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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수교회 100주년 기념사업
교회당 설립계
명치41년 3월1일부터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에 교회당을 설립하고 기독교 포교에 종사함에 의하여 포교규칙 제19조에 의하여 모든사항을 갖추어서 종목별 제출한다.
*명치41년은 1908년을 말함
대정 4년 12월 18일 (1914년)
신고자 주소 :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
성 명 : 최 계 창
조선 총독
백 작 : 사 례 정 귀하
1. 설립에 요하는 사유
명치40년 부터(1907년) 시시때때로 전도하는바 교세가 발전하여 현재 신도의수는 15명에 있어 계속 있어야 겠기에 이들로 선교에 종사하고자 함
2. 포교소 의 명칭
곡수교회
3. 포교소 소재지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 4번지
4. 부지면적 소유자
부지면적 소유자는 143평(도면은 별지에 있음)
소 유 자 : 경기도 경성부 죽첩정 삼등목 172번지
이 근 묵 씨
5. 건물의 평수
이 근묵씨 소유 143평 (7평 도면은 별지에 한함)
건물의 소유자 :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고송리 2동 3번지
배 진 성
6. 종교와 종파의 명칭
조선 야소교 장로회
7. 포교 단임자 자격 선정방법
갑 : 조선 야소교 장로회 목사
을 : 미국 북장로회 전도회로부터 파견된 조선야소교 장로회 선교사.
선정방법 : 1) 유자격자 교회에서 선거하여 노회에 허가를 받아야 이이를 명함.
2) 미국 북장로회 전도회에서 선정 파견함.
8. 설립비 지급방법
설립비 ? = 50원은 교인들이 헌금
남은 금액은 선교사회에서 기부
9. 관리급 유지방법
관리 방법은 장로회의 정치급 규칙에 의하여 당회에서 교회의 사무를 정리하고 제직회의에 위임 시행케 한다.
유지 방법 : 1년 1회 혹은 2회 교회에서 총회를 소집하여 예산을 결정하고 장로 0명 집사 1명 기타직원 0명을 선정하여 내년도의 방침을 결정함.
유 지 내 용 : 신도의 헌금 혹은 선교사회 기타 마을 유지분들의 기부금에 의하여 지급함.
포교 단임자 선정계
주 소 : 경기도 경성부 연리동 136번지
직 명 : 조선 야소교 장로회 선교사
곽 안 렴
우자는 명치 41년 3월 1일부터 야소교 장로회 경기도 양평군 곡수리 교회 포교 단임자를 선정 하였기에 부 포교 규칙 제 9조 제2항에 의하여 그 이력서를 첨부하여 별도로 제출
대정 4년 12월 18일
주 소 : 경기도 양평군 지제면 곡수리
우신고인 : 최 계 창
조선 총독부
백 작 : 사 례 정 귀하
예수교
장로회 곡수교회 약사
교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파죽지세로 방방곡곡에 전파하게 되었으며 명치(1908년) 41년 3월 1일부터 죄악에 잠자는 곡수 심령에 중생하고자 전도가 시작 되어 다수의 신자가 모였다.
이 전도는 미국인 선교사 곽 안연씨 였다.
이 군중에서 최계창씨가 설선 심교 하고 열심 전도하여 마침내 교회가 설립되고 예배당이 건축 되었다.
십여일생을 유치이래러니 시국에 변천을 따라 지평구역 전도사로 시무하시던 배진성씨가 교회는 다른 교회와 합하고 부득이 예배당은 회손하고 주장하시던 최계창씨는 생계를 따라 타처로 이사 하시고 섭섭하게도 십여년간 무교회로 오더니 다시금 복음의 역사는 계속 되고있으니 1934년경 경성구역 예수교회 제직총회가 양평읍 교회에서 개최시 선교사 위철치와 협력하여 곡수교회를 복활전도 하기로 결의되어 전도경비 반액은 제직총회에서 담당하고 반액은 위 목사가 책임지기로 하고 전도인은 양평교회 김원인씨로 선정하고 매월 20원씩 지불하기로 되다.
금년 4월에 이치서씨댁 방을 월 4원세로 김원인 전도사 가족 이사 하고
제 1회 전도대에 김경덕 교사 전중훈, 이봉례부인 합 4,5인이 주간은 심방전도 야간은 전도강연을 하여 장년급 주교생 합 3~40명 이상이 집합함.
4,5일간 전도 하던중 신께서 만세전 예정하신 김기봉씨가 신앙키로 결심하다.
