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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압과 저항 - 한승원 론
김현
연보에 의하면 한 승원은 1939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으며, 30세가 된던 68년 《대한 일보》에 「목선」이 당선되어 작품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그 뒤 그는 《한 승원 창작집》,《앞산도 첩첩하고》(77년), 《여름에 만난 사람》(78년), 《안개바다》(79년),《한(恨)》,《그 바다, 끓며 넘치며》(80년)의 여섯 권의 소설집을 상재하였다. 그 중에서 이 글을 쓰기 위해 내가 다시 읽은 것은《앞산도 첩첩하고》,《여름에 만난 사람》,《안개바다》,《그 바다, 끓며 넘치며》의 네 권의 소설집이다. 「그 바다, 끓며 넘치며」는 그가 처음 서 낸 장편이다. 그것 외의 세 권의 소설집에 실려 있는 작품들의 수준은 고르지가 않다. 습작기의 작품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아주 수준 높은 것들이 있다. 나의 관심을 끈, 수준 높은 작품들을 열거해 보면,「석유등잔불」,「한 1,2,3」,「아리랑 별곡」,「울려고 내가 왔던가」,「구멍」,「기찻굴」,「안개바다」,「꽃과 어둠」 등이다. 그 작품들은 크게 세 부류로 나뉘어진다. 하나는 여자들의 한을 그린「한 1,2,3」,「아리랑 별곡」이고, 또 하나는 소년 시절의 체험을 그린「석유등잔불」,「안개바다」,「꽃과 어둠」의 연작이고, 마지막은 과거의 삶의 흔적을 현재의 관점에서 재구성해 보는 「구멍」,「울려고 내가 왔던가」,「기찻굴」이다. 이 글은 그 세 부류와 그의 뛰어난 장편소설인 「그 바다…….」가 한승원이라는 소설가의 상상력 속에 어떻게 연계되어 있는가를 밝히는 것을 목표하고 있다.
위에 내가 그 제목을 든 소설들은 공간적으로는 남도의 갯가에, 시간적으로는 식민지 시대에서 현재에 이르는 연대에 얽매어 있다.
한승원의 소설들은 그의 고향 부근의 갯가에서 조금도 벗어나 있지 않다. 대부분의 소설가는 자기의 주거 공간에서 자유스럽지 못하다. 예를 들어, 서정인은 남도의 소도시에서, 천 금성은 바다에서, 이문구는 충청도의 농촌에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갯가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자연스럽게 여겨진다. 대부분의 소설가가 자기의 주거 공간에서 자유스럽지 못한 것은, 그곳이 그의 체험의 원공간이기 때문이다. 체험 자체가 곧 소설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 체험들을 궤뜷는 어떤 성향은 원공간이 방사하는 색깔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독립적인 체험들이 원공간의 색깔에 의해 어떤 성향을 띠게될 때, 조금 현학적으로 표현하자면 내면화되고 구조화될 때, 그것들은 소설 공간의 밑바닥을 이룬다. 그의 소설 공간에서 그 작가 특유의 색채를 띠게 된다. 그는 그의 체험이 갯가스러워지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표현한다.
갯바닥 사람들은 화가 끓으면, 바위에 부딪쳐 하얗게 물방울 날리는 물결같이 장쾌한 욕설을 퍼부은 다음에 할 말을 한다. 나는 그 갯가에서 나고 자란 탓으로, 바닷바람이 곰솔 숲을 흔들고, 높은 물결이 모래톱이나 바위 끝을 두드리며 아우성치는 것을 보면서, 그 사람들의 말법을 익혔다. 말은 곧 생각이요, 생각은 모든 짓거리의 근원이라면, 나는 갯바닥스러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앞산도 첩첩하고》의 <작가의 말>)
그의 갯가 체험은 갯가스러운 말과 생각을 가능케 하고, 아니 차라리 갯가스러운 말과 생각이 되어 그의 내면 속에 구조화되고, 그래서 그의 소설은 그 갯가스러움에서 벗어날 길이 없게 된다.
