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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도량 道悟禪院 도오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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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보는 사찰기행 스크랩 공주 갑사(51번째 사찰순례)
대선大仙 추천 0 조회 21 13.05.11 14:53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곡성에서 출발해 아침부터 바쁘게 돌아다닌 내장사, 태인향교, 금산사, 귀신사에 이어 이제 서울로 올라가며 오늘의 하이라이트인 공주 갑사를 향해 달려왔다. 평일이라 넓은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나니 위쪽 소주차장이 또 있다. 그러나 마을을 구경할 겸 걸어서 위로 올라가니 제일 먼저 반겨 주는 것은 천육백년이나 되었다는 느티나무였다. 밑에는 괴목단 까지 설치해놓고 나무를 휘감고 있는 소원을 써서 새끼줄에 끼어놓은 종이들이 바람에 휘날리며 여느 성황당을 연상케 해준다. 어디를 가나 마찬가지지만 이곳 갑사 앞에도 어지럽게 펼 처진 상가들을 지나 조금 올라가면 갑사임을 증명하는 계룡산 갑사라고 쓰여진 일주문이 우리를 반겨준다.

나라 안의 으뜸가는 사찰이라 ‘갑사’라고 불렀다는 갑사. 그런데 왜 갑사가 나라 안의 으뜸가는 사찰인가요. 기록만 있지 그 연유를 밝히지 않아 지금으로는 확인할 수 없습니다. 갑사에 전해지는 많은 이야기 속에 연유를 그려볼 수는 있습니다. 갑사 창건을 알려주는 천진보탑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천진보탑은 사천왕중의 한분인 다문천왕이 인도의 아쇼카왕 전법의 서원을 받들어 절경이 아름다운 계룡산 자연석실에 부처님진신사리를 봉안한 탑입니다. 천진보탑은 갑사가 부처님의 전법도량이며, 계룡산은 불법이 살아 움직이는 산이라는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정유재란때 소실된 사찰 중건불사에 사부대중은 물론 동물들도 동참했다는 사실입니다.

경내에 있는 공우탑은 소 한마리가 갑사에 찾아와 불사에 필요한 자재들을 스스로 끌고 와 불사에 큰 힘을 보태어 주었는데, 불사 회향 날 소는 지쳐 쓰러졌다고 합니다. 이에 갑사는 공우탑을 세워 불사를 도운 소의 호법의 정신을 기리고 있습니다. 갑사가 불법의 고향이니 꼭 지켜야 한다는 것을 소를 통해 우리들에게 알려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불법의 산실이고, 사부대중은 물론 동물까지도 불법을 지켰음을 암시해주고 있는 갑사는 신행으로 으뜸가는 사찰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표충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표충원에는 임란때 나라와 백성들을 위해 승병을 일으킨 서산, 사명, 영규대사의 영정을 모신 곳입니다.

[괴목대신(槐木大神) 이란 글이 새겨진 돌과 괴목 앞엔 괴목단이라고 쓰인 제단이...]

갑사 앞에 있는 느티나무 괴목은 이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화합을 기원하는 괴목대신제(槐木大神際)가 열린다고 한다. 1천 600년된 느티나무에 마을의 안녕을 비는 이 대신제는 수백 년간 마을의 큰행사로 열려왔는데, 1960년대 이 후 일부 주민들에 의해 명맥만 유지되다가 2000년도부터 다시 문화축제로 되살아났다고 한다. 부대행사는 장승제, 풍물놀이, 윷놀이, 무용 등 다양한 민속놀이들이 병행된다고 한다. 마을의 수호신으로 여겨 지어온 이 느티나무는 임진왜란 당시 승병들이 모여 작전을 의논한 곳으로 유명하며 15년전 태풍으로 부러져 현재 밑동만 남아 있다고 공주 연합뉴스에서 보도된 바가 있다.

[갑사 일주문(甲寺 一柱門)...]

갑사 계곡을 따라 갑사로 오르는 입구, 매표소 옆에 위치하고 있다. 일주문에 들어설 때는 오직 일심(一心)으로 불법(佛法)에 귀의해야 하겠다는 마음을 다지며, 세속의 번뇌로 흩어진 마음을 사찰에 들어섬으로써 하나로 모아 진리의 세계로 들어간다는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1998년에 신축한 갑사의 정문으로 정면에 ‘鷄龍山甲寺’라고 쓴 현판을 달았다. 도리통 1간 규모로 외3출목(외7포)의 다포식이며,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박공에 풍판을 달았다. 기둥은 깔끔하게 치목한 원주로 굵은 편이며, 그 아래를 잘 다듬은 돌로 받치고 있다.

기둥머리에는 용을 조각했으며, 공포의 살미는 초제공, 이제공, 삼제공, 사익공, 오운공으로 구성했으며, 내부의 출목을 생략하는 변화를 지니고 있다. 전체적으로 조선시대 목조건축의 법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깔끔한 부재의 치목상태, 하부 석재의 사용, 화려한 면모 등에 있어서 최근의 건축 경향을 반영하고 있다.

