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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와 회복을 꿈꾸는 영혼들에게 띄우는 편지(통권 75호)
예 수 사 랑 • 가 족 사 랑
12권 1호 2011. 7. 1. Daum Cafe: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세리 삭개오에게 배우는 인생의 지혜
자살이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습니다. 카이스트교수가 연구비횡령문제로 자살했고 현직대학총장이 관료시절비리와 은행예금인출과정에 얽힌 사건으로 자살을 했습니다. 한국문화는 수치심의 문화입니다. 부끄러운 일을 했다는 세간의 비난을 견디지 못해서 자살을 한 것처럼 보입니다. 자살을 통해서 일정부분 명예를 회복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는 인내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을 국민들에게 주었습니다.
누가복음 19장에 나오는 삭개오도 부끄러운 인생을 살았던 사람입니다. 자신의 출생도, 성장배경도, 직업도 모두 부끄러웠습니다. 특히 매국노라고 비난받는 세리의 직업은 무척 수치스러웠습니다. 그가 예수님을 만나서 선언했습니다. “남의 물건 토색한 것을 네 배나 갚고 재산의 반을 빈자를 돕도록 사회에 환원하겠습니다.” 그의 결단은 아름답습니다.
성공적인 인생을 산 사람들은 치열하게 인생을 살아서 그 자리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비록 한 두 번의 결정적인 실수를 했다고 해서 인생을 함부로 포기하는 것은 너무나 안타깝습니다. 모든 인생은 부끄러운 선택을 할 수도 있고 해오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평생 온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척이나 어리석은 일입니다. 만약 이들이 가롯유다와 같은 자살을 선택하지 않고 세리장 삭개오의 선택을 했더라면 그들의 남은 생애는 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웠을 것입니다.
세계적인 선교단체인 국제 YWAM(Youth With A Mission)의 총재인 로렌 커닝햄목사는 신뢰했던 제자가 결혼 후에 같은 선교단체 회원과 성적으로 부정한 일을 하게 되어서 선교단체를 떠나게 되었습니다. 로렌목사는 그를 찾아갔고 그로 하여금 돌아오게 했고 선교단체에서 계속 중요한 일을 맡으면서 충성스럽게 선교사역을 계속하도록 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온전했기에 주님의 일을 한다고 생각한다면 그런 사람은 극히 소수이고 아무도 없을지도 모른다. 부족하지만 주님은 우리를 사용하신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큰 은혜이다.”
*** 김영근목사<예수사랑, 가족사랑 발행인>***
2011년 7월 가족치유회복중보기도
2011년을 반을 보내고 반을 남겨두게 되었습니다. 사회적인 양극화가 심각한 것같습니다. 경제는 회복되고 발전되었는데 신자유주의 경제의 영향으로 빈익빈 부익부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습니다. 이제는 사회통합의 문제가 중요한 사회이슈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믿음의 선진들의 삶을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적은 수입에도 감사할 수 있고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면서 기득권을 포기하는 선한 영향력이 기독교인들의 가정에서 먼저 시작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교회도 교인들도 양극화되는 것같아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습니다. 이 땅에 건강한 가정들이 많아지도록 더욱 간절하게 기도를 모읍시다.
1. 기도시간: 가족중보기도는 오전 6시, 낮 12시, 저녁 9시에 개인이나 그룹별로 1회 10분 이상씩 하면 좋습니다. 하루 한 번도 좋습니다.
2. 중보기도참여자: 가정을 위해 기도하기를 원하는 누구나(개인, 교회, 기관별로) 참여할 수 있습니다. 모든 기도의 사람들을 환영합니다.
3. 기도의 대상: 살고 있는 <시⦁군⦁구>에 있는 가정들이 기도의 대상입니다. 남양주시에 사는 저의 기도대상은 <남양주시>의 가정들입니다.
4. 기도의 제목
1) 일반기도제목
첫째, 가족식구들의 상한 마음을 건강한 마음으로 변화시켜주옵소서!
둘째, 주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가족 안에 용서를 실천하게 하소서!
셋째, 하나님의 시각으로 바라보며 건강한 자아상을 갖게 하소서!
넷째, 가족식구들의 생각이 성경적인 생각으로 바꿔지게 하소서!
다섯째, 언어가 불평과 원망에서 감사와 축복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섯째, 가정의 신맛(정죄)이 단맛(사랑, 격려)으로 바뀌게 하소서!
일곱째, 우리들의 적대감이 환대하는 마음으로 바뀌게 하소서!
여덟째, 가족에게 두려움이 떠나고 주님의 평강이 임하게 하옵소서!
2) 특별기도제목
첫째, 이 땅이 사회양극화를 극복하고 사회통합의 길을 걷게 하소서!
둘째, 삶의 현장에서 자족을 배워서 감사의 삶을 살게 하소서!
셋째, 교회지도자들이 청빈한 삶으로 복음의 디딤돌이 되게 하소서!
넷째, 여름철에 신앙인들이 쉼과 깊은 말씀의 은혜를 경험케 하소서
김영근의 상담자의 마음 1
하나님의 줄로 세워진 마음
내 자신을 하나님의 줄로 재어보면 어떨까? 내가 살아온 인생을 하나님의 자로 재어보면 어떤 결과가 나올까? 현재의 나의 마음을 하나님이 줄로 재어보시면 무슨 말씀을 하실까?
하나님은 선지자 아모스에게 이스라엘백성을 하나님의 다림줄로 재어보고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벌하시겠다고 말씀하셨다(아모스 7:7-9). 여기서 다림줄은 건축기사들이 건물이나 벽이 똑바로 세워졌는가를 측정하는 도구이다. 선지지 아모스가 활동할 때는 북왕국 여로보암2세가 통치하던 시절로 제2의 솔로몬시대라고 불릴 정도로 나라의 부강을 자랑했던 시절이었다. 주변의 약소국들은 조공을 바치기도 했다.
이때에 하나님이 다림줄로 재어보겠다는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외면을 재어보겠다는 것은 아니다. 이는 철저하게 사람들의 내면을 재어보겠다는 말씀이셨다. 너희들은 왕부터 시작해서 모든 지배계층들이 태평성대라고 자랑하는데 진정으로 너희 백성들 가운데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실천되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는 말씀이셨다.
하나님이 내린 다림줄은 선지자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서 왕후보를 선택할 때에 이미 활용되었다. 왕의 후보를 선택하기 위하여 이새의 집을 방문한 사무엘에게 장자 엘리압은 진정으로 호감이 가는 인물이었다. 그래서 왕으로 기름을 부으려고 하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는 적당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말씀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보는 것은 외면이 아니라 중심을 본다.”이 말에 순종해서 사무엘은 열외인 여덟 번째 아들 다윗을 왕의 후보로 선택한다.
상담자는 스스로의 마음을 먼저 하나님의 줄로 재어보고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줄로 재어보는 지혜가 필요하다. 부모가 자녀들을 바라볼 때도 부모의 줄이 아닌 하나님의 줄로 바라보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가 만들어 놓은 줄로 자신도 재어보고 다른 사람도 재어본다. 자기가 만든 측정기준은 늘 자신에게 유리하게 만들어진 것이다. 그 줄로 다른 사람도 재어보고 그 결과에 대해서 평가하는 것이다. 측정기준이 잘못되었다면 그 결과에 대한 평가도 잘못일 수밖에 없다.
