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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히브리서 12장 14절 :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을 닮아가는 것으로서의 성화
그리스도인이 순결(성결)에 힘씀으로써 순결한 자가 되어서 구원을 온전히 이루어가 보려고 하는 성화에 관심을 갖는 것은 우리가 주께로부터 받은 구원의 온전함을 죄 사함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서 보지를 않고 우리 인격의 변화에서 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룩할 것을 말씀하는 구절이 나오면 이를 모두 성화의 관점에서 본다. 이러한 사실은 히브리서 12장 14절의 경우에서도 보게 된다.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하나님의 품성인 거룩을 닮아 거룩한 사람이 될 것을 요구하시며 이를 명령하시는 성화를 말하는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신약 주석을 쓴 최세창은 그의 히브리서에서 12장 14절을 Thyers와 J. E. Frame의 말을 인용하여 주석하기를 “화평함과 밀접하게 관련되는 거룩함을 좇으라의 거룩함은 하기아스몬(aJgiasmovn)으로서 ‘정화’, ‘신성화’, ‘헌신’, ’성결‘, 거룩‘(롬6:19; 고전1:30; 살전4:3, 7) 등을 뜻한다. 이 낱말은 원래 거룩하게 하는 것, 죄에서 떠나 하나님을 향하여 도덕적으로 순수하게 되는 역사와 성결의 결과적인 상태를 의미한다. 간단히 말하면, 성화의 과정과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또한 W. Barclay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이 낱말은 하기아스모스(aJgiasmov")이다. 아스모스로 끝나는 모든 헬라어는 완성된 상태를 말하지 않고 과정을 말한다. 성화도 완성된 상태가 아니다. 이것은 성결로 가는 길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렸을 때, 그는 거기서 정지하여 완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가 한번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나면, 그는 성화의 과정 곧 성결로 가는 길을 출발한 것이다”라고 하면서성화의 주체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따라서 믿는 우리는 거룩하게 하시는 주님께 순종함으로써 거룩해지고, 더 나아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거룩함을 좇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렇게 히브리서 12장 14절을 성화의 개념으로 보는 것은 주석의 관점에서 뿐만 아니라, 우리말 성경도 이것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번역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한글개역성경을 비롯하여서 우리말의 번역 성경 모두에서 볼 수 있다.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며 거룩한 사람이 되도록 힘쓰시오. 거룩해지지 않으면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공동번역).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쓰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뵙지 못할 것입니다”(표준새번역). “여러분은 모든 사람들과 화목하게 지내고 거룩함을 추구하십시오. 거룩해지지 않고서는 아무도 주님을 보지 못할 것입니다”(현대인의성경). 이는 이 성경들이 번역을 위한 성경으로 삼고 있는 라틴 벌게이트(Latin Vulgate)를 비롯해서 영어 성경에 따른 것인데, 한글 성경에서 사용하고 있는 거룩이라는 단어가 라틴 벌게이트를 비롯해서 ASV, NASB, WEB, LSG에서는 sanctification으로, KJV, NKJV, NIV, RSV, NRSV, DBY, DOUAY, LBE, Webster는 holiness, 또는 holy으로, NLT는 a clean and holy life으로 번역을 하였다. 그러나 YLT는 separation으로 번역을 하여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렇게 영어성경이든 한글성경이든 성화의 개념으로 번역하고 있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aJgiasmovn이다. 이것은 남성 명사 aJgiasmov"의 단수, 목적격으로 ‘거룩함을’으로 해석된다.