[어델까나 돌에 새겨놓은 글씨들은 역사를 떠나서 눈살을 찌프리게...]

[계곡물은 시원하다 못해 차디차기까지 하고...]

[갑사 철당간지주(鐵幢竿支柱) - 보물 제 256호...]

철 당간지주는 현재의 갑사 동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이 당간은 지주는 물론 당간까지 갖춘 드문 예이다. 지주는 지대석과 기단석 및 두 개의 지주로 이루어져 있으며, 당간은 24개의 철통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라 문무왕 20년(680년)에 세워진 것이라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으며, 양식상 신라 중기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기단부의 대석은 땅 속에 매몰되어 있다. 기단은 두 개의 커다란 장방형 석재로 구성되어 있으며, 정면과 후면에 각 3개, 양 측면에 각 2개의 안상을 음각했다. 안상의 모습은 신라의 안상 기법을 간직하고 있다. 기단석 상면에는 두 개의 돌을 잇기 위한 시설로 철제의 비녀장을 박았던 홈이 남아있다.

동서로 맞서 있는 두 개의 지주는 기단석 상면에 마련한 홈에 끼워 넣어 세워져 있다. 정면에서 보아 위의 너비를 아래에 비해 약간 줄였을 뿐 아무런 장식이 없는 소박한 모습이다. 맨 위는 평평한데, 바깥쪽으로 접은 모서리는 활 모양을 그리며 원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지주 상부에는 당간을 고정시키는 杆孔이 하나 있는데, 이곳에 철제 당간의 다섯째 마디 철통을 철띠로 돌려 고정했다. 두 지주 사이 기단석 상면에는 원형 쇠시리 한 단을 두어 당간받침으로 삼았다. 철제 당간은 직경은 50cm 정도의 철통 24개를 연결한 것이다. 원래 철통은 모두 28개였으나 1893년(고종 30) 7월 25일에 벼락을 맞아 4개가 없어졌다고 한다.

[갑사 철당간지주...]

[갑사 대적전(大寂殿) - 보물 제 106호...]

대적전은 대웅전을 중심으로 한 현재의 갑사 중심 일곽에서 그 앞을 흐르는 계곡을 건너 서남쪽 별도의 영역에 대적전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후 갑사가 중창되기 전 원래의 갑사 중심 영역으로 금당터가 있던 옆이다. 대적전 앞마당에는 현재 사자암에서 옮겨온 고려시대 초기의 부도 1기가 있으며, 그 앞으로 난 길을 내려가면 철당간이 서있다. 건축양식으로 보아 조선시대 말기의 건축으로 보인다. 한편 정면 어간의 현판에 ‘道光六年四月日牧岩書’라는 명문이 있는데, 건축양식으로 본 시대와 부합되므로 현판이 제작된 조선 1826년(순조 26)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단청이 퇴락되어 있던 것을 최근에 새로 입혔으며,

1984년에 시도유형문화재 제106호로 지정되었다. 대적전은 원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석가모니와 아미타불의 삼신불을 모시는 불전이나 여기에서는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와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으로 도리통은 어간을 협간에 비해 2배 정도로 넓게 설정하였다. 내부에는 측면의 후면 쪽 평주 열에 맞추어 고주를 세우고 여기에 의지해 후불벽을 만들고 그 앞에 불단을 설치하여 석가삼존불을 모셨다. 특이한 점은 후불벽 앞쪽의 2간 통에는 마루를 깐 반면 뒤쪽의 1간 통에는 온돌을 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대적전이 갑사의 중심 영역에서는 멀리 떨어져 위치하고 있다.

암자로 운영되었던 상황을 반영하는 평면구성이라 할 수 있다. 정면은 어간에 사분합, 협간에 두 짝 여닫이를 들였다. 아래에 궁창부를 한 단 두고 그 위를 모두 띠살로 만든 동일한 형식의 창호이다. 좌측면에는 전퇴 쪽에 외여닫이문을 달아 출입을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또 후면의 온돌방에 채광을 하기 위해 좌측면 후퇴 쪽에는 살창을 달았다. 기단은 잘 다듬은 장대석을 두 단 쌓은 두벌대로 기단 상면은 강회다짐으로 마감하였다. 초석은 막돌을 이용하고 있으나 일부 초석은 상면에 주좌를 쇠시리 한 흔적이 남아있다. 고막이를 받친 지대석 중에는 쇠시리가 남아있는 것이 있다.

현재의 대적전 이전에 이곳, 또는 부근에 옛 건물이 남아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있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이다. 원주는 비교적 잘 다듬어 사용했고 민흘림이 완연하다. 기둥 상부에는 창방과 평방을 돌렸고, 그 위에 다포식 공포를 올렸다. 주간포는 정면과 후면 어간에 각 2개, 나머지 간에는 각 1개씩 두었다. 각 공포는 외2내3출목, 외5내7포의 구성으로 건물의 규모에 맞추어 출목 수는 적은 편이다. 주심포에는 보머리가 돌출해 있고, 주간포에는 그 높이에 해당하는 운공을 둔 점에 차이가 있을 뿐 주심포와 주간포의 구성은 동일하다.