그의 갯가는 남도의 갯가이다. 다른 소설가의 소설에서는 거의 볼 수 없는, 징하다, 짠하다, 보듬다, 뻗치다, 오달져하다 등의 남도 사투리는 그의 남도 갯가스러움의 한 표상이다. 가령 소설가가,
그것은 너무 오래 계속하므로 뻗치고 고되기 이루 말할 수 없고(「한 3, 우산도」)
라고 쓸 때, 그 지문 속의 <뻐치고>는 <피곤하고>라는 뜻 이상의 것을 담고 있다. 그것은 남도 갯가 사람들의 감정까지를 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평균치로서의 피곤함이 아니다. 지문 속에 나타나 있는 남도 사투리에서 벗어나 있지 않고 그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의 공간 속에 있음을 나타낸다. 가령 소설가가,
할머니가 엉덩이 토닥거려 주고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우리 청복이 공부 보지란히 한 것 보소이."
하고 오달져했다. (「아들 나무에 젖뿌리기」)
라고 썼을 때, 따옴표 속의 할머니의 말의 사투리와 지문 속의 사투리는 갯사람스러움의 이중의 표현이다. 지문 속의 사투리 속에는 할머니의 사투리가 사실로서 삼투되어 있어, 할머니의 감정이 그대로 지문 속에 배어나오는 것이다.
짙은 사투리로 채색되어 있는, 아니 차라리 짙은 사투리의 갯가는 소설가의 고향의 갯가이다. 그 고향의 갯가는 무뚝뚝하고 상스럽기 이를 데 없는 뱃사람들이 모여 사는 아랫마을과 비교적 양반스러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윗마을로 나뉘어 있으며, 그곳 사람들은 대개 김농사를 짓고 있다. 그 갯가는 음습한 계곡을 안고 있는 산을 뒤에 두고(「그 바다, 끓며 넘치며」), 쪽빛으로 다져지는 호수 같은 득량만을 앞에 두고 있다.(「여름에 만난 사람」). 뒷산에서는 대개 윤리에서 벗어난 일들이 일어난다. 시집·장가 가지 아니한 처녀 총각들의 불장난, 과부·홀아비들의 정사, 혹은 혼외 정사 등의 성적인 불륜, 자살, 살인 등의 비정상적 행위들이 벌어지는 곳이 그 곳이다. 앞의 득량만은,
귀남이 당숙은 득량바다만큼이나 든든한 어른이었다.(「겨울비」)
라는 표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개 긍정적인 가치를 갖고 있다. 가난, 불륜 따위의 비정상적인 삶의 자리인 그 갯가에서 소설가의 상상력에 깊은 울림을 준 것은 핏빛 같은 노을이다. 김원일의 「노을」에서와 마찬가지로 한승원의 노을은 거의 언제나 핏빛 노을이다. 그 핏빛 노을은 갯가에 무슨 사건이 생길 때마다 전율스럽게 되풀이 묘사되고 불길함의 징조로 쓰이고 있다. 몇 개의 예을 들겠다.
① ……하고 시작하는 그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다. 정씨네 선산 너머에서 바야흐로 저녁놀이 벌겋게 피고 있었는데, 그 저녁놀은 우리들이 내려다보는 바다는 물론, 우리를 에워싼 수수잎마저도 숫제 핏빛으로 물들여 놓고 있었다.(「참 알 수 없는 일」)
② 반드시 해주어야 한다고 별러 온 것은 아니었지만, 갑자기 호젓한 들판에서 만나게 되니, 직접 하여 주고 싶어진 말이 생긴 것이었다. 다시 한번 두엄을 짊어지고 뒷등으로 올랐을 때엔, 뒷산 너머로 빨갛게 타는 듯한 저녁놀이 앞산과 그 산 너머로 호수처럼 바다보이는 바다를 온통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장례네 수수밭이 불그죽죽하게 물들었고, 그 속에 푹 빠져 허위적거리고 있는 듯한 장례의 머리 위의 흰 수건은 흡사 핏빛이 되어 있었다. (「앞산도 첩첩하고」)
③ 우산도 끝에 있는 어협 창고의 양철지붕이 붉게 물들어 반짝거리고 바다의 흰 누엣결이 핏빛이 되는가 했는데, 땅거미가 천관산과 우산도의 검은 솔숲에서부터 밀려나와 온 바다를 덮었다. 꽃섬 쪽에서 양수기 엔진 소리나 오토바이 엔진 소리를 내면서 달려와야 할 채취선은 끝내 달려와 주질 않았다. (「아리랑 별곡」)
