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李
성(姓)의 하나.
〈증보문헌비고〉에 451개의 본관이 전하나, 오늘날 전하는 것은 전주(全州)·경주(慶州)·성주(星州)·광주(廣州)·연안(延安)·한산(韓山)·전의(全義)·함평(咸平)·합천(陜川)·영천(寧川)·벽진(碧珍)·고성(固城)·성산(星山)·여주(驪州)·월성(月城)·인천(仁川)·진보(眞寶)·원주(原州) 등 230여 개이다.
우리나라의 이씨는 고성이씨나 연안이씨, 청해이씨(靑海李氏), 상산이씨(商山李氏) 등과 같이 외래한 연유가 확실한 경우와 인천이씨처럼 사성(賜姓)되어 이씨가 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 뿌리를 신라 6촌의 하나인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의 알평(謁平)에서 찾고 있다. 그밖의 이씨는 선계(先系)를 상고할 수 없어 고려시대의 현달한 인물을 시조로 삼고 있다. 알평을 시조로 하는 경주이씨에서는 이후 여러 계통이 분적하여 경주가 아닌 다른 본을 사용했는데 합천·원주(原州)·재령(載寧)·우계(羽溪)·진주(晉州)·장수(長水)·아산(牙山)·강양(江陽)·울산(蔚山)·진위(振威)·덕은(德恩)·차성(車城) 등이 대표적이다. 합천이씨는 알평의 후손 개(開)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개는 고려 태조가 후삼국을 통합할 당시 가수호장(嘉樹戶長)이었는데 뒤에 강양(江陽:지금의 합천)호장이 되었다. 이후 후손들이 합천에서 세거하면서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개의 후손 초(超:고려시대에 사재감령을 지냄)는 강양을 본관으로 하여 합천이씨에서 분적(分籍)했다. 원주를 관향으로 하는 이씨는 알평의 후예 이외에도 고려 인조 때 병부상서를 지낸 춘계(椿桂)를 시조로 하는 계통이 있어 일반적으로 전자를 신원주이씨, 후자를 구원주이씨로 구별하여 부른다. 신원주이씨의 시조는 알평의 후손으로 원주호장을 지낸 신우(申佑)이다. 나라에 공이 있어 원주백(原州伯)에 봉해지고 원주에 세거의 터를 정하면서 경주이씨에서 분적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본관을 익흥(益興:지금의 원주)으로 칭하다가 곧 원주로 바꾸었다. 익흥이씨는 그 내력이 전하지 않으나 신우의 12세손인 반계(攀桂:고려시대에 중랑장을 지냄)를 시조로 하여 원주이씨에서 분적했다. 문헌에 따라서는 호장을 지낸 신우나, 장령을 지낸 시정(時楨)을 시조로 전하기도 한다. 구원주이씨의 시조 춘계는 진시황의 학정을 피해 우리나라에 와 정착한 중국 사람의 후손이라 한다. 이후의 세계가 실전되어 신라시대의 인물 진민(眞民)을 원조(遠祖)로 하고 있다. 재령이씨는 경주이씨의 중조(中祖) 거명(居明)의 6세손 우칭(禹徵 : 고려시대에 문하시중을 지냄)을 시조로 한다. 그가 재령군(載寧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재령을 관향으로 삼아 경주이씨에서 분적했다. 우계이씨의 시조 양식(陽植:고려 인종 때 중서사인 좌복야를 지냄)도 알평의 후손으로 전한다. 그가 우계에 터를 잡아 정착한 연유로 후손들이 경주이씨에서 떨어져나와 본관을 우계로 칭했다. 그리고 진주이씨의 시조 군재(君梓:조선 태조 때 이조판서를 지냄) 역시 거명의 18세손으로 전한다. 그밖에 장수이씨의 시조 임간(林幹:長川府院君), 아산이씨의 시조 주좌(周佐), 울산이씨의 시조 철(哲:鶴城君), 진위이씨의 시조 자영(自英:振威君), 차성이씨의 시조 위(渭:車城君)가 모두 알평의 자손으로 그 선대가 경주이씨였다. 덕은(德恩:지금의 은진)을 관향으로 하는 덕은이씨의 시조인 전(
: 德恩君)의 선대는 진위이씨이다.