[갑사 부도(甲寺 浮屠) - 보물 제 257호...]

갑사 뒤편 계룡산에 쓰러져 있던 것을 1917년 대적전 앞 현재의 위치로 옮겨 세웠다고 한다. 부도 주변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초석 몇 개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창건 당시 갑사의 중심 영역이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다. 부도는 지대석과 하대석, 중대석 및 상대석으로 이루어진 기단부, 탑신석, 옥개석 및 상륜부로 구성되며 전체가 팔각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신라 말 고려 초에 걸쳐 유행하였던 소위 ‘팔각원당형’ 부도의 기본 형식을 따르고 있는 부도이다. 지대석은 팔각형 평면으로 하나의 돌을 이용해 만들었다. 하대석은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부조의 조각으로 가득 채웠는데, 하단에는 팔각형의 각 면에 사자로 보이는 짐승과 함께 인물상을 새겼으며, 상단에는 구름무늬를 가득 채웠다.

중대석 역시 2중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단은 지대석과 면석, 우주, 갑석의 형식으로 된 가구식 기단을 간략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상단은 팔각의 모서리에 꽃을 고부조로 새기고, 각 면에 주악천인과 향로를 새겼다. 상대석은 현재 위아래가 뒤집혀 있다. 1917년 옮겨오면서 위아래가 바뀐 것으로 보인다. 뒤집히지 않은 상태로 생각하면 상대석 맨 아래는 두 단의 쇠시리를 둔 위로 각 면에 3개씩 모두 24개의 연꽃을 앙련으로 새겼다. 그 위에는 아무런 조각도 하지 않은 부분이고 그 위로 두 단의 쇠시리를 두었으며, 다시 그 위쪽에 우주와 갑석, 면석을 지닌 목조건축의 기단부를 표현하였다. 갑석 상면에는 복련의 연꽃을 조각한 위로 3단의 나지막한 쇠시리를 두어 탑신을 받칠 수 있도록 하였다. 탑신석은 각 모서리에 배흘림이 완연한 원주를 새겼고,

원주 상하에 창방과 하인방을 조각했다. 정면과 후면에는 문틀과 함께 자물쇠를 조각함으로서 문을 표현하였다. 문 양옆의 네 면에는 사천왕을 조각하였고, 나머지 한 면은 아무런 조각 없이 비워두었다. 옥개석은 아래 두 단의 쇠시리를 두어 받침으로 삼았고 그 위쪽으로 서까래를 조각한 부분까지 크게 두 번 볼록하게 만든 부분을 두었다. 이 두 단의 볼록한 부분 사이와 서까래를 새긴 부분과의 사이에는 수평선을 표현하였는데, 이것은 도리 또는 장여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각 모서리에는 살미를 아래위 두 단 표현하였고, 각 살미 끝에는 소로와 함께 단여로 볼 수 있는 도리 방향으로 놓인 짧은 부재를 표현하였다. 이 부분은 최소한 2출목으로 구성된 공포대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공포대가 비교적 크게 새겨졌기 때문에 서까래는 비교적 짧게 표현되고 있다.

처마는 원형의 서까래와 방형의 부연, 그리고 초매기와 이매기까지 비교적 충실하게 조각하였다. 지붕은 비교적 물매가 급한 편으로 기와골과 함께 막새기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내림마루 역시 사실적으로 표현하였다. 내림마루 끝에는 곱새기와까지 조각했던 흔적이 있으나 모두 깨져 나갔다. 옥개석 위에는 연봉을 올려 마감했는데, 이것은 후에 새로 만들어 올린 것이라 한다. 신라 말 고려 초에 유행하던 전형적인 부도 형식을 지니고 있는 부도로 하대석과 중대석의 조각이 대담하고, 그 크기가 커서 안정적인 구도를 이루고 있다.

그러나 조각은 상부로 올라갈수록 약화되고 하대석에 비해 탑신부와 옥개석의 크기가 비교적 작은 편이다. 특히 옥개석이 지나치게 작고 물매가 급해 전체적인 비례와 균형을 잃고 있다. 따라서 이 부도는 고려 초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탑신과 옥개석의 세부 조각은 당시 조영된 어느 부도에 비해 목조건축의 구조를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갑사 부도 옥개석은 팔각원당형으로 되어있고...]

[갑사 요사채...]

[갑사 공우탑(功牛塔)...]

공우탑은 갑사 중심 영역에서 대적전으로 가는 도중 남쪽 계곡을 건너자마자 작은 규모의 삼층석탑이 있다. 공우탑이라 부르는 탑으로 백제 비류왕 4년(재위304~344년) 계룡산 갑사에 속한 암자를 건립할 때 자재를 운반하던 소가 군자 냇물을 건너다가 죽자 그 소를 이곳에 묻고 그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웠다는 전설이 있다. 자연 암반 위에 나지막한 기단을 형식적으로 만든 위에 세웠다. 각층의 탑신은 동일한 형태로 우주만을 새겼는데, 상층으로 올라가면서 급격한 체감을 이루고 있다. 옥개석은 각 층마다 층급받침을 다른 형태로 만들었다.