④ 그들 중에 누군가가 하는 말을 들으며 하눌재를 쳐다보았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하눌재가 불타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듯 불처럼 타는 노을을 나는 처음 보는 것이었다. 재 바로 위에 뜬 구름 덩어리는, 내가 교통호 파기 울력을 가다가 나룻머리에서 본 검은 바위 위의 핏덩이같이 검붉었다. 그리고, 그 구름덩이 위쪽의 하늘은 온통 주황빛 깁을 덮어놓은 것만 같았다. 이때 진뫼몰 쪽 큰 산머리에서 대포알처럼 나타난 쌕쌕이 두 대가 그 하늘을 가르며 도둑골 쪽으로 넘어 갔다. (「꽃과 어둠」)
위에 든 네 개의 예에서, 노을은 예외 없이 핏빛으로 붉게 타고 있으며, 그 뒤에는 큰 사건이 펼쳐진다. ①의 예는 「참 알 수 없는 일」에서 뽑은 것인데, 그것은 화자인 나의 대역으로 나온 정 수복이, 아이를 내버리고 도망가 버린 여편네를 찾아다니다가 아이를 죽이게 된 처참한 이야기를 하기 직전의 장면 묘사이다. 핏빛 노을은 처참한 삶의 전조인 것이다. ②의 예는 「앞산도 첩첩하고」에서 뽑은 것인데, 그것은 주인공과 그의 대역인 장례와의 불행한 삶의 발단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③의 예는 「아리랑 별곡」에서 뽑은 것인데, 그것은 주인공의 손자가 칼부림으로 죽게 될 사건을 알리는 전조로서 제시되고 있는 장면 묘사이다. ④의 예는 「꽃과 어둠」에서 뽑은 것인데, 그것은 화자인 나의 누이가 자살 소동을 벌일 때의 장면 묘사이다. 네 개의 예에 나타나는 노을은 객관적인 의미에서는 노을이지만, 그 노을을 바라다보는 ①의 화자, ②의 주인공, ③의 할머니의 눈에는 핏빛으로 보이는, 다시 말해 주관적으로는 죽음으로 나타나는 노을이다. 한승원의 소설에서 죽음은 핏빛 노을이라는 씨니피앙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남도의 갯가 마을의 음습한 뒷산 계곡, 핏빛 노을은 한승원 상상력의 원공간이다. 바다는 대개 긍정적으로 나타나고 있으나, 그 바다에도 죽음의 기호는 있다. 그것은 문어·낙지이다. <큰 동네 뒷산의 밭언덕〔은〕축 늘어진 문어발처럼 느슨하게 흘러냈다.>(「앞산도 첩첩하고」), <나는〔……〕갑자기 나타나 덮쳐 싸아버린 문어의 발들 속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치는 문저리의 꼴이 되어버렸다.>(「안개바다」), <나는 낙지 같은 여자를 알고 있었다.>(「여름에 만난 사람」) 따위의 표현을 가능케 한 것은, 낙지·문어의 공격성이 사람의 죽음과 관련되어 있다는 원체험이다. 그 원체험의 모습은 「꽃과 어둠」에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돌을 매달아서 물에 들친 짚가마니 한 개가 그물에 걸려 나왔어야, 그걸 끄집어내다가 강도령 묏둥 옆에 있는 바위 위에다가 놔두고, 묶여 있는 새내끼줄을 짤라냈제. 짚가마니나 새내끼줄은 한나도 안 썩고 성성하드라. 그것을 잘라내고 짚가마니를 거꾸로 쳐들었네. 그렁께 거기서 뭣이 나왔는지 아냐? 검은 바우 위에가, 마구 꿈실꿈실하는 것들이 아주 허옇게 되아 뿌럿단 말이다. 그것인 뭣인지 아냐? 문어하고 낙지하고야……."
내 잠자리에는 밤새 문어와 낙지들이 바글바글 들끓어댔다. 무수히 덤벼드는 문어와 낙지들의 발에 휘감기는 꿈을 꾸고 또 꾸곤 했던 것이다.(「꽃과 어둠」)
자기가 아는 사람의 시체에 달라붙어 있는 문어와 낙지 ! 갯가 아이들의 그 문어와 낙지의 대응어는 농촌 아이들에겐 쇠파리·지렁이일 것이다.
한승원의 상상력 속에서, 뒷산의 계곡·핏빛 노을·문어·낙지는 갯가 사람들의 불운의 원공간이다. 그 불길함의 원공간이 그 부정성을 승화시킬 때, 그의 갯가 음식의 상상력이 나타난다. 그 상상력은 직유의 상상력이다.
