으로써 일제의 만주침략은 일단락되었다.p>이어서 일제는 만주를 단시일 내에 석권한 여위(餘威)를 빌어 일거에 중국의 심장부를 침공하여 소위 '상해사변'을 도발하였다. 이것은 만주침략에 대한 국제여론이 나쁘고, 중국의 학생·노동자·민중들의 민족주의 항일운동이 거세게 일어나는 상황에서 '만주국' 건설을 감추고자 했던 것으로, 말하자면 '만주국' 건설운동의 양동작전이었던 것이다.
1932년 1월 무렵의 상해에서는 일제의 만주침략을 규탄하는 시민대회가 열리고 中·日人 간의 충돌이 빈번히 발생하는 가운데 1월 8일에 이봉창의 동경의거가 일어나자 중국의 신문들은 이를 두둔하는 기사를 싣는 등 반일감정이 점점 고조되고 있었다. 일제는 이러한 분위기를 이용하여 중국인 무뢰한을 매수하여 일인 탁발승을 살해하게 함으로써 중 · 일인 간의 반감을 심화시켰다. 촌정창송찬 상해총영사는 24시간 기한부로 상해시 당국에 대하여 시장의 진사와 가해자의 처벌과 피해자의 배상을 요구하였다. 중국측은 할 수 없이 모두 승낙하였으나, 이미 계획된 도발은 중국이 어떠한 양보를 한다고 해도 저지할 수 없었다.
중국은 공산군 40만이 남경을 위협하고 있었고 각지에 군벌이 잔존하고 있는 상황이어서 중앙군이 투입되지 못하고, 본래 광동파 지방군이었던 채정해가 지휘하는 제 19로군과 장치중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 5군 만이 참전하고 있었다. 제 19로군은 내전 경험을 쌓은 정예군으로 1931년 가을 상해 부근에 배치되면서부터 상해 시민의 항일운동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었기 때문에 용감히 싸워 일제의 작전에 차질을 주었다. 그러나 일 육군이 대거 증파되어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면서, 중국군의 배후에 상륙하게 되자 중국군은 지탱하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즉각 전투중지를 명하고 정전회담을 시작했으나, 난항을 거듭한 끝에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성공한 후에야 일군이 사변전의 상태로 돌아갈 것을 결정한 정전협정이 체결되었다. 상해사변은 일제가 만주점령의 몇 배나 되는 손해를 입으면서도 아무 것도 얻지 못한 채 큰 실패로 끝났다. 이는 중국 민중과 제 19로군의 치열한 저항의 결과였다. 그러나 일제는 3월 1일에 당초의 목적인 '만주국'의 성립을 선포하여 기정사실화하였다
4.수렴청정
중전에서 물러나 대비전으로 거처를 옮긴 대비는 아침저녁으로 왕과 왕비의 문안 인사를 받았고, 왕실의 경조사나 명절 때에는 왕실의 어른으로 참석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경우라도 대비는 왕의 어머니로서 또 왕실의 어른으로서 최고의 권위를 갖고 있었다. 더구나 미성년자인 왕이 즉위하는 상황이 많았던 조선의 현실 때문에 어린 왕을 대신해 대비가 왕실의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실시하곤 하였다.
유교 정치 문화에서는 왕비나 대비, 외척의 정치 참여는 금기시하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대비의 수렴청정이 가능했던 것은 조선 초기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미성년자로 왕위에 오른 첫 번째 왕인 단종이 원로대신 김종서와 수양대군의 권력 투쟁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유능한 관료나 종친이 어린 왕을 도운 것이 아니라 반대로 왕위 자체를 빼앗은 결과가 되어 버렸다. 이같은 위험을 피하기 위해 왕이 될 수 없는 여성으로 어린 왕을 진정으로 보호하고 도와 줄 수 있는 대비가 그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대비는 왕의 어머니 또는 할머니라는 혈연적인 정이 있고, 또 오랜 궁궐 생활에서 체득한 정치 경험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발을 쳐서 남녀간의 분별을 지켰다. 이에 조선시대 대비의 수렴청정은 성종 때부터 정식으로 시작되었다.
