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열성당 순환길 야간 도보 순례
○ 순례 일자 : 2013. 07. 19. ~ 20. 금,토요일 (22:45 ~ 03:15)
○ 순례 인원 : 50 명 (이영춘 요한 지도신부, 이동수 안드레아 안내)
○ 순례 일정
1. 21:15 : 전주 교구청 출발
2. 22:45 : 함열성당(咸悅聖堂) 출발
함열성당 : 1959년 1월 10일 제12대 김영구 신부가 안대동 성당에서 함열 성당으로 본당을 옮겨 함열성당 시대가 열렸다. 1959년 10월 29일 본당 건물을 신축하고 봉헌하였다. (안대동 공소 참조)
함열(咸悅) : 본래 백제의 감물아현(甘物阿縣)이었는데 당나라가 백제를 멸한 뒤에 노산(魯山)으로 고쳐 노산주(魯山州)의 영현으로 하였다. 신라 경덕왕 때 함열로 고쳐 임피군(臨陂郡)의 영현으로 하였다가, 고려 현종 때 전주에 예속시켰고 명종 때에 감무를 두었다.
조선 태종 때 용안(龍安)과 합쳐 안열(安悅)로 하였다가, 뒤에 이를 나누어 각각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에 군이 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군을 폐하고 일부는 옥구군에, 나머지는 익산군에 병합되었고 1979년에 함열면이 읍으로 승격, 1995년 익산군과 이리시가 통합되어 익산시로 되었다.
금강 남쪽 호남평야에 자리잡고 있으며, 북쪽으로는 임천(林川)ㆍ한산(韓山)ㆍ홍산(鴻山) 등지와, 남쪽으로는 임피ㆍ김제ㆍ만경 등지와 연결되는 도로가 발달하였다. 조선시대에는 금강연안에 성당(聖堂) 조운창(漕運倉)이 있어 이곳의 곡식을 경창(京倉)으로 날랐다.
부근의 용산(龍山)에는 백제 때 산성의 유물이 있었고, 소방산(所防山) 봉수는 서쪽으로 임피현 오성산(五聖山)에 응하고 동쪽으로 용안현의 광두원산(廣頭院山)에 응하였다.
3. 22:50 : 함열중학교
4. 23:00 : 동지상(冬至上·동지매) 마을
동지 마을을 상하로 나눈 이름. 동지산 밑의 마을이므로 생긴 이름. 동지매의 매는 뫼(山)의 변한 말.
5. 23:04 : 삼양(三陽) 마을
전에는 벌메라고도 했는데 벌메는 수목이 없는 야산이라는 뜻. 삼양은 동남향한 양지바른 곳이므로 산양(山陽)이라 했었는데 삼양(三陽)으로 바뀌었다는 설과 또 길이 세 갈래로 나있어 삼거리와 양지의 합친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6. 23:05 : 동지산 마을 표지석 - 왼쪽 마을 안길로
7. 23:12 : 안대동 공소
안대동 공소는 1896년에 설립되었다. 1910년 10월 19일 초대 서병익 신부가 본당을 설립하였다. 서 신부는 나바위 성당으로부터 11개 공소와 신자 1,088명을 인수받았다. 그 당시 안대동에는 24가구의 교우집이 있었다. 1911년과 1912년 그리고 1916년에 드망즈 주교의 방문이 있었다.
1951년 2월 제11대 송남호 신부가 부임하였다. 송 신부는 재임기간(1951~1958)이 안대동 본당 역대 주임신부 중 가장 길었고, 많은 일을 하였다. 송 신부는 성당 벽을 벽돌로 쌓았다. 그리고 라디오를 들고 다니며 삼종을 쳤다. 그 종소리를 들으며 교우들의 신앙이 성장하였다. 교세는 갈수록 증가되어 대축일이 되면 성당이 비좁아 숲이나 성당 밖 곳곳에 서서 미사에 참례하였다. 교구에서는 안대동 본당이 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교통이 불편하고 장래성이 없어 함열읍으로 본당을 이전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1959년 1월 10일 제12대 김영구 신부가 함열 성당으로 본당을 옮기므로 안대동 본당은 폐쇄 되었다.