①……이런 말들을 가지고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입방아들을 찧기도 하고, 그렇게 찧어댄 말들에다가 찹쌀떡에 고물 치고 엿 바르듯 자기들의 생각들을 치고 바르기도 하여, 꼴딱꼴딱 침 넘어가는 말들을 만들어 가곤 하였는데……(「폐촌」)
②목이 찰떡이나 마른 감태 한 줌을 잘못 먹어 꼭 걸린 듯 메이여, 생마늘을 통째로 씹어먹은 듯한 가슴이 되어지는 것이었다.(「한2, 홀엄씨」)
③그나마 현장 감독이라는 자가 보리 까리기같이 꺼끄러운 사람이어서(「한3, 우산도」)
대개 직유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먹거리를 표현의 재료로 쓸 수 있기 위해서는, 시골에서 오래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시골에서 오래 산 사람들만이, 생각에 떡고물을 치고 엿을 바를 수 있으며, 생마늘 먹은 것처럼 가슴이 아려올 수 있으며, 보리 까라기 같은 까끄러움을 감각적으로 간직할 수 가 있다.
한승원의 소설은 그 원공간에서, 윗마을 사람들과 아랫마을 사람들이 일으키는 갈등의 연대기적 기록이다. 그 사람들 속에 내면화되어 있던 갈등은 해방, 여순반란사건, 육이오 등의 역사적 변화기를 통해 폭력적으로 드러나거나, 근대화의 물결을 타고 합법적 투쟁 ― 속임수, 인내심 등은 그 투쟁의 한 양상이다 ― 으로 응축되어 드러난다. 그 갈등의 드러남은 세 개의 유형을 갖는다. 하나는 아이들을 키우기 위해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살아 남은 여자들의 한을 통한 것이고, 또 하나는 이해할 수 없었던 것들의 의미를 장성한 뒤에야 깨닫는, 큰 사람의 확인·각성을 통한 것이며, 마지막은 이해될 수 없는 것의 그대로의 드러냄을 통한 것이다. 단 세 유형은 위에서 내가 가른 한승원 소설의 세 부류에 그대로 대응하는데, 편의상 그것을 각각 한의 유형, 드러냄의 유형으로 부르기로 하겠다.
한의 유형에 속하는 것은「한 1,2,3」,「아리랑 별곡」등이다. 그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다 여자들이다. 역사의 변덕에 의해 피해를 받으면서도 그것을 개조하거나 변혁해 나갈 방법을 아이 키우기 외에는 발견할 수 없는 여자들에게 역사란 이해랄 수 없는 사건이나, 갑작스러운 몽둥이질에 지나지 않는다. 아이 키우기 때문에 삶을 구차스럽게 영위해 나가지 않을 수 없는 여인들에게 삶은 엄살도, 울분도, 증오도, 통곡도 아니다. 그것은 한숨의 앙금이거나 당함의 피멍이다. 그 삶은 한 그 자체이다.
한은, 물고기 같은 것이므로 그물을 치거나 낚시질을 하여 잡듯 건져낼 수 없으며, 냉이나 쑥잎 같은 것이므로 쉽사리 뜯어다 무치어 밥상에 올리듯 내놓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엄살이 아니며, 울분도, 증오도, 피를 토하는 듯한 통곡도, 이를 갈며 대드는 악다구니도 아니다. 어쩌면 짜낼래야 짜낼 눈물이 씨도 없이 말라 버린 뒤의 한숨의 앙금이거나 당함의 피멍〔이다〕.(《앞산도 첩첩하고》의 작가의 말)
한이란 역사의 폭력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수동성과 순응성, 그러면서도 아이들을 키워 대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종족본능에서 맺어지는 한숨의 앙금, 당함의 피멍이다. <어머니>라는 부제가 붙은 「한 1」 의 주인공의 불운은 일본놈 면장에게 가장 신임을 두터이 받는다고 떵떵거리는 참봉네 아들에게 남편이 맞아 죽고, 자운영 사건으로 아들이 도망간 데서 연유한다. 주인공의 막둥이 아들은 자운영을 캐다 ― 지주들은 비료로 쓰려고 심는 것이며, 농민들은 끓여 먹으려고 캐는 것이다 ― 얻어맞은 마름집을 습격하다가 실패, 도망하여 광주로 피신하였다가 해방 후에 살인죄로 투옥된다. 어머니는 막둥이 옥바라지를 하기 위해 미역 장사를 한다. 