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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산초등학교총동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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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공마을 스크랩 지리산길 동강-수철구간 / 산청.함양 추모공원
천왕봉(배익선) 추천 0 조회 117 11.08.26 21:4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지리산길 동강-수철구간

산청.함양 추모공원

2009년 07월 25일 . 날씨 : 구름 많고 가끔 비

 

 

 

 

 

양민을 적이라 하고 / 작전을 수행했던 이상한 부대 / 하늘 아래 있었습니다. // 가현, 방곡, 점촌 사람을 몰살하고 / 그 아래 야지 마을 사람 반으로 나눠 / 무차별 사살했던 이상한 부대 / 이 나라 땅위에 있었습니다. // 대대로 살아온 것 죄가 되는가 / 흙 파고 씨 뿌린 일 죄가 되는가 / 제 나라 군대의 총알에 맞아 죽은 백성들 / 산발한 채 원혼으로 반세기 / 하늘을 떠돌아 다니는 나라 / 이 나라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 그 부대 대장들이 붙들려 / 눈 가리기로 / 재판 받고 감옥 갔다 풀려나 / 승진해 가는 동안 / 나라의 권력은 善으로부터 고개 돌렸으니 / 하늘 아래 권력이 이처럼 오래 죄인의 손 / 들어주고 다닌 나라 / 이 나라 말고 어디 있겠습니까 // 그러나 역사는 義人들을 내고 / 진실 화안히 드러나니 / 이제는 냇물이 제 소리 내며 흐르고 / 노을과 이슬 저희 허리 펴고 다니기  / 시작했습니다.  // 오! 반세기 / 자리에 한 번 앉아 보지 못한 7백여 원혼들이여 / 이제는 나라가 법으로 그대들 양민이라 하고 / 겨레가 입으로 그대들 님이라 부릅니다. / 자리에 앉아 편히 쉬세요 / 진달래 피고 보리가 익는데 / 님들이 그리워 새들이 재잘거립니다. / 님들이시여 힘 들어도 오히려 불쌍한 죄인 / 죄인들  / 새들의 노래 안에 불러 들이세요 // 중매재 고개마루 / 깨곰이 달리고 산머루 탐스레 익으면 / 거기 그 빛깔로 도란도란 오세요 // 오세요 저희 살아남은 자 곁으로 / 나라 잘못된 나라 되지 않게 염원 알알이 목에 걸고 어서 오세요. (헌시/강희근)

 

 

 

 추모공원 입구의 장승

 

전라북도 남원시 주천면에서 시작한 지리산길 트래킹이 경상남도 함양군을 넘어 어느사이에 산청군으로 들어섰다. 산청군은 동쪽으로 합천군, 의령군, 북쪽으로 거창군, 남쪽으로 진주시, 하동군, 서쪽으로 함양군에 접한다. 지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한 백두대간이 남북으로 질주하여 하동군, 함양군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추모공원의 입구 회양문이다 - 슬픔과 고통의 음지(陰地)의 과거를 극복하고 역사의 새 시대를 열어가는 상생(相生)의 양지로의 화합을 창출해 나가 미래의 초석을 낳는 디딤돌로 승화되어야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회양문에서 바라 본 추모비

 

산청과 함양의 주민 7백여 명을 학살한 부대는 국군 11사단 9연대다. 이들은 이틀 후 거창지역에서 다시 800여명의 양민을 학살하는데 과연 11사단은 어떤 부대인가? 화랑부대라고도 불렸던 국군 11사단은 1950년 8월 27일 경북 영천에서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창설된 군대였다. 이들은 한 달에 걸쳐 9연대, 13연대, 20연대의 3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9연대는 지리산지구, 13연대는 전북지구, 20연대는 전남지구를 담당하였다.사단장은 만주군출신 최덕신(후에 월북함)이었고 공비토벌작전은 일본군이 만주항일군 토벌작전이었던 ‘견벽청야(堅壁淸野)’작전으로 저항세력의 인적, 물적 근거지를 없애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추모공원 안내판

 

국군11사단에 의한 학살사실이 확인된 곳은 경남 산청, 함양, 거창 외에 20연대가 저지른 전남 나주, 함평, 화순 등이 있으며 13연대의 작전지역내 수백 명의 희생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으나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11사단에 의해 토벌된 공비에 대한 공식통계는 1950년 10월 7일부터 1953년 6월 30일까지 사살 2만 4,228명, 생포 3,690명이며 이 수치에는 산청, 함양, 거창을 포함한 작전지역내 각 지역의 무고한 주민들이 포함되어 있다.