필자가 지리산지역에서 목회했을 때 정신박약아로 태어나서 한평생을 누워지내는 한 자매를 방문했다. 가까운 곳에 개척교회가 시작되어서 그 자매는 어머니와 함께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정박아로 태어난 딸을 어머니는 부끄러워하면서 오랫동안 숨겨서 키워왔다. 본인 스스로도 쓸모없는 인생으로 생각을 하면서 그냥 목숨을 부지해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 자매가 예수를 믿었을 때 자신을 세상의 줄이 아닌 하나님의 줄로 재보기 시작했다. 그 어머니도 자신의 딸을 하나님의 줄로 재어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 때에 비로소 자신과 자신의 딸이 귀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세상사람들의 줄로 보았을 때 정박아 딸과 그의 어머니인 자신은 저주였고 창피한 것이었는데 하나님의 줄로 보았을 때는 귀한 생명이었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자녀였다.
상담공부를 처음 시작하는 목회자들은 상담을 권면으로 오해할 때가 많다. 그들은 익숙한 설교말씀을 통해 권면하려고 하고 권면을 빼놓은 상담은 상상하지를 못한다. 그런데 상담을 배워가면서 권면은 상담의 과정에 필요하지만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상담자들이 하나님의 다림줄로 세워진 마음을 가질 때에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배우는 경우가 참으로 많다. 그들은 고백한다, “인생이 간단한 것이 아니구나. 인생이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구나. 이렇게 망가진 사람인데도 내가 배울 아름다운 교훈을 많이 간직하고 있구나!”
우리 모두는 상담자이다. 성령님은 여러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그중에 하나가 상담자이다.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게 되면 우리는 좋은 상담자가 될 수 있다. 나이든 할아버지에게 어린 손녀딸은 좋은 상담자이다. 외로운 할아버지의 과거의 경험담을 재미있게 듣고 있는 그 손녀딸은 좋은 상담자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인생살이에서 실패하고 돌아온 아들에게 어머니는 얼마나 좋은 상담자인가! 이 때 상담자는 하나님의 심정인 측은지심으로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면 할아버지의 이야기가 재미있고 할아버지가 귀한 분으로 생각된다. 실패한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픔을 나누는 어머니는 아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준다.
하나님의 줄을 가지고 모든 인생을 상대하다보면 모든 인생은 우리의 스승이다. 내가 악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얼마나 따뜻한 품을 간직하고 있는지 모른다. 내가 그 사람은 참 이기적이고 건방지다고 생각했는데 그에게 발견하는 인생의 풍성함은 종종 나를 감동시킬 때가 있다.
가정사역자 정동섭 칼럼 1
남녀의 차이를 알면 가정이 잘보인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어머니를 마치 개인의 소유물처럼 다루는 것을 보며 자랐다. 나의 아버지는 어머니를 신체적으로 구타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준비한 반찬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어머니의 말이 당신의 기분에 거슬렸다 싶으면 예고없이 밥상을 둘러엎곤 하였다. 어떤 일로 어머니와 의견충돌이 있을 때 아버지는 언제나 언성을 크게 높이심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셨다.
아버지와 아들은 밥상에서 식사를 했고 어머니와 딸들은 남자들이 식사한 다음에 먹거나 방바닥이나 마루바닥에 앉아서 식사했다. 장유유서나 남존여비 사상은 어린이는 어른 앞에서 그리고 여자는 남자 앞에서 조용히 순복할 것만을 요구했다. 위계질서는 모든 사람에게 분명한 것이었다. 특히 여성은 감정을 표현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주장할 수 없었다.
나는 이처럼 유교의 전통적인 가치관이 지배하는 한국의 전형적인 양반가정에서 자라났다. 내가 자라난 가정의 문화는 삼강오륜에 따르는 남존여비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따라서 여성으로 태어난 사람은 소녀 시절에 부모에게 순종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을 지아비로 모시고 노년에 이르러 과부가 되면 재혼이 금기시 된 문화 속에서 아들의 눈치를 보며 생활해야 했다.
가정에서의 생활은 가장 밖의 확대사회에도 반영된다(Nock, 1987, p. 6). 우리 모두는 가정문화의 산물이다. 크리스천 정신과 의사인 스캇 펙(1991)이 관찰한 대로,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갖는 관념이나 남녀관은 모두 모델링(본뜨기)을 통하여 우리에게 영향을 미쳤던 근원가정(family of origion: 출신가정)에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나는 어린 시절 가정에서부터 여성을 멸시하고 무시하도록 서서히 사회화되었다. 충청북도 시골에서 자라난 나는 여러 첩을 거느리고 사는 이웃 아저씨가 집안싸움으로 고통을 받는 것을 보면 ‘여자가 문제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여자 쪽을 탓했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이 말해주듯 모든 책임은 여인의 손에 특권은 남자들의 손에 달려있는 것으로 알아왔다. 한국의 유교문화는 나에게 남자는 항상 옳고 여성은 열등하고 잘못되었고 악한 존재라고 가르쳤다.
미개하고 미신적인 가정에서 10남매란 대가족의 중간아이로 이렇다 할 소속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란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가 ‘기독교복음침례회’라는 간판을 내건 이단집단 구원파에 빠져들게 되었다.
나는 남성우위론자로 성장했다. 그런데 여성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내가 이단의 앞잡이로 활동했던 8년 동안 더욱 강화되고 굳어졌다. 교주의 측근에서 통역과 섭외업무를 담당했던 나는 그의 비인격적인 생활양식을 보고 그대로 흉내냈다.
나는 구원파에서 아내를 만났는데 교주가 그의 아내를 대하듯 나도 내 아내를 마구 다루었다. 결혼이 파탄으로 끝나지 않았던 것은 아내가 성격장애자인 남편에게 (장모님이 장인어른에게 하듯)순복하는 태도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결혼한 후 처음 6년 동안 처가식구들이 우리 집을 방문한 뒤에 아내에게 하는 말은 “너는 심장을 빼놓고 사는 거냐? 어떻게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하느냐?”는 것이었다.
그 후에 나는 8년 동안 맹목적 충성을 바쳤던 구원파를 1977년 아내와 함께 떠나게 되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 부부를 불쌍히 여겨 이단의 굴레에서 건져주신 것이다. 이단의 교리로 세뇌된 나는 그 뒤 3년 동안 혼란의 와중에서 방황하다가 1980년 서울 ‘사랑의 교회’ 여름수련회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내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상처투성이인 나를 영접해 받아주셨다(롬15:7).
하나님의 받아주시는 사랑을 경험한 나는 우선 아내와 어머니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었다. 여성관, 즉 여성을 보는 시각에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아내를 나와 같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남자와 여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갈3:28)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여성을 얕잡아보고 무시하던 태도가 후회와 용서를 비는 마음, 사랑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 그리고 존경심으로 바뀌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 주님께서는 내가 침례신학대학 통역강사로 사역할 때 만났던 두 명의 여자교수를 비롯해 여러 명의 여성 친구들을 허락해 주셨다. 쉘톤(Shelton)교수와 부쉬만(Bushman)교수의 따뜻한 우정과 돌봄이 없었다면 나는 어린 시절과 이단에서 생활하면서 받았던 수많은 정서적 상처를 치료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나의 어머니와 아내, 그리고 앞에서 언급한 두 명의 미국인 교수를 나는 내 생애에서 인격적으로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꼽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중요한 타인을 통하여 나를 어루만져 주셨고 사람을 보는 시각을 바꿔주셨다. 40년이라는 짧은 생애를 통하여 나는 권위와 순종에 의해 유지되던 부부관계에서 사랑과 신뢰를 기본으로 하는 대등한 동반자관계로의 전환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다른 문화권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여성은 남성에 의해 늘 천대를 받아왔다. 여성은 합리적 대화를 나눌 수 없는 상대로 단순한 노리갯감이나 성적유희의 대상, 무보수의 요리사, 집이나 지키는 사람, 아이나 돌보는 사람, 그리고 머리가 텅 빈 이등인간으로 취급대기가 일쑤였다.