광주로 피신시킬 때도, 옥바라지를 할 때도 어머니의 마음 깊숙이 숨겨져 있는 것은 아이들 크는 것을 보는 재미뿐이다. 어머니의 한은 남편을 잃고 자식 하나를 감옥에 보낸 것이지만, 그 한의 뒤에는 일본 식민지 시대의 농민 수탈이 숨어 있다. 그 농민 수탈의 집단적 주체는 일본 식민주의자이지만 개별적 주체는 참봉네이다. <홀엄씨>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한 2」의 주인공의 불운은 남편이 육이요 때 보안서에 끌려가 장작쪽으로 얻어맞아 골병이 들어 죽은 데서 연유한다. 남자 일손이 없는데도 자식들만 교육시키면 모두 자기 앞에 와 무릎 꿇으리라는 희망으로 주인공은 온갖 고통을 참아 나간다. 그 고생의 한 예가 그녀가 부정한 짓을 했다는 소문이다. 그녀의 고생 ― 한의 뒤에는 육이오의 좌우익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숨어 있다. 그 대립이 아니었으면, 그녀도 남처럼 떳떳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 2」의 속편이며, <우산도>라는 부제가 붙는 「한 3」의 주인공의 불운은 교육시킨 아이들이 자기 집안 꾸려나가기에만 바빠 형제간의 우애를 크게 생각 않은데다가 형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일꾼으로만 키운 막내가 간척지의 둑막이 현장에서 다쳐 죽는 것으로 심화된다. 그녀는 해방 후의 개인주의와 조국 근대화의 폭력을 또 맛본 것이다. 「아리랑 별곡」의 할머니의 불운은 그 모든 것의 집약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그녀의 남편은 해장 전에 징용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으며, 그녀의 아들은 월남에 가 죽었으며, 그녀의 손자는 계집애를 두고 싸우다 연적을 찔러 죽이고 자살을 한 것이다. 여자에게 있어 남자를 잃는다는 것은 삶의 희망과 지주를 잃는다는 것을 뜻하며, 거기에서 한은 생겨난다. 한승원 소설의 여자들의 한은, 있는 자와 없는 자 사이의 갈등 때문에 남자들을 잃어버린 데에서 생겨난다. 그 남자 잃기를 가능케 한 것이 식민지 시대의 수탈, 육이오의 이데올로기 싸움, 그 이후의 근대화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남자 잃기와 아이 키우기 (자식 감싸기)를 통해 남는 갯가의 여인들은 역사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한과 역사의 폭력을 은페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각성의 유형에 속하는 것은 「구멍」, 「울려고 내가 왔던가」,「기찻굴」등이다. 이 유형의 작품에 공통되어 있는 인식은 삶의 진상을 자기 나름대로 보아 버린 사람의 씁쓸한 비극적 세계 인식이다. 그 비극적 세계 인식은 「기찻굴」의 한 인물이 토로하듯 세계란 아무리 손을 뻗쳐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싸늘한 텅 빈 공간(「여름에 만난 사람」)이라는 표현 속에 간결하게 요약되어 있다. 「구멍」은 농약을 먹고 자살한 화자의 누이동생이 왜 죽게 되었을까를, 화자가 장례식에 참여하여 그것을 끝낼 때까지의 사건 진술을 통해 천착하고 있다. 화자의 누이동생은 심인성 협심증에 피해 망상증이 겹쳐 있는데, 그 증세를 자리에 누워 자꾸 한숨을 쉬고 엎치락뒤치락할 뿐 깊은 잠을 못 자는 것이다. 그 증세가 생긴 것은, 화자의 어머니에 의하면, 육이오 때의 여러 사건들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은, 숨은 아버지를 찾아내기 위해 집에 불을 질렀을 때, 잠이 깨어 벌겋게 물든 창을 보고 놀란 것이리라는 것이다. 그 놀람이 무의식 속에 들어가 그녀를 잠 못 자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라는 것이 화자의 어머니의 추측이다. 