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수도 : 예루살렘
2. 인구 : 426만 명
3. 면적 : 21,501km2(남한의 4.5분의 1)
4. 종교 : 유다교(유다인), 이슬람교(아랍인)
5. 역사 지중해의 동쪽 끝에 위치한 성지 이스라엘은 북으로는 레바논, 동으로는 시리아와 요르단 그리고 남으로는 시나이 사막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스라엘은 비록 작은 땅이지만 고대엔 이집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를 연결하는 중요한 통신로였다. 오늘날에는 세가지 큰 신앙의 땅으로 전 세계인의 관심대상이 되고 있으니, 즉 유다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를 태동시킨 땅이다. 유다인들에게는 성서와 그들의 과거의 영광스러운 땅이고, 크리스찬들에게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지로 그 분이 사시고 죽으셨으며 영광스럽게 부활하신 곳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시며 가르치신 거룩한 땅이고, 이슬람교도들에게는 그들의 예언자가 하늘로 올라간 땅이다. 그러나 이 땅은 고대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전쟁과 분쟁의 연속으로 인해 피로 점철된 파란의 땅이 되어 왔다. 이 성지보다 더 극적인 역사를 지닌 나라는 없을 것이다.
6. 언어 : 히브리어, 아랍어
7. 화폐 : 화폐의 단위는 세겔(SHEKEL)이며 미화 1달러는 약 2세겔 정도임.
8. 기후 이스라엘의 여름(4월∼10월)은 길고 더우며 비가 없다. 그러나 예루살렘, 사페드와 같이 고지에 위치한 도시들은 다른 지역보다 특히 건조한 반면 시원하다. 겨울(12월∼3월)은 일반적으로는 온화하나 구릉지대는 꽤 서늘하다. 한차례의 소나기가 햇빛사이로 쏟아지곤 한다. 이스라엘에서는 연중 수영을 즐길 수 있다. 특히 4월에서 10월경에 지중해 해안과 갈릴레아 호수에서 즐기는 것이 좋으며 겨울에 적합한 곳으로는 사해 해변과 홍해 연안이 있다.
9. 산업 이스라엘은 생동력있는 산업국가이며 공업국가이다. 식료품을 자급자족하고도 많은 양의 농작물을 수출하고 있다. 공업은 스틸이나 기계류의 생산을 많이 하며, 항공기 제조, 선박업, 전자공학, 기타 과학기초산업, 다이아몬드 세공, 연마업, 합성섬유제조, 광물 공정 등이 있다. 소비 상품으로는 가공음식, 패션옷, 가구, 전자제품, 보석류, 종교 서적 등이 있고 수출도 활발하다. 주요 사업 중의 하나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관광산업이다.
10. 전압 : 220볼트
11. 시차 : 한국과 7시간(한국이 7시간 빠르다)
바티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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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1년의 이탈리아 통일이래, 이탈리아 정부와 교황청은 대립을 계속해 왔으나 1929년 뭇솔리니 정권은 교황청과 라테란조약(Lateran 約)을 맺어 화해하였다. 이에 의해 교황청은 로마 시티의 비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면적 0.44㎢를 영유하는 독립국이 되고, 외교상으로는 교황이 일국의 원수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었다. 바티칸시국은 바티칸 궁전을 중심으로 한 지대와 이탈리아 안에 산재하는 약간의 성당을 그 영토로 하고 있는데, 성(聖) 베드로 성전 앞의 성 베드로 광장은 일반에게 개방되어 이탈리아 경찰의 관할하에 있다. 바티칸시국은 이탈리아와의 협정 아래 화폐와 우표를 발행하고 있다. 바티칸시국에 있어서는 교황의 절대적 통치권이 확립되어 있으며 이를 돕는 것이 추기경(樞機卿) 회의이다. 재정은 각국 신자들로부터의 기부와 라테란 조약에 의해 이탈리아 정부가 몰수한 교회 재산에 대한 보상으로 지불하는 자금으로 주로 운영되고 있는데 그 액수는 매우 큰 것으로 생각된다. 교황은 전 세계 10억 가톨릭 신자들의 정신적 지도자로서 큰 영향을 갖고 있으며 세계의 약 50여 개국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바티칸시국은 세계적인 미술품과 자료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우선 성 베드로 대성당에는 바로크 미술의 진수를 지닌 베르니니의 '교황제단 천개', 성모 마리아가 운명하신 그리스도를 무릎에 올려놓고 통곡하는 삐에타 대리석상(미켈란젤로 작)이 있다.
