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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우리집 대소사
1.해외여행 절정
2.혁진 영주권과 운전면허
3.큰형수의 죽음
4.처갓집 우환
5.혁범 자동차 마니아
6.태양광 발전 설치
7.55톤 크레인 매각
8.컴맹탈출과 카페개설
9.평생처음 뽑은 대통령
10.청계천 마라톤대회 참가.
*해외여행 절정
2007년은 우리 부부의 해외여행의 절정기를 이룬 해이다.
우리부부의 해외여행 시작은 동남아를 필두로 하여 중국 유럽 호주 미주를 섭렵하고 지중해까지 갔다 왔다. 짬이 나는 대로 해외여행을 다닌 지가 벌써 10여년이다. 한번도 기획하여 혼자의 힘으로 여행한 적은 없고 여행사의 패키지여행만 쫓아다녔다. 패키지여행은 한나라에 한도시를 주마강산 식으로 훑어보고 갔다 왔다고 하는 것이다. 나는 어쨌든 전 세계 6대주를 한발씩은 밟아봤다. 만만한곳을 다니다 보면 남는 것이 남미나 아프리카다. 남미를 가는 사람은 해외여행을 할 만큼 한 여행에 일가견이 있는 베테랑 여행 족이다.
우리나라 여행의 패턴을 보면 처음에 동남아를 돌고 다음이 중국 미국 호주 유럽 순으로 여행을 한다. 여기까지 갔다 오면 술자리에서 제법 큰소리로 여행담을 해도 인정을 해주는 편이다. 더 나아가면 캐나다 다음에 지중해 동유럽 인도를 꼽을 수 있다. 하다보면 남는 곳이 남미나 아프리카다.
금년에 나는 일본 스키여행을 필두로 대만 동유럽 중남미를 여행하였다.
1월 10일 3박4일로 간 일본 하꼬네 스키여행은 혁범이까지 세 식구가 갔다 왔다.
스키여행 해외원정은 처음이며 내 스키경력의 마지막 스키투어로 생각하고 일본을 갔는데 생각 외로 내 체력이 따라주고 스키실력도 발휘할 수 있었다. 겨울 휴가 겸 스키투어로 간 이번여행은 만족할만하고 기분도 좋았고 세 식구 모두 좋아하니 성공적인 휴가여행이다. 여행기를 MBA카페에 올리니 노익장을 과시한다고 부러워한다.
3월 21일 3박4일로 생우회에서 대만여행을 갔다.
생우회란 고향 초등학교 서울 모임인데 내가 회장이 되여 반부담으로 이 회에서는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가는 것이다. 해외여행을 처음 가는 친구도 있고 부부동반인데 싱글로 3명이나 참석하여 15명이 탈 없이 즐겁게 놀다왔다. 초등학교 동창들이라 고향집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훤히 아는 친구들이라, 대화에 격이 없고 대화수준은 현재의 초등학교 수준으로 천진하고 가식이 없고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유자재로 떠들고 논다.
5월 16일부터 8박 9일로 동유럽 5개국을 갔다 왔다.
동유럽은 공산치하 50년으로 황폐하여 쓰러질 것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천년의 고도가 그대로 있고 새롭게 국가 발전 속도가 눈에 뛰도록 발전하고 있다. 유럽의 중심이었던 옛날의 영화를 바로 찾을 것 같다. 세계1차대전까지 유럽을 주름잡았던 프라하는 지금도 고색 찬란한 문화가 그대로 존재하여, 관광을 하며 감탄하고 놀라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다. 관광에는 북 유럽보다 동유럽이 한수 위다. 20세기 세계를 주름잡는 서유럽보다 관광하는 데는 물가도 저렴하고 옛날의 정취가 그대로 묻어있는 동유럽을 권하고 싶다. 체스키 크롬로브같이 동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마을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는 황홀하여 눈을 뗄 수가 없었다.
11월 8일 중남미 8국을 21일간 라틴아메리카 일주여행을 하였다.
일상생활을 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여행이 좋다고 하여도 20여 일간 여행을 떠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구나 한국의 반대편에 있는 남미를 간다는 것은 보통 결심만 갖고 되는 일이 아니다. 돈과 시간과 건강이 뒷받침 되어야 하는 라틴아메리카여행을 우리 부부는 성공적으로 마쳤다. 일반관광여행으로 남미여행은 관광의 절정이라고 보아도 된다. 남미를 여행 오는 사람은 웬만한 관광여행은 다 해본 프로급의 여행자다. 군대 동기생 카페에 여행기를 올리니, 나보고 대단하다며 선망의 시선을 보낸다.
아쉬운 것은 리오데 자네이로에서 찍은 사진을 디카에서 지움을 잘못 눌러 찍은 사진을 몽탕 날려버렸다는 점이다.
*혁진 영주권과 운전면허
혁진이가 다니던 그래텍 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2005년 1월 초 카나다로 게임개발회사에 스카우트되어 간다고 출국을 하였다. 2006년 2월에 내가 집사람과 가서 보니 게임개발은 신통치 않고, 학창시절부터 사귀어온 조소영이와 가까워져 있었다. 카나다에 이민 가서 있는 소영이 부모를 만나 전격적으로 결혼을 시키기로 하고 우리 부부는 귀국을 하였다.
혁진이와 소영이는 카나다에서 카나다식으로 2006년 4월 28일 토론토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곧바로 서울에서 5백여 명의 하객을 모시고 6월 24일 신사역에 있는 강남웨딩문화원에서 또 결혼식을 올렸다. 9월 17일에는 카나다 토론토에서 교민들을 모아놓고 결혼 리셉션을 하여 우리 부부는 일년에 두 번 카나다를 왕복하였다.
결혼을 하여 카나다 윈저에 보금자리를 튼 혁진이는 영주권이 나오기 전 까지는 카나다에서 정식으로 취직이 안 되어 프로그램 개발을 한다, 아르바이트를 한다 하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카나다 시민권을 가진 소영이와 정식으로 결혼을 했는데도 영주권이 바로 나오지를 않는다. 행정이 늦어서 그런지 정밀하게 검증을 하려고 그런 건지 우리는 답답하기만 하였다.
2007년 8월 24일 카나다에서 영주권 인터뷰에 통과되어 영주확인증을 받았단다. 카나다에서 식을 올린지 1년 4개월만이다. 이런 정도면 다른 사람에 비하여 매우 빨리 나온 편이란다.
영주권을 받고 혁진이는 활력이 났는지 컴퓨터 관련회사에 이력서를 낸다며 들떠있다.
영주권을 받았으니 카나다 운전면허증도 내야 한다며 면허증 갱신하기 위하여 토론토 영사관에 갔더니 국내운전면허적성검사 기간이 넘어 한국에 가서 적성검사를 받아야 된단다.
혁진이 국내 1종 면허증은 갱신기간이 지나 11월 2일 까지 적성검사를 받지 않으면 면허가 취소가 된단다. 국내 면허증으로 카나다 면허를 갱신하면 쉽게 카나다 면허증이 나오는데 카나다에서 운전면허시험을 보아 취득 하려면 시간이 무한정 걸린단다. 내가 시간이 걸리더라도 카나다에서 취득하라고 하였더니 영주권에 혼이 났는지 비행기 값이 날라 가더라도 귀국한단다.
10월5일 혁진이 혼자 귀국하여 면허증 갱신하고 각종보험 해약하고 신용카드 재 발급받고 병원 검사하고 한국에서 결혼신고도 했다.
지금까지 카나다에서 번역하여 먹고 살았는데, 영주권 나오고 이력서 넣은 회사에서 인터뷰 요청에 응해야 한다고, 한국의 체류일정을 충분히 잡지 않고 17일 출국을 하여 5천불을 쥐여 보냈다. 기왕 한국에 왔을 바엔 좀 쉬다가 가도 좋으련만 특별히 할 것도 없으면서 취직이 불안하여 얼른 출국한 모양이다.
다음은 혁진이 운전면허 갱신관계로 답답하여 인터넷 네이버에 물은 글이다.
신통한 답은 안 나왔지만 우리나라 행정력을 보여주는 단편이다.
운전면허증 취소를 면 하려면?
해외에 나가있는 자식이 운전면허 적성검사 기간이 경과 되였다.
서울지방경찰청에 의하면 적성검사기간 종료 후 1년 안에 적성검사를 받지 않으면 운전면허가 취소가 된다고 한다.
문제는 적성검사기간 종료 후 1년 내에 신체검사와 적성검사를 받아야 하는데 지정된 신체검사장이 국내에만 있다는 것이다. 운전면허증이 2종이면 신체검사 없이 가능하나 1종이기 때문에 본인이 귀국하여 꼭 신체검사를 받아야만 된다는 것이다. 1종을 2종으로 변경하면 어떠냐고 물으니 그것도 본인의 확인이 필요하고, 본인의 동의서가 필요하다고 한다.
본인이 귀국하지 않고 가능한 방법이 무엇이냐고 물으니, 없다고 한다. 출국 전에 연기 신청을 하고 출국해야 되는데 연기신청을 하지 않아서 가능한 방법이 없고, 면허증이 취소되고 나중에 귀국하여 주행시험만 보면 된다고 한다.
외국에 있는 사람을 운전면허 때문에 귀국하여 적성검사를 받으라는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아, 면허시험공단에 문의하니 적성검사기간 종료 후 1년 안에는 면허증이 유효하니 주재국 영사관에 문의해 보라고 한다. 우리나라와 운전면허 협정이 체결된 국가에서는 바로 당해국가의 면허증으로 변경해 준단다.