그 추측에서 독자는 화자의 누이동생의 죽음이 육이오의 이데올로기 대치와 관계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놀람은 한 평론가의 표현을 빌어서 표현하자면 육이오 콤플렉스의 근원이다. 그것은 우리의 일상성 속에 뚫려 있는 구멍인 것이다. 그 구멍은 화자의 살아 있는 남동생 ― 그도 화자의 여동생과 같은 체험을 했다 ― 의 가슴에도 보여줄 수 없게 뚫려 있다. 그 구멍에 철학적인 이론과 문학적인 수식을 덧붙인 것이 「기찻굴」이다. 그것은 한승원의 작품으로서는 특이하게 갯가를 무대로 삼고 있지 않다. 그 소설의 실제적 주인공은 화자의 매형인데, 그는 육이오 때 그의 부모를 잃는다. 그의 아버지는 교회 목사였는데, 그는 인민군이 들어왔는데도 교회 안에서 기도만 하다가 인민군에게 대창으로 찔려 죽고, 그의 어머니는 그것 때문에 충격을 받아 실성기가 생겨 들판을 헤매다가 산기슭에서 발을 헛딛고 떨어져 죽는다. 세계는 그 이후에 그에게는 싸늘한 텅 빈 공간, 시커먼 구멍으로만 보일 때, 세계는 생명력을 상실한 죽은 자궁이다. 생명력 있는 어머니스러운 것으로 그가 가능케 한 것은 무엇일까? 그것에 대한 조그마한 암시를 우리는 그의「울려고 내가 왔던가」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 소설의 화자는 자기 아버지를 죽인 원수를 죽이기 위해 고향에 돌아온다. 거기서 그는 자기가 죽이려 한 원수에게서 사건의 전말을 듣는다. 그의 아버지가 자기의 아내를 범한 것, 자기가 아내를 때려 죽게 한 것, 그의 아버지를 육이오 때 잡아 보안서에 보내 죽게 한 것, 그의 어머니를 꾀어 이 년간 데리고 살다가 딸을 낳았다는 것, 그의 어머니는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것 등이 그것이다. 그 사건의 전말을 듣고 나 뒤 그는 그를 죽이지 못하고 울며 되돌아 온다. 세계의 비밀을 엿본 사람에게는 근원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일까, 자기가 진실로 생각한 것이 반드시 옳지만은 않다는 것이, 각성의 유형에 속하는 작품들의 허무주의의 근원이다. 그 허무주의에는 여자들의 강한 종족본능마저 사상되어 있어, 절망감을 절고시키고 있다. 그 허무주의는 체념, 퇴폐로 치닫을 가능성을 갖고 있다. 사실「두족류(頭足類)」,「폐촌(廢村)」등은 그런 경향으로 그가 경사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 준다. 그러나 그의 좋은 소설들은 체념과 퇴폐로 빠지지 않고, 비극적인 세계를 있는 그대로 보임으로써, 그 허무주의를 극복할 수 있는 시적 역설을 보여 준다.
드러냄의 유형에 속하는 것은,「석유등잔불」,「안개바다」「꽃과 어둠」의 연작과, 「그 바다, 끓며 넘치며」라는 장편이다. 그것들은 한승원의 소설 중에서 제일 광휘를 발하는 것들이다. 그것들은 텅 빈 어둠의 역사적 근원과 텅 빈 어둠의 실존적 드러남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그 드러냄을 통해 어둠은 시적 역설로 밝음의 앞자리 혹은 윗자리가 된다.「석유등잔불」,「안개바다」,「꽃과 어둠」연작은 한 평론가가 순진한 눈이라고 부른 소설기법을 차용하고 있다. 독자들에게는 이미 알려져 있으나, 화자인 아이들은 그 의미를 모르는 사건들을, 아이들의 눈으로 그리는 것은, 아이들을 아이들스럽지 못한 일에 끼어들게 만든 현실에 대한 고통스러운 인식과 함께 아이들의 순진성이 왜곡된 형태로나마 드러나는 것을 보는 부드러운 느낌을 자아내게 한다. 가령
이 날은 가뜩이나 방 안에 오소리를 잡을 때 피우는 짚불 연기같이 짙은 담배연기가 꽉 차 있었다. 막 들어서면서 식은 빨갛게 타고 있는 담뱃불꽃밖엔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얼마 뒤, 어둠에 눈이 익어졌을 때에야 그 담배의 불꽃을 받아 빛나는 아버지의 눈알을 알아볼 수 있었다. 흡사 독오른 도둑 고양이의 살기어린 눈이었다.