1469년 세조의 손자인 성종이 13세의 왕위에 올랐을 때, 대비가 세 명이나 있었다. 세조 왕비 정희왕후 윤씨, 성종의 생모인 소혜왕후 한씨, 그리고 예종의 왕비 안순왕후 한씨였다. 이중에서 최고 어른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었다. 정희왕후는 성종이 20살이 되는 해까지 7년간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후로 조선시대에는 10세 전후의 어린 왕이 즉위하는 경우 으레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는데, 그 기간은 대체로 왕이 20세가 될 때까지였다. 이때가 되면 대비가 자청하여 수렴청정을 거두는 경우가 많았다. 왕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대비의 수렴청정이 끝나지 않으면 신료들이 상소하여 거두게 하였다. 성종 이후에도 명종 12세, 선조 16세, 숙종 14세, 순조 11세, 헌종 7세, 고종 11세 등 6명의 왕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다. 이에 중종 비 문정왕후, 명종비 인순왕후, 영조비 정순왕후, 순조비 순원왕후, 익종비 신정왕후 등이 섭정을 하였다. 다만, 고종 때에는 수렴청정을 하던 신정왕후의 위임을 받아 친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섭정(攝政)을 하였다.
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는 장소는 편전이었다. 편전의 중앙에 어린 왕이 앉고 그 뒤에는 발을 쳤다. 대비는 신료들이 직접 볼 수 없도록 발의 안쪽에 앉았는데, 자리는 왕보다 동쪽이었다. 수렴청정을 시작하는 날, 대비는 적의를 입고 편전의 발 안쪽에 앉았다. 조정 신료들은 국왕에게 행하는 예법대로 대비에게 먼저 절을 네 번 한 이후에 왕이 있는 쪽으로 옮겨서 또 절을 네 번 하였다. 수렴청정을 하는 동안은 계속 이렇게 인사를 하였다. 첫날 이후로 대비는 평상복을 입었고, 편전에 모인 신하들이 주요 국정 현안을 보고하거나 건의하면 발 안쪽에서 듣고 결정을 내렸다. 이 때 대비가 내리는 명령을 의지(懿旨)라 하였다.
그런데 수렴청정을 하는 대부분의 대비가 한문으로 된 공문서, 상소문 등을 읽을 수 없었다. 이런 경우 승정원의 승지들이 한문 보고서를 한글로 번역해 대비에게 보고하였고, 반대로 대비가 한글로 된 명령서를 내리면 승지들이 한문으로 번역해 배포하였다.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기 전까지는 승지들이 정전이나 편전, 침전까지도 직접 공문서를 가지고 가서 왕에게 보고하였으나, 대비에게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대비에게 보고할 문서나 대비의 명령을 내시들이 중간에서 승지에게 전하는 식으로 국정 처리 방식도 바뀌었다.
정희왕후는 비교적 순조롭게 수렴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철저하게 왕권을 보호하여 성종의 정치적 입지를 열어 주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세자 훈련과정을 거치지 못한 성종의 부족한 점을 수렴청정 기간 동안 철저히 보완하여 정치적 균형감각을 익히게 하였으며 왕권강화 과정에서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당시 기득권세력인 원상(院相)을 비롯한 훈신세력들과 원만하게 타협하면서, 또 외척세력을 적절히 등용하여 세력균형을 도모하였고 왕권에 도전할 수 있는 정치세력의 성장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와 함께 시기적으로도 정희왕후가 수렴청정을 할 당시는 조선왕조의 문물제도가 정비되는 안정기로 접어들었다는 점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대체로 정희왕후의 정치력으로 들 수 있는 것은 정치적 유연성과 포용력이다.
명종대는 문정왕후의 강력한 지원을 받는 윤원형을 중심으로 하는 소윤세력의 척신세력이 정국을 주도해 갔다. 이들은 처음에는 척신으로서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훈구세력과 연합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나 그 후 훈구세력을 제거하면서 독자적인 지배체제를 구축하였다. 이들에 의한 인사권의 독점, 경제권의 비대,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 등은 정치세력의 편협성이라는 문제점을 야기하여 사림파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 그 중 선교(禪敎) 양종의 복립, 내수사의 인신사용 등의 정책은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려는 긍정적인 요소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척신세력의 사적 기반위에서 추진된 정책이었으며, 유교이념을 국시로 하는 조선왕조에서 불교진흥은 정치의 기본을 흐트러뜨리는 무리한 선택이었다. 문정왕후는 비교적 자질도 총명하고 남성중심의 정치사회에서 남성을 압도하는 과감한 정치적 장악력도 탁월하였으나 외척들의 무능과 부패, 불교에 대한 극단적 집착 등이 유교중심의 조선사회를 헤쳐 나가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대비의 수렴청정은 대부분 그 정치적 기반을 외척에 두고 있었으므로 조선 후기의 외척의 득세와 세도정치의 폐해를 가져오기도 하였다.