1층 옥개는 4단의 층급받침을 두었는데, 층급의 높이가 매우 낮아 형식화 된 모습을 보인다. 2층 옥개의 층급받침은 5단이나 한 단은 높고 한 단은 낮게 하여 변화를 주었다. 3층 옥개의 층급받침은 5단으로 층급의 높이도 다른 층에 비해 높은 편이다. 3층을 제외한 1, 2층의 층급받침은 그 높이가 낮아 형식화 된 모습이다. 한편 2층과 3층 탑신에는 3층에 ‘功’, 2층에 ‘牛塔’이라는 글자를 음각해 탑명(塔銘)을 적고 있다. 그리고 1층 탑신 정면에는 '臥塔起立人道偶合三層己巳厥功居甲'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갑사 전통찻집이 계곡 위로 자리하고...]

[갑사 계곡물을 건너서 들어서면...]

[갑사 전통찻집...]

[갑사 감로수...]

[높이 조성되어 있는 갑사 경내로 올라가는 계단과 석문...]

[석문옆에는 갑사 가람 배치도가...]

[계룡갑사 현판이 걸린 갑사 강당(講堂)...]

갑사 강당에는 '계룡갑사(鷄龍甲寺)'라는 사액이 붙어 있는데, 이 글씨는 1887년(고종 24) 충청감사 홍재희(洪在羲)가 쓴 것이다. 원래 현재의 강당 자리에는 해탈문이 있었고 강당은 대웅전 쪽으로 더 물러나 있었다. 그러나 최근의 중수불사로 앞쪽의 해탈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강당을 옮겨지었다. 비좁은 대웅전 앞마당을 넓히기 위한 배려에서 비롯된 배치상의 변화로 보인다. 이렇듯 강당을 옮겨짓게 됨에 따라 강당은 그 하부 구조에 변화가 생겼다. 원래는 사면 모두 동일한 높이의 마당과 접하고 있었고, 바닥의 높이가 낮았다.

그러나 옛 해탈문 자리로 옮겨오면서 강당 전면을 축대 바깥으로 돌출시켰고, 이에 따라 전면에 누하주를 첨가함으로서 누각형식으로 변화되었다. 그러나 이건(移建)에 따라 누하주가 첨가된 것을 제외하면 원래의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3간이나 양통의 전후 툇간을 좁혀 잡아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내부는 내주(內柱)를 사용하지 않은 통간으로 구성하였다. 전면과 후면에만 창호를 달았고 양 측면은 모두 벽을 쳐 막았다. 전면에는 어간에 사분합문을 달았고,

양 협간에 두 짝의 판문을 달았으나 사분합문은 개수로 원형을 잃은 것이다. 후면 - 대웅전 마당 쪽에서는 정면에 해당 - 에는 세 간 모두에 사분합문을 달았고, 이 문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전면의 외부를 향해서는 폐쇄적인 창호를, 후면의 대웅전 앞마당을 향해서는 개방적인 창호를 둔 것인데, 이것은 대웅전 앞마당을 중심으로 한 중정형의 배치구성에 따른 공간 이용의 방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중정형 배치를 이루는 조선시대 후기에 조영된 많은 사찰의 강당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창호 구성이다.

[갑사 범종루(梵鐘樓)...]

범종루는 누강당 앞마당 북쪽에 누강당과 평행하게 서향을 하고 있다. 2003년에 신축한 누각 형식의 건물로 누마루 위에 범종과 법고, 목어, 운판 등 사물을 봉안하고 있다. 내부에 청동으로 주조한 '계룡산갑사대범종범종각주조및건립불사동참대중질'이라는 제목의 현판이 있고, 불기 2547년, 즉 2003년에 창건하였음을 기록하고 있다. 범종을 비롯한 사물 역시 같은 해에 동시에 조성하였다. 범종루는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누각 형식으로 지붕은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아래층은 비워 두었으며 기둥은 모두 원주를 사용하였고 가구는 무고주5량이다.

주간포는 정면과 후면에는 주간에 각 2개씩, 양 측면에는 각 1개씩 배열하였다. 각 공포는 내외2출목으로 살미는 쇠서를 길게 만들었다. 제1단과 제2단 살미는 앙서형의 제공으로 만들었고, 제3단과 제4단 살미는 한 몸으로 합쳐서 초각했음이 조선시대 후기의 형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창안이라 할 수 있다. 기둥과 창방 사이에는 낙양각을 둘러 장식했고, 누마루 사방에 계자난간을 돌렸다.

[갑사 대웅전(大雄殿) - 보물 제 105호...]

