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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k.m][삼상14:12]-[삼상17:28]
[h.k.m 주석] 사무엘상 4
성 경: [삼상14:1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용기를 모욕하고 그들을 지극히 우습게 보았음을 시사해 준다. 아울러 이같은 블레셋 군인들의 반응은 그들이 정신적으로 나태해있었음을 보여 주는 증거였다. 따라서 요나단은 이 응답을 접하면서 블레셋에 대한 자신들의 승리를 확신하였을 것이다(9,10절).
한 일을 보이리라 - 문자적으로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게 해주겠다'란 뜻이다. 한편, 여기서 '한 일'(*, 다바르)은 블레셋 군대의 무력적인 힘을 뜻한다.
성 경: [삼상14:1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요나단이 손발로 붙잡고 올라갔고 - 보세스의 고지는 거의 절벽에 가깝다고 한다(Lange). 따라서 요나단은 이같은 방식으로 가파른 그곳을 오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들이...엎드러지매 - 이같은 결과는 말할 나위없이 요나단의 민첩한 공격에 따른 것이었다(LXX).
병기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 여기서 '죽였으니'(*, 메모테트)는 다시 살지 못하도록 완전히 죽이는 것을 가리킨다(Lange, 창7:22; 신22:24; 왕하8:10). 따라서 병기 든 자는 요나단에 의해 부상당한 자를 뒤따르면서 즉이는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14:1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반일경 지단 안에서 - 고대 중근동에서는 황소 두 마리가 하루에 보통 밭을 갈 수있는 분량인 약 1에이커(1에이커=약 4km )를 밭의 면적을 계산하는 단위로 삼았었다(Driver). 따라서 '반일경 지단'은 대략 1/2에이커의 땅(an half acre of land, KJV)을 뜻한다. 여기서 '지단'(地段)은 단지 '땅'이란 의미이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위의 언급이 블레셋에 대한 요나단의 공격이 반나절 걸렸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때 요나단은 단시간 내에 블레셋 수비대에 대한 공격을 완료했을 것이다.
처음으로 도륙한 자 - 여기서 '처음으로'는 본서 저자가 20절 이하에 언급된 블레셋의 수비대는 요나단 일행이 그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올가와 졸지에 습격하리라고는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마냥 방심하고 있다가 갑자기 들이닥친 요나단 일행의 공격에 당황하여 전의를 상실하고 도주하기 바빴던 것이다(Keil, Smith).
성 경: [삼상14:1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요나단의 승리]
들에 있는 진 - 여기서 '들'(*, 사데)은 넓은 벌판을 가리킨다. 따라서 '들에 있는 진'은 블레셋 본국의 사령부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실 '사데'라는 단어는 블레셋 지역을 가리킬 때 사용된 단어였다(6:1).
모든 백성 - 군인과 대조되는 일반 블레셋 백성들을 가리킨다.
떨림이 일어났고 - 여기서 '떨림'(*, 하드라)은 심리적인 현사으로서 극도의 공포심(panic)을 뜻한다(NIV, RSV).
부대와 노략군들 - '부대'(*, 하마차브)는 당시 믹마스에 주둔하고 있던블레셋의 본대를 가리킨다<13:16>. 한편, '노략군들'은 삼 대(三隊)로 나뉘어 이스레엘의 여러곳을 유린키 위해 떠났던 블레셋의 부대들이다<13:17,18>.
땅도 진동하였으니 - 이것은 '지진'(earthquake, Living Bible)을 가리킨다. 비록 '진동하였으니'(*, 티르가즈)란 말이 때로 심리적인 격동을 뜻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지진을 가리키기 때문이다(삼하22:8; 시18:7; 77:18; 사5:25). 또한 지진은 공포와 함께 성전(聖戰)이 있을 때에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 원문에는 '하나님의 큰 떨림이었더라'로 되어 있는데, 이는 블레셋에 임한 공포와 지진의 재앙이 하나님에 의해 니려진 것임을 강조한다.
성 경: [삼상14:1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베냐민 기브아 - 즉 베냐민 지파에 속한 기브아란 뜻으로, 이곳은 사울의 고향 기브아를 가리키며 당시 이스라엘에 대한 사울의 통치 거점이었다(10:26; 13:2).
파숫군이 바라본즉 - 이때 '파숫군'은 약 1.5km 떨어져 있는 믹마스의 블레셋 본진(本陳)을 관찰한 듯하다. 물론 이때 파숫군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스러운 모습을 보았을 뿐만 아니라 아우성 소리도 들었을 것이다.
블레셋 사람이 무너져 - 여기서 '무너져(*, 나모그)는 문자적으로는'녹아내리다'란 뜻이다. 곧 이는 극도의 공포로 인해 용기를 잃고 마음이 녹아내리는 상태를 나타낸다.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 이것은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일행의 예상치 못한 공격과 수비대의 패주 소식을 듣고 극도의 혼란 상태에 빠져있음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표현이다.
성 경: [삼상14:1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이때 사울은 블레셋 진(陳)의 혼란이 누군지 모르지만 일단의 이스라엘 병사들에 의해 일어나게 된 것으로 판단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블레셋의 진을 공격한 병사들이 누구인지를 알기 위해 점호(點呼)를 실시하게 하였다.
점고하여 보라 - 여기에서 '점고(點考)하다'(*, 파카드)란 말은 '계수하다(number, KJV; 11:8; 13:15; 민1:20,22; 대상23:24), '점호하다'(공동번역), '소집하다'(muster, NIV)등의 의미로 볼 수 있다.
성 경: [삼상14:1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 - 맛소라 본문(Masoretic Text)은 이처럼 '하나님의 궤'(*, the ark of God)로 되어 있으나, 칠십인역(LXX)은 '에봇(*, ephod)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칠십인역의 표기를 정확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Keil, Smith).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가져오라'(*, 하기솨)라는 말은 성경 용례상 언약궤와 관련하여 사용된 적이 전혀 없으나, '에봇'과 관련해서는 몇 회 사용된 단어이다(23:9; 30:7). (2) 사울은 그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의 안전 여부를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을 통해 하나님께 물으려 했던 것이 분명하다(22:10). (3) 그 당시 언약궤를 전장(戰場)에 가져갔다가 패배했던 아벡 전투(4:5-11)에 대해서 능히 기억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궤가...함께 있음이라 - 이것은 '하나님의 궤를...가져오라'는 앞의 문구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필사자의 가필(加筆)로 봄이 타당할 것이다(R.Payne Smith). 따라서 물론 칠십인역에는 본 문구가 없다.
성 경: [삼상14:1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 사울은 블레셋 진에서 벌어진 이같은 상황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물론 사울은 이때 자신의 아들 요나단에 대한 염려를 모두 떨쳐버리지는 못했을 것이다.
네 손을 거두라 - 이것은 사울이, 요나단의 안전 여부 및 블레셋의 진으로 공격해 들어가야 할 당위성이 있는지의 여부를 하나님께 묻기를 포기했음을 시사해 준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울의 변덕스런 신앙 자세를 엿볼 수 있다. 즉 사울은 전쟁의 작전 수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을 받으려 하다가(18절), 전세(戰勢)가 유리하게 돌아가자 돌연 하나님을 향한 질문을 취소하였던 것이다.
성 경: [삼상14:20]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사울과...모든 백성이 모여 - 여기서 '모여'(*, 자아크)는 원래 '고함을 치다', '소리를 지르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수동형으로 사용될 때는 '소집하다'란 뜻으로 봄이 타당하다(수8:16; 삿6:34,35). 한편 '함께한...백성'은 사울과 길갈에서부터 동행했던 육백 명(13:15)과 요나단의 수하에 있던 병력 일천 명(13:2)을 합한 숫자를 가리킨다.
블레셋 사람이...칼로 그 동무를 치므로 - 이같은 기묘한 상황은 기드온의 소수 병력이 미디안을 대항해 싸울 때에도 벌어졌었다(삿7:22). 여기서도 하나님께서는 블레셋 사람들의 마음과 정신을 혼란스럽게 만드심으로써, 자기들끼리 피차 싸우다 자멸(自滅)하도록 하셨던 것이다. 결국 이같은 상황은, 모든 전쟁을 홀로 주관하시는 하나님께서 친히 간섭하신 결과였으며, 요나단의 신앙적 용기와 도전에 대한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였다.
크게 혼란하였더라 - 이같은 적군의 자중지란(自中之亂)의 모습은 대적에 대한 이스라엘의 승리가 결정적임을 보여줄 때 종종 성경에서 언급되고 있다(5:9,11; 7:10;출14:24; 신7:23; 겔38:21).
성 경: [삼상14:2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블레셋 사람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 - 이들은 블레셋 사람의 부대에 편성되어 블레셋을 위하여 싸우던 용병(傭兵) 내지는 징용군(徵用軍)이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한때 분명히 이스라엘을 대항해서 싸우기도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이 블레셋의 군대로 편성된 데에는, 이스라엘 영토의 많은 부분이 블레셋의 지배를 오래도록 받았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여기의 '히브리 사람'(*, 이브림)은 타민족에 의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붙여지던 모멸적 의미의 명칭이었다<13:3>. 따라서 그당시 블레셋 사람들은 이스라엘 출신의 군민들을 바로 이 '히브리 사람'(the Hebrews)이라는 명칭으로 불렀을 것이다(Keil).
사방에서...진에 들어왔더니 - 이것은 이스라엘 출신의 용병(혹은 징용군)들이 이번 전투를 맞이하여 자신들의 동족 이스라엘과 싸우도록 강제로 동원되었음을 강력히시사해 준다.
그들이 돌이켜...합하였고 - 엄밀히 말하여 히브리 원문에는 '돌이켜'라는 말이 없다. 다만 이는 의미를 두드러지게 하기 위한 번역자의 삽입이다(the Chaldee, LXX,the Vulgate, the Syriac).
이스라엘 사람 - 이는 본절 앞부분의 '히브리 사람'과 대조된다. 즉 여기서 저자가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그 백성의 거룩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듯하다. 이 사실로 볼 때 위의 '히브리 사람'은, 그들이 이스라엘의 원수 블레셋을 위해 봉사했다는 전력(前歷) 때문에 본서 저자에 의해서도 경멸적으로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4:2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사람 - '에브라임 산지'(hill country of Ephraim)는 팔레스틴 중부의 구릉 지대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곳에는 베냐민 지파 사람도 거주했으나(수18:11), 여기서는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살고 있던 지역만을 가리킨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까닭은, 에브라임 산지의 베냐민 지파 거주 지역은 사울의 군대로 인하여 그리 불리한 전황(戰況)만은 아니었고, 따라서 베냐민 사람들의 대부분은 숨을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13:6).
성 경: [삼상14:2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블레셋 진영의 소동]
본절은 그날 블레셋과의 믹마스 전투에서의 이스라엘의 승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기인하였으며, 또한 완전하였음을 강조한다.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 '벧아웬'(bethaven)은 믹마스 서쪽 약 1.2km 지점에 위치해 있다(13:5 주석 참조). 본서 저자가 여기서 '벧아웬'을 언급한 이유는, 13:5에서 블레셋 족속의 군대가 주둔했던 믹마스를 '벧아웬 동편'이라고 소개했던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여기서는 '벧아웬을 지나니라'라고 언급함으로써 믹마스에 주둔했던 블레셋 족속들이 이제 자신들의 본국 방향인 서쪽으로 패주했음을 밝히려는 것이다(Bunsen; 31절). 한편, 여기서 '지나니라'(*, 오브라)라는 말은 '넘어가다'(passed over, KJV), '계속되다'(continued out, Living Bible)란 뜻으로서, 곧 전쟁이 벧아웬 너머까지 계속 진행된 상태를 보여 주는 말이다(the battle moved onbeyond Beth Aven, NIV).
성 경: [삼상14:2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이 날에...백성이 피곤하였으니 - 여기서 '피곤하였으니'(*, 니가스)는 원래 '독촉하다', '압제하다'란 뜻이다. 여기서는 수동형으로 사용되어 '곤욕을 당하다', '괴로움을 받다'란 의미이다(13:6; 사53:7).
이는 사울이...맹세시켜 경계하여 - '이는'은 본절 첫 부분의 내용, 즉 이스라엘 백성이 피곤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를 밝히고 있는 구절을 이끄는 상관 접속사이다. 한편, '맹세시켜 경계하여'(*, 요엘)는 (1) '-라고 맹세하기를 강요하여', (2)'어리석게 행동하여'등 두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잇다. 그리고 본 문구 이하는 사울이 백성들에게 맹세하기를 강요한 내용이다.
저녁 곧 내가 내 원수에게 보수하는 때까지 - 사울의 이같은 말은, 태양이 질 때까지 원수를 무찌르겠다고 했던 여호수아의 결심을 염두에 두고 한 것 같다(수10:13). 따라서 이 말은 블레셋을 완전 섬멸시키겠다는 사울의 결심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사울의 이 맹세는 여호수아의 경우와는 달리 여호와를 위한 진정한 충정과 신앙에서 비롯된 열성은 아니였다. 다만 사울이 자신의 공명심과 명예욕을 드높이기 위해 상황을 잘못 판단하고, 그대로 밀어부친 독선적 횡포에 불과했다(Kiel, Fay). 따라서, 결국 사울의 이같은 행동은 여러가지 부정적인 결과를 낳고 말았으며, 전쟁에 이기고도 백성들의 신임을 잃는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그러므로 사울의 이러한 맹세는 이기적이고 독선적인 열정이 가져다 주는 폐단을 잘 보여 주는 예이다.
먹는 사람은 저주를 받을지어다 - 구약 성경에서 성행위를 절제하는 것(21:5), 잠을 줄이는 것(시132:3,4), 그리고 희생 제사를 드리기로 서원하는 것(삿11:30,31) 등은 용사들이 전쟁에서 필승을 기원하는 의미에서 취했던 행동으로 언급되고 있다(Klein). 따라서 그때 사울은 이겻들과 유사한 형식으로, 자신의 헌신적 자세를 표명키 위하여 자신을 포함한 전군(全軍)에게 금식령을 내린 것 같다. 그런데 여기서 사울이 군사들로 하여금 금식하도록 한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 전투를 속전 속결로 끝내기 위함이였을 것이다.그러나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블레셋과 격전을 치뤘으며, 블레셋을 쫓아 먼 거리를 행군했기 때문에 매우 허기진 상태였을 것이다. 따라서 당시사울은 이러한 군사들의 상황을 헤아리기보다는 자신의 공명심을 채우기위해 경솔한 맹세를 발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이 식물을 맛보지 못하고 - 이것은 사울의 명령이 어리석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 명령에 충실히 복종했다는 사실을 시사해 준다.
성 경: [삼상14:2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그들이 다 수풀에 들어간즉 - 여기서 '그들이'(*, 콜 하아레츠)는 문자적으로는 '온 땅이'란 의미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말은 '온 땅의 백성이'란 의미로 이해함이 타당하다(렘22:29). 한편 '수풀'(*, 야아르)은 레바논의 백향목숲 보다는 그 규모나 나무의 크기 등에 있어 훨씬 볼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광양의 이 수풀 지대 역시 어느 정도 우거졌었다. 그리고 이것은 농지나 목초지로 개간 가능한 숲을 말한다(Keil).
땅에 꿀이있더라 - 파레스틴 지방에서는 벌들이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 집을 짓고 거기에 꿀을 만들어 놓느다고 한다(Schultz). 심지어는 꿀이 벌집에서 넘쳐 땅으로 흘러내리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신32:13; 삿14:8; 시81:16; 마3:4).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러한 나뭇가지나 바위틈 사이에서 꿀을 취해 먹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가나안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신11:9 주석 참조)으로 묘사하기도 했던 것이다(출3:8; 민13:27; 신8:8).
성 경: [삼상14:2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맹세를 두려워하여 - 이스라엘 군사들의 이 두려움은 결국 자신들이 한 맹세를 지키지 못할 경우 사울에 의해 시행될 엄중한 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성 경: [삼상14:2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지팡이 끝을 내밀어 꿀을 찍고 - 이처럼 요나단이 손이 아닌 지파이로 꿀을 찍어 먹은 이유는 시간의 낭비없이 신속히 적을 추적하기위해서였다(Stoebe).
눈이 밝아졌더라 - 기록된 본문(케티브)을 따라 직역하면 '그의 눈이 보였더라','시력을 회복했더라'란 뜻이다. 그러나 맛소라 학자들은 29절에 근거해 이말을 '케리'로 처리하여 곧 '그의 눈이 밝아졌더라'란 의미로 해석하였다. 여하튼 이 말은 블레셋 군대를 추격하던 중, 피로하고 허기에 지친 요나단이 수풀 나뭇가지에 뭉쳐있는 꿀을 취해 먹고 기력을 다시 회복하였음을 가리킨다(스9:8; 시13:3).
성 경: [삼상14:2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맹세로...엄히 명하여 - 이는 금식(禁食)이백성들 스스로 자원해서가 아니라, 사울의 강제적인 명령에 의해 되어진 일임을 시사한다. 즉 사울은 자신의 독단적인 판단하에서 금식령을 내려 백성들로 맹세케 했고, 이에 백성들은 그 위세에 눌려 할 수 없이 금식 맹세를 했던 것이다.
백성이 피곤하였나이다 - 여기서 '피곤하였나이다'(*, 야아프)는 '탈진하다', '지치다'란 뜻의 '우프'(*)에서 파생된 말로, 곧 사울의 금식령으로 인해 백성들이 심히 곤비하게 된 상태를 가리킨다. 삿4:21에는 같은 단어가 '기절하다'란 말로 나타나 있다.
