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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미술애호가 이장현씨가 본 ‘클림트’ | ||||
29일 어렵사리 전국 8개의 극장을 잡아 영화 ‘클림트’가 개봉됐다. 평소 화가 구스타프 클림트에 관심이 있던 사람들은 어지간한 대형 멀티플렉스 영화관 한곳만도 못한 초라한 개봉관 숫자를 탓할지 모르지만, 요즘 예술영화는 단관개봉도 감지덕지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래도 몇몇 극장주들은 이 영화에 사람을 끄는 뭔가가 있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이 영화는 무엇으로 사람을 끄는 것일까?
극중 클림트를 연기한 존 말코비치는 그 존재감만으로도 관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할리우드에서 몇 안 되는 연기파 배우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이마에는 주름살이 깊이 파였고 머리도 벗어졌지만, 그는 젊은 배우들의 근육이나 성적 매력 대신 배우 본연의 가장 강력한 무기인 연기를 영화 전면에 내세운다. 날카롭다. 역시 배우란 생강처럼 늙고 묵어야 제맛이다. 영화는 일단 화가 클림트의 예술성과 배우 말코비치의 흥행성이라는 두가지 요소로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에 대한 흥미를 유발시키는 데 성공했다. 영화를 관람하며 상상으로나마 꿈꾸던 클림트의 아틀리에를 엿볼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스크린 속 클림트의 작품들은 대부분 충실하게 재현되었지만, 일부분은 불가피하게 현대의 상상력이 동원된 것이다. 클림트 역작의 하나로 꼽히며 영화 첫머리 ‘KLIMT’라는 이니셜과 함께 등장하는 3편의 학부회화(철학, 법학, 의학) 중 ‘의학’은 2차 세계대전 말엽 나치 친위대의 방화로 그림을 보관중이던 임멘도르프 성이 불타면서 다른 작품들과 함께 소실되었다. 현재 남아 있는 도판은 아쉽게도 모두 전쟁 이전에 촬영된 흑백사진뿐이다. 세계대전 전에 태어나 클림트의 그림을 관람할 수 있었을 만큼 장성했던 이들 중, 현재까지 살아남아 ‘의학’의 화려한 색채를 증언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그 때문에 영화 속 다른 작품들은 몰라도 영화 도입부의 애매한 컬러는 상당부분 감독의 상상력에 기인한 것임을 미리 알아두자. 영화를 보는 내내 아쉬웠던 점 하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배우들 모두가 전체적으로 말랐다는 것이다. 젊어서부터 살짝 대머리 기가 보였던 존 말코비치는 이제 클림트만큼이나 훌륭한 ‘진짜’ 대머리가 되었다. 그러나 이 천하의 말코비치조차 그 육덕(肉德)만큼은 클림트를 따를 수 없었나보다. 클림트에 싱크로가 맞춰진 말코비치의 극중 연기는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지만, 원래 클림트는 그 눈빛만큼이나 뱃살과 옆구리살 또한 인상적인 화가였다. 설사 감독 라울 루이즈가 “바짝 마른 존 말코비치 외에는 클림트를 연기할 배우가 없다”라고 강변하더라도 세기말 세기초 벨르 에포크(Belle epoque) 빈을 재현하는 데 동원된 21세기 할리우드 여배우들의 영양상태 역시 클림트 당시의 모델들에 비하면 헐벗고 굶주렸다고 할 정도로 ‘슬림’하다. 클림트의 회화 속에서 등장하는 풍성하고 퇴폐적인 여성들을 영화에서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살찐 배우 기근인가. 다이어트 열풍이 영화 잡는다.
영화는 ‘클림트’라는 소위 팔리는 화가의 상업성에 주목한 나머지 그의 예술보다는 지나치게 클림트라는 인물의 여성편력, 가십에 집착하는 전개를 펼친다. 도대체 클림트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면서도 클림트의 예술이 그리운 것은 무슨 까닭인가. 화가의 방탕했던 사생활이 영화의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 가십성 소재로 사용되고 또 강조되기까지 한 것은 ‘클림트’가 순수한 예술영화라는 평을 듣기 어려운 부분이다. 양념을 아낌없이 넣었지만 재료의 맛을 100% 풍성하게 끌어내는 데 성공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분명 클림트는 사후 10여 건이 넘는 사생아 생계부양료 청구소송이 제기되었을 만큼 분방한 여성편력의 주인공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클림트를 주목하는 것은 그가 이룬 뛰어난 예술적 성과 때문이지 그가 남긴 수많은 ‘클림트의 사생아들’ 때문이 아님을 잊지 말자. 영화 ‘클림트’는 흥미롭다. 그러나 영화관을 나서며 감독의 손가락은 과연 제대로 달을 가리켰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극장을 나서는 늦은 저녁, 마침 장마구름 때문인지 하늘엔 달이 보이지 않았다. 〈이장현 |‘클래식광, 그림을 읽다’의 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