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요약>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위하여 죽기까지 사랑하는 마음이 나도 기름의 향기로 나타났습니다. 신약시대 마리아가 예수님께 부은 순전한 나드 향유를 부은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죽기까지 사랑하고자 하는 신부들에게서 나는 향기인 것입니다.
그리고 솔로몬도 신부를 위하여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죽기까지 사랑하는 몰약의 향기를 품어냅니다. 이것 또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의 사랑의 향기인 것입니다.
그런 죽음을 통해서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는 고벨화송이의 향기를 술람미 여인은 맡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연인들이 서로 사랑하는 상태에서 향기를 경험하고 있고, 엔게디 샘에서 터져 나오는 생수와 같은 영적 시원함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들에게 성령을 보내주심으로 오늘날 우리들은 성령의 생수를 마시고 있는 것입니다.
15절,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제 술람미 여인의 사랑의 노래를 듣고 솔로몬이 화답의 노래를 합니다.
15-17절을 통해서 비둘기,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백향목, 잣나무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데이트 장소가 숲속으로 생각됩니다.
이런 숲속의 풍경들을 마음속으로 그리면서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숲속에서 서로를 향해 교창으로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9절과 같이 ”내 사랑아“(히, 라야), 명사, 여성, 단수 (라흐야티)로 왕인 솔로몬이 시골 여자인 술람미 여인에게 거리감을 없애기 위하여 친구, 동료로 다가오기 위하여 사용한 호칭이라고 말씀을 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을 향해 ”어여쁘다“(히, 야페)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합니다.
이후에 솔로몬은 계속 이 단어를 즐겨 사용하는데 (아 4:1,3,7,6:4), 이것의 의미는 외모적인 아름다움도 있지만 ”맑다, 깨끗하다“의 의미도 있습니다.
슥 9:16절에, 구속받은 백성의 아름다움을 나타낼 때도 이 단어를 사용한 것으로 보아 술람미 여인의 외형적인 아름다움 뿐만 아니라 구속받아 죄의 문제가 해결된 술람미 여인의 영적인 깨끗함, 맑음으로 인하여 어여쁜 모습인 것입니다.
11절-14절에서 그녀는 나도향, 몰약향, 고벨화송이의 향기를 맡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향기이므로, 그녀는 영적으로는 십자가의 피로 구속을 받은 상태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여쁘다를 두 번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 반복은 강조기법입니다.
전체를 보아도 어여쁘고 신체 부분을 보아도 어여쁜 것입니다.
원어를 보면, ”어여쁜 내 사랑아, 보라 어여쁜 비둘기 같은 눈“입니다.
→ 주님께서 믿는 우리를 보는 시각입니다. 지금도 우리를 향해 ”어여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눈을 비둘기로 비유했을까요? ”비둘기 눈“이 아닙니다. 술람미 여인의 눈이 비둘기 같다는 것입니다.
비둘기는 파트너를 바꾸지 않는 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므로 죄의 문제가 해결된 눈이며 순수결함의 눈인 것입니다. 한곳 오직 솔로몬만 바라보는 눈인 것입니다.
제물로 드려지는 정결한 새이므로 정결한 눈인 것입니다. 마치 바드랍빔(히, 빠트 랍빔- 많은 무리의 딸들) 문 곁에 있는 연못같이 말입니다 (아 7:4). 맑은 눈인 것입니다. 순수한 눈이기도 합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흩어져 여기 저기 관심을 가지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리는 그런 눈과는 다른 눈인 것입니다.
16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 나의 사랑하는 자(히, 도드, 도디)는 ”가장 사랑하는 자, 아저씨, 삼촌“이란 뜻이 있습니다. 13, 14절에서도 사용된 단어입니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부를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15절 솔로몬의 노래에 대한 술람이 여인의 화답의 노래인 것입니다.
그녀는 솔로몬이 자신에게 한 것 같이 똑같이 솔로몬을 ”어여쁘다“고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 예수님께서 ”어여쁜 것“은 술람미 여인과 마찬가지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 그리고 화창하다고 노래합니다. 화창하다(히, 나임)는 것은 즐겁다, 아름답다의 뜻이 있습니다. 영어성경에는 ”즐겁게 하는, 사랑스러운“ 등으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봄날처럼 화창한 모습인 것입니다.
악한 것에 잡혀 있으면 결코 화창할 수 없습니다. 우울한 것입니다.
그들의 영적인 상태가 화창하고 실제 데이트 분위기도 화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말없이 마치 싸운 것처럼 심각한 모습으로 있으면 화창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과의 관계가 화창했으면 좋겠어요. 즐거웠으면 좋겠어요.
날마다 심각한 분들이 많습니다. 뭐 응답해 주지 않는다고 삐지면서 떼를 쓰고, 내 놓으라고 윽박지르지 말고요~~
→ 화창하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해야 가능한 것인데, 아직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부족하거나 죄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침상 (히, 에레스)은 원적으로 실제 큰 침상, 침대의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실제 숲속에 ① 침대와 같은 큰 의자, 벤치와 같은 곳에서 서로 데이트 하는 모습이거나 또는 ② 침상이 푸르다고 노래하고 있으므로 푸른 풀밭을 침상 삼아 함께 하늘을 바라보며 누운 모습일 것입니다. 그 이유는 17절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17절, 우리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서까래로구나
그들은 숲속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단둘이서 숲속에 임시로 놓인 긴 침상 또는 푸른 풀밭을 침상 삼아 누워서 백향목과 잣나무가 우거져 마치 지붕처럼 되어 있는 모습을 노래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향목은 굵으니 들보로, 가지가 가늘은 잣나무는 서가래로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백향목은 왕을, 잣나무는 고관들을 상징하고 있으므로 (왕하 19:23,슥 11:2), 그들의 신분과 데이트 분위기에 어울리는 나무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백향목과 잣나무는 성전 내부를 꾸미는 나무이기 때문에 (왕상 6:15), 영적으로 성소와 지성소의 장소인 것입니다. 이런 장소가 교회 성전이 될 때가 많습니다.
두 연인은 실제적으로도 정말 목가적인 데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청순한 데이트인 것입니다. 우리들도 주님과 아무도 방해받지 않는 이런 곳에서 데이트를 해야 합니다. 나만의 성소와 지성소에서, 깊은 성전 숲속에서 풀밭이나 벤치에 앉아 깊은 묵상기도를 통하여 가능할 줄 믿습니다.
<소결론>
술람미 여인과 같은 우리 주님과 데이트를 해보고 싶지 않습니까?
식탁 교제도 하고, 서로 안기기도 하며, 푸른 나무 아래서 벤치에서 앉아서 또는 푸를 잔디를 침상 삼아 하늘을 보고 눕기도 하면서 말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 가슴 사이에 얼굴을 파 묻고 안겨져 있는 모습을 그려보세요. 주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모습입니다. 놓치고 싶지 않는 떠나고 싶지 않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향기가 나를 통해서 풀풀 풍겨져 나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죄로 인하여 똥 냄새 풍기는 사람은 결코 주님의 품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죄의 문제가 해결된 비둘기 같은 눈으로 주님을 바라보며, 마침내 주님의 향기가 내 향기가 되어 나도향기, 몰약향기를 풍기고, 고벨화송이와 같은 모습으로 주님의 품 안에서 주님의 향기를 풍기는 신부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