캐나다 영사관에서 운전면허에 대한 공증서를 해 달라니까 안 된다고 한다. 전에 사정을 해서 공증을 해 주었더니 캐나다에서 거부를 하여 안 된단다. 재외국민을 보호해야할 영사관이 해보지도 않고 합법적인 사안을 놓고 안하겠다니 국민을 기만하는 것 같다. 영사관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지만 재외 국민이 운전면허 적성검사 때문에 귀국해야 한다면 법 자체가 너머나 잘못된 것이다.
영사관에서 면허증 공증을 못해준다면, 나는 재외 영사관에서 지정하는 병원에서 신체검사를 받고 한국에 보내지면 한국에서 신체검사 받은 것으로 간주되어 적성검사를 인정해 주면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우선 영사관에서 면허증 공증을 못해준다는 것은 아무리 보아도 직권해석을 잘못하고 국민 보호 의무를 저버리는 것 같다.
답답하여 좋은 방법이 없나하고 여러 사람의 좋은 의견을 듣습니다.
*큰 형수의 죽음
우리 집 3남 4녀, 7남매 중에서 남자는 막내인 나 혼자만 남고 두 형은 모두 작고했다. 그 중에서 큰형만 유독 3번이나 결혼을 하게 되었다.
큰형의 3째 부인인 김추자 형수는 금년 4월 10일 02;15분 아들들이 잘 보살펴 주지 않는 상태로 불쌍하게 운명을 달리했다.
큰 형의 첫째 부인은 서씨로 두 딸을 낳고 6.25후에 바로 세상을 떴다. 청계산 하오고개에 묻었는데 누가 돌봐주는 사람도 없이 페총이 되여 지금은 찾을 수도 없다. 양가집 규수로 시집을 와서 조용히 살다 갔다. 신혼살림사리에 자수도 여러 점 해온 것을 미루어 보면 신경을 써서 시집을 보낸 흔적이 보인다. 초등학교 나의 2년 후배가 되는 첫째 딸 혁구는 시집을 갔다가 재미있는 세상도 구경 못하고 바로 죽고 둘째딸은 6.25때 어린 나이로 죽었다.
둘째 부인은 강원도 여자로 안양에서 공장에 다니다가 중매로 농협에 다니는 큰형과 결혼을 하여 2남 1녀를 낳고 잘살았다. 첫째 혁성이는 팔월 보름에 낳고 둘째 혁창이는 금토동 세향제에 낳고 마지막 정희는 정월 초 하루날 낳았으니 생일들이 특이하기도 하다. 내가 군대에 있을 때 편지로 다음엔 내 생일에 낳으라고 썼다.
이런 형수가 생활력도 강하고 집안일도 잘 하여, 부모도 만족하고 경제권도 모두 넘겼는데, 동네 총각과 바람이 나서 큰형이 농협에서 탄 퇴직금까지 갖고 사라졌다.
동네 총각이 내 초등학교 동창이고, 이런 사건을 동네에서는 모두 알고 있었는데 등잔 밑이 어둡다고 우리 집만 뒤늦게 알았다. 현역에 있던 내가 휴가를 와서 동창을 만나 형수와의 관계에 대한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집안 식구에게 이야기 하여 부모도 이 사실을 확인을 하게 되었다. 큰형을 포함한 온 식구의 의견으로 내가 안양에 피신해 있는 형수를 만나 이혼 도장을 받아냈다.
셋째 부인이 이번에 돌아간 형수인데, 이북에서 피난을 나와 헐헐 단신이다. 우리 큰 누이가 종로 6가에서 셋방살이하던 주인집의 첩실로 있었는데, 소원이 정식으로 혼인을 해보는 것이란다. 혼자 있는 큰형에게 중매를 하여 구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어서 세 번째 부인이 된 것이다.
큰형이 농협에서 퇴직을 하고 시골에서 신접살림을 차리고 편안히 잘 살다가 서울 답십리로 올라와서 부터는 궁자가 끼기 시작하여, 다시 낙향을 하였다. 큰형이 간으로 유명을 달리하니 형수 혼자 부모님을 모시고 살림을 시골에서 하게 되였다.
큰형은 일제 시대에 일본 황족 여동생이 학교를 세웠다는 신의주에서 유명한 삼무학교를 나왔다. 예능에 재질이 있어 그림도 잘 그리고 붓글씨도 잘 써서 전국 대회에 입선도 하였다. 키도 작고 체구도 작은데 기계체조에 능하여 시골학교 선생들이 감탄도 하였다. 고향에서 낙생 초등학교 선생도 하다가 농협 대리로 있다가 퇴직을 하고부터는 말년을 보람 있게 살지 못하고 말단 인생으로 하직을 한 것이다.
형수는 큰형이 죽고 시골 살림을 하며 나름대로 조용히 전원생활을 하며 새마을 부녀회장도 하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마저 돌아가셔 시골집을 형수 혼자 버팅겨 온 것이다. 부모님 계실 때 내가 전역을 하여 시골집에서 서울로 회사를 출퇴근하여 적막강산은 면 하였지만 내가 장가를 가니 시골의 그 큰집은 썰렁하게 되었다. 지금은 판교 신도시로 유명세를 타지만 당시에는 산골 시골이었다.
장족하인 혁성이가 제대하여 시골에서 안양 시청으로 출퇴근 할 때까지가 아주머니의 행복의 마지막 순간이다. 혁창이는 수원시청으로 출퇴근을 하는데 가물에 콩 나듯 집에 오고 정희는 나이가 엄청나게 차이가 나는 남자와 혼자 결혼을 하여 왕래가 별로 없는 상황이다.
아들인 혁성이가 결혼을 하면서 고부간에 틈새가 나며 순식간에 모든 집안의 권한은 며느리에게 휘어 잡혔다. 천성이 순진하고 연약한 형수로서는 강하고 싸늘한 며느리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남에게 의지해야만 살수 있는 의지가 약한 형수는 자기 몸만 사리고 일에 꾀를 부리는 습성에, 며느리에게서 독립을 하여 제 살길을 찾지 못하고 집안 내에서 끙끙거리다 정신병이 들기 시작하였다.
자식과 며느리의 구박은 집에서 밥도 따로 해 먹고 겨울에 냉골의 방에서 지내도록 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혁성이도 형수가 집안 생활을 너머나 못마땅하게 하여 격리 할 수박에 없고 전에는 외간남자와 놀아났다는 등 자식이 어머니에게 할 도리를 벗어나고 말았다. 형수는 친자식이 아니라고 자식과 며느리한테 버림받고 시름시름 앓더니, 머리가 돌아 귀신과 대화를 한다고 촛불을 켜놓고 칼까지 갖다 놓고, 제정신이 아니라 위험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옛날에는 양반의 대갓집이라고 칭송받던 우리 집이 이렇게 전락한 것이다.
이런 곡예가 한참을 지속하다 다행히 혁창이 집으로 형수가 옮겨가게 되었다. 장가도 안가고 혼자 사는 혁창이가 있는 수원 아파트에 형수가 가니, 누가 속박하는 사람도 없지 혁창이는 밤늦게 왔다 아침 일찍 식사도 하지 않고 출근 하지, 꼼지락거리기 싫어하는 형수로서는 안성맞춤이지만, 이때는 이미 심신이 지쳐있어 신기가 있고 몸은 허약해 뼈만 남은 상태라 더 이상의 삶을 기대할 수 없고, 재생의 기운이 없으니 빨리 인생을 하직을 하는 편이 낳은 상태다.
모처럼 수원 혁창이 아파트를 가니 온 집안은 한 달 동안 청소도 안한 것 같고 식사는 언제 했는지 냄비는 말라있어, 이런 삶도 있구나 하고 망연자실하여 말도 못하고 있는데, 같이 간 집사람이나 막내 누이도 어안이 없어 위로의 말도 못하고 있다. 정신이 나간 형수를 데리고 음식점으로 갔는데 굶었는데도 먹지를 못한다. 뼈만 남은 앙상한 체구에 정신까지 오락가락하여 불쌍하기 이를 데 없다.
이 불쌍한 형수가 유명을 달리하여 금년 봄 수원 연화장에서 장사를 치렀다.
자식이라고 혁성이가 상주 노릇을 한다. 혁성이 부부 마음은 형수 죽은 것이 참 잘됐다, 빨리 장사나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 할 거다.
장례식장이 문상객도 없이 얼마나 초라할 가하고 근심을 하였는데, 작은아들 혁창이가 특실로 잡아놓고 혁창이 문상객이 물밀 듯 들이 닥치는데, 과소평가하던 혁창이를 다시 보게 되었다. 혁성이 문상객은 고향사람 몇 사람 외에는 없다. 오히려 사촌인 혁봉이가 삼성회사에서 식기도 가져오고 문상객도 와서 일손도 도와주고 하여 보기에 흐뭇하였다.
퇴근하던 혁범이도 가세하여 상가일 을 도우 는데 재치가 있어 보인다. 손주인 혁성이 두 아들도 열심히 도왔다.