그는 소름을 쳤다. 그게 바로 악질반동의 무서운 눈이다 싶었던 것이었다. 울력꾼들을 앞장서서 하눌재의 내리받잇길을 달려 내려가면서 식은 혀를 깨물었다. 반동자인 아버지가 원망스러웠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나쁜 사람들의 앞잡이 노릇만 했었을까. 눈살을 찌푸렸다.(「안개바다」)
라는 대목을 읽을 때, 독자들은 무슨 저런 아이가 있나, 아버지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는데, 그 고생하는 사람의 눈을 독오른 도둑고양이 같다고 생각할 수가 있나 따위의 고통스러운 느낌과 함께, 자기 또래 아이들과 허물없이 어울리고 싶은 아이들의 욕망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확인하는 부드러움을 같이 공유하게 된다.
국민학교 저학년인 식이라는 주인공의 시선에 의해 드러나는 그 소설들 속의 주된 사건에 대한 정보를 단락지어 모아 보면 다음과 같다.
① 그의 아버지(고영만 씨)는 그의 마을에서 제일 많은 농사를 짓고 있다. 그 마을 사람들은 논을 장만하는 것보다는 배나 그물 장만하는 데 더 신경을 쓴다. 그러나 그들은 농토 많은 사람들을 미워한다. 식의 아버지가 농토를 많이 산 것은 구장이나 총대를 하면서 공금을 긁어 먹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생각한다.
② 그의 집에는 아기업개로 순이가 들어와 있는데 그의 작은아버지가 그녀를 건드린다. 그녀의 오빠가 그 분풀이로 육이오 때 그의 작은아버지를 죽이고, 그의 작은누이를 윤간시킨다.
③ 그의 매형은 순이 오빠와 함께 여순반란사건 때 설치던 사람으로, 반란사건이 진압된 뒤 잡혀 토벌되어 죽게 된 것을 그의 아버지 힘으로 살아난다. 육이오 때는 보안서 부서장을 지낸다. 그는 뒤에 장인집 골방에 숨어 있다 체포된다.
④ 그의 아버지는 여성동맹에 다니는 순이 때문에, 그녀가 그를 죽이게 되어 있는 날 도피하라고 귀띔해 줘서 살아난다. 순이는 유격대원하고 살다가 정식으로는 시집 안 간, 그러나 애 밴 과부가 된다. 그녀는 애인의 집에 가 애를 낳아 주려 한다.
⑤ 작은누이는 자살을 한다.
「석유등잔불」,「안개바다」,「꽃과 어둠」연작은 그러나 그러한 사건으로만 요약될 수 없는 소설이다. 아이들끼리의 놀이, 성, 일하기 등등이 섬세하게 드러나 있는 그 연작은 줄거리보다 차라리 그 섬세성에 관심을 두고 읽고 싶을 정도로 아이들의 심리에 섬세하다. 그 섬세성을 통해 작가가 드러내려 한 것은, 부유한 사람들의 관대함, 자기 기만, 가난한 사람들의 공격본능, 시골 처녀들의 갇힌 성, 시골사람들의 종족보존욕, 삶의 지혜 등이다. 그러한 것들은 보통 때에는 일상적 삶 속에 갇혀 두드러지게 드러난다. 격동기에는 삶의 수식이 없어지고 삶 그것만이 벌거벗은 채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 삶은 추상적인 삶이 아니라, 생존 차원의 삶이어서, 개인이 바라는 것이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부각시킨다. 어린아이의 눈은 그런 삶을 비판 없이 혹은 수정하지 않고 그대로 소박하게 드러낸다. 그 소박성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소박한 아이들이 언젠가는 자라서 그것들의 의미를 확실하게 알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비추어 살아갈 것이라는 가능성 때문이다. 가령 자기 아버지가, 자기가 친일파가 아니라는 것을 변명하는,
"어짠께 친일파랑가? 일본놈들하고 가깝게 지냈응께 친일파랑가? 개 같은 놈들, 공출 작게 나오게 해주라, 건홍 물자 많이 나오게 해주라, 해의 일등품 많이 맞게 해주라고 돈 걷어줌스로 갖다가 받치락 한 놈들은 누군디....."(「석유 등잔불」)
라는 말을 단순한 자기 변명이 아니라, 식민시대의 진실한 현실의 한 단면으로 이해하고, 가령
아버지는 왜 반동자냐고, 아버지가 반동자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남과 이북 가운데 어느 쪽이 이겨야만 살 수 있게 되느냐고, 아버지는 어느 쪽에 가까우냐고, 묻고 싶은 것이었다.(「석유등잔불」)