성 경: [삼상14:2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이 땅으로 곤란케 하셨도다 - 여기서 '이 땅으로'(*, 에트 하아레츠)는 '이 땅을'이란 뜻인데, 곧 25절의 경우처럼 '이 땅의 백성들'이란 의미이다(Keil). 그리고 '곤란케 하다'(*, 아카르)는 '해롭게 하다', '고통을 주다'란의미이다(창34:30; 수6:18). 또한 이 단어는 문맥에 따라 '성전(聖戰)을 망치다'란 의미로 확대 해석될 수도 있다(Keil). 왜냐하면 사울의 잘못된 금식령으로 인해 이스라엘 군사들이 탈진 상태에 놓였고, 결국 그로 인해 블레셋을 철저히 추격 섬멸하지 못함으로써, 믹마스 전투의 승리가 불완전한 상태에 머물고 말았기 때문이다. 한편 여호수아는, 전리품의 일부를 사취(詐取)함으로써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을 패배케한 아간에 대해서 이 단어를 사용했었다(수7:25). 그리고 사사 입다는, 자신의 맹세로 인해 결국 자신을 괴롭게 했던 자신의 딸에게 이 단어를 적용하였다(삿11:35).
성 경: [삼상14:30]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서약과 요나단의 실수]
본절에 나타난 요나단의 말은 사울의 어리석은 맹세가 왜 믹마스 전투를 망치는 행위였는지를 분명히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4:3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아얄론에 이르기까지...쳤으므로 - '아얄론'(Aijalon)은 '사슴의 자리'란 뜻으로, 이곳은 믹마스로부터 서쪽으로 약 20km 지점에 위치했으며 블레셋과의 국경에 인접한 성읍이다. 또한 이곳은 역사상 여호수아가아모리 족속을 패배시켰던 전적지이기도 하였다(수10:12). 결국 이스라엘이 금식을 수행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얄론까지 블레셋을 추격했다는 사실은 (1) 요나단의 말처럼(29,30절), 만일 금식을 하지 않았더라면 그 승리가 얼마나 더 컸을 것인가를 짐작케 해주는 반면 (2) 또한 그당시 이스라엘 군사들이 얼마나 허기지고 피곤했을 것인가를 가히 짐작케 해준다.
성 경: [삼상14:3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본절은 사울의 어리석은 금식 명령이 야기시킬 수 밖에 없었던 부정적 결과에 대한 언급이다. 즉 맹세의 유효 만료 기간인 저녁이 되자마자(24절), 이스라엘 군사들은 너무나 허기에 지친 나머지 자신들의 굶주린 배를 채우느라 율법의 주요한 두 가지 계명을 범하고 말았다. 곧 이때 이스라엘 군사들이 범한 죄는 (1) 소와 송아지를 같은 날에 잡아먹은 것(레22:28), (2) 고기를 피채 먹은 것(창9:4; 레17:10-14; 신12:23)등이다(Pulpit Commentary). 이 중 특히 '고기를 피채 먹은 것'은, 거듭 반복 금지된 율법의 핵심 명령을 어겼다는 점에서 더욱 큰 잘못이었다. 레19:26 주석 참조.
땅에서 잡아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배고팠던 나머지 허기(虛飢)를 채우는 일에 급급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사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큰 돌 위에서 가축을 잡아야만 고기로부터 피를 뺄 수 있었던 것이다.
성 경: [삼상14:3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기본 동사 '바가드'(*)는 '은밀히 행하다', '속여 다루다', '배은 망덕하게 행하다','신실치 못하다'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고기를 피채 먹지 말라는 모세의 율법(레19:26)을 지키지 않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사울의 엄중한 책망이다. 그러나 사실 백성들의 이러한 범죄는 결국 사울의 경망스런 금식령(24절) 때문에 초래된 것이었다. 따라서 사울은 이러한 현상에 대해 먼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이어 범죄한 백성 전체의 회개를 주도했어야만 옳았다. 그러나 사울은 당장 범죄한 눈 앞의 백성들만 책망하였고, 더 나아가 꿀을 먹은 요나단(27절)을 죽이려고까지 하였다(44절).
성 경: [삼상14:3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거기서 잡으니라 - 즉 사울의 명령으로(33절) 마련된 큰 바위 위에서 짐승을 잡았다는 뜻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스라엘 군사들은 짐승으로부터 피를 뺀 후 살코기만 구별하여 먹을 수 있었다(Keil, smith, Fay).
성 경: [삼상14:3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의 범과(犯過)]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으니 - 여기서 '단'(壇)은, 그곳을 희생 제사가 계속적으로 드려지는장소로 삼으려는 목적에 따라 세워지지는 않았다. 다만 사울은 그때 본(本) 믹마스 전투를 승리로 이끄신 하나님께 감사하기 위해(7:12) 단회적으로 사용할 목적으로 그 단을 쌓은 듯하다(Keil).
처음 쌓은 단이었더라 - 문자적으로는 '단을 쌓기 시작하였다'란 의미이다. 즉 이것은 특별한 목적에 따라 왕이 단을 쌓는 일에 있어서, 사울이 선구자가 되었음을 뜻한다(R.Payne Smith). 한편 후일 다윗도 여호와를 위해 단을 쌓았다(삼하24:25).
성 경: [삼상14:3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사울이 가뢰되...한 사람도 남기지 말자 - 블레셋을 섬멸시키고자 했던 사울의 열심을 엿볼 수 있다. 그때 사울은 자신의 어리석은 명령(24절) 때문에 블레셋 군대를 섬멸할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고 판단함으로써, 그것을 만회키 위해 이와 같은 제안을 한 듯하다.
제사장이 가로되...하나님께로 나아가사이다 - 여기의 '제사장'은 말할 나위없이 대제사장 아히야(Ahijah)임이 분명하다(3,18절). 그리고 '하나님께 나아가사이다'란 말은 하나님의 뜻을 물어보기위해 취하는 행동이다. 따라서 그때 제사장 아히야는 밤중인데도 불구하고 블레셋 군대를 계속 추격하자는 사울의 결정이, 전투중인데도 백성들을 금식시켰던 전번의 결정만큼이나 경솔하지나 않은 것인지를 염려했던 것이다.
이리로 - 방금 전 사울이 쌓았던 제단을 가리킨다(Keil).
성 경: [삼상14:3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사울이 하나님께 묻자오되 - 사울은 이때 대제사장의 에봇에 들어있는 '우림과 둠밈'(출28:30 주석 참조)을 통하여 블레셋을 추격해야 할지의 여부를 질문하였을 것이다(Fay).
대답지 아니하시는지라 - 대제사장의 '우림과 둠밈'을 통하여 합법적으로 문의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 전혀 응답지 않으셨다는 사실은, 분명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瑕疵)가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Fay, Keil).
성 경: [삼상14:3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사울이 가로되...이 죄가 뉘게 있나 알아보자 - 사울은 자신의 질문에 하나님께서 응답지 않으신 것은 분명 이스라엘 백성 중에 숨은 죄가 있다고 판단하고, 그 사실을 규명코자 적극 나섰다.
백성의 어른들 - 여기서 '어른들'(*, 핀노트)은 '모퉁이의 돌', '우두머리', '망대'란 뜻이다(출27:2; 삿20:2; 습1:16). 따라서 '백성의 어른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표자 격인 각 지파 장로들을 가리킴이 분명하다(8:4; 민11:30).
성 경: [삼상14:3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반드시 죽으리라 - 전투 중에 군사들을 금식케 한 사건(24절) 이후, 사울의 경솔한 맹세가 여기서 또다시 나타난다(수9:15-21).
한 사람도 대답지 아니하매 - 요나단이 사울의 명령을 범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군사들까지도 이같이 한 것은, 이처럼 침묵함으로써 사울의 경솔함을 책망키 위함이었을 것이다(Pulit Commentary).
성 경: [삼상14:40-4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드러난 요나단의 죄]
우림과 둠밈을 통한 문의에 하나님께서 대답이 없자(37절), 사울은 여기에서 제비를 뽑는 방식에 의하여 범인을 가려내고 있다. 즉 그때 사울은 제비 뽑기를 통하여(1) 백성과 자기 가족 두편 중에서 먼저 범인이 속한 한 편을 가려내고 (2) 이어 범인이 속한 한 편으로 밝혀진 자신의 가족 중 최종적으로 범인 요나단을 가려냈던 것이다.
실상을 보이소서(*, 하바 타밈) - 직역하면 '완전을 주소서'(Give a perfect)인데, 곧 '완벽한 제비(lot)를 보여 주소서'란 의미이다(KJV). 그런데 70인역(LXX)과 일부 학자들(Ewald, Thenius)은 여기서 '타밈'을 '툼밈'(thummim)으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 부분을 길게 의역(意譯)하기를, "만일 나 또는 요나단에게 죄가 있으면 '우림'(Urim)으로 응답하시고, 만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죄가 있으면 '둠밈'(Thummim)으로 응답하소서"라고 하였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동사 '뽑히고'(*, 일라케드)와 '뽑으라'(*, 히필)는 제비 뽑기의 추첨과 관련되어 사용되는 동사이며, 우림과 둠밈과 관련해서는 성경 용레상 한번도 사용된 적이없다. 그러므로 본문을 확대 의역한 70인역의 번역은 그 타당성이 없다(Keil &Delitzsch, Commentary on the O.T., vo1.2-ii. pp. 145-146). 한편 '제비뽑기'(lot)에 대해서는 수14:2; 18:10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14:43]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본절에서는 요나단은 자신의 행위(27절)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겸손히 부친 사울의 뜻을 좇기로 작정한다.
성 경: [삼상14:44]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사울은 여기서 자신이 여호와의 사심으로 맹세했던 바(39절)는 반드시 하나님 앞에서 지켜저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민30:1-8 강해, 서원과 맹세에 대하여>. 물론 그때 사울은 자신의 맹세가 경솔한 것이었다는 사실로 인하여 내심 후회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한편, 그런데 여기서 요나단이 금식령 기간 중 꿀을 먹은 사실은 결코 사울의 맹세에 대한 거역이나 불복종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때 요나단은 그러한 사울의 명령을 전혀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27절). 즉 요나단은 전혀 고의성(故意性) 없이 '부지중에' 잘못을 범한 것이다. 이런 경우 율법에 의하면(레4:3,13,14,22-24,27,28), 합당한 제물을 가지고 대속을 위한 속죄제를 드림으로써 죄 용서함 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요나단에게 속죄제를 드릴 기회조차 주지 않고, 자신의 맹세를 따라 요나단을 죽이려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사울이 자신의 권위에 스스로 빠져버린 어리석은 행위였다(R.Payne Smith).
성 경: [삼상14:45]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백성들의 변호(辯護)]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 백성들은 제비를 뽑기 전에는 소극적으로 침묵으로 일관했으나, 제비에 의해 요나단이 맹세를 범한 장본인으로 판명되고, 이에 따라 그가 죽임을 당할 위기에 놓이자 이제 적극적으로 요나단의 구명(救命)을 위해 사울에게 항의한다.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사하였음이니이다 - 이것은 백성들이 사울에게 제시한 바 요나단이 죽임을 당하지 않아야 할 이유이다. 즉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요나단을 도구로하여 블레셋과 전투를 치르셨다는 사실이다. 결국 이같은 사실을 하나님께서 요나단과 함께 하셨기 때문에, 금번 믹마스 전투를 이스라엘이 승리로 이끌 수 있었던 것이므로, 승리를 위해서 발한 사울의 맹세는 마땅히 철회되어야 하고, 따라서 요나단에 대한 처형 역시 마땅히 중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즉 당시 백성들은, 이처럼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사람을 해(害)하는 일은 그 자체가 하나님을 거스리는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구원하여 - 기본 동사 '파다'(*)란 단어는 원래 돈, 짐승, 심지어 사람 등을 대신 주고 특정인을 되찾거나 목숨을 구하는 경우에 사용된다(출13:13,15; 21:30;34:20; 민3:46-51). 결국 본서 저자는 여기서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써, 요나단을 구출하려는 백성들의 의지가 실로 대단했음을 강력히 암시하고 있다. 또한 이러한 백성들의 강력한 의지는, 결국 애초에 사울이 발한 맹세(24절)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반영하는 것이다.
성 경: [삼상14:46]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블레셋...따르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 이것은 사울이 블레셋과의 전투를 완전히 중지한 채,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정치적 통치 중심지인 기브아(10:26)로 돌아갔음을 뜻한다. 한편 이것은 사울이라는 인물이 경박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보여 준다. 사실 하나님께서 사울의 질문에 대하여 대답지 아니하신 것은(37절), 블레셋을 추격치말라는 의미에서 그리하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볼 수 있는 까닭은, 대답지 아니하셧다는 것은 이스라엘 중에 어떤 하자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는 바(37절), 이제 그 하자가 발견되어 완전히 해소되었기 때문에 다시금 일치 단결하여 추격의 고삐를 당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사울은 그 하자(瑕疵)가 결국 자신의 경솔한 맹세(24절)로 귀착되자 그만 블레셋에 대한 추격까지 포기하고 만 것이다.
블레셋 사람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 즉 믹마스 땅에 진쳤던(13:16)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에 패하여, 결국 자기 본토로 돌아갔다는 뜻이다. 따라서 결국 이번 믹마스 전투에서 살아남은 블레셋 군대는 이후 다시 세력을 키워 이스라엘을 재차 침공하였고(29:1), 그 전투에서 이스라엘은 대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울과 요나단이 전사하기까지 하는 비극을 당하고 만다(31:1-6).
성 경: [삼상14:47]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사울이...왕위에 나아간 후에 - 사울이 처음 길르앗 야베스 전투(11:11)를 통해 암몬 족속을 꺾음으로써 공식적으로 이스라엘의 왕위(王位)에 추대되었듯이(11:15), 이제 사울이 믹마스 전투(14:23,31)를 통해 난적 블레셋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완전히 확립했음을 보여 준다(Keil). 한편 여기서 '나아간'(*, 라카드)은 '획득하다', '점령하다'란 의미로서(신2:35; 수8:21; 삿1:12), 이는 곧 사울이 왕으로서의 통치권을 확고히 굳혔다는 의미이다(Jerusalem Bible, 공동번역).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 이 표현 그대로, 당시 이스라엘을 중심으로 모압과 암몬은 동편에, 에돔은 남방에, 소바는 북방에, 그리고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서편에 각각 위치하고 있었다.
모압 - 여기서 모압 족속은 요단의 동쪽, 갓과 르우벤 지파의 영토 남쪽에 거주했던 민족으로서, 사사 시대 이래 이스러엘 백성들을 괴롭혀왔다(삿3:12-14). 한편 이곳이외에는 사울 시대에 이 모압 족속이 이스라엘을 침입해왔다는 언급도, 또한 사울이 이들을 물리쳤다는 언급도 없다.
암몬 자손 - 암몬 족속 또한 사사 새디 이래 이스라엘을 괴롭혔던 족속이다(삿10:7-17). 이들은 사울의 즉위 직후 이스라엘에 대한 공격을 폈으나, 사울에 의해 격파당했었다(11:1-11).
에돔 - 에돔 족속은 사해의 남부에 자리잡고 잇던 족속으로서, 사사기에서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침입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사 시대에는 모압 족속의 공격이 없었을지라도, 사울 시대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이들의 공격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소바의 왕들 - '소바'(Zobah)는 유프라테스 강 상류에서 야르묵 강 사이에 자리 잡았던 아람족의 일파이며(삼하8:3), 여러 부족으로 이루어진 부족 연합 성격의 국가였다(Beitzel). 한편 '왕들'은 이들이 부족 연합의 성격을 띠고 있던 도시 국가였음을잘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4:48]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아말렉 사람을 치고 - 사울이 '아말렉'(Amalek)을 친 사실은 15:1-9에 언급되고 있으나, 여기서는 별도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듯하다. 그같이 보아야 할 까닭은, 15:1-9의 언급은 출애굽시 아말렉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가나안 여정(旅程)을 방해했던 역사적 사실에 따라 그 족속에 대하여 행해진 징벌과 관계되지만, 본절의 언급은 아말렉족속의 이스라엘 영토 침입에 따른 징벌과 관계되기 때문이다.
약탈하는 자의 손에서 건졌더라 - 이러한 문구는 사사의 활약상을 묘사한 전형적 문구이다(삿2:16). 그러므로 본절의 이같은 표현은 결국 본서의 저자가 사울을 사사(士師)의 연장선상에서 보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4:49]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리스위 - 이 사람은 '아비나답'과 동일한 인물임이 분명하다(31:2; 대상8:33;9:39).
말기수아 - 이 이름은 '나의 왕은 구원이다'란 의미이다. 한편, 사울과 그의 세 아들 요나단과 리스위(아비나답)와 말기수아는 후일 블레셋과의 길보아 전투에서 함께 전사(戰死)한다. 그리고 이 외에도 사울에게는 '에스바알'이라고도 불리우는(대상8:33) 그의 네째 아들 '이스보셋'이 있었다(삼하2:8).
메랍 - '증가하다'란 의미의 이름인 메랍은 원래 골리앗을 죽인 사람에게 시집보내기로 약속이 되었었다(17:25).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고, 골리앗을 죽인 다윗 대신 므흘랏 사람 아드리엘에게 시집보내졌다(18:19).
미갈 - '누가 하나님 같으냐?'란 뜻이다. 사울의 차녀인 미갈은 다윗과 결혼했으나, 언약궤로 인하여 기뻐서 춤추던 다윗을 비웃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아이를 낳지 못했다(삼하6:23). 한편 사울의 두 딸 메랍과 미갈은 18:17-21의 사건에 대한 배경으로 여기 기록되었다.