이씨 중에서 가장 크게 번창한 전주이씨는 신라말 문성왕 때 사공(司空)을 지낸 한(翰)을 시조로 한다. 〈전주이씨선원보감〉을 보면 한이 중국 중원 사람으로 모해를 받아 이를 피해 동래했다는 설이 있고 한편으로는 전주에 터를 잡고 세를 누린 경주이씨 알평의 후예라는 설도 있으나 이는 모두 고증할 길이 없다. 명확한 것은 그가 경주 일대가 아닌 전주 출신으로서 신라 태종무열왕의 10세손 김은의(金殷義)의 딸을 아내로 맞을 만큼 유력한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전주는 시조 한 이래의 세거지로서 관향이 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일부 후손이 동북면으로 옮겨가 살면서 이성계를 배출, 마침내 조선왕조를 건국하게 했다. 전주이씨에서 분파된 이본(異本)의 성씨로는 연계(連桂:大興君)를 시조로 하는 대흥이씨가 있다.
성주이씨는 신라 경순왕 때의 순유(純由)를 시조로 한다. 순유는 아우 돈유(敦由)와 더불어 신라시대에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었고 신라가 망한 후에는 신라에 대한 지조를 지켜 이름을 극신(克臣)이라 고치고 성주 땅에 숨어 살았다고 한다. 고려 태조가 벼슬은 폐했으나 그의 절개를 사서 성주호장으로 삼았다. 중시조 장경(長庚)은 크게 현달한 손자 승경(承慶)으로 인해 농서군공(
西郡公)이 되었으므로 한때 농서이씨로도 불렸으나 고려 말기 이후에 성주이씨로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농서이씨는 성주이씨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본(異本)의 성씨로 성주이씨의 중시조 장경을 시조로 하고 그의 후손 천충(天忠)을 중시조로 삼고 있다. 천충은 장경의 둘째 아들 천년(千年)의 후예이다. 광주이씨의 시조는 신라 내물왕 때의 인물인 자성(自成)으로 전하나 그의 관력이나 행적을 상고하기 어려우므로 일반적으로는 그를 원조(元祖)로 하고 그의 후손 당(唐)을 시조로 삼고 있다. 당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과거에 급제했다고 한다. 그중 집(集:초명은 元齡)이 문장과 지조가 남달라 이름이 높았으며 이색·정몽주·이숭인 등과 교류했다. 고려말에 신돈의 눈에서 벗어나 신돈이 그를 잡아 죽이려 하자 아버지 당을 업고 영천으로 피했다가 신돈이 죽은 뒤에 비로소 돌아왔다 한다. 이후 이름을 집이라 고치고 봉순대부전교시사(奉順大夫典校寺事)를 지냈으나 벼슬에 뜻을 잃어 곧 낙향하여 밭 갈고 글 읽는 일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한산이씨는 윤경(允卿:고려시대에 호장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호장공계와 윤우(允佑:고려시대에 권지합문지후를 지냄)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의 두 계통이 있다. 호장공계는 언제부터인지는 알 수 없으나 일찍이 시조 윤경의 선대부터 한산에 터를 잡았던 토착 성씨로서 이곡과 그의 아들 이색을 배출했다. 한산을 관향으로 삼은 것은 이색이 고려의 관계에 나가 정당문학·문하시중을 거쳐 한산군에 봉해진 연유를 따랐다. 권지공계는 후손 무(茂:고려시대에 검교대장군을 지냄)가 한주군(韓州君:한주는 지금의 한산)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관향을 한산으로 하고 일족을 이루었다. 전의이씨의 시조는 도(棹:초명은 齒)로 전한다. 그는 고려 태조 왕건이 견훤을 치기 위해 남하하던 중 금강을 무사히 건너도록 도운 공으로 삼한개국익찬 2등공신이 되고 도라는 이름을 사명(賜名)받았다고 한다. 도의 후손으로 보문각제학을 지낸 익(翊)이 예안군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후손들이 익의 조부 혼(混:집현전태학사를 지냄)을 시조로 하여 예안으로 분적했다. 함평이씨의 시조는 언(彦:고려시대에 신호위대장군을 지냄)으로 전한다. 그가 함풍군(咸豊君:함풍은 지금의 함평)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함평을 관향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영천이씨는 고려 충혜왕 연간에 영천부원군에 봉해진 능간(凌幹)을 시조로 한다. 벽진이씨는 신라말 고려초에 벽진(碧珍:지금의 성주)의 태수를 지낸 총언(總言)을 시조로 한다.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워 벽진장군이 되었다고 한다. 성산이씨의 시조는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운 뒤 태조의 사위가 되고 사공(司空)에 올랐던 능일(能一)로 전한다. 그는 성산 일대에서 유력했던 호족출신의 인물로 후에 그 인연을 좇아 성산군에 봉해졌으며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성산을 관향으로 삼아 세계를 이어왔다. 여주이씨는 〈증보문헌비고〉에 인덕(仁德:인용교위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이른바 교위공파(校尉公派)만을 전하고 있으나, 이외에도 은백(殷伯)을 시조로 하는 문순공파(文順公派), 세정(世貞)을 시조로 하는 경주파(慶州派)가 있다. 또한 진보(진성)이씨의 시조는 현리(縣吏)로 생원시에 합격하고 아들 자수(子修)가 현달하여 밀직사사(密直司使)에 추증된 석(碩)으로 전한다. 평창이씨는 광(匡)을 시조로 한다. 광이 백오군(白烏君:백오는 지금의 평창)에 봉해진 것을 계기로 평창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덕수이씨의 시조는 돈수(敦守)로 고려시대에 신호위중랑장을 지냈다고 한다. 덕수는 선조의 오랜 세거지로서 그대로 관향이 되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참봉을 지내고 해주에 정착, 세거하여 해주이씨의 시조가 된 선(璿)의 선대가 덕수이씨이다.