5.인현왕후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 민씨는 현종8년(1667) 여흥 민씨 유중(維重)의 딸로 태어났다. 민유중은 서인이면서 노론의 중진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숙종의 첫째왕비 인경왕후 김씨가 1680년 왕비책봉 4년 만에 천연두로 사망하자 숙종은 1681년에 민씨와 가례를 올려 계비로 맞이하였다.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었을 때 숙종은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가 쫓아낸 궁녀 장옥정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명성왕후가 1683년 12월 세상을 떠나자 쫓겨났던 장옥정은 궁궐로 다시 들어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숙종은 장씨만 찾게 되었다. 민씨가 잉태도 못하는 상황에서 숙종이 남인 세력인 장씨만 지나치게 총애하자 불안감을 느낀 서인세력은 후궁을 들여 후사를 볼 것을 숙종에게 권하였다. 그리하여 서인세력인 영의정 김수항의 종손 김희홍의 딸을 후궁으로 간택하여 숙의에 봉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숙종은 숙의 김씨에게도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숙종은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 강경파들이 하나씩 둘씩 세상을 떠나자 이를 계기로 왕권을 강화시키기로 작정하고 이를 위해 서인 세력을 견제하기 시작하였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 조씨의 재종제(再從弟)인 남인 조사석을 영의정에 앉혔다. 얼마 후 장씨가 왕자 균(후에 경종)을 낳자 숙종의 장씨에 대한 총애는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장씨의 어머니 윤씨가 장씨의 산후조리를 위해 옥교를 타고 궁궐로 들어오다가 사헌부 관리에게 옥교를 빼앗기고 여덟 명의 노비가 취조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천인 윤씨가 옥교를 탈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딸 장씨는 내명부 2품이었으므로, 숙종은 이 사건을 자신에 대한 능멸로 보고 서인에 대한 공세를 본격적으로 하였다. 그래서 3개월 된 균을 원자로 책봉하고 장씨를 내명부 정1품 희빈에 봉하였다. 왕비 민씨가 아직 젊으므로 대부분의 서인들이 이에 반대하였으나 숙종은 강하게 밀고 나갔다. 송시열이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리자 숙종은 송시열을 삭탈관직하고 제주도에 유배시키고, 서인들을 몰아내고 남인들을 등용 하여 우의정, 좌의정에 임명하였다. 이어서 민씨의 투기를 이유삼아 민씨를 폐출시키려하자 반대에 부딪쳤으나 결국 송시열을 사사시키며 서인세력들은 사사, 삭탈관직, 유배 등을 통해 정계에서 모두 축출하였다. 아울러 남인의 주장에 따라 서인들이 신앙처럼 모시던 이이, 성혼도 문묘에서 출향시켰다. 또한 숙의 김씨도 민씨와 함께 장희빈을 투기했다는 죄목으로 폐출시키고 이어 민씨까지 페출시켰다.
인현왕후는 폐서인이 되어 상궁 한 명, 시녀 두어 명과 함께 안국동 본댁(감고당-현 풍문여고 자리)으로 나와 식구들을 모두 백부 집에 거쳐하게 하고 혼자서 지냈다. 이곳에서 민씨는 일절 외부와 접촉을 끊고 아래채에 기거하면서, 뚫어진 문에 창호지 한 장 바르지 않고 잡초도 그대로 두고 지내 폐옥과 다름이 없었다. 숙종은 민씨를 폐위시킨 후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고, 장씨의 아버지 장 형을 양반으로 승격시켜 옥산 부원군으로 정하여 장씨 집안은 최고 명문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5.6년이 지나 숙종이 남인의 세력 확대를 막기 위해 고심하며 폐비에 대한 처사를 후회하고 있던 중에 1694년 서인의 소론 김춘택이 숙종의 마음을 읽고 폐비복위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남인 민암, 김덕원 등이 이를 막으려 했고, 이에 숙종은 이들을 유배 사사시켜 갑술옥사가 일어났다. 그 결과 폐위되었던 민씨는 복위되고 장씨를 희빈으로 강등하고 장 형의 봉작도 거두어 버렸다. 아울러 이 후로는 빈이 후비로 오르지 못하도록 국법으로 정하였다.
선천적으로 허약했던 인현왕후 민씨는 복위된 지 7년 만에 170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였다.
느낀점
방금전 이 걸 만드는 순간 잠시나마 2학기 동안 배웠던 조선 역사들을 다시금 돌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아이들이 쓴 것을 보고 새로운 것도 느낄수 었고 나중에 고등학교에 가서도 그 후 성인이 되서도 잊지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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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민군 편집을 하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그러나 소감이 짧고 오타도 있습니다.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는 조사한 단어를 읽어보고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보면 좋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