인간의 사용단어 가운데 “당신 생각에는 어떤 단어가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랑, 행복, 가정, 하나님, 건강 등을 말한다. 『관계중심전도』의 저자 톰슨(Oscar Thompson: 1980) 목사는 사람의 이름, 즉 고유명사를 제외하면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관계”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과 행복이 중요한 것이 사실이지만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랑도 행복도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과 인간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모든 관계 가운데서 우선적인 관계로 제시하고 있다(시42:1-2, 엡5:1, 18). 그러나 수평적인 인간관계 가운데서 근원적이고 본능적인 관계는 역시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다(엡5:22-33, 골3:18-19). 남편과 아내의 친밀한 관계에 비하면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 주종관계같은 것은 부차적인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엡6:1-9, 골3:20-4:1).
베드로는 남편들에게 “자기 아내가 자기보다 연약한 여성이라는 것을 잘 이해하고 함께 살아가며 생명의 은혜를 함께 상속받을 사람으로 여기고 존경하십시오”(벧전3:7, 공동번역)라고 권면한 적이 있다.
사랑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주는 것에서 시작된다(롬15:7). 남녀가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결혼을 비롯한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이 된다. “남녀관계보다 우리의 감흥을 일으키는 주제는 없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는 이런 저런 모양으로 우리 모두의 생활가운데 대부분의 시와 소설, 대부분의 범죄, 대부분의 고상함과 대부분의 잔인함, 대부분의 환희와 대부분의 권태의 배후에 깔려있다.
창세기 1장 말씀에 의하면 “인간 안의 하나님의 형상은 인간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되었다는 데서 발견된다. 인간은 외로운 개인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나’와 ‘너’로서 서로 대면하는 두 인격체로 존재하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만 하나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의미는 우리가 관계를 누리도록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융과 떠나는 심리치료 여행 1/ 김영근
칼 융을 새롭게 만나다.
심리학을 공부하다보면 융의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프로이트를 공부하게 되고 애들러를 공부하면서 곧 융을 공부하게 됩니다. 목회상담학을 공부하는 신학도들이나 일반대학원에서 상담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은 융의 심리치료 이야기를 듣게 됩니다. 또한 목양사역을 하면서 목회에 꼭 필요한 목회상담분야를 조금 깊게 공부하려고 할 때에도 융을 만납니다.
칼 구스타브 융(Carl Gustav Jung)은 의사이며 심리학자로서 1875년 7월 26일에 스위스에서 태어났고 1961년 6월 6일에 사망합니다. 그는 바젤대학교 의학심리학 교수, 취리히 연방과학기술전문대학 심리학 교수 등을 엮임했으며 그의 대표적인 책으로 <인간과 무의식의 상징> 이라는 책이 있고 많은 책을 저술했습니다.
목회자의 입장에서 융은 목사의 아들이라는 면에서 친근감을 느끼게 됩니다. 대부분의 신학생들도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되기에 목회자의 아들인 융에 대한 친밀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향력이 있는 목회자들이나 목회상담학자들의 융에 대한 이해와 통찰력에 대한 감화를 받으면서 융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같게 됩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목회자와 목회상담학자로서 치유상담에 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신학교에서 가르쳐왔고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강의와 임상사역을 해왔습니다. 치유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치유기제는 고백(Confession, Opening Up)입니다. 융은 이러한 면에서 고백의 중요성에 대해서 강조를 했습니다. 그는 사람들이 정신의 비밀(psychogenic secret)을 들어내지 않고 소유하는 것은 심령의 독(psychic poison)을 간직하고 있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특히 고백에 관한 융의 견해는 오늘날 알콜중독자들의 치료를 위한 가장 효과적인 모임인 AA(익명의 알콜중독자 집단치료모임)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에서 더욱 가치있게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AA모임에 참여하는 알콜중독자들은 자신의 알콜섭취로 인하여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많은 피해를 주었다는 사실을 모임에서 계속해서 고백하게 함으로 치유를 시작하게 됩니다.
융은 사람들의 인격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인격성장에 대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결정론이라고 합니다. 어린 시절(5세 이전)의 경험은 일생을 지배한다는 견해입니다. 특히 어린 시절에 성장과정(주로 부모들)에서 받은 영향력이 사람들의 정신건강을 일생 동안 지배한다는 프로이트의 견해에 대해서 융은 중년기 이후에도 성장이 가능하다고 했습니다. 이러한 견해가 융이 프로이트의 결정론을 벗어나 다른 심리치료자의 길을 걷게 된 동기 중의 하나가 되기도 했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섭리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부모를 중심으로 한 인생초기 환경의 영향력이 사람들의 일생을 지배한다는 것을 강조한 프로이트의 견해를 기독신앙인들이 받아들이기는 힘듭니다. 아동기 이후에 예수님을 영접하고 예수님의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결단하는 사람들의 생애에서 놀라운 변화를 목도하는 신앙인들에게는 인격성장에 관한 융의 견해가 훨씬 매력적입니다.
융은 인간의 인격성장과정을 자아(自我, Ego. 의식)의 단계에서 자기(自己, the Self, 의식+무의식)의 단계로 변화의 과정이라고 말했고 이것을 개성화의 과정이라고 설명합니다. 자아의 단계에서 머무는 사람들은 자신의 외적인 영역에 집중합니다. 세상에서 유명한 사람들이 되려고 하고 늘 의식적인 면에 집중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의 사람인 페르소나에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이런 사람들이 목회자가 되어 성공하더라도 세상적인 명예욕과 권력욕과 물질욕 등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런데 자기의 단계로 들어선 사람들은 자신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그렇다고 그들이 자신의 외형적인 관계를 무시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융은 중년기(35-40세)이후의 삶은 자아탐닉에서 자아초월로 가는 자기의 단계로 들어서야 행복하다는 했습니다. 융의 견해는 인생살이의 반을 넘긴 사람들, 즉 인생 팔십 중에서 사십을 산 사람들은 자신의 외면보다는 내면의 삶에 집중해야 행복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기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나이가 사십이 넘은 사람은 우리들의 겉사람보다는 속사람에 집중해야 행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사도도 겉사람은 나이가 들어서 후패하지만 속사람은 날로 새롭다(고후4:16)는 말씀을 하면서 진정한 행복은 속사람의 변화임을 강조했습니다.
종종 융의 견해에 견주어서 나의 단계를 살펴보면 부끄럽지만 희망을 가집니다. 나는 여전히 외면지향적으로 자아의 단계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자기로 변하는 과정에 대한 가치를 부여하면서 조금씩이나마 나의 내면을 돌아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합니다.