그런데 히브리서 기자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Eijrhvnhn diwvkete meta; pavntwn kai; to;n aJgiasmovn)고 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렇지 않으면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할 것(ou| cwri;" oujdei;" o[yetai to;n kuvrion)이기 때문이다. 즉,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아야 할 이유는 주를 보게 될 것과 관련이 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이야기를 하는 앞에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하면 믿음으로 산 사람들을 열거하면서(히11:) 이들이 하나 같이 바라본 것이 무엇인가를 말한다. 그것은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 라는 것이다(. 무엇 때문에 이것을 말하는가 하면, 믿음의 인물들이 ‘믿음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이 그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믿음으로’ 바라보고 온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그들의 구원이시기 때문이다(히12:2).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는 to;n th'" pivstew" ajrchgo;n kai; teleiwth;n !Ihsou'n으로 여기에는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 첫째는, ajrchgo;n 은 ajrcή와 ἄgω의 합성형으로 “앞서 인도하는 자”(chief or leader)의 뜻이며, 따라서 우리 번역과 같은 뜻으로 취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둘째는, 그러나 이 낱말의 어근이 ‘처음’인 ajrcή이므로 이 어귀를 /“믿음의 창설자”(the author and finisher or our faith)로 이해하는 견해도 유력하다. 공동번역성경, 표준새번역성경, 현대인의성경, 현대어성경은 모두 이 견해를 따른다. 영어번역성경으로는 KJV, NKJV, AV가 이 해석을 따른다. 그러나 NIV, RSV 등의 다른 영어번역성경은 첫째의 경우를 따른다. 이 두 견해에서 후자인 둘째의 경우가 유력해 보인다. 그것은 ‘처음’(ajrcή)과 ‘끝’(telo"j)이란 반대어를 살려서 예수는 믿음의 시작이요 끝이란 것으로 예수에게서 믿음은 출발하고 또 그에게서 믿음은 완성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믿음의 ’시작‘은 ’근원‘의 개념이다. 이것이 문맥의 흐름에도 맞아 보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히브리서 11장에 소개되고 있는 분들의 ‘믿음으로’ 들어와, 그들을 ‘믿음으로’ 주도하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 그들이 14절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믿음으로’ 바라보게 될 주이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히브리서 기자는 우리의 믿음의 근원이며 완성자이신 예수만 바라보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분은 앞서 말해온 옛언약이 목표해왔던 새언약의 중보자시오 최고의 증인이시므로 이 한 초점을 향해 주의 깊게 응시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은, 곧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 뒤에 올 기쁨을 아시고 그 십자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고 거기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지금은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아 계신다(히12:2). 만일 그를 믿고 따르는 자들이 지치거나 낙심케 되거든 죄인들의 무서운 만행을 참고 견디신 예수님이 당하신 일을 생각하고 인내하여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히12:3-4). 그런가 하면,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훈계와 그에 따르는 징계의 혹독한 시련을 참아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자녀에게 하여야 할 일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히12:5-13). 하나님은 자기 자녀된 자를 육을 쳐 복종하게 하여 영의 일을 생각하고 바라보게 하신다.
그리고 이것의 이야기에 의해서 14절인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좆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를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려 죽음을 당하는 고난을 받게 하셨으나 그를 높여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의 영광스러운 자리에 앉게 하시고는 그의 온전함에 그를 믿는 자들을 두시고는 그들의 믿음을 이끌고 가신다. 그들에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지내고 거룩하게 살기를 힘쓸 것을 말씀하신 것은 이 말씀을 하시게 된 것이 그들의 화평치 못하고 거룩하지 못한 사실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무엇 때문에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는가를 다루시면서 우리가 죄의 유혹과 맞서서 싸움으로 겪는 고난, 하나님의 자녀 된 자가 받는 징계를 말씀하신 것이다. 그 모두가 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상처에서 나음을 입고, 화평 하고 거룩 하는 것은 그리스도이신 예수께서 대속주가 되셔서 십자가에 달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이 저주하시는 심판을 대신 받으신 까닭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이 공로를 은혜로 입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하며 거룩한 사람이 된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자가 말하고 있는 ‘화평함과 거룩함’은 십자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행위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우리가 화평에 힘쓰고 거룩에 힘쓴 그 선한 행위에 의해서 화평을 이루고 거룩한 사람이 되는 성화가 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화평과 거룩은 십자가를 지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죄에 대하여 죽은 자가 되게 하시며, 날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게 하심으로써 이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은 자신을 믿는 자들의 주가 되셔서 그들의 화평과 거룩을 다스려 가신다. 이것은 성화의 개념에서가 아니라 예수님을 믿는 자들에게서 발생하는 죄에 대하여서 그 죄가 그를 정죄하여 죽음의 심판으로 이끌고 가지 못하도록 십자가에 달려 구속의 피를 흘리신 그리스도의 의가 막아 나서 변론하시며 보호하시는 까닭에서 이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을 소유케 하신데서 이다. 이런 그는 성화되어갈 자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그 나라의 백성으로 온전한 자이다.1) 이것의 근거가 지금 믿는 자들의 주(머리)이신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오른편 보좌에 앉아계신 사실에 있다.