4/12일 아침 8시가 발인이라고 하여 누이들을 모시고 7시 반에 가니 7시에 발인을 했단다. 문상객이 발인시간에 맞추어 계속 오는데 이게 무슨 결례람. 상주가 사전에 화장 시간과 발인시간을 오인한 결과라 왈가왈부할 시간은 지났고, 화장한 후 11;30분에 연화장 납골묘에 안치하였다(10613)
혁창이가 수원 공무원이라 시립 연화장의 모든 경비를 절감 받아 장례비용도 생각 외로 조금 들어 마음도 가볍다. 문상객이 많아 부의금도 많이 들어 왔는데 혁성이가 모두 관리한 모양이다. 누이들은 혁창이 문상객이 주류니 혁창이 몫도 나누라고 하는데 혁성이가 그렇게 할리도 없고 혁창이가 남은 부의금에 군침을 흘리지도 않을 것이다.
혁성이 부부가 장례가 끝나고 식구들 앞에서, 고인이 된 어머니를 공경 못해서 미안합니다, 라고 한마디 용서를 빌었으면 했는데 결국은 뉘우치지 못하는 모양이다.
초라해서 얼마나 창피할 가 근심했는데, 떡 벌어진 판에 문상객이 아들들 덕분에 많으니, 고인이 된 형수도 이승에서 고생하고 고달팠던 모든 일을 잊고, 편안히 행복한 마음으로 가시기 축원합니다.
*처갓집 우환
금년은 처갓집의 우환이 끝이지 않는 해이다. 집안의 조그만 말썽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생사가 달린 우환이 연거푸 일어난 것이다.
금년 1월 5일에 미국에서 돌아가신 장모님 49제를 길상사에서 끝내고 집안이 조용한가. 했다.
난데없이 10월 12일에 막내처남 해룡이가 출근하다 덤프트럭에 3중 충돌사고가 발생하였다. 해룡이는 의식불명상태가 2개월이나 계속되었다. 일산병원에 입원해 있는데 병원비가 자부담이라면 벌써 손을 들고 말았는데, 다행히도 보험에서 카바가 되여 아직 젊은 나이니 조금의 살 수 있는 확률이 있더라도 살리려고 온 가족이 매달렸다. 사고가 난 자동차 상태로 보면 도저히 사람이 살 수 있는 상황이 아닌데 천행스럽게도 아직까지 살아있다. 2개월 만에 의식이 돌아왔을 때엔 이런 상태로 식물인간이 되든지 아니면 인생 살아가는데 중증 장애자가 되어 모든 식구의 짐이 되지 않나 근심을 하게 되었다.
덤프트럭이 사고를 내면 피해자가 가해자로 바뀔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주위의 충고도 있었는데, 다행히 막내 동서의 친구가 경찰서장이 있어 해당 경찰서에 전화도 해주고, 보험은 연택이의 힘으로 가해자로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으나, 대형사고라 보험회사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
인천 집에서 새벽에 출근을 하다 덤프트럭과 같이 좌회전을 하는데 직진하던 다른 덤프트럭이 해룡이 차를 받고 연거푸 좌회전하는 다른 덤프트럭을 받았는데 해룡이 스포티지 차는 옆 운전석 휀다를 받고 운전석을 파고 들어와 뒷좌석을 부수며 튕겨져 나가 차량이 종이쪽같이 꾸겨지며 파여져 나갔다.
견인된 해룡이 차를 보고 폐차장에서 이런 정도면 운전사가 살아 있다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짓는다.
가해차량이 해룡이차를 받고 2차로 다른 덤프트럭을 받았는데 바친 덤프트럭은 축이나가며 기사는 의식을 잃고, 받은 덤프트럭 기사는 멀쩡한데 덤프트럭은 완파가 된 모양이다. 경찰에서 의식이 없는 두 기사는 말이 없고, 받은 기사의 현장상황설명에 의존해야 하는 상황에서 피해자이지만 불리한 상황이었는데, 다행히 목격자가 있어 해룡이 에게 유리한 진술을 하여 피해자가 가해자로 뒤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룡이가 가입한 보험사는 능력이 없어 휴일도 끼었지만 3일 동안 어떻게 일어난 상황인지 파악도 못하고 경찰조서도 못 보아 자기들이 피해자인지 가해자인지도 모르는 한심한 행정을 하고 있다. 덤프트럭 양쪽이 모두 대형 보험사에 가입하고 대형사고라 보험금액이 크기 때문에 양측의 보험사가 신경을 곤두세우고 피해 조사를 벌였기 때문에 해룡이가 속한 보험사는 조사에서 소외당하더라도 큰 문제가 생기지 않아 다행이었다. 이후의 보험사간의 문제는 건교부산하 차량 연구소에 있는 연택이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일산 병원의 담당 의사를 참 잘 만난 것 같다. 실력도 있고 환자의 입장에서 치료를 하는 배려가 있다. 새로 지은 병원이라 병원도 크고 깨끗한 일산병원에서 뇌수술을 10시간에 걸쳐 수술을 하고 한 달 후에는 페에 물이차서 수술을 또 하고 중환자실에서 퇴원하기 전에 장에 피가 고여 응고된 것을 또 5시간의 수술을 하였다. 뇌에 물이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뇌에서부터 위로 호스를 영결하는 샨트를 하였다.
해룡이가 지금은 의식이 회복되기 시작하였으며 목에 호스를 박고 죽을 먹고 말은 못하지만 지금부터는 회복속도가 매우 빠르게 진행되는 것 같다. 지금 예측하면 중증 장애자는 면하고 약간의 후유증은 있을지 몰라도 제대로 사람이 되어서 퇴원할 것 같아 다행스럽다.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길 때까지 처갓집 모든 식구가 매달려 정성을 다 하였다. 일반병동에는 집사람이나 은선 어미가 너머 자주 병실을 들락거리니 해룡이 댁이 오히려 오지 않았으면 하는 눈치다.
해룡이가 정신이 들가말가 하는 12월 24일, 느닷없이 해룡이 4촌인 해수가 이대 부속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단다.
전북에 있는 하수처리장건설 감리회사의 부장으로 있다 작업이 종료되어, 종로5가 집에 와서 다음공사를 대기하고 있는 중에 크리스마스이브에 사고를 당한 것이다.
술을 좋아하던 해수가 술을 거나하게 먹고 동네 슈퍼에서 딸애들 줄 음료를 사 가지고 집에 가던 중, 계단에서 앞머리를 부딪치고 뒤로 넘어져 뒤 머리를 또 부딪쳐서 뇌진탕이 되어 동대문에 있는 이대 부속병원 중환자실에 입원을 하게 된 것이다.
넘어져 있는 해수를 늦게야 슈퍼주인이 발견하고, 해수 딸에게 연락하여 병원에 오니 머리 속에 피가 꽉 차있는 상태다.
해수 부모로부터 자매까지 해수를 살리려는 의지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조금만 살리려는 의지가 보인다면 바로 옆에 있는 서울대 병원으로 가면 될 것을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대 동대문 부속병원은 지금 병원을 이전하려고 의사나 간호원도 별로 보이지 않고 환자도 없는 쓸쓸한 병원에 입원을 해 있는데, 부모나 자매는 환자가 오래가지 않고 빨리 죽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입원한지 닷새 만에 해수는 치료도 못 받아보고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 해수가 생전에 아무리 보기 싫은 일을 했더라도 부모와 자매의 행동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다.
병원에 빈소를 차렸는데 빈소를 지키는 사람이 없다. 첫날은 상주 없는 영정에 예를 갖추고, 다음날은 혹시나 밤을 새울 것을 예상하고 빈소에 갔는데 분위기가 썰렁하고, 예금통장 가지고 큰소리가 나고, 계속 있을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빈소에 조문객이 이렇게 없는 것도 처음 보았다. 자식이 없어 해수 두 딸이 고모들 눈치 보며 울지도 않고 상주노릇을 하는데 무슨 집안이 이런가, 참으로 한심하게 보인다. 자식이 죽었다고 부모는 보이지도 않는다.
해수는 생전에 불교를 믿고 불교 청년회활동도 열심히 한 불교도인데 영정에 천주교 십자가가 붙어있다. 부모가 생전에 천주교로 개종시킨 것 같다. 본래 해수집안은 대대로 내려오는 불교집안인데, 해수어머니가 천주교를 믿으면 죽었을 때 염도 공짜로 천주교에서 해주고, 장사도 천주교식으로 성대하게 치러주니까 남의 눈치 안보고 장사를 치를 수 있는 장점이 있으니, 모든 식구가 천주교를 믿어야 한다고 했다. 천주교를 믿기 때문에 남이 우리 장례식 때에 안와도 되니, 남의 장례식 같은 데를 안가도 된다고 친척집의 애경사에 발걸음을 안 비추더니, 자식의 장례식이 이 꼴이 되고 말았다. 발인식에 4촌인 해명이 까지 안가니 관을 들을 사람이 없었단다. 추한 장례식의 극치를 달린다.
처형인 유성이 어머니는 소뇌 축소증으로 쓰러져 입원하여 상계동 을지병원에서 수술을 하고 거의 식물인간같이 이 병원 저 병원으로 옮겨 다니는지가 2년이나 되었다. 서울의 각 시립병원을 3개월씩 섭렵하며 지금은 동부시립병원에 있다. 환자는 시간이 갈수록 온몸의 근육이 축소되어 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정신은 멀쩡하여 눈만 껌벅거리고 있다.