한 때 융에게 상담하러 온 미국의 큰 사업가가 있었습니다. 그 분은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신경증으로 시달리면서 잘못 이루는 불면의 시간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세계적인 심리치료사인 융을 통해서 자신의 정신적인 질환을 치료받기를 원했습니다. 융은 먼 곳에서 자신을 찾아온 내담자에게 오두막에서 가서 여러 날 동안 주기도문을 계속해서 암송하도록 권면을 했습니다. 융을 만나 특별한 심리치료의 기법을 기대했던 사람에게 행했던 융의 치료방법은 주기도문을 암송하면서 외형적인 삶을 떠나 내면의 삶에 집중하는 삶의 변화였습니다.
융은 신앙을 통한 심리치료의 긍정적인 효과를 강조했습니다. 융의 견해는 신앙생활은 정신적인 질환의 치유과정에 소중하다는 것입니다. 프로이트는 기독교인들을 포함한 종교인들이 신앙을 떠나야만 진정한 치유가 일어난다고 했습니다. 프로이트의 견해는 사람들이 유아기에 가졌던 주요 대상인에 부모에 대한 의존성을 성인이 되면 버려야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는데 신앙인들은 그 대상을 부모대신에 신(하나님)으로 바꾸어 의존성을 지속하는 나약성 때문에 정신질환이 계속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융의 견해는 프로이트와 달랐습니다. 융은 그 자신이 프로테스탄트 가정에서 태어나 처음에 유물론(唯物論)과 프로이트 학설에 매료되었었으나 점차 영적인 것을 중요성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신경증의 발생이나 정신의 전일성(全一性)형성에 영적인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융은 자신이 정신과 의사로서 일생을 보내면서 사람들의 심리치료에 신앙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있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의 깨달음은 신앙생활은 인간에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융에게 종교는 자연발생적인 실재(實在)로서 인간들에게 가장 본질적인 욕구이며 인간존재가 균형을 이루는데 있어서 필수불가결한 정신작용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종교는 기독교만을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기독신앙인들도 잠못이루는 불면의 밤을 가지고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우울증이라는 질병은 영역이 매우 넓은 정신질환입니다. 모든 우울증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상당히 많은 우울증은 자아에 집중된 사고방식, 특히 왜곡된 인지(생각)와 삶의 양태에서 생겨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쟁의식, 율법주의, 완벽주의적 경향, 남과의 지나친 비교, 타인에게 받았던 모멸감이나 무시 등, 이러한 것들을 훌훌 털어버리지 못해서 생겨날 때도 많습니다. 이 글을 쓰면서 조심스러운 우울증을 앓고 있는 많은 사람들을 비난하려고 하는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우울증을 겪고 있는 분들은 세상을 대충대충 살려고 하지 않고 세상의 모든 일들과 영향력에 대해서 섬세하게 반응했던 착한 분들도 너무나 많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일들과 영향력에서 어느 누구가 자유로울 수가 있겠습니까? 그런 분은 예수님 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풍랑이는 바다의 배 위에서 잠을 주무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 바다를 바라보면서 죽게 되었다고 소리치면서 예수님을 깨웠습니다.
이미 언급했던 미국에서 온 사업가는 융의 권면대로 아무 것도 없는 오두막에서 주기도문을 수도 없이 암송했는데 자신의 신경증과 불면증을 온전하게 해결했다고 합니다. 주기도문의 암송은 이 내담자로 하여금 복잡한 의식의 세계를 떠나서 깊이 있는 무의식의 세계로 들어갔고 진정한 자기로 변하는 과정에서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도록 했습니다.
융을 만나며 새롭게 발견한 것은 나의 그림자의 영역(어두운 부분)을 사랑하게 된 것입니다. 융은 사람들에게는 겉으로 들어나는 사회적으로 예의를 갖춘 페르소나와 우리가 들어내고 싶지 않은 어두운 영역인 그림자가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를 들어 한 남성에게는 겉으로 들어나는 페르소나인 남성성인 아니무스 외에 겉으로 들어나지 않은 여성성인 아니마가 그 남성의 무의식속에 열등한 모습으로 들어있습니다. 이 남성의 건강한 인격성장은 자신에게 열등한 모습으로 현존하는 여성성인 아니마와 친숙하며 그 아니마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이 남성은 주변에 있는 여성들을 실제로 존중합니다.
융의 그림자이야기는 나에게는 소중한 교훈이 되었습니다. 나는 열등감이 참으로 많은 사람입니다. 외모 콤플렉스도 많습니다. 얼굴이 흰 사람들은 귀티가 나는데 얼굴이 검은 편인 나는 천한 티가 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신학을 공부하면서 또한 목회를 하면서 아버님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꼭 감추고 싶었던 그림자의 영역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일생동안 페르소나를 꾸미고 치장하는데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나의 그림자를 감추느라고 더 많은 시간을 소진했습니다.
내가 결혼하기 전에 아내와 교제하면서 나의 아버지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고 정확하게 이야기를 하지 못하고 신앙이 부족하다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나의 교묘한 수법은 교회에 나가지 않는 것을 신앙이 부족하다는 말로 위장해서 사용했습니다. 결혼하고 나서 아내는 어떻게 교회를 나가지 않는다고 말을 해야지 신앙이 부족하다고 말을 했느냐고 항의를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융을 만나면서 나의 어두운 부분을 나의 인격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아직도 계속해서 융과 함께 여행 중이지만 나의 감추고 싶은 모습을 나의 모습이라고 조금씩 들어내게 된 것은 나의 인격의 작은 성장의 모습입니다.
나의 그 아버지는 작년(2010년) 10월 21일에 소천하셨습니다. 감사한 것은 작년 3월부터 예수님을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시다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나의 육신의 아버지의 영혼을 위해서 오랫동안 기도한 것에 대해 응답해주신 주님의 은혜가 감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가면을 쓰는 것에 익숙한 한국의 문화와 교회현실에 근거해서 오랫동안 목회자로서 종교의 옷을 두껍게 입고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또한 융을 공부하면서 배웠던 것은 융은 끊임없이 정신분석을 통해서 사람들의 신경증을 치료하는 일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성장을 위해서 집중했다는 것입니다. 융은 목회자의 아들이지만 일반적으로 말해서 신앙인으로 살았다는 뚜렷한 증거는 없습니다. 그가 기독교의 진리를 수용하고 심리치료에서 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활용했지만 개인적으로 그가 기독교인은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면에서 융을 이해할 때에 우리가 조심해야 할 영역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사고가 교리적인 신앙에 근거해서 구원론에만 집착할 때에 기독교인의 사고가 편협할 수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인도의 독립운동가이면서 사랑의 실천가였던 마하트마 간디를 참 좋아했고 존경했습니다. 나는 대학을 다니면서 간디를 개인적으로 연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거듭난 신앙인으로 구원에 열정이 많이 있었기에 늘 믿음의 선배들에게 귀찮을 정도로 간디가 구원을 받았는가에 대해 집요하게 질문을 해왔습니다. 물론 한 인간이 구원을 받았는가 하는 문제는 기독교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고에 집착해 있으면 우리는 이 세상을 폐쇄적으로 살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비도 햇빛도 악인이나 선인이나 골고루 나눠주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온갖 비난을 받으면서도 그 당시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보기에는 도저히 구원받을 수 없는 사람들인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의 친구가 되어서 그들과 교제하였습니다.