회화관에는 주로 종교화를 시대순으로 진열했는데 안젤리코의 '성 모자'나 라파엘의 '포리뇨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헤로니무스 평화' 등이 있다. 이 밖에 도서관에는 보통서적 50만, 수사본 6만, 고판본 7천권과 세계에서 제일 많은 사본, 필본을 소장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진열실에는 성서나 복음서의 수사본, 토마스 아퀴나스·미켈란젤로·루터·에라스무스의 서한이 있다. 시스틴 성당에 그려진 벽화는 너무나 뛰어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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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티첼리를 비롯한 유명한 몇몇 화가가 양쪽 상단벽에 모세와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린 그림도 모두가 무한한 감명을 주지만 특히 미켈란젤로의 천정화와 제단화는 더욱 솜씨가 놀랍다. 너무나도 유명한 천지창조, 실락원, 최후심판, 내부의 샹데리아 석등 등 예술의 신비가 가득하다.
1506∼1626년 베드로 무덤을 중심으로 미켈란젤로가 설계하고 베르니니가 건축을 완공한 베드로성전은 조상이 남긴 많은 유적을 보관할 수 있다.
성서에 없는 그리스도에 관한 전설에 따르면 서기 67년 어느날 젊은 시절 갈릴레아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했던 어떤 늙은이가 끌려왔다. 그는 너무나 그리스도교를 열심히 전교하여 로마관헌에게 잡혔고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선고를 받았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은 방법으로 처형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니 거꾸로 매달아 죽게 해달래서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고 한다.
이 순교자는 바로 그리스도의 12제자중의 한 사람인 시몬 베드로로 성 바오로와 함께 로마에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네로의 옥외극장 바로 바깥에는 불에 타죽고 학살된 기독교 신자의 시체를 묻은 묘지가 있는데 베드로의 시체도 거기 던져졌었다. 그러나 베드로의 죽음은 헛되지 않아 그가 죽음으로써 많은 신자가 생겼고 250년 뒤(313년)에는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 대제도 개종하여 가톨릭 신자가 되어 곧 베드로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다. 이 콘스탄티누스의 교회는 성 베드로 성전이라고 불리며 1100년 동안 있었다. 이 성전은 역대 교황이 다스렸고 또 온 유럽의 왕이나 황제가 성 베드로 무덤 앞에서 대관식을 올리게 되었다. 1450년 무렵부터 이 건물은 노후하기 시작했다. 율리우스 2세 교황은 이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그 전의 2배나 되는 새 성당을 세운 것이 바티칸 궁전 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전이다. 이 건물은 르네상스의 대표적 건물로서 장엄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이 건축의 중심이 되는 지름 42m의 중앙돔은 미켈란젤로의 설계로 이루어졌고 그가 70살을 넘은 뒤 손을 댄 것이다. 이 돔은 108m의 높이에 그 위에 24m의 탑이 서 있으며 그 끝에 십자가가 있다. 이 돔의 맨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고 성 베드로 대성전 내부의 제단(월계수 잎사귀 모양의 나선형) 기둥은 판데온에서 가져온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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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루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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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르드는 프랑스 남쪽의 국경을 막은 피레네산맥의 산록에 위치하고 있는 작은 마을이다. 본래 세상에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1858년 2월 11일 이후 수십 회에 걸친 성모 마리아의 발현이 있은 이후로 일약 세상에 유명해졌다. 그 마을의 교외에 있는 가르와리아라는 산록을 따라 가브강이 흐르고, 그 중간에는 샬레섬이 있어서 강물을 두 갈래로 나누고 있지만, 그것이 다시 합류되는 곳에 큰 절벽이 있고 그 가운데 마사비엘이라고 부르는 굴(洞穴)이 있다. 이곳이 성모께서 발현하신 성지이다.