처음 수술을 하고 의사가 목에 줄을 박자고 할 때 동의해 주지 말았어야 하는 것을 ‘나는 와이프를 사랑해’ 라며 3개월 시한부 인생인줄알고 유성이 아빠가 동의한 것이 이지경이 된 것이다. 우리 집사람은 이런 경우를 많이 경험하여 ‘나의 형제이지만 동의하면 안 된다’ 고 유성이 아빠를 설득해도 안 되었던 모양이다.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든지 환자가 나을 수 있다는 희망이 있을 때 결심을 해야지 환자를 이렇게 만들어 놓은 상태에서는 진퇴양난이다.
장인이 다리를 못 써서 수십 년 동안 방안에서 고생을 한 것을 보았고 해명이도 현장에서 떨어져 병원에서 몇 개월 고생했다는데, 처갓집에 이제는 더 이상의 우환이 없고 활기찬 가정이 지속되기를 기원 한다.
*혁범 자동차 매니아
나는 혁범이가 자동차에 그렇게 관심이 많고 깊이 있는 지식이 있다는 것을 작년에 느끼게 되었다. 자동차의 관심은 연택이만 있는 줄 알았는데 내 아들이 그에 버금갈 줄은 몰랐다. 연택이는 아예 그쪽으로 취직을 하여 일생동안 자동차 관계로 먹고 살지만, 혁범이는 순수한 자동차를 즐기는 마니아로 남아, 자동차를 손보며 토요일 일요일은 악착같이 끌고나가 휴일을 즐긴다.
혁범이의 자동차 관련사건은 혁범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에 일어났다. 포니나 맵시등 승용차 뒤에 붙어있는 로고를 몰래 떼어 한 봉투 가지고 왔다. 친구의 말에 의하면 로고 하나에 서비스 공장에 가서 팔면 삼 사백원하니 돈이 된다고 하여, 길거리에 세워져 있는 승용차에서 몰래 로고를 떼어 가지고 온 것이다. 요즈음 서울대에 합격하라고 소나타의 S자만 떼어가는 것 하고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
집에서 로고를 엄마한테 들켰다. 엄마가 열불을 내며 누가 너보고 도둑질을 하라고 했느냐고 큰소리로 야단을 쳤다. ‘너 같은 놈은 감옥에 가서 혼이 나야 한다’ 고 파출소로 끌고 간다. 혁범이는 안 간다고 울고 다시는 그런 짓 안한다고 울며불며 용서해 달라고 한다. 바늘 도둑이 소 도둑 된다고 이런 짓 하면 안 된다고 야단친 소란 끌에 울음은 끝이고 일단락이 되었다.
자동차 왕 왕서방이라는 스토리가 있다.
자동차 공장 사장 왕서방이 자동차를 잘 만들고 예쁘게 만들고 첨단으로 만들어 많이 팔아서 부자가 된다는 줄거리다. 이 자동차 왕을 초등학교 내내 학년이 올라갈 때마다 학교에서 글을 써 오라면 조금 살을 부쳐 졸업할 때까지 써먹더니, 중학교 고등학교 가서도 계속 한 레퍼토리로 왕서방 스토리를 팔아먹는다. 고등학교 때는 이 왕서방 자동차가 하늘을 날라 다니고 접었다 폈다 도하며, 제 나름대로의 줄거리로 가닥을 잡아간다. 자동차 왕사장만 죽어라 하고 국 끓여 먹는 것도 대단하지만 다른 책은 읽지를 않고 버팅 기는 것도 대단하다. 다독을 하는 혁진이는 상식이 풍부한데, 혁범이는 지독스럽게 책을 읽지를 않는 대신 순간 재치가 번득여 조금의 상식 가지고 다 커버해 나가는 재주가 있다.
혁범이와 같이 차를 타고가면 앞에 가는 차를 보고 ‘저게 무슨 차야, 저건 무슨 차야’ 하며 차종을 계속 묻더니 조금 커지니 자기가 알아서 구별을 한다. 알아서 구별할 때쯤에는 우리나라 차종이 급격히 여러 종류로 생산할 만큼 자동차 산업이 발전하고 있었다.
현대 포니2를 쏘나타로 바꿀 때 포니를 판다고 하니, 혁범이가 자기가 다니고 있는 학원의 기사를 데리고 와서 그 기사에게 팔았다. 초등학교 때에 벌써 자동차 중개까지 한 꼴이다.
소나타를 폐차 처분하고 혁범이와 엄마용으로 중고 엘란트라를 사 주었다. 엄마는 내 승용차도 마음 놓고 사용하니 엘란트라는 혁범이 용이나 다름없었다. 이 중고 엘란트라를 열심히 닦고 갈고 정성을 드린다. 처음으로 자기차라 그러려니 하고 보았다. 이 엘란트라가 타이밍 벨트가 끊어져 고치는 가격과 그런 정도의 차를 사는 값과 엇비슷하니 폐차 시켜 버렸다. 혁범이는 폐차 시키는 것이 무척 아까운 모양이다.
중형차인 대우 레간자를 중고이지만 동급의 다른 차와 비교할 때 무척 싸서, 엘란트라 폐차시킨 지 닷새만인 2006년 8월 21일 3백 8십에 구입했다. 차량등록도 혁범이 이름으로 하니 그렇게 기뻐한다. 대금도 혁범이가 냈다. 완전한 자기 명의로 자기차가 처음으로 생기니 매우 흡족한 모양이다. 나도 레간자가 이렇게 쌀 줄은 몰랐다.
강서 자동차중고시장에서 차를 구입하는데 매매상을 쫓아가다가 교통사고가 났다. 매매상이 처음에는 부천입구의 자동차시장에서 실물이 없으니 강서자동차시장으로 안내하는데 앞에서 매매상이 자기차로 인도하고 나는 혁범이를 태우고 쫓아가는데 신호등이 걸렸다. 빨간불에 매매상이 잠시 정차하더니 좌회전을 한다. 나도 매매상을 쫓아가느라고 1차선에서 좌회전을 하는데 느닷없이 마티즈 소형차가 같이 좌회전을 하며 내 그랜저 조수석 앞바퀴를 받아 앞 휀다와 범퍼까지 나가버렸다. 마티즈가 2차선에서 우리가 좌회전을 하니 쫓아서 좌회전을 한 모양인데 문제는 마티즈가 과속을 하여 받았기 때문에 내차는 휠어라이먼트까지 해야 했다. 캄보이하는 매매상이 좌회전을 그 찬스에서 하지 않으면 사고는 발생하지 않았는데 원인은 매매상의 캄보이 능력 부재이나 사고는 내가 났으니 어이가 없는 일이다.
더 황당한 일은 마티즈 운전하는 아줌마가 자기가 받아놓고 나보고 받았단다. 양측의 보험사에서 나와 현장을 보고, 누구의 잘잘못을 가릴 것 없이, 수리금액이 보험수가가 올라갈 만큼 많이 나오지 않고, 신호 위반을 양쪽에서 모두 했으니, 쌍방과실로 처리하는 것이 현명하다고 하여 쫓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런 곡절 끝에 구입한 혁범이 레간자는 약간의 손을 보는 수리는 하였지만 지금까지 잘 굴러다닌다. 혁범이의 차 관리는 상상을 넘을 정도로 정성을 쏟는다. 인터넷에서 부속이나 보조 부품을 구입하고 차는 광택을 내며 자기차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신경을 쓴다. 대학교 시절에 딴 운전면허로 운전을 하는데 운전 실력이 빼어나다. 주로 집 앞에 세워둔 차는 토요일이나 일요일에는 어김없이 가지고 나가 지겨울 정도로 놀러 다니고 밤늦게 온다.
내가 운전을 해보니 대우에서 레간자 처음 출고할 때 광고에 소리 없는 레간자라고 광고를 열심히 했는데 엔진소리가 소나타보다 오히려 더 나고 처음 스타트할 때에 액셀러레이터가 무겁게 작동을 하는데 주행할 때는 아무 이상이 없다. 지금은 온도 게이지만 정상이 되면 한참 탈것 같다.
이런 차를 엄마는 혁범이 출근을 할 때, 새벽마다 영동시장 혁범이 회사 출근 버스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라다 주는데 짜증도 안내고 즐겁단다.
*태양광 발전 설치
우리 집 지붕에 태양광 발전을 하는 솔라 시스템을 금년 봄에 설치하였다.
태양광 발전은 주택 건물 지붕에 솔라 모듈 24매를 설치하여, 이 모듈이 태양광을 받아 3Kw의 발전을 하게 되여 있다. 발전된 전기는 한전에서 설치한 계량기에 연결되어 집에서 사용한 전기가 남으면 계량기가 역 회전을 하여 한전에 보내지고 모자라면 모자라는 만큼만 한전에 전기료를 납부하는 방식이다.
우선은 지붕에 내리 쪼이는 태양광으로 발전을 하게 되니 햇빛이 비취는 한 영구적인 발전을 할 수 있고 무공해에 소음도 없고 옆집에 피해도 주지를 않아 설치를 할 수 있는 공간만 되면 자연을 활용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에 태양광 발전시설을 할 수 있는 기술이 미약하여, 과연 설치한 설비가 얼마만큼 오래 사용할 수 있고 견고 하느냐의 문제가 있다.
나는 30년 전에 태양열로 하는 솔라 시스템을 관심 있게 보아 당시에 태양열 솔라 시스템을 설치하려고 계획한 바가 있다. 이 당시의 태양열 솔라 시스템은 지금같이 전기를 발전하는 것이 아니다. 태양열로 모듈에 들어있는 물을 덥게 하여 온수를 만들어 사용하는 방법이라, 온수를 많이 사용하는 가구 외에는 커다란 메리트가 없었다. 지금은 온수가 아니라 태양광으로 전기를 생산하니 사용하는 활용도가 훨씬 높아 설치비용만 싸다면 추천할만한 발전 설비다.