기독교인들의 사고가 하나님과의 교제에 집중하는 수직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맺어가는 수평적인 사고도 참으로 소중합니다. 개인적으로 간디가 힌두교인으로 살아갔기에 기독교인 필자의 입장에서 간디의 생애는 구원받지 못한 인생이기에 무가치하다고 폄하했다고 하면 간디의 사상에서 너무나 소중한 것을 발견할 수도 없었고 인도인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관심도 사랑도 많이 약해졌을 것입니다.
융은 태생적으로 기독교에 관한 깊은 이해를 가졌고 신앙치유에 대한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는 궁극적인 인간성장인 자기로 가는 과정인 자아초월은 영적성장에서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던 우리시대의 스승입니다.
정광일의 영성이야기 1
영성의 빈곤, 영성의 자리
정의를 내리기 어려운 <영성>이란 말을 한번 풀어 본다면, 그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드러나는 ‘영적 가치의 우위’ 또는 ‘영적 지향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어떤 가치관에 따라 움직이게 마련이다. 돈을 제일로 여기는 이는 돈 되는 쪽으로 움직일 것이고 권력을 최고로 아는 이는 무엇보다 힘을 얻는데 전력을 기울일 것이다. 명예나 쾌락이나 이념도 사람을 이끄는 좋은 매개가 될 수 있다. 이념의 시대인 20세기를 넘어 탈이념의 시대로 접어든 21세기에는 또 무엇이 대중을 휘어 감는 동력으로 작용할까? 이 시대의 주된 가치는 건강이나 웰빙(well-being)에 있는 것 같다. 지난 가을 친구들과 함께 산에 가면서 듣고 한바탕 웃은 이야기. “공부 잘하는 여자가 얼굴 예쁜 여자만 못하고, 얼굴 예쁜 여자가 시집 잘 간 여자만 못하고, 시집 잘 간 여자가 자식 잘 둔 여자만 못하고, 자식 잘 둔 여자가 건강한 여자만 못하다고, 그래 건강이 최고여!” 사실 ‘건강하게 잘 사는 것’에 대한 바람은 새삼스런 일이 아니다. 이것은 시대나 지역을 뛰어넘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인간의 한결같은 소망이기도 하다. 어떤 학문이나 사상 심지어 종교도 이 같은 인간의 보편적 욕구를 외면하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는 이를 이루기 위해서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기도 한다.
기독교도 예외는 아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대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요 10:10)이 사실이고, 이런 차원에서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요삼 2)” 바라는 말씀이 아직까지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는 것도 당연하다. 오랫동안 베스트셀러의 자리를 지켜 온 <야베스의 기도>는 책으로 뿐만 아니라 실제로 우리의 일상기도를 대신해왔다. 넓은 땅을 가지는 복 그리고 고통과 불행은 멀리 떠나도록 복을 비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서 이렇게 ‘건강하게 잘 사는 것’을 뒷받침해 주는 구절은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기를(창 1:28)” 원하셨다. 땅에 사는 모든 생명체가 그렇게 되기를 바랄진데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고백하는 사랑하는 자녀의 경우야 두 말 할 필요가 있겠는가! 옳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당당하게 이 땅에서 주어진 생명을 누릴 권리가 있다. 예수 믿으면 복 받는다는 전도 방식, 복을 기원하는 축복기도, 다양한 교회 성장 프로그램, 치유집회, 성공담이 곁들여진 간증 등의 현상은 이래서 나온 것들이다. 그런데 지금 한국교회 특히 개신교는 우리 사회에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가톨릭과 개신교의 자리가 뒤 바뀌었다는 인식이 회자 되고 있다. 전통의 단계에도 미치지 못하면서 그 이상의 수준을 말로만 외쳐온 이른바 ‘개혁주의’의 현상을 일컫는 말이리라. 안티 기독교사이트에서 떠도는 말을 그대로 수용하지 않더라도, 또 우리 사회가 교회를 일종의 방어기재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한국교회가 이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사명을 잘 감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 잘 해 왔으니 이대로 잘 가면 된다는 주장보다는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된다는 목소리에 더 많은 사람이 공감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한 해를 1907년의 평양 대 부흥운동을 기억하며 그런 참회의 마음으로 보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잘 못되었다는 말인가?
이 십 여년 된 것 같다. 루터 교에서 출간하고 가르친 <베델성서>라는 성경공부 교재가 있었다. 지금도 사용하는 교회가 있는 줄 알지만 그때는 그 교재의 인기와 열기가 대단하였다고 생각된다. 교육목사였던 나도 이 강습을 받고 또 교우들에게 강의를 전수하면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신 말씀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창 12:2)” 이었다. 교재는 성경 전체의 핵심을 이 한 구절에서 충분히 찾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구절의 앞부분보다도 특히 뒷부분의 말씀에 포인트를 두었다. 즉 복을 받는 일은 복의 근원이 되는 과정이며 절차일 뿐이라는 점이다. 복은 받고 주고, 또 주고 받고 하는 것이다. 복이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대상일 뿐이다. 복은 내 것으로 차지하면 그만인 게 아니라 굴러 들어오는 대로 이웃에게 굴려 보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갈릴리 호수가 헬몬 산의 물을 받아 요단강을 통로로 하여 아래로 흘려보내듯이. 생명이 넘치는 갈릴리와 죽음의 바다 사해의 차이점과 그 이유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난다. 바로 이런 문제이다. 받는 복에서 주는 복으로 가지 못하는 데 대한 안타까움 말이다. 하늘로부터의 축복 통로인 위문은 크게 활짝 열어 놓았는데 세상으로 향하는 아래문은 꼭 닫아 놓은 모습. 어찌하여 밑은 굳게 닫혀졌는가? 왜 아래로 가는 문은 잘 열리지 않는가? 우리 마음 한 가운데 버젓이 자리 잡고 있는 이기적 욕구, 자기중심성, 탐심, 소유욕, 명예욕 이런 것들을 어찌 할 것인가? 이미 거듭나지 않았는가. 성령 충만을 체험 하지 않았는가, 제자로 헌신하지 않았는가, 사역자가 되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나는...” 이와 같은 상태를 “영성의 빈곤”이라 말하고자 한다. 영적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놀랄만한 카리스마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교회 성장에도 불구하고, 우러러 보는 그 지위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나는...” 곧 영성의 빈곤이다.