 

 

 

 추모위령탑

 

사단장 최덕신은 일제강점기 광복군으로 활약하였으며 6·25전쟁 때 사단장으로 참전하였다. 이후 외무부장관, 주서독대사, 주베트남공사 등을 지내다가 1986년 북한으로 망명하였다. 1986년 아내와 함께 북한으로 망명하여 조선천도교청우당 중앙위원장, 조선종교인협의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는 <내가 겪은 판문점><제2의 판문점은 어디로> 등이 있으며, 북한의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 중 첫 부분인 1부부터 3부까지가 최덕신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작전의 전모를 살펴보자. 유격대의 근거지가 될 것으로 판단되는 모든 자원을 파괴하라는 작전명령이 1951년 2월 2일 정오 ‘작명 제5호’로 떨어졌다. 이 명령에 첨부한 자료인 ‘별지투명도’에는 지도위에 각 마을별로 학살할 대상의 숫자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국군11사단의 학살행위를 시간의 순서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951년 2월 7일 새벽 5시경 11사단 9연대 3대대의 2개 중대가 경남 산청군 금서면 수철리를 출발하여 그 중 1개 중대가 7시경 40여 가구가 사는 가현마을에 도착하여 주민 전원을 모은 후 산제당 골짜기로 끌고 가 학살하였다. 

 

 

 

위령탑 앞에서 내려다 본 회양문과 관리사무소

 

같은 날 오전 10시경 방곡마을에 진주한 11사단 9연대 3대대의 또 다른 1개 중대는 논밭에서 212명을 학살한 뒤 72채의 민가를 불태웠다. 오후 1시 30분경 가현마을에서 학살을 저지른 1개 중대병력이 함양 점촌마을에 도착했다.군인들은 가현, 방곡에서처럼 귀중한 물건과 가축들을 빼 낸 다음 주민들을 동네 우물가로 모이게 한 후 20여 호의 집을 다 태워버렸다. 그리고 이유물문하고 60여명의 주민들이 학살했다.

 

 

1951년 2월 7일 산청군 금서면 화계, 화산, 주상, 자혜마을과 함양군 유림면의 지곡, 손곡 등의 마을에 경찰, 향토방위대원, 군인 등이 조를 짠 듯이 나타나서 모든 주민들을 강건너 서주리로 모일 것을 통지했다. 오후 4시경 가현, 방곡, 점촌, 묵은터에서 주민들을 학살한 3대대 군인들이 서주리에 도착하였고 선별되지 않은 주민들을 유림지서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렸고 선별된 주민들은 군인들에게 둘러싸였다. 주민 300여 명을 구덩이에 몰아넣었고 이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해 310명을 처참하게 학살하였으며 박격포를 수직으로 발사하는 등 온갖 잔인한 방법을 동원했다.

 

 

 

학살 군인들은 처참한 시신위에 마른 나무와 기름을 뿌려 불로 태웠으며 대대장 한동석은 신원면 일원에 계엄령을 내려, 이방인 출입을 막고, 어린이 시체는 골라내어 학살 현장에서 약 2㎞ 떨어진 홍동골 계곡으로 옮겨 암매장했다.사단장 최덕신 등은 187명의 공비 및 통비분자를 소탕했다는 전과보고를 하는 등 학살 사실을 은폐 하였다.

 

 

 

1951년 3월 21일 사단장 최덕신은 “학살주민이 대부분이 양민이어서 군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고 이 밖에도 부녀자 강간, 물품강요, 재산약탈 등으로 주민들이 분노하고 있다.”는 보고서를 올렸다. 이에 국방장관 신성모는 “외국의 원조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마당에 이 같은 비행이 외국에 알려지면 전쟁수행에 지장을 초래하고 군의 사기를 해친다”면서 “희생자 수는 187명이며 모두 통비분자였다”고 조작했다.