순례차 방문한 안대동 공소는 성당 안은 주물공장으로 변했고 사제관도 관리가 안 되어 있고 주변환경이 너무 많이 변하여 있었다. 하루 빨리 원상 복구하여 우리의 신앙선조들의 땀과 열정이 깃든 신앙의 보금자리로 가꾸어 나가야 하겠다.
뮈텔주교 일기 (1896년 11월 23일)
보두네 신부의 첫 관할 지역인 용안 땅의 동지매(익산시 용안면 동지산 마을)를 향해 출발. 비에모 신부는 우리와 함께 갔다. 길을 메운 짐들을 밀어 치우지 않고는 장터를 지나갈 수 없었다. 나바위를 지나자 수많은 교우들이 무리를 지어 왔다. 200명의 교우들이 우리를 따라 들판의 좁은 길을 지나며 긴 행렬을 했다.
8. 23:18 : 안대동 마을 표지석 - 왼쪽으로 큰길로
9. 23:24 : 오른쪽 과속 단속 표지판 옆으로
10. 23:27 : 학동 마을 회관 (10분 휴식)
學洞마을 지형 鶴洞說 碑
서기 1916년 學洞으로 썼다. 그러나 마을 지형이 鶴과 같아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과 鶴이 많이 깃들어서 생긴 이름이라는 설 또 書堂이 있어 學堂을 學洞이라는 설이 있다.
11. 23:48:칠정마을
12. 23:59:정자(亭子)마을 - 큰 느티나무 세 그루가 있어 생긴 이름
13. 00:05:남당리 → 00:09:우리고물상 → 00:16:서동촬영지표지판 → 00:26:석재
공장 → 00:29:흰돌교회 → 00:41:덕성원 → 산넘기
14. 00:54 : 용왕(龍旺)골 교우촌 (30분 휴식) - 점촌(店村) 교우촌
용왕은 용왕산 골짜기에 있어 생긴 이름이다. 점촌은 전에 도자기를 만들던 곳.
박제원의 전교 약기
(죠스(요안) 신부께서) 거기서 떠나 가새벌 ․ 차돌백이 여러 공소를 지나, 달이실[月谷] 용촌내 공소에서 함열 용왕골로 왔는데, 이 공소는 백주교 신부 때에 잠종(潛蹤)하시던 동리라. 거처하시던 집을 가보니 대밭 밑 삼간초옥에 집이 낮아 키 큰 사람은 머리를 들기 불편하고, 신공하시던 자리를 가보니 솔밭 가운데 작은 정무가 있어 그 위에 방석을 깔고 신공을 하여 세월을 보내셨다 하더라.
15. 01:33 : 석치(石峙)마을 표지석
전에는 고개에 돌이 있어 이루어진 이름. 돌고개→石峙.
16. 02:04 : 두라(斗羅·豆羅·두리기·두리기)마을
1972년 두라와 용운(샘골)이 합쳐 한 마을이 되었다. 샘골에는 들샘이 있어 물이 잘 나고 그 샘의 모양이 우렁이와 같다 하여 우렁샘골이라고도 하였다.
17. 02:10: 석매 건널목 → 02:20:와리 건널목
18. 02:26 : 부촌(富村·부장골)
부자가 많이 살아서 생긴 이름이라 한다. 부자골→부장골.
19. 02:34 : 아사달 공원 (20분 휴식)
사랑불로문(不老門)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창덕궁 연경당 입구에 세워진 돌문이 불로문이다. 양쪽기둥과 심방석(心枋石) 전체가 통석 ㄷ 모양으로 도려내어 만들어졌으며 이 문으로 다니면 무병장수한다는 뜻이 있다. 사랑불로문은 아사달공원 이미지에 맞게 창작하였으며 이 문을 오고가는 모든 사람들의 사랑과 건강을 기원하고자 했다. - 조각 김종원, 이두석
20. 02:53:휴먼시아 아파트 → 02:56: 농협 → 03:00: 함열초등학교
21. 03:15 : 함열성당
첫댓글 야간 도보순례라 무더위는 피하셨지만 어두움이 있어 고생하셨습니다. 그래도 고생하신 만큼 보람도 크시고 은총도 충만하셨을 겁니다. 부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