상황을 좀 바꾸어 설명해 보기로 하자. 예수님은 복(福)에 굶주려 복을 달라며 산에 까지 따라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일반적 복 개념과는 전혀 다른 복을 말씀하신다(마 5:1-12). 가난한 사람들,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박해를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이 바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말이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팔복(八福)의 내용인데 사실 이것은 일반 상식을 벗어난 이야기다. 가난과 굶주림과 고통과 박해는 ‘복’ 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화(禍)’에 가깝다. 어처구니없는 복 해석이다. 다산(多産)과 소유의 확대 등 물질적 풍요를 통해서 부귀영화(富貴榮華)를 누리고자 하는 마음은 인간의 공통된 욕망이고, 이런 욕망을 채우려는 과정에서 종교도 한 몫을 담당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이스라엘 사람들도 이 점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이러한 풍요로움으로 이끌어 주시는 분으로 고백하면서 믿음을 키워 왔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내려 주시는 분이다. 그의 뜻대로 율법을 잘 지키면 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화를 입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도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다음의 확신으로 이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땅에서 온갖 복을 누리며 산다면 그것은 당연히 하늘로부터 받은 것 일 터이요, 그렇지 못하다면 거기에는 그만한 까닭이 있을 것이다.” 따라서 빈민, 환자, 장애자에 대한 멸시는 당연한 것이었다. 그들의 화(禍)는 죄의 대가(代價)였기 때문이었다. 이쯤 되면 성경 특히 구약성경은 일종의 이스라엘을 위한 국부론(國富論)이나 이스라엘 민족을 위한 민부론(民富論) 수준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 결코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고작 그런 정도의 책은 아니지 않은가?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라.”(신 10:19)
“그의 거룩한 처소에 계신 하나님은 고아의 아버지시며 과부의 재판장이시라.”(시 68:5) “내가 심판하러 너희에게 임할 것이라...과부와 고아를 압제하며 나그네를 억울하게 하며 나를 경외하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말 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마 25:35)
나그네, 고아, 과부는 소위 ‘복’과는 인연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이들을 내치려 하지 않는다. 결코 정죄의 대상이 아니었기에 그들을 돌보라고 한다. 그들을 끌어안으라고 한다. 하나님은 바로 이런 사람들의 하나님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그의 아들 독생자도 이런 모습으로 보내셨다. 머리 둘 곳 없는 가난한 이로, 나그네로 말이다. 그리고 평생을 이런 사람들과 함께 지내셨다. 그러면서 바로 그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 가난한 사람들은 행복하다. 너희 고통 받는 이들은 행복하다. 너희 주리고 목마른 이들은 행복하다.” 이 말씀을 어떻게 풀어야 할까? 지금은 가난하지만 앞으로는 부자가 될 것이다. 지금은 고통 가운데 있지만 곧 나아질 것이다. 지금은 주리고 목마르지만 언젠가는 배부를 것이다. 그러니 행복하다고 생각해라. 미래에 일어날 기대감으로 행복을 누려라. 다가올 부와 배부름과 풍족함을 믿음으로 앞 당겨 행복감에 젖어라. 이런 말씀일까? 그렇다면 예수님도 일반적 통설과 동일한 가치의 잣대 위에서 말씀하신 셈이 된다. 돈이 있어야 행복한데, 건강해야 행복한데, 높은 지위를 누려야 행복한데 사실은 그게 행복인데 너희들의 사정은 지금 그렇지 못하니 참으로 안됐구나! 그러나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부자들이 소유한 그 돈을 빼앗아 너희에게 주겠다. 그들이 차지한 권력을 빼앗아 나누어 주겠다. 모든 불평등의 원인은 땅에 있으니 지주의 땅을 빼앗아 골고루 나누어 주겠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금까지 누렸던 그 행복을 너희들도 누리도록 해 주겠다. 예수님의 팔복 선언이 무슨 공산당 선언이라도 된단 말인가? 만일 그렇지 않다면?
예수님이야말로 가난과 질병과 사회적 불의 때문에 당하는 고통을 잘 아시는 분이다. 알 뿐만 아니라 몸소 겪은 분이다.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으로서 가장 낮은 곳으로 내려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온갖 고초를 다 체험하신 분이다. 밑바닥의 삶을 사시다가 그런 바닥조차도 없는 극한 지경에서 죽음을 당하신 분이다. 하나님의 아들이고 사람의 아들이며 하나님 자신이기도 한 그분이 말씀하신 행복 선언이 여기 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다!” 이 ‘가난’과 이 ‘행복’은 과연 어떤 것일까? 예수님은 이 가난을 어떻게 지내셨으며 이 행복을 어떻게 누리셨을까? 그분에게서 가난과 행복은 어떤 연관성이 있나? 이렇게 말해 본다. ‘가난하지만 행복한 삶’ 아니면 ‘가난하기에 행복한 삶’ 좀 더 나아가 ‘가난하기에 더욱 행복한 삶’ 이 정도면 예수님 영성의 그 경지를 엇비슷하게 맞추지 않았나 생각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느 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도 우리처럼 돈이 없으면 힘들어 하고 돈이 생기면 좋아하고 행복해 한다. 그러던 그가 돈이 없어도 행복해 한다면 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말하기를 돈이 없으니 더욱 행복하다고 한다면 그리고 그 말이 진실한 고백이라면... 돈이 집일 수 있고, 지위일 수 있고, 명예나 사회적 영향력일 수 있다. 권력일 수도 있겠다. 삶의 목표이며 존재이유가 되었던 그런 것들이 뜻대로 이루어져서 행복할 수 있겠으나, 그런 외적인 것들의 성취여부와 관계없이 행복을 누릴 수 있다는 생각. 그런데 이러한 생각의 발상의 전환은 입신양명이나 부귀영화 또는 건강한 상태에 있을 때 보다 그러한 것들을 잃었을 때 오히려 가능하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말, 전자의 경우를 ‘영성의 빈곤’이라고 후자의 경우를 ‘영성의 자리’라고.
크고, 힘 있고, 기름지고, 화려하고, 빛나고, 성공적이고 그래서 뭇사람의 시선을 끌며 우러름의 대상이 되는 그런 자리는 영성적 차원으로 볼 때, 영성의 자리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영성의 빈곤에 해당되는 자리라고 함이 옳으리라. 진정한 영성의 자리는 작고, 힘없고, 때묻고, 초라하고, 이름 없고, 빛 없는 그래서 부러움 보다는 조롱과 멸시의 대상이 되는 그런 상태에서야 가능하다. 이 같은 상태에 있는 사람을 일컫는 가장 적절한 표현이 바로 ‘가난한 사람’ 또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사람 어찌 복되다 아니할까? ‘가난한 사람’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첫째는 가난 가운데 태어나 가난에 찌들어 살면서 가난을 탄식하며 사는 사람, 둘째는 가난이 죽기보다 싫어 이 가난을 딛고 일어선 사람, 셋째는 가난 가운데서도 자족하며 하늘의 복을 누리는 사람이다. 첫째 유형은 타고난 가난이고 둘째 유형이 물리친 가난이라면 셋째 유형은 거듭난 가난이다. 첫째는 무의미의 가난이고 둘째가 부정적 의미로서의 가난이라면 셋째는 자발적 가난이다. 예수님은 이 자발적 가난에 영적 의미를 부여하신 것이다. 이런 가난을 ‘영적 가난’이라고 부르고자 한다. 성경에 나타는 고통, 고난, 실패, 질병, 역경의 의미는 이 영적 가난의 의미이다. 왜 하나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고난(가난을 포함한)을 받는가? 성경에 나오는 믿음의 위대한 선배들은 예외 없이 고난의 사람들이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욥, 모세, 다윗, 마리아, 바울... 그들의 고난은 그들의 영적 성장을 가져다 준 ‘영성의 자리’가 되었다. 그들의 고난이 어떻게 그들의 영성을 꽃피울 수 있는 자리로 바뀔 수 있었을까? 그들은 고난을 통해서 ‘영적 가난’의 경지를 이루어 낼 수 있었다. 그렇다. 물적(物的) 가난에서 영적(靈的) 가난으로의 승화. 진정한 영적 가난은 물질적 풍요 가운데서는 얻어질 수 없다. 등 따시고 배부른데 하나님 찾겠는가? 그런 상태에서 우리가 부르는 하나님은 대부분 ‘우상’이기 쉽다. 참 하나님이 아닌 거짓 하나님이다. 나를 만족 시켜주고 나의 이기적 욕망을 채워주고 나를 위한 수호신으로서의 역할에 그치는, 이른바 나를 위한 하나님. 곧 우상이다. 이러한 거짓 신앙의 상황을 두고 예레미아가 표현한 말이다.
