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원
바 람
박미영
바람이 분다.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분다. 늘 무언의 몸짓만 가득하던 나뭇잎들이 바람의 목을 빌어 작은 아이들처럼 재재거린다. 더운 여름, 잠시 일손을 멈춘 이마위로 시원히 흐르는 바람, 탁 트인 산 정상에서 가뿐 호흡을 틔워주는 바람은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아마 그 순간을 누구나 잠시의 자유로운 꿈에 빠질 것이다.
저 먼 나라의 고산족이 온갖 아름다운 풍경을 제 것처럼 누리는 것보다 더 부러웠던 건 바람을 가진 것이었다. 언제든 집을 나서면 불어 닥치는 바람이 나는 부러웠다. 산등성이를 타넘은 바람이 거친 소리를 내며 지붕을 두드리고 가만히 쉬는 양의 방울을 흔드는 것을 나는 부러움으로 지켜보았다.
고요한 산사의 풍경소리가 없다면 나는 절을 찾아 산을 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바람이 지나지 않는 숲은 더 신비로울지라도 사람의 발을 허락하지 않을 만큼 완고한 것이다. 바람을 품은 숲은 너그러운 인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바람이 좋았다.
인적이 드문 거리에서 갑작스런 소나기처럼 몰아치는 바람을 만나면 나는 가만히 두팔을 벌려 바람을 맞았다. 내 머리카락 사이사이로 벌려진 두 팔 밑으로 손에 잡힐 듯 손가락 사이사이를 꽉 채우는 바람. 바람은 나를 밀쳐내지 않고 나를 어루만지며 지나갔다. 내 몸속을 통과하여 그 속의 찌꺼기를 훑어주었다. 마음이 풍선처럼 두둥실 떠올랐다. 하늘위로 공기처럼 흩어졌다.
그때의 나는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 사이에서 눈치만 보는 천덕꾸러기 같은 시간이었다.
늘 나를 키운건 8할이 바람이었다는 노시인의 말을 가슴에 품고 끊어진 연처럼 바람따라 흐르고 싶었다. 무엇하나 절구치지 않고 푸른 태평양 위를 티벳의 고원 위를 날고 싶었다. ‘바람 속에 나를 맡기고 부는대로 따르리니 바람이 나를 자유케하리라.’
마음이 답답해지면 나는 거리로 나가 무작정 걸었다. 바람 속에서 나는 혼자였다. 내 주위의 모든 것이 휩쓸려 날아갔다. 바람이 내 몸속에서 피처럼 흘렀다. 지나간 자리마다 푸른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그럴때마다 나는 조금 새사람이 되어 일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렇게 20대의 한때가 지났다.
나는 그냥 내 나이 또래와 비슷한 시간을 보내고 결혼을 하고 이젠 포기도 부끄럽지 않은 나이가 되었다. 여전히 고산족의 마을이 덜컹거릴 때 마다 부러운 맘을 갖고 있지만 지금 나의 뺨에 불어 오는 바람도 티벳의 고원을 넘는 바람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아마 이 바람 속엔 고산족이 키우는 양의 방울소리가 들어 있겠지.
끊어진 연처럼 살기 바랬던 나는 얼레와 짝을 이뤄 창공을 나는 방패연의 자유로움을 알게 되었다. 해가 져서 땅으로 내려오면 내일 다시 날아오르면 되는 것이다. 내일도 바람은 불고 연을 날려 줄 것이다.
나는 아직도 바람맞는 것을 좋아한다. 내 머리 속을 헤집고 내몸을 띄울 것처럼 세차게 부는 바람이 좋다. 그 순간 나를 자유롭게 하는 바람이 좋다.
바람이 분다. 등나무가지 사이로 바람이 분다. 재재거리는 잎사귀들이 고운 춤을 추며 내려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