에너지 관리공단에서 태양광 솔라 시스템을 설치하는데 정부보조금으로 2006년에는 설치비의 70%를 보조하고 본인 부담금은 30%면 된단다. 2007년에는 보조금이 60%, 2008년에는 50%로 하향조정 된단다.
나는 2006년에 신청을 하였으나 시공을 하지 않아 2007년에 설치를 하였는데 2006년도로 적용하여 30%의 신청자 분담금을 부담하였다.
설치회사의 견적을 받으니 총 공사비를 27,500,000원도 있고 2천 2백만 원도 있어 후자를 선택하고 5백만 원의 분담금으로 해결하였다.
설치는 2007년 4/29일 하루 만에 설치를 완료하였다. 태양광 직류전기를 교류로 변환해 주는 인버터를 달았는데 인버터의 표시기가 일반 사용자는 보기 어렵게 만들어져 있다. 현재 발전량이나 누적 발전량 등을 알 수가 없어 일반인이 쉽게 보고 알 수 있게 수정되어야 한다.
전력 생산량을 보니 한달에 8, 9만원정도의 생산량이니 아무 고장 없이 정상적으로 전력을 생산해 준다면 5년이면 자기 분담금은 해결하고 다음부터는 수익이 계속 될 것이다.
우리나라도 자연을 이용할 수 있는 태양광 발전을 발전시키고 설비자재도 국산화하여 가격도 저렴하게 자질도 양질로 생산하여야 한다. 수입해 들여오는 모듈도 인버터도 충분히 국산화 할 수 있는데 기업체에서 자체개발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지 않다. 설비업체는 중소업체가 난립하여 정부 보조금에만 눈독을 드리는 형상이다. 건실한 업체가 계속 나타나고 애프터서비스도 잘하여 주는 업체를 기대한다. 태양광은 세계적으로 3, 40%씩 성장하는 유망산업이다.
*55톤 크레인 매각
55톤 크레인이 샐러리맨 생활을 하다가 처음으로 구입하여, 중기 업계에 내가 발을 처음 드려놓은 계기가 된 중장비다.
사업자 등록번호도 내서(105-57-62771 영등포세무서 1989. 4. 17일) 처음으로 공식적인 사장이라는 명칭도 달게 되었다.
55톤 크로라 크레인은 형식이 Kobelco 7055인 일본 고베스틸제품으로 토목공사에 사용하는 크레인이다.
일본에서 수입하여 인천항에 도착하였을 때 집사람과 같이 어떻게 생겼는지 구경하자고 인천항 부두에 가서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이렇게 생겼구나 하고 감격했던 기억이 있다.
오퍼상인 근환 상사를 통해 미스비시 한국 지사에서 1989. 4. 1일 L/C open을 하여 4.25일 도착한 것인데, 크레인 실물은 한국에 한대도 없고 카탈로그는 크레인 모형이 설계도 같이 그려져 있어 사진 한 장 못보고 구입했으니 무모한 짓이기도 하다. 전문가가 보고는 신출내기 비린내 난다고 보았을 것이다.
사실로 건설 토목의 문턱에도 못 가본 입장에서 더군다나 크레인 업계는 하나도 알지도 못하고 어떻게 작업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장비를 수입부터 해 놓았으니 우려하는 목소리는 당연한 일이다.
나의 경력은 경영학을 전공하고 제조업체의 경리나 관리만 보다가 생소한 건설의 건자도 모르면서 뛰어들었으나 야밤의 불속에 뛰어드는 불나방 꼴이었다.
이 크레인은 코벨코 7천 시리즈로 처음 만든 것인데 고베스틸이 미국의 P&H 회사와 기술제휴계약이 만료되어 고베스틸이 자사 모델로 처음으로 제작하여 판매하는 것으로 한국에는 아직 판매 대리점을 계약한 회사가 없는 초창기 모델로 고베스틸의 최초 시범작품이다.
한국 종금을 통해 한국기업리스에서 5년 리스상환으로 수입했다. CIF $233,075 @669 155,927,495원에 관세외 45,218,960원, 선임 10,638,219원으로 원가는 211,784,674원이다. 딸라 LIBO금리로 리스계약을 했으나 계속환율이 올라가고 규손금에 장비 인수 시에 원가의 10%까지 리스사에서 걷어가 5년간 리스사에 납부한 것이 원금의 곱절이상으로 리스사의 이자받아가는 방식이 등골을 휘게 한다.
크레인을 처음 사게 된 원인은 대호중기 박윤풍 사장의 세무회계를 보아주면서 한번 해 보라는 권유로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 하이드로 크레인 8톤이나 16톤을 고르다 크로라 크레인55톤으로 낙착을 하게 되었다.
박사장이 나를 사무실에다 데려다 놓고 회계와 영업을 시킬 의향이었다. 지독한 이기주의와 대인관계가 전혀 없는 박사장을 만나 내가 크레인을 수입한지 한 달 만에 박사장사무실에서 쫓겨나 나 혼자 아무도 없는 황량한 벌판에 내팽겨 처졌다. 처 고모할머니 아들이라는 헝겁부치에, 필요할 땐 조카사위라고 소개해 놓고 내 자존심을 짓밟는다. 일생동안 이런 부류의 인간을 상대해 보지 않아 망신살만 당하고만 입장이지만 더 이상 그 이름을 입에 올리고 십지도 않은 인간이다. 자기가 필요할 땐 상대의 입장은 생각 않고 찾아오는 이런 인간이, 내 친구가 감사로 있는 한국 종금에 내가 외화를 크레인 두 대분 해 놓고 한대를 하여 한대 분이 남은 것을 알고는 잽싸게 자기도 한대 신청했다. 당시는 외화가 부족하여 외화로 리스를 한다는 것은 특혜나 마찬가지다.
황야에 혼자 있다고 죽을 수는 없는 일 아니냐. 전화번호부 놓고 건설이나 중기라고 보이면 무턱대고 전화하고, 거리에서도 건설회사라고 보이면 명함 한 장 들고 들어간다. 장비 사용하는 업체에 들어가서 중기 제원표를 펴고 명칭이 사장인 내가 간단한 제원표를 볼 줄을 모르니 어쩌랴. 공사부장이 딱하던지 자기가 제원표를 보고 결정을 한다. 초창기의 우여곡절 끝에 잘 버틴 긴 것은 당시에 우리나라 장비가 부족하여 나 같은 신출내기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Crawler Crane 장비를 가지고 힘들었지만 리스료를 갚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지나게 되었다. 업계에서 5년 이상을 뛰니 삼원중기라는 명성도 서울 인천 부산까지 알려졌다. 나름대로의 장비임대에 자신이 생겨 80톤짜리 crane을 또 리스로 하다가 IMF 환란으로 집도 날려야 되는 혼 바람이 났다. 지금은 다 수습이 되여 안정을 찾고 있으나, 초등학교만 나와도 할 수 있는 별것 아닌 장비임대도 굴곡이 있는 것이다.
55톤 크레인은 수입한지 18년이나 되어 고물 취급을 받으나 아직까지 일은 잘 하고 있다. 건설 현장의 규모가 커져 옛날에는 55톤이 대형으로 취급받았으나 지금은 소형으로 전락하여 150톤 250톤이 판을 친다. 나보고 관록이 있으니 해보라는 것을 비축한 돈도 모자라고 나이도 원로에 들어 결심이 잘 안된다.
55톤은 Pile 박기나 서비스 작업이 대부분이다. 요즈음 파일업자는 현장 반장이나 기사출신이 대부분이고 집은 셋방살이하며 남의 장비 빌려서 하청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라 공사를 하다가 손해 보면 장비비 떼어먹고 도망가기 일쑤다. 일년이 이렇게 2, 3개월 떼어먹히면 일년 헛장사다. 나는 재수 없게도 몇 년 이런 저질의 업자에게 걸려 재미를 못 보았다.
이런 와중에 일본 스미토모공장 방문 시에 길우상사에서 안내해준 김주학이 오퍼상을 자기가 한다며 중동 두바이에 수출을 하니 55톤을 팔란다. 1억 2천에 팔기로 하고 계약하니 파란만장한 55톤은 사라지고 80톤만 남게 되었다.
생우회에서 대만 관광을 갔을 때 듀바이행 배가 입항하여 55톤 크레인을 선적해야 된다며 서류의 인감문제로 국제전화가 오고 사무실의 임사장이 혁범이에게 전화를 하고 통화도 잘 안되는 대만의 산골짜기에서 가이드의 전화를 빌려 통화를 하는 해프닝도 벌어졌다.
*컴맹 탈출과 카페개설
지금 나는 인터넷 다음 카페에 등록과 네이버 지식인에 기고하는 실력까지 되었으니 내 친구들은 인터넷이 뭐야 하고 묻는 정도에 비하면 비약적인 발전을 한 것이다.
우리 집은 두 아들이 전자공학과를 나왔으니 컴퓨터에서는 일가견이 있으며 지금도 컴퓨터의 인터넷으로 밥벌어먹고 살 으니 현대 산업의 총아인 인터넷의 최고 수혜자라고 봐야 할 것이다.