전도인 김원인씨가 신 신자 김기봉씨와 동심협력하여 열심 전도하였으나 경제 문제로 전도치 못하고 부득이 김원인씨는 정지됨.
1936년에 위철치 목사가 광탄리에서 전도하는 김달이 전도부인을 본 곡수교회로 부임하여 다시 전도 계속되다.
김달이 부인은 김기봉씨와 협력하여 열열심전도하여 남여 합 20여명 교우를 얻어 유지하여옴.
1938년 형편에 의하여 김달이 부인은 본면 지평리로 전도되고 그러므로 김기봉씨 자택에서 예배하게 되고 김기봉씨도 영수직을 받고 예배인도와
그 외 중임을 지고 주관케됨.
금년 11월 다문교회 신자 권중훈씨로 (말이 빠졌음) 내어 1939년 4월경 정지됨.
1939년 김기봉 영수께서 위목사와 협의하여 박중구씨 사택 12칸을 현금 230원에 내수하여 수선 개축을 하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기로 함.
위목사의 도움으로 경기 아현정에 거하는 강태호씨를 전도인 으로 파송을 받아
교회주택에 거주하면서 열심 전도한 결과 3,40인 이상의 신자를 득하여 복교되었다.
예배당은 건축 되었으나 교회 종이 없어서 유감히 생각한 김기봉 영수께서 단독으로 150원의 헌금으로 구입되다.
1942년 1월 지평구역 형편을 따라 부득이 동서 구역으로 분할케 되어 본 교회는 서 구역으로 다문, 신점, 광탄, 지평, 곡수로 권중훈 전도인이 순행 시무케 되고 월 4원으로 부담지불하고 본 교회 자동결의 된바 교회 종을 반납하였음.
일본의 시민지 호각정치는 날로 조선교회를 탄압하므로 그 영향은 교회에까지 미쳐 교내 혼잡을 가져왔음. 그래서 교회 주관이신 김영수님 가정과 교회에 거하시던 정대부인 경숙모외 아동 몇몇이 교회를 유지하였음.
정준환대주를 신봉키로되어 가족이 합심하여 출석을 함.
정씨 부인은 집사님으로 많은 수고를 하였다. 그러나 섭섭히도 가정의사정으로 이거케하여 여주 당우리 교회로 가심.
정준환씨도 배진성 목사로부터 세례받은 후 집사 직분을 임명받음.
그래서 수고하던중 1946년 9월에 직업문제로 경성에 익거케됨으로 김영수가 많이 교회를 받들고 계시며 특히 아동 교화 운동에 힘쓰시고 주교생 30여명을 잘 교육 시키시며 이용옥씨가 김영수를 도와 1946년 봄 초부터 수고하시어왔음. 2년의 세월을 보낸 1948년 여전도회 전마테씨의 파손으로 김순이 전도부인이 열심 전도할 교인가정을 방문하여 새로운 신도를 많이 얻게 됨.
1949년 본 교회당 회장 유학노 목사 주례로 학습 14명, 세례 1명이 받다.
1949년 6월부터 9일까지 하기 방학을 이용하여 조선 신학교 재학중인 기원형씨 교회를 봉사함.
김기봉 영수는 1.4후퇴까지 다각도의 난관도 무찌르며 신앙을 지켰는데 당시 사상적 난관은 교내까지 들어오니 사상을 노골화하여 큰 파문이 되었던 것이다.
다음해(1951년)에 귀향하여 보니 교회와 집들이 많이 전폐되었으니 인심 혼잡한 때임. 김기봉 영수는 자기집 보다 교회에 큰 관심을 가졌으니 마치 이스라엘 민족 귀향이 연상됩니다. 3칸 움집에서 예배를 보다가 김기봉 영수의 십일조 2,000원으로 목재를 구입하여 4칸 벽돌집을 교우일동의 노력으로 건축하였음.
얼마후 율촌리 성결교회 오이흥 전도사를 모시고 많은 은사를 받았으며 특히
김기봉 영수는 그해 십일조로 강대를 헌남하심 또 전교우의 일심으로 토지(전) 3,286평을 구입함. 정준환씨도 회심하여 교종자없어 김기봉 영수 많은 수고함.
1954년초 당회장 유학노 목사 임명으로 한국 신학 재학중인 심정택 전도사 모심.
사변으로 인한 교회건물 전폐된
상부 보조의 의하여 12칸 건물인 교회를 건축함.