그밖에 고려시대의 수광(秀匡:금오위대장군을 지냄)을 시조로 하는 양성이씨(陽城李氏), 상(尙:巴山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함안이씨(咸安李氏), 덕명(德明:고려시대에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신평이씨(新平李氏)와 신평이씨에서 분적한 것으로 전하는 담양이씨(潭陽李氏), 능희(能希:고려시대에 삼중대광태사를 지냄)를 시조로 하는 청주이씨, 천일(天一:公山君에 봉해짐)을 시조로 하는 공주이씨, 고려 태조 왕건을 도와 후삼국통일에 공을 세우고 왕의 사위가 된 길권(吉卷:삼중대광태사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용인이씨, 무재(茂材:사재동정을 지냄)를 시조로 하는 성산이씨(星山李氏:성산은 廣平의 다른 이름), 예(藝:예빈소윤을 지냄)를 시조로 하는 학성이씨(鶴城李氏:학성은 蔚山의 다른 이름), 인보(仁輔:완산호장을 지냄)를 시조로 하는 가평이씨, 그리고 경조(敬祖:고려시대에 성균관대사성을 지냄)를 시조로 하는 고부이씨(古阜李氏)와 백하군(白夏君) 중선(仲宣)을 시조로 하는 안성이씨, 고려 명종 때 공정(公靖:병부상서를 지냄)을 시조로 하는 우봉이씨(牛峯李氏) 등이 있다.
외래이씨로 대표적인 연안이씨는 무(茂)를 시조로 하는 성씨이다. 무는 당(唐)나라 고종 때 중랑장으로서 소정방을 따라와 백제를 치는 데 공을 세운 후 돌아가지 않고 머물러 살면서 신라시대에 벼슬을 했다고 한다. 황해도 연안에 터를 잡은 그가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연안을 관향으로 삼았다 한다. 시조 이후의 여러 대가 실전되어 각각 현달한 후손이 중시조 또는 파조가 되어 10개의 파를 이루었다. 연안이씨에서 분적된 이본의 이씨가 조선시대의 인수(仁守)를 시조로 하는 경기계 안산이씨이다. 안산이씨는 시조가 서로 다른 두 계통이 있는데 앞서 언급된 경기계와 고려 고종 때 철산판관(鐵山判官)으로서 몽군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한 희적(希勣)을 시조로 하는 철산계가 그것이다. 고성이씨(固城李氏:고성은 鐵城의 다른 이름)의 시조 철령군(鐵嶺君) 황(璜:고려시대에 호부상서를 지냄)도 한(漢)나라 무제 때 중서사인을 지낸 반(槃)의 후손으로 선대에서 동래한 인물이 있어 우리나라에 정착하게 되었다는 내력이 전해온다. 고성의 관향은 시조 황이 철령군에 봉해진 연유를 좇은 것이다. 그밖에도 청해(靑海), 상주(尙州:商山), 정선(旌善), 태안(泰安), 태원(太原), 화산(花山) 등이 외래의 내력을 가진 성씨이다. 인천이씨의 시조 이허겸(李許謙)은 본명이 허겸이다. 일찍이 가야의 김수로왕이 한 아들에게 모후의 성인 허씨를 따르도록 했다. 신라시대에 아찬 벼슬을 한 허기(許奇)가 사신으로 입당(入唐)하여 안녹산의 난을 피해 촉(蜀)으로 가는 현종을 배종했는데 뒷날 그 공을 인정받아 이씨 성을 사성받았으므로 허기는 이 성을 자신의 이름자 앞에 붙여 성으로 삼았던 것이 이씨가 된 연유라 한다. 허겸은 그의 후손으로서 소성(邵城:지금의 인천)에 오래 세거하여 인천을 관향으로 삼았다. 1985년 한국인의 성씨 및 본관 조사보고에 따르면, 598만 5,056명으로 인구순위 2위이다.