“선지자들은 거짓을 예언하며 제사장들은 자기 권력으로 다스리며 내 백성은 그것을 좋게 여기니 마지막에는 너희가 어찌하려느냐” (렘 5:31) /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다.” (렘 6:14)
육체의 가시 때문에 괴로워했던 사도 바울은 말한다. “나에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은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후 12:9-10).
시편기자의 신앙고백을 들어보자.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119: 67)/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119:71)
그동안 내 삶에서 물적 가치가 아닌 영적 가치의 우위, 세속적 지향이 아닌 영적 지향의 때는 과연 언제였나? 돈 많을 때 보다 가난했을 때, 성공 보다 실패 했을 때, 존경 보다 멸시를 받았을 때, 건강 보다 질병가운데서 힘들어 할 때가 아니었던가? 자신의 약함을 뼈저리게 느낄 때가 아니었던가? 그 약함과 상처와 아픔이 영성의 자리가 되어 나의 믿음을 이만큼이나마 키워 주지 않았던가? 외양간의 말구유에서 시작하여 골고다의 십자가에서 그의 삶을 마치신 예수 그리스도는 지금도 그곳에 있는 이들, 그곳을 찾는 이들과 함께 계신다. 그리고 그들의 영성을 어루만져 주신다. 영성의 길은 지극히 단순하고 소박한 길이다. 그렇지만 좁고 험한 길이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그런 길이다. 떠나지 않고는, 비우지 않고는, 낮아지지 않고는, 작아지지 않고는 갈 수 없는 그런 길이다. 그러나 그길 이야말로 예수를 닮는 길이고, 예수처럼 사는 길이다. 영성은 삶이다. 영성은 길 찾는 삶이다. 영성은 길가는 삶이다. 잘 알고 있었으나 지금은 잊혀진 그래서 아무도 가지 않는 그 옛길을 다시 찾아 풀섶을 헤치며 조심스레 한발 한발 내 딛는 그런 삶이다.
<십자가> 윤동주
쫒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나의 치유목회 /중앙경찰학교 경목실장 남병습목사
한 영혼에게 예수님의 마음으로 다가서기
일상적으로 경찰학교를 졸업한 친구들은 바쁘고 피곤하여 나에게 연락을 거의 하지 않는 편이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자주 연락하는 자매가 한 사람있다. 경찰학교 생활 할 때부터 생활실 지도관들로부터 많은 지적을 받았고, 졸업 사정회에서도 졸업불가라는 오명이 거론되었을 정도였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졸업한 그런 자매였다. 거칠고 욕도 잘하고 막 대하는 그런 자매였다. 졸업한 후에 한 번은 연락도 없이 찾아와 껄렁한 자세로 욕을 섞어가면서 나에게 “이제부터 막 나가기로 했어요. 하나님이고 뭐고 다 필요없어요.”라면서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면서 내게 압력아닌 압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그 날 나는 그런 거친 모습들이 하나도 밉지 않고 그 자매의 아픔과 고독함의 절규로 보이고 들리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다 받아주면서 저녁을 사주고 사과도 한 박스 사서 가는 편에 붙여 주었다.
사실 이 자매는 매우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아버지는 전형적인 가정 폭력을 행사하였고, 엄마는 속병을 얻어서 늘 아파했고, 자신은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일부러 안좋은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삶을 왜곡해서 보는 것을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허리가 아파서 병원에 가보니까 척추측만증이라는 불치병이 있다는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그런 절망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찾게 되었고, 교회를 나오게 되었는데, 교회를 다니면서 ‘왜 하나님은 나에게 이런 어렵고 힘든 환경, 아픈 몸을 주셨는가?’하는 원망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가 이 자매를 만나게 되었을 때는 경찰학교 생활할 때, 한참 자기 삶에 대한 원망이 극도에 이르렀을 때였다. 나는 천연스럽게 자기 이야기를 웃어가면서 이야기하는 자매가 참 불쌍해 보였다. 그래서 이야기를 들으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공감해주었는데, 이 자매도 결국 이야기를 하다가 눈물을 쏟았다. 그래서 위로해주고 상담을 마쳤다. 그 후로 이 자매의 삶이 많이 변화되기 시작했다. 예배도 빠지지 않고 나오기 시작했고, 여러 모임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그리고 졸업한 후에 나름대로 한 영혼을 섬긴 보람을 느끼고 있었는데, 갑자기 다시 껄렁한 모습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내가 그런 모든 모습조차도 포용해주고 안아주자, 이 자매의 생각들이 많이 변화하게 되었다. 나름대로 나를 의미있는 타자로 여기고 자주 연락을 준다.
이번 주에는 예배 때 찾아오고 싶다고 연락을 주었다. 동기들이랑 함께 오겠다고 해서 ‘언제든지 환영하겠다’고 했는데, 결국 전화로 “근무 여근 때문에 이번에는 어렵고 수련회 때 가겠습니다”라고 했다. 고분고분하고 상냥한 목소리를 들으면서 그녀가 오든 오지 않든 상관없이 자기 일에 열심이며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는 자매에 대해서 안심하는 마음이 들었다. 한 영혼을 세우기 위해 섬기고 사랑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이것만큼 가치있고 고귀한 일은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다시금 드는 한 주간이었다.
가족치유상담연구원소개 1
엘림상담실이야기
엘림상담실은 상담사역을 하는 곳입니다. 모든 상담은 개인상담과 가족상담과 지역교회에서 위탁받은 위탁상담으로 이루어집니다. 매 회기 상담은 매주 월요일 오전 9시부터 토요일 저녁 6시까지 본 상담실에서 이루어집니다. 모든 상담은 전화로 상담시간을 예약합니다. 상담의 내용은 비밀이 유지되며 초기 10회 상담을 우선으로 합니다.
상담은 유료상담이 원칙이고 모든 상담료는 본 가족치유상담연구원 운영을 위한 후원비로 활용됩니다. 일반 내담자의 상담료는 1회기에 오만원이며 협력교회에서 위탁받은 내담자의 상담료는 1회기에 삼만원이며 경제적인 형편이 어려운 분들에게 할인혜택이 주어집니다. 상담을 전공하는 상담전공생들을 위한 수퍼비전의 비용은 매회기당 오만원입니다.
엘림상담실은 지역교회의 위탁상담을 환영합니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을 위한 깊이있는 상담을 하기가 어려울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경우에 엘림상담실은 지역교회에서 위탁받은 내담자들을 정성껏 섬길 것입니다.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은 지역교회의 좋은 협력기관이 되기를 원합니다.
상담자는 상담과정에서 내담자가 문제의 원인과 해답을 발견하도록 도와줍니다. 이 과정에서 내담자는 자신을 이해하고 수용하고 더 나아가서는 타인을 이해하고 수용해서 건강한 인격의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엘림’은 구약성경 출애굽기 15장 27절에서 유래된 말로서 하나님께서 마라의 쓴물을 단물로 만들어 지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마시게 한 뒤에 이들을 엘림이라는 곳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곳에는 열 두 개의 샘과 70그루의 종려나무가 있어서 이스라엘백성들은 넉넉히 물도 마시고 종려나무 열매도 먹으면서 쉼을 가지면서 다음 여행을 준비했습니다.