그 후 교파의 관계로 심정택 전도사 부결키로 시무치 못함.
경제적 난관이 동반한 곡수 교회에 서울 청암교회 청년회와 낙산 양행사장 민상기 장로와 전담하여 5,000원정으로 당회장 김상영 목사의 탐문으로 대한 신학교 재학중인 조인택 전도사를 모심.
떄는 1955년 1월 초 주일부터였는데 2개월 후인 개학기간을 이용하여 정준환 씨는 숨었던 기장교파로 청년회만도 47명의 수를 갖어오던 바이다.
출석을 방해하는데 이르러 이유 밑에 타 청년들에서 구타까지 이르렀다.
교회내 어지러움의 수습기일은 장기전 이었으며 전혀 볼 수 없는 새벽 성종은 울리기 시작하여 눈물의 고함이었다.
1956년도는 전적 청암 청년회에서 파송하는 것으로 되어 여름이면 하기학교를 물심양면으로 조력하였으며 나아가 동기아동 부흥회 강사 강습회도 하였으니 주교생은 182명의 재적을 가져옴에 200명 돌파 목표까지 세운 것이다.
민상기 장로를 모시고 부흥회 하여 많은 신자를 얻었음.
교파 관계로 유감을 가져왔다.
은혜중 일심을 가져오기 위해 당회장 김상용 목사의 소개로 장집사 모실 부흥회 함.
그 후 다시금 김상용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 함.
부흥도중 기장에서 다수 방문하여 술책을 강구하여 많은 시험을 가져왔음.
운동장을 넓히기 위해 100평되는 토지를 서울 서대문교회 박덕선 선생이 헌금하여 구입함.
또 타종, 경 공과 책 이흥옥 장로 (서대문교회) 하기 학교 경비와 페인트 1통을 헌금함.
양학규 (염주교회) 문일경 (영락교회) 집사도 어린이 위해 헌금함.
곽안전 선교사 김마테 선교사 및 몇분의 헌금으로 성종을 구입하는데 대구 도원동교회 조의택 목사가 수고하였으며 종탑은 고래산에 가서 김재수. 안기학 . 경자. 정일. 김갑식. 조 전도사가 백설상에서 베어 지개로 운반하였다.
창, 커튼, 정문, 시멘트도 서울 교우들의 헌금으로서 만들어짐.
더욱 감사한 것은 오사단 군인 오소령 (오승호)은 교회에 관심이 많은 끝에 교회 사택건축에 수고하시어 많은 병력으로서 협조하였다.
아동문화사의 지도로써 본 교회 이야기 대회도 개최한 바 있다.
이와 같이 3년간이나 서울 청암교회에서는 조인택 전도사를 파송하였던 것이다.
후포리 김명순 목사를 모시고 부흥회 은혜중 “죽었느냐 살았느냐?”의 중대시에 처해 많은 일심을 가져왔다. 주의 성종은 김영수님이 치다.
유점례 집사에게 넘기어 4년간 하루의 빠짐도 없이 수고하셨다.
조순학, 신유순 집사는 심방에 큰 수고 하였으며 박수원 집사는 주교부장으로 수고하며 김재수, 안기학 선생은 주교와 음악지도에 수고 많이 하였음.
또 야간 벧엘 중학원을 개원함.
원장에 김기봉 서무 및 강사(수학) 김충묵 영어강사 황덕규. 성경, 음악에 조인택 선생으로 시작하다.
후에는 곽순례 (여) 오사단 군인 3인으로 하다가 강사문제로 중지됨.
지금까지 세례교인은 37명 학습교인 58명을 얻었다.
1908년 3월 1일 : 미 북장로교 선교사 곽안련 목사의 협조로
최계창(앞의 곡수교회 약사참조)씨 댁에서 설립 예배를 드리다.
곡수교회는 설립한지 얼마 못되어 일제의 탄압으로 난관에 처하게 되었고,
급기야 교회문을 닫게 되었다.
1934년 : 총회에서 위철치 선교사의 협조와 양평교회의 도움으로
김원인 전도인이 부임하여 다시 교회가 시작되다.
1934년 11월 : 이치서씨 방을 월세로 얻어 김겸억 목사, 권중훈씨를 모시고 부흥회를 가짐.
1936년 : 김원인 전도인 사임하다. 김달이 전도인 부임하다.
1938년 : 김달이 전도인 사임하다.
1938년 11월 : 권중훈 전도인 부임하다.