우리 집에서 컴퓨터를 처음 구입한 것은 혁진이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대우에서 나온 최신형 16비트 286 컴퓨터를 구입한 것을 비롯하여 혁진이 대학교 입학 선물로 당시엔 최고급의 펜티엄 586 컴퓨터에 프린터기 까지 구입하였고, 혁진이가 해 달라는 사양대로 모두 해 주었으니 혁진이는 더 바랄 것이 없었다. 혁진이 캐나다에 취직하여 간다고 할 때엔 고성능 노트북을 사주어 지금까지 잘 활용하고 있다.
혁범이는 혁진이 눈치 보며 조금씩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전부인데, 혁범이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 컴퓨터 경시대회에 반에서 뽑혀 출전 하게 되어, 컴퓨터 학원에서 속성으로 배워 출전을 하였으나 입상은 못하였다. 지금은 삼성에서 핸드폰 영상으로 해외에 출장을 다니는 실력이다. 대학교 졸업 시에 따는 자격증을 고등학교 때에 정보통신기사 1급을 땄으니 조숙한 편이다.
두 아들 모두 컴퓨터를 사 주었다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연구하고 컴퓨터에서 지식을 습득하였다고 보기보다는, 컴퓨터를 가지고 대학교 다닐 때까지 게임만 열심히 했다는 것이 올은 말일 것이다. 게임하는 만큼 프로그램개발에 열심이었다면 지금쯤은 프로그램 대가가 되었을 것이다.
지금 우리 집에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가 각 방에 하나씩 5대가 있다. 다 혁범이 손으로 조립한 공이다. 집에 컴퓨터 한대만 있어도 괜찮은데 5대나 있으니 어떻게 쓰던지 간에 사람들이 보면 놀랄 일이다.
우리 집사람은 인터넷에 연결하여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실력이 있고, 이 메일을 보내는 실력이 된다. 나는 집에서는 인터넷 바둑을 밤새도록 두느라고 집사람에게 있는 대로 핀잔을 듣고도 아직 고치지 않고 있다.
나는 회사의 홈페이지를 10여 년 전 두 아들이 만들어 3부자 합작품인 크레인 홈페이지를 하이홈에 연결하여 흐뭇해하고 있었는데, 이 하아홈이 소규모고 엉망이라 2005년부터 연결이 안 되고 하이홈에서 연결된 포털싸이트에 내 홈페이지는 삭제되고 말았다.
이때에 엠파스 자회사라며 미래아이콘이 나에게 홈페이지도 신식으로 다시 잘 만들어 주고, 5대 대형 웹싸이트에 Overture Sponsor Link도 2년간 해 주고 도메인도 주고, 2년간 관리해 주며 2년 후에는 반가격에 계속 관리해 준다고 하여 1,210,000원을 송금해 준 것이 화근이 되었다.
홈페이지도 안 만들어 주고 스폰서링크도 2개월 만에 끝이고 말았다. 결국은 2006년 일년여동안 옥신각신 끝에 52만원에 합의하여 송금해준 반값에 도메인만 등록한 꼴이 되고 말았다.
www.samwoncrane.co.kr 이 회사 도메인이다.
현대의 젊은 세대가 최첨단 IT산업에서 일하며 순발력 강하게 정보산업을 잘 이끌고 있는 줄 알았더니 미숙한 컴맹자들을 상대로 얄팍한 돈 벌이에만 급급한 놈들이 더 많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다음은 문제 해결되기 전의 미래 아이콘에 보낸 내용증명이다.
내 용 증 명
문서번호 ; 06-1010
수 신 ; (주)미래아이콘 대표이사
서울시 중구 서소문동 39-1 신아빌딩 703호
참 조 ; 오 팀장, 백 팀장, 강지정, 관리이사.
제 목 ; 회비 반환의 건
1. 귀사의 번창함을 기원 합니다.
1. 본인은 2005년 10월 26일 2년간 스폰서 링크와 홈페이지를 제작하여주고 도매인까지 준다고하여, 본인의 홈페이지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전문가가 만든 세련된 홈 페이지를 갖어보고 싶은 마음에 1,210,000원을 지급하고 2년간 스폰서링크 계약을 하였으나 처음부터 약속이행이 되지 않아 2006년 1월 16일 계약을 취소 통보를 하였더니, 귀사는 2006년 1월 24일 회원취소 통지를 해왔읍니다.
1. 본인이 회비를 반환하여 달라고 여러번 재촉하였으나 현재까지 반환이 되지 않아 문서로 보내니 2006년 10월 31일까지 전액을 환급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환급이 되지 않아 귀사의 명예가 실추되지 않도록 노력하여 주십시요.
이해를 돕기 위하여 3개월도 않된 기간동안 일어난 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엠파스의 로칼사업부라며 Overture Sponsor Link를 2년간 월 5만원 꼴인 121만원에 하여주며 2년후에는 반값인 55만원에 하여주며, 홈페이지를 새로 제작하여 주고 도메인도 준다고 하였읍니다. 스폰서 링크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담당자의 설명을 들으며 링크를 이해 했읍니다. 홈페이지는 내것이 있다고 하니, 세련되게 멋있게 다시 만들어 준다고 하여 도메인도 받을겸 응락을 하였읍니다.
2005.10.26일 121만원을 지급하고 10.31일날 회원가입 및 도메인 등록양식을 전송하였는데 늦어도 10.28일부터는 스폰서 링크가 나간다고 하였는데 몇일이 지나도 소식이없어 연락을하니 미안하다며 곧 스폰서링크가 나간다는게 한달 반만인 12.14일 우리 이름도 아닌 삼양으로 나와 이의를 제기하니 12.21일에야 삼원으로 수정되였읍니다.
계약하고 보름안에 세련된 홈페이지 만들어 준다는 것은 허사고 지금까지도 만들어 본적이 없읍니다. 내 홈페이지를 참고하라고 하였는데도 만들지 않아, 금년 1월 중순 계약을 파기한다고 하니 1월 19일 내용은 없고 홈제목만 떴는데 엉뚱하게도 제조회사용입니다. 우리는 중기 크로라 임대업체인데 왠 제조회사에 품질관리가 나옵니까.
스폰서 링크가 나간지 20여일 밖에 안되는데 1월10일 느닷없이 오버추어 코리아라며 20만원이 다 소진되였으니 입금하라는 연락이와 당황스러워 미래의 담당자에게 물으니 엠파스의 자회사가 미래고 오버추어는 야후로 넘어갔다고하여 복잡한 그 회사속은 알 수 없고, 단지 2년간 스폰서링크를 계속 해 주던지 아니면 계약을 파기하고 지불한돈을 반환하라고 하였읍니다. 신세대에 편승하려다 망신당하고 사기당한 구세대 꼴이 처량하지만 업무처리가 이런식 이라면 재교육을 해야 할 것 같습니다.
2006. 2.1일 고객쎈타 팀장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하고 2.13일에 2월 말일까지 결론을 나에게 문서로 보내라고 하였으나 지금 까지 받지 못허였으며 참고 기다리다 반환하라는 문서를 보냅니다.
참고로 제 은행 구좌번호는 신한(조흥)은행 362-06-156770 입니다.
2006. 10.11일
서울시 영등포구 영등포동 7가 94-90
동보빌딩 302호
삼 원 중 기 권 오 찬
동기생 홈페이지가 ‘다음‘에 둥지를 틀어 자유게시판에 댓글이나 달다가, 2007년 2월 10일 나도 다음 포털 싸이트에 카페를 개설하고 내 여행기를 열심히 올리기 시작하였다.
권오찬이란 내 카페는 누가 와서 봐주는 것도 아니고 단지 우리 집 식구만 알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내 주변의 일들을 올리는, 나 혼자만의 카페나 마찬가지다. 여기에는 나의 국내 국외 여행기를 비롯하여 매년 우리 집의 대소사 그리고 자유게시판에 잡다한 글과 여행사진 앨범을 올려놓는 정도다.
Cafe.daum.net/koc1115 가 권오찬 카페다.
대형 포털싸이트를 다니다 보니 내 글이 올라온 것이 있어, 자세히 보니 내 카페에서 퍼다가 올려놓은 것이다. 이런 위력이 있구나 하고 포털 싸이트 네이버 지식인 란에 기고를 하기 시작하였다. 도량형이나, 기중기의 정의, 크레인과 화성의궤를 올리니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방문회수가 2천명 3천명이나 된다. 인터넷의 위력에 놀랐고, 나도 필요한 지식을 인터넷에서 많이 습득한다.
인터넷을 섭렵하는 친구들은 참을성이 없는지 문장만 길면 보지를 않고 쓰는 것도 깊이가 없고 너머나 얄팍한 것이 많아 충분한 지식이 내재해 있지 않다는 것이 나타난다. 지금까지 내가 쓰는 모든 것은 문장이 길고 사진도 들어가 있지 않으니, 인기는 없을 줄 아나 가능한 한 나는 구체적으로 쓰려고 노력을 한다. 내년에는 나도 짧은 문장으로 간략하게 서술하며 사진을 곁들이는 방법도 연구해야겠다.
나는 컴퓨터 덕분에 회계프로그램을 깔아 10여 년간 회사의 종합소득세 신고를 편히 할 수 있어 굉장히 효과를 보고 있다.
금년에는 옛날에 해외여행 갔다 온 여행기를 생각나는 대로 기억을 더듬어 써 보려고 한다.
*평생 처음 뽑은 대통령
2007년 12월 19릴 우리나라 제17대 대통령선거가 있었다.