가족치유상담연구원소개 2
가족치유상담아카데미
치유상담아카데미는 치유상담과 가족상담에 관심을 갖고 교육받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의 전문상담교육기관입니다.
본 교육은 정규강좌와 집중강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정규강좌는 전반기는 3월-6월까지 16주 과정, 후반기는 9월-12월까지 16주 과정으로 각각 진행됩니다. 집중강좌는 7월과 8월에 각각 2회씩 진행됩니다. 강의는 월-목요일(오전10시-오후4시)까지 연속 4일 동안 진행됩니다.
치유상담아카데미의 강좌는 다음과 같이 총 16강좌로서 강의는 상담학에 박사학위를 갖고 임상경험을 갖춘 10명의 교수들이 담당합니다.
1. 치유상담: 하나님다림줄, 전인치유, 성경적내면치유, 쓴뿌리치유
2. 인간관계: 용서상담, 독서치유, 웃음치료, 인간관계 ․ 집단상담
3. 가족상담: 대상관계, 부모교육 ․ 대화법, 가족상담, 성상담
4. 상담심리: 기독교상담, 성격상담 ․ 심리검사, 인지치료, 역동심리
<2011년 전반기(7월 8월) 집중강좌>
* 집중강좌1: 하나님의 다림줄, 7월18-21일 (월-목), 강사: 김영근
<거절과 반항의 인간의 다림줄⟶수용과 사랑의 하나님의 다림줄로의 인격변화과정>
* 집중강좌2: 용서상담, 7월 25-28일(월-목), 강사: 김희라
<용서상담의 이론교육과 용서상담을 가정과 교회에 임상적인 적용․ 실습하는 과정>
* 집중강죄3: 전인치유, 8월16-19(화-금), 강사: 김영근
<내적치유, 인격치유, 관계치유, 영적치유를 통한 온전한 신앙인격의 치유․회복과정>
* 집중강좌4: 성격상담 ․ 심리검사, 8월 22-25일, 강사: 김희라
<MBTI, 애니어그램, 기질검사 등 다양한 심리검사을 활용한 자기발견과 수용과정>
등록: 18만원(교재대, 점심값, 간식비포함, 1주전 사전등록 1만원 할인)
구좌: 농협 121015-52-049140 김영근(송금 후 전화 02-3675-7368)
<2011년 후반기(9월-12월) 8주과정 정규강좌 >
* 정규강좌1: 성경적내면치유, 9월6일-11월1일(화, 오전), 강사:김영근
* 정규강좌2: 인간관계․집단상담, 9월6일-11월1일(화, 오후),강사:김희라
* 정규강좌3: 쓴뿌리치유, 11월8-12월27일(화, 오전), 강사: 김영근
* 정규강좌4: 부모훈련․대화법, 11월8-12월27일(화, 오후), 강사:김희라
등록: 18만원(교재대, 점심값, 간식비포함, 1주전 사전등록 1만원 할인)
가족치유상담원소개 3
목민독서교실
목민독서교실은 책을 읽고 삶을 나누는 독서모임입니다. 좋은 책은 우리들의 영혼을 살찌웁니다. 여러 해전에 미국에서 유학하는 동안에 한 시골의 작은 도서관에서 책을 쌓아놓고 독서하는 노인 한 분을 보았습니다. 그 분의 모습에서 삶의 여유와 풍요를 보았습니다. 좋은 책을 읽고 함께 나누는 것은 우리들의 교제의 장을 넓히고 삶을 유익하게 하고 치유에 회복에 이르는 좋은 길입니다. 여러분을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의 독서모임인 목민독서교실로 안내합니다. 목민독서교실은 한 달에 두 세권 정도의 책을 함께 읽고 나눕니다. 목회자반, 사모님반, 평신도반이 있습니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들은 책을 보내드립니다.
* 목민독서교실 9월 안내 *
도서1: 헨리 나우웬의 <영적인 발돋움>, 도서출판 두란노
도서2: 송봉모의 <상처와 용서>, 바오로 딸
도서3: 에디스 쉐이퍼의 결혼이야기, 에스라 서원
사모님반: 9월8일-29일(매주 목요일, 4회) 오전10시-오후1시
목회자반: 9월9일-29일(목주 목요일, 4회) 정오12시-오후3시
* 등록: 9만원(도서비, 점심값, 간식비)
* 구좌: 농협121015-52-049140 김영근(송금후 전화 02-3675-7368)
* 목민독서교실 10월 안내 *
도서1: 리사 맥민의 <성, 거룩한 갈망>, IVF(한국기독교학생회춢판부)
도서2: 김영근의 <쓴뿌리 치유>, 목양미디어
사모님반 10월6일-27일(목) 오전10시-오후1시
목회자반 10월6일-27일(목) 정오12시-오후3시
* 등록: 9만원(도서비, 점심값, 간식비)
* 구좌: 농협121015-52-049140 김영근(송금후 전화 02-3675-7368)
아름다운 인생을 위한
가족치유상담연구원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은 가족치유상담센터의 새 이름입니다. 그 동안 가족치유상담센터는 1995년에 한국크리스천상담학교의 이름으로 대전에서 사역을 시작한 이래 개인과 가족과 교회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개인상담사역, 치유상담세미나, 월간쪽지 <예수사랑 ․ 가족사랑>을 발행하면서 활발한 사역을 감당해왔습니다. 이제 오늘 7월1일부터 서울 종로구 연지동 136-46 한국기독교회관 504호에 둥지를 터고 새롭게 활동을 시작합니다. 저희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은 지역교회의 협력기관으로 한국과 지구촌의 모든 가정들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작은 부분에서 성실하게 섬겨나갈 것입니다. 여러 지역교회의 목회자들과 성도님들이 저희 가족치유상담연구원을 위해서 적극적으로 기도해주시고 협력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종로5가 지역을 들리는 분들 중에서 누구든지 오시면 저희들은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함께 교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에 예수님의 동행을 기도합니다.
* 가족치유상담 연구원의 사역 *
► 가정회복중보기도사역: 모든 가정의 회복을 위해 중보기도합니다.
► 엘림가족상담실: 개인과 가정의 치유와 회복을 위해서 상담합니다.
► 치유상담아카데미: 이론과 임상을 갖춘 치유상담교육프로그램입니다.
► 중국가정교회지도자상담교육: 중국가정교회지도자를 상담교육합니다.
► 커플 1박2일 치유모임: 김영근목사 부부와 함께 보내는 모임입니다.
► 다문화가정상담: 국제 결혼한 다문화가정을 돕는 상담모임입니다.
► 목민독서교실: 다양한 서적을 읽고 삶을 나누는 치유․회복모임입니다.
► 격월간쪽지<예수사랑 ․ 가족사랑>: 다양한 읽을 자료를 제공합니다.
가족치유상담연구원
<부설: 엘림상담실, 치유상담아카데미>
종로구 연지동 136-46 기독교회관 504호/02-3675-7368, (fax)7369
원장: 010-3290-1007, 행정실: 010-3219-1097 상담실: 010-2424-1612
Cafe.Daum.net/familytherapy0191(daum 다움 카페→가족치유상담센터)
메일 noksanlove@hanmail.net/후원: 농협351-0355-2650-43 김영근
찾아오는 길: 종로5가역 2번출구 대학로 방향 200M⟶ 한국기독교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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