성 경: [삼상14:50,51]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아하노암 - '나의 형제는 유쾌하다'란 의미이다. 부친은 '아히마아스'인데, 그 이름에 '아히'(*, '형제'란 뜻)란 접두어가 붙은 것으로 보아(3절) 제사장 가문일 가능성이 있다(Smith, Fay).
아브넬 - '나의 아버지는 넬'이란 뜻이다. 사울과는 사촌 관계로서(Keil, Fay), 사울 왕국의 군대 장관을 맡았던 아브넬은 요압이 다윗을 군사적으로 도왔듯이 사울과 그의 아들 이스보셋을 군사적으로 보좌했던 인물이다(삼하2:8,9).
사울의 숙부 넬 - '넬'은 '등불'이란 뜻이다. 이 사람은 사무엘이 사울에게 무슨 말을 했는지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표명했던 인물이다(10:15,16).
기스 - 9:1 주석 참조.
아비엘의 아들 - 카일(Keil)과 스미드(Smith) 박사는 여기서 '아들'(*, 벤)을 '자손들' 혹은 '아들들'(*, 베네)로 보아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성 경: [삼상14:52]
주제1: [믹마스 전투]
주제2: [사울의 업적과 가계(家系)]
본절은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왕국을 통치하는 기간 동안에 있었던 가장 특징적인 사실들을 언급하고 있다. 그것은 즉 (1) 숙적(宿敵) 블레셋과 간단없는 전쟁을 치루었다는 사실이며(17:1-3; 23:27; 29:1; 31:1,2), (2) 따라서 그러한 블레셋과의 전쟁에 대비키 위하여 정예 상비군을 조직함으로써, 국방력을 키워나갔다는 사실이다(Pulpit Commentary). 이처럼 사울은 이스라엘의 사사(士師)시대를 마감하고, 왕정(王政) 시대를 문을 열고 그 기반을 닦은 무사적(武士的) 왕으로서, 실로 백성들의 요구대로 '열방과 같은'(8:5,20) 왕처럼 활약한 인물이었다.
사울이...불러 모았더라 - 이 말은 사울이 열방과 같은 왕처럼 조직적인 군대를 소유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힘있고 용맹한 백성들을 병사로 징집함으로써 상비군(常備軍)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이다(13:2).
성 경: [삼상15: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 선지자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을 사울 왕에게 전달하기 위해 그에게 다시 온 때는 두 사람이 헤어진 이후(13:15) 꽤 오랜 세월이 지난 뒤인 듯하다. 대략 당시의 시점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다. 즉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때인 B.C. 1010년 경에 왕위에 올랐는데, 만일 다윗이 최초 기름 부음 받은 때를 대략 15세 때로 본다면(16:11, 12) 그때는 아말렉 전투 직후였으므로(16:1), 아말렉 전투는 B.C. 1025년 경에 벌어졌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결국 사무엘이 사울에게 다시 온 이때는 믹마스 전투 때(B.C. 1048년)이므로 사울과 헤어진 지(13:15) 약 23년 후라는 계산이 나온다(Leon Wood, A Survey of Israel's History).
여호와께서 나를 보내어...기름을 부어 -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열방의 왕과는 다른 특성을 지닌 왕임을 보여 준다. 즉 선민 이스라엘의 왕 사울은 열방의 왕과는 달리 신적(神的)인 기원을 가지며, 따라서 하나님의 대리자인 선지자의 지도를 받아야만 하는 왕이었다. 한편, 여기서 '기름을 부었다'는 선지자 사무엘의 말은 10:1의 사건과 연관되는 말이다(Keil, Fay).
이제 왕은...말씀을 들으소서 - 이말은 사울이 전에 여호와의 선지자 사무엘의 직무를 침범했던 제사 사건(13:8-14)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사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하나님의 일차 시험을 통과치 못했었다. 그러므로 여기 사무엘의 이 언급은 사울이 반드시 통과해야만 할 새로운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질 것을 예시한다. 이로 볼 때 믹마스 전투 개시 직전, 사무엘이 사울의 불순종에 대해 심판적 경고(13:13, 14)를 내린 것은 최종적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즉 그 선언 이후 사무엘이 다시금 사울을 찾아와 여호와의 말씀을 지킬 것을 당부한 것은 여호와께서 아직 사울을 버리지 아니하사, 그로 하여금 새롭게 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고 계심을 의미한다(13:14 주석 참조). 이것은 마치 니느웨 성에 대한 요나의 심판 선언도 최종적인 선언인 것 같았으나, 니느웨 성이 회개하자 하나님께서 그 뜻을 돌이키신 것과 같은 이치이다(욘 3:4-10).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길이 참으사 죄인이 회개하고 살기를 바라시는 자비와 긍휼의 하나님이시다(겔 18:23; 33:11; 롬 2:4). 그러나 사울은 금번 아말렉 전투에서도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거역과 반역의 죄를 범함으로써(9절), 마침내 하나님께 버림받고 만다(26절; 16:14).
성 경: [삼상15: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만군의 여호와 - 이 표현은 특별히 성전(聖戰)과 관련하여 주로 언급된다(1:3, 11; 4:4; 17:45; 삼하 5:10). 따라서 사무엘은 여기서 이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본절 이하에서 언급되는 아말렉과의 전투 명령의 엄숙성을 더욱 강조한다.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 아말렉 족속(the Amalekites)은 에서의 손자 아말렉의 후손들로서(창 36:12, 16; 대상 1:36), 유다 남부 광야 지역을 거점으로 유목과 약탈로 살아간 호전적인 족속이다. 이 족속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 직후 르비딤 광야에 이르렀을 때, 교활하게 이스라엘 후미(後尾)를 기습 공격했었다(출 7:8-13).그런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오랜 노예 생활 끝에 해방된 직후였으므로 아무런 전투 능력도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신 25:17-19). 따라서 그때 이 일로 인하여 이스라엘이 입은 타격은 실로 막대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서 '아말렉이 이스라엘에게 행한 일 곧 애굽에서 나올 때에 길에서 대적한 일'은 바로 이러한 아말렉의 기습 공격 사건을 뜻한다. 아말렉의 이 공격 사건이 특히 용서받지 못할 사건이 된 것은 이것이 (1)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위에 베푸신 크신 출애굽의 은총을 무시한 채 가나안 여정을 방해했던 사건이고, (2) 피곤하고 지친 이스라엘의 후미를 공격하는 비겁한 전술을 구사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아말렉 족속을 선민(選民) 이스라엘의 제 1의 대적국으로 간주하시고, 그 족속을 천하에서 도말하고 진멸할 것을 선언하시고 명령하셨는 바(출 17:14; 신 25:19), 이러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는 이방의 술사(術士) 발람의 예언 속에서도 여실히 나타났다(민 24:20). 한편 이러한 하나님의 형벌 하에 놓여진 아말렉 족속은 비단 이 사건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이스라엘이 요단을 통하지않고 네게브(Negeb, 유다 남부 사막 지대) 지역을 통과하여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려는 것도 방해하였다(민 14:43-45). 그리고 사사 시대에 들어와서도 이스라엘에 대한 그들의 잔인하고 난폭한 침입은 결코 중지되지 않았었다(삿 3:13; 5:14; 6:3, 33; 7:12; 10:12; 12:15). 이에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사울을 통해 아말렉 족속을 진멸코자 하셨던 것이다. 출 17:14; 민 24:20; 신 25:19 주석 참조.
내가 추억하노니 - '추억하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파카드'(*)는 '방문하다', '생각하다'란 뜻으로서, 곧 어떤 일에 대해 잊지 않고 내내 기억하고 있다가 때가 되어 찾아가는 행위를 뜻한다. 물론 여기에서는 이스라엘에게 행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를 지적하고 있는 말이다. 그러나 이 말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대한 아말렉의 적대 행위 자체만을 기억하고 있음을 뜻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이때 (1)아말렉 족속에게 복수하라고 당신께서 이스라엘에게 명령하셨던 사실(출 17:14; 신25:19), (2) 그리고 아말렉에 대한 복수를 위한 성전(聖戰) 때에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대신하여 싸우실 것이라고 약속하셨던 사실(출 17:16) 등을 염두에 두고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말렉 진멸 명령]
지금 - 출애굽 직후 가나안 행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공격한 아말렉 족속의 적대 행위에 대해 이스라엘이 복수해야 할 때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여러 측면에서 안정을 이룩했을 시기로 지정하셨었다(신 25:19).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은 사울 치하에서 정치적인 안정을 이미 구축하고 있었다(14:47, 48). 즉 아말렉을 칠 시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가서(*, 얄라크) - '진군하다', '쫓아가다'란 뜻이다(출 13:21; 24:5,8). 곧 총공격을 하라는 의미이다.
아말렉을 쳐서 - 여기서 '치다'(*, 나카)란 말은 '때리다', '쳐죽이다'란 의미로서,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傷害)를 입히는 것을 가리킨다(13:4; 14:14 ;17:35; 수 10:20).
그들의 모든 소유를...진멸하되 - '그들의 모든 소유'는 문자적으로는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란 뜻으로, 곧이어 언급되는 '남녀...나귀' 등 모두를 가리킨다. 한편 '진멸하되'(*, 하람)는 원래 '금지하다' 혹은 '바치다'란 의미이나, 여기서처럼 사역형으로 사용될 경우 '분리시키다', '금지시키다'란 의미가 된다. 특히 이 단어는 성경에서 사역형으로 사용되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기 위하여 그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목적으로 부정한 것을 제거하거나 저주받은 물건을 제사장에게 바치는 행동을 나타낸다(Lange). 즉 하나님의 뜻에 의해 '헤렘'(바쳐진 것, 금지된 것)으로 지정된 것은 결코 다른 용도로는 쓰여질 수 없었고, 오직 하나님의 공의(公義)의 만족을 위해 반드시 '헤렘의 법칙'대로 시행되어야만 했다. 따라서 만일 이 '헤렘'이 산 것이면 죽여야 했고, 그 밖의 물건들은 불로 다 태워버려야 했으며, 불로 태워지지 않는 금.은 등은 성소에 귀속시켜 하나님께 봉헌되어야만 했다(레 27:28; 신 13:16 ;수 6:17). 한편, 이와 비슷한 법칙은 성경 외적 문헌들에도 나타난다. 곧 어떤 고대 문헌에는 모압 왕 메사가 이스라엘의 장년, 소년과 소녀, 하인 등을 잡아간 후 그들을 모두 죽여서 자신의 신 그모스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나와 있다(Pritchard). 따라서 여기의 '진멸하되'는 단순히 정치.군사적 행동이 아닌 영적.종교적 행위라는 점에서, 사울로서는 반드시 그대로 이행해야 될 사항이었다. 레 27:28; 신 13:17; 수 6:17 주석 참조.
남기지 말고 - 여기서 '남기다'(*, 하말)는 '긍휼히 여기다', '동정하다', '아까워하다'란 뜻이다(23:21; 삼하 12:6; 대하 36:15, 17). 그러므로 이 말은'일말의 동정도 하지 말고' 또는 '조금도 아까워 말고'란 뜻이다. 곧 이는 거룩한 하나님의 의롭고 공의로운 심판대로 철저히 시행하라는 엄숙한 명령이다.
성 경: [삼상15: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사울이 백성을 소집하고 - 여기서 '소집하다'(*, 솨마)는 원래 '듣다'란의미이나, 여기서처럼 강조형으로 쓰일 경우 '불러 모으다', '듣게 하다'란 뜻이 된다(시 66:8; 렘 51:27). 결국 이것은 전투의 필요성을 알리며, 그렇게 함으로써 백성들이 전투하기 위하여 모여 들도록 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들라임에서 계수하니 - '들라임'(Telaim)은 유다의 한 성읍으로서 '델렘'(수15:24)과 동일 지역인 듯하다(Kimchi, Keil). 그런데 '델렘'(Telem)은 여호수아서에서 유다의 또 다른 성읍 '십'과 같이 언급된다는 점에서 그곳에 인근한 지역일 것이다. 한편 '십'(Ziph)은 헤브론 남쪽 약 51km지점에 위치해 있다. 결국 '들라임'은 유다 남방의 국경 지대에 있는 장소로서, 곧 아말렉과의 경계 지점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이처럼 아말렉 경계 지점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여건상, 아말렉 전투를 수행키 위한 군사들의 집결 장소로 이곳이 채택된 것 같다(Fay). 한편 '계수하니'는 오히려 '소집하다'란 의미로 봄이 좋다(11:8).
보병이 이십만...유다 사람이 일만 - 여기서 '유다 사람'만 유독 구별되어 있는 것은, 여기에는 본서 기록 당시의 정치적 상황이 의도적으로 반영되고 있기 때문이다(11:8). 즉 이 아말렉 전투가 벌어졌을 당시 유다 지파는 이스라엘의 다른 지파와 완전히 동화되지 못했음이 분명하다(Klein). 한편 '이십만...일만'은 야베스 길르앗 전투때 소집된 병력 '삼십만...삼만' 보다는 적은 숫자이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필요가 있는 것은, 유다 지파는 병력 소집 장소인 '들라임'에 가까이 거주했으면서도 참여율이 다른 지파에 비하여 훨씬 적었다는 사실이다(11:8). 이것은 결국 유다 지파가 사울의 왕국에 대하여 특별히 도전적 자세를 취하고 있었음을 암시해 준다. 아마 유다 사람들은 그때 자신의 지파에서 왕이 나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일 것이다(창49:10).
성 경: [삼상15: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아말렉 성에 이르러 - '아말렉 성'은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 곳으로서, 지금도 정확한 위치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아무튼 이때 사울의 군대는 국경을 넘어 아말렉의 영토 안으로 진격해 들어갔음이 분명하다.
골짜기에 복병하니라 - 여기서 '골짜기'는 건기(乾期)에는 물이 흐르지 않는 '와디'(Wady)를 가리킨다. 그리고 '복병'(伏兵)은 이스라엘이 가나안 족속들과 정복전을 치룰 때 이미 전술의 한 형태로서 사용되었다(수 8:2; 삿 20:29). 그러나 여기의 '복병'은 아말렉을 기습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아말렉 사람들과 함께 거주했던 겐 사람들(the Kenites)을 대피시킬 시간적 여유를 갖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5: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사울이 후대의 다윗처럼(27:10; 30:26-30), 이스라엘에 대하여 우호적이었던 겐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푸는 장면이 언급되고 있다.
겐 사람 - '겐'(*, 케니)은 '금속 세공업자' 혹은 '대장장이'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명칭은 그들이 살던 아라비아 지역에 질이 좋은 동광석(銅鑛石)이 풍부했었다는 역사적 사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아브라함 당시 유목민으로서 가나안 땅에 거주한(창 15:19) 겐 족속의 일파는, 모세 당시에는 미디안 지역에 거주했었으며(출 2:16-21; 18:1; 민 10:29), 이스라엘 백성들의 출애굽 때에는 그 족속의 한 사람이었던 모세의 처남 호밥이 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길 안내자가 되면서(민 10:29-32) 이스라엘과 우호적 관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그 민족은 이스라엘의 남부 브엘세바 근처에서 살게 되었다(삿 1:16). 그리고 이때로부터 점점 남부로 내려가, 사울 시대에는 아말렉 족속들의 지역에 함께 거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겐 사람들 모두가 이스라엘에 대해 호의적이었던 것은 아니다. 여기서 언급된 '겐 사람' 이외의 또 다른 '겐 사람'의 일파는 아라비아의 페트레아(Petrea) 지역에 살면서 에돔과 동맹을 맺고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등,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의를 갖고 있었다(Lange).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은 이후 다윗 시대까지 이스라엘과 우호적인 관계를 형성하였다(30:29).
선대하였느니라 - '선대'(*, 헤세드)는 '인자', '긍휼' 등의 의미로서,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을 가리킬때 사용되었다(창 19:19; 시23:6; 106:45). 그러나 여기 언급된 겐 사람들의 '선대'는 구체적으로 그들이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여행 길 안내자가 되어주었다는 사실이다(민 10:29-32). 출애굽 당시 모든 민족들이 이스라엘에 대하여 적대(敵對) 행위를 한것에 비하면, 겐사람들의 이같은 태도는 '선대'(善待)라고 하기에 가히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삿4:11-22; 5:24-27). 한편 혹자(Hengstenberg)는 이처럼 아말렉 족속으로부터 겐 족속이 구별되어 보호 받을 것이란 사실은 이방의 술사 발람의 예언(민 24:20, 21)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고 한다. 민 24:21 주석 참조.
떠나니라 - 이것은 겐 사람들이 그 지역에서 영원히 떠났음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아말렉과 이스라엘의 전투를 피해 잠시 다른 곳으로 이동 대피했음을 의미한다. 이는 이후 사울 왕 말기에도 겐 사람들이 네게브(Negeb) 지역에 계속 살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확증될 수 있다(27:10; 30:26-30).
성 경: [삼상15: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하윌라에서부터 애굽 앞 술 - '하윌라에서부터 ~술에 이르기까지'라는 말은 당시 아말렉 족속들이 흩어져 살던 거의 모든 영역을 가리킨다(창 25:18). 한편 '하윌라'(Havilah)는 '광황한 모래 사장'이란 의미로서, 아라비아 반도 북서부 쯤에 위치한 한지역 정도로만 추측된다(S.Cohen). 카일(Keil)과 스트라보(Strabo)는 현재 이곳을 아라비아의 페트레아 경계 지점에 위치한 '하우로테안'(Chaulotoeans) 지역으로 본다. 그리고 '술'(Shur)은 딤사 호수 동쪽에 위치한 시나이 광야를 뜻하는 일반적 명칭인듯 하다(창 16:7). 즉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 최초로 도달한 지역으로(출 15:22), 애굽과 팔레스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아라비아 사막의 일부이다(Keil). 그리고 현재의 지명은 '이팔'(Jifar) 광야이다(Fay). 한편, 위의 언급을 통해 우리는 사울이 아말렉 족속을 진멸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좇아 유다 국경 지대로부터 애굽의 경계에 이르기까지 아말렉 족속의 거의 전지역을 초토화(焦土化) 시켰음을 알 수 있다(Smith).