1942년 1월 : 신학사상 혼란으로 어려움이 있고, 핍박중에도 김기봉 영수, 경숙씨 등의 노력으로 순수신앙을 고수함.
1942년 : 정준환 씨가 배진경 목사 주례로 세례받고 집사로 임명됨.
1948년 : 김순이 전도인이 부임하다.
1951년 : 김기봉 영수의 희생적 봉사로 교회를 재건축함.
1954년 : 심경택 전도사 부임하다.
1955년 : 심경택 전도사 사임하다.
1955년 1월 : 조인택 전도사 부임하다.
1957년 : 조인택 전도사 사임하다. 김재복 전도사 부임하다.
1958년 : 김재복 전도사 사임하다. 윤석봉 전도사 부임하다.
(사임한 년도는 확실치 않음)
1964년 : 유영실 전도사 부임하다.
1965년 : 유영실 전도사 사임하다.
1965년 10월 : 문영호 목사 부임하다.
1975년 11월 18일 : 정준환씨가 초대 장로로 장립하여
곡수교회 당회가 구성됨.
1978년 : 문영호 목사 사임하다. 문형철 강도사 부임하다.
1979년 : 문형철 강도사 사임하다. 김정배 강도사 부임하다.
1979년 10월 : 김정배 강도사 목사 안수를 받음.
1979년 11월 15일 : 안기웅 씨가 장로 장립을 받음 (2대)
이기주, 이운종씨가 안수집사. 황간난씨가 권사로 취임.
1980년 9월 : 김정배 목사 사임하다.
1980년 9월 16일 : 박남현 목사 부임하다.
1981년 3월 10일 : 박남현 목사 위임식을 하다.
1982년 4월 15일 : 이덕호씨 집사 장립. 박만녀씨 권사로 취임하다.
1984년 1월 : 김원삼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84년 12월 11일 : 이운종씨 장로 장립. 장경환 집사 장립.
문인기씨 권사 취임하다.
1984년 12월 : 김원삼 교육전도사 사임하다.
1985년 1월 : 박종한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86년 1월 : 이승구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86년 12월 : 박종한, 이승구 교육전도사 사임하다.
1987년 4월 20일 : 박남현 목사 사임하다.
1987년 4월 22일 : 김은경 목사 부임하다.
1987년 11월 : 교회 미니버스 (승합차)를 구입하다.
1989년 11월 : 장호철 전도사 부임하다.
1990년 12월 30일 : 장호철 전도사 사임하다. 박단열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92년 5월 : 박단열 교육전도사 사임하다.
1992년 12월 : 승합차를 구입하다.
1993년 : 이승구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95년 12월 : 이승구 교육전도사 사임하다. 조진규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95년 8월 : 사택대지 60평 (건평26평)(곡수2리 361-1번지)를 구입하다.
1996년 12월 : 조진규 전도사 사임하다. 조성호 교육전도사 부임하다.
1996년 9월 : 교회증축과 주방, 서재실(당회실), 방 등의 건축을 시작함.
1996년 12월 : 교회증축공사를 완공함.
1997년 4월 22일 : 정준환, 이운종장로 은퇴. 황간난권사 은퇴함.
이성규, 최천영, 윤병원씨 집사장립.
김종학, 김옥순, 이봉자, 박옥진씨 권사 취임함.
1997년 12월 26일 :(교회 승합차 구입하다)
1998년 6월 30일:장경환집사, 최천영집사 장로 장립하다.
1998년 12월 : 조춘경 교육전도사 사임하다.(98년 1월~ 12월까지 시무)
1999년 1월 : 배도식 전도사 부임함.
2000년 12월: 배도식 전도사 사임함.(2년 시무)
2003년 6월 : 안수집사와 시무권사를 위한 공동의회에서 안수집사 2명 시무권사 6명을 선출.
2003년 11월 18일 : 유대석, 곽호영집사를 안수집사로.
시무권사에 신진철, 최연숙, 박광명, 최옥치, 이순란, 최금순씨를 (6명)
명예권사에 (당회에서 추천한) 박학분, 윤정순, 이정희, 이주영, 김간난, 정연숙
(6명) 을 위한 임직식과, 취임식을 행함.
2004년 11월 20일 : 교회대지를 확장하기 위하여 건축 위원회를 구성하고,
교회입구에 있는 농협창고부지 (곡수2리 363-2) 627평을 매입하였음.
2004년 12월 30일 : 교회가 농협창고부지 대금중 잔금을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지급하였음.