나와 집사람은 이명박을 찍었는데 혁범이는 이회창을 선택한 모양이다.
혁진이는 카나다에 가 있어서 선거에 참여하지 못했고, 며느리는 카나다 시민권만 있어 아직 참정권이 없다.
내 나이 환갑을 지나 칠십이 가까이 오는 동안 여러 번 대통령 선거를 치렀는데 내가 찍은 대통령 후보가 당선되기는 평생에 이번이 처음이다.
내가 야당성향이 강한 것도 아니고 보수도 아닌데 내가 찍으면 대통령에 떨어지니 찍으면 떨어지는 징크스가 있는 모양이다.
김영삼, 김대중도 찍어봤는데 내가 찍을 때는 꼭 떨어지니 말이다.
우리나라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여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 기념식을 중앙청 앞에서 거행하여 정식으로 정부가 출발하였다.
제 1 공화국의 탄생이었다.
우리나라 초대 대통령 선거는 48년 7월 20일 국회에서 간선제로 이승만이 당선되었다.
2대부터 대통령 직선제가 되여 이승만이 재선되었고 3대 대통령선거 때는 투표일 4일 전에 강력한 야당후보 신익희가 급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3선되었다.
4대 때는 야당후보 조병옥이 투표 한 달 전에 병사하는 바람에 이승만이 당선되었으나 60년 3.15 부정선거로 4.19혁명이 일어나서 무효가 되어, 4대 대선을 다시 치르게 되었다.
제 2 공화국이 되어 다시 치른 4대째는 대통령제에서 내각책임제로 바뀌어 선거가 간선제로 바뀌고 의회에서 다수표를 획득한 장면이 내각 총리가 되고 차점인 윤보선이 명색뿐인 대통령이 되었다.
61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통치권자가 되어 제 3 공화국이 탄생하였으며 63년 대통령 선거제도가 다시 직선제로 바뀌어 5대에서는 박정희와 야당후보 윤보선의 대결장이 되었다.
나는 이 5대 때부터 대통령 투표권을 한번도 빠짐없이 행사하였다.
나는 5대 6대에서 윤보선을 선택하였는데 박정희에게 연패하고 말았다.
7대에는 젊은 기수 김대중을 찍었는데 근소한 차이지만 박정희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유신헌법이 들어서며 제 4 공화국이 되고 8대부터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는 간접선거로 체육관 대통령이 탄생하게 되어 한동안 투표를 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었다.
8대 9대를 박정희가 당선되었으나 79년 대통령 박정희를 정보부장 김재규가 시해하는 10.26사태가 발생하여 급기야 총리인 최규하가 10대 대통령에 당선되고 8개월 만에 11대 대통령에 황야의 무법자 전두환이 당선된다.
직접선거로 다시 돌아온다는 80년 정치의 봄이라던 김영삼 김대중 김종필의 3김의 환희는 사라지고 제 5 공화국이 세워진다.
12대 선거인단의 간접선거로 전두환이 당선되고 노태우의 10.29선언으로 야당이 원하는 모든 조건을 들어주며 직접선거로 다시 바뀌어 제 6 공화국이 된다.
40여년 만에 6공화국까지 왔으니 우리나라 헌법이 얼마나 누더기가 되었을지 뻔하다.
봉건주의나 왕정에서 민주주의로 발전하기 까지가 얼마나 험난한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이승만 시절에 런던 타임스가 우리나라에 민주주의가 도입되었다고 하니, 쓰레기통에서 장미가 피겠느냐고 혹평을 한지 40여년이 걸린 것이다.
직접선거로 돌아온 13대 대통령 선거에 여당인 노태우와 야당인 3김이 대결을 하여 3김은 다 잡은 토끼를 노치고 대권을 노태우에게 넘기고 만다. 3김이 욕심을 버리고 한사람씩 출마를 했으면 모두 편안히 대통령을 할 수 있을 것을 이때를 놓칠 수 없다고 야당 3김이 서로 싸우다 대권을 놓친 것이다. 이때 나는 김영삼을 찍어 또 고배를 마신 것이다.
14대 선거 때는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의 삼각구도에서 나는 3등을 한 정주영을 찍어 당선자를 내지 못하는 기록을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정주영을 찍은 이유는 독선적이고 박정희 보다 더 독재를 할 것 같은 정주영이지만,
울산 앞바다의 모래사장 사진을 들고 조선소를 만들어 배를 납품하겠다고, 세계굴지의 선박회사의 수주를 받아, 선박을 건조하여 대형선박을 납품한 정주영이라면, 우리나라 경제를 고도성장 시킬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타격을 받을 수는 있겠지만, 수백 년간 내려온 가난과 배고픔을 해결한 박정희에서 보듯 일정한 경제수준이 올라가, 국민소득 3만 불 정도에선 자연적으로 인권이나 민주주의가 펼쳐질 것으로 판단하여, 선진국으로 진입할 때까지는 모든 민생을 참고 이겨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당선된 김영삼은 군사독재와 결별한다고, 국민의 정부라는 기치아래 진정한 민주 투사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자만하여, 세계 각국에 다니며 큰소리치다가 입으로만 갱재 갱재 하며 경제의 기초도 모르면서 OECD에 가입하며 선진국 폼을 내다가, IMF라는 환란을 국민에게 안기어 거대한 국가 재산을 일거에 외국에 헌납하는, 졸렬한 정책을 수행하고 국가를 멍들게 한 민주투사다.
15대 선거는 여당인 이회창과 김대중의 대결인데 나는 이회창을 찍고 대권은 김대중에게 넘어갔다. 대쪽같은 이회창은 최소한 국가 기본은 살린다고 생각을 했는데 여당 경선에서 패배한 이인제가 나타나 고춧가루를 뿌린 것이다.
4수만에 처음으로 당선된 김대중은 IMF를 극복한다고 공적자금을 마구 풀고, 국민들의 돌 반지까지 거둬들였다. 망해가는 기업은 공적자금 받으려고 정치인에게 뒷돈 주며 줄을 서고 정부는 햇빛정치 한다고 북한에 막대한 자금을 퍼주어 국가 채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있었다. 국가 경제발전에 힘을 쏟을 생각은 하지 않고, 북한의 김정일을 만나 노벨 평화상을 타고, 노벨상금은 헌납한다고 하더니 꿀 먹은 벙어리다.
외국에서는 IMF때 한국에 컴뮤니스트가 대통령이 된다고 뉴스가 떠돌아, 한국에 있는 딸라의 유동자금이 물밀 듯이 빠져나가고 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한국의 기업을 외국에 팔아야 한다고 국내 기업을 덤핑으로 마구 팔아버렸다. 개국 이래 최대의 한국자산이 외국으로 넘어가, 옛날에 국가 자산을 지키자고 온 국민이 물산장려운동을 한 것이 무색하게 되었다. 조그만 외국 펀드회사가 우리나라 은행을 인수하여 3년만에 투자 원금을 훨씬 넘는 2조 5천억 원의 순이익을 남기는 일을 서슴없이 해 놓고 IMF를 자기가 극복했다고 자랑한다.
호남에서는 김대중이가 추천을 하면 촌 무지랭이도 국회의원에 당선하는 힘이 있으니 공천 장사만 해도 거금이 들어와 개인재산이 천문학적이라는 세평이 있다.
16대 선거는 노무현대 야당이 된 이회창의 대결인데 나는 이회창을 찍으며 이제는 내가 정말로 대통령을 뽑아보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선거는 뚜껑을 열어봐야 안다고 결과는 노무현이 당선되었다. 젊은층에게 인터넷을 활용한 선거 전략과, 사기꾼 김대업의 병풍이라는 흑색선전이 주효한 것이다.
노무현도 분배와 노동자를 위주로 하여 사회주의 정책을 표방하니 이제는 국가경제에서 서민경제까지 걱정하는 나라 살림이 되었다. 대통령으로서 품위 없이 말을 함부로 하여 권위를 추락시키고, 한번도 미국을 가본 적이 없다던 노무현은 대통령이 되고 세계 순방을 제일 많이 한 대통령이 되었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더니 공무원을 십만 명이나 늘리고 어용 시민단체들에 활동비를 주어, 국가를 운영하는 것인지 386 데모꾼들의 한을 풀려는 것인지 도저히 대통령으로 인정해 주고 싶지 않은 노무현이다. 국내에 있는 좌익 성향의 인사들은 노 정권 하에서 모조리 노출된 편이다.
17대 총선에는 여당의 정동영과 야당인 한나라당 이명박의 대결장이다.
여당의 정동영은 민심이 떠난 노무현과 연계하면 대선에 필패한다고 신당을 만들어 후보로 나왔고, 박근혜와 치열한 경선 끝에 후보로 지명된 이명박은 재산축적과정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생각지도 않은 이회창이 자기가 만든 한나라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나와 보수표가 갈라져 정권이 또 신당으로 넘어가지 않나 근심을 하게 한다.
나는 전적으로 이명박을 선택하였다. 삼십대 중반에 현대건설 사장이 되었다면 정주영과 비슷한 면이 많이 있을 것이다. 오너도 아닌 사장을 하려면 부하 직원을 혹독히 다뤄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 것이나, 우리나라 대통령 중에 실물경제를 이명박 만큼 알고 실천할 대통령은 없다.
나는 김대중 노무현의 잃어버린 10년을 찾기 위해서라도 이명박을 택했고, 국가 경제에 누구보다도 심혈을 기울이고 충분히 경제발전을 해낼 수 있을 것으로 확신을 한다.