그것은 교황 비오 9세가 성모 무염시태를 새 신덕도리로 반포하신 후(1854년 12월) 3년 2개월 째 되는 날이었다. 가난한 물방앗간 집에서 출생한 벨라데따라는 13세의 소녀가 강을 건너 마싸비엘 부근에 가서 땔나무를 하기 위하여 흘러 내려온 나무를 한참 줍고 있을 때 돌연 큰바람이 불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매우 놀라 뒤를 보니까 마침 굴속에 아름답고 어여쁜 한 부인이 계셨다. 그는 몸에 백설과 같은 흰옷을 입고, 허리에는 하늘색의 띠를 두르고 손에는 백주금쇄(白珠金鎖)의 묵주를 들고, 깨끗한 맨발로는 두 장미꽃을 밟고, 눈은 황홀하게 하늘을 우러러보고 계셨다. 벨라데따는 그이가 누구이신가를 아직 모르며 다만 그 아름다운 모습에 도취되어 마음속에 무한한 즐거움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묵주를 꺼내어 같이 기도를 바치고 영광송이 끝나자 그 귀부인의 모습은 사라졌다. 그 후 벨라데따는 집에 돌아와서 양친과 본당 신부께 그 이야기를 하였지만 그들은 믿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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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4일 벨라데따는 그 귀부인에 대한 정에 못 이겨 재차 마사비엘을 방문하였다. 그는 예상한 대로 또 귀부인의 발현을 보았지만, 그의 모습은 호기심으로 그를 따라간 다른 사람에게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그들은 그때의 벨라데따의 탈혼상태에 놀라 그와 소리를 합쳐 묵주기도를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귀부인의 발현은 2월 11일부터 7월 16일 갈멜산의 성모의 축일까지 18회나 되었다. 혹은 호기심으로 혹은 신앙심으로 벨라데따를 따라 동굴에 가는 사람은 점점 증가하여 종종 수백만 명에 달한 때도 있었다.
3월 25일 성모 영보축일에 16회 째 귀부인의 발현을 본 벨라데따가 "오, 부인이여! 당신은 누구시며 당신의 이름이 무엇이옵니까?"하고 여쭈어 보니까 귀부인은 하늘을 우러러보시면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명백히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분이 성모 마리아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보다 먼저 성모 발현의 목적에 대하여 벨라데따에게 "여기에 성당을 세우고 많은 사람들이 이곳에 모이는 것을 원한다는 것을 사제에게 말하라"고도 분부하셨고, 또 "죄인의 회개를 위하여 기도하라"고도 명령하셨으며, 다시 벨라데따 개인에 대해서는 "나는 반드시 너를 행복하게 하여 주리라. 그러나 그것은 이 세상에서가 아니라 저 세상에서이다." 하고 고마운 약속을 하셨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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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5일 9회째 발현에서는 "샘의 물을 마시고 세수를 하여라"고 명령받았다. 벨라데따는 샘 같은 것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손짓한 곳을 손으로 파보니까 과연 물이 솟아났다고 한다. 이것이야말로 후에 많은 병자를 영적으로 낫게 하고, 매일 12만2천4백 리터의 물을 내게 하는 루르드의 영천(靈泉)의 시작인 것이다.
이 영천의 난치병에 대한 효능은 실로 놀랄만한 것으로써 지금까지 영수(靈水)를 마시고 혹은 몸을 씻음으로써 아주 희망이 없었던 병자가 완쾌된 예는 얼마나 되는지 모를 정도이다. 1861년까지 3년 동안에 이미 100건 가량의 완치 사례가 있었고, 의사단(醫師團)의 엄밀한 조사에 의해서도 "그 중의 15건은 적어도 인간의 지식을 초월한 기적이다." 하고 결정되었던 것이다.
7월 16일 최후의 발현이 있은 후 그 교구의 주교는 신학자, 과학자, 의학자 등으로 구성된 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발현의 사건에 대하여 충분한 신학적·과학적인 조사를 하도록 명하였는데, 그 결론은 각 위원 모두 자연적인 현상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가 없고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인정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에 일치하였다.