라는 대목의 자기 질문이 자기의 이익을 잃지 않으려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욕망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가령 순이가 애를 낳아 주러 애인 집에 가겠다고 했을 때
"잘 생각했다. 그 집에 손 이어주는 것도 나쁜 일이 아니다."(「꽃과 어둠」)
라고 한 아버지의 말이 종족본능이라는 신화로 여자를 억누르는 것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는, 바로 그 가능성이 아이의 눈의 소박성을 인정케 하는 진정한 근거이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어린애가 아니나 있는 것을 있는 그래도 본다는 아이들의 순진한 소박성이, 그것 때문에 드러난 어둠을 극복하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준 것이 그의 대표작이 되리라고 생각되는 「그 바다, 끓며 넘치며」이다. 바다 한가운데 도사린 비리와 비인간적인 횡포 속에서 한을 알고 사는 갯가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작가 스스로가 말하고 있는 그 소설을 읽으면, 그 이전의 작품들은 그것을 낳기 위한 연습기의 작품들처럼 보인다. 그만큼 그 소설은 그 이전에 그가 취급한 거의 모든 종류의 삽화들로 가득 차있다. 그 삽화들을 아름답게, 다시 말해 절제 있게 구조화하여 한승원은 뛰어난 장편소설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것은 어촌의 비리, 예를 들어 어협의 경직성을 고발하면서도, 상당수의 고발소설이 취하는, 사태의 폭력적 해결을 시도하지 않고 있다. 개인의 폭력에 의해 사태는 해결되지 않는다. 폭력은 개인의 울분의 해소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그것은 사태가 한 순간이라도 해결된 듯한, 다시 말해 선이 악을 이겨낸 듯한 헛된 환상을 불러일으켜, 사태의 현실적 개선, 개조에 오히려 해를 끼칠 가능성을 갖는다.「그 바다」가 극도로 억압된 울분, 터지기 직전의 울분, 그러나 언젠가는 터지고야 말 울분으로 끝막음하고 있는 것은, 독자의 가슴속에 그것이 더 크게 울리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것과 연계되어 있는 것이지만, 이 소설이 보여 주고 있는 또 하나의 생각은, 진실을 위한 싸움은 표피적인 현상을 넘어서서 깊게 그리고 넓게 행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 소설의 주인공인 칠보와 그의 대역인 최질만의 김 양식권을 둘러싼 싸움은, 그 자체를 넘어서서 깊게 그리고 넓게 본다면, 그 둘을 싸움붙임으로써, 잠깐이나마 진실을 은폐하고 자신의 이익을 철저하게 그리고 확실하게 취하려는 최영만의 인형극에 지나지 않는다. 주인공이 소설의 맨마지막에 최질만에게 너나 나나 맹물만 썼다고 말할 때, 그는 최질만과의 싸움에서 새롭게 드러난 새 적에 대한 싸움으로 싸움이 확대되어 나가는 것을 피부로 느끼고 있다. 싸움은, 그것을 하는 사람들에겐 절실한 것이지만, 그것을 조종하는 사람들에겐 우스꽝스런운 것이다. 싸움이 싸움다워지려면, 그 싸움을 조종하는 손과도 싸워야 한다. 그리고 그 손 뒤의 손과도 싸워야 한다. 그 계속적인 싸움을 위한 결의가 억제된 울분이다. 터진 울분은 이미 싸움을 끈질기게 해내는 것을 포기한 것을 뜻한다. 울분을 억제하고 사태를 가능한 있는 그대로(비판력을 갖게 된 아이의 눈으로) 파악하고 분석하는 것, 그것이 진짜 큰 싸움의 전제이다.
한승원은 남도 갯가를 성공적으로 소설 공간 속에 옮겨 놓고 있다. 그를 통해 남도 갯가는, 마치 「탁류」를 통해 군산이 살아나듯, 남도 갯가로 살아난다. 그의 전라도는, 서정인의 전라도 소읍들, 김정한의 경상도 낙동강 하류, 이문구의 충청도, 염상섭의 서울 등과 함께 한국문학 지리부도의 한 거점을 이루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