대학교는 나와 같은 61학번이다.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얼굴 인상이 푸근하지 않아 얼굴이 사진에 많이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대선 결과는 이명박이 압도적 승리로 정동영을 누르고 17대 대통령에 당선되어 내 일생에 처음으로 대통령 당선자를 뽑았다.
역대 대통령 선거일
제 1 공화국
제 1 대 1948. 7. 20일 이승만 간접선거 정부수립
제 2 대 1952. 8. 5일 이승만 직접선거
제 3 대 1956. 5. 15일 이승만 직접선거
제 2 공화국
제 4 대 1960. 3. 15일 이승만 직접선거 4.19
1960. 8. 12일 윤보선 간접선거 재선거
제 3 공화국
제 5 대 1963. 10. 15일 박정희 직접선거 5.16
제 6 대 1967. 5. 3일 박정희 직접선거
제 7 대 1971. 4. 27일 박정희 직접선거
제 4 공화국
제 8 대 1972. 12 .23일 박정희 간접선거 유신체제
제 9 대 1978. 7. 6일 박정희 간접선거
제 10대 1979. 12. 6일 최규하 간접선거 10.26
제 11대 1980. 08. 27일 전두환 간접선거
제 5 공화국
제 12대 1981. 2. 25일 전두환 간접선거
제 6 공화국
제 13대 1987. 12. 16일 노태우 직접선거 10.29
제 14대 1992. 12. 18일 김영삼 직접선거
제 15대 1997. 12. 18일 김대중 직접선거
제 16대 2002. 12. 19일 노무현 직접선거
제 17대 2007. 12. 19일 이명박 직접선거.
간접선거 7회, 직접선거 11회. 직접선거(제4대) 1회는 무효.
직접선거 출마 회수는 김대중이 4번, 이승만 박정희가 3번.
간접선거 선출 장소는 1, 4대에만 국회, 나머지 4, 5공화국에서는 체육관.
*청계천 마라톤대회 참가
얼떨결에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2007 하이 서울 마라톤 대회인 청계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게 되었다.
고대 MBA 산우회에서 10Km 청계천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보자며 참가비2만원을 서울시에 납부해야하니 먼저 내라고 하여 납부하였다. 주관은 산우회가 아니라 마라톤회인데 MBA에서 총체적으로 밀어주어 마라톤에 참석하지 않아도 청계천 걷기대회를 겸하니 회원 가족도 모두 참석을 권유하고 있다.
서울시 청계광장에서 2007년 10월 7일 아침 8시에 출발하니 MBA는 7시 반 까지 삼성본관 뒤 소공원으로 모이라고 한다. 마침 결혼한 혁진이가 카나다에서 귀국하여 집사람보고 같이 청계천구경 시켜주라고 하며 아침에 같이 가기를 권유했다. 같이 가기로 동의하고 혁범이도 데리고 오라고 하였다.
나는 먼저 6시 반인 새벽에 집에서 출발하여 전철로 집결장소로 가니 여러 명이 와서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시에서 나누어준 번호표 6282번과 상의를 받았는데 MBA에서 별도로 상의를 또 마련하여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MBA옷으로 갈아입었다. 번호표 뒤에는 칩이 붙어 있는데 완주 후에 시에 반납하는 것이란다.
마라톤은 국민 학교 때 뜀박질 잘한다고 뽑혀서 한번, 대학 축제 때에 한번, 그리고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 60대 중반에 다시 한번 도전하는 것이다. 이 나이에 연습도 하지 않고 완주를 할지는 두고 보아야 알 일이지만 무리인 것만큼은 사실이다.
신발도 없어서 어제 백화점에 가서 런닝화를 하나사서 오늘 처음 신어보고, 옷을 입는데 초년병이라 어색하여 팬티를 입느냐고 물어보니 팬티는 안 입고 겉옷만 입는단다. 혁범이 수영복을 겉에다 입고 그런대로 모양을 갖추고 준비 운동에 들어갔다.
준비 운동을 하는데 집사람이 두 아들을 끌고 나타났다. 잽싸게 쫓아가 식구들에게 MBA옷을 입혀주어 같이 사진을 찍었다. 대회 후에 모일 식당인 삼우정에서 우물우물하다가 시간이 지체 되여 출발시간을 놓쳤다. 시청광장으로 빨리 쫓아가니 벌써 출발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덕수궁 앞에서부터 뛰어 청계광장을 지나 출발점에 가니 출발시설물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출발점을 통과하니 벌써 허덕거리기 시작하였다. 공짜로 500메타는 더 뛴 셈이었다. 마라톤을 뛸 때 손은 어떻게 하고 머리는 어떻게 하고 보폭은 어떻게 하고 숨고르기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나의 사전 지식도 없이 촌놈 등지게지고 달리듯 내 맘대로 내식대로 뛰기 시작하였다.
나름대로 달리다 보니 세운상가가 보인다. 숨고르기와 보폭을 나에 맞추어야겠다고 생각하며 뛰니 2Km 지점이 지나고 내 고등학교 자리인 두산타워가 눈에 들어온다. 우리가 늦게 출발하였지만 먼저 출발한 사람들이 뛰다가 지쳐 벌써부터 걷다 뛰다를 반복한다. 허리 디스크가 있어서 그런지 발걸음이 사쁜사쁜 해야 하는데 터벅터벅 무겁게 느껴진다.
청계광장에서 무학교 까지 왕복거리인데 동평화 앞에 오니, 신경통으로 왼쪽 무릎이 아파 파스를 붙이고 왔는데 근심했던 왼쪽 무릎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데, 허리 왼쪽부분이 통증이 오기 시작한다. 반도 못 온 지금 와서 장담은 할 수 없지만 죽을힘을 다하여 참고 완주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내 옆에서 나를 흉내 내고 쫓아오던 젊은이도 사라졌고 나는 똑같은 스타일로 달리기 시작하는데, 인후에 문제가 있어 잘 때도 자리끼를 놓고 자는데, 인후가 마르기 시작하여 물은 없고 사탕이라도 주머니에 넣고 왔으면 해결할 문제를 지금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데도 자꾸만 사탕 생각이 난다.
시에서 준 옷은 반소매 인데 MBA옷은 긴팔이라 무척 후덥지근하다가, 지금은 그 상태가 지나 긴팔인지 짧은 팔인지 옷을 입었는지 벗었는지 구별할 필요 없이 몸은 열기로 가득 찼다. 4Km지점을 지나 무학교 까지 한참을 가야겠구나하고 뛰는데 무학교가 바로 앞에 나타난다. 집사람이 다니던 무학여고 근처다. 무학교에서 반환점을 회전하니 몸은 힘들어도 완주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제는 행사요원이 길거리에 물도 비치하여 목도 추길수가 있어서 좋았다.
청계천 양옆은 교통순경이 차 없는 거리로 교통을 차단하여 청계로를 우리만 뛰는데 차가 없으니 한적하고 조용하다. 마라톤은 젊은이가 많고 장애인도 눈에 뛰는데, 산에 가면 그 많던 노인네가 별로 눈에 안 띈다.
반환점을 돌아오니 이제 요령도 생기고 심페 기능에 자신도 생겨 보폭을 약간 넓게 하여 뛰니 속도가 내가 느끼기에도 많이 빨라지는 것을 알겠다. 우리 집 식구들은 심페기능이 좋아 물속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오래 참을 수가 있어 숨에 대해서는 자신감이 있는데 그 효과가 여기서 나타나기 시작한다.
2Km전방에 오니 힘은 들지만 뛰는 것이 지루하게 느껴진다. 머리에다 손수건을 말아 질끈 동여매고 대단한 선수처럼 뛰기 시작했다. 종착역인 시청의 광장 입구에 오니 종착지의 선이 보이지 않아 안쪽으로 뒤여 들어갔다. 완주 후에 걸음을 걸으니 오히려 다리가 후들거리고 걷는데 중심이 잡히지 않는 것 같다.
완주 후에 칩을 반납하니 한 시간 후에 ‘2007 하이서울 10Km마라톤 6282번 참가자 권오찬 기록 1;15;41’ 이라고 문자 메시지가 핸드폰으로 날아왔다.
이런 정도라면 아직 힘이 남아 있으니 10Km가 아니라 하프 마라톤도 이를 악물고 뛰면 완주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번 마라톤의 자랑이라면 한번도 걷지 않고 계속 뛰었다는 것이다. 완주 했다고 음료 봉투 하나와 완주메달을 받아든 후에 MBA 뒤처리 장소인 삼우정 식당으로 향하였다.
식당에서 집사람과 두 아들을 만나 회식장소에 앉아 식사를 하는데 사회자이영목이 나를 지목하며 하는 말이, 어제 산우회에도 오고 오늘 마라톤을 완주한 6학년6반 대선배를 소개한다며 치켜세운다. 지금 졸업한 후배와는 30년 이상 차이가 나며 해병대 장교 출신이라고 소개하며, 아들들이 일어나니 우람한 두 아들을 보고 후배들이 와 ~ 하는 함성이 나온다. 식구가 모두 일어나 박수를 받으며 네 식구 참석한 기념으로 기억 베게를 선물로 받았다.
사전 준비도 없던 마라톤을 완주하여 기분도 좋고 네 식구가 모두 모여 청계천도 구경하니 흐뭇하기도 하고 MBA에서 후대하니 뿌듯하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