대웅전은 석가여래 삼존을 모신 갑사의 중심 불전으로 뒷산에 의지하여 서향하고 있다. 원래 갑사의 중심 지역은 현재 대적전 부근으로 대웅전도 그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러나 정유재란으로 갑사의 대부분 건물이 소실된 후 1604년(선조 37)에 대웅전을 비롯한 건물들을 중창하면서 대웅전을 이곳에 짓게 되었고, 그 이후 이곳이 갑사의 중심 지역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갑사사적기에 1604년(선조 37)에 갑사를 중창하면서 대웅전을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건축양식이 17세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대웅전은 이때 중건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1654년(효종 5)에 갑사에 중수불사가 있었던 것으로 보아 이때 대웅전도 중수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며, 1875년(고종 12)에 중수가 있었다. 최근에는 1991년에 보수공사를 실시한 바 있으며, 1984년에 시도유형문화재 제105호로 지정되었다. 지형의 경사로 인해 앞쪽에는 높은 축대를 쌓아 기단을 구성했고 좌우에 폭이 넓은 계단을 두어 오르내릴 수 있도록 하였다. 기단은 크고 작은 돌을 섞어 쌓은 기단으로 맨 아래는 장대석을 이용한 지대석을 한 단 두었고, 상부도 크지는 않지만 길쭉한 돌을 이용해 갑석의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서 자유롭게 쌓은 기단의 위아래를 마무리하였다.

기단 앞에는 최근에 조성한 괘불대 지주 한 쌍이 서있다. 평면은 도리통 5간, 양통 3간으로 도리통은 어간과 그 좌우 협간을 비슷한 주간으로 설정하고, 가장 바깥 쪽 툇간을 많이 줄였다. 양통은 중앙의 간을 매우 넓게 설정한 것이 특징이다. 내부는 측면의 뒤쪽 고주 열에 맞추어 고주를 세움으로서 후퇴형의 평면을 구성하였다. 이 고주 열에 기대어 후불벽을 만들고, 그 앞에 3간 너비의 긴 불단을 두어 삼존불을 모셨는데, 양통의 중앙 간을 넓게 설정하였기 때문에 불단 앞의 예불공간을 매우 넓게 확보할 수 있었다. 또한 기둥을 높게 설정하고 7포의 공포를 둠으로서 내부공간은 넓고 높아 시원한 감이 있다.

임진왜란 직후인 17세기 건축에서 간혹 볼 수 있는 부재로 동자기둥과 내목도리 사이의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나 그 기능은 많이 쇠퇴하였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는 풍판을 달았다.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은 내목도리 안쪽 전체에 우물천장을 들였는데, 중도리를 중심으로 한 바깥쪽은 지붕의 경사에 맞춘 빗천장으로 구성했다. 건물 내외는 전체에 화려한 단청을 하여 장엄을 하였다. 기둥머리를 비롯해 창방과 평방, 도리 등의 머리에는 머리초를 베푼 모로단청을 하였다.

포벽에는 여래상을 그렸으나 외부와 내부 벽면에는 벽화를 그리지 않고 가칠단청만으로 끝냈다. 다만 내부 툇간의 고주 사이를 연결하는 벽에 천녀상을 그렸을 뿐이다. 정면 어간에는 ‘大雄殿’이라 쓴 현판을 달았는데 그 한쪽 편에 ‘康熙八年己酉六月日書’라는 명문이 있어 1669년(현종 10)에 쓴 것임을 알 수 있다. 한편 정면 기둥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적은 주련을 걸었다. '淨極光通達 / 寂照含虛□ / 劫來觀世間 / □□梵中事 / 誰見諸根動 / 要以一機抽'

[갑사 대웅전과 오층석탑...]

[갑사 진해당(振海堂)...]

진해당은 대웅전 앞마당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ㄱ자형 평면으로 대웅전 앞마당 쪽인 남쪽과 전면인 서쪽에 툇마루를 두어 개방시킨 평면을 지니고 있다. 스님들의 처소 겸 선방으로 사용되는 온돌방과 大房을 갖추고 있다. 대방에는 불단을 마련하고 약사여래불과 후불탱을 봉안하여 예불을 드릴 수 있도록 하였다.

[백제불교회관이라 쓰여있는데 절대 치지 말라고 쓰여있어...]

[갑사 동종각...]

갑사 동종은 1584년(선조 17)에 국왕의 만수무강을 축원하며 갑사에 달 목적으로 조성된 종이다. 강당 옆 새로 지은 종각 안에 있다. 종각은 사방 1간 규모로 초익공식에 사모지붕을 하고 있다. 동종의 높이는 127cm, 구연부 지름은 91.5cm이다. 일제시대에 헌납이라는 명목으로 공출되었다가 광복 후에 이곳 갑사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음통이 없는 것이 한국 종으로서는 특이한 모습이다. 용뉴는 두 마리의 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머리와 발이 신체에 비해 매우 크게 묘사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종신(鐘身)은 어깨부터 중간까지 완만한 곡선을 이루며 내려오다가 중간부터 구연부까지 직선으로 되어 있다. 종의 어깨에는 물결 모양으로 꽃무늬를 새겨 돌출시켰고, 그 바로 아래 수평선을 양각하여 상하로 나누고 그 속에 위에는 연꽃무늬를, 아래는 범자를 촘촘히 새겨 띠를 이루도록 하였다. 이 띠 아래로 4곳에 유곽을 만들고 그 속에 유두를 9개 씩 새겼다. 유곽은 안팎에 양각한 두 줄의 선을 그어 윤곽선을 마련한 속에 보상화문을 장식하였으며, 유두는 5엽의 연꽃을 바탕으로 그 가운데서 돋아난 모습이다.