성 경: [삼상15:8,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불순종]
본문은 사울이 하나님의 진멸 명령을 부분적으로만 이행하였음을 보여 준다. 즉 사울은 일반 백성들과 짐승의 열등한 것들은 명령대로 모두 진멸했지만, 자신에게 실리적으로 유용한 짐승 또는 우수하고 질 좋은 것들은 진멸치 아니했다.
아각을 사로잡고 - 사울이 하나님의 지엄한 명령을 따르지 아니하고, 이처럼 아말렉 족속의 왕 '아각'(Agag)을 살려둔 이유는 아마 다음과 같을 것이다. 즉 (1) '아각'을 통하여 큰 실리(實利)를 얻기 위한 목적(왕상 20:31-42), (2) 혹은 '아각'을 통하여 자신의 이름을 내기 위한 목적(12절) 등으로 이해될 수 있다. 한편 '아각'(*)은 애굽 왕을 '바로'라고 하듯이, 아말렉 왕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불려지던 명칭이다(민 24:7 주석 참조). 그리고 '아각'의 의미는 '맹화'(猛火)란 뜻이다(Lange).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 이 말은 아각을 제외한 모든 아말렉 사람들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두 진멸했다는 뜻이 아니다. 단지 거의 모든 아말렉 족속을 쳐죽였다는 뜻이다(Fay). 사실 아말렉 족속이 거주하던 유다 남부 광야 지대는 광활했을 뿐만 아니라, 아말렉 족속은 유랑 생활을 하던 족속이었으므로 이들을 완전 진멸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Smith). 따라서 당시 일부는 피해 달아났거나 또는 발각되지 않았던 관계로 살아 존속했을 터인데(27:8; 30:1; 삼하 8:12). 결국 이들은 히스기야 시대에 시므온 사람들에 의해 전멸되었다(Keil, 대상 4:43). 한편, 여기서 진멸하였으되(*, 헤헤림)란 말의 개념에 대해서는 3절 주석을 참조하라.
기름진 것(*, 미쉐님) - 직역하면 '두번째로 태어난 것'이란 뜻이다(D. Kimchi, R. Tanchum). 그러나 이는 다른 것보다 열등하다는 뜻이 아니라, 다른 것보다 좋다는 의미이다(Keil, Fay). 사실 고대인들은 동물의 태(胎)에 있어, 첫번째 태보다 두번째 태를 더 좋은 것으로 간주하였다(Smith).
성 경: [삼상15:10,1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여호와의 탄식]
사무엘의 제사권 침해 사건(13:9)에 이어 여기서는 사울이 하나님에 의해 제시된 두번째 시험, 곧 아말렉 진멸 사건에서도 불합격 판정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1절; 13:8-14).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 여기 하나님의 '후회'는 인간의 후회와는 전혀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다. 즉 하나님의 후회는 당신의 어떤 특별한 행위가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여, 거기서 돌이키는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29절). 이것은 다만 죄인의 거역에 대한 신적(神的)인 슬픔을 의인법적(擬人法的)으로 묘사한 표현일 뿐이다(창 6:6, 7).
돌이켜서(*, 슈브) - 성경 용례상 이 말은 종종 여호와께 대한 반역 및배교를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이다(민 14:43; 32:15; 수 22:16, 18; 렘 3:19).
사무엘이 근심하여 - 여기서 '근심하다'(*, 하라)란 말은 '(분노로) 타오르다'란 의미이다. 따라서 여기 이 말은 오히려 '진노하여'로 번역함이 타당하다(창4:6; 민 11:33; 신 7:4; 삼하 24:1). 아마도 이때 사무엘은 자신의 간곡한 권면(1절)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자신의 이기적 충동을 따라 하나님께 불순종함으로써, 결국 왕을 세운 하나님의 거룩한 목적이 손상되고 파괴되었다는 그 사실로 인하여 거룩한 의분(義憤)을 느꼈을 것이다(Keil, Fay).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 사무엘의 이같은 태도는 왕과 백성들을 위하여 쉬지 않고 기도하겠다고 했던 자신의 각오(12:23)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자신의 각오처럼 이때 사무엘은 (1) 하나님께로부터 사울의 불순종의 죄를 사죄받기 위하여,(2) 그리고 무엇보다 사울이 자신의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회개하기를 바라고 기도하였을 것이다. 이처럼 사무엘이 여호와께 부르짖는 모습은 이전에도 수차 나타나는데(7:8, 9; 12:18), 이로 보아 진정 사무엘은 기도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죄인이 죄 용서함 받기 위해서는 가장 필수적이고 기본적인 전제 조건이 있으니, 곧 당사자인 그 죄인의 회개이다. 그러나 사울은 끝내 회개치 않음으로써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고 만다. 한편, 유대 학자 아바르바넬(Abarbanel)은 여기서 사무엘이 사울을 위하여 그처럼 간절히 중보 기도한 것은, 사무엘이 개인적으로 사울을 그 용모와 용감성 때문에 진정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Lange, Commentary on the Holy Scripture).
성 경: [삼상15:1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울이...자기를 위하여 기념비를 세우고 - 여기서 '자기를 위하여'란 말은 사울의 이기적 행동 원리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말이다. 한편 '기념비'(*, 야드)는 원래 '손'(hand)이란 뜻이나, 손으로 어떤 모양을 만들어 자신의 이름을 낼 수 있다는 효과 때문에 '기념비'란 의미로 전의(轉義)된 듯하다(삼하 18:18; 사 56:5). 한편 여기서는 아말렉 전투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승전비(勝戰碑)를 가리킨다.
갈멜에 이르러 - 여기의 '갈멜'(Carmel)은 헤브론 남동쪽 약 15km 지점에 위치한 유다 지파의 성읍으로서, 원래 갈렙에게 주어졌었다(수 15:55). 이곳은 또한 나발과 아비가일의 고향이기도 하였다(25:2-40). 현재의 '쿨물'(Kurmul) 지역으로 추정된다(Fay, Keil).
돌이켜...길갈로 내려갔다 - 사울이 자신의 고향이자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적 수도인 기브아(10:26)로 가지 아니하고 '길갈'로 간 까닭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제단이 있는 여러 곳(7:16) 중 가장 가기에 용이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1절). 한편 '내려갔다'(*, 야라드)라는 말은 길갈(Gilgal)이 요단 골짜기 저지대에 위치했었다는 지리적 특성을 잘 반영해 준다(10:8; 창 43:20; 수 16:7; 18:16). 즉 사울은 갈멜에서 승전비를 세운 뒤 유다 산맥을 가로질러 요단 계곡의 길갈로 향했던것 같다(13:4). 한편 '길갈'(Gilgal)에 대해서는 수 4:19 주석을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1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내가 여호와의 명령을 행하였나이다 - '여호와의 명령'은 분명 아말렉에게 속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진멸하라는 것이었다(3절). 그러나 사울이 이같은 여호와의 명령을 제대로 이행치 않았으면서(8, 9절), 명령을 온전히 이행한 듯 묻기도 전에 말한 것은 죄의식(罪意識)의 소산이요, 외식(外飾)의 결과였다.
성 경: [삼상15:1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들려오는 짐승의 소리를 증거로 사울의 말(13절)이 위선이요 거짓임을 예리하게 폭로한다. 이에 대해 스미드(R. Payne Smith) 박사의 다음과 같은 표현 역시 날카롭다. '사울의 양심은 침묵하나 오히려 짐승은 사울의 위선과 불복종을 외치고 있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5:1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그것은 무리가...끌어 온 것인데 - 여기서 '무리가'란 말은 13절의 '내가'란 말과 너무나도 대조된다. 즉 13절에서는 자신을 내세워 자신의 공로를 주장하다가, 이제 상황이 불리해지자 재빨리 '무리가'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 위기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이다. 이렇듯 진정한 회개 및 죄의 고백으로부터 점점 멀리 떠나가는 사울의 위선이 애처롭다. 이는 마치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 죄를 하와에게 떠넘기려는 책임 전가와 다를 바 없다(창 3:12). 그러나 당시 백성들은 사울의 허락이나 묵인 없이는 결코 짐승들을 끌고 올 수 없었다(14:24-26).
여호와께 제사하려 하여...남김이요 - 사울의 이 말은 거룩한 제사 의식을 빌미로 하여 자신의 범죄와 이기심을 합리화 하려고 애쓰고 있음을 잘 보여 주는 말이다. 그러나 비록 사울이나 백성들이 짐승들을 실제로 하나님께 제사드리기 위하여 진멸치 아니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에게 잘못이 없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짐승들을 하나님께 제사드린 후 그 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결국 그들은 바로 이같은 이기적인 계산에 따라 '제사'를 빙자하여 짐승들을 진멸치 아니한 것이었다(Keil).
성 경: [삼상15:1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가만히 계시옵소서 - 이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헤레프'(*)는 문자적으로'중지하라!'(Stop!)란 뜻이다. 결국 이 말은 핑계와 변명, 책임 전가 등을 이제 그만두라는 의미로서, 사울의 구차한 변명을 더이상 듣지 않겠다는 사무엘의 확고한 의지를 반영하는 말이다.
간밤에...이르신 것 - 이 계시는 사무엘이 철야하며 기도하는 중에 하나님께로부터 임하신 사울에 대한 말씀인 듯하다(11절).
성 경: [삼상15:1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왕이 스스로 작게 여길 그 때에 -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왕으로 세우려는 의사를 보였을 때에 사울이 취했던 겸손한 행동을 가리킨다(9:21). 그러나 왕위에 오르고 권력이 생기자 사울은 점차 교만한 자가 되어, 결국은 비천한 자신을 들어 왕으로 세우신 여호와의 명령까지 무시하는 패역한 자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누구든지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마 23:12).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벧전 5:6).
여호와께서...기름을 부어...왕을 삼으시고 - 이것은 (1) 사울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오른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며, (2) 따라서 사울의 왕권은 이방의 그것과는 달리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온전히 실행할 의무가 뒤따른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성 경: [삼상15:18,1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여기서 사무엘은 사울에게 하달된 여호와의 신성한 명령을 사울이 전적으로 이행치 아니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것은 결국 사울의 주장(13, 15절)이 자기 변명과 외식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히는 것이다.
길로 보내시며 - 여기서 '길'(*, 데레크)은 여호와께서 사울에게 아말렉족속을 진멸하라는 신성한 명령을 주어 내보낸 원정의 길을 뜻한다(Fay).
죄인 아말렉 - 여기서 '죄인'이란 말은 '아말렉' 족속들이 마땅히 진멸됐어야 할 합당한 이유이다. 그런데 여기 아말렉 족속의 용서받지 못할 죄는 하나님의 나라와 그 백성을 멸절시키려 했던 죄이다(2절; 출 17:8-13).
탈취하기에만 급하여 - 이것은 문자적으로 '탈취물에게로 날아갔다'(flew on thespoil, KJV)란 뜻이다. 이 말은 아말렉과의 전투시 사울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보고 그 마음에 탐심이 생겨, 그것을 간절하고도 열정적으로 원했다는 뜻이다. 결국 사무엘의 이 말은 사울이 여호와께 제사드리기 위해 아말렉의 좋은 것들을 남긴 것이 아니라,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한 것이었음을 지적하는 말이다.
성 경: [삼상15:2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아각을 끌어왔고 - 사울은 여기서 여호와의 진멸 명령을 거역하고 '아각'을 살린 자신의 사악한 행위(8, 9절)를 전혀 죄로 인정치 않고 있다. 오히려 여호와의 명령을 좇아 아말렉과 전투를 수행했다는 그 실제적인 증거로서 아각을 사로잡아 왔다는 식으로 자신의 정당성을 강변하고 있다.
성 경: [삼상15:2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울은 15절에 이어 여기서도 아말렉의 짐승을 진멸치 않은 자신의 범죄를, (1) 하나님의 제사를 빙자하고 (2) 또한 백성들에게 떠넘김으로써 정당화시키려 한다(15절).
성 경: [삼상15:2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번제와 다른 제사 - '번제'는 헌신을 상징하는 제사이다(레 1:3-17). 그리고 '다른 제사'(*, 제바힘)는 문자적으로 '희생'(sacrifices)이다. 그런데 이것은 복수로 언급되어 있다는 점에서, 번제 이외의 다른 희생 제사 모두를 가리킴이 분명하다<레위기 서론, 7. 구약 제사의 종류와 의미>.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아말렉 족속에 대한 여호와의 진멸 명령(3절)을 무시한 채, '여호와께 제사드릴 목적으로'(15, 21절) 그 족속의 가장 좋고 기름진 짐승들을 끌고 왔노라고 극구 주장하는 사울에게 사무엘이 명쾌히 선포한 이 말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외적 의식(儀式) 행위 보다는 내적 마음의 순종 자세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금언적(金言的)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사무엘 이후 많은 선지자들에 의해, 여호와께 대한 합당한 예배의 기본 자세로 거듭 강조되었다. 즉 시편 기자(시 50:8-15; 51:16, 17), 이사야(사 1:11-17), 예레미야(렘 6:20), 호세아(호 6:6), 미가(6:6-8), 그리고 마침내 참 선지자요 대제사장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 사실이 다시금 확증되고 강조되었다(마 9:13 ;12:7). 따라서 이 말씀의 핵심을 다시 요약하면, (1) 예배의 형식 보다는 예배자의 마음 자세가 더욱 중요하며(전 5:1; 미 6:6-8), (2) 영(靈)이신 하나님께서는 수양의 피나 기름보다 인간의 전인격적 마음을 원하시며(시 51:17; 요 4:24), (3) 하나님의 말씀이야말로 모든 신앙 생활의 척도가 된다(딤후 3:16, 17)는 사실이다. 이런 의미에서, 사실 구약 시대의 모든 희생 제사 행위는 짐승을 잡아 피를 뿌리고 그 고기를 제단 위에서 태우는 일,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다만 그러한 행위를 통하여 인간이 그 행위 속에 담긴 참뜻을 깨달아, 하나님께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이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즉 '제사'는 그림자요, '순종'은 실체인 것이다. 벧렌베르겔성경(Berlenberger Bible)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제사(sacrifices)로는 인간이 단지 비이성적인 짐승의 고기만을 드릴 뿐이지만, 순종(obedience)으로는 인간이 자신의 뜻을 바친다. 그러므로 순종이야말로 이성적이고 영적인 제사인 것이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56). 한편, 그러나 사무엘의 이 말은 '제사'를 부정하는 말은 아니다. 다만 사무엘이 여기서 강조한 근본 사상은 제사 행위 속에는 반드시 순종의 자세가 깃들어 있어야 한다는 뜻이요, 제사로 말미암아 순종이 거부되거나 무시될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말은, 후대의 예언자들이 합당한 예배에 앞서 성도가 갖추어야 할 기본 자세를 언급하면서 많이 사용하였다(사 1:10, 11,13; 렘 7:21-26; 호 6:6; 암 5:21-24; 미 6:6-8; 막 12:28-34).
수양의 기름 - 여기서 '기름'(*, 헬레브; fat)은 희생 제사에서 하나님께 태워지던 부분으로서, 주로 가축의 내장 및 꼬리 주위의 '기름진 부분'을 가리킨다(레 3:16, 17; 7:23-25).
성 경: [삼상15:2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책망]
사술의 죄 - 여기서 '사술'(*, 케셈)은 점(占)을 치는 행위를 뜻하며, 이같은 행위는 당시 이방 세계에서 보편화 되었었다(6:2; 민 22:7; 신 18:14; 수13:22). 그리고 이스라엘 사회에서도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행해졌었다(렘 14:14 ;27:9; 29:8; 겔 13:6, 23; 미 3:7). 따라서 이러한 행위는 우상 숭배죄로 규정되어 성경에서 절대 금지되었다(신 18:10; 왕하 17:17).
사신(邪神) 우상 - '사신'(*, 아웬)은 '악함', '무가치함', '허탄한 것'등의 의미로서, 성경 다른 곳에서는 '우상'으로 번역되었다(사 66:3). 그리고 '우상'(*, 테라핌)은 중근동 사람들이 가신(家神)으로 섬기던 우상의 한 종류인데(창 31:34, 35; 삿 17:5; 18:14), 성경의 다른 곳에서는 점(占)을 치는 수단으로써 언급되기도 한다(겔 21:21; 호 3:4). 창 31:19 주석 참조.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 여기서 '버려'(*, 이므아스카)는 미완료형이므로 미래형의 의미로 번역해야 된다는 점에서, 사울의 왕권이 머지않아 끊어질것을 시사해 주는 단어이다. 그러나 만일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지 않고, 그 말씀을 제대로 좇았다면, 그의 왕권은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세습될 수 있었을 것이다(13:13). 한편 여기의 '버려'라는 단어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열방과 같은 왕을 요구함으로써 하나님을 배척했던 그 행위를 나타낼 때, 하나님께서 친히 사용하셨던 단어이다<8:7>.
