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같은 고향 사람인 형로 오빠가 있다. 형로오빠는 우리 오빠의 단짝 친구이다.
나의 대학 졸업식 때 수줍어서 머쓱해하는 내 옆으로 다가와 함께 사진을 찍을 정도로 넉살이 좋다. 그런데다가 유머스럽고 입담이 좋아 형로 오빠와 전화통화를 할 때면 나는 개그콘서트를 보는 것처럼 깔깔 웃어대기 바빴다.
미국으로 유학간 오빠가 논문을 쓰던 중 말기암 판정을 받고 사경을 헤맬 때 미국에 유학온 오빠의 후배들이 오빠와 한국에 있는 가족을 위한 소통창구로 인터넷 카페를 개설해 주었다.
투병중인 오빠를 위해 나는 그 카페에 우리 고향 이야기를 써서 인기를 얻은 적이 있었다. 팽나무를 추억하며 라는 제목의 글을 쓰고 난 후 그 오빠와 전화가 시작 되었다.
오빠의 죽음이 눈앞에 닥쳤을 무렵 형로 오빠에게 전화가 온 적이 있었다. 나는 의기소침해져 있었고 우울감이 극치에 달했었다. 형로오빠의 전화를 받고 나는 흐느꼈다.
형로오빠는 우는 나를 위로한답시고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자기 아버지가 초등학교 4학년 때 돌아가셨는데 아버지의 마음이 헤아려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유산이라고는 똥구멍이 찢어지는 가난밖에 없는데 젊은 처와 어린 자식들을 놓고 죽어야만 하는 가장의 마음이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를 생각하니 아버지가 불쌍하고 안쓰러워 지금이라도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 아버지에게 아무 걱정마시라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 말을 듣고 죽어가는 오빠의 마음이 헤아려 지면서 더욱 슬펐지만 위로를 받은 느낌이었다. 아버지를 잃어본 당사자의 말을 들으니 나의 슬픔은 어쩌면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형로 오빠는 항상 그랬지만 보잘 것 없는 자신의 현실(사수까지 했던 대학의 낙방, 오랜 백수생활)을 유머로 승화시키는 묘한 매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미국에 유학중인 오빠에게도 틈틈이 전화하여 안부를 전하고 우리 부모님도 가끔 찾아뵈는 마음에 여유와 사랑이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는 그런 사람이다.
오빠가 죽고 나서도 미국에 직장 없이 사는 새언니에게 생활비를 7년째 대주고 있다. 그동안 미국에서 새언니는 자신의 아르바이트로 번 돈과 한국에서 가족들이 조금씩 모은 돈으로 근근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새언니는 돈 한푼 없이 혼자 아이들을 양육해야 하는 암울한 상황을 무기삼아 툭하면 더 많은 생활비를 대 줄것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그래서 우리는 미국 새언니의 갈수록 더해가는 경제적인 지원의 압력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런 상황을 형로 오빠도 알고 있기에 절친했던 친구 부인을 매정하게 외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이 생겼다.
형로 오빠는 내 동생의 계좌에 작게는 십만원 많게는 이십만원씩을 매달 입금을 시켜주고 있는데 형로 오빠 부인이 동생에게 전화를 한 것이다.
형로 오빠는 지금 분당에서 닭갈비집을 운영하고 있다. 들은 말로는 장사가 아주 잘된다고 했다. 형로오빠 부인 말이 자기는 지금 빚이 억대로 있어서 죽을 맛인데 형로오빠는 맘편하게 누가 좀 못사는 사람이 있으면 못도와 줘서 안달이라고 하면서 이제는 부디 형로 오빠가 우리에게 도움주는 일을 끊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자기 친형제간도 몰라라 하는 세상에 친구 부인을 7년씩이나 도와 준다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는 그냥 고맙게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런 사정이 있는지는 몰랐다.
그래서 동생은 나에게 형로 오빠와 통화할 일이 있으면 미국 새언니가 취직했으니 이제 돈을 부처주지 않아도 된다는 거짓말을 하라고 했다. 나는 그런다고 했다.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형로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고 했다. 동생은 형로오빠에게 새언니가 취직을 했으니 이제 돈을 그만 부쳐주라고 했는데 형로오빠가 미심쩍은지 나에게 확인차 전화를 하겠다는 말을 했다고 했다.
동생과 전화를 끊자 마자 전화가 왔다.
"여보세용" 오빠 특유의 장난이 담긴 목소리다
"호호 안녕하세요"
" 잘 있었어?"
" 예 "
" 근디 아직도 투지폰 쓰네 "
"어떻게 아셨어요?"
" 아직도 공일일이잖아"
" 예 제가 좀 시대에 뒤쳐져서"
" 그게 아니고 아끼느라 그러겠지 "
오빠가 절약을 하고 사는 나의 심정을 알아 주니 고맙다.
"지금 어디에 있다고 했지?"
" 덕치요 강진에서 동계가는 쪽에 있어요 여기 구담마을이 유명하더라고요 영화에 나온 곳이라고"
"나도 알아 천담도 있고 구담도 있지, 아름다운 시절이란 영화에도 나왔고 이장과 군수라는 영화도 찍었던 곳이잖아"
하면서 임실군청에서 데모한 장면을 찍고 주인공인 군수집은 진안 어디에 있는 집이라는 것까지 이야기 한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잘 아신대요?"
" 내가 얼굴은 이래도 주둥아리 힘 하나는 좋잖아 사람들이 나를 보면 고등학교 나온 나에게 서울대학교 나온 줄 안다니까"
"호호호" 나는 웃었다.
" 아들이 군대 갔다고 했던가?"