히브리서 12장 14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거룩을 추구하며 거룩한 행실을 가져 거룩에 힘쓸 것이라든가 거룩한 사람이 되라는 형식의 구절은 베드로의 서신에서도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데, 베드로전서 1장 2절, 12절, 15절, 2장 2절, 21절, 베드로후서 3장 11절, 14절에서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모두는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 성화의 과정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의 관계성 속에서 자신들의 정체를 알라는 것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날까지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경건하게 살아야만 하는 것은, 곧 경건하게 살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래서 그들이 모든 행동에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만 하는 것은, 다시 말해서 거룩한 사람이 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수가 없기 때문이다. P. E. Hughes가 쓴 히브리서 주석에서 소개하고 있는 르페브르 테타플이 한 말은 옳다. “마음이 거룩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가장 비극적인 손실이며 가장 궁극적인 불행이다.”2) 그래서 믿는 자들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불러 모으신 자들을 자신과 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여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레19:2; 벧전1:16)는 언약의 성취된 관계성 속에 두시고서 거룩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주로 모시고 섬기면서 따르는 자들이 거룩에 힘써 나가게 하시면서 그들이 이르지 못하는 거룩의 온전함으로 나타나 자신과 한 몸을 이루고 있는 자들의 온전한 거룩이 되어 그들을 또한 거룩하게 하신다. 바울은 이 신비의 비밀을 에베소서 5장 26절, 27절에서 그리스도와 그의 신부된 교회의 관계를 가지고서 알려주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목숨을 버리시면서 까지 교회를 사랑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씻어 거룩하게 정결하게 하시려고 목숨까지 버리셨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하신 것은 한 점의 티나 주름도 없고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맞아들이려고 그렇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은 믿는 자들이 아닌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시며, 믿는 자들의 거룩은 그들이 거룩한 행실을 갖고 거룩에 힘써 거룩한 삶을 살고, 그래서 거룩한 사람이 되어서 거룩이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받들어 따르지 못함으로 결코 거룩에 이르지 못하는, 그래서 전혀 거룩하지 못한 그들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거룩 속에 두시고서 그들에게 거룩하라고 하신 그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온전히 이루심으로써 그 거룩이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시는 자들의 거룩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무슨 성화의 과정이 있을 수 있겠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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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온전함’은 그가 성숙한 자로 성장하여가면서 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그의 몸으로 하나 된 데 있다. 즉, 그리스도와 하나 되어 그의 몸으로 온전한 몸을 이루는 것으로 말해지고 있는 것이다(엡3:20-22, 4:13-16).
2) 최세창은 그의 신약주석시리즈 히브리서에서 P. E. Hughes가 쓴 히브리서 주석에서 소개하고 있는 르페브르 테타플이 페브르 테타플가 한 말인 “마음이 거룩하고 순결하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을 보지 못할 것이다.”를 오해하였다. 그래서 그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순결할 것을 요구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 성화되어 갈 것을 말씀하시는 것으로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