성 경: [삼상15:2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사울은 사무엘의 날카로은 심문과 경고에 의하여, 변명으로 일관하던 태도를 바꿔 이제 자신의 죄를 시인했지만, 그 시인한 죄조차도 불가피한 상황하에서 백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범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 사울의 이 고백은 진정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범죄하였는지를 깨닫고 뉘우치는 참된 회개라고 볼 수 없다(Keil, Fay, Smith). 그 이유는 (1) 계속 자신의 죄를 시인치 않고 변명과 책임 전가로만 일관하다가, 사무엘의 무서운 심판적 선언(22, 23절)을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어쩔 수 없이 시인했기 때문이며,(2) 또한 죄의 고백 후에, 다시금 백성들의 탓으로 그 죄의 원인을 책임 전가하는 말(24b)을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3) 나아가 고백 후에도 계속 왕위 보존과 왕권의 명예에 집착하고 있기 때문이다(30절). 결국 라피데(C.V. Lapide)가 정의한 것처럼, "사울의 이 고백은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통회의 회개가 아니라, 단지 왕국의상실과 명예의 실추를 두려워한데서 비롯된 '입술의 회개'(repentance of the lips)였다"(Keil & Delitzsch, op. cit. p. 157).
내가 백성을 두려워하여 - 사울의 이 변명은 어느 정도 진실임에 틀림없다. 그당시 사울의 왕권은 웬만큼 백성들로부터 인정은 되고 있었으나, 근본적으로 사울은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세워진 왕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눈치를 실피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30절). 바로 이 사실이 사울 왕권(王權)의 한계요, 비극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폐하고, 당신께로부터 비롯된 마음에 합당한 한 인물(다윗)을 따로 세울 필요가 있었다(13:14; 행 13:22).
성 경: [삼상15:2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의 후회]
지금 내 죄를 사하고 - 사실 사울의 죄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것이라는 점에서, 하나님께 자신의 죄 용서를 구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은 여기서 사무엘에게 자신의 죄 용서를 간절히 요청하고 있다. 이 사실은 사울이 아직까지도 그가 지은 죄의 근본 성격을 제대로 이해치 못했음을 시사해 준다. 즉 사울은 하나님께 대한 범죄를 인간에 대한 범죄 정도로 가볍게 인식했던 것이다.
나와 함께 돌아가서 - 이때 사울이 사무엘과 함께 가려고 했던 목적지는 길갈 제단이었을 것이다(21절).
여호와께 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 사울의 이 '경배' 허락 요구는, 사울이 하나님께 회개할 기회를 갖고자하는 의도에 따른 것이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사울은 그때 사무엘이 집전하는 제사의 현장에 사무엘과 함께 있음으로써, 자신이 왕으로서 건재함을 만백성들에게 과시하기 위한 의도에 따라 사무엘에게 함께 제사를 드리러 가자고 요청했던 것이다<30절>.
성 경: [삼상15:26]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울의 심중(心中)을 간파한 사무엘은 여기서 사울의 폐위된 왕권은 어떤 방법으로도 회복될 수 없음을 다시 한번 단호히 선포한다. 여기에 왕권에 굴복하거나 타협하지 않는 참 선지자로서의 절개가 돋보인다. 한편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 볼 점은 사울에 대한 하나님의 왕직 박탈은 단순히 사무엘의 제사직 침해 사건(13:9)과 아말렉 왕과 짐승을 살려둔 사건(15:9)의 두 가지 사건 때문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즉 이 두 가지 불복종 사건은 사울이 저지른 유일한 불복종 사건이 아니라, 많은 반역적이고 불순종적인 사건들 중 대표적인 경우라는 점이다(Leon Wood).
성 경: [삼상15:27]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무엘이 가려고 돌이킬 때에 - 사무엘의 이같은 행동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1) 사울에게 그의 폐위가 확정적임을 행동으로 선언한 것이다.(2) 사울의 반복되는 간청 때문에 인정에 얽매여 혹시 범할지 모르는 인간적 실수를 피하기 위함이었다.
겉옷 자락을 붙잡으매 찢어진지라 - 여기의 '겉옷'(*, 메일)은 몸에 꽉 붙는 옷을 가리킨다(R. Payne Smith). 따라서 사울이 붙잡았다는 것은 그가 사무엘에게 극렬히 매달렸음을 뜻한다. 한편 사무엘의 옷이 찢어진 것은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에 따라 이뤄진 일임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의 옷이 찢어지게 하심으로써, 그 일을 사울의 왕권이 취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하나의 징조(sign)로 삼으셨던 것이다. 그같이 볼 수 있는 근거는 여기 '찢어진지라'는 말이 28절의 '떼어서'(*, 카라)란 말과 동일한 단어를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성 경: [삼상15:28]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 여기서 '이웃'(*, 레아)은 비한정적인 용법으로사용된 말로, 곧 '누구든 간에 어떤 다른 사람'(an other)이란 의미이다. 그런데 이후 전개되는 역사에 견주어 볼 때, 여기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은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곧 다윗을 가리킨다(13:14; 행 13:22).
주셨나이다(*, 네타나흐) - 여기서 이 단어는 13:14에서처럼, 다윗이 이미 왕으로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시사해 주는 과거 완료형의 의미로 표기되어 있다. 그러나 이때 사무엘은 사울을 이어 이스라엘의 차기(次期) 왕 될 사람이 누구인지는 알지 못했었다(16:3, 6-13).
성 경: [삼상15:29]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사무엘은 인간의 가변적(可變的) 속성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하나님의 불변적(不變的) 속성을 소개함으로써, 사울의 왕권이 다시 회복되기 불가능함을 명확히 선언하고있다.
지존자(*, 네차흐) - 하나님의 신적(神的) 속성을 시사하는 명칭 중의 하나로서, '영광스러우신 분', '영원히 계시는 분', '승리하시는 분', 그리고 '변함이 없으신 분'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Klein).
결코 변개치 않으심이니이다 - 여기서 '변개(變改)하다'(*, 나함)란 말은 11, 35절의 '후회하다'란 말과 같은 어근(語根)의 말이다. 그렇지만 본절의 '변개함이 없다'란 말과 11, 35절의 '후회하셨다'라는 말은 상호 모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11, 35절에 묘사된 하나님의 후회(변개)는 사람의 후회나 변개처럼 그 마음의 변덕이나 어떤 계획의 차질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니고, 다만 인간의 타락에 대해 가지는 신적 긍휼과 슬픔을 신인동형 동성론적(神人同形同性論的, *, 안드로포파도스)으로 묘사한 것 뿐이고(창 6:6, 7), 본절에 묘사된 바 '변개(후회)함이 없다'란 표현은 신적 섭리와 경륜에 대한 하나님의 속성을 순수하게 신성론적(神性論的, *, 데오프레포스)으로 기술한 것이기 때문이다(Keil, Fay). 실로 스스로 계시는 영원자 하나님께서는 과거.헌재. 미래가 동일하신 분이시다(출 3:14). 다만 하나님의 영원하신 경륜과 섭리가 인간의 자유 의지와 맞물려 역사가 진행될 때, 인간 편에서 일어나는 영고 성쇠(榮枯盛衰)가 마치 하나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는 것으로 보여질 뿐이고, 또한 11, 35절처럼 그렇게 하나님을 의인화시켜 묘사했을 뿐이다(R. Payne Smith). 민 23:19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5:30]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범죄하였을지라도...나를 높이사...경배하게 하소서 - 여기서 사울은, 하나님의 작정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왕권이 건재함을 만인에게 알릴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줄것을 사무엘에게 다시금 요청한다<25절>. 이로써 사울은 죄의 고백(24절)이 정치적 목적 때문이었음을 보여 주었으며, 또한 여호와께 대한 경배 역시 자신의 명예 때문이었음을 드러내고 말았다. 실로 사울은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딤전 6:5)로서, 선민 이스라엘을 여호와의 말씀으로 이끌 왕의 직무를 감당하기에는 부적격자라는 사실을 스스로 입증하고 말았던 것이다.
내 백성의 장로들 - 여기서 '내 백성'이라는 말은 사울이 그때, 이스라엘 민족이 여호와 앞에서 갖는 언약적이고 영적인 특성을 완전히 망각하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성 경: [삼상15:31]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무엘의 예언]
하나님의 최종적인 폐위(廢位) 선언으로 말미암아(23, 26절), 사울은 이후 왕위에는 있으나 실상은 왕이 아닌 자로 전락해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사무엘은 함께 제단으로 가서 여호와께 제사드리자는 사울의 간절한 요청(25, 30절)을 들어주었다. 이처럼 사무엘이 사울의 요청을 허락한데에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다.(1) 비록 형식적이긴 하지만 차기 이스라엘 왕이 등극할때까지 그래도 사울을 통하여 외적인 정치 질서를 유지시켜 나갈 필요성이 있었기 때문이다(O.V. Gerlach). (2) 사울과 함께 가서 아말렉왕 아각을 죽임으로써, 사울이 완수하지 못한 일을 자신이 마저 처리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다(C.F. Keil).
성 경: [삼상15:32]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아각이 즐거이 오며 - 여기서 '즐거이'(*, 마아단노트)는 '부드럽다', '느슨하다'의 의미를 갖는 아랍어 어근 '아단'(*)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기쁘게', '기꺼이' 등의 뜻이다. 아마도 아각은 자신이 왕의 손에서 제사장의 손으로 넘어가게 됨을 알고, 이제는 자신의 목숨이 부지될 줄로 확신했던 것 같다(Clericus). 한편 '아단'이라는 동사에서 '복락', '기쁨', '환히' 등의 의미가 있는 '에덴'이란 단어가 파생되었다(창 2:8; 시 36:8).
진실로 사망의 괴로움이 지났도다 - 벌겟역(the Vulgate)과 수리아역(the Syriac)은 아각의 이 말을, 그가 자신의 죽을 운명을 예견하고 불안과 체념으로 한 말이라고 보고 "실로 죽음은 괴롭도다"란 의미로 번역했다(R. Payne Smith). 그리고 혹자는 아각의 이 말을, 죽음을 앞둔 전사로서의 영웅적 용기로 치켜 세우기도 한다. 그러나 문맥을 통해 볼 때, 여기 아각의 이같은 언급은 자신이 사무엘에게 넘겨짐을 알고, 여호와의 선지자 특히 노년의 선지자는 적어도 왕이나 군대 보다는 긍휼이 풍성할 것이라는 그 자신의 판단에 따라 '마침내 죽을 고비를 넘겼나 보다'(공동번역)라는 의미로 한 말이었다(Lange).
성 경: [삼상15:33]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아각의 처형]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무자하리라 - 사무엘은 '동해 복수법'(Lex Talionis, 출 21:24, 25; 신 19:21)에 근거하여 아각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한편 사무엘의 말을 통해 우리는 아말렉 왕 아각(Agag)이 수많은 전쟁과 약탈을 통해 매우 잔인하고 포악하게 행동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여인들로 무자케 한 것 같이'란 말은 아각이 여인들을 얘기 못낳는 불임 여성으로 만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다만 여인들의 자식을 죽여 없앴다는 뜻이다.
여호와 앞에서 아각을...쪼개니라 - '여호와 앞에서'는 곧 여호와의 제단 앞을 가리킨다. 본서 저자가 여기서 특별히 이같은 언급을 한 까닭은, 사무엘의 아각 처형이 단순히 정치 보복적 차원이 아닌, 철저히 하나님의 아말렉 족속 진멸 명령(3절)에 근거하여 영적.공의적 차원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한편 선지자의 이같은 직접적인 형 집행은, 왕이 합당한 형 집행을 게을리하는 경우에 대신 이뤄졌었다(왕상 18:40).
찍어 쪼개니라 - 기본 동사 '솨사프'(*)는 '여러 조각내다'(cut inpieces) 또는 '토막토막 끊다'(hew in pieces)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아각의 비참한 죽음을 연상시켜 주는데, 우리는 이를 단순히 잔인하다고 비난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우리는 포악한 아말렉 족속의 아각 왕에 의해 더욱 비참하게 살해당했을 수많은 자들을 생각해야 하며,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와 그 백성을 파멸시키고자 끝없이 이스라엘을 괴롭힌 아말렉 족속의 극한 죄악을 기억해야 한다. 즉 이는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사단 왕국의 우두머리에 대한 신적(神的) 공의의 정당한 수행이라는 차원에서 이해해야 한다.
성 경: [삼상15:34]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사무엘은 라마로...사울은 기브아 본집으로 - 길갈에서 여호와께 대한 제사와 아각의 처형을 마친 후, 사무엘과 사울은 각자의 거처로 각각 돌아갔다. 이 사실은 단순히 각자의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의미 외에, 이후 두 사람의 교제가 단절되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준다. 한편 사무엘의 고향 '라마'(Ramah)에 대해서는 1:1주석을, 그리고 사울의 고향 '기브아'(Gibeah)에 대해서는 10:26 주석을 각각 참조하라.
성 경: [삼상15:35]
주제1: [사울의 두번째 실패]
주제2: [사울과 헤어지는 사무엘]
사무엘이...사울을 다시...보지 아니하였으니 - 이 말은 사무엘과 사울이 죽기까지 서로 상면조차 아니했다는 의미라기 보다는(19:24), 사무엘이 사울에 대해 선지자로서의 권고를 더이상 하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결국 이것은 사무엘이 사울을 신정(神政)왕국의 왕으로 더이상 인정치 아니했음을 뜻한다. 즉 신정 왕국의 특성은 왕에 대한 선지자의 신의(神意)의 전달 및 권고로 요약될 수 있다는 사실에서 볼 때, 선지자가 왕을 만나지 아니했다는 것은 실제적으로 '왕의 폐위'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그가 사울을 위하여 슬퍼함이었고 - 처음 사무엘이 사울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었을 때는 그를 진정 위하는 마음으로, 사울의 왕직(王職) 수행을 기꺼이 도와주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울이 계속 하나님의 뜻을 어기고 열방과 같은 왕으로 전락하자, 그는 마침내 하나님께로부터 왕직을 박탈당하는 비운을 맞이하게 된다(23,26절). 따라서 이제 사무엘은 여호와께서 폐위시켜버린 왕을 위해 더이상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다만 사울을 위해 슬퍼할 뿐이었다. 그러나 이 말속에는 사무엘이 사울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는 계속 기도했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왕 삼으신 것을 후회하셨더라 - 11절 및 29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6: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 하나님께서 사울의 왕위를 배척하셨다는 언급은, (1) 사울이 선지자 사무엘의 제사 행위를 침해했을 때(13:8, 9, 13, 14), (2) 그리고 사울이 이기적 욕심에 따라 아말렉에 속한 것을 잔멸치 아니했을 때(15:23, 28) 나타났었다. 그러나 첫번째의 경우때에만 해도, 사울은 자신의 이후 행위 여하에 따라 자신의 왕위를 계속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두번째의 거역 행위로 인하여 사울에게 선언되었던 '폐위(廢位) 선고'는 완전히 확정되고 말았던 것이다.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 사무엘의 이같은 깊고 오랜 슬픔은 단순히 개인 사울의 비극에 대한 사적(私的) 심정 때문만이 아니라, 사울의 폐위로 인하여 이스라엘 사회 전반에 나타날 부작용을 염려한 때문이었다(Keil, Smith). 사실 그때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로서 사울의 군사적 능력만은 분명히 인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일 사울의 전사(戰死)를 슬퍼한 다윗의 애가(삼하 1:19-27) 속에서도 분명히 나타난다. 한편 여기의 '슬퍼하겠느냐'(*, 미트아벧)는 특별한 원인에 따라 심히 애통하는 행동을 가리킨다(사 3:26; 암 1:2; 8:8). 그런데 여기서는 특히 강조적 재귀형으로 사용되어, 그 슬픔을 밖으로 강력하게 표출시킴을 가리킨다(15:35;삼하 14:2; 대하 35:24; 스 10:6).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신령한 책망과 더불어 사무엘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심으로써 그의 슬픔을 소망으로 승화시켜 주셨다.
기름을 뿔에 채워 가지고 - 여기서 '뿔'(*, 케렌)은 양의 뿔을 가리킨다.그런데 왕의 기름 부음을 위해서는 '병'(*, 파크)이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10:1). 그러나 '뿔'이 사용되는 경우와 '병'이 사용되는 경우는 분명 어떤 대조점이 암시되고 있는 듯하다. 즉 '뿔'이 사용될 경우에는 주로 그 왕의 정통성 및 긍정적 성격이 암시되며(왕상 1:39). 반면 '병'이 사용될 경우에는 그 왕의 비정통성 및 부정적 성격이 암시되는 듯하다(10:1; 왕하 9:1-13). 성경이 이처럼 의도적으로 '뿔'의 사용을 보다 긍정적 차원에서 보는 것은, 성경의 여러 문맥상 '뿔'이 왕권(王權)을 상징하고 있다는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2:10; 겔 29:21; 단 8:3, 21).
내가 너를...보내리니 - 여기서 '보내다'(*, 솰라흐)란 말은 '가기를 강요하거나 허락하다'라는 의미 보다는, 오히려 '사명을 주다'란 의미로 봄이 더 타당하다(민 14:36; 신 19:12; 삿 6:14).
베들레헴 사람 이새 - '베들레헴'(Bethlehem)은 '떡집'이란 뜻으로, 이곳은 사무엘의 고향인 라마 남서쪽 약 16km, 그리고 예루살렘 남서쪽 약 10km지점의 해발 690m에 위치한 유다의 작은 성읍이다(룻 1:1). 한편 '이새'(Jesse)는 부호(富豪) 보아스와 모압 여인 룻 사이에서 태어났던 오벳의 아들로서(룻 4:17, 22; 대상 2:12; 마 1:5,6; 눅 3:32). 그 이름의 뜻은 '여호와의 사람'이다(Klein). 이새는 그의 할아버지가 부자였으므로, 그 당시 그 역시 부유했었음이 분명하다(룻 2:1). 그러므로 사무엘은 인근 마을의 유력한 가문인 이새의 집에 대해 개략적으로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Fay,Smith). 그러나 그가 당시 이새의 막내 아들 다윗에 대해서는 몰랐음이 분명하다.