" 예, 작년 12월에 갔어요"
"그럼 이제 일병이겠네 그럼 휴가 한번 왔다 갔겠는데"
" 예,봄에 왔다 갔는데요 하루만 집에서 자고 이틀 밤은 친구네 집에서 자고 오더니 내가 직장간 사이에 아들은 가버리고 없었어요"
" 나는 그보다 더했어 옛날에는 휴가가14박 15일이었어 휴가나온 첫날 저녁에 막차타고 들어가서 집에 인사만하고 바로 나왔다가 입대하기 전날에 막차타고 들어가서 인사하고 끝이야. 그런데 내 동생은 14박 15일동안 하루도 밖에 안나가고 집에서 일만 하다 갔는데 갈 때 엄마가 돈을 주면 군인이 돈이 무슨 필요가 있냐고 돈을 안받고 그냥 갔는데 나는 안준다고 안달했지, 그래서 우리 엄마는 천당과 지옥을 함께 살았어 내가 있으면 지옥 동생이 있으면 천당 헤헤헤"
"아들이 군대가니까 철이 들대요 편지가 왔는데 속이 꽉 찼더라고요"
" 군대가면 누구나 다 그렇게 성철스님처럼 깨달은 사람이 되는 거야. 그것을 돈오돈수라고 하지? 돈오 한 것처럼 갑자기 깨달은 사람 행세를 하는거야 그러다 병장이 되면 내가 언제 그랬나 싶게 도라미타불되는 거야"
오빠는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투로 이야기 한다.
"오빠는 아이가 몇 학년이에요?"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6학년이야"
"아직도 어리네요"
"아니야, 딸이 키가 168에 몸무게가 70키로야"
"우와!"
" 장미란이 우리 딸보고 나라를 위해서 역도를 좀 해줘야 한다고 하기에 나는 고기 사먹일 돈이 없어서 포기해야겠다고 말했더니 장미란이 나를 설득하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데 그래도 안된다고 했어"
"그 말 진짜에요?"
"가짜지"
오빠의 말을 어디서 부터 진실인지 어디서 부터 가짜인지 분간이 안된다.
"남편은 지금도 잘있고?"
"예, 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음, 왜 10년째 경위를 달고 있는지 이제야 알았네"
우리 남편은 경찰인데 10년째 승진을 못한 이유가 술 때문이라는 것이라는 이야기다.
"호호호 오빠는 술 안마셔요?"
" 나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마신술이 10병도 채 안돼"
"정말요? 와 그러면 무슨 재미로 사신데요 우리 남편은 술마시는 재미로 사는데"
" 나는 그냥 삶자체를 즐겨, 이렇게 사는 것 자체가 좋아"
"우와! 오빠 멋있다."
" 내가 할말은 안하고 엉뚱한 말만 늘어놓았네 참 미국 언니 취직했어?"
" 예, 그렇다네요"
" 어디에 취직했대?"
"모르겠어요 전화를 안해봐서"
오빠는 나의 말이 거짓말인지 짐작을 할 것이다. 취직을 했다면 어디에 했는지를 잘 알것이기 때문이다.
언니가 취직을 했다면 오빠가 죽고 7년만의 경사인데 어디에 취직을 했는지 왜 모를까
그런데 우리는 지금도 미국 새언니의 돈부쳐달라는 압박(?)에 시달려 미국에 돈만 부쳐주고 연락을 안한다.
늙고 가난한 부모님 조차도 돈부쳐달라고 졸라대는 새언니에게 전화하는 것을 꺼려 한다.
"동생 고마워"
"고맙긴요 뭐가 고마워요, 제가 더 고맙지요 정말 고맙습니다."
나는 형로 오빠와 실컷 웃다 전화를 끊었다.
동생에게 얼마 안있어 다시 전화가 온다.
"언니 형로 오빠가 돈을 15만원이나 부쳤어" 나와 통화하자마자 바로 돈을 송금했나보다.
"그러냐? 그럼 어떡하냐 오빠가 새언니 취직했냐고 묻기에 했다고는 했는데 거짓말인지 뻔히 알거야 "
"그럼 오빠네 언니에게 미안해서 어떡해 나에게 전화했을 때 날보고 형로 오빠에게 새언니 돈 없다고 궁상떠는 이야기 하지 말라고 그랬는데 "
"그럼 형로오빠에게 온 돈을 그 언니에게 다시 되돌려주면 되겠다"
"그렇지 않아도 그때 부쳐준다고 계좌번호를 불러 달라고 했더니 싫대, 그렇게 까지는 하기 싫고 그냥 앞으로 형로오빠에게 그냥 새언니 잘있다는 말만 하래"
"그러냐? 그러면 오빠 성격에 우리 사정 뻔히 다 아는데 알아서 하라고 그냥 냅두자, 그런 남편을 만난 것도 그 언니 팔자니까" 나는 그냥 냅두자고 했다.
남편에 대한 불만이 꼭 그것 때문인 것만은 아니니까. 여러가지 복합적인 것이 작용하는 거니까. 삶은 하나가 해결되었다고 모든 것이 다 해결된 것은 아니니까. 내가 남편의 술 때문에 힘들어 했지만 실은 나의 남편에 대한 나의 끊임없는 집착과 욕심 때문에 그렇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그것이 내려 놓아질 때까지 삶은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나는 투쟁을 멈추고 싶어서 수행을 했고 많은 것을 멈주고 있는 중이고 더 많이 멈출 것이다.
형로오빠는 가뭄에 단비처럼 어느날 갑자기 웃음보를 자극하고 홀연히 사라지는 자유로운 영혼 같았다.
멋쟁이 형로오빠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