종신 중앙부에는 4곳에 당좌를 마련하였고, 그 사이마다 석장을 들고 구름 위에 서있는 지장보살을 선각(線刻)하였다. 당좌는 안팎 두 겹의 양각한 원형 윤곽 속에 연꽃을 조각한 모습이며, 아래를 구름무늬가 받치고 있다. 종신의 아래에는 구연부에서 좀 떨어진 곳에 상하로 양각한 수평선을 돌려 구획한 속에 각종 꽃과 그것을 연결하는 넝쿨을 그려 넣은 띠를 새겼다. 종신에는 명문이 새겨져 있어 선조 17년에 만들어졌음과 이 절의 명칭이 당시 ‘岬士寺’였던 사실 등을 알 수 있다.

[갑사 동종(銅鐘) - 보물 제 478호...]

[갑사 적묵당(寂默堂)...]

갑사 종무소로 쓰이고 있는 적묵당은 대웅전 앞마당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 적묵당은 종무소 겸 요사로 사용하고 있는 건물이다. ㄴ자형 평면을 지니고 있으며, 대웅전 앞마당 쪽에 툇마루를 마련해 개방시키고 있다. 구조는 초익공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년)에 지어졌다.

[갑사 삼성각(三聖閣) - 문화재자료 제 53호...]

삼성각은 칠성과 독성, 산신을 함께 모신 건물로 대웅전 남쪽 언덕 위에 서향하고 있다. 삼성각 안에는 <鷄龍山甲寺三聖閣再建功德主>를 기록한 현판이 걸려 있다. 1958년에 기록한 현판으로 현재의 삼성각이 이때 조영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최근에 중수한 바 있다. 기단은 막돌을 이용해 나지막이 쌓았다. 초석은 화강암을 잘 다듬어 만든 원형초석이다. 평면은 도리통 3간, 양통 2간의 장방형으로 도리통 3간을 동일한 주간으로 설정했다. 원주를 사용했으며, 기둥 상부에는 창방을 돌렸다. 이익공식 구조로 주간에는 초각한 화반 하나씩을 두었다. 초익공은 앙서형으로 위에 연꽃을 새겼고, 이익공은 수서형으로 초각했고 행공은 교두형이다.

보머리에는 봉취형을 조각해 끼웠다. 주간에는 일정한 간격으로 운공을 두었다. 이익공식 짜임을 두어 대들보를 받도록 하였다. 지붕은 겹처마, 맞배지붕이다. 내부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고, 천장은 소란반자를 사용하지 않은 우물천장이다. 건물 내외에는 모로단청을 하였고, 측면과 후면의 내외벽에는 산수화, 독성, 산신, 호랑이 등의 벽화를 그렸다. 측면 박공부에도 풍판 아래에 천장을 들였는데, 이곳에는 학을 그렸다. 정면 어간에는 ‘三聖閣’이라고 쓴 현판을 걸었다. 또 기둥에는 '鷄化爲龍甲天下 / 三閣莊嚴護十方 / 艮山回運降○祥 / 萬年明德○馨香'이라 쓴 주련을 걸었다.

[갑사 중사자암지 삼층석탑(甲寺 中獅子庵止 三層石塔) - 문화재자료 제 55호 ...]

이 석탑은 대웅보전 서쪽 담장으로 구획된 별도의 영역 안 향적당 옆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 갑사의 부속암자인 사자암에 있던 것을 대적전 뒤에 옮겨두었다가 현재의 자리로 옮겨온 것이라 한다. 탑은 규모가 작은 편으로 기단부와 3층의 탑신, 상륜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상륜은 소실되었던 것을 새로 만들어 덧붙인 것이다. 기단은 2중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그 높이가 매우 낮아 신라 석탑이 변형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상층 기단석의 상면은 구배를 두었으며, 한 단의 쇠시리를 두어 탑신을 받치도록 되어 있다.

탑신은 각층 모두 우주만 새겼을 뿐이며, 2층에서 그 높이와 폭이 급격히 줄어들고 있다. 옥개석은 모두 동일한 형식으로 아래에 3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처마는 모서리로 가면서 완연한 곡선으로 반곡되어 있고 지붕면의 물매는 완만한 편이다. 탑신과 옥개석에서는 신라계통 석탑의 형식을 지니고 있으나 규모가 매우 작고 특히 기단부가 약화되었다. 옥개석도 층급이 3단으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모습으로 보아 고려시대 석탑의 조형이 약화되던 시기에 조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갑사 향적당(香積堂)...]