그 아들 중에서 - 당시 이새에게는 여덟 명의 아들이 있었다(6-11절).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 여기서 '예선하였다'(*, 라아)는 문자적으로'보다'란 의미이다. 그런데 성경 전반에서 이 단어는 '선택하다'란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17절; 창 22:8; 41:33; 왕하 10:3). 그리고 여기의 '왕'(*, 멜렉)은 사울에게 적용되었던 단어 '지도자'(*, 나기드)와는 그 의미에 있어 다르다<9:16>. 즉 '방백'(方伯)의 의미인 '지도자'와는 달리, '왕'은 명실공히 한 나라의 군주(君主)를 뜻하기 때문이다. 아무튼 여기 여호와에 의해 왕으로 예선된 자는, 이미 '여호와의 마음에 맞는 사람'(13:14), '사울보다 나은 사울의 이웃'(15:28) 등의 표현으로 암시되어 왔던 다윗을 가리킨다. 즉 사울은 인간적인 기준에서 백성들에 의해 선발된 왕이었으나(8:5, 20; 11:15), 다윗은 오래전부터 신적인 기준에서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고 예비된 왕이었다(7절; 행 13:22). 이런 점에서 진정한 이스라엘의 신정적(神政的) 왕정 체제는 사울의 때가 아니라, 다윗의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룩되었다고 봄이 옳을 것이다(신 17:15).
성 경: [삼상16: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사울이 들으며 나를 죽이리이다 - 비록 사울은 하나님께로부터 최종 폐위 선언을 당함으로써(15:23, 26) 영적 왕권은 이미 상실된 처지였지만, 그래도 당시 사울은 정치.군사적으로는 여전히 이스라엘의 공식적인 왕으로 군림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만일 사무엘이 다른 사람을 왕으로 기름 부을 경우, 그 일은 당연히 역모(逆謀) 행위로 몰릴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사무엘은 일이 그런 식으로 전개된다면 자신의 죽음이나 추방이 문제가 아니라, 이새 가문까지 화를 면키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사무엘은 그러한 현실적인 문제를 솔직히 하나님께 아뢰었던것이다(Smith, Fay). 따라서 사무엘의 이같은 반응은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다. 오히려 우려되는 불행한 상황을 방지하고, 보다 나은 방법을 하나님께 아뢴 선지자의 사려깊은 기도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무엘의 그러한 반응을 전혀 책망하지 않으시고, 즉시 지혜로운 방법을 그에게 알려 주셨다는 사실에서 충분히 입증된다(Keil).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 사무엘에게 지시한 여호와의 이 명령은, 여호와께서 당신께 드려지는 거룩한 제사를 사울을 속이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라는 명령이 결코 아니다. 실로(Shiloh)의 중앙 성소가 훼파된 당시 상황에서, 백성들을 영적으로 지도할 자격과 책임이 있는 선지자 사무엘이 어디에서든지 하나님께 대한 제사를 백성들과 함께 드리는 일은 지극히 정당하며, 또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므로 그때 사무엘은 여호와의 명령대로 실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면서, 아울러 그곳에서 기름 붓는 일도 수행할 수 있었을 것이다(Calvin, Keil, Fay). 다만 사무엘은 자신이 기름 부으러 간다는 사실을 공개할 필요나 책임은 없었던 것이다. 한편 여기의 '제사'(*, 자바흐)는 (1) 화목제를 가리킬 때 종종 사용된단어라는 점(1:3) (2) 제물이 암컷이라는 점(레 3:1-5)등으로 미루어 볼 때 화목제를 가리킴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6: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하나님께서 택한 이새의 아들]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 여기에 언급된 '제사'는 제사 후 함께 나누어 먹는 잔치가 동반되는 화목제였기 때문에, 사무엘이 제사에 그 지방의 사람을 칭하는 일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9:22). 그러므로 사무엘에게 있어서 사실상 이새를 청하는 것은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붓는 일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그러나 그 소식을 듣게 될 사울에게는 전혀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지니라 - 이새의 아들 다윗에게 기름붓는 것은 사울에게 기름 부은 것과는 그 성격.목적에 있어서 전혀 다름을 암시하고 있다. 즉 사울에게 기름을 부었던 목적은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8:5, 20) 다만 이스라엘의 군사.정치적 독립을 위한 것이었지만(9:16, 17), 다윗에게 기름을 붓는 일은 '하나님의 일'로서 곧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일임을 보여 주고 있다.
성 경: [삼상16: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성읍 장로들이 떨며...영접하여 - 베들레헴 성읍 장로들의 이같은 태도는 (1) 당시 사무엘은 여호와의 선지자로서 가장 권위있고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2) 또한 사무엘은 사사로서 그 직무상 종종 죄 범한 성읍을 방문하여 책망하고 징벌하는 일을 하는 자였기 때문에, 성읍 장로들은 갑자기 방문한 사무엘을 불안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Klein, Keil, Fay, Smith).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 "언짢은 일로 오신 것은 아니겠지요"(공동번역), "어쩐 일로 오셨는지요? 혹 무슨 잘못한 일이라도 있습니까"(what is wrong? why haveyou come? - Living Bible). 베들레헴 장로들의 이같은 질문은 사무엘이 자신들의 잘못을 징치하기 위하여 오지는 않았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잘 보여 준다(Mauchline; 왕상 2:13; 왕하 9:17, 19)
성 경: [삼상16: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스스로 성결케 하고 - 부정한 상태에서 벗어나 몸과 의복을 깨끗케 함으로써,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에 합당하도록 준비하는 것을 뜻한다(출 19:10; 수 3:5; 7:13; 욥1:5; 요일 1:7-10).
성 경: [삼상16: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 여기서 '보고'(*, 야레)는 이스라엘 백성들이사울을 선택할 때 그의 탁월한 신체를 중시했던 것처럼(9:2; 10:23, 24), 여기서 지금 사무엘도 그같이 외모를 중시했음을 암시해 준다. 한편 '엘리압'(Eliab)은 '하나님은 아버지이시다'란 뜻이며, 그는 블레셋의 골리앗이 이스라엘을 침공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하였다(17:13, 28).
성 경: [삼상16:7]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여기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이 처음 외모를 중시하여 왕을 선택했던 일이 결국 실패로 돌아갔던 사실을 사무엘로 하여금 회고케 함으로써 그같은 실수의 재발을 방지하려고 한신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 여기서 '용모'(*, 마르에)는 '보다'란 의미를 갖는 동사 '라아'(*)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곧 얼굴 생김새나 풍채 등내면은 관계없이 겉으로 보이는 모습(appearance) 자체를 가리킨다(창 2:9; 12:11; 민8:4). 따라서 본 문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 머리에 기름부을 자를 택할 때 결코 외적인 모습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이 말이 용모나 신장은 무조건 배격하고 무시하라는 뜻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이 결코 하나님의 일꾼이 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사람은 외모를...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 여기서 '외모'(*, 아인)는 직역하면 '눈'(eye)이란 뜻으로서, 곧 '육신의 눈'(肉眼)을 가리킨다. 그리고 '중심'(*, 레브)은 직역하면 '마음'(heart)이란 뜻으로서, 곧 '마음의 눈'(靈眼)을 가리킨다. 따라서 이러한 원문의 뜻에 맞추어 본절을 해석하면, "사람은 (육신의) 눈으로 보거니와, 여호와는 마음(의 눈)으로 보느니라"란 뜻이 된다(Klein). 즉 이것은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에 있어서 인간의 척도와 하나님의 척도가 전혀 다름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이는 비록 인간은 육신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외적 용모, 신장, 배경등을 보지만 하나님께서는 마음의 눈을 가지고 사람의 내적 겸손, 신앙, 인격, 진실성 등을 감찰하신다는 의미이다(대상 28:9; 시 7:9; 눅 16:15).
성 경: [삼상16:8,9,1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이새의 아들들을 청하는 사무엘]
사무엘은 이새의 여러 아들들 중 누가 하나님에 의해 왕으로 선택됐는지를 몰랐기 때문에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자기 앞으로 지나게 하면서 하나님의 뜻을 물었으나, 그러나 이새의 일곱 아들들 중에는 왕으로 선택된 자가 끼어있지 않았다. 아마도 사무엘은 그러한 사실을 하나님께서 주신 내적 음성 또는 내적 확신을 통해 알았을 것이다(Fay).
아비나답...삼마 - 이 두 사람은 모두 형 엘리압과 함께 블레셋의 골리앗이 침범했을 때 사울을 따라 종군했었다(17:13, 28). 한편 여기서 '아비나답'(Abinadab)은 '아버지는 훌륭하시다'란 뜻으로서, 이새의 둘째 아들이다. 그런데 사울 왕의 둘째 아들이름도 '아비나답'이었다(31:2). 그리고 '삼마'(Shammah)는 '황무지'란 뜻으로서, 삼하 13:3; 대상 2:13에서는 '시므이'로 표기되어 있다.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지나게 하나 - 대상 2:13-15에 기록된 다윗의 가계에 따르면, 이새의 아들은 다윗까지 포함하여 도합 7명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다윗까지 포함하면 이새의 아들은 도합 8명이 된다. 이러한 차이는 분명 이새의 8아들들 중 한 사람이 어려서 일찍 죽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Smith, Fay).
성 경: [삼상16:1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말째가 남았는데 - 여기서 '말째'(*, 하카탄)는 '가장 어린'이란 의미외에 '가장 작은'이란 의미도 있다는 점에서, 당시 다윗의 모습은 사울의 '큰 키'와는 너무나도 대조적이었다(9:2; 10:23).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 이것은 그당시 이새의 가족들이 다윗을 아직 어른으로 생각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왜냐하면 당시의 풍속으로 볼 때, 어른만이 제사의 초청에 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왕은 고대 중근동에서 종종 '목자'로 인식된다는 점에서(De Vaux), 여기서 다윗이 양무리 가운데 있는 것으로 언급된 것은 다윗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예시하려는 저자의 의도가 깃들어 있다고 볼 수 있다(Klein).
앉지 아니하겠노라 - 이 말은 그때까지 사무엘이 앉아 있지 않았음을 암시하는 말이 아니다. 여기의 '앉지'(*, 사바브)는 '둘러싸다', '에워싸다'란 의미로서(삼하 22:6; 대하 33:14; 시 17:11; 전 9:14), 곧 식사하기 위하여 식탁에 둘러앉는 것을 가리킨다(Keil, Smith, Fay). 따라서 그때 사무엘은, 다윗에게 기름을 부은 후 식사를 하겠다고 한 것이다.
성 경: [삼상16:1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그의 빛이 붉고 - '빛이 붉고'는 머리털 색깔이 붉음을 뜻한다(Klein, Keil, Lange).대부분 검은 머리털 색깔을 지닌 중근동에서 이 붉은 색 머리칼은 귀한 것으로서, 그 지역에서는 아름다움의 한 조건이었다(Keil).
눈이 빼어나고 - 여기서 '빼어나고'에 해당하는 원어 '야페'(*)는 '아름답고', 또는 '반짝이고'란 뜻이다. 따라서 이 말은 총기어린 아름다운 눈을 가리킨다. 이것도 뛰어난 얼굴 모습의 소유자가 갖추어야 했던 한 조건이었다(창 29:17).
얼굴이 아름답더라 - 이것은 단지 외적 아름다움만을 의미치 않고, 내면에서 풍겨나오는 아름다움을 뜻한다. (25:3; 창 41:5; 신 1:25; 9:6; 삼하 18:27; 행 7:20). 그러나 여기 '얼굴'(*, 로이)은 분명 '겉모양' 혹은 '외모'란 의미도 있는바, 이는 또한 그 외적 얼굴도 아름답게 잘 생겼다는 사실을 시사한다.(Klein).
성 경: [삼상16:1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기름 부음 받은 다윗]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부었더니 - 다윗은 모두 3차에 걸쳐 기름 부음을 받았다. 즉 여기 첫번 기름 부음은 비공식적으로 이새의 가족만 참석한 가운데 은밀히 부어졌고, 두번째의 헤브론에서 유다 족속의 왕으로 올랐을 때(삼하 2:3, 4) 기름 부음 받았다. 그리고 세번째는 마침내 다윗이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했을 때(삼하 5:3)받았다.
그 형제 중에서 - 이것은 형제들이 목격하는 가운데서 다윗이 기름 부음 받았음을 가리킨다. 그러나 그때 이새의 가족 이외의 사람들은 그 장소에 아무도 없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다윗의 형제들은 사무엘의 엄중한 부탁과, 그리고 사울의 보복등을 우려해 그 사실을 비밀로 유지한 듯하다(Leon Wood).
이 날 이후로 - 이것은 여호와의 신이 다윗에게 즉각적으로 임했고, 또한 영속적으로 임재하고 계셨음을 시사하는 문구이다(Fay).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신정 국가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적.도덕적.영적 지도자가 될 수 있는 역량과 은사를 허락하셨음을 뜻한다. 그 결과 다윗의 행동과 말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18절). 한편, 이처럼 기름을 붓는 객관적 의식(儀式)의 결과로 여호와의 신이 주관적으로 임했다는 이 사실은 사울에게서도 동일하게 나타났었다(10:1, 10). 그러나 사울의 경우와는 달리, 다윗의 경우는 이같은 일이 (1) 기름 부음의 의식 직후에 있었으며 (2) 임재하신 여호와의 신이 끝까지 떠나지 않으셨으며 (3) 여호와의 신이 임할 때 발작적이지 않았다는 점에서(10:9-12; 11:6, 7) 사울의 경우와는 구별된다(Klein). 따라서 본서 저자는 위의 두 경우를 암시적으로 비교함으로써, 사울에 대한 다윗의 우월성을 강조하려고 한 듯하다. 한편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여호와의 신(神)을 부어주신 까닭은 (1) 다윗이 왕의 신분에 합당한 도덕성을 소유할 수 있도록 하며, (2) 왕의 고유한 직무를 감당할 능력을 소유토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런데 삼하 5:4에 이하며, 다윗은 그의 나이 30세에 전체 이스라엘의 왕으로 등극된다. 그러나 여기서 처음 다윗이 사무엘에게 기름부음받을 때, 그의 나이를 레온 우드(Leon Wood)는 15세 가량으로, 그리고 카일(Keil)은 20세 가량으로 추정한다. 아무튼 당시 다윗이 제사 의식에 공식 참여치 못했다는 사실은 그가 만 20세 이상의 성년 남자가 되지 않았음을 시사하므로(11절),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으로 마침내 등극될 때까지 약 10-15년 가량을 예비 왕으로서 연단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혹자는 사무엘의 생전에 다윗이 라마의 선지 학교에서 일정 기간 동안 훈련받았다고 추정하기도 한다(R. Payne Smith, f.r. Fay).
성 경: [삼상16:14]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여호와의 신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 사울에게 임했던 '여호와의 신'은 그로 하여금 이스라엘의 왕직을 제대로 수행토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11:6>. 따라서 이제 사울의 왕위가 폐위된 이상, 여호와의 신이 그에게 더 머물 이유가 없었다.
여호와의 부리신 악신이 그를 번뇌케 한지라 - 원문은 '여호와께로부터 온 악신'(an evil spirit from Jehovah)이란 뜻이다. 여기서 이 '악신'(*, 루아흐 라아)은 인간의 도덕적.영적 생활을 고양시키는 하나님의 거룩한 영과는 본질상 뚜렷이 대조되는 사단의 영으로서, 곧 인간의 정신과 마음을 억누르고 파괴하는 사단의 사악한 영을 가리킨다. 그러나 이 사단의 영은 하나님과 허락과 지배하에서만 활동할 수 있다(욥 1:12). 따라서 이것은 선악(善惡) 간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주재권 아래 있다는 구약의 전반적 사상과 잘 조화된다(신 13:2-4; 삿 9:23; 삼하24:1; 왕상 22:19-22; 대상 21:1; 욥 1:6-12). 그런데,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이같은 악신이 활동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그것은 (1) 사울의 왕위가 폐위되었다는 사실을 가시화(可視化)하여, (2) 새로이 영호와의 신을 받은 다윗과 대조시키며, (3) 또한 악신에 시달리는 사울로 인해 다윗이 수금 연주자로 성경이 무대에 공식 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인 듯하다. 한편 여기서 '번뇌케 한지라(* 바아트)는 '두렵게 하다', '놀라게 하다'란 의미이다(삼하 22:5; 욥 18:11;사 21:4). 즉 이것은 극심한 정신적 고통 혹은 정신병적 우울증이나 착란증 현상을 가리킨다(Pulpit Commentary).
성 경: [삼상16:15]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사울 주변의 신하들에게도 사울의 폐위가 가시화되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성 경: [삼상16:16]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수금(*, 킨노르) - 이 악기는 음량을 크게 하기 위한 소리통 곧 본체에서 뻗은 두 개의 가지가 달린 현악기로서<10:5>, 이 두개의 가지 사이를 가로지른 막대기와 본체의 끝에 동일한 길이의 현(絃)들이 여러개 연결되어 있었다. 한편 약 B.C. 1400년 경의 것으로 추정되는 바로 이와 같은 모양의 악기가, 최근에 일단의 성서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므깃도에서 발굴되었다(Klein).
악신이 왕에게 이를 때에 - 이것은 사울에 대한 악령의 활동이 간헐적(間歇的)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그가...타면 왕이 나으시리이다 - 당시 사울이 당하던 고통은 원인의 특수성에도 불구하고 어쨌든 정신 심리적 현상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고대 사회에서 흔히 사용되던 음악을 통한 심리적 치료 요법이 어느 정도 통할 수 있었을 것이다<10:5; 왕하3:15>. 그러나 사울에게 나타난 현상은 근본적으로 영적(靈的)인 원인에 따른 것이었다는 점에서, 음악을 통한 심리적(心理的) 요법은 임시 방편에 불과할 수 밖에 없었다.