이와 같은 기적이 세상에 알려짐에 따라 루르드에 순례하는 자는 날이 갈수록 증가되었다. 프랑스 국내는 물론 멀고 먼 외국에서도 개인으로 혹은 단체로 이 성지를 방문하고 그 동굴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의 전달을 간구했으며 영육간 많은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이루 헤아릴 수가 없고 그 영수(靈水)의 효능으로 난치병을 회복한 자도 그 수를 모를 정도로 다수에 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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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용시의 한 조각가 파비슈는 벨라데따에게 발현하신 성모 마리아 모습을 조각하여 그것을 [마사비엘]의 동굴 안에 안치하고 1864년 4월 4일 그 축성식을 거행하였다. 오늘까지 세상에 유명한 루르드의 성모상은 바로 이것이다.
루르드의 성모의 전달로 은혜를 받은 신자들 중에는 감사의 헌금을 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한 헌금으로 성모의 원의대로 그곳에 건립된 화려한 성당은 1876년 7월 2일 축성되었다. 그 후로 그곳을 참배하는 순례자는 한층 더 많아져 매년 평균 60만명인데, 1933년의 발현 75주년에는 실로 150만명에 달하였다고 한다.
병자의 완치는 모두가 기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루르드 의국조사위원(醫局調査委員)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최초의 55년 동안에 기적이라고 인정되는 것이 4,445건이나 된다고 한다. 또한 루르드를 순례하는 병자가 모두 다 완치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누구든지 많은 위안을 얻어 병고를 잘 참게 된다는 것은 일반이 인정하는 바이다.
루르드 성지에서는 매일 미사성제가 여름에는 새벽 5시 30분부터 9시 30분 그리고 겨울에는 아침 8시 30분에 드려지고 있다.
성모상은 성모님께서 나타나셨던 바로 그 모습이며 또 바로 그 같은 장소에서 성모님께서는 피레네 방언으로 "나는 원죄 없이 잉태된 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벨라데따에게 자신의 신분을 알려주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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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왼쪽 동굴 안에 자물쇠로 잠겨진 돌판 아래에는 1858년 2월 25일 9번째 발현 당시의 성모님의 말씀에 따라 벨라데따가 땅을 파헤쳤을 때 솟아올랐던 샘이 있다.
이 샘의 물은 몇 개의 큰 저수통에 저장되어서 목욕하는데 공급이 되고 또 우리가 마실 수 있도록 된 샘에도 공급된다.
샘 왼쪽에 대리석 판이 있는데 그 위에 성모님께서 벨라데따에게 여러 번 발현 당시에 하신 말씀이 적혀 있다. 그 말씀은 중요한 메시지로서 우리들 각자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가브강을 따라 동굴을 지나가면 많은 순례객들이 들어갈 수 있도록 1955년에 다시 지어놓았던 건물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목욕실로 지어진 건물이다. 여기서 병자나 건강한 이들 모두 목욕을 할 수 있도록 초대되고 있으며 수많은 이들이 아침 9시부터 11시까지 그리고 오후 2시 30분에서 4시까지 목욕물에 들어간다.
맨 위에 지어진 대성당은 이미 알려진 것처럼 "여기에 성당을 짓도록 하라"고 하신 성모님의 요청에 의해 지어진 것이며 그 성당의 제대가 바로 성모님 발현 장소의 위쪽에 위치하고 있다. 그래서 이 대성당은 출구가 왼쪽에서 시작된 것이다. 성당 양쪽의 유리문은 발현 당시부터 1876년 루르드 성모상 하관의 역사까지 계속 보여주고 있으며 또 좀더 위쪽 유리문들은 세상 태초부터 비오 9세까지 정식 [교의]로서 발표하시기까지의 성모 무염시태 신비를 상기시켜주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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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1,530m의 거리를 두고 언덕 위에 십자가의 길이 만들어졌다. 각처마다 쇠로 조각된 2m 높이의 상들이 있다. 누구나 이 언덕의 십자가의 길을 방문하면서 대사를 얻고 은총의 상태에서 거룩한 십자가의 고통을 묵상할 수 있다. 순례객들의 편의를 위해 왼쪽에는 기도문이 새겨져 있다. 또 한편 병자 순례단을 위한 십자가의 길이 마련되어 있는데 그것은 가브강을 따라 목욕실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고 1963년 3월 25일에 만들어진 것이다.