향적당은 대웅전 북쪽, 담장으로 구획된 영역에 서향으로 위치하고 있다. 도리통 5간, 양통 3간의 一字形 평면을 지니고 있는데, 뒤편 일부 지붕을 맞배지붕으로 한 것으로 보아 원래 ㄱ자형 또는 ㄴ자형으로 평면을 확장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사로 사용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1984년에 지은 건물이다. 기단은 자연석을 이용한 외벌대이며, 초석은 막돌을 이용하고 있다. 기둥은 비교적 굵은 부재를 사용하고 있다. 외1출목의 주심포식, 즉 주삼포식(柱三包式)으로 주간에는 판재 형태의 화반을 두었다. 지붕은 겹처마로 팔작지붕이나 후면 일부에는 맞배지붕이 혼합되어 있다.

[갑사 보장각(寶藏閣)...]

보장각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홑처마에 맞배지붕을 올린 건물이며, 창호는 전면의 어칸에만 달았다. 안에는 보물인『월인석보판본』이 모셔져 있는데, 원래는 논산 쌍계사에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월인석보판본은 1569년(선조 2)에 새긴 월인석보 판목은 우리나라에 남은 유일한 것으로 훈민정음을 창제하고 나서 한글을 이용해 처음으로 지어낸 글인만큼 국어학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월인석보는 1459년(세조 5)에 세조가 세종이 지은『월인천강지곡(月印千江之曲)』을 본문으로 하고 자신이 지은 『석보상절(釋譜詳節)』을 설명 부분으로 하여 합편한 책으로 석가모니의 일대기와 공덕을 칭송한 것이다. 또한, 세종과 세조 2대에 걸쳐 임금이 짓고 편찬한 것으로 판각기법이나 인출 솜씨 등을 보면 조선초기 불교문화의 정수라고 할 수 있다.

[갑사 요사채 쪽문을 새로 만들고...]

[요사채 담장밖엔 창고 같은 예쁜...]

[갑사 표충원(表忠院) - 문화재자료 제 52호...]

표충원은 대웅전이 위치한 갑사 중심 영역의 북쪽 계곡을 건넌 곳에 남향하여 위치하고 있다. 표충원은 조선 1738년(영조 14)에 왕명으로 지은 사당으로 임진왜란 당시 승병을 일으켜 왜적을 격퇴한 서산대사 휴정, 사명대사 유정, 영규대사 기허의 공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원래 표충원은 갑사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1845년(헌종 11) 당시 충청도 관찰사 강시영이 관비(官婢)를 모아 옮겨지었다. 이때의 기록이 사당 안에 <公州甲寺騎虛大師書院移建文>이라는 제목의 현판으로 남아있다. 이후 고종 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1894년(고종 31)에 복원하여 갑사에서 관리하고 있다.

표충원은 사당을 중심으로 앞쪽에 넓은 마당이 있으며, 주변을 담장으로 에워쌌다. 사당과 중심축을 맞추어 담장 정면에는 일각문을 두었고, 앞마당의 동측에는 위당 정인보 선생이 지은 글로 1973년에 세운 승병장영규대사기적비(義僧將靈圭大師紀蹟碑)가 있다. 표충원 사당은 막돌을 이용해 쌓은 나지막한 기단 위에 세워졌다. 도리통 3간, 양통 1간 반의 장방형 평면을 지닌 작은 건물로 정면에만 모든 간에 두 짝의 여닫이문을 달았을 뿐 측면과 후면에 벽을 들여 감실형으로 구성했다. 내부는 통간으로 후면 벽과 양 측면 1간의 벽에 의지해 ?형으로 불단을 만들었다. 그리고 후면 벽에는 각 간에 하나 씩 휴정, 유정, 기허대사의 영정을 모셨으며,

동쪽 벽에는 현은대화상을 비롯한 11분 승려의 영정을, 서쪽 벽에는 허암당대선사를 비롯한 네 분 스님의 영정을 모셨다. 초석은 막돌초석이며 기둥은 원주이고, 기둥 상부에는 이익공식 짜임으로 보를 받도록 하였으며, 주간에는 원형의 화반을 두었다. 지붕은 겹처마의 맞배지붕으로 박공부에는 풍판을 달았다. 익공은 초익공과 이익공 모두 앙서형으로 쇠서 위에 연화를 초각했는데, 건물의 규모에 비해 쇠서가 커 과장된 모습을 지닌다. 행공은 교두형으로 직절한 단부 아래를 둥글게 접었다. 또한 보머리에는 봉취형을 조각해 끼웠다. 가구는 무고주5량으로, 보는 휜 부재를 적절히 사용하였다. 바닥에는 전체에 우물마루를 들였다.

천장은 연등천장인데 휴정과 유정, 기허 세 분의 영정을 모신 후면에는 우물천장 형식으로 닫집을 꾸몄다. 사당 안에는 도광 25년(헌종 11년, 1845년) 을사 8월에 경월 쾌수가 쓴 <公州甲寺騎虛大師書院移建文>이 있다. 당시 충청도 관찰사였던 강시영이 표충원을 옮겨 지은 것을 기록한 것이다. 또한 그 아래는 어제(御製) 현판이 걸려 있다. 현재의 건물은 건축 양식으로 보아 조선 말 이후의 것으로 보이며,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폐되었다가 복원된 1894년(고종 31), 또는 그 이후에 지어진 것으로 보인다.