성 경: [삼상16:17,18]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여기서는 장차 왕위에 오를 자로서, 다윗의 여러 뛰어난 자질이 주위 사람들에게서 이미 어느 정도 널리 인정되기 시작하였음을 시사해 준다.
소년 중 한 사람 - 이 소년(*, 네아림)도 사울의 신하 중에 있었다는 점에서, 사울의 신하였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그의 연소함은, 또한 연소했던 다윗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던 한 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 다윗에 대한 이같은 호칭은 하나님께서 1절에서 직접 사용하셨던 것으로서, 다윗을 소개하려고 한 그 소년 신하가 다윗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 시각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해 준다.
호기와 무용과 구변이 있는 준수한 자 - 다윗에 대한 저자의 이같은 언급은 사울에 대한 다윗의 탁월성을 강조하려는 의도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서 '호기'(豪氣)는 문자적으로 '능력있는 용사'(a mighty valiant man, KJV)란 뜻이다. 이것은 말할 나위없이 다윗이 자신의 가축을 해치려던 사자나 곰 등을 쳐죽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 말이다(17:33-37). 그리고 '무용'(武勇)은 '전사'(戰士, a man of war; KJV, RSV)란 뜻이다. 이것도 위의 '호기'와 같은 배경에서 이해되어야 할 듯하다. 또한 '구변'(口辯)은 '매사에 분별력 있는'(prudent in matters, KJV), '말을 신중하고 현명하게 하는'(prudent in speech, RSV)이란 뜻이다. 특히 이러한 자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매우 귀중히 평가되던 덕목(잠 23:9; 25:9, 11, 15; 29:20)인데, 이것은 시편 기자로서의 다윗의 작시(作詩) 능력을 염두에 둔 말일 것이다. 그리고 '준수한'(*,토아르)은 '잘 생긴 미남자'(a finelooking man, NIV; a man of good presence, RSV)를 가리키는 말로서, 특히 이 점에 대한 묘사는 이미 12절에 언급되었었다(25:3; 창29:17; 39:6; 신 21:11; 에 2:7).
여호와께서...함께 계시더이다 - 기름부음 받은 결과 하나님의 신에게 크게 감동된(13절) 다윗은, 이후 그의 행적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되었다. 즉 내적으로는 겸손, 성실, 진실함으로, 그리고 외적으로는 사자나 곰을 맨손으로 물리치는 호기와 무용으로 그 증거를 나타내었던 것이다. 아무튼 여호와께서 다윗과 함께 게신다는 이 사실은 이후 모든 면에서 다윗에게 승리가 보장되어 있음을 가리키는 어구이다(3:19; 10:7; 18:12, 14).
성 경: [삼상16:19]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사울이...다윗을...보내라 하매 -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경고하셨던 바대로(8:11-18), 사울은 자신의 필요에 따라 백성들을 징집하는 일을 거침없이 시행하고 있었다.
성 경: [삼상16:20]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이새가...보내니 - 당시 이새는 왕의 권위를 존중하였으며 - 또한 자신의 아들이 왕실의 일에 종사케 되었음을 명예롭게 여겼기 때문에(Klein), 자신의 아들을 기꺼이 사울에게 보냈을 것이다. 특히 이때 이새는 자신의 아들이 미래의 왕으로서 기름 부음을 받았던 사실(13절)을 상기하고, 자신의 아들이 왕실에서 일하게 됐다는 사실에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을 것이다.
떡과 한 가죽부대의 포도주와 염소 새끼 - 이와같은 예물은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1) 상대방에 대한 존경심을 표명하거나(9:7, 8), (2) 또한 상대방에게 감사를 나타낼 때(창 14:18). (3) 그리고 상대방을 진정시킬 목적(25:18) 등으로 사용되었다. 여기서는 왕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서 첫번째의 경우에 해당될 것이다.
성 경: [삼상16:21]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그 앞에 모셔 서매 - 이것은 (1) 분부를 받기 위하여 가까이서 기다린다(왕상3:16), (2) 또는 본격적으로 신하의 한 사람이 되어 일을 하다(창 41:46) 등의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분명 다윗은 사울이 악신으로 고통당할때 수금을 타 그의 마음을 위로함으로써 봉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일이 사울의 마음을 매우 흡족하게 하였고, 또한 사울에게 크게 사랑받는 요인으로 작용하였을 것이다(23절).
자기의 병기 든 자를 삼고 - 처음 수금 연주자로 사울에게 봉사한 다윗은 얼마 후 사울의 병기 든자(armor - bearer, RSV)로 승격되었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시사한다. 즉 (1) 다윗에 대한 사울의 사랑과 신임이 더욱 두터워졌으며, (2) 또한 사울이 다윗의 무예를 어느 정도 인정하였음을 암시한다. 왜냐하면 '병기 든 자'는 주인의 창칼이나 방패 등을 가지고 다니는 일종의 부관으로서(Smith, Keil), 주인으로부터 가장 신임받는 정예군 중에서 임명되었기 때문이다(14:1; 17:41; 31:4-6; 삼하18:15). 이처럼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로 말미암아, 마치 모세처럼 다윗도 사울이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상황 가운데서 왕실의 보다 고상한 직책을 감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왕궁의 여러 법도와 국사를 익히게 하셨는바,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다윗을 장차 이스라엘의 왕으로 착실히 준비시켜 나가셨다(Keil & Delitzsch, Vol. II-ii. p. 172).
성 경: [삼상16:22]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에서 사울은 다윗을 계속적으로 자신의 곁에 두겠다고 이새에게 고지(告知)함으로써, 다윗에 대한 자신의 사랑과 신임을 강력히 표명하고 있다.
그가 내게 은총을 얻었느니라 - 문자적으로는 '그가 나의 눈에서 은총을 발견하였느니라'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다윗이 사울 자신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는 사실을 가리킨다(21절). 이처럼 사울은, 다윗에 대한 시기와 질투심이 생기기 전에는 그를 진정 사랑했다. 그러나 다윗에 대한 백성들의 칭송이 자신을 앞지르자(18:7), 이후로 사울은 이전에 다윗을 사랑한 것 이상으로 그를 적대하게 되었다.
성 경: [삼상16:23]
주제1: [기름 부음 받는 다윗]
주제2: [사울의 부름 받은 다윗]
본절은 다윗이 사울에게서 사랑을 받을 수 있었던(21, 22절) 중요한 이유를 보여준다.
하나님의 부리신 악신 - 이는 하나님의 허락과 지배하에서 주로 악인들에게 활동하는 사단의 영을 가리킨다. 14절 주석 참조.
다윗이 수금을...탄즉 사울이...낫고 - 굳이 현대 의학적으로 사울의 병명을 분류하자면, '심한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 착란증'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심리학상 좋은 음악을 통한 치료법이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사울을 번뇌케 한 원인은 사단의 활동이므로 일반 음악 요법으로는 결코 그를 치료할 수 없었다. 다만 여기서 다윗의 수금연주가 효과를 볼 수 있었던 것은 여호와의 신에 감동된(13절) 다윗이 수금을 통한 음악으로 그것을 표현했기 때문에, '악신'(惡神) 곧 하나님께서 부리시는 사단의 영이 사울에게서 일시적으로 떠나간 결과로 말미암은 것이었다. 16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블레셋 사람들이...싸우고자 하여 - 블레셋 사람들의 이같은 전의(戰意)는 당시 악신으로 고통받던(16:14) 사울의 통치력 약화를 기화로, 믹마스 전투에세의 패전(14:31)을 설욕키 위한 것이었다.
유다에 속한 소고 - '소고'(Shochoh)는 '가시가 많은 곳'이란 의미이다. 이곳은 유다 산지와 블레셋 평원, 곧 세펠라 지역에 위치한 요새 도시 중 하나로서(수 15:35), 오늘날 와디숨트(Wady Sumt)지역에 위치한 '슈웨이케'(Shuweikeh)로 추정된다(Keil,Smith). 베들레헴 서쪽 약 22.5km, 아세가 남동쪽 약 4.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한편 블레셋 군이 유다에 속한 이곳에 진을 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이스라엘에 대해 기선을 장악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아세가 - '파헤친 땅'이라는 의미이다. 이곳은 아얄론 골짜기(수 10:12) 남부의 견고한 도시로서, 해발 약 120m 가량이다. 수 10:10 주석 참조.
에베스담밈에 진치매 - '에베스담밈'(Ephes-dammim)은 '피의 경계선'이란 의미이다. 이같은 지명은 그곳에서의 잦은 전투로 많은 피가 흘려졌기 때문에 붙여졌을 것이다. 이곳은 소고(슈웨이케) 북동쪽 약 2.5km 지점으로 현재의 '다뭄'(Damum)으로 추정된다(Keil, Fay). 한편 대상 11:13에는 '바스담밈'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 경: [삼상17: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엘라 골짜기에 진 치고 - '엘라 골짜기'(the vally of Elah)는 '상수리 나무의 골짜기'란 의미이다. 이곳은 예루살렘 서남쪽 약 22.5km에 위치한 오늘날의 '와디 에스상트'(Wadies Sant)로 추정된다. 당시 그 지역 내에는 나무가 무성하였고, 그 골짜기 밑바닥에는 다윗이 골리앗을 죽였을 때 사용했을 듯 싶은 조그만 돌들이 지금도 깔려있다고 한다. 또한 이 골짜기는 '소고'의 북쪽에서 동서로 가로질러 있다. 한편 이곳은 여름철만 빼고는 항상 골짜기에 물이 흘렀으므로, 블레셋과 이스라엘의 이 전투는 물이 말랐을 여름철에 벌어졌음이 분명하다(Hertzberg).
항오를 벌였으니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는 '상대를 엄습하다', '일렬로 정렬하다'란 의미이다(4:2;욥 6:4). 여기서는 블레셋에 대한 이스라엘의 방어적 자세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블레셋의 침입]
본절은 블레셋 족속이 자신들의 본진이 있는 '에베스담밈'<2절>을 떠나 이스라엘이진을 치고 있던 '엘라 골짜기'로 진격했다는 사실을 암시해 주고 있다. 이때 양군은 골짜기를 경계로 낮에는 양편 언덕에 대열을 이뤄 길게 늘어서서 전투 내세를 취하다가, 밤에는 자신들의 장막으로 돌아가기를 계속하고 있었을 것이다(Hertzberg).
사이에는 골짜기가 있었더라 - 여기의 '골짜기'(*, 가이)는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일반적 의미의 골짜기(*, 에멕)와는 전혀 다른, 좁고 급격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협곡(峽谷)을 뜻한다(Conder). 바로 이같은 지형적 요인 때문에, 이스라엘과 블레셋은 마주보면서도 쉽사리 전면전을 벌이지 못했을 것이다(PulpitCommentary).
성 경: [삼상17: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싸움을 돋우는 자(*, 아쉬 하베나임) - 문자적으로는 '둘 사이에 있는 사람'(a man between the two)이란 뜻이다. 이것은 결국 단신으로 싸워 단번에 전쟁의 승패를 판가름하기 위해 두 군대 사이에 개입하는 중간사람(middle-man)이란뜻으로, 곧 선봉장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같이 전군(全軍)을 대표하여 선봉장이 상대방의 선봉장과 전투를 하는 방식은 성경 다른 곳에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같은 전투 방식은 헬라 민족들 사이에서는 일반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바로 이 블레셋 족속들이 헬라권에서 이민 온 민족이라는 사실은 골리앗의 이같은 전투 형태를 넉넉히 이해케 해준다.
그 이름은 골리앗 - '골리앗'(Goliath)이란 이름이 갖는 정확한 의미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밝혀지지 않고 있다. 그 까닭은 이 사람이 비셈계 인종에 속하기 때문이다.
가드 사람 - '가드'(Gath)는 아세가 서쪽 약 8.9km 지점으로, 블레셋 5대 도시 중 하나이다(5;80. 그런데 이 지역에는 거인족인 아낙 족속(Anakim)이 섞여 살고 있었다(수 11:22). 그러므로 분명 골리앗도 이 거인족의 후예일 것이다.
그 신장은 여섯 규빗 한 뼘이요 - 고대의 측략법에 근거하여 한 규빗(Cubit)을 약45cm 정도로, 한뼘(Span)을 약 13cm 정도로 본다면, 골리앗의 키는 약 283cm 정도로 추정될 수 있다. 한편 NEB는 274cm로 환산하였고, NIV와 Living bible은 '9피트 남짓'(over nine feet, 약 270cm 남짓)으로 보았다. 아무튼 골리앗은 270cm 이상으로,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장대한 거구였음이 분명하다.
성 경: [삼상17: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머리에는 놋투구 - 여기서 '놋투구'(*, 코바)는 이 단어의 첫 철자가 본절에서는 '카프'(*)로, 반면 38절에서는 '코프'(*)로 각기 다르다는 점에서, 헷 족속이나 아랍 민족으로부터 수입한 것이 듯하다(Krinetzki).
몸에는 어린갑을 입었으니 - '어린갑'(*, 카스케세트)은 천 위에 비늘모양의 놋이나, 철판 조각을 다닥 다닥 붙여서 만든 갑옷(coat of mail, KJV; coat ofscale armor of bronze, NIV)으로(Aquila), 고대의 전투 때에 왕이나 군장에 의해 주로 착용되곤 하였다(Layard).
그 갑옷의 중수가 놋 오천 세겔 - 한 세겔(Shekel)은 약 11.5g이므로, '오천 세겔'은 약 57.5kg이다.
성 경: [삼상17: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그 다리에는 놋경갑을 쳤고 - 어린갑에 의해서는 허리나 허벅다리 부분까지도 보호되었다. 그러므로 이 놋경갑은 다리 부분을 보호하는 장비임이 분명하다.
어깨 사이에는 놋단창을 메었으니 - '놋단창'(*, 키돈)은 어깨의 뒷 부분에 차는 창을 가리킨다. 혹자는 이것을 방패라고 주장하나(LXX, Vulgate, theSyriac) (1) 고대에 방패는 대개 병기 드는 자가 별도로 갖고 다녔으며(7절) (2) 견고한 갑옷에 의해서 등 부분도 충분히 보호될 수 있다는 점(Josephus) 등에서, 여기 '놋단창'은 방어용 무기인 방패라기 보다는 오히려 창과 같은 공격용 무기로 봄이 타당할것이다. 그리고 본 단어가 단수라는 점에서, 이것은 손으로 던져 적을 살상케 하는 단검류는 아닌 듯하다.
성 경: [삼상17: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창자루는 베틀채 같고 - 이것은 멀리 던지기 위해 창자루에 고리가 달린 가죽끈을 감아 놓은 창의 모양에 대한 표현이다(Yadin). 즉 창자루에 긴 끈이 달려있었기 때문에 '베틀채'(weaver's beam, KJV; weaver's rod, NIV) 같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이다. 한편 여기서 '자루'(staff, KJV; shaft, NIV)에 해당하는 '헤츠'(*)는 케리(Keri)에 따라 '에츠'(*)로 고쳐 읽어야 한다(삼하 21:19;대상 20:5).
창 날은 철 육백 세겔 - 600 세겔은 약 7kg이다. 따라서 이것은 골리앗의 창이 엄청나게 컸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4-7절에 묘사된 바 블레셋 군대의 선봉장 골리앗(Goliath)은 그 거대한 신장이나 육중한 무기등이 보통 사람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조차 없을 만큼 크고 강했다. 마치 우뚝 솟은 난공 불락의 요새와 전혀 다를 바 없었던것이다.
성 경: [삼상17: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본절에는 골리앗이 자신을 블레셋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이스라엘 군대에게 자신과 싸울 대표를 뽑아 보내라고 호통치는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골리앗이 이처럼 일대일 결투를 신청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1) 협곡을 경계로 서로 대치했던 지형 형편상 전면 선제 공격이 곤란했으며 (2) 골리앗이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이스라엘의 그 누구라도 쉽사리 이길 수 있으리라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사실 이같은 일대일 결투는 고대 이방의 전투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경우 선봉장의 승리는 곧 전체의 승리로 간주되어, 패배한 측은 상대국에게 패전국으로서의 모든 의무를 다해야 했다(Klein, 9절).
그가 서서 - 골리앗은 그때 언덕위에 있던 자신의 진을 나와 골짜기의 중간쯤에 우뚝 버티고 서있었을 것이다.
어찌하여...항오를 벌였느냐 -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블레셋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하여 군대를 이끌고 나와 진을 치고, 골짜기 언덕에 대열을 이루고 있는 사실을 가리킨다.
나는 블레셋 사람...너희는 사울의 신복 - 여기서 '나는 블레셋 사람'이란 말은 골리앗 자신이 블레셋 군대의 힘을 대표하는 자란 뜻이다(Keil). 그리고 '너희는 사울의 신복'이란 말은 이스라엘 민족이 중앙 집권적 군주 사울에 의해 철저히 예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조롱하는 말이다. 이것은 여기의 '신복'(*, 아바림)이란 단어가 '종들' 혹은 '노예들'이란 의미를 갖고 있다는 사실로써도 잘 알 수 있다. 아무튼 골리앗은 이같은 언급들을 통하여 이스라엘에 대한 블레셋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흥분케 함으로써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 한것이다.
성 경: [삼상17: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종이 되어...섬길 것이니라 - 본절에 언급된 골리앗의 이 제안은, 결국 그가 패배했음에도 불구하고 블레셋이 이스라엘의 속국이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볼 때(52-54절), 다만 이스라엘을 공포 분위기 속으로 빠뜨리기 위한 공갈 협박용이었음이 확실하다(10, 11절).