이 십자가의 길은 합당한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잘 준비시켜 준다.
여름에는 항상 문이 열려 있는 이 성당은 50개의 고해소가 있고 각 나라에서 오신 신부님들께서 각 나라 말로 고해성사를 주는 기회를 마련하고 있다.
바른쪽 경사지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 사무실은 불치병 완치에 대한 연구나 교회에서 인정된 기적에 관한 순례객의 질문에 대한 안내의 역할을 하는 일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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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아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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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과 스페인은 거의 자유 왕래다. 태양의 나라, 투우의 나라, 정열적인 국민성을 나타내는 훌라맹고의 나라인 에스파니아 즉 스페인은 면적 50만㎢(한반도의 2.3배), 인구 약 3,900만 명의 전통적 가톨릭 국가이다. 수도는 마드리드. 근세 초기에는 세계 최강의 해상제국으로 "스페인의 영토에는 해가 지는 일이 없다."고 할 정도로 눈부신 발전을 하였으나 17세기 이후 국운이 기울어 현재는 유럽의 후진국에 속할 정도이다. 스페인의 기후는 각 지방마다 다르나 대체로 대륙성 기후이며 공기는 건조하고 비가 적은 편으로 4∼10월이 여행하기에 가장 좋은 계절이다. 우리 나라 교포는 약 700명 정도인데 대부분이 태권도 사범과 그 가족들이다 스페인의 상점, 회사, 관청 등의 집무 시간은 오전 9시∼오후 1시, 오후 4시 30분∼오후 8시이며 오전에만 근무하는 곳도 많다. 마드리드의 수호 성인 이시도르 축제 기간에는 매일 투우장에 인파가 몰린다. 투우 사육장이 400여 개나 되고 마드리드 시가지에는 유명한 투우사인 안토니오의 동상이 세워져 있을 정도로 투우는 그 인기가 대단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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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대 데레사의 탄생지인 아빌라시를 '성인의 도시'라고도 부른다. 아빌라는 해발 1,131m의 높은 위치로 옛날부터 군사적인 요충지로서 (높은 성벽이 시가지를 빙 둘러싸고 있음) 회교도와 그리스도교도 간에 300년 동안이나 공방전을 계속한 곳이며 파괴와 수리를 되풀이하여 현재의 모습으로 개축된 때가 1099년이다. 성벽의 전체 길이는 2,400m요, 높이는 12m이다. 성녀 대 데레사는 1515년 3월 28일 탄생하여 12세 때에 어머니를 잃고 수녀원에서 위탁교육을 받은 뒤 19세 때 가르멜 수녀원에 들어가 완덕의 길을 닦기 시작하였다. 성녀는 어느 날 성당에서 기도를 하다가 예수께서 매질을 당하시는 장면을 그린 상본을 쳐다보고 또 성 아우구스띠노의 고백록에서 받은 감명으로 크게 각성을 하게 되었다. 그 결과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의 생활이었다."고 자서전에 적고 있다. 자기 안의 예수의 생활, 이것이 바로 유명한 데레사의 신비 생활의 기본인 것이다. 이런 생활이야말로 바오로 사도의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갈라디아2, 20)라는 성경 말씀과 같은 것이다. 성녀 대 데레사의 저서는 지금까지 신비신학의 기초로서 존중되고 있으며 그 기본은 "하느님 없는 나는 무(無)요, 나에게 하느님은 전부"라는 사상이며 "모든 것에 있어 주의 성의를 이행함"이라는 그의 표어다. 이렇듯 데레사는 영혼을 신비계로 끌어들이는 동시에 가르멜회의 개혁에 착수하여 마침내 성공을 거두니 다른 수도회의 모범이 되었다. 데레사 성녀가 쓴 "영혼의 성", "완덕의 길", "천주 자비의 글"이 발행되어 쉽게 구할 수 있다. "주여 당신을 위해 고통을 받겠나이다. 그렇지 못하면 차라리 죽겠나이다."하면서 극기 수덕의 길을 걷던 데레사 성녀는 1582년 10월 4일 기쁨 중에 "주여 나는 성 교회의 딸입니다."라고 거듭 말하면서 숨을 거두었다. 데레사는 사후 40년이 지난 1622년에 교황 그레고리오 15세에 의하여 시성되었고 1970년 교회학자로 선언되었다. '알바 데 또르메스'의 성녀 대 데레사 성당에는 4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성녀의 심장과 팔이 썩지 않고 그대로 보존되어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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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투갈 파티마
7대 교회(요한 묵시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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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2,18-29) |