[갑사 성보보장각()...]

[갑사 사적비(事蹟碑)...]

갑사 사적비는 자연석을 지대석으로 삼아 비신(碑身)을 세우고 그 위에 단순한 형태의 옥개(屋蓋)가 올려져 있다. 1654년에 여주 목사 이지천이 비명(碑銘)을 짓고 건립하였다. 현재는 마멸이 심한 편으로 비문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이 비는 조선 현종 원년(1659년)에 세운 것으로 갑사의 창건과 역사를 적고 있다. 비문은 여주 목사 이지천이 짓고 전 공주목사 이기징이 글씨를 썼다. 전체 높이는 337cm이고, 비신은 높이 225cm, 너비 133cm, 두께 49cm이다. 천연의 바위 위에 홈을 파고 바로 비신을 세웠으며, 위에는 지붕형의 옥개를 올렸다. 대리석으로 만든 비신에는 사면에 비문을 새겼다.

정면과 후면 상부에는 전면에 6자, 후면에 5자로 나누어 ‘公州鷄龍山甲寺' 문장 속에서는 '岬寺'라 적고 있다. '事蹟碑銘’이라는 비명(碑銘)을 전서체(篆書體)로 써서 새겼다. 비문은 비교적 잘 남아 있는 편이나 일부 손상된 부분이 있다.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비석 속에 금이 들어 있어 그것을 파내기 위한 소행이었다고 한다. 비의 좌측면에는 건립에 참여한 승려와 시주자, 石工, 刻工 및 冶匠의 명단을 기록하였다. 옥개석은 장방형 평면의 사모지붕 형식으로 아래에는 앙련과 함께 모서리에 추녀를 조각했다. 처마는 완연하게 반곡된 모습이다. 지붕면은 경사가 완만하나 추녀마루에 용을 새겼고, 정상에는 별석으로 가공한 보주를 올렸다.

[갑사 석조약사여래입상(石造藥師如來立像)...]

석조약사여래입상은 현재 갑사에서 동쪽 계곡으로 약 100m 쯤 올라간 곳에 있으나 원래는 갑사 뒷산의 사자암에 있던 것이라고 한다. 전체 높이 141cm이며 신체의 비례와 구성, 조각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추정된다. 상호는 갸름하고 긴 편이며, 위에 커다란 상투 모양의 육계가 있고, 목에는 三道를 표현하였다. 오른손은 가슴까지 들어올리고 있으며, 왼손에는 약함을 들고 있어 약사여래임을 알 수 있다. 신체는 어깨가 상호에 비해 넓은 편이다. 법의는 통견으로 가슴을 약간만 노출시키고 있으며, 무릎 아래까지 길게 늘어져 있다.

[내려오는 길목에 작은 폭포도 있고...]

[갑사 부도군...]

갑사 부도군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스님들의 묘탑(墓塔)이 한 곳에 집중되어 조성되어 있다. 대부분이 단순한 석종형(石鐘形)이지만, 옥개(屋蓋)를 올린 것도 몇 기(基) 있다.

[갑사 부도군...]

[갑사 사천왕문 안쪽...]

[갑사 사천왕문(四天王門)...]

내가 거꾸로 돌아나와 처음 맞이하게 되어있는 사천왕문을 제일 나중에 나오게 되었다. 갑사 사천왕문은 2002년에 신축한 건물이며, 도리통 3간, 양통 2간으로 장대석으로 쌓은 나지막한 기단 위에 세워져 있다. 공포는 외1출목의 주심포식(주삼포식)이며, 지붕은 겹처마에 맞배지붕으로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조선시대 후기 천왕문의 일반적인 법식을 따르고 있으나 기단에 사용된 장대석의 치석 상태, 깔끔하게 치목된 반듯한 부재 등 세부적인 기법에서 현대적인 모습을 물씬 풍기고 있는 건물이다. 2004년 7월 현재 아직 천왕상은 모시지 않았다.

[해는 서산에 지고 날은 어두워 지니 빨리 귀가를...]

[천안역전에 위치한 "후에버"라는 커피?...]

갑사를 다 돌아보고 천안으로 출발을 한 시간은 오후 7시가 훨씬 지난 시각이다. 서둘러 지방도로를 이용해 천안역전으로 달려갔다. 오늘 하루를 같이한 성산이 천안에서 기차를 타고 곡성으로 가야하기 때문이다. 나는 성산이 떠나는 것을 보고 가려 했으나 10시 기차이기에 시간이 많이 남아 동생이 하고 있는 '후에버' 라는 커피?에서 진하게 커피를 마시고 잠시 오늘의 여행과 또 다음을 약속하며 나도 바쁜 걸음으로 서울로 향해야 하는 발걸음은 그리 유쾌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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