(대금 127,000,000원) 일금 일억이천칠백만원.
2005년 1월 1일 : 교육전도사에 김진성 전도사를 임명하였음.(한국성서대학재학)
2007년 12월 9일 : 김은경 목사 위임식을 거행함.
김은경 목사는 1987년 4월 22일 부임하여 19년을 시무중에 있으며 늦게 위임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2008년 3월 1일 : 100주년 기념식 및 임직식
장로임직 : 유대석. 이성규
안수집사 : 김용재. 김창국
권사취임 : 최영순.유혜숙.김금자.박인선
이후로도 많은 자료가 있습니다 시간되는대로 한자로 풀어서 올려 보겠습니다.
읽어주신 곡수교회 식구들 그리고 출타하신 선배님 감동 되시는 대로
교회역사 기록에 좋은 책이 나오도록 기념사업회 이름으로 지출될 비용을 부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후에 당회를 통하여 통장도 개설토록 하여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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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정말 귀한 자료입니다. 이곳에서 간혹 몇백년된 미국교회들의 당회록 등을 보면서 부러워 했는데,, 괜히 부러워 했습니다. ㅎㅎ 어떻게 보내면 되는지 계획되고 통장이 준비되는 대로 공지해주세요.
출타하신 분들의 기억에 남는 이야기를 년도에 맞추어 기록하여 봅시다 예) 1980년도 6월 한달간 박종덕.한상용.유대석과 함께 곡수교회 주일학교 찬송가 괘도100장을 만들고 7월1일 군입대함. 이처럼 기억되는 교회 일들을 올려 주시기 바랍니다.
보시긴 많이 하나 댓글이 없네요
교회 각 건물의 건축년도와 건축회사 대표자이름 건축금액 건축관련 이야기 등이 없어요 본당은 지내리교회 장로님(당시 집사님)으로만 기억이 되고 제가 중1때로 기억이되는데 정확치가 않아요 1972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자세한 내용 부탁 드립니다.
본당 신축 1974년 (문영호 복사님) 지내리교회 김주훈장로 건축 건축비용은 ? 220만원을 황권사님 댁에서 논을 팔아 과수원을 구입하여 신복성 장로로부터 220만원을 받고 30만원은 그해 농사로 받음. 도합 250만원을 황권사님 지불함.
종을 4년간 김영수님 부인 유점례씨가 치신것으로 기록됨. 현재 장호원 공원묘지에 안치되심
1998년 9월 8일 교육관건립 머릿돌 표기됨(박종환목사 필체임)
주일학교 공과책은 계단공과를 지금도 사용함
아침해 웃으면서 (여름학교 교가는 합동측). 힌구름뭉게뭉게( 장로교 통합측)
최초의 교회당은 현재 황금하씨터라고 짐작케함.(박중구씨는 아무도 모름)
김기봉 영수님의 무덤은 여주 점동면에 위치하며 고향은 골말이라 하심.
현재 본당 건축시 유리는 지평에서 리어카로 안기웅장로님 김성태 목사님이 운반한걸로 기억됨(성태목사님 증언)
1982년으로 기억됨 -상순 사모와 이용자 사모. 이금숙 집사님이 제작하심. 김간난 권사님이 천은 사오심
학생성가대 1979년즈음 유대석장로 지휘로 인애하신 구세주여로 시작됨
예, 그렇게 시작된 학생회성가대가 저의할머니 (故 노복철성도) 장례식때 발인 예배에 참여하여 성가와 조가를 불러 주었고 가운을 입을채로 꽃상여에 앞서 장지까지 행진하던 모습은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겁니다.
꽃상여 총 소요갯수는 820개로 기억됨
아마도 맞을 겁니다. 저의 조모 (노복철성도1982년 12월 27일소천)장례식때 교육관에서 중,고등부 학생들이 습자지로 하얀 장미꽃을 만들던 기억이 납니다.
김재수 장로님의 호주 이민은 차남 재길(현 장로님)의 망나니 생활이 하나님과 교회앞에 덕이 안되어 이민을 결절하심,(11월16일 곡수교회 오후 예배 간증)
믿지 않는 사람들도 꽃상여 보고 많이 부러워 했구요 밤새워 꽃 만들면서 상가댁에서 배달된 음식을 먹던 일들과 넓은 천(교회 봉고차 쒸움)에다 꽃을 하나 하나 작업하던 일도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추억 속에 한 페이지가 되어 버렸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