 

 

 

 

조작의 사실은 1951년 3월 29일 거창 출신 신중목 국회의원에 의해 국회에 폭로되었다. 다음날인 3월 30일 국회와 내무·법무·국방부의 합동진상조사단이 구성되어 4월 7일 합동진상 조사단이 신원면 사건 현장으로 나왔다. 그런데 길 안내를 맡은 경남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은 신성모 국방 장관과 사전에 모의하여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의 수색 소대로 하여금 군인을 공비로 위장 매복시켜, 거창읍에서 신원면으로 통하는 험준한 계곡의 길목인 수영더미재에서 합동진상조사단에게 일제히 사격을 가해 조사를 못하고 되돌아가게 하였다.

 

 

 

 

이에 대하여, 7월 27일 사건발생 5개월여 만에 대구고등군법회의는 심판부(재판장에 강영훈 준장, 심판관에 정진환 준장, 이용문 대령, 법무관에 이운기 중령, 검찰관에 김태청 중령, 김부남 소령, 김동수 대위)를 구성하여, 12월 15일 구형공판에 이어 다음날인 12월 16일 선고하였다. 선고결과 9연대장 오익경 대령 무기징역(구형 사형), 3대대장 한동석 소령 징역 10년(구형 사형), 소대장 이종대 소위 무죄(구형 징역 10년), 계엄민사부장 김종원 대령 징역3년(구형 징역 7년)으로 관련 군지휘관에게 실형이 확정되었다.

 

 

 

 

그러나 사단장 최덕신은 기소조차 안 되었고 오익경, 한동석도 1년이 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최덕신은 대사에 임명되는 등 출세가도를 다렸으며 김종원은 대통령 특별명령으로 석방된 후 전북경찰국장으로 복권되었다. 유족들은 학살 후 3년이 지나서야 유골을 가매장 할 수 있었으며 가매장 당시 앙상한 뼈로서는 성별 구별을 할 수가 없어 큰 뼈는 남자, 중간 뼈는 여자, 작은 뼈는 소아로 구분, 화장하여 박산합동묘소에 합장하였다.

 

 

 

 

그러나 1961년 5.16 군사정부는 5월 18일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 단체로 몰아 투옥을 시켰으며, 6월 25일 경남지사 최갑중은 517기를 합장하여 놓은 박산합동묘소에 개장 명령을 내렸다. 희생자의 시신 구별이 불가능해진 상황을 알면서도 내려진 이와 같은 명령은 합동묘소를 없애기 위한 목적이었다. 그리고 위령비는 글자 한자 한자가 정으로 지워서 땅속에 파묻혀 졌다.

 

 

 

 

산청, 함양, 거창지역에서는 국군11사단의 작전에 의한 학살 이외에도 많은 희생이 있었다.1948년 5월 8일 위천면장 등 20여 명이 거창경찰서에서 고문을 당해 위천면장이 목숨을 잃었다. 1949년 7월 18일에는 산청의 신천마을, 보안마을 주민 41명이 토벌군에 의해 희생되었으며 나흘 뒤인 22일에는 같은 마을 주민 100여 명이 시천면 원리 덕산초등학교 뒷산에서 학살당했다.

 

 

 

1949년 8월 20일에는 김종원부대가 지리산 인근지역의 보도연맹원 등 367명을 진주법원에 재판 받으러 간다고 속여 경남 산청군 시천면 사리골짜기 남명조식의 선산 부근 골짜기에서 집단학살했다.1949년 8월 31일부터 9월 19일 사이에 거창군 남상면 춘전리 마을주민 24명이 안의지서에 연행된 뒤 안의초등학교 뒤 대밭골 등에서 학살당했으며, 9월 20일에는 국군에 의해 경남 함양군 수동면 이른리 도북마을 주민 32명이 당그래산에서 희생당했다. 

 

 

 

당시 휴천면 지서주임이었던 최시문은 “2월 6일 오후 작전지구 4개 지서장을 함양읍 수리조합에 설치한 연대본부로 소집한 9연대 연대장이 각 면별로 통비분자들의 명단을 제출받아 집단처형을 가하겠다고 하면서 투명도에 그려진 대로 학살 대상 숫자를 설명했다. 작전지구내 할당된 인원은 휴천면 1천 명, 유림면 3백 명, 신원면 8백 명, 금서면 5백 명 등 도합 2천 6백 명을 계획 학살한다는 것이 투명도상의 내용이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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