성 경: [삼상17:10]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내가...모욕하였으니 - 이것은 골리앗이 (1) 이스라엘 사람들을 사울의 노예 혹은 종이라고 깔보았고(8절), (2) 또한 이스라엘은 겁장이들이므로 블레셋의 종노릇이나 해야 할 무력한 민족이라고 조롱했던 사실(9절)을 가리킨다.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자신과 맞서 싸울 용사를 요구만 하고 이스라엘 진으로 접근해 갈 수 없었던 이유는 (1) 무엇보다도 이스라엘의 진이 가파른 산 위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2) 또한 그는 중무장을 하여 몸이 무거웠기 때문일 것이다.
성 경: [삼상17:1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골리앗의 도전]
놀라 크게 두려워하니라 - 여기서 '놀라'(*, 하타트)는 원래 '파괴되다', '부서지다'란 의미로서, 극단의 공포심을 표현할때 사용되는 단어이다(왕하 19:26;사30:31;렘 8:9). 그리고 '두려워하니라'(*, 야레)는 '경외하다', '엄위하다'란 의미로서, 어떠한 유.무형의 강력한 힘에 대하여 정신적으로 완전히 압도당하는 것을 가리킨다(창 18:15;19:30;신 5:5;수 4:4;시 119:120). 이처럼 이스라엘은 사울 왕으로부터 전체 병사에 이르기까지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의 기세등등한 모습에 겁을 집어먹고 기가 질려 두려움으로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는 무엇보다 이스라엘의 총지휘자 사울에게서 여호와의 신이 떠나 버린 필연적 결과였다(F. W. Krummacher).
성 경: [삼상17:1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 - '에브랏'(Ephrath)은 베들레헴의 고대 명칭으로서(창48:7), 족장 야곱의 아내 라헬이 산고로 죽은 곳이며(창 35:16-19), 무엇보다도 후일 선지자 미가의 입을 통해 메시야가 태어날 장소로 예언된 곳이다(미 5:2). 한편 본서 저자는 여기서 '유다 베들레헴'이라고 분명히 밝힘으로써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과 구별했고(수 19:15;삿 12:8), 또한 '에브랏 사람'(Ephrathite)이라고 밝혀줌으로써 이새의 집안이 베들레헴 본토인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결국 유다 베들레헴은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고향으로서, 그리고 장차 메시야 그리스도가 태어날 곳으로서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임을 알 수 있다.
이새는...나이 많아 늙은 자 - '늙은 자'(*, 자켄)는 성경에서 보통 '장로','노인'으로 번역되는 단어이다. 한편 '나이 많아'는 '나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보다 앞섰다'란 의미이다. 결국 이같은 언급은 이스라엘 사람들 대부분이 참전하고 있던 블레셋과의 전쟁에 이새가 참전치 아니했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Fay). 한편 스미드(R.Payne Smith) 박사는 당시 이새에게는 장성한 세 아들이 있었고, 도합 8명의 자녀가 있었던 사실에 근거하여 이새의 나이를 최소한 60세 이상으로 보았다.
여덟 아들이 있는 중 - 16:10, 11에서도 이새의 아들은 여기서처럼 여덟 명으로 언급되고 있으나, 역대상 2:13-15에서는 일곱 명으로 나와 있다. 이같은 차이를 규명해보려는 시도로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가 있다. 즉 (1) 이새의 아들은 원래 여덟 명이었으나 한 명은 죽었다고 보는 견해(Keil, Smith), (2) 이새의 아들은 원래 일곱 명이었으나 16:10에서 다윗을 제외하고도 일곱 명이라고 한 까닭은 많은 다른 아들들은 하나님에 의해 선택되지 못했음을 강조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고 보는 견해(Klein) 등이다.
성 경: [삼상17:1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장성한 세 아들은...싸움에 나갔으니 -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군대에 나갈 자격과 의무가 있는 자는 이십 세 이상의 남자였다(민 1:3).
엘리압...아비나답...삼마 - 16:6-9 주석부분 참조.
성 경: [삼상17:1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다윗은 말째라 - 이것은 다윗이 자신의 형들과는 달리 사울을 따라 싸움에 나가지 않았던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이는 당시 다윗의 나이가 20세 미만이었음을 시사해준다.
성 경: [삼상17:1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다윗은 사울에게로 왕래하며 - 여기서 '왕래하며'(*, 훌레크 와사브)는 다윗이 사울의 궁전과 베들레헴 집을 반복적으로 계속 오갔음을 뜻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히브리 원문은 다만 '갔다가~그리고 (사울에게로부터) 왔다'라고 말하고 있기때문이다. 즉 다윗은 수금을 타기 위해사울에게 갔다가(16:19, 22), 그의 병이 호전되자 양을 치는 자신의 일을 위하여 다시 베들레헴의 자기 집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베들레헴에서...양을 칠 때에 - 이것은 오히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기 위하여'(to feed...sheep at Bethlehem, KJV)로 번역함이 타당하다. 즉 이것은 다윗이 수금을 타던 일을 그만 두고, 사울의 곁을 떠났던 한 가지 목적을 언급하는 어구인 것이다.
성 경: [삼상17:1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전쟁에 참전한 이새의 아들들]
그 블레셋 사람 - 이것은 단수로 표기되었다는 점에서, 블레셋 군대가 아닌 '골리앗'(Goliath) 개인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사십일을... 몸을 나타내었더라 - 이것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계속적으로 소강(小康)상태에 머물고 있었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이같은 상태가 계속된 까닭은 (1) 이스라엘측에서 골리앗을 상대할 용사를 아직껏 내보내지 못했으며(11절) (2) 블레셋은 이스라엘의 진(陳)이 자리잡고 있던 지형적 조건상 전면 공격을 감행한다는 것은 매우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3절 주석). 그러나 블레셋의 선봉장 골리앗의 계속 되는 위협으로 말미암아 전황(戰況)은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이스라엘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여기 '사십 일'은 이스라엘이 위기에 처해 있었음을 예시해주는 어구로 보아야 할 것이다(창 8:6;삿 13:1; Krinetzki). 즉 본서 저자는 여기서구체적으로 이스라엘이 위급한 상황을 맞이하고 있다는 언급은 하지 않았으나, 이같이 시련과 위기의 수인 '사십 일'이라는 말을 특별히 언급함으로써, 다윗이 매우 필요 적절한 시기에 이새에 의해 블레셋과의 전투 장소에 보내졌음을 강력히 암시하려고 한 듯하다.
성 경: [삼상17:17,1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이새가 여기서 이같은 조치를 위한 이유는, 블레셋과의 사십 일 이상의 대치로 인하여(16절) 이스라엘 군대의 식량이 고갈되었을 것을 염려하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각 가정은 싸움에 징집된 자식들에게 일종의 병참 지원을 했던 것같다.
볶은 곡식...떡...치스 - 성경에서 이것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곤고한 자들에게 적절한 음식으로 주로 언급되고 있다(25:18;삼하 17:28;룻 2:14). 특히 '볶은 곡식'과 '떡'은 서민들에 의해 애호되던 음식이었다(Krinetzki). 그리고'치스'(*, 할라브)는 문자적으로는 '우유'를 뜻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건조한 우유덩어리'를 가리킨다. 한편 '한 에바'는 약 23리터에 해당하는 구약 시대 고체량의 부피 단위이다(출 16:36).
안부를 살피고 - 이것은 건강 및 생존의 여부에 관한 '솰룸'(*, '평안')의상태를 알아보라는 당부이다.
증표를 가져오라 - 이것은 (1) 다윗이 제대로 형들을 만나 형들의 안부를 살폈는지의 여부, (2) 예물이 전달됐는지의 여부, (3) 다윗에 의해 이새에게 전달될 형들에 관한 소식의 진위(眞僞) 여부를 증명할 어떤 '증거물'(token, RSV)을 뜻한다. 틀림없이 이것은 서신(書信)의 형태였을 것이다(F. R. Fay).
성 경: [삼상17:19]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도 18절에 이어, 이새에 의해 다윗에게 전달됐던 내용이다.
엘라 골짜기 - 2절 주석 참조.
성 경: [삼상17:20,21]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일찌기 일어나서 양을...맡기고 - 다윗의 순종과 부지런함, 그리고 책임감이 잘 나타난 구절이다. 아마도 저자는 여기서 사울의 왕권을 계승할 자로서의 다윗의 인품을 강조하려는 의도를 가졌던 것 같다.
진영 - (*, 마갈라). 이것은 '둥글게 하다'라는 의미를 갖는 동사 '아갈'(*)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고대 수비 진지의 일반적 형태인 둥근 모양을 한 바리케이드를 가리킨다(Lange). 한편 칼빈(Calvin)은 이 바리케이드가 병거로 이루어졌다고 보고 '병거의 장소'로 이해하였다(26:5, 7).
항오를 벌이고 - '항오(行伍)를 벌이다(*, 아라크)란 말은 '정렬하다', '배열하다'란 의미로서, 곧 전투 대형으로 군사를 적절히 배치하는 것을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2]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짐을...맡기고 - 다윗은 이같이 함으로써 형들이 있는 전투 대열로 신속히 가려고 했던 것 같다. 물론 여기서 '짐'은 형들에게 주기 위해 아버지에게서 가져온 음식 보따리를 가리킨다(17절).
짐 지키는 자 - NEB(the New English Bible, 새 영어 성경)는 이 말을 '병참 장교'(quartermaster)로 번역하였다. 이 번역을 따른다면, 다윗은 그때 집에서 가져온 음식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전하지 않고, 여기의 이 병참 장교의 손을 통해 형들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것 같다.
성 경: [삼상17:23]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골리앗...항오에서 나와서 - 여기서 '항오'(*, 마아로트)는 골짜기를 경계로 양쪽 언덕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는 군사 대열을 가리킨다<3절>. 그리고 '나와서'(*, 올레)는 '올라가다'란 의미인데, 이것은 골리앗이 자신의 진에서 내려와 이스라엘 진쪽의 언덕으로 어느 정도 올라왔음을 가리킨다(F. R. Fay).
전과 같은 말 - 곧 8-10절의 내용과 같은 모욕과 조롱의 말.
성 경: [삼상17:24]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심히 두려워하여...도망하며 - 즉 골리앗이 더이상 따라 올라올 수 없는 안전 지대로 피신했다는 말이다. 이로 볼 때 당시 사울과 이스라엘 군대는 블레셋의 거인 골리앗 한 사람으로 인하여 얼마나 사기가 저하되고 두려움과 떨림에 사로잡혔는지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성 경: [삼상17:25]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여기서는 사울 왕에 의해 약속된 바(27절) 골리앗을 죽이는 자에게 주어질 세 가지 상급이 언급되고 있다.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 이와 같이 큰 재물을 약속함으로써 군대의 사기를 북돋우는 경우는 성경에 많이 언급된다(수 15:16;삿 1:12;삼하 18:11;대상 11:6). 한편 당시의 왕정(王政)이 실시된 지 20여년<15:1> 이란 세월이 흐른 뒤였으므로, 아마도 사울 왕가(王家)는 어느 정도의 행정 조직을 갖추고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둬들임으로써 많은 재정을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8:15, 17). 사실 고대 군주국에서는 군주(君主)가 자신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신하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 뒤따랐고, 따라서 그러한 관습이 군주가 많은 재정을 보유하려 했던 목적 중의 하나였다(8:14, 15).
그 딸을 그에게 주고 - 성경에는 '메랍'과 '미갈'이라는 두 딸만이 사울의 딸로서 언급되고 있다(14:49). 그러나 사울에게는 이들 외에도 또다른 딸들이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에 이 두명 만이 언급된 까닭은, 이 둘만이 다윗과 특별한 관계를 가지기 때문이다. 즉 맏딸 '멜랍'(Merab)은 결국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지만 처음에는 다윗에게 주기로 약속됐던 처지였고(18:17-19), 또한 둘째딸 '미갈'(Michal)은 결국 다윗에게 주어졌던 것이다(18:20-27). 어쨌든 왕의 사위가 된다는 것은 매우 매력적이며, 의미 심장한 일이었다. 특히 이미 기름 부음을 받아 차기의 왕으로 확정된(16:13) 다윗에게는 그 일이 왕좌로 나아가는 자신의 길을 보다 평탄게 할수 있을 것이었다.
그 아비의 집을...자유하게 하시리라 - 사울의 이 약속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다. 즉 (1) 왕과 백성 사이의 중간 계급 혹은 귀족 계급으로 올려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Lemche, Ewald), (2) 세금 납부를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Fay), (3) 부역을 면제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견해(Smith) 등이다. 그러나 첫번째 견해는 그 당시 이스라엘 사회에는 중간 계급이 형성되어 있지않았다는 점에서 (Mccarter), 그리고 두번째의 견해는 '자유하게 하시리라'(*, 하파쉬)는 단어가 성경 용례상 세금의 면제를 전혀 뜻하지 않는다는 점에서(출 21:2;신 15:12;렘 34:10) 타당치 않다. 반면에 세번째의 견해는 '자유케 하시리라'라는 단어가 대체적으로 육체적 억압에서의 해방을 의미하며, 또한 우가릿 문서에 용감한 행동을 한 사람이 왕에 의하여 노예의 신분에서 자유인이 되었다는 평행 구절이 나타나고 있다는 점에서(Klein) 타당성이 있다. 한편 여기 '아비의 집'은 가문(家門) 전체를 가리킨다.
성 경: [삼상17:26]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 이 말은 다윗의 의분(義憤)이 단순히 개인적이거나 또는 골리앗을 죽이려한 다윗의 의도가 자신의 영달이나공명심 때문이 아니라, 오직 골리앗으로부터 당한 민족적 치욕 및 신성 모독을 제거하려는 것임을 보여 준다. 한편 여기서 '치욕'(*, 헤르파)은 골리앗이 이스라엘에게 준 '모욕'(10절)과 동일한 어근의 말이다.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 이것은 다윗이 이미 약속된 것(25절)보다 더 큰 상급을 사울에게 약속받으려 했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다만 다윗은 그때 이 말을 함으로써 골리앗을 죽이는 일의 당위성.시급성을 시사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본절의 후반부 '이 할례 없는...모욕 하겠느냐'라는 말과 (2) 이후 딸을 주겠다는 사울의 제안을 다윗이 사양했다는 언급(18:18) 등을 통해 분명해진다.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 - 이 말은 블레셋 사람들이 대체로 포경 수술을 안했다는 사실 자체 보다는, 그들이 이스라엘과는 달리 하나님과의 거룩한 언약 관계하에 있지 않은 이방 민족이라는 사실에 강조점이 있다<14:6 주석 참조>. 그러므로 다윗의 이 말에는 자신이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자부심과 하나님께서 자신과 반드시 함께 하실 것이라는(16:18) 확신이 담겨 있었다.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 - 이같은 문구는 이방인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행동에 관한 언급이 다뤄지는 문맥중에 종종 나타난다(Klein, 수 3:10;왕하 19:4).그리고 여기 '사시는 하나님'(*, 엘로힘 하임)은 말할 나위없이 블레셋이 섬기던 다곤(Dagon, 5:2 주석 참조) 우상의 무기력함과 무가치함을 경멸하는 말투임이 분명하다(렘 10:6-10). 이같은 다곤 우상의 무기력성은 다곤의 이름을 빙자한 골리앗의 다윗에 대한 저주가 아무런 효험을 나타내지 못했다는 결과적 사실로써 증명되고 말았다<43절>. 뿐만 아니라 다곤 우상의 무기력함은 과거에 하나님의 언약궤 앞에 완전한 항복을 함으로써 백일하에 폭로되지 않았던가(5:3, 4)! 한편,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의분으로 훨훨 타올랐던 소년 다윗의 이 말은 당시 사울 통치하의 무기력하고 침체된 이스라엘 군대의 무감각성을 일깨워 주는 각성제가 되었을 것이다.
성 경: [삼상17:27]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본절은 골리앗을 이기는 자에게는 세 가지 상급(25절)이 주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결코 근거없는 유언 비어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성 경: [삼상17:28]
주제1: [골리앗을 물리친 다윗]
주제2: [다윗의 의분(義憤)]
엘리압이...노를 발하여 - 다윗의 맏형 엘레압의 이 분노는 다윗의 거룩한 분노와는 뚜렷히 대조되는 것으로, 곧 자신의 편협한 소견에서 비롯된 세속적 분노이다. 어쩌면 엘리압의 이같은 분노는 자신을 제쳐놓고 동생 다윗이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사실로 인한 질투 및 시기심이 근본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네가 어찌하여...내려왔느냐 - 이것은 베들레헴이 해발 690m 높이의 고지에 위치한 성읍이었다는 사실을 앎으로써 이해될 수 있다(15:12;16:2).
몇 양을 뉘게 맡겼느냐 - 엘리압의 이 말은 (1) 양을 지키는 본연의 임무에 태만했다는 것, (2) 쓸데 없는 일에 공연히 참견했다는 것 등을 지적한, 다윗에 대한 부당한(20절) 책망이다(Lange).
나는 네 교만과...완악함을 아노니 - 여기서 '교만'은 목동의 주제를 벗어난 이기적 욕심(25절)을 지적한 말이고, '완악'은 피흘리는 전쟁을 보고 즐기고자 하는 사악한 심성을 지적한 말이다. 그런데 이러한 '교만'과 '완악'은 모두 하나님께 대한 불순종을 지적코자 할때 성경에서 종종 사용되는 단어들이다(신 17:12;18:22;렘 7:24). 그러므로 결국 형 엘리압은 이같은 단어를 다윗에게 적용함으로써, 다윗의 거룩한 열정과 의분을 한낱 이기적인 교만과 사악함으로 격하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로 볼 때 실로 교만하고 완악한 심성은 엘리압 자신의 부당한 비난 속에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