바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다. 주전 300년에 Seleucus 1세에 의해서 세워진 도시이며 주후 1세기에는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하였다. 사도행전 16,11-15에 의하면 사도 바울로는 제 2차 전도여행 떄에 필립보에서 '티아디라에서 온 리디아'를 만났다고 되어있다. 리디아는 자색 옷감 장수로서 하느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지금은 교회가 기둥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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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3,14-22) 리커스 계곡에 위치한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알렉산더가 죽은 후 Seleucid왕가의 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이아라 불렀다. 이곳에서 6.5km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이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요한 묵시록 3장 14절 이하에는 라오디게이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이곳에는 현재 로마식 야외 운동장과 원형 극장터가 발견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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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2,12-17) 이 지역은 가장 오랜 선사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다. 주전 3세기에 베르가모는 독립된 왕국의 중심이 되어 높은 문화를 이루었다. 이곳의 부의 근원은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 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였다. B.C. 133년 이후 로마 통치를 받게 되면서 속주 아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그러나 후에 세력이 커진 에페소로 수도가 옮겨지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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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3,7-13) 주전 159∼138년 베르가모 왕 Attalus 2세, Philadelphus에 의해 이 도시가 세워졌다. 그의 이름을 따서 필라델피아로 불리우게 되었다. 이곳은 사르디스, 베르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이아와 히에라 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하였다. 그래서 필라델피아 교회에서는 소아시아 내의 300여개 교회에 성찬식때 쓸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였기 때문에 형제 사랑을 실천한 교회이기도 하였다. 스미르나와 이곳은 책망받지 않은 교회이다. 그러나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되었다. 오늘날 비잔틴 시대에 세운 교회터가 남아있는데 3개의 큰 기둥과 거기에 그려진 벽화가 비바람에 마모되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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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3,1-6) 주전 3세기경 Sardis왕가에 의해서 이 도시가 세워지게 되었다. 로마시대에 이곳은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914년 프린스턴 대학팀의 발굴로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비잔틴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신전은 B.C. 335년 Alexander대왕에 의하여 재건되었는데 이 신전은 희랍시대에 가장 큰 신전중의 하나로 크기가 약 100m×50m였다. 지금 신전 후면에 교회의 유적이 남아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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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미르나(묵시2,8-11) 현대 이름은 이즈밀이다. 주전 3,000년부터 형성된 항구도시로서 알렉산더 대왕이 이곳에 주둔하였고, 산 위에 성채를 건설하였다.스미르나 는 주전 3∼2세기 희랍시대에 크게 번성하였고 항구 상업도시로서 유대인들이 이곳에 많이 살게 되었다. 155년에 순교한 뽈리까르뽀는 스미르나의 주교로 요한사도에게 직접 배웠고 그로부터 주교임명을 받었던 교부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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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시2,1-7) 에페소에 대한 우리의 역사적 자료는 고대에 활약한 작가들이 작품이나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얻어진 수천 점의 비문에 의존하지만, 도시의 기원에 대한 정확한 지식은 알 수 없다. 역사에서 에페소의 이름이 최초로 언급된 것은 기원전 13세기경의 히타이트 성경의 헷 족속 비문에서인데 그 비문에 Apasas라고 불리웠던 도시가 바로 이 지역으로 추정된다. 기원후 1세기에 에페소는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중요한 도시 중의 하나가 되었다. 37∼42년 사이에 그리스도교 전도에 주력하던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예루살렘에서 추방당하게 되자 사도 바울로는 그의 2차와 3차 전도 여행 떄 에페소를 방문하여 선교를 하고 교회를 세우기도 했다. 또한 사도 요한도 그리스도로부터 성모 마리아를 돌볼 임무를 부여받고, 성모 마리아와 함께 에페소에 와서 살면서 말년을 보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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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가톨릭 신문사 성지순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